21세기 첫 25년의 영화 25편 (2)

앞의 글 안 읽고 오신 분들을 위해 리스트만 앞에다 붙인다.
기준은 작품성 예술성 모르겠고, 그냥 내가 가장 좋아한, 2001-2025 사이의 영화 25편. 배치는 제작 연도순. 순위 아님.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피아니스트의 전설 (주세페 토르나토레, 2004)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대니 들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스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이것만으론 아쉬우니 한줄씩 붙인다.
1~12까지는 바로 앞의 포스팅 참고.

13.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어느 순간엔가, 모든 좀비 영화는 가장 무서운 병, 치매라는 병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가장 슬픈 좀비 영화는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사랑하던 사람이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던 사람이 아닐 때, 그 사람을 바라보던 케이트 블랜칫의 슬픈 눈빛이 지금도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단편을 읽어 보시길. 각색이란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14.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슈퍼맨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데가 있어서 그나마 좋아했는데 뭘 해도 고민하는 배트맨은 너무 중2병스러워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언맨의 자기애와 과시욕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등장. 그리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시대의 매혹적인 화법. 이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마블은 없었다.
15.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솔직히 놀란의 영화는 거의 다 봤지만 <인썸니아>, <프레스티지>, <인터스텔라>, <덩케르크>는 매우 마음에 들었던 반면 그 나머지 영화, 배트맨 3부작과 <메멘토>, <테넷> 등은 뭔가 좀 거슬렸다. 그런 사람으로서 <인셉션> 은 발상에서 그 발상을 영화로 표현한 방법까지, 진정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과연 팽이는 멈춘 걸까.

16. 그을린 사랑 (대니 빌뇌브, 2010)
뭐하는 감독의 무슨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이런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보는 동안 설마...했던 것이 설마...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충격의 순간도. 이런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어느 세계, 어느 문명을 누리고 있어도 결국은 모두 비슷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순식간에 회귀하곤 한다. <듄>이나 <컨택트>도, <시카리오>도 훌륭했지만 여전히 내게 빌뇌브의 최고작은 <그을린 사랑>이다.
17.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그 많은 앨런의 영화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직도 물론 <애니 홀>을 꼽지 않을 수 없고, 10개를 꼽는대도 7,8개는 20세기의 영화들일 것 같은데, 그래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매혹적인 상상은 늘 다시 들쳐보고 싶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고 싶은가. 무엇이 나에게 진짜 산다는 느낌을 줄 것인가. 스스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앨런의 위대한 헌사.
1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뭔가 영화를 만들수록 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고레에다. 아무래도 그냥 마구잡이로 혼자 분류할 때, '가족과 아이들'에 천착했던 고레에다 1기의 정점에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키웠는데 내 아이가 아니라니...에서 오는 직관적인 느낌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잊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19.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스가르 파라디, 2013)
고구마 서사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떤 영웅>은 좀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파라디에 대한 기대가 여전한 것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과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워낙 좋았기 때문. 두 작품 중 어느 것을 고르는가는 그야말로 미세한 취향 차이일 수 있는데(두 편 다 고르자니 25편은 너무 적었다), 전자는 누가 봐도 '확실한 이야기'가 있었던 반면, 후자는 '무슨 이야기인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그걸로 한 편의 영화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위대한 스토리텔러 파라디의 재능을 더 잘 발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 킹스맨 (매튜 본, 2014)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맡은 007 시리즈가 흥행 기록을 돌파할 때 한켠에서 분노에 몸을 떨던 사람들이 있었다. 매튜 본의 <킹스맨>이 사랑받은 이유 중에는, 그렇게 '진정한 본드'를 빼앗긴 사람들이 이쪽으로 집결했기 때문은 아닐지. 비록 2편 3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킹스맨>의 발랄한 똘끼만큼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들을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21.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이 영화, 네번째 매드맥스 시리즈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감독의 나이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70세 노장의 감각이 이렇게 힙할 수가 있다니. 34세때인 1979년 <매드맥스>를 내놨던 조지 밀러는 결국 그 세계관을 갈고 닦아 30여년 뒤에도 통할 수 있게 부활시키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다. 그 시절 칙칙한 불법 복제 비디오로 <매드맥스>와 <매드맥스2>를 보던 사람들 중 누가 2015년에도 젊은이들이 빨간 내복에 열광할 줄 알았을까. 밀러는 아직도 6번째 매드맥스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부디 가시기 전에 10편을 채워주시길.
22.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마틴 맥도나의 영화라고는 <킬러들의 도시> 하나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영화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작은 도시에 세워진 세 개의 간판. 그리고 법 집행을 믿을 수 없는 엄마의 폭주. 정의와 질서라는,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는 두 가지 세계에 대한 엄청난 폭탄 같은 영화. '스토리텔링이란 이런 것'이라고 감히 잘라 말하고 싶다.

23.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정말로 우연히, 부산영화제 참관차 갔다가 사전정보 0인 상태로 보게 된 영화. 그런데 여운이 일주일은 갔다. 어린이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 중 이보다 강렬한 작품이 있었을까. 대체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모르는,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철없는 엄마와 그나마 철이 좀 든 어린이의 기막힌 드라마. 물론 베이커에게 아카데미 작품/감독/극본상을 안겨준 작품은 <아노라>였지만, 가장 오래 기억될 영화는 역시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아닐지.
24.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신카이 마코토의 소위 '재난 3부작' 중 많은 사람들이 <너의 이름은>을 최고로 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베스트를 꼽자면 <날씨의 아이>. 끝없이 비가 내리는 도쿄의 어느 여름. 비가 그치고 해가 떠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가 있다. 그런데 이 홍수는 우연이 아니고, 세계의 지형을 바꿀 노아의 대홍수였고, 그런 결과를 막는 것도 결국 그 소녀에게 달린 일이었다. 여기서 신카이는 묻는다. 자, 이 소녀 하나를 희생시켜서 그 비를 막을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전체주의 국가' 일본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다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
25.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대체 이게 뭐지. 호러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나 <이발사 토드>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리메이크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였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고는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뚝심이 어마어마했다.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 열연도, 영화 전편에 넘쳐 흐르는 순혈 블루스의 힘도 강력한 작품. 이 모든 것을 조율해 낸 라이언 쿠글러의 다음 작품이 빨리 보고 싶다.
추리고 추리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6편의 단편 모음 영화. 아르헨티나, 그 중에서도 부에노스 아일레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야기 하나 하나의 밀도가 24시간 우려낸 설렁탕 이상이다. 천재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압권.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사람들은 왜 모이고, 무엇 때문에 흩어지는가. 왜 제목은 스틸 라이프일까. 지아 장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물 하나 하나는 왠지 거대한 산수화 속에 박혀 있는 동그라미 머리 하나 하나처럼 느껴지곤 한다. 장강은 유유자적 흘러가고, 청산도 그대로 그 모습인데, 거기 잠시 머물다 가는 인간들의 사연이 제아무리 기구하다 하나, 어차피 곧 흘러갈 일들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 때문에 쉽게 '사회성 강한 영화'로 단정할 수 없게 하는 대작.
이렇게 2001-2025까지 25편을 꼽아 봤다.
여러분의 25편은 어떠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