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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을 보러 가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이 거의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지명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각계의 호평이 쏟아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대체 어떻게 이런 많은 관객을 몰고 왔나 궁금할 지경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사전정보를 수집하는 거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워낙 온 세상이 영화 정보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 근 몇년 사이 이 영화만큼 사전에 아무런 지식 없이 본 작품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내가 "'그을린 사랑'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게 전부였죠.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은 빨리 창을 닫으시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를 보지 않고 2011년을 그냥 흘려 보낸다면 여러분은 이 해에 단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캐나다 퀘벡에 위치한 장 레벨씨의 공증인 사무소. 쌍둥이 남매 시몬과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기묘한 유언장을 접하고 당황합니다. 어머니는 남매에게 두 가지를 각각 부탁합니다. 잔느에게는 '너희의 아버지를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 시몬에게는 '너의 형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작에 죽었다고 알고 있고, 형이 있다는 말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남매는 일순 반발합니다. 하지만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버티는 시몬과는 달리 어머니에게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 잔느는 어머니의 과거를 찾기 위해 나왈의 고국인 '아랍의 어느 나라'로 향합니다.



끝까지 나왈이 태어나 자란 '이 나라'가 어디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인종 청소와 관련된 내전이 거론되는 탓에 구 유고 연방 지역의 어딘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보고 있으면 레반트 지역의 어느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요르단. 하지만 기독교 민병대와 PLO가 개입된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될 정도의 심각한 혼란을 겪은 나라라면 레바논이 모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원작이 된 연극의 저자도 레바논 출신이라는군요.

(다만 이 시기 중동 지역에서 펼쳐진 종교분쟁의 아수라장을 얘기할 때 책임을 피하기 힘든 이스라엘과 미국 관련 내용은 이 영화에서 아예 거론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중함이 이 영화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리주의를 고집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요소가 비판을 부르는 부분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영화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10대 후반쯤이었을 나왈은 '이 나라'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팔레스타인 난민 청년(당연히 무슬림입니다)과 해서는 안될 사랑에 빠지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손에 묻은 피를 새로운 적의 피로 씻는 복수극의 정서입니다. 온갖 참극을 직접 몸으로 겪은 나왈 역시 스스로 복수의 화신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이런 격렬한 복수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로 전환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을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보여주며 관객을 설득하는 빌뇌브 감독의 스토리텔링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 할만 합니다.

빌뇌브 감독이 모성애에 기반한 이해와 용서를 웅변처럼 외치고 있는 이면에서 또 한가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록에 대한 애정입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가 기록자의 시각에 따라 왜곡될 여지가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반면, 숫자로 표현되는 기록은 묵묵히 진실을 대변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물론 기록 자체도 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어떤 기록이 채택되는지에 의해 주관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지만 화려한 수사로 서술된 '말의 역사'에 비하면 도표와 숫자는 훨씬 더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빌뇌브 감독의 입장은 선명합니다. '기록하라'. 당장 의미가 부여되지 않아도 제대로 된 기록은 언젠가 진실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죠. 뒷날 기록에 의한 진실 규명이 이뤄진 뒤에도 용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닐까(프랑스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가르침대로 덮어 둘 것은 그냥 덮어 두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그을린 사랑'을 보고 나면 빌뇌브 감독의 이런 주장에 대략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너무나 강력한 서사가 지배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에 대해 뭐라 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왈 역을 맡은 루브나 아자젤은 1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한 여자의 반생을 기가 막히기 표현해 냅니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글자 그대로 '망가져'가는 개인의 삶을 묵묵히 표현해내는 연기는 보톡스와 친한 중년 여배우들에게선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절제와 균형이 빛을 발하는 연기와 연출입니다.

사실 '그을린 사랑'의 가장 큰 강점은 빌뇌브 감독의 메시지보다는 이야기를 배치하는 교묘한 솜씨입니다. 특히 충격적인 결말 이후에도 영화의 에너지가 전혀 사라지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아무리 칭찬해도 진정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반전'을 너무 기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반전에 신경 쓰다 보면 진정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뇌브 감독은 이 부분에서 반전을 감추기 위해 살짝 영화적인 반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안 속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영화의 감동은 사라진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아무튼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 역시 같은 요령으로 가려 둡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마우스로 긁어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끝까지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바로, 표 사러 나가세요.


전체적인 영화의 얼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이오카스테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니야드를 나중에 알아보기 위해 표시하는 부위가 발 뒷굼치라는 점('오이디푸스'는 '부은 발'이란 뜻입니다)은 관객을 위한 힌트라고 봐야 할까요.

물론 니야드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빌뇌브 감독은 지나치게 나이 든 배우를 기용해 자신의 의도를 가립니다. 나왈이 크파르 리야트에 수감되어 있을 때 니야드는 만 스무살을 넘기 힘들죠. 하지만 그때 니야드의 얼굴을 보고 스무살 안팎의 청년이라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 합니다. 일종의 반칙인데, 애교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P.S. 영화에는 두 가지 형태로 지식인의 역할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은 다레쉬에 갔을 때 잔느가 처음 만나는 수학 교수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이죠. 잔느가 "빌어먹을 코헨(이 교수를 소개시켜 준 자신의 은사를 말합니다)"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살짝 중의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헨이라는 대표적인 유태인 이름을 이용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비극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네. 과잉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 바로 나왈의 고용주였던 공증인 장 레벨입니다. 레벨이 병상에 누운 나왈의 구술에 따라 편지를 대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남매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 줄 수도 있었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남매가 어머니의 유언을 직접 몸으로 수행하고 어머니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합니다.

물론 편지는 죽기 전에 써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레벨도 전모를 알고 있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끝까지 '기록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을 주는 레벨의 역할을 생각하면, '기록자'에 대한 빌뇌브 감독의 애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P.S.2. 원제 INCENDIES는 '전쟁의 참화', '불에 그을린 것'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군요. 거기에 비하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순한 제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쁜 제목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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