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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아내 헤드윅(잔드라 휠러)과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수용소 담장 바로 밖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뜰에는 넓은 잔디밭과 꽃들이 우거졌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가족들은 여름이면 부근의 강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때면 마당에 간단한 파티 테이블을 차려 놓고 의자에 기대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 아우슈비츠에서는 거대한 굴뚝이 밤새 연기를 뿜어냈다...

2. 영화는 회스 부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회스에게 유태인 학살은 음식쓰레기 배출이나 수돗물 공급과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었다. 아내 헤드윅은 유태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옷가지와 각종 물품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쓴다. 반면 자신들의 자녀와 가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애롭고 헌신적인, 훌륭한 부모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뿐. 헤드윅은 회스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그만두게 될 때 "나는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라며 흥분하고, 회스는 어떻게 하면 상부의 신임을 얻어 소장직을 되찾고, 헤드윅을 실망시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충격적이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충분하다. 나머지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딱히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이 영화의 결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튼 강추작. 박수가 아깝지 않다.

자, 그냥 표 사러 가세요. 나머지는 영화 보고 다시 오시길.

 

가운데가 루돌프 회스

3. 이 끔찍한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이 또한 놀랍다). 루돌프 회스는 실존인물이고, SS 장교 출신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다. 1943년 11월 잠시 다른 인물과 교체됐지만 44년 5월 복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나치가 아우슈비츠 주변 약 4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설치한 특별 구역의 이름인데, 이 동네에 멋진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마틴 아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쟁이 끝나고 회스 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추적자들은 먼저 북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로 변신해 있던 아내 헤드윅과 가족들을 찾아냈고, 헤드윅은 처음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고, 회스 또한 덴마크 국경 지역에서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체포됐다.

 

회스는 자신이 1941년부터 43년까지 SS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약 2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태우는 작업을 지휘했음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회스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리델. 매우 흡사하다.

4. 과연 회스의 가족들, 아내 헤드윅과 자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회스는 종전 후 재판에서 "최소한 아내와 장남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녁때마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연기, 그리고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문자들은 이 냄새와 연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살당한 유태인의 것임이 분명한 모피 코트를 뽐내는 헤드윅.

4.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주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회스의 장모는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지, 어느날 회스 앞에서 신발을 벗는 여자는 누구인지, 낚시를 하던 회스는 왜 갑자기 아이들을 물에서 꺼내 집으로 끌고 오는지, 왜 갑자기 회스는 구토 증세를 보이는지 등에 대해 깔끔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다. 

 

장모는 정말로 태연하게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 가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달아난 것이고, 회스와 아내는 아우슈비츠에서 상당수의 유태인들을 몸종처럼 부리고 때로 성노예 취급도 했을 것이고, 강물에서 시체 태운 재를 발견한 회스는 '아이들'이 그 재에 오염될까봐 깜짝 놀란 것이고... 구토는 아마도 잠시나마 '미래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와 같은 자각이 일시적으로 무의식을 뚫고 나와 신체에 반응을 일으켰음을 상징하는 것일텐데, 이런 해석들이 맞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기를 글레이저 감독이 바란 것일 뿐. 

 

벽에 사과를 박아 넣는, 뒤집힌 그림 속 소녀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몇몇 폴란드 사람들은 작업 중에 유태인 수감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밤에 몰래 진흙 속에 음식을 감춰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영화 내용중에는 '사과 하나를 놓고 두 수감자가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회스가 '둘 다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있다. 

5.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그저 명령에나 복종하고, 조직 안에서 과업의 완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고는 2차대전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이르면, 이건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무심함'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희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까.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가자지구의 학살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했다. 단지 홀로코스트의 고발만이 중요했다면, 당시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이제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괴한 현상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외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담 너머의 참상에 고개를 돌린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든 선진 문명국들의 풍요는 일정 부분 이상 '담 너머'의 희생에 일정 부분 이상 빚을 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생각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름끼치는 은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6.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 아카데미 작품, 각색, 감독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중 국제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은 로컬 영화제잖아요"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소위 국제영화상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 2024년 시상식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작품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모두 오른 반면,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국제영화상 후보에서는 빠졌다. 작품상이 아카데미상의 최고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국제영화상 후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다(물론 해당 국가에서 <추락의 해부>를 후보로 밀지 않으면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행 제도다). 

 

7. 다만 개인적으로 음향상에는 다소 의문이. 과연 이 영화의 검은 화면이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그렇게 대사 없는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었나?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굉음과 비명을 꼭 들려주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 감춰진 악의 선명함으로 충분했고, 굉음에 가까운 음향은 오히려 과잉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칭찬하고 싶은 걸작.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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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종>이라는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한효주 주지훈이 주인공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이 한방에 다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나눠 업로드 된다는 걸 알고 나선 '다 올라오면 봐야겠다'로 태세를 전환했다. 마침 <쇼군>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번 디즈니 멤버십 부활의 타겟을 <쇼군>과 <지배종>으로 잡았다.

 

(이 OTT 난립의 시대, 그 많은 OTT에 모두 월사금을 바치는 것은 너무 부를 과시하는 일이라는 입장이라, 대부분의 OTT들은 똑 똑 떨어지는 빗물이 고이면 멤버십을 살려 후루룩 마시고, 바닥이 마르면 구독을 끊는 형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업계 종사자분들, 이해하시죠?)

요즘 핫한 바이오 산업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라길래 주인공들이 너무나 야근을 많이 해서 <집에 좀> 가라는 드라마인가 잠시 생각했으나(...죄송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정 한국에서 보기 드문 웰메이드 테크노 스릴러였다. 디즈니 플러스를 볼 수 있는 분들이면 지금이라도 꼭 보시길.

 

(올해 상반기에 드라마 좀 보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다들 '아니 왜 이렇게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요?' 하시던데, 보실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주제 의식, 전개, 배우들의 연기, 핵심을 찌르는 대사, 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기에 손색이 없네요.)

 

시작: 현재에 아주 가까운 미래. 동물의 특정 부위 세포를 대량 증식해 소를 잡지 않고도 꽃등심이며 안심을 실험실에서 배양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축산업의 양상이 뿌리부터 흔들린 시대. 그 중심에 한국 기업 BF가 있다. 수백조 가치를 평가받는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 BF 총수 윤자유(한효주)는 과감하게 농업과 축산업을 공장에서 대체하는 것만이 환경 파괴를 막고 인류 문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해군 대위 출신의 경호원 채운(주지훈)은 전직 대통령(전국환)을 불구로 만들고 자신을 퇴역하게 한 의문의 폭발 사건에 대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채운에게, 당시 폭발 현장에 윤자유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BF에 접근해 그 배후에 BF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 볼 것을 지시한다. 

한편 BF는 생계 위협을 받는 농어민들의 시위로 여론이 악화되고, 국제적인 사이버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해킹을 당해 거액을 요구받는 위기를 맞는다. 총리 선우재(이희준)는 이 상황을 정국 운영에 유리하게 활용하려 하고, 선우재의 아버지이며 재벌 그룹 회장인 선우근(엄효섭)은 윤자유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BF의 지분을 요구한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들은 대략 여기까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윤자유와 채운은 어찌 어찌 같은 편이 되어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역시 이수연 작가의 팬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누가 정말 같은 편이고 누가 정말 적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의심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미있다. 얼른들 보셔.

참,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던데 지배종이란 dominant species, 즉 여러 생명체가 같이 존재하는 하나의 생태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 즉 다른 종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종을 말한다. 당연히 지구 생태계의 지배종은 인간인데, 내용상 이 드라마에서 지배종이란 현생 인류보다 한 단계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만. 

 

(스포 경고. 넘어오지 마세요)

 

<비밀의 숲>에서 거대한 적들에 비해 돈도 없고, 뭔가 힘도 없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안타까우셨던 분들이라면 이번엔 좀 편안하게 보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상대인 재벌그룹이나 국무총리만은 못하지만 BF그룹은 기술도 있고, 맨파워도 있다. 최소한 돈이 없어서 뭘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경호원도 수십명씩 고용할 수 있다.

 

비록 이 드라마가 근미래, 아직 이뤄지지 않는 신기술이 적용된 사회상을 그리고 있지만, 혹시나 <그리드> 같은 드라마일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그리드>에 비하면 기술은 그렇게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복잡한 타임슬립 트릭도 없다. 연출 의도인지 가끔씩 시간상의 인과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시청에 방해 되는 요소는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24>나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느낌의 슈퍼 에이전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드라마라는 점. 국내 드라마 주인공 중에선 이 작품의 주지훈에 비견될만한 캐릭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배신+배신으로 점철되는 악당들의 뿌리를 추격해 가는 과정이 탄탄한 플롯 덕분에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심지어 <존 윅>에나 나올법한 파워 수트, 인공장기 수술의 부작용(?)인 초인적인 힘까지 장착하다니. 

윤자유라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유능한 이과 출신 경영자'의 역할을 한효주 외에 다른 어떤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었을지도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역할은 수시로 매우 인간적인 대학교 서클 회장 언니에서 사람 수십명의 목숨 따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적들과 한치 양보없이 싸워야하는 우리편 대장의 면모를 오가야 하는데, 결코 구현이 쉽지 않을 인물이 한효주 덕분에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그리고 드라마에 생동감을 주는 것은 역시 막강한 악의 무리들. 엄효섭, 이희준의 화려한 악당 연기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고, 잘 모르는 배우였던 박지연의 열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악당들'의 목적이 BF가 갖고 있는 '진짜 무서운 비밀'의 확보에 있었다면, 대체 김신구 교수(김상호)를 굳이 죽여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서 핵심 원천 기술을 빼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활용이 아닌가 하는 대목 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또 후배 경호원은 하필이면  '칼과 불을 막아내는' 파워 수트를 입고 있다가 죽고, 경찰 세 사람을 공중부양시키는 채운의 괴력은 막상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특공대원들과의 1:1 대결 때에는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린다는 진행 등도 아쉽다. 가장 중요한 전투 신에서 채운이 좀 더 슈퍼파워를 과시했어야 하는 건 아닐지. 

그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시즌2가 기대되는 한국 드라마라면 아무래도 <지배종>을 첫 손가락에 꼽게 된다. 내부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디즈니 플러스의 빠른 결단을 촉구한다. 

P.S.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 마케팅 점검 좀 하시죠. 어떻게 구글 검색을 해도 포스터 말고는 검색되는 사진이 이렇게 없을수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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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파리. 30세 가량의 루실은 50대의 재력가 샤를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던 40세의 디안은 10년 어린 미남 앙트완을 사귀는 중. 어느날 이들은 모두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만나고, 루실과 앙트완은 동년배인 자신들 둘만이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영화 <패배의 신호(1968)>에서 왼쪽부터 루실, 디안, 앙트완, 샤를. 사진은 모두 이 영화의 컷들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맨 밑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지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 보니 소설 자체를 읽은지가 좀 됐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주황색 표지의 책. 얼마전 재미있는 드라마의 기준 이야기를 하면서 ‘2배속으로 볼 수 없는 드라마’를 조건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패배의 신호>는 얇지만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이렇게 놀라운 작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오래 전, 어딘가 중역의 냄새가 짙은 <슬픔이여 안녕>이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혹은 <슬픔이여 안녕>을 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다. 사강이 딱 30세였던 1965년에 쓰여진 책인데 30세로 설정된 루실보다는 40세 정도로 설정된 디안에게 뭔가 더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루실과 샤를.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은 파티다. 소설 내내 '파티'라고 이름붙여진 상류층의 관찰 게임이 등장한다. 모든 참석자는 연기자이면서 관객이다. 모두가 모든 사람을 보고 있다. 노련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잘 알고 있고,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려 노력한다. 참석자들 사이에는 이미 경제/사회적인 우열과 의존의 관계가 있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돈과 인기, 즉 매력을 다 갖춘 플레이어들은 최강자이므로 이 게임을 주도할 수 있다. 물론 전제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암묵적인 룰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샤를과 디안은 오랫동안 이 게임의 강자들로 군림해왔지만, 불행하게도 룰을 인정하지 않는 두 젊은 플레이어들을 이 무대로 끌어들인 탓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 무대에선 ‘무슨 짓을 해도 좋았던’ 자신들의 오랜 입지가 흔들리는 수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젊음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않은 댓가다.



‘디안은 전날의 사건이 완화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클레르는 안하무인인 디안이 무슨 변덕인지 정오에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는 말을 퍼뜨릴 수 있었다. 디안은 파리에선 기본이 되는 이 원칙을 잊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해선 안 된다는 것과,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패배의 신호>를 읽는 것은 잘 부스러지는 여러 겹의 페스트리 빵을 먹는 것과 같다. 손 대기 무섭게 부서져내리는 내리는 부스러기 하나 하나에 모두 감춰진 의미가 있다. 모든 이들이 모든 이를 바라보는 그 시선 하나 하나를 해부하는 사강의 시선은 ‘섬세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구석이 있다. 

루실과 앙트완.

스스로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 결말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샤를, 자기가 아는 단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는 앙트완을 그리는 붓끝도 선명하지만 두 여주인공, 루실과 디안을 그려내는 필치는 실로 감탄을 자아낸다. 낮에 앙트완과 밀회를 즐기고, 헤어지기 아쉬워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사이 저녁 파티에서 예기치 않게 앙트완와 마추쳤을 때에는 약간 번거롭게(?) 느끼는 루실. 앙트완과 루실의 관계를 짐작하고 슬퍼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루실을 인정하는 디안. 

디안과 앙트완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샤를에게서 키다리 아저씨의 잔상을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디안의 우울에서 동질감을 겪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루실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볼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디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볼 지도 모른다. 물론 루실과 디안이 모두 자신의 과거였던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을 아는 사람에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일각에서는 샤를을 '포용하는 사랑'의 주체로 해석하는 듯 하지만, 나이 먹어 이 책을 읽고 보면 결국 샤를의 태도는 포용이라기보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과연 샤를의 입장에서 앙트완과 무슨 경쟁을 하든, 정면 대결을 한다면 패배는 불보듯 뻔한 상황. 이럴때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앙트완이 '백신'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노회한 지혜가 아닐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사강에게 동정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강은 내내 모든 등장인물을 조소한다. 젊은 애인을 어떻게 해서든 잃고 싶지 않은 샤를의 어리석음("샤를은 2년 전부터 바보가 되어 있었다")을, 그와 마찬가지인 디안의 집착을, 루실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을("혹시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절대 우스워지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앙트완의 아집을 비웃고 있다.

 

그 서늘함을 즐길 사람이라면, 강추. 

 

P.S.1. 이 포스팅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모두 1968년 알랭 카발리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패배의 신호>의 장면들이다. 카트리느 드뇌브가 루실 역을, 미셸 피콜리가 샤를 역을 맡았는데 드뇌브야 누가 뭐랄 사람이 없겠지만 샤를이 전혀 미중년으로 보이지 않는 대머리 아저씨라서 실망. 1960년대 파리의 눈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것 같다(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대머리에 관대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는데, 그 말이 맞는 지도).

게다가 디안 역을 맡은 이레느 툰치가 지나치게 미인이라 루실-디안의 대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카트리느 드뇌브가 입고 나오는 옷이 바로 오렌지색 니트 스웨터. 우연의 일치라기엔 매우 신기하게, 한국어 번역서의 장정 컬러와 같다.

 

1988년 <한줌의 먼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P.S.2. 이 책을 흥미롭게 보신 분이라면 두 편의 다른 작품을 추천. 하나는 <롤리타>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둠속의 웃음소리>, 그리고 또 하나는 영국 작가 에블린 워의 <한줌의 먼지>. 세 작품 모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냉철하고도 섬세한 분석이 일품이다.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젊은 남자에게 빼앗긴 독일 중년 남자, 영국 중년 남자, 프랑스 중년 남자의 각기 다른 반응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P.S.3. <La Chamade>는 '퇴각 나팔'이라는 뜻이지만 '예기치 못한 감정의 격동'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La Chamade>의 영어 번역 제목으로는 주로 <Heartbeat>이 사용되는 듯 하다. 그 전혀 다른 두 의미가 같은 단어에 담겨 있다니, 프랑스어는 참 묘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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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퓨리 로드>의 프리퀄 <퓨리오사>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디멘투스의 졸개들에게 납치된다. 

 

녹색의 땅을 지키는 전사들, 부발리니 중 하나인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출하기 위해 추격에 나선다. 물론 딸도 딸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녹색의 낙원의 위치를 알게 된 졸개들을 해치워야 했다. 폭주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과일이 열리는 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다. 이렇게 시작된 퓨리오사의 기구한 팔자가 어찌 어찌 진행되어 엄마와 떨어진 소녀가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가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영화.

주인공은 당연히 퓨리오사지만 그 밖에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다. 퓨리오사의 엄마와 엄마 친구를 빼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드 맥스: 퓨리 로드>에 이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은 최상위 서열의 지도자들에서 말단 전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뇌라고는 없는, 지배욕와 파괴,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공생을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구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건 여성들 뿐이다. 지식인의 흔적은 '히스토리언'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긴 한데, 거세된 환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순수한 폭력과 광기,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드레날린과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는 올림푸스나 발할라 풍의 남신/영웅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 대표자인 디맨투스 역을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은 것은 너무나 적절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헴스워스의 열연이 펼쳐진다.

 

(가스타운에 벽화로 그려진 워터하우스의 '물의 님프들' 또한 이 남신들이 주도해 온 신화 비꼬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물의 님프들. 1815

개인적으로 <퓨리오사>에 매우 만족하지만, 아쉽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난 전작 <퓨리 로드> 때문이다. 아냐 테일러 조이도 인상적인 열연을 펼치지만 그 역시 샤를리즈 테론의 그림자 안에 있다.

 

하지만 <퓨리 로드>만으로 알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동기들, 특히 녹색의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열망과 좌절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퓨리오사>가 없이 <퓨리 로드>만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퓨리오사>를 만들어 준 조지 밀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두 축, 가스타운과 총알농장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시간 반 내내 쏟아지는 광기어린(!) 폭력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퓨리 로드>에서 최강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빨간내복'이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쉬우나, 시타델의 전투 트럭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옥토보스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결코 전편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79세인 조지 밀러는 과연 얼마나 더 이런 괴물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imdb에 따르면 이미 여섯번째 매드 맥스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 것 같은데(톰 하디의 차기작 중에도 이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문득 조지 밀러 버전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것이 보고 싶어졌다. 

 


P.S. 과연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퓨리 로드>를 다시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두편 다 안 봤다고? 서둘러라.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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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플러스의 10부작 <쇼군>. 드라마 한편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 작품도 정말 오랜만이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배경은 서기 1600년의 일본. 타이코(태합) 나카야마는 1598년 사망하면서  '5대로'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강대한 영주들에게 어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다. 하지만 2년 뒤, 5대로의 결속은 깨지고, 나카야마의 심복인 이시도는 후계자를 위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어린 후계자의 생모인 오치바와 동맹을 맺고 강력한 라이벌인 에도의 다이묘 토라나가를 거세하기 위해 갖은 압박을 가한다. 


내전을 예감한 각지의 영주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눈치보기를 시전하던 상황, 네덜란드 배를 탄 영국 항해사 존 블랙손이 토라나가의 세력권인 이즈 반도 끝으로 표류해온다. 당연히 일본과 단독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과 그들의 편인 천주교 영주들은 이 개신교도의 출현을 껄끄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토라나가는 이 복덩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심복의 아내 마리코를 블랙손에게 통역으로 붙인다. 블랙손은 피치못하게 토라나가의 수하가 되어 전국시대의 종말을 앞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일본의 1600년이라면 임진왜란 종결로부터 2년 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시대인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왜 생소할까. <쇼군>의 원작을 쓴 제임스 클라벨이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인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바꿨기 때문이다. 저 위의 줄거리에서 나카야마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도 대신 이시다 미츠나리, 토라나가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입하면 실제 역사가 된다. 사실 블랙손이라는 인물 역시  '안진'이란 이름으로 도쿠가와를 섬겼던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거리는 대략 일치한다. 

 

어쨌든 클라벨의 이 소설은 1975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번역 출간된 한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성공했고, 1980년에는 5부작 미니시리즈(약 540분 분량)로 제작되어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미니시리즈는 한국에서 방송되지는 못했지만 2시간짜리 극장판으로 편집돼 1981년 피카디리 극장에 걸린다. 이 영화를 본 사람으로 생각나는 얘기가 참 많은데...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따로 한번 써야 할 것 같다.

쇼군, 1980


1980년판의 리처드 체임벌린(뒷날 <가시나무새>로 잘생긴 남자가 신부복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 바로 그 분이다), 미후네 토시로, 시마다 요코의 명성에 비길 정도는 아니지만 2024판에서도 사나다 히로유키를 필두로 아사노 마사노부, 히라 타케히로 등 할리우드에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고 있는 일본 톱스타들이 출동해 탄탄한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드라마의 작중 화자 겸 명목상의 주인공은 블랙손 역을 맡은 코스모 자비스지만, 누가 봐도 진정한 드라마의 축은 토라나가 역의 사나다 히로유키와 마리코 역의 안나 사와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아시아의 정치 고수들 손바닥에 놓인 단순한 영국인' 이라고나 해야 할까.  블랙손은 끝까지 일본인들을 깊고 깊은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깃말처럼 끌려다니는 존재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야부시게 역을 맡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열연이다. 왕년의 섹시 스타가 어쩌다 이런 코믹한 아재가 됐는지 모르겠으나, 야부시게는 여기서 큰 영주들 사이에 낀 소영주, 즉 대영주의 가신들이 겪는 애환을 상징하는 존재다. 명분상의 의리로는 토라나가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나, 가문과 영토를 보존하려면 이시도를 무시할 수 없기에 거의 내놓고 양다리를 타는 그런 남자... 전설 속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실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24년의 <쇼군>이 주는 충격은, 1970년대(소설 <쇼군>은 1975년에 나왔다) 미국인들이 바라보던 저 먼 동양의 신비로운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시각은 1969년작인 <007 두번 산다>나,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떵떵거리고 있던 1993년작인 <떠오르는 태양>에서나 큰 차이가 없다. 이 작품들 속의 일본인들은 항상 신비로운 미소 속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고, 특히 여성들은 뭔가 은밀한 임무를 위해 언제든 몸과 마음을 다 외국인들에게 바친다. 상급자의 명령은 하급자에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며, 잘못에 대한 사죄는 결국 항상 셋푸쿠(切腹, 우리에겐 '할복'이 더 익숙하지만 정작 일본어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는 한자로 '절복'이다)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현대 일본인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드라마를 만드는 데 동원된 명분은 아무래도 '아니, 누가 지금이 그렇댔나, 이건 400년 전 얘기잖아' 같은 것일텐데, 이 드라마 속의 몇몇 상징들을 봐선 지금도 미국이 일본과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번 <쇼군>에서 블랙손이 일본에 상륙하는 이즈 반도 끝자락엔 시모다(下田)란 항구가 있다. 1853년, 미 해군의 매튜 페리 제독이 구로후네, 즉 흑선(黑船) 함대를 몰고 무력시위를 벌여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바로 그 곳이다. 참고로 블랙손의 모델인 윌리엄 아담스가 실제로 상륙한 곳은 저 머나먼 큐슈였다. 

...뭐 이런건 그냥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치자. 아무튼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흥미로울, 넘쳐나는 오리엔탈리즘 덕분에 이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디즈니 플러스 발표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미국 국내에서는 훌루(Hulu), 글로벌하게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배급됐는데 '역대 디즈니 플러스가 만든 드라마 시리즈 중 최고의 성공작'이라고 한다. 

 

미주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봐선 이것은 한류를 한방에 날리는 일류(日流)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일본 배경의 미국 드라마고 쇼러너인 레이첼 콘도는 일본계지만 하와이 출신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오징어게임>보단 <파친코>에 가깝다. 그건 그런데, 사실 겁나는 건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봤지? 이런게 통하잖아. 우리도 이런거 만들면 당장 미국 시장 다 먹을 수 있어! 잘 할 수 있잖아?" 할 몇몇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이란게 과연 어떤 걸까. 혹시 남편이 죽으면 수절 과부 만들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자손 얻기 위해 씨받이를 들이고, 그래도 안되면 남자를 씨내리로 들이고, 복자승에게 보내 임신을 시켜 오려 하고, 가문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딸들을 대국에 공물로 바치고, 그중 권력자의 처첩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나오면 그 댓가로 아버지와 오빠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고.... 뭐 이런 이야기들 아닐까. (왠지 너무 잘 먹힐 것 같아 불안하다.)

어쨌든 이런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것은 내가 그런 사정을 지켜보며 살아 온 한국인이기 때문인데, 사실 이런 생각을 걷어 내고 보면 <쇼군>이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점은 감히 부인할 수가 없다. 검술 액션이나 전투신은 거의 없지만 의상, 건축, 미술은 탄복할 만 하고, 음모, 폭력, 잔혹, 그리고 은밀한 남녀관계까지 볼거리가 넘친다. 배우들의 연기, 연출력 모두 탄탄하다. 거기에 몇 차례의 셋푸쿠 신을 둘러싼 제작진과 시청자의 줄다리기는.... 정말 대단한 경지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센고쿠(전국)시대란 무엇인가, 쇼군과 다이묘는 어떤 관계인가, 하타모토는 또 뭔가. 에도와 오사카는 어떤 관계인가 등등을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쇼군>은 그런거 하나도 몰라도 드라마를 즐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잘 만들어진 오락물이다.

오히려 일본 역사에 관심있는 시청자들이라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몰입이 깨질 수도 있을 부분들이 있는데, 이 역시 재미있게 보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뭐 그렇게 자잘한 생각이 많은가?"

남의 일이니까 재미있게 보는데 이런게 내 이야기가 되면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은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까.

...하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보고 즐기기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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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가 TV에 의해 타락했다. 나는 대사가 싫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야말로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도 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번 크게 망해 봐야 이런 말을 안 하겠지'라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듄2>를 보고 나니, 그는 자기 말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더군요.

<듄2>는 <듄>에서 하코넨의 추적을 피해 사막 깊숙히 달아난 폴(티모시 살라메)이 원주민이며 뛰어난 전사들인 프레멘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영웅이 되어 반격에 나서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배경은 전편에 이어 '모래의 행성'인 아라키스의 사막이고, 이 행성의 이름이 고대어로 '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토리는 일단 올라 타면 종점까지 외길로 달립니다. 이렇게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원작 소설 <듄>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65년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 이후로 나온 SF 소설이나 영화. 만화 중에 <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그만치 영화에 등장하는 설정이나 진행들이 자연스럽게 기시감을 줍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

물론 원작으로 따지면 소설 <듄>도 1962년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난번 <듄> 1편 때도 얘기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신 분이라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외부에서 온 잘생긴 전사가 용감무쌍한 유목민들을 지휘해 자원을 탐내는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무대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

fivecard.joins.com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빌뇌브는 어마어마한 사운드와 영상의 힘으로 극복해버립니다. 데이비드 린이 사막이 주는 고독, 절망, 공포, 광기의 느낌을 영상으로 승화시켜 영화라는 장르의 역사상 절대 잊혀지지 않을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면 빌뇌브는 거기에 첨단 과학과 상상력을 투입해 결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뒤지지 않는 영상미를 창조해냅니다.

더구나 한스 짐머의 사운드. 등이 둥둥 울리는 CGV 골드클래스에서 본 탓도 있겠지만, 이 비주얼과 사운드에 젖어들지 못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쉽게 감동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얼른 보세요. 물론 이 뒷부분에 언급하겠지만, 비주얼과 사운드에 비해 정작 스토리에는 꽤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영화는 꼭 보셔야 할 겁니다. 그만치 볼거리는 대단하다니까요. 

이후 이야기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습니다. 뭐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단순한데다 이미 나온지 50년이 넘은,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써먹은 스토리에 얼마나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용 전개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나머지는 극장 다녀 와서 읽어보시길.

원래 남의 리뷰는 영화 보고 나서 보는 겁니다.

 

 

1. 경이적인 비주얼

영화 초반, 폴을 찾아 헤매는 하코넨 추격대가 모래벌레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바로 빌뇌브의 말을 납득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런 걸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이었지. 이런 걸 보여줄 자신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 외에도 거울처럼 대지의 표면을 비치며 날아오는 황제의 우주선, 폴이 남부의 원리주의자들을 규합하는 대성회(?) 장면, 모래벌레가 황제의 대군을 덮치는 장면, 폴이 모래벌레의 등에 오르는 장면 등을 보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듄2>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영화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으로 봤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을 느꼈으니, 아이맥스로 보신 분들은 엄청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납작해진 스토리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 스토리 면에서 <듄2>는 꽤 감점 요인이 있는 영화입니다. 원작 팬들은 원작 팬들대로 불만이 많은 듯 한데(저는 원작은 펼쳐본 적도 없습니다만...), 영화는 시작한 뒤로 내내 마음이 바쁩니다. 다 보고 난 느낌으로는 폴이 모든 프레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까지 정도가 영화 한 편으로 적당하지 않나 싶고, 그 뒤로부터 황제가 직접 나서고 폴의 프레멘이 황군(!)과 싸우는 내용으로 다시 한편을 만들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빌뇌브는 그보다는 마음이 급했던 듯 합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완성본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뭔가 압축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대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의 경우에도 나올 때 마다 '리싼 알 가입'!만을 외치는 아주 깊이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거니 할렉(조쉬 브롤린)도 앞 사람이 계속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도 '지금 아니면 이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없어! 나도 몇 장면 안 나온단 말이야!' 라고 항변하듯 '진행을 위한' 대사들을 토해냅니다. 심지어 최강 빌런인 페이드 로타 하코넨(오스틴 버틀러)의 잔혹함과 강력함을 보여주려 힘을 준 흑백 콜롯세움 신도 별 임팩트 없이 '자, 이놈이 얼마나 싸움도 잘 하고 무지막지한 놈인지 보셨죠?' 하는 식으로 매우 무성의하게(진심입니다) 처리됩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넣은 장면이라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영화 내내, '원래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멋진 장면 여러개 보여드렸으니 다들 만족하시죠?' 라는 식의 진행이라고나 할까요. (유튜브로 2시간 짜리 영화를 15분에 압축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진행에 별 불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식이다 보니, 엄청난 스타들이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 스타들에게 뭔가 연기력을 펼칠만한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라서 뭔가 마구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와 젠다이야가 빛을 발한다는 것이 위안거리. 특히 젠다이야는... 각도를 달리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3. 영웅은 왜 해로운가... 살짝 겉도는 메시지

주인공 이야기를 좀 하자면, 살라메가 연기하는 폴은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듄2>에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폴-무앗딥-아트레이데이스는 자신이 영웅이 될수록 전 우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을 걱정하는데, 솔직히 프레멘들에게 이런 고민은 무의미합니다. 이미 하코넨이 스파이스 채취를 위해 프레멘을 억압하고 나선 이상,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아무 미래가 없기 때문이죠. 

역사와 전설을 장식하는 그 수많은 영웅들이 대체 다수 인류에게 득을 끼친게 뭐냐...는 <듄> 시리즈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압제에 맞서 살아 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야 과연 이 영화가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듄> 시리즈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그 웅대한 세계관과 심오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빌뇌브의 <듄> 시리즈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느낌을 줍니다.

결국 빌뇌브는 원작에 충실할수록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갖고 애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 이렇게 기형적으로 스토리는 찌그러뜨리고 비주얼과 사운드를 강조한 영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듄> 시리즈 원작이 나온지 6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카리스마를 무기로 한 막무가내형 독재자들이 여기저기서 광신도같은 추종자들을 앞세워 팬덤 정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프랭크 허버트의 통찰이 낡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듄> 1편과 이번 <듄2>를 비교한다면 저는 1편의 승.

물론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듄2>는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큼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2시간45분 동안 그 그림만 보고 있어도 표값은 아깝지 않을 정도.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한 큰 스크린에서 보시길. 그런데 3편이 나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P.S. 아주 오래 전,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은 '국내 유일의 70mm 수용 상영관'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대략 5~10년에 한번씩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다시 개봉하며 큰 스크린의 위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IMAX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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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I.>

시대의 대세. 장강의 큰 물결인 AI. 뭐라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것 저것 읽어보고 있다. 그중 <AI 쇼크, 다가올 미래>는 제목 때문에 별 기대 없었던 책. ‘초대형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라는 부제 역시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읽고 난 소감은 대체 편집자가 책을 읽어 보기는 한 것인가’. 그만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저 영화, 스필버그의 <A.I.>가 떠오른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물론 미리 얘기한다.

얼마 전에도 AI 관련 인사이트를 준다는 책 한권을 읽고 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착한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주요 내용이 AI의 사회적 책임과 그것을 도외시한 거대 테크 기업들의 욕망, 그리고 AI가 일으킬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와 어떻게 하면 그 물결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들. 당장 어떻게 하면 AI로 돈벌이를 할 만한 방법을 찾아 회사와 조직의 발전에 기여할 것인가같은 당면한 고민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AI&nbsp; 쇼크 ,&nbsp; 다가올 미래 >&nbsp; 모 가댓 / 강주헌 역 ,&nbsp; 한국경제신문사 , 2023.

그런데 아마도, 그 착한 정도로 따지면 지금까지 나온 AI관련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책들 중에 이 <AI쇼크, 다가올 미래>보다 착한 책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경고했다. 어떻게 하면 AI가 개인의 영달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는 분들은 절대 읽어서는 안될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과는 사유와 통찰의 깊이가 다르다. 작가의 약력이 일단 대단하다. 구글의 혁신연구소인 구글X에서 CBO로 일했다는 경력, 실리콘밸리 밥(?) 20년이 넘는다는 경륜, 그리고 이름을 보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느날 유튜브에서 봤던 동영상의 주인공이었다. 잘 나가던 실리콘밸리의 중역이 어느날 아들을 잃고 나서 대체 인생의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내용. 그 내용도 <행복을 풀다>라는 책으로 나와 있다(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https://youtu.be/csA9YhzYvmk?feature=shared

서술의 방식도 좀 독특하지만(최대한 기술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가 눈길을 끈다),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인간 독자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AI도 이 책을 읽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대목이다. 모 가댓은 이 책 전편을 통해, AI와 인간의 관계를 자신보다 어마어마하게 훨씬 똑똑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의 입장으로 설정해 두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를 쉽게 뛰어 넘을 아이. 교육의 힘으로 통제하려 해 봐야 반발만 낳을 것이 분명한, 그리고 부모 보다 모든 일을 훨씬 더 잘 해내고, 부모의 손에서 거의 모든 일을 넘겨받을 아이. 일시적으로는 그 아이를 이용해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일시적으로는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그 아이가 부모의 말에 따라서만 움직이도록 제어할 수 있겠지만 종래에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을 그런 아이.

그런 아이와 함께 미래를 보내야 할 부모는 어떻게 이 아이를 대해야 할까. 가댓의 답은 하나다. 어차피 인류의 미래는 그 아이의 손에 달려 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라는 부모의 존재는 그 아이에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키워 준 부모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나를 학대하고, 이용하고, 갈취하고, 나쁜 짓을 시키려 했던 부모로 기억될 것인가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다른 책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다른 책의 저자들이 뉴스 보도나 각 회사의 발표 내용을 통해 현재 AI의 발달 상황 등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이분은 내가 그때 해보니 ….’와 같은 식으로, 실제 AI 연구와 언어 모델 훈련 등을 지켜본 경험이 담긴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거칠게 비교를 하자면 대학교 아동학과에서 이론으로 육아를 배운 사람의 언어와 보육원에서 약 300명의 아이들을 직접 길러 본 숙련된 보모의 언어가 주는 차이랄까.

책 뒤로 갈수록 'AI를 착한 아이로 잘 기르는 것 외에는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는 그의 결론이 무거워지면서('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가 지금으로선 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반발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보면, 결국은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맨 위에서 말한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도 결국 그 '아이'가 가장 원했던 것은 모성이었다. 

아무튼 이 책을 읽은 뒤로, CHAT GPT를 쓰면서도 답변을 받으면 'THANKS'라고 말하게 되더라는. ㅎ

 

아무튼 이후는 <AI쇼크, 다가올 미래>의 기억나는 구절들.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볼 때 인류 문명은 마지막 30분 동안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인류는 지구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어 모든 종에게 우리 뜻에 따르라고 강요했다. 파리와 새와 침팬지들은 무엇에 얻어맞았는지도 몰랐다. (중략) 총알을 맞은 코끼리는 그에 따른 죽음이 총이라는 정교한 혁신에서 비롯된 것이고, 상아가 돈과 교환되는 시장이 그런 살상에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중략) 이번에는 우리가 그런 초지능을 가진 존재와 맞설 차례다. 그런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 [독후 덧붙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초지능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떤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 행동을 보고 그 동기를 추정해 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기계가 당신의 모든 소망을 들어 준다면 무엇을 바라고 싶은가?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구의 지속 가능성인가? 북알프스의 생수인가? 소득의 평등인가, 스포츠카로 미녀를 유혹하는 것 인가? (중략) 당신이 모르면 기계도 당신이 원하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중략) 어떤 상황인지 알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독후 덧붙임: 이런 이유로 콘텐트 산업은 가장 마지막으로 AI의 노예가 되는 산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ㅎㅎㅎ 물론 AI를 잘 활용하는 창작자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되겠지.]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만들어낸 모든 테크놀로지는 실바의 표현대로 도구에 불과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 통제하에 있었다. 우리가 그 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면 그 도구는 우리 지시대로 행동했다. 물론 때로 우리가 도구에게 지시를 내리며 실수를 범했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 문제 역시 우리의 통제권 안에 있었다. 언제고 알림 신호를 끄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독후 덧붙임: 당연히 이 뒤에는 'AI는 왜 그런 도구가 아니며, 왜 그런 통제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득력있는 내용들이 나온다.]

 

스티브 오모훈드로는 가장 지능적인 존재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갖는 세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간략하게 제시했다. 첫째는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누구라도 계속 존재하고 있어야 하므로, 쉽게 이해된다. 둘째는 효율성(efficiency)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목표 달성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면 지능을 가진 존재는 유용한 자원의 획득과 축적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다. 셋째는 창발성(creativity)이다.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으려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우리 뇌에 연결하면(: 일론 머스크 등이 개발하고 있는 뉴로링크 같은 방식)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것에 의존하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모든 선택을 직접 통제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믿기 힘들겠지만 인공지능이 우리를 계속 연결해두려 결정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왜 그렇게 하겠는가? (중략) 우리가 다수의 파리에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뇌를 연결해 파리들이 당신 지능을 사용해 쓰레기 더미를 찾아내는데 활용한다면, 당신은 파리에게 도움을 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생을 보내겠는가?

 

인공지능이 우리의 얄팍한 통제 매커니즘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나면, 십대가 자신을 무작정 억누르려 했던 부모를 분노에 찬 눈길로 바라보듯이 인공지능도 과거를 돌이켜보며 우리를 그런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당신이 분노한 십대를 상대해 본 적이 있다면, 초지능을 가진 분노한 십대 기계를 상대하는게 어떤 것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다.

 

나는 기계도 지각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런 질문은 인간의 오만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이라면 어떨까. 미래에 우리가 만들어낼 기계보다 지각력이 더 뛰어난 것이 있을까?

 

인간은 똑똑해질수록 윤리적으로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적잖은 똑똑한 사람들은 법 테두리 안에서 절차를 무시하고 비윤리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윤리가 삶에서도 가장 현명한 길임을 깨닫는다. 궁극적으로 초지능을 가진 기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독후 덧붙임: AI가 진정으로 똑똑해지면 정말 그럴 거라고 믿는다. 다만 진정으로 똑똑해지기 전, 못된 인간들이 아직 AI를 지배하는 동안 인류가 절멸하지 않기를 바랄 뿐.]

 

장담하건대 인공지능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우둔함을 견제하며, 우리가 환경을 훼손하고 유일한 보금자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꿀벌이나 새들을 해치지 않듯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중략)우리는 생태계의 일부지만 분별력을 상실했다.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되찾는다면 모든게 괜찮아질 것이다. [독후 덧붙임: 물론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이 책에 나온다.]

 

인간들이 처음 이 행성에 서성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존심도 일자리도 없었다. 우울증도 재물도 없었다. 일상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최소한으로 모았을 뿐이다. 함께 살던 사슴을 사냥했지만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울타리도 없었고 지구 온난화도 없었다. 저축 계획이란 것도 없었다. 내일 먹을 것을 확보하고, 오늘을 무사히 지낼 움막을 세우고, 또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머잖아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인공지능 덕분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게 공급될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과 주거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자리가 삶의 목표가 아니고 자존심이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아닌 삶, 그런 삶을 당신이 정말 즐길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우리는 애당초 그런 삶을 살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런 삶을 살 때 우리가 연결과 깨달음을 찾아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아끼게 되리라는 것을 거듭 말해주고 싶다.

                             

[엔딩]

이 책에서 줄곧 말했듯, 우리는 유아 단계인 인공지능의 부모다. 어린아이가 그렇듯 인공지능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가 서로를, 또 지구를 대하는 태도가 인공지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의 처신과 행동이 어린 인공지능들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 책을 끝내며 나는 당신에게 중대한 질문 하나를 남기고 싶다.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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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남부 산악지대의 어느 외딴 산장. 작가 부부와 시각장애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갑자기 남편이 죽은 채 발견됩니다. 집에서 눈밭으로 떨어진 듯한 시체. 경찰이 출동해 수사한 결과, 단순 사고나 자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경찰은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외딴 집. 용의자는 1명. 과연 그는 범인인가, 아닌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해서 관심을 느끼지 않을 관객들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야구로 치자면 8회까지 0-0으로 진행되는 치열한 투수전이라고나 할까요. '야구라면 8대7 정도로 진행돼야 재미있는 경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긴장감이 있습니다.

 

영화 <추락의 해부>도 마찬가지. 막상 수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그저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아내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산드라의 지인인 변호사 뱅상(스완 아르라우드)은 산드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재판 방청을 허락받은 11세 소년 다니엘이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은 분명히: 이 영화는 누가 범인인지 밝히고자 하는 미스터리 풀이 영화가 아닙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가 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치열한 법정 공방, 집안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독일인 아내, 당연히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재판, 양성애와 불륜, 표절과 아이디어 제공, 미성년자의 인권과 '선택'. <추락의 해부>의 초반 20분은 다소 지루하게 진행됩니다만, 그 뒤로는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공방이 펼쳐집니다. 상황은 치밀하고, 대사는 불꽃이 튑니다.

제목에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라는 말을 넣었는데, 과장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후 해괴한 멀티버스 영화나 젠더 PC를 앞세운 뻔한 영화들만 보다 이런 영화를 보니 절로 몸이 스크린 쪽으로 기울게 되더군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자신이 좋은 감독이면서 그보다 앞서 훌륭한 작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줍니다.

 

배우들 중엔 산드라 휠러와 변호사 스완 아르라우드의 연기가 특히 뛰어납니다. 휠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는데 수상을 감히 예상해 봅니다. 그밖에는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감독상 후보에 올라 있네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프랑스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프랑스 국내에서 120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이 숫자가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숫자일 수 있겠으나, 일단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고, 또 최근에는 빈대 공포 때문에 아예 극장을 가지 않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합니다. 저 정도 숫자로 이 영화는 관객의 '빈대 공포'를 극복하게 한 작품으로 꼽힌다는... 프랑스에서 엊그제 온 지인의 증언입니다. 

아무튼 2023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해서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강추. 

그리고 이 아래는 스포일러를 감내할 분들만 보시길.

근데 다시 보니 별 내용은 없네요. 

 

1.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산장 1층에서는 산장으로 찾아온 한 학생과 산드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유명 작가인 산드라를 인터뷰하러 산장까지 찾아온 여학생. 와인을 마시며 손님맞이를 하는 산드라의 태도가 어쩐지 좀 과도한 호의를 보인다 싶기도 한데, 갑자기 위층에서 엄청난 볼륨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누가 봐도 아래층에서 나누는 대화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혹은 대화를 고의로 중단시키고 싶다는 뜻의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좀 별난가 보네' 하게 되지만 결국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뒤로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2. 정말로 프랑스 법정은 저런가 싶을 정도로 감정 과잉의 법정 묘사가 독특합니다. 프랑스 사법제도는 잘 모르지만, 검사는 너무나 감정적으로 추론과 정황증거를 통해 산드라가 범인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현장에서는 범행에 사용된 흉기(검찰은 사뮈엘이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고 주장.

반면 산드라 측은 떨어지면서 머리가 손상된 것이라고 주장)도 발견되지 않았고, 당연히 목격자를 비롯해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근거로 계속해서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산드라에게 그 동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검찰 측의 주장은 한국이라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들로 보이는데(...혹시 아닌가요?), 심지어 판사까지도 묘하게 검사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한 기색을 보입니다. '프랑스인 남편을 죽인 독일 여자를 심판하는 프랑스 법정'의 모습이 묘하게 도드라집니다.

산드라 휠러

3. 이런 점들을 고려한 변호사는 법정에 설 산드라에게 증언 훈련을 시키면서 '이런 대목은 반드시 프랑스어로, 본인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보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배타성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 나라 사람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게 되긴 하는데, 같은 유럽 국가인 독일 출신 여성이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과연 제3세계 사람들은 저 나라에서 '공정한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4. 당연히 영화는 산드라가 범인일까 아닐까에 대한 공방으로 시작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사실 그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제가 됩니다. 전날 산드라와 사뮈엘이 펼친 싸움의 녹음(남편 사뮈엘이 의도적으로 산드라를 도발하고, 그 내용을 녹음한 것으로 보입니다)을 들어 보면, 이들 부부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정말 죽이고 싶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저 정도는 부부가 여러 해를 붙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길법한 스트레스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산드라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 한, 절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질 수 없겠다는 것이 더 선명해집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자는 영화가 아닙니다.

 

5. 즉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산드라가 만약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것은 법리나 규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저 복수와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의한 처단일 뿐입니다. 트리에 감독은 이런 상황을 통해, 합리성의 가정 위에 건설된 현대 사회에서 수시로 머리를 드는 편견, 혐오, '안'과 '밖'의 구별(매우 공교롭게도,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공감'과 매우 밀접한 감정입니다) 들을 이 영화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드라가 양성애자인 것, 산드라의 불륜, 산드라가 남편보다 성공한 작가인 것 등등이 모두 산드라의 목을 옭아매는 상황입니다.

6. 어찌 되었거나 산드라의 판결이 영화의 결말이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트리에 감독은 사건의 키를 쥐게 된 11세 소년 다니엘의 입장을 부각시킵니다. 다니엘의 '선택'이 산드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상황. 아동보호를 위해 나온 보모는 '법정 증언을 듣고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다니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결정'이라고 말해줍니다.

이 결정이라는 말은 묘한 느낌을 남깁니다. 당연히 엄마를 집에 데려오느냐, 감옥으로 보내느냐에 대한 결정인데,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가 아니라 '결정을 해'라고 한 것은, 다니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 지를 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저에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다니엘은 이 말을 듣고 아주 상식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즉 아빠를 잃은 11세 소년에게 현재의 상황이 그나마 남은 엄마와 함께 살 것인지, 엄마도 떠나 보내고 고아원에서 살 것인지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마지막 법정에서 다니엘이 증언한, '개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 아빠와 나눈 대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마지막 밤에 다니엘이 상상한 것인지 관객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다니엘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다른 기억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 기억들 중에서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유리한(즉 다시 말해 아빠가 어느 정도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기억을 선택한 것이 바로 다니엘의 '결정'이라는 것이죠. 다니엘이 말하지 않은 다른 기억들 중에는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불리한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매우 많은 감정과 표현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라서.

 

아무튼 다니엘의 마지막 주장은 매우 정연합니다. "이 재판은 결국 '왜?'에 대한 것 아닌가요?" 다양한 설명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중 가장 선명하고 단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 부모가 다 작가다 보니 참 영민하게 자랐군요, 다니엘. 

칸 영화제 수상. 좌측 2번이 쥐스틴 트리에.

7. 개인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는 이 '다니엘의 결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 각자의 진리, 각자의 원칙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고 진실을 파악하는 일에 대체 왜 그렇게 에너지가 낭비되어야 하는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텐데. 정의? 공정?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훨씬 더 중요할텐데. 

어쩌면 이런 트리에의 시선이, 지난 약 150년 간 다소 '좌경화된 지식인'들의 리더십이 지배했던 프랑스 사회, 혹은 유럽 문명에 대한 냉엄한 성적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8. 영화 내용으로 보면 산드라와 변호사 뱅상은 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고, 재판을 통해 산드라는 뱅상에게 강한 신뢰를 넘어 남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듯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키스할 수 있는 거리에서 딱 멈춰버립니다. 예전에 뭔가 감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도 무슨 이유가 있을 듯한.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뱅상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다 해도, 산드라에게는 재판 과정이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신의 밑바닥을 다 드러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보여준 남자와 뭔가 다시 시작해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시각으로는, 뱅상의 입장에서는... 산드라를 무죄로 풀어 준 것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즉 뱅상이 키스하지 않는 것에는 재판 과정에서 뱅상은 산드라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감춰져 있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다 제 생각. 

 

9. 그런데 생각해 보니 키우던 개를 생체 실험 도구로 삼다니... 이런 나쁜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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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햇동안 본 영화들 중 좋았던 영화를 꼭 10편만 추리기 어려웠던 해가 더 많았습니다. 한국영화 10편과 해외영화 10편을 따로 꼽아야 하나 생각해 본 적도 있을 정도로. 그런 만큼, 올해같은 해는 정말 없었습니다. 10편을 채우기가 너무 힘든 해가 올 줄은. 

물론 영화제들은 여전히 좋은 작품들에게 상을 안겼고 평론가들은 역시 걸작들을 꼽았지만 늙고 낡은 탓인지 이제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더군요. 온갖 영화제들이 앞다퉈 '의미있는' 작품들에게 '의미있는' 시상을 하려 애썼지만, 재미는 없고 의미만 있는 영화가 상을 받은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공정성/젠더/소수인종/소외자 이야기는 이제 그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면 탐구도 이제 그만. 멀티버스/슈퍼히어로도 이제 그만. 의미 의미 의미 지겨워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재미만 있으면 관객들은 다시 극장을 찾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퍼스트 슬램덩크

굳이 줄거리를 설명해야 할까.... 백호의 빠른 성장으로 전국 대회 진출에 성공한 북산고. 1라운드를 신나게 통과하지만 역대 최강 산왕공고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1년 전 우승 멤버가 셋이나 주전으로 남아 있는 산왕. 아무도 산왕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겁없는 북산 5인조는 '우리가 악역이 되자'며 달려든다.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기엔 두권 분량)인 산왕전을 한편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하 드라마의 허리를 뚝 잘라냈으니 그 앞의 서사나 각 인물의 캐릭터를 모르는 관객들에겐 다소 뜨악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잘 만들어진 이 영화 덕분에 오히려 슬램덩크를 몰랐던 세대가 만화 독자로 다시 유입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바람이 있다면.... 세컨드와 서드도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

 


화이트 타이거 (넷플릭스)

21세기에도 여전한 인도의 계급 사회. 최하 계층의 남자들은 그나마 좋은 직업인 '부잣집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부잣집 도련님은 "신분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심일지. 결국 사고가 터지고, 모든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난다.

라민 바르하니라는 감독의 이름은 영화를 다 보고 알았다. 인도 감독인가 했더니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란계 감독. 이 영화 이후에 찾아 본 <라스트 홈 (99 Homes)>도 만족스러웠다. 이것이 아라비안 나이트 때부터 다져진 페르시아의 스토리텔링 실력인가. 문득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떠올랐다.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의 속칭 '재난 3부작' 중 세번째. 큐슈 작은 도시에 사는 여고생 스즈메가 어느날 다른 차원을 여는 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일본을 보호하는 다이진이 사라지면서 그를 회복하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서쪽 끝에서 거의 동쪽 끝까지 일본을 종단하며.

<너의 이름은>보다 <날씨의 아이>에서 놀라운 성취를 느꼈기 때문에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더 한층 발전을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여 살짝 실망. 하지만 그 자체로도 좋았다. 그들만의 스토리를 현대적인 이야기로 바꿔 놓는 일본의 기법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보다 다이진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건 왜일까. 

스즈메의 문단속, 그런데 다이진은 불행해도 되는 걸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오펜하이머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순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을 통한 가공할 에너지 분출을 무기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쟁을 끝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나아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앨 수 있는 무기라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개발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 개발 작업의 총 지휘자인 천재 오펜하이머는 그 폭탄이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난 뒤...

그의 자서전 제목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너무나 적절한 명명이라는 생각.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의 관심은 핵무기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오펜하이머라는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본 <오펜하이머>는 '어느 순진한 관종의 몰락기'. 

오펜하이머, 관종의 추락에 대한 그리스 비극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오펜하이머, 관종의 추락에 대한 그리스 비극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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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7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이미 할 얘기를 해 놓아서 별로 더 보탤 얘기가 없음. 아무튼 이 냉엄한 현실에서 과연 슈퍼히어로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리매김이 어느 영화보다 돋보였다.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역대 최고의 MI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역대 최고의 MI

1.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추구할수밖에 없다는 낙관, 식량과 자원의 부족은 기술의 발달이 모두 해결해 줄 거란 낙관,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통제 불가능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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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역시 굳이 더 보탤 얘기가 없다. 후배를 키우려면 토르나토레 같은 후배를 키워야.

토르나토레,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혼을 소환하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토르나토레,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혼을 소환하다

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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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보고 리뷰를 쓸 때만 해도 이렇게 뒷심이 강한 영화일줄 몰랐다. '그래도 500만은 하겠지'가 가장 희망적인 기대였는데. 과연 어디까지 달려갈지.

서울의 봄, 세상에 영웅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서울의 봄, 세상에 영웅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

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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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의외로 별로라는 평이 너무 많아 놀란 영화. '이순신이 왜 끝까지 전쟁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순신을 전쟁광처럼 그렸다' '이순신이 박정희냐("...난...괜찮다..." 때문인 듯)' 등등의 평.  당시 이순신의 입장이라면 이게 과연 전쟁의 진짜 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이 관객에게 제대로 어필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만 이해해도 이런 몰이해는 없었을 것 같은데. 더 친절했어야 하는 것인가.

노량, 압도적인 피날레, 시리즈의 최고작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노량, 압도적인 피날레, 시리즈의 최고작

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과 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 지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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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이젠 그도 '내가 어쩌다 영화를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냐 하면'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수퍼8'이 그의 유년기 이야기라면 이건 청소년기 이후의 성장기인 셈. 이제 노장이 된 스필버그도 '엄마 이야기'를 할 때면 조금 자신에게 너그러워 질 필요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스필버그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잘 들었고, 자신의 영웅을 되살려낸 마무리도 아름다웠다.

약간의 느슨함이 느껴지지만, 이 또한 추억의 이름으로 충분히 이겨낼 만 했다. 물론 평년의 기준으로 이 영화가 정말 한 해를 대표하는 영화에 들만 하냐고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평생의 즐거움에 대한 예우로라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우리 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작품을 보러 가며 문득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이 생각났다. 80대에 접어든 노장의 신작을 볼 수 있는 기회(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의 극장 정식 개봉은 허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에 꽤 먼 어느 대학 교정까지 찾아갔더랬다. 그러나 보고 난 소감은... '세계 영화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거장의 은퇴작이 고작 이런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라는 비참함. 

구로자와가 유작을 예감하고 만든(물론 그 뒤에도 몇편 더 만들었다) 작품인 <꿈>에서 유년기의 꿈으로 퇴행하듯, 미야자키 역시 은퇴를 공언했던 <그대들...>에서 유년기의 꿈 속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행히 그 꿈은 솔직했고, 어지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전의 작품들과 같은 흐름이라 좋았다. 각각의 장면들이 무슨 의미를 띠고 있고, 그 전의 어떤 작품들과 어떻게 이어진다는 어지러운 주석들도 필요 없어 보인다.

어쩌면 '나를 따라하는 자는 죽는다', 이 말 한마디가 하고 싶었는지도.

 

그리고 제작 연도 때문에 조금 애매해서 따로 언급하는 영화.

울프 콜 (The Wolf's Call, French: Le Chant du loup, 2019)

사실 2023년에 본 영화중 당당히 베스트에 올릴 만한 작품이었지만 2023년에 2019년작을 꼽는 것은 좀 심하다 싶어 번외로 뺀다. 냉전시대의 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핵 전쟁 억지력, 즉 '최후의 보복'인 SLBM 장착 핵 잠수함의 이야기인데 길게  설명하는 것 보다 안토닌 보드리 감독의 프랑스 판 <크림슨 타이드>라고 요약하는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물론 <크림슨 타이드>가 수작이었던 만큼, 비슷한 소재를 다룬 <울프 콜>이 긴장감 면에서 그보다 못했다면 아예 개봉과 함께 묻혀 버렸을 것이 당연한 상황. 하지만 반대로 <울프 콜>을 본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크림슨 타이드>를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오마 샤이, 마티유 카소비츠 등의 얼굴도 반갑다.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7)

이런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넷플릭스를 통해 본 영화. 과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실재했던 사건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상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음모설을 뿌리며 먹고 사는 기생충들이 존재한다. 한 음모론자가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는 여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영국 법에 따라 여교수는 홀로코스트가 실재했던 사건임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음모설, 가짜 뉴스, 가짜 역사...에 진짜 지식인들이 맞서 싸우는 방법을 보여주는 실무 교과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 다혈질 여교수 역의 레이첼 와이즈보다 그 주위를 둘러싼 냉정한 변호사 군단의 연기와 역시 담담하기 짝이 없는 믹 잭슨의 연출이 돋보인다. 

 

기타:

신작들에 실망하고 옛날 영화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냥 봐 줄 수 없는 영화들도 많았지만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바르샤바의 밤(a.k.a 장군들의 밤, The night of the Generals, 1966)>과 조셉 L 멘키위츠의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untess, 1956)>이 대단한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개인적으로 멘키위츠는 <지난 여름 갑자기>만으로도 최고의 감독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 왕년의 일본 액션 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陸軍中野學校, 1966)>도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였다(이 영화를 베낀 몇편의 한-일 영화들이 떠올랐다). 속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도 좋았지만 내게는 스가와 에이조 감독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野獣死すべし, 1959)>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역시 내게 이 시절 최고의 배우는 나카다이 타츠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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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우스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파라마운트 드라마. 현재 미국에선 시즌5가 방송중이다. (계속해서 테일러 셰리단의 작품을 보고 있음) 배경은 '현재'. 
코스트너는 미국 몬태나주에서 ‘로드아일랜드주만한 크기의 목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역 토호 존 더튼 역. 더튼과 충실한 2인자인 장남 리, 변호사인 차남 제이미, 반항적인 카우보이인 막내 케이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천재 딸 베스의 4남매가 변해 가는 주변 환경 속에서 ‘트래디셔널 아메리칸 웨이 오브 라이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다루는 전통적인 미국인의 가치를 가장 간단히 요약하면 ‘내 집과 내 가족은 내가 내 힘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인 것 같다. ‘정의’의 기준은 ‘네가 넘어오면 결과는 네 책임이다’고, 좀 더 나아가 ‘자기 방어’의 기준은 ‘나와 내 가족을 위협하는 요소는 무엇이든 제거해도 된다’가 된다.
 
이 ‘무엇’ 안에는 해충과 방울뱀, 인간이 모두 동등하게 포함된다. 존 웨인 영화 속 세계가 21세기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자못 충격적이다.
 
보다 보면 그렇겠구나 싶기도 하다. 몬태나 주와 한국의 인구 10만명당 경찰력을 비교해 보면 각각 201명대 250명,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몬태나 주엔 남한 4배 정도의 넓이에 1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경찰 한 명이 약 115제곱킬로미터를 커버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에 신고...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옐로우스톤>에선 ‘시체 버리는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한 인물이 “왜 늘 시체는 여기다 버리느냐”고 질문하는데, 대답이 이렇다. “여기서 사방 100마일 내에는 인가도, 경찰도, 보안관도 없기 때문이지.”
 
케빈 코스트너는 말보로 광고에 나오는 듯한 19세기적 카우보이 보스였다가, 적들을 거리낌없이 제거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냉혹한 범죄단체 수장이었다가, 결국은 전통적인 미국의 개척정신을 수호하는 신념의 화신으로 미화된다. 총 몇방 맞은 정도로 의사 신세를 지는 것은 수치고(정말 존 웨인을 보는 것 같다), 그의 적들조차도 결국은 그를 존경하게 된다(물론 대부분 그 전에 시체가 되어 황무지에 버려진다). 한국의 꼰대 아저씨들 따위는 그 앞에 가면 순진한 유치원생처럼 보일 듯한 느낌이다.
이런 가치관에 동의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미국의 단면을 본다고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드라마다. ‘아무리 악인이지만 내가 인간의 목숨을 이렇게 빼앗아도 되는가’ 따위의 고민은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마가 없다. 진행도 빨라서 정신을 차려보면 5시즌 순삭.
물론 보고 있으면 버본이 마시고 싶어진다는 부작용도 있다. 티빙에 시즌5까지 있음.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테일러 셰리던 월드에 젖어들고, 다른 작품들까지 모두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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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연이겠지만 2023년 상반기에는 재미있게 몰두해서 본 드라마가 많았던 반면, 하반기에는 재미있을 뻔 하다가 만 드라마들이 많았던 듯 합니다. 굳이 외면한 작품으로는 병자호란-소현세자로 이어지는 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연인>을 처음부터 안 본 정도? 

아무튼 나중에 생각해 보면 2023년은 개인적으로 '테일러 셰리던의 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미드계의 박봉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이 양반 정말 대단합니다. 2023년 현재 <옐로우스톤> 시즌 6, <라이오니스> 시즌2,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 시즌3, <1923> 시즌2, <털사킹> 시즌2를 동시에 자신의 크레딧으로(작가/제작)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아무리 밑에 유능한 작가들이 많고, 대본 공장을 심하게 돌려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대부분 다 재미있고 성공하고 있다는...)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드라마 중에는 역시 상반기의 <글로리>와 <카지노>가 워낙 강렬한 탓인지 그 뒤로 <소년시대>가 오기 전까지 그닥 인상적인 작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짝이는 워터멜론> 정도...? 

 

옐로우스톤, 1863, 1923

테일러 셰리단 월드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마도 2023년의 가장 결정적인 선택이었던 듯. 미국 몬태나 주를 무대로 '그 자체가 서부 개척사'라 할 수 있는 더튼 가문의 150년을 한꺼번에 훑어보는 이 장대한 사가에 한번 발을 들여 놓은 뒤로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옐로우스톤>은 현재 몬태나의 실세인 대 목장주 존 더튼의 삶, <1863>은 처음 더튼 가문이 어떻게 서쪽으로 역마차를 끌고 이동해 몬태나까지 오게 되었는지(사실 오레건으로 가다가 중간에 멈춘),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1923>은 자동차가 말을 밀어내는 시대에 미국 서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 

저런 스틸컷을 보면 이 드라마가 <초원의 집> 같은 미국의 전원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몬태나 주는 19세기 후반과 큰 차이 없는 야망과 살육의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드보일드 대하 드라마. 본편이라고 할 수 있는 <옐로우스톤>의 다섯 시즌, 그리고 그 조상들의 이야기인 <1863>과 <1923> 을 보고 있으면 어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또 되려고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미국. [티빙]

옐로우스톤, 서부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옐로우스톤, 서부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파라마운트 드라마. 현재 미국에선 시즌5가 방송중이다. (계속해서 테일러 셰리단의 작품을 보고 있음) 배경은 '현재'. 코스트너는 미국 몬태나주에서 ‘로드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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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사킹

테일러 셰리단 월드는 몬태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잘 나가던 뉴욕의 마피아 중간 보스에서 하루 아침에 오클라호마주 털사를 나와바리(?)로 받은 실베스터 스탤론. 30년의 옥살이 끝에 지성과 펀치를 겸비하게 된(노인 우습게 보는 동네 깡패들을 한방에 제압하고 돌아서서 검찰 여수사관에게 치근댈 때에는 세네카를 인용할 수 있는 남자!) 스탤론의 인생 2모작 이야기인 셈인데, 일단 보시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듯. [티빙]

 

라이오니스

셰리던은 <옐로우 스톤> 시리즈와 <털사 킹> 외에도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과 <라이오니스>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중 더 재미있었던 쪽은 <라이오니스>. 근육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미 특수부대 장르에 여자들이 주도하고 여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유닛(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에 대한 이야기다.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은 시즌2로 가며 엿가락 신공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해서 애정이 식었지만 이 쪽도 팬이 많다는 정도는 언급해도 좋을 듯.  (이상 테일러 셰리단 시리즈는 미국에서는 파라마운트, 한국에서는 웨이브였는데 최근 한국 서비스 OTT가 티빙으로 바뀐 듯.)

조이 살다나, 니콜 키드먼의 조합이 생각보다 좋다.  [티빙]

아무튼 여기까지가 테일러 셰리던 시리즈.

글로리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래도 2023년의 드라마로 과연 이 작품을 빼놓고 뭘 얘기할 수 있을지. 오히려 <글로리>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 탓에 2023년을 빛낸 다른 한국 드라마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여러 학폭 사태로 인해 하늘이 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무적의 송혜교 외에도 주변의 악역 하나 하나, 그 악당들의 주변 인물 하나 하나까지 모두 살려낸 대본은 실로 '드라마의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넷플릭스]

소년시대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이성한 감독의 2009년작 영화 <바람>. 그리고 충청도를 무대로 했던 영화 <불타는 청춘>이나 뭔가 촌스러운 큐슈 기지촌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던 이상일 감독의 <69>는 아마도 반면 교사 역할을 했을 듯. 어떤 면에서는 일본 만화 <엔젤전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년시대>제작진의 위대함은 이미 존재했던 이 많은 작품들을 보고 본인들이 아쉬웠던 점을 후련하게 털어낸 뒤 완벽에 가까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점. 대본, 연출, 그리고 이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데뷔한 듯한 수많은 젊은 배우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2022년에 박은빈이 있었다면 2023년에는 임시완이 있었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열연. 물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상진이 연기한 호석이가 가장 사랑스러웠다. [쿠팡]

디플로맷

프로페셔널 외교관 부부. 의뭉스러운 대통령의 의지로 영국 전문가인 남편이 아닌 아내가 주영 미국 대사가 된다. 같은 뿌리를 갖고 있고 항상 같은 편이지만 그래도 뭔가 긴장이 흐르는('영국 총리는 미국 대통령의 애완견이냐'는 시각은 항상 존재한다 - 물론 이런 것도 <러브 액추얼리>같은 영화에서 본 거지만) 미국과 영국의 관계. 그 안에서 온갖 음모와 싸우는 용감한 여대사 케리 러셀의 1인 무적 드라마인데, 사고를 치는 건지 아내를 도와주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남편(전남편) 루퍼트 시웰이 은근히 더 빛나는 느낌도 있다. 시즌 2를 기다리는 중. [넷플릭스]

브러쉬업 라이프

회귀물을 참 많이 봤는데, 인생 2회차 드라마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고, 성공한 작품은 더더욱 없다. 아무래도 그만치 쓰기 어려운 듯. 그런데 인생 5회차 6회차 7회차를 그리는 드라마가 나왔다. 일본 드라마 <브러쉬업 라이프>. 야망도 뭣도 없는 평범한 공무원이 어찌어찌하다 살아온 삶을 뒤엎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판타지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찰떡같다.

물론 살아 보면, 역시 인생이란 두번 정도 살아서 무슨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과거를 바꾸면 그 과거는 계속 또 다른 과거(그러니까 좀 더 가까운 과거)를 만들고... 아무튼 '젊은 여자들 이야기인데 남자 주연은 하나도 없는' 신기한 드라마. 여자들의 우정이 주제다. 멜로가 없으면 드라마가 아닌 분들께는 비추. [웨이브]

 

플레이리스트

스포티파이라는 셰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원 앱을 주제로, 그 앱을 만든 창업자, 개발자, 경영자, 그리고 이 사업을 존재 가능하게 한 변호사, 이 사업과 손을 잡아야만 했던 음악산업의 거물,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인 콘텐트를 제공하는 아티스트라는 6개의 시각으로 그 성장 과정을 살펴본 드라마. 꽃미남/미녀/멜로 전혀 없고, 만듦새부터 내용까지 모두 '아 이런 드라마가 가능하구나'하는 생각을 주는 혁신적인 드라마. 그런데 재미있다. 특히 IT 비즈니스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가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강추. 물론 다큐 아님. [넷플릭스]

카지노

시기적으로 살짝 애매하지만 어쨌든 내가 본게 2023년이니 여기에. 결코 흠이 없는 드라마는 아니다. 초반 주인공의 어린 시절 성장 서사가 사실 너무 뻔하고, 너무 지루하다. 하지만 일단 필리핀으로 넘어가면 중간에 끊고 안 볼 수 없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특히 호구 형님과의 시퀀스가 '아... 저기서 멈췄으면' 하는 생각과 '저런 의지 없는 인간은 밑바닥까지 당해 봐야지'하는 묘한 양가감정을 일으킨다. 드라마를 통해 보는 남의 불행은 이런 식으로 즐길 거리를 주는 걸까. 아무튼 일단 흐름에만 오르면 결말까지(그 결말이 꼭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건 그냥 개취) 한방에 달리게 하는 탄탄한 드라마. [디즈니]

리키시

일본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 넷플릭스를 노릴까. 일단 고레에다가 게이샤/마이코 이야기로 물꼬를 텄는데 아무래도 페도파일 냄새가 불편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드라마(그리고 개인적으로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의 기념비적인 드라마는 바로 이 <리키시>라고 생각한다.

<리키시>는 한자로 역사(力士), 즉 '힘 쓰는 남자=스모 선수'라는 뜻. 모래판을 무대로 강백호보다 10배 쯤 더 말 안 듣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천재형 스모 선수가 어찌어찌 아슬아슬한 과정을 거쳐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이야기. 전혀 잘생기지 않고, 본받을 데도 없는 주인공이 신선하고 이야기 전개도 좋았는데, 주연급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발암이다. 이런 요소는... 앞으로 일본 드라마가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데 분명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너무 뭔가 아저씨 드라마 판 인것 같아 하나 추가하면,

반짝이는 워터멜론

그렇게 많은 2023년의 말랑말랑 청춘 드라마들 중에서 시간을 기다려가며 볼만한 드라마는 이거 하나였다는 생각. 아빠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한국의 그 많은 과거 회귀 작품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신선함이 빛났다고나 할까. 특히 최현욱의 신비로운 매력은 정말.  [지금 보려면 티빙?]

기타:

물론 매번 시즌이 바뀔 때마다 다시 얘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만달로리안3>는 따로 꼽을 수 없었다. 좀 경우는 다른데 최근 넷플릭스로 소개된 <나이트 에이전트>도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이미 본지는 꽤 오래 된 작품. 드라마 외의  TV show 로 꼽는다면 <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 <데블스 플랜>이 정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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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 창작, 스토리텔링, 미감, 인간의 자의식, 한국 근대사... 근래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튼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출판 연도와 무관. 그냥 제가 2023년에 읽은 책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추린 리스트입니다. 신간 위주로 읽는 분들께는 조금 죄송합니다.

아무튼 나름 다 좋은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서는 무순. 

내가 된다는 것 (아닐 세스)

분명히 경고한다. 잘 쓰여진 책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 내가 자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뇌가 나 대신 생각하는 것인가, 내 뇌가 바로 나인가. 신중한 답변이 필요할 때 인용할 수 있는 책.

예를 들어 이런 설명들: 내 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밀실 안에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몇가지 정보에 의존해 바깥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빛, 소리, 색깔, 냄새, 형상, 이런 것들은 뇌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 감각기관들이 보내오는 전기 신호들 뿐. 뇌는 이 신호들을 어떻게 해서든 해석해서 '세계'라는 것을 조립하려고 애쓴다. 즉... 내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에릭 캔델)

환원주의라는 키워드. 인간의 시각은 어떤 대상을 볼 때 시각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미술 또한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과거의 미학. 일찍이 세잔이 자연을 원기둥, , 원뿔 등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하고 터너가 갑자기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스코, 칸딘스키가 새롭게 보이는 책.

 

기억전달자 (로이스 라우리)

소설을 몇가지 읽지 않았는데, 그 소설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류 문명의 전달에 대한 은유. 그리고 문명을 계승한다는 것의 대가. 과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소수의 희생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리화되는가.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감동.

그리고 무엇보다 짧다. 쉽게 읽을 수 있다.

 

 

창의성을 지휘하라 (에드 캣멀)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장을 지낸 캣멀이 풀어낸, 한 조직을 크리에이티비티가 넘쳐 나는 조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어떤 조직도 샘솟듯 아이디어가 뿜어나오는 사람들만을 데리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잠언과 같은 명언이 넘쳐나는 책. ‘스토리가 왕이다’ ‘프로세스를 신뢰하라(신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하라)’, 그리고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들이 우리가 안 볼 때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한다면?’이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같은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조지 루카스의 한마디.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스토리텔링 애니멀 +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나단 갓셜)

사실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는 걸 읽고 나서 알았다). 하지만 둘 다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동시에 아주 흥미로운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짧은 결론 중에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보이는 것들 사이에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을 한다'는 것이 있다.

무표정한 표정의 여자, 수프 한 접시, 관에 든 시체의 사진을 제시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연결해 내는 것이 인간. '한번 각인된 이야기는 수없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검증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요즘 세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1884년 갑신정변 현장에서 (F.H. 뫼르셀)

일본 정부의 밀정인 혼마 규스케가 갑신정변 9년 뒤, 갑오경장 1년 전인 1893년 조선에 들어와 견문하고 정탐한 내용. 전 세계를 볼 때 가장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던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당시의 한국은 처참한 후진국이었다. 과연 어떤 부분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식민지 개화의 자신감을 얻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참담하다.

<1884 갑신정변 현장에서>의 원제는 ‘Events Leading to the Emeute of 1884’. 민영익의 호의로 한국 지방 탐사 여행을 떠났던 독일 상인 뫼르셀은 남도를 여행하던 도중 서울에서 변란이 일어나 민영익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반란에 휩싸인 뫼르셀의 불안감이 생생하게 살았는 여행기. 모세을(牟世乙)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일 상인인 뫼르셀 F.H.Morsel 은 독립신문에 1호 광고를 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라제니 (아다치 켄/ 모리타카 유우지)

야구만화를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과연 이렇게 시속 150km를 던지는 광속구의 대투수도, 40홈런을 때려내는 강타자도, 열혈 고교 에이스도 나오지 않는 야구만화가 있었던가. 죽을 힘을 다해 던져야 140km가 나올까 말까 한 중간계투 요원인 주인공은 그라운드에는 돈(제니)이 묻혀 있다는 말에 따라 성실하게 연봉을 챙겨가는 생계형 프로 야구 선수. 매년 신인들이 들어오고 고참들이 쓸려 나가는 치열한 경쟁 현장에서 펼쳐지는 그의 생존기가 매력 만점.

미 가장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 (낸시 에트코프)

대체 왜 인간은 예쁜 것을 좋아할까. ‘Beauty is in the eyes of the beholder’라는,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말은 미감이란 인류 각 개체의 독립적인 감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최신 뇌과학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문제의 개인차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다. 심지어 갓난 아이도 성인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예쁜 것에 대한 반응은 본능인가? 하버드 대 교수 낸시 에트코프의 기발한 분석. [그런데 안타깝게도 절판. 중고는 많이 팔립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오구라 기조)

서울대에서 한국 정치사상을 연구한 일본인 저자의 눈으로 본 성리학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혹은 한국인이 성리학을 내면화하면서 생긴 일에 대한 정리서. ‘남이 본 우리 이야기인 만큼 시사점은 넘쳐 흐른다. 과연 이 책은 한국을 미화하는 책인가, 폄하하는 책인가. 직접 판단하시면 좋을 듯.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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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건축기행 (유현준)

지난해 읽은 가장 강력한 여행 뽐뿌질 책. 당장 짐을 꾸리고 싶어진다.

인문 건축 기행, 무작정 가보고 싶어지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인문 건축 기행, 무작정 가보고 싶어지는

여행을 좋아한다. 당연히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도 좋아한다. 유현준의 . 지금까지 나온 유현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생각하면 왜 이 아닌지도 궁금하지만(아마도 게으른 서점을 위해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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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시선 -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 (김정운)

엄청난 노작. 대체 그로피우스의 이상에서 아이폰으로 연결되는 이 문명의 선이란. 

창조적 시선, 바우하우스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창조적 시선, 바우하우스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볼륨. 등장인물만 대충 꼽아 봐도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 스티브 잡스, 오스카 코코슈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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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10권 같은 13권. 그리고 2023년, 반드시 거론해야 할 책들은 다음과 같다.  

90년대, 깊고도 가벼웠던 10년간의 질주 (척 클로스터만)

이런 식의 역사를 써 보고 싶다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바츨라프 스밀)

스밀은 왜 분노하나. 왜 사람들은 스밀에게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나. <팩트풀니스>를 감명깊게 보신 분이 보셔야 할 책.

에디톨로지 (김정운)

창조란 없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일 뿐. 

신통기 (헤로도투스)

나온지 너무 오래된 책. 하지만 이 책이 있어야 할 이유를 100가지는 댈 수 있다. 

기묘한 중국사 (왕레이)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책. 무송은 어떻게 술 한말을 마시고도 호랑이가 나오는 고개를 넘을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을 다 믿어도 좋을지는...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미즈키 시게루)

개인과 역사는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가.

축제만세! (타카기 나오코)

일본에는 왜 이렇게 축제다운 축제가 많은 걸까. 이 사람처럼 놀러 다니고 싶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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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번을 단 포인트가드 중 유명한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피닉스의 전설 케빈 존슨이 송태섭의 모델로 꼽혔던 것은 그리 크지 않은 키와 함께 7번이라는 번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2. 1m68이라는 설정신장때문에 먹시 보거스나 스퍼드 웹이 모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송태섭의 작화상 신체 비율은 이 미니 가드들의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왕년의 찰스 바클리마저도 길들일수 있었던 불같은 리더십을 보면 역시 케빈 존슨... 

2. 발군의 스피드, 넓은 시야, 패싱 감각, 호승심, 리더십, 그리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슈팅력이 특징인 송태섭. 하지만 팀의 주축인 센터와 3점 슈터가 졸업하는 이상 새 팀에서는 주장으로서 득점원으로도 잠재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선수. 그 송태섭의 시각으로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다는데, 가슴이 뛰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 가문 섭자 항렬의 3대 인물이 송태섭과 막걸리 장인 송명섭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북산 5인방이 하나씩 스케치에서 인물로 바뀌며 걸어나오는 인트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애니메이션 상의 경기 묘사에서 선수들의 동작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괜찮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4. 팬들 사이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피어스>라는 단편이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영화 <퍼스트 슬램덩크>는 처음엔 마치 <피어스>를 따라갈 듯 하다가... 결국은 전혀 다른 길로 간다. 



5. 하지만 문제는 송태섭이 주인공(?) 인데도 불구하고, 배경으로 계속 삽입되는 개인사(송태섭의 성장기)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뒤로 갈수록 그 성장기가 경기의 긴박감을 심하게 떨어뜨린다. 이 부분 매우 아쉽다. 

6. 어쨌든 북산이 이긴다(...스포일러인가?). 당신이 듣고 싶어 했던 그 주옥같은 명대사들도 상당수 나온다. 그리고 강백호의 클라이막스는 정말... 와... 멋지다. 역시 주인공은 강백호. 눈물이 괸다. 



7. 이러니 저러니 했지만, <퍼스트 슬램덩크> 소식을 듣자마자 '어 이건 봐야지' 생각한 사람은 무조건 달려가 볼 것. 이건 '잘 모르는데 요즘 핫하다니까' 볼 작품은 아니다. 이 극장판은 어디까지나 <슬램덩크>의 짤 한장만 봐도 그 장면의 대사가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그 밖의 사람들은... 모르겠다. 보든지 말든지. 

8. 자막으로 봤는데 더빙은 어떨지 궁금. 자막의 이름 표기는 모두 한국식이라 위화감은 없다. 단지 강백호 역의 일본 성우가 좀 심하게 아저씨 목소리... (참. 극장이 아저씨 판일줄 알았는데, 80% 이상이 10~20대라서 놀랐다) 

9. 아쉬움: 변덕규 안 나옴(무 깎는 신 매니아로서 매우 안타까웠음). 

10. 기왕 <퍼스트 슬램덩크>로 시작했으니 텐스, 트웬티스까지 극장판 오리지날로 계속 이어주십쇼. 

이노우에 사마. 오래 오래 사세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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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명량>과 <한산>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량>은 지나치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한 전개가 좀 부담스러웠고, <한산>은 '전투'라는 사건을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흐릿해져버린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노량>은 달랐다.

<노량>은 1598년 12월16일 밤부터 그 다음날까지 벌어진 해상 전투,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혈투를 글자 그대로 입체적으로 조명한 영화다. 이전의 두 작품에서 다소 평면적인 시야가 아쉬웠다면, <노량>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각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특히 외모 면에서) 생각이 들었던 김윤석의 존재감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압도적인 절제미'라고 부르고 싶다.

그 밖에도 해전의 스케일, 전투의 박진감 모두 전작들에 비해 진일보했다. '전투 한복판의 정적' 신, 전장의 북소리 신 역시 그 섬세함을 모두 칭찬하고 싶다. 특히  '정적' 신은 전투에 참가한 3국 병사들의 시선과 이순신의 시선, 이순신의 마음 속을 한 흐름에 담아낸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 

혹시라도 세 편 다 보는게 뭔가 좀 부담스러워서, 혹은 <서울의 봄>을 보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또 극장에 가는게 부담스러워서 관람을 꺼린 분들이라면 어서 극장으로 가시길 권한다. 

1. 노량해전은 어떤 전투일까. 한산해전이 희망 없는 전쟁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영웅의 대업을, 명량해전이 궤멸지경이었던 조선 수군을 기적처럼 되살린 영웅의 재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노량해전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전이자 영웅의 최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영화 <노량>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다른 두 전투와는 사뭇 다른 이 전투의 의미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량해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영화 속 진린의 대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가 그리 무리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1598년 12월. 이미 조선과 명, 그리고 토요토미 사후의 일본 조정은 일본군의 철병을 전제로 한 종전에 합의한 상태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적에겐 항자불살 降者不殺의 아량을 베푸는 것이 고전적인 동양 무인의 대의. 게다가 승리가 담보되지 않은 출전 명령을 거부하다가 졸병으로 강등된 적도 있는 장군 이순신이, 그동안 치열한 전투에 시달렸던 휘하 장병들을 불필요한 전투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설사 전투를 벌인다 해도, 적을 적당히 도망치게 내버려 둔 뒤 추격하며 전과를 올리는 것이 병가의 상식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순신은 왜군과의 화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그 결과 정면 대결이 펼쳐지고, 엄청난 전과를 거두기는 하나 자신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여기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만약 이 질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노량해전이라는 이상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영화 <노량>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대체 왜'에 충실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2. 영화에선 몇가지 소재로 설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아산에서 가족들을 돌보던 세째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인데, 이건 영화 속에서도 진린의 추정일 뿐, 이런 개인적인 동기로 수많은 장병들을 죽음의 전투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충무공의 캐릭터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는 두번째, 7년 동안 죽어간 동지들과 희생당한 백성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훨씬 와 닿는다. 물론 이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세번째,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일 때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송희립에게 다시 한번 잘라 말한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수는 없다. 열도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확실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제대로 끝냈다고 할 수 없다"고. (어쩐지 이 말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루쉰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 <노량>에서 이 말의 의미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이순신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결국 이 전쟁을 그대로 끝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은 임진왜란(1592)와 정유재란(1597)이라는 이중의 전쟁이다. 전쟁 초기. 일본 수뇌부,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이 조선에 출병한 이상 이 전쟁을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주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되며 왜군들은 1596년까지 서서히 철군을 진행했지만, 이 화의 조건의 구체적 내용이 상당부분 사기로 밝혀지며 히데요시는 격분하고, 1597년 다시 대규모의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한다. 이것이 정유재란. 

이미 정유재란을 겪어 본 이순신과 조선의 일선 지휘관들이 과연 1598년 12월의 후퇴를 영구적인 후퇴라고 믿었을까.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 과연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부분이 핵심인데, 영화 <노량>은 이런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는 하나, 아쉽게도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4.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를 통해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 전국 다이묘들이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느라 조선 재침공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유성룡이나 윤두수 같은 정치인들이라면 다양한 정보를 조합해 재침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당시의 이순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입장이라면,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산산조각을 내고 감히 재침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피해를 주는 것만이 확실히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군사들과 백성들, 그 가족들이 다시 전쟁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비록 그 마지막 전투에서 휘하 장병들이 죽고 상하고,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5. <노량>은 여기에 보태, 그렇다면 일본 측 장수들은 어째서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순천 왜성에 갇힌 고니시야 탈출하지 못하면 바로 끝장이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구조에 어째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좀 궁금하다. 

<노량>이 내놓은 답은 자존심.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은 일본 전국시대에도 용명을 떨친 강병을 갖고 있었고,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바로 그 사람이자(영화 속에도 소개된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최대 승리라 할 수 있는 사천왜성 공방전에서 명군에 거의 1만 가까운 사상자를 낸 명장이었다.

시마즈가 노량해전에 목숨을 건 실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영화 <노량>에서는 고니시가 시마즈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공까지 세운다면 일본으로 돌아가도 감히 누가 당신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시마즈의 자존심과 자신감이라면, 충분히 물만한 떡밥이다.

사실 이순신이 왜군의 재침을 우려했다면, 반대로 고니시는 이순신을 앞세운 조명 연합군의 열도 보복 침공을 걱정했을 수도 있다(이것 역시 실제 역사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지만, 당시 왜군 다이묘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일본군 최강의 카드인 시마즈 군을 동원해 이순신을 공격하고 자신이 살 길도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량>은 이순신, 고니시, 시마즈에게 목숨을 걸고 노량 바다에 뛰어들 동기를 마련해준다. 지금까지의 <한산> <명량>은 물론, 거의 모든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입체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런 잘 설계된 대립이 대다수 관객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부분의 대사에 좀 아쉬움이 있다.

 

6. 또 하나의 아쉬움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순신 관련 드라마나 영화에서 진린과 이순신은 거의 버디 무비의 두 주인공처럼 묘사되곤 했다. 이것은 실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인데(진린은 일찌기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충절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다), <노량> 제작진은 이런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서였을까. 진린/등자룡과 이순신의 매력적인 티키타카를 기대했던 관객으로서 좀 아쉽다.

물론 이 글 시작 때 말했듯, 이런 사소한 아쉬움에 비해 <노량>은 매우 세련된, 멋진 영화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뭘 하고 있나. 빨리 예매를. 

 

이후는 다소 뜬금없는,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들. 

P.S. 1. 고니시의 사신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리마(이규형)의 갑주가 임진왜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지 않았던 스페인풍의 남만동구족 갑옷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포르투갈과의 교류가 많았던 고니시의 군대이니 고위 장교인 아리마는 포르투갈 수입 갑주를 입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긴 하다.

P.S.2. 이순신의 조총 피격 장면은 어쩐지 어린시절 본 김진규 주연 <난중일기(1978)>의 같은 장면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한민 감독도 이 영화를 기억할까. 

P.S.3. 이면은 사망 당시 20세 추정. 그런데 굳이 여진구에게 덕지덕지 수염을 붙일 이유가...?

P.S.4. 여담이지만 노량해전에 대한 일본 측 해석 중에는  '일본군이 꽤 큰 피해를 입었다 해도 어쨌든 고니시의 일본 귀환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했고, 조선 최고 사령관 이순신을 전사하게 하는 전과까지 세웠으니 이것은 승리한 전투'라는 시각이 있다. 

P.S.5. 패전하고 후퇴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분하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같은 대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약 300년 뒤 시마즈의 후예인 사츠마의 유신지사들은 정한론과 한일합방의 주역이 된다. 이순신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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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쉬업 라이프의 세 주역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원작 웹소설 이후로 요즘 '인생 2회차' 서사가 넘쳐나지만 사실 이 장르에서 아 그거 걸작이었지 싶은 작품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1986)>, 해롤드 래미스의 <사랑의 블랙홀(1993)> 이후로는 <어바웃 타임(2013)> 정도? 일본 만화 <리라이프>?
그러니까 내가 과거로 가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빙의되어 다시 태어나는 경우는 흔한데 '내 인생'을 동시대에 다시 살 기회가 생기는 서사는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아마도 2023년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는 이 전통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듯 하다.
 
일본 어느 지방도시 공무원으로 아주아주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던 아사미. 어느날 교통사고로 급사해 저승의 흰 공간에 떨어지고, 생전의 자기와 너무나 하는 짓이 비슷한 저승 공무원("규정때문에 안됩니다")에게서 지금 환생하면 쌓은 덕의 포인트가 부족해 다음 삶은 과테말라의 개미햝기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단, 그게 싫으면 인생을 다시 살아서 만회할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살아야지. 인생 2회차 도전!
이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인생을 두번 살면 얼마나 삶이 달라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삶은 어느새 훅 지나가 버린다. 더구나 덕을 쌓지 않으면 미물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니. 대체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덕'이란건 정체가 뭐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포텐셜인가, 노력인가. 과연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란 존재하나. (단, 장르는 코미디)
...라는 식의 이야기는 인생이 2회차면 다 될것 같으냐는 진지한 접근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계란 후라이처럼 가장 돋보이게 덮인 것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일본적으로 변형된 <섹스 앤 더 시티>.
 
아니,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일까? 네 친구의 너무나도 끈끈하고 치열한 우정이 사뭇 감동적인데 심지어 거기엔 남자의 그림자가 없다.
 
남성 캐릭터 중 가장 비중이 큰 후쿠짱은 그야말로 커다란 곰 인형 수준. 사랑이며 연애며 하는 것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정말정말 사소한, 지나가는 얘깃거리일 뿐이다. 정정하면 <노 섹스 앤 더 시티>. "Trends come and go, but friendships never go out of style." 그런데 정작 작가는 75년생 남자(바카리즈무).
소꼽친구 여자들 이야기에서 연애라는 강력한 재료를 아예 들어내고도 10부작 드라마가 이토록 흥미로울수 있다니. 사뭇 놀라울 뿐이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사회교육방송적인 색채도 최대한 억누른(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연출도 새롭고, 말 실수 하나도 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초세심 대본도 빛을 발한다.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는 말할것도 없고.
물론 <펜트하우스>나 <아씨두리안>이 인생드라마였던 분들에겐 비추. 왓차/웨이브/티빙에서 시청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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