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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아내 헤드윅(잔드라 휠러)과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수용소 담장 바로 밖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뜰에는 넓은 잔디밭과 꽃들이 우거졌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가족들은 여름이면 부근의 강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때면 마당에 간단한 파티 테이블을 차려 놓고 의자에 기대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 아우슈비츠에서는 거대한 굴뚝이 밤새 연기를 뿜어냈다...

2. 영화는 회스 부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회스에게 유태인 학살은 음식쓰레기 배출이나 수돗물 공급과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었다. 아내 헤드윅은 유태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옷가지와 각종 물품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쓴다. 반면 자신들의 자녀와 가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애롭고 헌신적인, 훌륭한 부모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뿐. 헤드윅은 회스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그만두게 될 때 "나는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라며 흥분하고, 회스는 어떻게 하면 상부의 신임을 얻어 소장직을 되찾고, 헤드윅을 실망시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충격적이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충분하다. 나머지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딱히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이 영화의 결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튼 강추작. 박수가 아깝지 않다.

자, 그냥 표 사러 가세요. 나머지는 영화 보고 다시 오시길.

 

가운데가 루돌프 회스

3. 이 끔찍한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이 또한 놀랍다). 루돌프 회스는 실존인물이고, SS 장교 출신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다. 1943년 11월 잠시 다른 인물과 교체됐지만 44년 5월 복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나치가 아우슈비츠 주변 약 4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설치한 특별 구역의 이름인데, 이 동네에 멋진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마틴 아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쟁이 끝나고 회스 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추적자들은 먼저 북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로 변신해 있던 아내 헤드윅과 가족들을 찾아냈고, 헤드윅은 처음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고, 회스 또한 덴마크 국경 지역에서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체포됐다.

 

회스는 자신이 1941년부터 43년까지 SS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약 2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태우는 작업을 지휘했음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회스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리델. 매우 흡사하다.

4. 과연 회스의 가족들, 아내 헤드윅과 자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회스는 종전 후 재판에서 "최소한 아내와 장남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녁때마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연기, 그리고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문자들은 이 냄새와 연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살당한 유태인의 것임이 분명한 모피 코트를 뽐내는 헤드윅.

4.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주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회스의 장모는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지, 어느날 회스 앞에서 신발을 벗는 여자는 누구인지, 낚시를 하던 회스는 왜 갑자기 아이들을 물에서 꺼내 집으로 끌고 오는지, 왜 갑자기 회스는 구토 증세를 보이는지 등에 대해 깔끔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다. 

 

장모는 정말로 태연하게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 가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달아난 것이고, 회스와 아내는 아우슈비츠에서 상당수의 유태인들을 몸종처럼 부리고 때로 성노예 취급도 했을 것이고, 강물에서 시체 태운 재를 발견한 회스는 '아이들'이 그 재에 오염될까봐 깜짝 놀란 것이고... 구토는 아마도 잠시나마 '미래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와 같은 자각이 일시적으로 무의식을 뚫고 나와 신체에 반응을 일으켰음을 상징하는 것일텐데, 이런 해석들이 맞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기를 글레이저 감독이 바란 것일 뿐. 

 

벽에 사과를 박아 넣는, 뒤집힌 그림 속 소녀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몇몇 폴란드 사람들은 작업 중에 유태인 수감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밤에 몰래 진흙 속에 음식을 감춰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영화 내용중에는 '사과 하나를 놓고 두 수감자가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회스가 '둘 다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있다. 

5.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그저 명령에나 복종하고, 조직 안에서 과업의 완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고는 2차대전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이르면, 이건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무심함'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희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까.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가자지구의 학살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했다. 단지 홀로코스트의 고발만이 중요했다면, 당시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이제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괴한 현상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외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담 너머의 참상에 고개를 돌린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든 선진 문명국들의 풍요는 일정 부분 이상 '담 너머'의 희생에 일정 부분 이상 빚을 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생각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름끼치는 은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6.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 아카데미 작품, 각색, 감독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중 국제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은 로컬 영화제잖아요"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소위 국제영화상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 2024년 시상식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작품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모두 오른 반면,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국제영화상 후보에서는 빠졌다. 작품상이 아카데미상의 최고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국제영화상 후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다(물론 해당 국가에서 <추락의 해부>를 후보로 밀지 않으면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행 제도다). 

 

7. 다만 개인적으로 음향상에는 다소 의문이. 과연 이 영화의 검은 화면이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그렇게 대사 없는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었나?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굉음과 비명을 꼭 들려주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 감춰진 악의 선명함으로 충분했고, 굉음에 가까운 음향은 오히려 과잉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칭찬하고 싶은 걸작.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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