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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를 뒤늦게 봤다. 주위의 찬사와 추천 속에서도 사실 <패터슨> 비슷한 영화라는 말에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연말을 맞아 보길 잘 했다.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코모레비 (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라는 새로운 명사를 이야기했다.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달리건, 자동차로 달리건, 걸어가며 바라보건, 아니면 제 자리에 누워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건 코모레비는 아름답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도 한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쓴들, 이 세상의 모든 코모레비를 가질 수 없고, 내가 없다 한들, 심지어 아무도 즐기는 사람이 없다 한들 코모레비는 변함 없이 어딘가에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한때 '코모레비'가 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보고 나니, 그 코모레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코모레비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같은 순간은 하나도 없는, 변화 없는 것 같은 나날들 속의 코모레비같은 햇살의 가치'에 큰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중요한 영화긴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속죄와 욕망에 대한 영화로 읽혀서 매우 와 닿았다. 

일상의 소중함? 잔잔한 감동? 천만에. 



2. 히라야마는 왜 화장실 청소부가 되었을까. 누가 봐도 '이런거 하실 분' 혹은 '이렇게 사실 분'이 아닌 사람이 매일 아침일찍 일어나 토사물 쌓인 아침의 공공화장실을 꼼꼼하게 닦고 정리한다. 대체 왜.

누가 봐도 '닦음'의 의미는 선명하다. 그는 지우고 싶고, 펴고 싶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고 싶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그 노력은 결실을 이룬듯 했다. 

 


3. 다만 빔 벤더스가 그리 친절할리 없고,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 사연을 깔끔하게 털어줬더라면 영화의 아우라는 확 사라져 버렸을게다. 그저 이 정도로 짐작하고 상상하게 하는게 좋다.

히라야마의 동기 가운데 단지 느낄수 있는 것은, 배운 사람인 그에게 어느 한 순간 자신과 주변에 대해 견딜수 없는 환멸이 찾아왔고, 기존의 삶을 도저히 유지할수 없는 계기가 있었을 거란 정도였다. 맨 정신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4. 조카, 동생, 술집 여주인, 안경 쓴 남자와 일련의 만남은 그에게 그가 왜 현재의 삶을 택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 일들이 한방(대략 2주 사이)에 찾아오는 바람에, 그는 지난 수년간의 삶이(최소 6년, 대략 10년? 15년?), 혹은 치열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된다.

긴 시간 변기를 닦으며 속죄(수행)를 했건만, 그렇게 쌓아올린 마음이 이렇게 한방에 무너져버리고 마는구나. 여전히 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다가가려 하고, 질투하고 좌절하는구나. 그냥 그런 인간의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렇게 울고 웃을수밖에 없었구나. 



5. 그렇게 폭풍우가 이는 듯한 영화를 봤다. 영화는 결코 잔잔하지 않았다. 야쿠쇼 코지는 치열했다.


대략 여기까지가 페북에 썼던 글. 사실 여기서 할 얘기를 다 하긴 했지만, 한발 더 들어가보려 한다. 역시 결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혹은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감정만을 갖고 싶은 분도 멈추시기를 권장한다.

물론 이런 해석 역시 개인적인 시각일 뿐이고, 민주적으로 1/n의 가치를 갖는다. 반대로, 빔 벤더스가 어떤 인터뷰에서 어떻게 말했거나 야쿠쇼 코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든, 그것이 절대적인 해석의 기준일 수도 없다. 이미 해석은 관객의 것이니까. 

 

 

 

 

6. 히라야마는 계속 꿈을 꾼다. 꿈은 흑백으로 묘사되어 확실히 현실과 구분된다.

7. 조카 니코가 찾아온 날, 히라야마는 니코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치 그가 기존의 가족들을 떠나온 것이 오래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던 그는 이 낯선 소녀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니코니?"라고 묻는다. 

8. 그날 밤, 그의 꿈에는 니코가 나타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니코가 아니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상, 바로 오늘 처음 본, 지금 위층에서 자고 있는 조카가 나온다는 것은 넌센스다. 이 꿈에 나타난 소녀는 아주 오래 전, 그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던 소녀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녀가 왜 니코와 똑같이 생겼을까

9. 며칠 뒤, 기사가 모는 렉서스를 타고 여동생이 딸을 데리러 나타난다. 여동생은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방문해 보라. 예전처럼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치매 상태일 수도 있고, 그냥 노쇠했을 뿐일 수도 있다. 어쨌든 히라야마의 가출은 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버지로부터 내쫓김을 당했을 수도, 내쫓기기 전에 그 스스로 떠났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히라야마의 '죄'는 가족 내부의 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카의 비밀을 상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10. 히라야마는 바 여사장과 전남편이 포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사장과 눈이 마주친 히라야마는 맥주 세 캔을 사들고 도망친다. 강가에서 술을 마시는 그를 발견한 전남편(어떻게 히라야마를 찾았고, 어떻게 알아봤는지를 따지지는 말자 ㅎ)은 그와 여사장 사이의 서사를 말해주고,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히라야마가 도망쳤다는 것은 그 역시 여사장과의 관계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림자 놀이는 좀 난감하지만, 결국 인간의 감정과 관계라는 것은 논리와 주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짙다면 그냥 짙은 것이고, 안 짙다고 하면 안 짙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11. 사실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듯, '소소한 일상의 작은 행복의 소중함'을 말하자는 거였다면, 마지막에 울었다 웃었다 하는 히라야마를 설명할 수 없다. 히라야마는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미션>의 로버트 드 니로가 갑옷 뭉치를 끌고 이구아수 폭포의 절벽을 오르듯, 남의 오물을 씻는 행동으로 속죄를 꾀했다. 가끔씩 '난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아'라는 듯한 몸짓의 노숙자가 악몽처럼 나타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조카와의 해후 전까지 그는 자신의 속죄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조카와 여사장의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속죄가 눈속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울고 웃음을 반복하게 된다. 좌절일까. 좌절만은 아니다. 삶이란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고, 그는 자신의 삶을 이제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릴 지도 모른다. 즉 '사는' 것에서 '살아지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고, 속죄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깨달음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코모레비는 번뇌의 다른 표현일 뿐. 번뇌가 싫어 인간의 삶을 떠났다면(떠날 수 있었다면), 사실은 코모레비도 사라졌어야 한다. 찰나가 영원이고, 영원이 곧 찰나라면 코모레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나는 이 열린 결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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