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문화의 핵심을 성리학의 기본 단위인 이(理)와 기(氣)를 통해 해석, 전통적인 한국 사회와 해방후 급격한 경제 발전, 사회의 변화, 특징적인 민주화 등이 어떤 정신적 분위기(?)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공자는 참으로 강하구나" 했던 바로 그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한국에 정통한 학자라 해도 한계는 있겠으나, 매우 독특한 해석이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부분들이 많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면.

 

 

 


1.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한국인의 사상사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명사를 통해 해석하고 가르쳤다.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이며, 단일한 원리이자 지향해야 할 선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이며,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의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기는 이 이가 현실세계에 적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이가 절대지상의 원칙이라면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흔히 이를 체(體)라 한다면 기는 용(用)이라 표현된다.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빗대 이해할 수도 있다. 


2. 오구라 기조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사회다. '주자학에 의한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라고 규정한다.
즉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 주자학 이후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리'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리'가 도덕적 정당성이 되어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나라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덕을 중시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문체에서는, 지식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며 정치의 선봉에 선 시대가 없었던 일본 역사에 대한 묘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도 시대에도 유학자들은 막부의 통치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종의 어용 학자의 역할을 했을 뿐, 유학자가 정국을 주도하거나 한 시대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정치는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전문가'들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 '공맹지학'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유학에서 맹자의 존재가 희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3. 아무튼 지식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보니, '리'에서 벗어난 물(物)은 매우 비천한 것으로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공고하고, 특히 공과 상의 귀함이 지독하게 무시당해 온 역사가 바로 이 '리'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해석이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음에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恨)이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소비는 일종의 한풀이다. 그 구매 대상이 상징하는 상위의 생활에 대한 동경이 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런거 하나 못 살까보냐', '내가 이런 것 하나 못 사줄까보냐' 같은 심성이다. 정말 일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에 대한 이런 묘사는 심히 그럴듯하다.


4. 그렇다면 왜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事大)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일까. 오구라에 따르면 그 이유는, 중국의 명조가 바로 '리'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명조에 있었고, 유학이라는 학문이 지향하는 과거의 이상, 즉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실재하는 존재가 바로 명조였던 것이다.


오구라는 여기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한중관계를 잠시 거론한다. 과거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사대를 기본 원칙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사대는 과거의 중국이 '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나 20세기 이후 중국은 그런 존재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미 20세기 이후, 한국의 '리'는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을 추종한 것 역시 오구라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이 6.25때 도와주었다거나 경제적 원조로 번영을 이끌었다거나, 혹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방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친미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과거 중화가 갖고 있던 '리'를 한국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리를 지향하고, 거기에 맞춰 국가와 국민 모두 합심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오구라 기조 교수


5. 한국의 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이 리를 숭상하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민주주의라는 리의 구현을 위해 한국 지식인들은 목숨과 지위를 아끼지 않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대부'와 '선비'로 나뉘곤 한다. 선비가 국정에 참여하면 사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재야의 사림이 된다. 항상 그 순수성은 재야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안에서 오구라의 주장은 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각이 반한적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오구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앞서도 잠시 말했듯, 일본 역사에서도 이토록 지식인(혹은 문인)이 주도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부러움이 느껴진다. 


6.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과연 오구라의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인 스스로 쓴 한국인의 정치 사상사, 혹은 한국인의 정신사에 대한 저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대한 분석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정치사상을 다룬 한국 학자의 괄목할만한 저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몇몇 권위자들께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추천할만한 책이 없다'였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은, 책 자체의 독후감보다 '없다'라는 추천의 충격이었다. 왜 없을까. 없어야만 할까. 

혹시라도 '없긴 왜 없어'라고 추천해 주실만한 분, 아울러 지금이라도 직접 써 주실 분이 궁금하다. 이 포스팅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부모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고, 살아가면서 얽힘이 없는 인간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늘 꼽는 학연/지연/혈연을 옹호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주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의 성취(혹은 그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는 자기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판타 레이> 저자인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이런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책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구한말-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의 암흑기에, '우리 조상들이 좀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분단과 남북한 독재의 탄생과 같은 민족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뭔가를 알려 할수록, 그 시기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를 그 시대에 데려다 놓은들 과연 더 낫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917년작인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사람들에게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미국 유학가서)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물론 형식 자신도 생뭏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광수는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꿔놓기 위해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등장하는 조선의 과학자들은 1920년대 이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같은 서구의 최신 물리학 조류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식민지의 계몽에 온 정성을 바쳤다. 이 책은 최규남 최윤식 도상록 이극로 등 당대의 선각자들이 조선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배운 사람'들은 '무식한 민중'을 탓하며 자신들만의 성역에 안주하지 않았다.

 

1939년 영화화된 <무정>. 김신재 한은진 주연. 당시 경성 장안의 화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규남이 '백만원이 있다면 지상 5층 지하 5층의 번듯한 이과학 연구소를 만들겠지만, 백만원이라면 일원짜리 지폐 백만장이 아닌가''라며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한 순간에선 안타까움이 앞선다. 간송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 1만원에 산 것이 화제가 되었던 시절이다.  누가 식민지 젊은이들을 위해 그 큰 돈을 모을수 있었을 것인가. 1938년에서야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설치된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학생 한명당 2만원 수준의 투자가 이뤄졌다고 하니 최규남이 바랐던 것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 같다. 


'이과 책'이긴 하나 어려운 과학 지식을 요하는 내용은 없다. 사실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과학사')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궁극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책이다. 가능하면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거룩하고 지루한 책 같지만, 저자의 취향이 개입된 trivial한 팩트들이 주는 자극을 또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선데이 과학(?)' 적인 요소도 다분하니 재미없다는 얘기는 안 나올 듯.^^ 아무튼 강추.

여행을 좋아한다. 당연히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도 좋아한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지금까지 나온 유현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생각하면 왜 <인문 공간 기행>이 아닌지도 궁금하지만(아마도 게으른 서점을 위해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 읽다 보면 처음엔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나 저기 갔었는데. 왜 저걸 못 봤을까. 유홍준 선생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항상 참이다. 베를린에 갔어도 국회의사당은 밖에서 보는 걸로 스쳐 지났고, 베네치아를 몇번 갔어도 퀘리니 스탐팔리아는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오사카에 갔어도 빛의 교회나 아주마 하우스를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뭐 대신 히메지성을 갔으니 이건 후회는 없다). 물론 어쩔 수 없었던 때도 떠오른다. 산 세바스찬에 갔어도 빌바오를 들를 수는 없었던 것처럼.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남들에게도 그 감동을 전하고 싶어하고, 글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 책은 건축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건축덕후의 글에 가깝다.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감정이 있다. ‘...어렵게 찾아가느라 짜증이 났는데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는 식의 표현. 어떤 것인지 바로 느낌이 온다. 그래 맞아, 맞아.
이 책이 꿈이라면, 이 책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두 찾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건 슬픔. 우와 하는 생각에 정확한 위치를 검색해 보면 파리에서 6시간.... 어렵다.
 
아무래도 살아 생전에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베어런(그 유명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이 있다)이나 텍사스 주 포트워스(킴벨 미술관)같은 곳에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안타깝다.
이 책에 나와 있는 30개의 건축물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여기에 올라와 있을 지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 유현준 교수가 본 ‘세계 3000대 건축물’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엄선된 것일 거란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투자자만 있다면 멋진 건축 다큐(...아니다). 아무튼 또 한동안 여행병에 시달리겠다는 생각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은 읽으실 분들을 위한 주의사항 모음]

P.S. 단순한 관람기가 아니다. 한 건물을 설명하기 위해 대략 10개 안팎의 다른 건축물과 예술작품들, 해당 건축물들의 역사적 맥락과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워싱턴 베트남 베테랑 메모리얼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서도호의 ‘ some/one’ 이 매우 반가웠다.
 
한때 리움의 상설전시작품이었던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옛 글귀를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표현하다니, 라고 감탄했던 때가 생각난다
<창조적 시선 -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 10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볼륨.

등장인물만 대충 꼽아 봐도 조너선 아이브, 디터 람스, 스티브 잡스, 오스카 코코슈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말러,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슈테판 츠바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마 말러... 뭐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벨 에포크.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 통일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때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아이디어가 넘쳤던 이 시기는 '아무도 예측할수 없었던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이 끝난 뒤, 기존의 어떤 것도 믿을수 없게 된 시대에 가장 창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학교를 만든다. 그 이름도 찬란한 바우하우스.
 
<창조적 시선>은 그 바우하우스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버티다 어떻게 달라져갔으며,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에 대한 책이다. 또한, 인류가 어떻게 해서 '창조성'이란 개념을 발명하게 되었는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방대한 책의 내용을 더 이상 짧은 몇줄에 압축할 재간은 없다. 김정운 교수의 '10년 공부가 담겼다'는 윤광준 선생(이 책의 사진을 맡은)의 말씀이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것 밖에는.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끝나는지가 궁금해 약 3주를 매달렸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대단원.
 
맨 위에 써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얽혀 어디로 흘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봐야 할 책. 단 각오는 단단히 하고 달려들어야 할 것. 어려워서 못 읽을 책은 절대 아니지만, 이야기의 망망대해 속에서 일엽편주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P.S. 문득 이 책과 매우 유사한, <판타레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두 책은 빈의 제체시온 미술관에서 만난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이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는 미술관. 이 두 세계가 만나면 거기선 또 얼마나 더 엄청난 이야기가 쏟아질까. 한국에서도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와 주길 기원한다.

 

매년 연말이 되면 정리를 해보곤 합니다만... 매년 반복되는 생각은 '아 내년에는 책 좀 더 읽자'. 

물론 실용서 종류를 필요에 따라 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지나고 나면 참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시간순으로 2022년의 첫 책인지도? 이미 올해가 저물 때가 되어 가다 보니 아직 안 읽은 분이 거의 없을 듯도 하지만, 혹시 아직 안 읽은 분들이 있다면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살짝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여성 과학자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로 시작하다가 한 유명 어류학자의 성공담, 그리고.... 반전에 반전이 존재하는, 그러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놀라운 책.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2023년에는 반드시 읽어 보시길.

 

2.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본래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하는 편. 프랑스의 <파리 마치>가 자신들의 잡지에 연재된 세계 유명 작가의 단편들 중 베스트를 추린 단편집. 이선 캐닌의 <궁전 도둑>과 제임스 설터의 <방콕>, 두 편만으로도 제값을 하는 책입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었지만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걸작. 누군가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두고 '불면증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은유'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삼.

이런 단편집은 시간 날 때마다 사탕 까 먹듯 한편씩 읽는 재미가 쏠쏠하죠.

 

3. 일본인 이야기 1, 2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하지만 '진짜 일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정말 적은 나라 한국. 자칭 일본 전문가는 넘쳐나지만 센고쿠 시대와 임진왜란 시대, 혹은 메이지 유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역시 대부분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에도 시대 일본이 엄격한 기독교 금지와 쇄국 정책 속에서도 난학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물을 꾸준히 가까이 하며 이미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거기서 좀 더 알고 싶으면 한국어로 된 좋은 문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같은 맥락에서 시라이 사토시의 <국체론>도 참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휴가 때 긴자나 오모테산도, 좀 더 나아가 지유가오카나 시모키타자와에서 쇼핑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을 알고 싶은 분들이 읽으실 만한 책. 감동적입니다.

 

4. 고립의 시대

현대의 고독을 말한 사람은 많지만 그 고독을 이렇게 사회적/심리적/산업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분석한 책은 드뭅니다. 뭣보다 중요한 건 코로나가 끝난다 해서 사람들이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외로움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혹은 그 해결을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해 빛나는 인사이트를 주는 책. 거기다 나치, 트럼프, 아베의 성공을 설명해주는 외로움과 문명의 관계는 매우 설득력있습니다.

초반의 '뉴욕의 시간제 친구' 이야기부터 흡인력이 장난 아닙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너무 폭이 넓다(너무 많은 것을 고독과 고립감으로 해석한다?) 정도인데 그건 각자 알아서 새겨 들으시길. 

 

5. 고양이에 대하여

어떤 주제에 대해 '정말 당신이 이 주제에 대해 뭘 알긴 알아?' 라는 식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애묘인들이 넘쳐 나는 시대. 과연 고양이 기르는 분들은 이런 것까지 알까.... 싶은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고양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야생에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인류가 개를 길들인 기간이 고양이를 길들인 기간의 5~10배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애완' 보다는 '포획' 상태의 종이라는 것.... 등등. 필요에 의해서 읽은 책이지만 고양이를 키우시는 분이든, 아닌 분이든 매우 흥미로울겁니다.

 

6. 더 페이블

뭔가 우울하고 답답할 때를 위한 만화. 일본 전국구로 활약하던 살인청부업자에게 어느날 보스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오사카의 아는 야쿠자를 소개시켜 줄테니, 그 지역에서 당분간 숨 죽이고 살아라. 절대 티 내지 말고, 보통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야 한다." 반문이 허용되지 않는 절대 보스의 명령. 당연히 잘 수행하려고 하는데, 당연히 잘 안 되겠죠. 

문제는 한국에선 전자책으로밖에 발매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 만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전자책 정도는 살만 합니다.

 

7.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이 작가의 전작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고 대실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사이트라고 할 수도 없는 잡담으로 가득한 책. 그런데 그런 기대를 뺀 상태에서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니 재미와 상상이 솔솔. '데이터 사이언스 어디까지 왔나'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물론 오락성도 매우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아주 구라가 좋은' 책. 구라 속에서 쓸만한 이야기를 걸러낼 수 있는 사람에겐 참 유용한 책.

 

8. 감각의 미래

'아니 이런 책을 이제서야 보고...?' 라고 하셔도 할 수 없는, 이미 고전이 된 책. 소위 말하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너무나 뛰어난 가이드. 흔히 우리가 오감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감각들을 뇌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서부터 그 각각의 감각을 현대 첨단 과학은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대체하고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즉 메타버스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기관과 뇌의 '착각'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각종 실험과 새로운 기술을 통해 설명하는 대목.

물론 이 책이 나온 뒤에도 놀라운 발전이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겠지만, 역시 그건 각자 알아서 보충해 가시길. 제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9. 폴리나

바스티엥 비베스. 우연히 그림 한 장을 보고 빨려들듯 읽게 된 책. 회색의 사회주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폴리나가 츤데레의 끝에 있는 발레 선생님을 만나고, 재능을 인정받고.... 그렇게 자기 인생의 춤을 추게 되는 이야기. 쓸쓸하지만 군데 군데 훈훈하고, 그 어떤 젊었던 날을 되새겨보게 하는 만화.

만화가 두 편이나 올해의 책으로 뽑힌 것은 그만치 '진지한 책'을 안 읽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지금 저 표지에 나온 정도의 제한된 선으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빠짐 없이 표현해 내는 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비베스는 천재다'. 물론 이 책을 보고 나면 <염소의 맛>도, <내 눈 안의 너>도 읽게 됩니다. 당연히. 

 

10. 크래프톤 웨이

'아 얘가 그 쪽으로 가더니 이런 책을... ' 이런 생각 하시는 분들도 많을 듯. 사실 책을 선물받고 거의 1년 지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흥미진진. '개발, 디자인, 마일스톤, KPI, MAU' 이런 이야기를 배제하고 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의 현대 영웅서사더군요. 그런데 주인공은 2/3가 지난 다음에 등장하고, 책의 초반부에 대의를 위해 뭉친 군웅들의 운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 이건 스포일러라 차마 말할 수가). 소설적인 과장, 무협지적인 윤색 없는 담담한 서술이랄까. 

많은 이들은 역사가 그냥 숫자와 도표의 연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남들의 성공담은 그냥 우상향의 그래프라고 생각해버리곤 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 본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업적도 우상향 직선으로 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걸 알려주는 좋은 책, 좋은 서술. 많은 면에서 공감하고 감동.

 

11. 위어드

많은 뛰어난 분들이 극찬하시기에 속으로 의아했던 책. 아니 고등교육을 받은 진보적인 서구 남성들이 인류 문명을 이끌고 있다는 게 대체 뭐가 신기한 일일까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의 데이터 활용은 매우 놀랍습니다. 특히 한국에 대한 부분. 어떤 분야에서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정직성("당신이 유일한 증인인, 친한 친구의 범법 사실을 감춰주기 위해 당신은 위증을 할 수 있는가")에서는 최하위인 나라. 과연 이런 나라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거다 싶은 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아무튼 읽고 나면 뿌듯해집니다. 

 

12.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13세기 남송의 화가 이숭이 그린 <고루환희도(骷髏幻戱圖)>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상징성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해골은 작은 해골로 아이를 유혹합니다. 그 아이를 말리는 다른 아이는 누구며, 해골의 뒤에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다 보면 과연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오래 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부박한 것인가 하는 것은 대략 2000년 전에 확인된 것인데,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당신이 함부로 커피 한잔에, 소주 한잔에, 가벼운 실패 후에 '인생 뭐 있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온당한 일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는 책.

고루환희도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2020년에 비해 책읽기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연말. 책 한권을 봐도 필요한 부분만 보게 되고, 책보다 자료를 더 많이 보게 된 나날. 그래도 기를 쓰고 읽었다(?). 그중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꼽아 보니 12. 10권을 안 지키면 누가 따질 것도 아니니 그냥 소개

(드라마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2021년에 출간된 책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몇년도에 나왔든 2021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선정.)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조법종)

1884년 미 해군 소속 조지 포크 중위의 한반도 남부 여행기 번역과 그 해설.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개화파와 친분이 두터웠던 포크 중위는 한국에 대한 더 깊은 이해(물론 미 해군의 이해가 더 중요한 목적이었겠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여행을 떠났는데, 바로 그 개화파 인사들은 포크의 여행 도중에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역만리에서 정변에 휩싸인 우리의 포크는 어찌 될 것인가…. 정도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신기한 이야기. 이사벨라 비숍 여사와는 확실히 관점이 다르다.

넷플릭스 시대의 글쓰기 (패멀라 더글러스)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에서 드라마가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메인 작가 혹은 쇼러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자세한 해설서. 초판은 21세기 초에 나왔고 원제도 넷플릭스와는 1도 관련 없지만, 최신판에서는 넷플릭스 이후의 사례를 많이 소개했으니 저 제목도 아주 틀린 건 아님. 관심있으면 유용.

버터 (유즈키 아사코)

소설. 살인자로 몰린 여자와 그 여자와 인터뷰를 하고 싶은 여자. 음식에 관심이 넘치는 여자와 음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여자. 두 여자의 세계는 과연 만날까. 같은 여자라는 면에서 대동단결, 의기투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두 세계를 녹은 버터가 연결한다.

공기의 연구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에서공기라는 말은 한국에서 많이 쓰는분위기라는 말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대체 그럼 그 공기란 뭔가? 부제인일본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말에서도 읽을 수 있듯 그공기의 무게는 한국인이 느끼는분위기의 무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야마토 호를 마지막으로 출전시킨 결정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까지. 상당히 흥미롭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센델)

너무나 유명한 책인데 유명한 분들이 TV에서 이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앞부분 100페이지 이상 안 읽었구나’, 혹은 이 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 이상은 안 읽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 특히 한국 보수 언론이나 보수 계열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인용해 가며 이야기를 하는 건 누가 봐도 자충수인데, 그게 자충수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 걸 보면 한국이 신기한 나라인지도. 어쩌면 유명 정치인 가운데 그나마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이준석 하나 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분이 읽기 전에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훨씬 더 급진적인 책. 개인적으로 매우 공감.

혁명의 맛 (가쓰미 요이치)

맛으로 읽는 중국 현대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청조가 망하고, 황제를 위해 봉사하던 고도의 음식문화가 민간으로 퍼져나오며 형성되었던 20세기 초반의 화려한 북경 요리 씬은 중일전쟁과 혁명기를 거치며 파괴되어가지만 오히려 고위 공산당원들이 미식을 원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일본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중국의 음식 문화와 그 변화에 대한 이색적인 책.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묘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손정목)

1953. 전쟁이 끝난 수도 서울. 어떻게 도시를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 어디까지를 서울로 할 것인가, 워커힐이라는 호텔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한강과남서울의 관계 등등지금의 일상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낯선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담겨 있다. 해를 넘겨 이 책 시리즈는 모두 읽어보고 싶다.

 

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일본 문학 사상 3대 천재니 5대 천재니 하는 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낯선 작가. 천재라는 이름에 관대한 일본 문학계라는 점에서 그리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읽어 보고 매우 놀랐다. 창작의 뿌리를 고전에 두고 있어 제2의 아쿠다카와라는 말을 듣는지도. 번역된 작품 수가 매우 적어 아쉬움. 소년시절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내 <범 사냥>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이미 세계 최고의 미디어기업 중 하나였던 디즈니가 ABC, 픽사, 마블을 품에 넣고 진정 최강의 자리를 굳히는 과정을 지켜본 밥 아이거가 책을 썼길래 정말 디즈니만이 갖고 있는 뭔가 비밀스러운 프로세스가 담겨 있지 않나 했나. 알고보니 어떤 유능한 직장인의 고군분투기.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고, 인사이트도 넘친다. ‘창의력은 과학이 아니다같은 인사이트 넘치는 말씀도 많이 하심.

 

제비뽑기 (셜리 잭슨)

영미권 사람들에게 줄거리를 얘기해주면 108,9어 나 그 얘기 아는데라고 한다는 유명 단편 제비뽑기가 실린 셜리 잭슨의 단편집. ‘제비뽑기의 섬뜩함과 함께 지극히 예민하고, 지극히 치밀한 글쓰기가 사람을 잡아 끈다. 벗어나기 힘든 악마적 매력.

 

40일간의 남미일주 (최민석)

작년 연초. 뭔가 약간 우울하던 무렵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책. 남미의 절경과 재미를 만끽하는 와중에 끝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실수담과 후회. 탄식. 자학이 눈물없이 볼 수 없는 큰 웃음을 던진다. 특히 아르헨티나-브라질로 이어지는 신발 에피소드는…. 작가님. 장염일 때는 제발 맥주를 그만 드세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김영민)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이야기’, 애니메이션 월E의 뚱보 인간들,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생각난다. 인간의 욕망이란, ‘욕심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어야 욕심이 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책.

 

이밖에 2021년에 본 책 중 추천하고 싶은 책들은:

 

한국의 국보 (이광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진짜 프랑스(스페인)는 시골에 있다 (문정훈)

오늘부터 클래식 (김호정)

아무튼 떡볶이 (요조)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 (다카기 나오코)

 

자, 마지막으로 이 책을 빠뜨리면 안 되겠죠?

아... 읽은 책도 없는데 어떻게 10권이나 꼽지, 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쓰다 보면 꼭 10권이 넘어가게 되더라는. 이상하게 작년에도 막상 써보니 13권이었는데 이번에도 써 보니 15권이네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이 리스트는 너무나 순수하게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겁니다. 제가 1년에 책을 50권 100권씩 읽는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권위 없습니다.

물론 제게 <올해의 책>이 무슨 책인지는 너무나들 잘 아실 것이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고 익사이팅한 책입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실 듯...

아무튼, 본격적인 리스트는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트랜스휴머니즘의 현재와 미래 /이브 해롤드

2020년의 드라마로 단연 탑이었던 <이어즈 앤 이어즈>를 보신 분들에겐 트랜스휴먼이란 말이 낯설지 않으실 듯. 작가가 미치오 가쿠의 책을 읽었는지 육신의 제약을 딛고 하드디스크 안에 안주한 인간이 트렌드가 되는 근미래를 묘사했다. 개인적으로 2020년의 은근한 화두는 트랜스휴먼이었던 듯. 그 의미를 참 읽기 쉽게 풀이한 책으로, 이 책을 읽고 <이어즈 앤 이어즈>와 아마존 드라마 <업로드>를 보시면 개념 정리 끝. 상상력이 뭉클뭉클.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  /구정은 이지선

헬렌 켈러는 우리가 알던 그런 가엾은 장애인 소녀가 아니었다. 메건 마클은 그냥 왕실을 시끄럽게 만든 제2의 사라 퍼거슨이 아니었다. 그리고 산드라는 인간 여성이 아니었다. 앙겔라 메르켈이 아직도 독일인의 반성과 전체주의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지금껏 말하고 있는 것은 과거라는 것의 청산이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년에도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을 추천 리스트에 슬쩍 얹었는데, 구정은 작가의 시선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책값이라면 참 싸다.

 

 

 

위험한 생각들 /존 브록만 편

존 브록만이라는 놀라운 인맥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슈퍼 편집자(?)의 슈퍼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책. 100명의 석학들이 당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각자 그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예를 들어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문명의 발달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지성체들은 아주 시시한 일들에만 관심을 갖는 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멸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문명이 태어나 사라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내용으로 채워진 책. 어찌 보면 미친 책일 수도, 어찌 보면 책 100권을 읽는 느낌일 수도. 2007년 책이지만 아직 흥미롭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사실 한 저자의 책을 두 권 넣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개인적인 느낌으로 두 책은 결국 똑 같은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공부란 무엇인가가 표면적으로 공부인(?)’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면 앞의 책은 그 구체적인 예로 공자와 논어를 들고 있다. 공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입체적 조명이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평생 잊을 수 없을 한 줄이 남았다. 道之不行, 已知之矣

 

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르 꼬르뷔지에 같은 대가들이 동양 건축의 요소를 원용했다, 이런 얘기는 여기저기서 듣곤 한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이 책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통찰은 아무래도 '액자의 비유'다. 동양 건축에서 자연은 건축의 일부가 되고, 안방에 누워서도 장지문을 열면 앞산 뒷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럼 처마는 액자의 역할을 하고, 처마 안쪽의 단청은 그 자연을 바라보는 액자의 장식 역할을 한다는 얘기. 이런 인사이트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비밀의 계절 /도나 타트

어느 대학도시. 도대체 현실에서 쓸모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리스 고전 문학에 심취해 고전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는 폐쇄적인 학생 동아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선 서로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오고 가고, 마침내 그 결과는 비극으로 이어지지만 아직 끝은 멀었다. 밀접한 사람들 사이의 애정과 갈등 묘사는 러셀 웨스트브룩의 드리블 솜씨를 연상시킨다. 긴 소설이지만 책장이 엄청나게 빨리 넘어가는 책.

 

요리본능 /리처드 랭엄

원제는 Catching Fire. 인류학자가 음식에 주목해 온 것은 마빈 해리스 이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랭엄은 매우 좁은 주제, 불의 사용에 초점을 맞춘다. 찰스 다윈도 언어를 제외하면 아마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했다지 않는가. 불로 익힌 음식을 먹은 것이 문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다들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냈을지에 대해 이렇게 깊이있게 추적한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참고로 침팬지도 구운 고기와 날고기 중에서 구운 고기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염감이 흘러 넘치지 않는가?

 

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개인적으로 2020년의 소설. ‘플로리다라는 말 속에 깃든 낭만적인 태양, 긴 해변, 레게 뮤직과 모히또, 디즈니 월드 같은 이미지를 싹 날려 버릴 수 있는 단편집. 굉장히 좋았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그랬듯 플로리다는 어쩐지 낙원 같지만 한꺼풀 들추면 전혀 다른 곳이라는 비유로 쓰이는 느낌이다. 이 단편집 속의 플로리다는 파충류들이 또아리를 틀고, 태풍이 불고, 진흙과 모래 틈으로 발이 빠지고, 야생 표범이 밀림 속에서 눈을 빛내는 곳이다. 가장 치열한 삶의 공간이다. 여러 단편 중에서도 뱀과 파충류 사이에서 감정을 잃고 성장한 한 소년 이야기, <둥근 지구, 그 가상의 공간에서 At the round earth's imagined corners> 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내용상으로는 잘 짜여진 책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하나의 주제를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풀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그런게 문제가 아니고, 참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해준책이다. 특히 이 나라의 공적처럼 된 중년 남자로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쉽게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책. ‘양복 옷 태가 망가질까봐 전화기는 비서가 휴대해야 하는사람, KTX를 타도 자기 자리 앞에는 아무 것도 두지 않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모시는 방법에 대한 인수인계 리스트가 두 페이지나 되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노동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책.

 

나쁜짓들의 역사 /로버트 에반스

재미와 교양? ‘인간은 어떻게 해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등의 소재를 설득력있게 풀어 주는 책. 이런 식의 사소한(혹은 사소하지 않은) 악덕들이 인류의 문명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고, 때로 결정적인 발전을 이루게 했다는 내용의 책. 물론 대부분의 문명은 이런 사소한 악행보다는 보다 많은 인간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착취하려는 본격적이고 거대한 악의에 의해 더 많이 발전했겠지만, 이런 식의 시선을 슬쩍 바라보는 것도 상당한 지적 포만감을 준다.

 

화이트호스 /강화길

2020년의 한국 소설. 2019년 박상영을 제외한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에게 많이 실망했던 터에 단편 <음복> 한 편을 읽고 이야, 이 작가는 진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단편집 <화이트 호스>를 읽고 나니 이 작가의 본진은 고딕 소설. 사실 몇몇 작품들은 그냥 배경만 한국으로 옮겼을 뿐 그냥 서구의 낡은 성을 배경으로 한 인물과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느낌도 든다. 그런 자신의 본진에서 나와 한국과 화해하려는 첫 본격적 시도가 <음복> 아니었을까. 단편집을 읽고 나니 이 작가의 다음 행보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갈라테아 2.2 /

1990년대의 시선으로 인공지능을 상상했던 결과들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로 나와 있다. 그걸 문학에 적용시켜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사실 이 소설의 리뷰를 썼다가 저장을 하지 않아 날려 먹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영화 ‘Her’의 원작 같은 느낌. 물론 이 속도로 인공지능을 교육하다간 어느 세월에 교육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고색창연하고 비장한 느낌에 스윽 빠져드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P.S. 마지막 대사는 고전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따 온 것.

 

일 잘 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말합니다 /박소연

요즘 기업에서는 어떤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다 얻어 걸린 책. 정말 기업내/조직내 커뮤니케이션이란 어떤 것인가를 간명하게 설명하는 책. 물론 현실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이 실려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읽어 두면 도움이 될 책. 특히 선배들이 내 말을 도무지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 고민하는 젊은 사회인들이 읽으면 좋을 듯.

 

내친김에 2019년에 읽은 책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10권을 골라 보기로 했습니다. 고른 이유는 제각각. 어떤 책은 재미있어서, 어떤 책은 유익해서, 어떤 책은....

뭐 아무튼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 열권인데 제대로 읽은 책이 이 10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본 책들 중에는 음식에 대한 책(이건 왜 그런지 다들 아실듯), 그리고 이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에 대한 책들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돈을 벌자'는 책들은 좀 무의미한 것 같구요, 지금 이 세계가 변화하는 방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는 책을 찾고 싶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10권입니다. 순서는 무의미.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한국 소설을 거의 보지 않은 한해였지만 그중 발군.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소재가 새롭고 필치는 재기발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비슷하게 읽히는 장류진의 첫 단편집도 처음 발표된(책 수록 순서 아님) 두 개의 단편은 좋았지만 나머지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수필 같았다는 점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을 더 인정하게 된다.

 

산 자들 (장강명)

소설이라기에는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아무튼 좋았던 책. 여러 가지 입장을 볼 수 있어서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다만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에서 현실이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 더 치열하게 파고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

안녕 인간 (해나 프라이)

알고리듬을 왜 한국에서는 알고리즘이라고 쓰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고리듬이라는 것의 실체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는 책. AI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지나친 두려움도 사실은 알고리듬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마음의 미래 (미치오 가쿠)

마음이란 내 것인가? 내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나인가, 나의 뇌인가? 나는 앞으로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해도 죽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까?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들. ‘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첨단 기술의 발달 위에 놓고 설명해주는 책.

 

컬처 쇼크 (존 브록만)

미래의 문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문화란 사회와 어떤 관계로 지속될 것인가? 브라이언 이노가 리처드 도킨스의 밈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 음악의 히트 과정을 설명하는 등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책. 존 브록만이 일련의 책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가 정말 놀랍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굽시니스트)

아편전쟁에서 한 중 일 3국이 외세와 부닥뜨리면서 1840년대 이후 풍운의 19세기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 정말이지 칼날 끝에 서서 이를 악물고 뛰어야 했던 시기에 상황을 몰랐던 조상님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피어나기도 하지만, 일단 무엇보다 너무나 보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하는 책.

숨(테드 창)

이 SF의 신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찬사가 필요할까. 사실 중편으로 이미 출판됐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의 통찰이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감춰진 엄청나게 폭넓은 사고의 흔적을 또 어디서 발견할 수 있으랴. 지존에게 경의.

 

앞으로의 교양 (스가쓰케 마사노부)

무엇이 달라질까에서, 어떤 점을 다르게 살아야 할 것인가 놀라운 인터뷰. 특히 교양부서 담당자로서 생각의 방향이 달라진다.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역시 다르게 보기의 일환으로 중요한 책. 세계는 성장하고 있고,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곤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셰일가스와 미국없는 세계 (피터 자이한)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두 권의 책. ‘정통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사마외도 취급을 받는 책이라고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일본의 식문화사/ 음식의 문화를 말하다 (이시게 나오미치)

둘로 나누기 쉽지 않은 두 권의 책. “개발도상국에서는 음식문화에 대한 연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뭔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나 음식의 맛에 관심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음식의 연원과 발전 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일본은 그 부분에선 한국보다 30년 정도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고르다 보니 13권이네요. 굳이 빼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밖에 좋은 책들이었다는 생각을 주는 책들은

교수처럼 문학읽기 (토마스 포스터)

생각을 빼앗긴 세계 (프랭클린 포머)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오후)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피로 물든 방(앤젤라 카터)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

등입니다. 특히 <피로 물든 방>은 페미니스트가 쓴 새로운 동화^^ 라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웠고 <사라진 남겨진 버려진>은 근래 읽은, 현직 기자가 쓴 책 중에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유능한 사진작가와 팀을 이뤄서 같이 책으로 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1년동안 읽은 책을 정리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한번 해보고 나니 이것도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복많이들 받으시길.^^

그것은 어느 한 순간, 정재승 교수님의 신작 '열두 발자국'을 읽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따끈따끈한 신간이죠.

제목대로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일곱번째 발자국, 즉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는 여러분들이 어디선가 익히 보셨을 유명한 그림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네. 많이 보시던 그림이죠.

살바도르 달리 의 1951년작,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입니다.

(책과 제목을 다르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더 보시면 알게 됩니다.^^)

컬러로 보시면 이런 그림입니다.

 '열두 발자국'에서는 이 그림을 창의적 발상을 설명하는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그려 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우리가 많이 보던, 정면에서 보는 십자가와 거기 매달린 예수님을 그릴 겁니다. 화가들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와 예수를 그린 수만장의 그림 가운데 99% 이상은 아마 정면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일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혁신적인 구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 구도는 하나님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 높은 곳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을 형상화 한 듯한 구도인 것이죠.

상당수 해석자들은 이 구도가 바로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어제 처음으로 이 그림의 제목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Christ of Saint John of the Cross. 묘한 제목입니다. 한글로는 뭐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망설이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 저게 무슨 뜻인가 검색해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다짜고짜 영어로 세인트 존(St. John), 즉 성 요한 이라고 하면 1차적으로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을,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세례 요한 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요한이라는 이름은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넘쳐 나기 때문에 '성 요한'은 한두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 그림 제목에 나오는 성 요한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듣도 보도 못했다는 것은 제 기준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저 그림 제목에 나오는 성 요한은 바로 이 스케치를 남긴 사람의 이름이고, 카톨릭에서는 매우 유명한 성자였습니다. 이 분의 이름은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 Saint John of the Cross' 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님이 저 스케치를 남긴 것은 대략 1574~1577년 정도로 추정되며, 그 당시에도 '아니, 예수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다니!'라는 시선은 대단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십자가의 성 요한' 님의 유물이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소중한 보물로 간직되어 왔고, 어느날 저 스케치를 본 살바도르 달리가 저 구도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유명한 십자가 그림을 남긴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십자가의 성 요한' 님입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이 분은 1542년에 태어나 1591년에 돌아가신 스페인의 성직자입니다.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오랜 전통의 카톨릭 교단은 개혁의 필요성에 맞닥뜨리게 되었죠. 마침 그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 로욜라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은 요한님은 카톨릭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Carmelite) 수도회를 일으키게 되고... 뭐 다양한 업적을 남기시고 카톨릭 교회의 성인에 오른 분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분은 왜 '십자가의 요한 John of the Cross'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요? 혹시 저 유명한 '위에서 내려다 본 예수' 스케치 때문에? 이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일단 밝혀졌습니다. 이 분이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의 요한'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것이 1568년. 저 그림을 그리기 전의 일입니다. 그럼 혹시 십자가에 매달려서 순교라도? ...아닙니다. 이분은 단독(丹毒)에 걸려서 사망하셨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십자가의 요한의 일생을 소개한 글 에 답이 있었습니다. (알아보면 볼수록 십자가의 요한, 대단한 분입니다.)

원문은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audiences/2011/documents/hf_ben-xvi_aud_20110216.html 

For several months they worked together, sharing ideals and proposals aiming to inaugurate the first house of Discalced Carmelites as soon as possible. It was opened on 28 December 1568 at Duruelo in a remote part of the Province of Avila.

This first reformed male community consisted of John and three companions. In renewing their religious profession in accordance with the primitive Rule, each of the four took a new name: it was from this time that John called himself “of the Cross”, as he came to be known subsequently throughout the world.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순수했던 원시 기독교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십자가의 요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분이 모셨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역시 스스로 '예수의 테레사 Teresa of Jesus' 라고 불렸다니, '십자가의 요한'과 손발이 척 맞는 작명이네요.

결론적으로 저 그림의 제목은 한글로 하자면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라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글에 밝은 사람들에겐 뭔가 어색한 제목이지만, 저 제목이 붙은 이유를 생각하면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쓰고 나서 다시 한번 후회되는 것은...

남들은 12회나 기념비적인 명강의를 해서 이런 책까지 쓰고 있는데 너는 지금 이 시간에 블로그에 이런 글이나 쓰고 혼자 씩 웃고 있다니 이게 참 할 말이냐... 라는 자괴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포스팅도 이 글을 누가 읽고 공감해 주리라는 기대보다는, 대체 저 그림 제목은 무슨 뜻일까,,, 를 알아내는 데 쓴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기록이라도 남겨 두자는 차원인 것이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읭?) '열두 발자국'은 참 읽으면 읽을 수록 대단한 책입니다.

대체 뭐 하자는 짓이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구글 어스를 개발한 존 행크 가 이걸 어디다 써먹을까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결국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포켓몬 고 였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톰과 비트의 결합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얼마전 "만약 아인슈타인에게 자동차 운전자가 길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라는 프로젝트를 줬다면 결코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글을 읽고 그게 그렇구나 싶었는데, 이 이야기와 묶어 보니 이런 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무용(無用)의 대용(大用) 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려면 빅 데이터가 필수적인데 한국은 빅 데이터는 커녕 데이터 자체가 없다... 이 역시 평소 생각했던 문제지만 이 책에서 읽고 보니 더욱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공허함의 뿌리와, 그동안 빅데이터라는 이름을 걸고 혹세무민을 시도했던 몇몇 분들의 얼굴이 새삼 스쳐가는. (왜 그런지는 책에서 확인하시는 걸로.)

아무튼 '결정장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매우 친숙한^^)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에서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까지 읽고 보면, 과연 한 사람이 이 방대한 내용을 다 건드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경이적인 사고와 지식의 스펙트럼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술은 안 드시지만) 이 분을 보고 있으면 혹시 이미 집안에 대필 인공지능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곤 합니다. 대략 1.4KG 내외, 누구나 비슷비슷한 크기의 뇌인데 어디서 이런 차이가.

(지금 막 뭐라고 항변하시려는 분들을 위해 이 책에는 '얼굴이 크다고 뇌가 큰 것은 아니다'라는 방어벽이 쳐져 있습니다. 네. 철벽이죠.)

조금 이상한 내용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책, 생각의 자극이 필요하신 분들-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거의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만-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그리고 이런 책은 가능하면 남들보다 빨리 읽으시는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써먹고 싶어지는 이야기가 그득하거든요. 어젯밤 술자리에서 상무님을 감탄하게 했던 김대리 의 구라가 이 책에 나오는 얘기라는 걸 오늘 알고 나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시겠어요. 그러니까...

 

 

P.S.2.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이 글을 읽는 동안 저는 줄곧 이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번째로 정답을 맞추시는 분에게는 제가 맛난 밥 한끼 정도 사겠습니다. 응모는 여기 쓰시든, 페북에 댓글로 다시든, 트위터에 다시든 알아서. (넌센스 아님. 의외로 쉬울지도...) 노파심에서 단서 하나 달자면, '음반 관계자' 관련은 답이 아닙니다.

키워드 몇개를 조합하시는 것이 포인트.

그리고 상품으로 방금 나온 '차이나는 클라스' 1권 단행본도 추가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책도 따로 리뷰가 있을 겁니다.)

자, 분발하세요.^^

 

 

** 요즘 나오는 '열두 발자국'에는 본문의 내용이 수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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