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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발라드 가수들도 데뷔하는 데 2-3년 이상 걸립니다. 노래 실력을 다듬느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일단 '외모'를 데뷔하는데 맞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형수술도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죠. 수술 한번에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을 여러 차례 성형해 조각같은 얼굴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수의 힘은 역시 가창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노래를 하면 듣는이의 간장이 다 녹아 내리고, 듣는 순간 팬이 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똑같은 소리를 내도 어떤 사람은 그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감정이 다 펼쳐지는데 다른 사람은 목소리 곱고 음정이 정확한데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명가수는 타고 나기도 하지만 환경의 영향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굴곡진 삶을 산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이런 주장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가수로는 위 사진에 나오는 빌리 홀리데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늘 말씀드리지만 주말은 재방송^^)




빌리 홀리데이는 1915년 태어나 1959년 숨을 거뒀습니다. 할아버지는 형제가 16명이나 됐던 버지니아의 노예였고, 어머니는 홀리데이를 낳았을 때 겨우 13세였다고도, 16세였다고도 합니다.

홀리데이는 볼티모어의 빈민가에서 성장했고 부모는 그녀가 세살때 결혼했지만 곧 이혼해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11세때 성폭행을 당했고 이 일을 계기로 무단결석 증세를 보여 가톨릭계의 교정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1928년 뉴욕으로 이주해서도 다시 이웃집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합니다.

이런 전력 이후 그녀는 한때 창녀로 일했고, 옥살이도 경험합니다. 그래도 타고난 가창력 때문에 한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자 청중들은 눈물을 흘렸고, 이로 인해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뉴욕의 수많은 클럽들을 통해 입소문을 충분히 남긴 뒤에 1935년부터는 음반으로 빛을 보게 되죠.

이후의 삶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습니다. 재즈계에서 불멸의 여성 보컬로 각광받았지만 이미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1959년 죽기 직전에도 마약 소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결국 간경화 때문에 4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죠. 하지만 죽기 1년 전인 1958년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Lady in Satin> - <I'm a fool to want you>가 수록된 - 을 내놓을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 건 우리나라의 다른 가수 한 분이 생각나서입니다. 예전에 거기에 대해 써 둔 글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홀리데이의 사연과는 전혀 다르지만, 이 분의 사연을 알고 나면 어떻게 해서 그런 절창이 가능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편의상 이니셜을 사용했지만 짐작하기 그리 어렵진 않으실 겁니다.




제목: 어떤 사람이 가수가 되나

S씨의 아버지는 판소리 중고제(동편제 서편제 외에도 있다)의 명창. 고모는 승무의 대가였다. S씨를 낳을 때 아버지는 이미 60대였지만 그의 제자였던 어머니는 갓 스무살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S씨를 데리고 개가를 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사내아이는 내주고 S씨와 함께 또다시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늘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눈물짓는 어머니와 단 둘이 자란 S씨는 매우 병약한 아이였다. 급기야 중학교때에는 심장병으로 2년 정도 학교를 쉬게 된다. 그 뒤로도 수시로 병원 신세를 지느라 학교 생활이나 교우관계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도 어머니가 S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오랜 병끝에도 가정교사(흔히 S씨의 첫 히트곡의 주인공이라고들 한다)를 둘 수 있었던 걸 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매사 우울하고 예민한 성격이던 그가 1979년 10월, 감히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던 거물급 인사가 바로 눈앞에서 심복에게 사살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 지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S씨는 이미 스타가 된 뒤에 세번의 결혼을 했다. 첫번째 남편은 역술인. 그는 S를 보자 마자 "우리는 몇 세기 전부터 부부의 연으로 맺어진 사이"라며 못을 박아 버렸다. S는 그의 그런 태도에 감히 반항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 없이 자란 S는 남자를 만날 때 항상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를 찾았다고 한다. 권위있는 남자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남편은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파경으로 이어졌고, 결혼 생활에 관심이 없던 남편은 아들을 쉽게 내줬다. 아이를 기르며 살던 S는 이번엔 진해 출신의 호걸풍 사업가와 재혼을 했다. 매사 순조로워보였다. 딸 아이 하나를 낳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사업가라기보다는 어둠의 세계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알고 보니 본처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같이 살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딸 아이는 내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감히 맞설 수 없었던 S는 늘 딸 아이가 눈에 선했다. 그래서 '아이야'라는 노래도 만들었다.

세번째 남편은 방송사 PD. 이미 이혼 경력이 있고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던 PD의 남자다운 리더십에 S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결국 S가 PD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했다.

그러는 사이 두번째 남편이 사업도 망하고, 병들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남편은 딸을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S는 세번째 남편에게 "딸에게 그동안 못한 엄마 노릇을 해 주고 싶다"며 딸을 미국으로 데려가 1년간 함께 살면서 음악을 가르쳤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자 두번째 남편으로부터 "딸이 너무 보고 싶으니 좀 내려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개통한지 며칠 안 된 KTX를 타고 딸이 내려가던 날, 두번째 남편은 마중을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절명했다.

S는 현재 부모가 엇갈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다. 다행히 세번째 남편은 절세호인이라 그의 굴곡 많은 삶에도 평화가 깃들었다는 평이다. 하지만 S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면,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겹겹이 쌓인 한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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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목소리에서 뿜어나오는 겹겹이 싸인 한에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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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의 송화도 장님이 된 뒤에 그 한이 맺혀 나오는 목소리가 더욱 절창으로 꼽혔다고 하죠. 유독 맹인 명가수들이 많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한 작용을 하는게 아닐까요.

하긴 명배우 중에도 인생에 고달픈 역정이 담긴 사람들이 많이 있죠. 작가들 중에도 남다른 가족사를 가진 분들이 많은 걸 보면 '한'이라는 것이 창작력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 작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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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우를 여왕으로 인정하기까지  (35) 200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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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가끔 이니셜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글에는 이니셜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 보면 누군지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제가 만나 본 수많은 여배우들 가운데 이 분만큼 '여왕'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왕이나 여왕,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본래의 제목은 'K, 그녀를 여왕이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어 보고 나시면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2001년 쯤 있었던 일입니다. 


"따로 가서 한잔 할래요?"

만약 당신이 이런 메모를 미모의 톱스타로부터 받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렇다. 이 이야기는 누구라도 한번쯤 꿈꿔봤을 만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200*년, 한 사극이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인기를 모으고 있을 때의 얘기다. 방송사는 신이 나서 제작진을 치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시끌벅적한 행사를 마치고 방송사 고위 간부들과 몇몇 기자들, 작가들과 일부 주연 배우들이 여의도에서 따로 자리를 벌였다. 흥이 난다기보단 지나치게 격식이 앞선 따분한 술자리였다.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K가 슬며시 손을 뻗어 성냥갑 하나를 쥐어 주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던졌다. 눈빛이 0.1초나 스쳤을까. 못 견디게 궁금해진 기자는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성냥갑을 펼쳤다. 성냥갑 안쪽의 흰 속껍질에는 '따로 한잔 할래요?'라는 말과 함께 한 대형 가라오케 이름과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참고로 핸드폰은 있었지만, 문자 기능이라는 것이 아직 나오기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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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자는 학창시절 K가 출연하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그와 안면을 튼 적이 있었다. 취재하면서 몇 차례 옛 추억을 되새기기도 했고 현장에서 다른 기자들보다는 친근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그저 그런 정도. 그런 상황에서 기자에게 주어진 이 성냥갑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누가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자리로 돌아온 기자는 K의 눈빛에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바보같이 헤벌쭉 웃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K도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가슴이 콩당거리고 뛰었다. 술자리에 10여 명의 사람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그와 의사소통을 했다는 쾌감은 매우 컸다. 술자리가 파하자 기자는 즉시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달렸다. 꽤 늦은 시간이라 약속 장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구에서 'K씨가 예약한 방'을 찾았다.

앞장선 웨이터가 문을 열 때 방안에서 여러 사람의 웃음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방을 잘못 찾았다'는 것이었다. 방안에는 적게 잡아도 30명은 돼 보이는 남녀가 앉아 있었다. 60여 개의 눈동자가 내 몸에 꽂히자 술기가 확 달아났다. 입구 쪽에 앉은 한 사람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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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금방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기자분이잖아. 몰라?"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누나한테 얘기 듣고 오신 거죠?"

그러니까 방을 잘못 찾은 건 아니었다.

"누나한테서 좀 전에 전화 왔어요. 곧 도착할 거래요. 먼저 저희랑 한잔 하고 계시죠."

그들은 '제작부', 즉 촬영ㆍ녹음ㆍ미술ㆍ조명 등의 스태프 중 막내급에 해당하는 친구들이었다. 흔히 퍼스트ㆍ세컨드ㆍ서드 등 숫자로 불리는 어시스턴트들은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박봉에 24시간을 근무하는, 육체적으로는 가장 혹사당하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축하연도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었지만, 그런 그들을 누군가는 챙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K와 함께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따로 회식을 해 왔다고 했다. 이 자리에 K 이외의 다른 배우나 방송사 간부, 제작진의 우두머리들이 온 일은 없었다. 아무 힘도 없는 이들에게 술을 사 봐야 '누나'라는 친근한 호칭과 존경 외에 K가 얻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매달 적잖은 개인 돈을 써 가며 스태프의 노고를 위로해왔던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짧지 않은 경력이지만 어떤 배우도 이런 일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그 전에도, 그 뒤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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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도착했다.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들이 다시 집으로 데려가려 찾아온 큰누나를 만난다 한들, 그보다 반가운 환호성이 터지진 않았을 듯 싶다.

잠시 후 기자는 이런 대단한 일은 결코 돈이나 배포만으론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 자리의 30여명과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폭탄주로 건배를 했다. 물론 전부 원샷으로.

이 감동적인 배포, 감동적인 주량. 그 광경을 지켜보다 기자는 어느새 의식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도 MBC TV <문희>가 방송됐다.  그는 나이를 잊은 듯 팽팽하고 아름답다. 과연 그의 젊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혹시 그 엄청난 주량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전생에 어느 나라 여왕이었을 것이 분명한 그 카리스마에서 온 것일까. 확실히 강수연에겐 대한민국의 다른 어떤 배우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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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 보실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분을 직접 만나 보시면 누구라도 여왕으로 인정하고 싶어질 거라는 데 한표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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