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 결혼했어요'는 당연히 다르죠. 이 프로그램이 발을 딛고 있는 건 아무래도 가상현실이니까요. 이 쇼의 생존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쇼를 철석같이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만큼, 프로그램 안에서 달달한 연애를 하고 있는 남자가 사실은 따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있다는 것 만큼이나 '확 깨는' 일은 또 없을 겁니다. 안 그래도 이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부터 연출진과 기자들 사이에선 이런 얘기가 충분히 오갔기 때문이죠.
"출연자 중에서 누가 열애설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절대 그런 일은 없게 해야죠."
하지만 그 우려하던 일이 이번에 일어났고, 누구나 '이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속으로는 알고 있었겠지만, 이제부터 '우결'을 보는 눈은 달라질 겁니다. 제작진은 즉시 정형돈-태연 커플을 퇴장시켰지만 이제는 그게 문제가 아닐 겁니다. 안 그래도 시청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우결'을 지탱하고 있던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졌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예전에 '우리 결혼했어요' 가 처음 화제를 일으킬 때 썼던 글로 넘어갑니다. 새로 글을 써도 되겠지만, 어차피 지금부터 하려던 말도 그 때 이미 했던 말과 거의 흡사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사태는 '우결'이 시작하던 지난해 5월에 이미 예견됐던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 대목에서 질문을 해 봅니다. 리얼리티 쇼는 정말로 리얼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리얼리티 쇼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서바이버'나 '배철러' 같은 리얼리티 쇼에서 출연자의 상당 부분은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믿는 냉소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쇼의 진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죠.
물론 '우승자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든가 하는 정도까지 미리 다 짜여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배철러'같은 경우에는 1위로 뽑힌 여자와 남자 주인공이 실제로 결혼하는 일도 있죠. 하지만 이런 리얼리티 쇼에서 가끔씩 악역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작설'이 믿고 싶어집니다.
누구라도 잘 보이고 싶을 게임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건 다른 보상을 약속받고 하는 행동일 거란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죠. 그리고 리얼리티 쇼를 표방하는 '심플 라이프' 같은 쇼에 나오는 것처럼 패리스 힐튼이 저능아일 거라고는 절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리얼리티 쇼인 '밀착취재, 스타의 신혼(Newlywed)'에서 '참치는 물고기가 아니라 새'라고 주장해 화제가 됐던 제시카 심슨도 쇼가 끝난 뒤 "이 쇼는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쇼 아니냐"며 자기를 바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제목에 리얼리티가 들어간다고 다 사실은 아닌 겁니다.
그리고, 최소한 미국의 리얼리티 쇼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이 출연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래야 진짜 리얼리티 쇼겠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리얼리티 쇼'라는 간판을 내걸고 연예인들이 출연합니다. 말하자면 '연기가 직업인 사람들'을 내놓고(가수도 포함됩니다. 가수는 노래가 곧 연기죠) 그걸 믿어달라고 하는 셈인데, 그걸 또 악착같이 믿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 걸 보다가 쓴 글입니다.
[송원섭의 두루두루] "이건 현실이 아니야!"
1938년. 미국 뉴저지주가 발칵 뒤집혔다. 라디오에서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미국을 공격하고 있다"는 아나운서의 급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 물론 이건 진짜 뉴스가 아니었고, 뒷날 '시민 케인'을 내놓은 천재 영화감독 오손 웰스가 H.G. 웰스의 SF소설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을 각색한 실감나는 라디오 드라마였다.
방송극 중간 중간 여러 차례 '이 방송은 실제가 아니라 구성된 드라마'라는 고지 방송이 나갔고, 심지어 광고도 끼어 있었지만 속은 사람들은 그런 건 고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부분만을 들었기 때문이다.
뒷날 미디어 연구자들은 이 사례에서 '매스컴은 사람들에게 탄환이나 피하주사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강효과이론을 주창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사건의 교훈은 다른 데 있다. '사람들은 미디어에서 무엇을 보여 주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쪽이다.
바로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우리 결혼했어요' 코너 얘기다. 남녀 네 쌍이 각각 둘만의 공간에서 밤을 지새며 나누는 '결혼 역할극'이 이 프로그램의 실체지만, 여기에 열광하는 여성 시청자들에겐 마지막의 '극', 혹은 '역할극'이라는 부분은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예전부터 드라마 속 커플들의 희로애락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열혈 시청자들은 많았지만, '우결'의 경우는 또 다르다. 이 프로그램에는 이들이 실제로 결혼했거나,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안전판이 드라마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열혈 팬들은 이런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출연자들이 이런 상황에서의 연기에 매우 능숙한 전문가들이라는 사실도 그냥 무시된다.
출연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 통해 최고의 '훈남'으로 떠오른 알렉스가 음반 준비를 위해 이 코너에서 빠졌을 때, 시청자들의 반응은 마치 알렉스가 파트너 신애를 차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라도 한 듯 아우성 일색이었다.
문득 오래 전 사무실에서 받은 전화 한 통이 생각난다. 기운 빠진 목소리의 한 여자가 당시 인기 절정이던 배우 H의 전화번호를 묻는 내용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사기를 당하고 식구들이 병이 있는데 전부 길에 나앉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H씨의 전화번호가 필요할까. "도와주실 것 같아서요." 여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희 사연을 알면 꼭 도와주실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리고 싶어요."
최신 미디어 이론들은 대부분 '매스컴에 의해 섣불리 휘둘리지 않는 똑똑한 정보 수집자'로서의 대중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이건 연기야. 실제가 아니야'라는 말을 무시하고 방송이 주는 판타지에 푹 빠져 있는 시청자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에겐 누가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줄지 궁금하다. (끝)
혹시 마지막의 빨간 알약 얘기에서 '이게 무슨 소린가' 하신 분들은 없겠죠.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개의 알약을 내밉니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이 상황이 모두 꿈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매트릭스가 주는 환상 속에서 잘 살게 되죠. 하지만 빨간 알약을 먹으면 꿈에서 깨고, 잔혹한 현실을 맛보게 됩니다.
물론 바로 뒤에도 나오지만 모피어스와 함께 싸우는 전사들 중에도 '차라리 그때 파란 알약을 먹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하죠.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아무튼 이 프로그램의 팬들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현실과 이 프로그램 내용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해, 알렉스가 새 앨범 준비를 위해 '신애와의 신혼 생활'을 포기한다고 발표하자 아쉬움의 함성이 일었죠.
하지만 알렉스가 군에 입대하는 성시경의 뒤를 이어 6월 초부터 라디오 DJ를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이 아쉬움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엄청난 악플이 달리기 시작한거죠. 물론 그 수가 절대 다수는 아니겠지만, 알렉스의 소속사 쪽에선 경악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팬들은 '어떻게 DJ할 시간은 있고, 신애와 달콤하게 속삭일 시간은 없느냐'는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스의 죄(?)라면 너무도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한 죄겠군요. 만약 이 대목에서 알렉스가 따로 사귀는 여자친구가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 대목은 지난해 5월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정형돈- 저 위 사진을 보니 심지어 재혼이었던 - 이 이 가정을 현실로 만든 것이죠. 그런데 최근 결혼 발표를 한 신애는 과연 저 때 '그분'을 사귀고 있었을까요, 아닐까요. 그것도 궁금해집니다.^^)
중간에 예화로 들어간 전화는 제가 직접 받은 거였습니다. 사연은 위에 적은 그대로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분은 무척이나 절박해 보였습니다. 도저히 매니저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않을 수 없더군요.
과연 그 뒤로 진짜 도움이 갔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런 식의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이미지가 좋은' 스타들에게 직접 전달되기 시작한다면 그 또한 당혹스러운 일이겠죠. 아무튼 재미있는 오락 프로그램으로 '우리 결혼했어요'를 소비하시는 분들에 대해선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서, 현실과 방송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분들은 빨리 주변 분들이 깨워주셔야겠죠.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단순한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점점 똑똑한 정보 추구자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 정론인데, 21세기에도 이런 판타지에 빠져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참 놀랍기만 합니다. 이래서 사람은 알 수 없는 존재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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