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의 모습에서 '세련된 영국제 스파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건 영 아쉬운 부분입니다. 비록 왕년의 선배 007들은 이제는 서민용 대출 광고나 상조 광고에 나올 정도로 노장들이 되어 버리셨지만 말입니다. 아랫 글은 '카지노 로열'때 쓰여진 글입니다만, 대부분은 지금도 유효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007이 본 시리즈를 모방했다든가, 다니엘 크레이그에게서 션 코너리의 냄새를 느낄 수 없다든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수많은 논의가 있었고, 본 시리즈야말로 결국 고전 007 시리즈에서 많은 부분을 모방했다는 것(엄밀히 따지만 제이슨 본, J.B.라는 이니셜부터 이미 대놓고 베끼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이언 플레밍이 그려내고 있는 원작 소설의 본드는 다니엘 크레이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 등이 Young 님을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지적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건질 건 이언 플레밍과 다니엘 데포의 공통점 정도...? 아무튼 '일요일은 재방송' 시리즈입니다.
[송원섭의 두루두루] 진짜 007을 돌려다오
007 제임스 본드와 로빈슨 크루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영국 작가의 유명한 주인공'이라는 대답은 5점. '피어스 브로스넌이 맡은 적이 있는 역할'이라면 8점 쯤 된다. 10점짜리 대답은 이 둘에다 '전직 첩보원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추가되어야 한다.
007 시리즈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이 2차대전 당시 진짜 영국 첩보원으로 활약했다는 건 상식이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데포가 영국 첩보기구의 창시자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명예혁명으로 뒤숭숭했던 17세기 말 윌리엄 3세의 편에서 '영국의 적'들과의 첩보전을 주도했다.
(다니엘 데포)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영국제 스파이'의 장구한 역사를 짚어 보자는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한발 건너 있는 영국은 오래전부터 군사력보다는 외교력과 정보력으로 균형자의 위치를 지켜왔다.
이런 전통을 대변하듯 007로 대표되는 영국제 스파이들은 깔끔한 의상과 침착하고 우아한 태도,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이미지를 굳혀 왔다. 프랑스인 쥘 베른이 쓴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나오는 영국인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의 느낌 그대로다.
(이언 플레밍입니다.)
하지만 007 시리즈 최신작 <카지노 로얄>은 이런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새로 발탁된 제임스 본드 역할의 다니엘 크레이그는 우아하지도, 여유롭지도 않다. 사건이 닥치면 일단 몸으로 밀어붙인다. 유머도 모른다. 당연히 플레이보이도 아니다. 오히려 순정을 바치다 당하기도 한다.
이번 변화는 궁여지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007 시리즈 제작진이 피어스 브로스넌을 은퇴시킨 이후 캐스팅난에 시달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멜 깁슨, 조지 클루니에서 주드 로를 거쳐 제라드 버틀러까지 이들이 물망에 올렸던 수많은 후보들을 거론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다. 수많은 진통 끝에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거친 용모의 배우가 선택됐고, 거기 맞춰 새로운 본드 상이 탄생했다.
결국 <카지노 로얄> 자체는 나름대로 완성도있는 작품이 됐지만 골수 007 마니아들로부터는 '진짜 본드를 돌려달라'는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크레이그에게선 션 코너리나 로저 무어의 향취를 전혀 느낄 수 없는데다, 본드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감초였던 비밀병기 전문가 Q도, 국장 M의 비서 머니페니도 등장하지 않는 본드 영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콜리스는 이번 제임스 본드에 대해 "훌륭한 몸은 갖고 있지만 영혼은 없다"고 혹평했다.
일리가 있다. 몸으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 보고 싶으면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나 빈 디젤의 <XXX>를 보면 된다. 전반부의 맨몸 추격전이 멋지다면 프랑스 영화 <13구역>이나 <야마카시>를 볼 일이다. 이런 주인공들이 널렸는데 대체 왜 제임스 본드가 후배들의 흉내를 내 가면서 이미지를 바꿔야 할까. 이런 부분에 대해 한국 관객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 지 궁금하다. (끝)
피어스 브로스넌이 나온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별 재미는 없습니다. <로마 Rome>에서 섹시한 모습을 과시했던 폴리 워커가 나온다는게 인상적인 정도.
다니엘 데포의 경력이 궁금하신 분은 http://en.wikipedia.org/wiki/Daniel_Defoe 나 콜린 윌슨의 <잔혹>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가지 얘기가 있었지만 저는 본드 캐릭터의 원형은 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의 데이비드 니븐입니다. 원작에 그려진대로 어떤 난국을 맞아도 절대 흥분하거나 판단력을 잃지 않고, 정확한 판단으로 태평스럽게 행동하는 영국 신사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낸 명배우였죠.
물론 나중에 등장한 진짜 본드들은 훨씬 더 당당한 체구의 미남들이었지만, 이런 느낌들은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조지 라젠비나 티모시 달튼이 장수하지 못한 것은 모두 이런 부분들에서 본드의 분위기를 풍기지 못했기 때문이죠. 특히 늘 긴장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달튼이 007이 된 것은 다니엘 크레이그 못지 않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원작자 이언 플레밍 역시 션 코너리가 007 1호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며 "데이비드 니븐이었으면 했는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지만 뒷날 션 코너리의 발전을 지켜본 플레밍은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해 냈다"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아무튼 범인이 뛰면 같이 뛰는 본드 캐릭터의 어디에서 우아함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뛰어라. 네가 뛰어서 도착하는 그곳에서 나는 기다리마...라는 것이 진정한 본드의 자세가 아닐까요. 저는 이런 본드를 보고 싶은 겁니다.
(앞글의 댓글에도 달았지만 차나 모터사이클, 스키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직접 뛰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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