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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디오라는 기계가 음악을 듣는데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One Summer Night>이라는 노래는 너무나 친숙했습니다. 매년 2월, 졸업식 시즌이면 <Graduation Tears>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TV에서 어린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면 <Tommy Tom Tom>이라는 노래가 들려왔거든요.

이 유명한 노래들이 모두 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라는 1976년작 한국-홍콩 합작 영화에 나온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진추하 (陳秋霞) 라는 여가수 겸 배우의 것이라는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저의 청소년 시절에도 이미 '흘러간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세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TV에서 방송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린 거죠.

(이 영화는 '합작' 영화였기 때문에 1976년 집계된 '올해 최대 관객 동원 한국영화'에 오릅니다. 약 17만 관객. 저는 그해에 한국영화 흥행 2위였던 <로보트 태권 V>를 대한극장에서 봤습니다. ㅎㅎ)

유튜브 시대 이후,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볼 기회는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명절을 맞아, 아주 우연히 OTT 웨이브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명절 때이므로', 드디어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One Summer Night'을 부르는 극중 진추하와 아비(종진도)

 

2. 그런데 영화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대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스잔나>냐는 것입니다. 일단 '수재너'가 아니라 '스잔나'인 것은 일본식 발음의 흔적인 것이 분명한데, 이 영화에는 '스잔나'라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홍콩 제목은 <추하(秋霞: 진추하의 이름과 같음)>이고, 영어 제목은 <Chelsia, My Love>입니다. 극중 진추하의 배역명은 한자로 추하, 영어로는 첼시죠. 어디에도 스잔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에는 느닷없이 스잔나? 

아마도 추측컨대 - 물론 이 추측이 진짜 이유인지 확인해 줄 사람은 아마도 생존자 중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 1967년작인 또 다른 홍콩 영화 <스잔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스잔나>와 구별을 위해 <리칭의 스잔나>라는 제목으로 불리곤 하는 이 영화는 1970년 한국에 수입되어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1970년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허리우드 극장 개관 1주년 기념 특선 푸로'로 그 유명한 영화 <스잔나>의 한국 공개 결정이 내려졌다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홍콩에서 만들어져 히트한지 3년만의 일입니다. 이후 이 영화는 3개월간 롱런하며 전설적인 히트작으로 기록됩니다.

아마도 <사랑의 스잔나>를 처음 기획했던 한국 관계자들은 메이드 인 홍콩인 로맨틱 영화라는 점에서, '제2의 스잔나'가 되어 <스잔나>의 빅 히트를 재현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그 결과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사랑의 스잔나>라는 제목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도 누군가는 '대체 이 제목은 뭡니까? 이 영화에는 스잔나가 안 나오잖아요!'라는 항변을 했을 것이겠으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었고 보면 자연스럽게 반론은 묻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다 추측일 뿐이나, 이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랑의 스잔나>의 히트를 등에 업고, 진추하-아비가 다시 주연을 맡아 급조된 영화 <추하 내사랑>의 제목이 <속 사랑의 스잔나>가 아니었던게 더 신기할 정도라는... 

 

3. 웬만한 분들은 다들 아시는 줄거리. 

홍콩 갑부 이사장 댁에 딸이 둘 있는데, 큰딸 추하(진추하)는 어려서부터 심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친구인 방박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해줍니다. 이사장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고, 애틋함 때문에 맏딸 추하를 편애하는데 이때문에 동생 추운은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라납니다. 

세월은 흘러 추하는 음악에 재능있는 숙녀로 자라나고, 방박사의 아들 자량(아비)은 추하를 짝사랑하지만, 이것 또한 자량을 좋아하는 추운의 성격을 더욱 비뚤어지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추하는 청각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국휘(한국 배우 이승룡)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나 부모의 이야기를 엿들어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추하는 국휘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좌절한 국휘는 한국으로 떠납니다(물론 국휘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곡절 끝에 추하의 비밀을 알게 된 추운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언니의 마지막 추억을 위해 온 가족의 한국 여행을 제안해 언니와 국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역시 모든 것을 알게 된 국휘는 이사장 내외에게 추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추하에게 눈 쌓인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용평 스키장으로 향합니다. 

(경복궁, 세종로도 잠시 나옵니다만, 홍콩에서 한국으로 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설경입니다. 지금도 동남아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용평 스키장이듯, 이들도 개장한지 얼마 안 된 용평 스키장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드래곤밸리 호텔의 옛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 관객이 홍콩/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어쨌든 '다른 나라'에 갔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었을테고, 그렇다 보면 홍콩의 요트 파티 같은 장면이나, 한국의 스키장 장면이 상대 국가 관객들에게 강한 느낌을 줬을 듯 합니다. 특히나 해외 여행이 극히 힘들고 꽉 막힌 내수용 문화에 답답함을 느꼈을 당시 한국 청년들로선 홍콩 젊은이들의 분방한 장면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듯.)

뭐 사실상 영화의 거의 모든 내용입니다만, 사실 이런 내용을 모두 안다 해도 감상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뭔가 이야기가 부실해진다 싶으면 진추하가 나와 노래를 하고, 노래들이 또 워낙 다 명곡들인 탓에 없던 개연성과 없던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물론 아니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듯한 한국 가곡 <봄처녀>는 여기 해당되지 않으나... 이 노래들 덕분에, 이런 뻔하디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영화 보기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4.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저보다 한 세대 윗분들 중 절대 다수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을 아비, 즉 종진도로 기억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한국에서의 히트곡인 <One Summer Night>을 함께 부른 것도 아비이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한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엄연히 한국 배우인 이승룡입니다. 

바로 이 분

사실상 <사랑의 스잔나> 주인공으로 픽업된 신인인 듯 한데, 그 이후로 이분은 배우 생활은 그리 오래 계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우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 날이고 보면, 참 인기도 무상하다 싶죠.

 

5. 그리고 이 영화를 늦게 본 덕에 발견한 한가지.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사실 이 영화에서 진추하나 아비 보다 더 친근한 배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대의 걸작 <영웅본색 2>의 최종 빌런, 보스 고사장 역으로 나오는 배우 관산(關山)이 진추하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웅본색2>의 석천(좌)과 관산

한가지 더욱 신기한 것은 배우 관산이 오리지날 스잔나, 즉 <리칭의 스잔나>에서도 여주인공 이청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관산은 한국 관객들에게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흥행 대작의 조연으로 인상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TMI: 관산의 진짜 딸도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황비홍>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관지림(關之琳).

 

6.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나서 알게 된 건 아비, 즉 종진도라는 스타의 재발견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서극의 <상하이 블루스>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종진도가 바로 그 <사랑의 스잔나>의 주연 배우 아비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B라는 이름 외에도 케니 비(Kenny Bee)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본래 위너스(Wynners)라는 밴드로 활동했는데, 이 밴드가 배출한 또 하나의 슈퍼스타가 알란 탐, 담영휘입니다.

아비, 즉 종진도는 1953년생으로 성룡과 임청하보다 한살 위, 주윤발보다 두살 위, 고 장국영보다 세살 위, 진추하보다 네살 위로 1980년대 홍콩 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끈 세대의 대표적인 배우 겸 가수입니다. 홍콩/중국어권에서는 앞서 말한 슈퍼스타들에 비해 전혀 손색 없는 유명 스타지만 일단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하다는 점, 그리고 묘하게도 종진도의 히트작들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거나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홍콩의 거의 모든 스타들은 배우와 가수를 겸업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쪽의 재능이 다른 한쪽보다 앞서기 마련인데,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한 스타들은 중국어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스타덤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홍콩의 대표 가수'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알란 탐(담영휘)에게는 성룡과 공연한 <용형호제>, 유덕화와 공연한 <지존무상>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들이 있고, 여가수의 대표주자라 할만한 왕비(왕정문)에게는 <중경삼림>이 있는 반면 종진도에게는 그렇게 이거나 싶은 영화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진도가 사극/무술 계열의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은 것도 문제. 한국에서 수입하는 홍콩/대만 영화들은 20세기 말까지 대부분 무협/사극 장르의 작품들이었고, 그때문에 현대물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중국어권을 벗어나면 거의 무명 배우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얘기했던 20대의 임청하(<동방불패> 이전의 임청하를 아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나 임청하의 애인이었던 진한, 진상림 같은 스타들은 한국에서는 '누구?' 하는 대접이었죠. 

그와 관련된 글: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얼마 전 영화 '화피' 때문에 왕조현에 대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엔 임청하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벌써 14년이나 됐군요. 임청하는 최근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

fivecard.joins.com

 

7. 아무튼 <사랑의 스잔나> 개봉 당시 23세였던 종진도와 19세의 진추하는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고, 서로에게 거의 첫사랑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곱게 늙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후문. 

알란탐과 진추하. 젊어 보이지만 알란탐이 7세 연상.

진추하는 젊은 날을 지나며 활동을 줄였지만 종진도는 나이 먹은 뒤에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는 전언.

중후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이 커플. (저도 이 세대까지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세대에도 이렇게 상징적인 커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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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아론 Hank Aaron, Henry Louis Aaron (1934. 2. 5 - 2021. 1. 22)

자고 일어나니 행크 아론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1934년생이니 향년 86세(미국식). 

잘 알려진 행크 아론의 업적을 가장 짧게 정리하면, '베이브 루스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깨고 한동안 역대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하다가 배리 본즈에게 그 타이틀을 넘겨준 사람' 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23년 통산 755홈런은 역대 2위 기록이 됐지만, 2297타점은 여전히 역대 1위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몇가지 오해가 있다. 요즘처럼 메이저리그 경기를 맘대로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보니, 어마어마한 홈런 기록 때문에 엄청난 거구일 것으로 추정(?)되었던 것과는 달리, 1982년 내한 당시 보는 순간 '어 별로 안 크잖아?'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왔다. 기록상 신장도 1m83. 물론 더 작은 윌리 메이스(1m78)도 홈런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전설의 행크 아론을 본 건 아마도 1982년 방한 때가 처음이었을거다. 물론 현역 선수는 아니었지만 이해 8월 삼성-롯데의 동대문 경기(이걸 '중립경기'라고 불렀다) 직전에 팬서비스로 이만수 김용철과 홈런레이스 이벤트에 참가했다. 48세의 나이에도 15개중 5개를 넘기며 예사롭지 않은 파워를 보여준 거다. 영상이 있다.

https://youtu.be/U0OW_7ud8fw 

그리고 이 해 시즌이 끝난 뒤에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마이너리그 연합팀을 인솔, 한국 선수들과 여러 차례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다. 선발팀과도 붙고 개별 팀과도 붙었는데 MBC 청룡전에선 특이하게도 3루수 이광은이 투수로 등판했다. 물론 실업야구때까지도 알아주는 투수였지만 프로 이후엔 투수로는 은퇴상태였는데 미국팀을 상대로 등판한 것이다. 아마도 추운 날씨라 투수 보호(...) 차원에서 희생한 게 아니었을지. 

아론에 대해선 늘 '화려하지 않은 꾸준함'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 이건 아마도 비교 대상이 무려 12회나 홈런왕을 차지한 베이브 루스, 타격 못잖게 신에 가까운 수비와 주루로 '가장 완벽한 선수'로 불렸던 윌리 메이스, 혹은 7차례나 MVP를 수상한 '오만한 신' 배리 본즈 같은 선수들이라 그랬을 것 같다. 심지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겨우(?) 47개라는 놀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론은 홈런왕을 4차례나 했고 MVP도 받아 봤고, 단 한번이지만 팀 우승도 시켜 봤다. 우승한 월드시리즈에서도 홈런을 3개나 때려내 새가슴 이미지도 아니다. 단지 비교의 기준이 너무 전설적인 선수들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흑인이 루스의 기록을 깨는게 불쾌했던 백인들이 고의로 폄하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등번호 44번으로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시즌 44홈런을 4회나 기록해 등번호를 잘못 고른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과연 55번이었으면 55홈런도 쳤을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임팩트가 약했던 것도 사실인가 싶은 것이, 일단 '등번호 44번의 강타자'를 생각하면 아론보다는 레지 잭슨이 더 먼저 떠오른다.^^) 

 

뭔가 평탄하고 꾸준한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인생이 그리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부분이 적었던 모양. 생애에 대해선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Chasing the dream과 The Hammer of Hank Aaron)가 있을 뿐, 극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사진에 등장하고, 통산 홈런 기록이 배리 본즈의 추격을 받는 동안 이런 광고에 출연한 적도 있다. 열심히 훈련하는 본즈에게 어디선가 '은퇴해... 은퇴해...' 하는 유령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알고 보니 그게 '내 기록 깨지 말고 그냥 은퇴해'였다는 코믹 광고. 은퇴자들을 겨냥한 금융사가 광고주. 

https://youtu.be/e5kLuWmw5EM 

몇해 뒤, 2007년 본즈가 자신의 기록을 깼을 때에도 축하 영상을 보냈다. 막상 기록을 깰때 현장에 오지 않았다며 대인배스럽지 못하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생각해 보라. 타이 기록이 나온 뒤 어느 경기에서 신기록이 나올줄 알고 따라다니겠나. 아무튼 루스나 루 게릭같은 말년 고생 없이 온화하고 평화롭게 잘 살다 가신 듯 하니 다행이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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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0년생인 펠레는 1958, 1962, 1970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 줄리메 컵을 영원히 조국 브라질에 귀속시킨 영웅이 되었다. 물론 펠레에게는 좋은 파트너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가린샤, 후기에는 자일징요(자이르지뉴) 같은 초특급 스트라이커들이 곁에 있었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브라질 축구와 유럽 축구 사이에는 꽤 레벨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은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신 브라질을 쓰러뜨린(그리고 나중에 북한도 탈락시킨)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이 대회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처럼 축구란 역시 알 수 없다. 오늘날의 펠레는 '예측 못 하기로 유명한 왕년에 축구 좀 했던 아저씨' 대접이지만 펠레가 아니라도 원래 맞추기 힘든게 축구의 승부다. 더구나 스코어까지 맞춘다는 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펠레가 한국 팀과 붙어도 아슬아슬한 승부가 연출될 수 있는 게 축구다. 50년 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 펠레는 한국에서 딱 한번 경기를 한 일이 있다. 1972년 6월2일. 당시 소속팀이던 산토스의 아시아 순회 경기에 참가해 서울운동장에서 국가대표 상비군과 친선 경기를 펼쳤다. 차범근 이회택 이세연 박이천 김호 등 당시의 톱스타들이 모두 출전했는데 차범근과 이회택이 득점하며 종료 4분전까지 동점으로 접전을 펼치다 3대2, 한골차로 패했다. 

펠레는 후반 한 골을 넣었지만 '펠레 부진'이라는 기사 제목이 뽑힐 정도로 당시 한국 팬들이 펠레에게 건 기대는 컸던 모양이다. 3만5천 관중이 모이고, 나중에는 관중들이 펠레에 붙어 밀착 수비하는 이차만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전에 본 이회택 회고록에는 "이차만이 경기 전부터 '펠레는 내가 꽁꽁 묶겠다'고 장담을 했다. 나중에 한방, 어! 하는 사이에 펠레에게 공이 가더니 바로 골이 됐다. '책임진다더니' 하는 뜻을 담아 이차만을 쳐다봤더니 이차만이 '형, 딱 한번 눈 질끈 감았소. 관중들도 표값은 해야지' 라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펠레가 뛴 산토스 팀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건 한국 축구계의 대단한 쾌거로 평가됐다. 다른 기사를 보면 암표가 극성을 떨고, 경기장 앞에서 사람들이 '펠레 방석'이라며 펠레 사진이 박힌 신문을 팔고, 펠레 얼굴이 인쇄된 '펠레 손수건'이 날개돋친듯 팔렸다는 내용을 봐도 대단한 화제였다.



3. 사실 펠레=골이라는 게 기본 상식이지만, 펠레는 본질적으로 '득점을 만드는 선수'지 '골 넣는 기계' 타입이 아니었다. 야구만큼 공식적으로 매겨진 것은 아니지만 축구에서의 등번호 역시 포지션과 관련이 있다. 

야구의 1번이 투수이듯 축구에서의 1번은 당연히 골키퍼. 2~6번은 수비수고 7~11은 공격수다. 대략 7번과 11번이 양쪽 윙어를 말하고, 전통적으로 스트라이커, 즉 센터포워드의 번호는 9번이었다. 펠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꼽은 디 스테파노에서 호나우두, 해리 케인에 이르는 9번의 역사는 유구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래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펠레는 10번. 물론 어느 포지션에 갖다 놔도 아마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심지어 골키퍼를 포함해) 뛰어난 축구감각을 가진 선수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10번이며, 마라도나와 메시가 10번을 달게 한 그 사람이다. 펠레 이전에도 푸스카스와 같은 역사적인 포워드들이 10번을 달았지만 진정한 10번, 최전방에서 미드필드까지 공격을 조율하며 득점을 창출해내는(스스로 넣든, 넣게 해 주든) 역할을 정립한 것은 누가 뭐래도 펠레다.

당연한 얘기지만 펠레 이후 브라질의 에이스들은 무조건 '제2의 펠레'로 시작했다. '하얀 펠레'로 불렸던 지코(지쿠)를 비롯해 나타나는 족족 '펠레의 후계자'로 불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브라질의 에이스는 펠레-지쿠-베베토-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10번 계열과 가린샤-자일징요-소크라테스-호마리우-호나우두로 이어지는 9번 계열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현재까지 나타났던 선수들 중 진정한 '제2의 펠레'라면 호나우지뉴를 꼽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얼마 전 FIFA 홈페이지에서 이번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축구의 GOAT는 메시로 판가름났다는 망발을 저질렀다가 곧 내린 적이 있는데(마라도나 팬들의 항의로 없어졌다고 함), 메시가 2026년 월드컵에 출전해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지 않는 한, 펠레-마라도나-메시를 놓고 벌이는 GOAT 논쟁은 앞으로도 수십년간 유효할 것이다. 

펠레에게 축구는 '뷰티풀 게임'이었다. 이기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로, 축구를 전쟁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와 브라질의 축구가 아니었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미학에 충실한 것이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 심지어 요즘에도 - 브라질 대표팀의 축구를 보다 보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선수들이 '너희 이런 식으로 하면 나 안 해', '이렇게 재미없게 하면 나 안 해'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같은 남미 축구라고 해도 정말 황소떼처럼 밀어붙이는 아르헨티나 축구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펠레의 시대에는 그렇게만 해도 월드컵 우승도 할 수 있고, 만사가 행복했다. 유럽 축구가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며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으던 시절도 아니었다(펠레의 유럽 이적을 막기 위해 브라질 정부가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프리메라리가가 지금의 프리메라리가라면 펠레는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을 것이다). 모든 게 지금보단 소박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제 10만년 이내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참 슬프다. 

RIP. 펠레. 



P.S. 펠레의 아버지도 축구선수이긴 했지만 크게 성공한 선수는 아니었다. 펠레는 한때 '제2의 펠레'를 묻는 흔한 질문에 "제2의 펠레는 나타날 수 없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너무 늙으셨거든"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7명의 자녀를 뒀는데 그중 축구선수가 된 것은 장남(넷째) 에디뉴 하나 뿐. 하지만 골키퍼였고, 국가대표급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산토스에서 2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온 세계가 기대한 '펠레 2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축구에서도 성공한 2세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축구를 잘 하는 데 있어 유전자의 힘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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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1936.12.19 - 2019.12.09) 

김우중 회장 별세를 맞아 기억나는 단편들.

아마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류에서 본 이야기인듯. 고인은 먹을 것을 놓고 깨작거리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인은 한창 일할 때 만나야 할 사람이 워낙 많아 점심 약속도 2부제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심을 두번 먹어도 두번 모두 맛있게 음식을 싹 먹어치웠다는 얘기다. 만약 수행하는 사람 중에 그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내가 점심 두번을 감당 못 하면 무슨 큰 일을 하겠느냐”고 못마땅했다는.

또 하나는 장거리 비행에서 피로를 이기기 위해 바닥에서 잤다는 이야기. 통상 2-4-2나 3-4-3으로 배열되어 있는 항공기의 뒤쪽 4열 좌석 바닥에 모포를 깔고, 길게 누워 자면서 날아가는 걸 대우 직원들은 '회장님 방식'이라고 불렀다는 전언이다. 요즘처럼 국제선도 꽉꽉 차는 세상엔 쉽지 않은 방법이겠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김우중쯤 되는 인물도 이코노미 타고 출장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물론 회장 된 다음에도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기업인으로서 그분의 성취나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감히 뭐라 말할만큼 알지 못한다. 다만 21세기에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대우 브랜드가 여전히 큰 인기더라는 것, 이란에서는 지금도 대우라는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등을 들었을 때 상당히 아쉽기는 했다. 한때 ‘받아도 잘 안 찌그러지는 차’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우 로열 시리즈도 생각나고. 어쩌면 대북사업에서도 현대보다 대우가 먼저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이야기일 터.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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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경우의수 정리] 네덜란드-대만전은 최악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네덜란드-대만전 결과가 네덜란드가 이기면 최선, 대만이 큰 점수차로 이기면 그 다음, 접전으로 이기는게 그 다음, 3~6점차로 이기는게 최악이었는데 하필 딱 5점차 승부가 났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네덜란드가 호주를 이긴다고 가정하고, 한국은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기되 특히 대만을 6점차로 꺾어야 2라운드에 자력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겨도 5점 차라면 한국/대만/네덜란드간의 득실점 중 자책점의 비율까지 계산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4점 차 이하로 이기면 같은 2승1패라도 한국이 무조건 탈락합니다.

 

물론 열심히 기도하면 호주가 네덜란드를 잡아 주는 로또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실제론 지금부터 대표팀 타선이 심기일전, 막강 공격력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대표팀 타선, 특히 중심타선이 살아나주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시작합니다.

 

 

 

 

모든 대회는 그 대회만의 고유 룰이 있는 법입니다. 특히 이번 WBC는 동률 팀이 나왔을 때 아주 고약하게 구분을 해 놓고 있습니다.

 

일단 원문을 그대로 가져와 봤습니다.

http://web.worldbaseballclassic.com/wbc/2013/about/rules.jsp#pool_first

 

 

POOL PLAY AND TIE-BREAKING PROCEDURES

First Round

The First Round of the Tournament shall be conducted in a round-robin format.

In the First Round, the Federation Teams in each pool shall be ranked according to the winning percentage of games in the First Round. The two Federation Teams with the highest such winning percentages in each pool shall advance to the Second Round as the Pool Winner and the Pool Runner-Up.

If at the end of pool play in the First Round of the Tournament two or more Federation Teams within a pool are tied with an identical winning percentage, the tie shall be broken based on head-to-head records or by ranking each team's "Team Quality Balance" (TQB), as set forth below:

  • Scenario 1
    Two Federation Teams with the highest winning percentage tied for Pool Winner designation.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in the First Round shall be declared the Pool Winner, and the loser of that game shall be declared the Pool Runner-Up.

  • Scenario 2
    Three Federation Teams with the highest winning percentage tied for Pool Winner designation.

    To determine the Pool Winner and Pool Runner-Up, the three Federation Teams shall be ranked in order of TQB (i.e., the sum of runs scor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offense, minus the number of runs allow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defense (RS/IPO)-(RA/IPD)=TQB)). For purposes of determining TQB only the scores from the games between the tied teams are to be used in the calculation. In the event two or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as follows:

    1.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winner of the tie between the two remaining Federation Teams.
    2.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by ranking Earned Runs Team's Quality Balance ("ER-TQB", i.e., the sum of earned runs scor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offense, minus the number of earned runs allow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defense (ERS/IPO)-(ERA/IPD)=ER-TQB)). In the event two or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as follows:
      1.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winner of the tie between the two remaining Federation Teams.
      2.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by ranking batting average in games between the tied Federation Teams.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ER-TQB, and ranking the Federation Teams by batting average,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winner of the tie between the two remaining Federation Teams.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each of the foregoing procedures have been applied, such remaining ties shall be determined by coin flip.
  • Scenario 3
    Three Federation Teams with the lowest winning percentage tied for Pool Runner-Up designation.

    The three Federation Teams shall be ranked in order of TQB to determine the Pool Runner-Up. In the event two or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Pool Runner-Up after determining 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as follows:

    1.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Pool Runner-Up after determining TQB,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Pool Runner-Up.
    2.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the Pool Runner-Up designation after determining 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by ranking Earned Runs Team’s Quality Balance (ER-TQB). In the event two or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Pool Runner-Up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as follows:
      1.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Pool Runner-Up.
      2.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after determining TQB and ER-TQB, such tie(s) shall be broken by ranking batting average in games between the tied Federation Teams. In the event two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Pool Runner-Up after determining TQB, ER-TQB, and ranking the Federation Teams by batting average, the Federation Team that won the game played in the First Round between the two Federation Teams that remain tied shall be designated the Pool Runner-Up. In the event three Federation Teams remain tied for the Pool Runner-Up designation after each of the foregoing procedures have been applied, such remaining ties shall be determined by coin flip.

 

 

상당히 깁니다만, 이번 대회의 동률 처리 규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한 조 안에서 두 팀이 동률일 때: 무조건 두 팀 사이의 승자승.

 

2) 세 팀이 동률일 때: 세 팀간 TQB에 따라 결정.

    TQB(Team Quality Balance)란 다음과 같습니다.

 

To determine the Pool Winner and Pool Runner-Up, the three Federation Teams shall be ranked in order of TQB (i.e., the sum of runs scor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offense, minus the number of runs allow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defense (RS/IPO)-(RA/IPD)=TQB)). For purposes of determining TQB only the scores from the games between the tied teams are to be used in the calculation.

 

그러니까 (낸 점수/공격 이닝 수) - (잃은 점수/수비 이닝 수) = TQB인 것입니다.

 

이제 그럼 한국이 2라운드에 올라갈 수 있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I. 2승1패 3자 동률이 되고, 대만에 6점차 이상 승리하는 경우

 

일단 호주가 3패를 기록하고, 한국/대만/네덜란드가 2승1패 동률이 되는 경우를 상정해서 계산해 보겠습니다. 물론 한국이 나머지 두 경기를 모두 이기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이 경우 동률팀간의 득실만을 따진다는 규칙에 따라 호주전에서의 득실점은 계산에서 제외됩니다.

 

한국과 대만을 모두 상대한 네덜란드는 17이닝을 공격해서 8점을 냈고, 역시 17이닝을 수비해서 8점을 잃었습니다. TQB 공식에 넣어 보면, (8/17)-(8/17)=0, 합계 0점이 됩니다.

 

대만과 한국은 5일 경기에 따라 결과가 나옵니다. 현재는 한국이 -.625, 대만은 +.667이지만 이 수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한국이 대만을 5:0으로 이긴다고 가정하면,

 

한국 (5/17)-(5/17)=0

대만 (8/17)-(8/17)=0

 

이렇게 해서 역시 세 팀이 다시 TQB 0점으로 3자 동률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건 5:0이건 6:1이건, 5점차가 나는 경우에는 불변입니다. (물론 9회까지 0:0으로 비기다가 10회에 5점차가 나는 경우라면 달라지지만, 가능성 희박한 경우는 제외합니다.)

 

한국이 만약 6:0으로 이기는 경우라면,

 

한국 (6/17)-(5/17)= .059

대만 (8/17)-(9/17)= -.059

 

그러니까 대만을 6점차로 이기면 TQB 점수에 따라 한국과 네덜란드가 올라가고 대만은 탈락합니다.

 

대만에 5점차로 이겨 다시 3자 동률이 되는 경우에는, 역시 대회 규정에 따라 ER TQB라는 더 복잡한 수치가 등장합니다. 저 득점과 실점 중에서 자책점의 비율이 높은 팀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냥 TQB에선 한국의 실점이 5점이지만 1점은 실책으로 인한 점수였으므로 ER TQB에서는 4점만 계산된다는 것이죠.

 

즉 '진정한 실력으로 점수를 낸 팀에게 어드밴티지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1점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 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II. 호주가 네덜란드를 꺾고, 한국이 남은 2승을 올리는 경우

 

이렇게만 된다면 득실 따질 필요 없이 한국과 대만이 올라갑니다. 한국이 대만을 이기면 승자승에 따라 자연히 조1위가 되죠.

 

 

III. 호주가 네덜란드를 꺾고, 한국이 대만에 지는 경우

 

이 경우엔 한국/네덜란드/호주가 1승2패로 3자 동률이 됩니다. 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만, 다시 위의 해설처럼 세 팀간의 TQB를 계산해야 합니다. 이 경우라면 호주와의 경기에서도 얼마나 큰 점수차로 이기느냐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어쨌든 이 경우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습니다.

 

 

 

결론은 한국은 무슨 수를 쓰든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기더라도 그냥 이기는 것 만으론 부족하고 점수를 많이 뽑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투수들도 투수들이지만, 타자들의 분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입니다.

 

따져 볼수록 네덜란드전에서 몇점이라도 점수를 뽑았어야 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지지만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법.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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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1회 그 수비 좋던 강정호 정근우가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지를 때부터 뭔가 불안하다 했습니다. 점수를 낼 듯 낼 듯 하면서 한 점도 못 내고 끌려갈 때 들던 불안간 느낌이, 끝내 현실이 될 줄이야.

 

물론 네덜란드가 한국 야구 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전력이 탄탄한 팀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국 야구를 이끌고 가는 선수들과 류중일 감독에 대한 신뢰가 워낙 컸기 때문에, 2라운드는 몰라도 1라운드는 여유있게 통과할 거라고 기대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네덜란드 타자들은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이제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번 대회의 복잡한 조건 때문에 앞날은 더욱 점치기 힘듭니다.

 

3일 경기 결과에 따라 경우의 수 예측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한국, 결론은 대만에 6점차 승리가 답. http://fivecard.joins.com/1104

 

 

 

 

 

 

이 글은 3일 네덜란드-대만전 이전의 예측입니다.

3일 경기 결과에 따라 경우의 수 예측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한국, 결론은 대만에 6점차 승리가 답. http://fivecard.joins.com/1104

 

 

4팀으로 한 조가 짜여지고, 조 안에서 라운드 로빙 방식(흔히 말하는 일반 리그 방식)으로 네 팀이 각각 세 경기씩을 치러서 그중 상위 두 팀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방식은 각종 대회에서 매우 널리 쓰이지만 보기보다 변수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네 팀이 각각 3승, 2승1패, 1승2패, 3패로 한줄로 늘어선다면 계산하기 편하겠지만 이렇게 실력 순으로 정렬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가장 골치아픈 경우는 한 팀이 전패를 해서 세 팀이 2승1패로 동률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호주가 다른 세 팀에 비해 전력이 상당히 처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호주가 3패를 할 것으로 예상할 때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 집니다.

 

어쨌든 한국은 이제 남은 두 경기를 무조건 다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2승1패로 2라운드에 올라갈 수 있는 최소 조건이 갖춰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대회의 특별한 규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회의 동률 처리 규정은 이렇습니다.

 

1) 한 조 안에서 두 팀이 동률일 때: 무조건 두 팀 사이의 승자승.

 

2) 세 팀이 동률일 때: 세 팀간 TQB에 따라 결정

 

TQB(Team Quality Balance)란 다음과 같습니다.

 

To determine the Pool Winner and Pool Runner-Up, the three Federation Teams shall be ranked in order of TQB (i.e., the sum of runs scor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offense, minus the number of runs allowed, divided by the number of innings played on defense (RS/IPO)-(RA/IPD)=TQB)). For purposes of determining TQB only the scores from the games between the tied teams are to be used in the calculation.

 

그러니까 (낸 점수/공격 이닝 수) - (잃은 점수/수비 이닝 수) = TQB인 것입니다.

 

한국이 네덜란드 전에서 낸 TQB는 (0/9)-(5/8)= -0.625입니다.

 

반대로 네덜란드는(5/8)-(0/9)이므로 그냥 0.625죠.

 

단순 득실차와는 좀 다르지만, 어쨌든 큰 점수차로 이긴 팀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세 팀이 2승1패 동률이고 호주가 3패로 탈락이라면, 호주전에서의 득실차는 계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동률인 팀들간의 득실차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다보면 TQB로도 동점인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일단 무시!)

 

 

 

 

이걸 전제로 한국의 앞날을 생각하면, 일단 호주가 3패 전력이라고 가정할 때 한국의 상황은 4일 네덜란드-대만전의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첫째: 네덜란드가 승리할 때.

 

이 경우 네덜란드는 3승이 유력해집니다. 그럼 한국이 호주를 이긴다고 보고, 마지막 날 한국과 대만은 같은 1승1패 상태에서 나머지 한 장의 카드를 놓고 생사의 일전을 갖게 됩니다. 이기면 무조건 2라운드, 지면 무조건 탈락입니다. 쉽죠.

 

하지만,

 

둘째: 대만이 승리할 때.

 

복잡합니다. 이때도 네덜란드와 한국이 모두 호주에게는 이긴다고 보고, 네덜란드는 일단 2승1패를 확보합니다. 대만은 2승을 깔고 한국과 겨뤄 이기면 3승, 지면 2승1패가 되죠. 한국의 희망은 대만을 이겨 세 팀이 2승1패 동률이 되는 겁니다. 그럼 위에서 얘기한 TQB를 따지는 상황이 오죠.

 

하지만 이미 한국은 -0.625를 안고 있는 상태. 따라서 대만이 네덜란드를 이길 때 접전 끝에 근소하게 이기게 되면, 한국은 대만을 상대로 5점차 정도는 내야 TQB에서 유리한 위치에 갈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대만이 3점차~7점차 사이의 승부로 이기는 경우죠. 그래서 만약 대만이 호주에게 이긴다면, 아예 대승을 거둬야 한국에게 유리합니다.

 

따라서,

 

네덜란드-대만전를 지켜보는 한국 팬들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우선 1지망은 '네덜란드의 승리 기원' 입니다. 이러면 '어쨌든 대만만 이기면 되는' 상황으로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반에 승세가 대만으로 몰리면, 그때부터는 대만이 점수차를 벌리도록 응원해야 할 겁니다.

 

정리하면,

 

1) 네덜란드가 대만을 꺾는다(점수차 무관)

2) 대만이 네덜란드를 최소 7점차 이상의 큰 점수차로 꺾는다

3) 접전 끝에 대만이 근소하게 이긴다

4) 대만이 네덜란드에 3~6점차 정도로 이긴다

 

의 순으로 한국에게 좋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경우는... 무조건 대만에 대량득점을 성공해 우리가 5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냥 이기기도 쉽지 않은데 대량득점까지 요구해야 한다는 건 참.

 

 

 

물론 이런 저런 얘기를 해 봐야 대만에게 지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어떻게든 대표팀이 심기일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기원할 뿐입니다. 뭐 야구라는게 하루 이틀 사이에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라 희망은 아직 충분합니다.

 

한대화의 역전 홈런으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이때도 한국은 서전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이탈리아에 첫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그 경기 이후 선수들의 정신력이 대폭 강화됐고, 결국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번에도 첫 경기의 패배가 선수들의 분발을 가져오길 기대해 봅니다.  

 

대한민국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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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 개막의 충격이 하루 종일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니 산만하고 별 재미 없던데...'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행사를 즐겼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개막식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올림픽 개막식 치고 멋지지 않은 적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런던 개막식이 줄곧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지금까지의 개막식들이 보여줬던 틀을 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국만이 할 수 있었던' 걸 보여줬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의 개막식 가운데 최고를 치자면 저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을 꼽아왔습니다. 그리스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신화를 먼저 떠올리겠죠. 그 소재를 최대한 이용한 당시 개막식은 누가 봐도 예술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도 좋은 평을 받았지만 미적 완성도보다는 어쩐지 물량으로 밀어붙여 보는 이를 압도하려는 듯한 '세 과시'가 좀 거부감을 주더군요. 아무튼 아테네 개막식의 미적 완성도는 여전히 역대 최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역대 최고 물량의 개막공연, 어떤 의미였나. http://5card.tistory.com/115)

 

하지만 런던 개막식은 정말 새로웠습니다.

 

 

 

 

올림픽 개막식은 어떤 경우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내용으로 꾸며집니다. 특히나 세계 무대에 나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개발도상국들은 이 행사를 국가 홍보를 위한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가 오랜 나라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개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이 주 재료입니다.

 

하지만 영국은,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대니 보일은 이런 관례를 한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영국은 흔히 '오래된 나라'임을 강조해 온 나라입니다.

 

 

 

 

런던 개막식은 약 18세기를 배경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케네스 브라나가 셰익스피어의 고전 '템페스트'의 구절을 읊긴 했지만 18세기 이전까지 약 2천년의 역사는 그냥 스킵해 버린 겁니다. 스톤 헨지도, 아서 왕도, 사자왕 리처드도, 마그나 카르타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항해 시대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영제국의 건설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 등 영국 역사의 전성기는 아예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pandamonium(지옥)이라는 이름으로 산업혁명과 혼란의 도래, 노동운동의 시작 등을 다뤘습니다.

 

(과거 - 잉글랜드의 화려한 역사 - 를 자꾸 강조해 봐야 '피정복지역'인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 사람들의 소외감만 강조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와 계관시인들의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이날 개막식에 등장한 사람은 '해리 포터'의 조안 K 롤링이었고, 피터 팬과 메리 포핀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동 복지와 전 세계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베겟머리에서 읽어 주는 책들이 바로 영국 작가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을 강조할 때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게 얼마나 많은데...." 라는 자세.

 

메리 포핀스가 볼드모트와 요괴들을 퇴치하는 것으로 끝난 이 세션의 제목이 바로 "second to the right and straight on till morning"이었습니다. 이 말은 '피터 팬'에서 피터 팬이 네버랜드의 위치를 설명할 때 하는 말이었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행사는 하나도 과장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어떤 어린이가 피터 팬과 해리 포터를 모를까요.

 

 

 

 

어쨌든 과감하게 '유구한 역사' 부분을 들어 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메운 요소들 중 두 가지에 방점이 찍힙니다. 바로 '대중문화가 주제였다'는 것과 '영국식 유머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다른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그 나라 출신의 유명 음악인이나 스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예 대중문화가 이렇게 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로 등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007,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왕을 호위하고 경기장으로 온다는, 그리고 여왕이 낙하산을 타고 경기장으로 들어온다는(물론 장난입니다만) 설정은 다소 엄숙하고 경건했던 지금까지의 개막식에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입니다.

 

 

 

 

이날 행사 가운데 유일하게 클래식적인 요소였다면 베를린 필의 마에스트로 사이먼 래틀이 등장했다는 점이지만, 그 래틀 경이 지휘한 곡 조차도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의 주제곡. 거기다 '미스터 빈' 로완 애킨슨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잠시도 심심할 틈을 주지 않도록 촘촘한 웃음을 줬습니다.

 

 

 

 

또 '영국이 20세기 대중문화의 물결을 주도했다'는 자랑화제의 음악 파트에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주제는 'SNS를 통한 사회의 변화'였지만, 그 과정에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주말 밤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맞춰 수십곡의 히트곡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곡들이 모두 MADE IN UK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이 잠시 흘러나오는 듯 하더니 곧이어 지난 세기 전 세계의 팝 차트를 장식해온 클래시, 섹스 피스톨스, 데이비드 보위, 퀸, 폴리스, 유리스믹스, 그리고 프로디지의 곡들이 영상과 함께 들려왔습니다. 그야말로 영국의 일세를 풍미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대중음악사라고 해도 좋을 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록의 개척기는 물론이고 글램 록, 펑크, 뉴 웨이브, 테크노에서 브릿 팝까지 일세를 풍미한 장르들을 영국 뮤지션들이 개척하고 주도했다는 자신감이 넘쳐 흐르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같은 대 스타들에게도 결코 편중이란 없었다는 점입니다. 워낙 스타도 많고 히트곡도 많으니 그렇게 편식할 여유가 없다는 여유가 넘쳐 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니 보일의 출세작인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언더월드의 'Born Slippy'도 한 부분을 장식했습니다. 보일의 서명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낭비(?)는 마지막까지 이어졌습니다. '개막식에 폴 매카트니가 나온다'는 정보 때문에 그 지루한 200개국의 입장을 다 지켜봤건만, 정작 등장한 매카트니 옹은 'The End'와 'Hey Jude' 단 두곡만을, 그것도 The End는 일부분만 부르고 바로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물론 그 장면 자체는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트위터에 썼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가 세계에서 제일 큰 무대에서 세계에서 제일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를 부르고 바로 사라진'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매카트니 옹은 왜 꼭 Hey Jude의 후렴부분 떼창을 시킬 때(물론 시키지 않아도 이미 관객들은 '나 나나 나나나나'를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남자들만 따로' '여자들만 따로' '한꺼번에 같이'를 시켜 보는 걸까요.^^

 

 

 

어떤 나라도 자기만의 독특한 올림픽 개막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 런던 올림픽도 누구를 연출자로 기용했느냐에 따라 수천가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니 보일(바로 윗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을 썼어도 이렇게 효과적으로 영국 대중문화의 막강함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은 개막식을 통해 '봐라.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데. 잘 몰랐지? 어때. 멋지지?'라는 자세를 견지한 반면, 이번 런던 개막식은 '응. 이게 우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지? 자, 이것도 우리 건데, 물론 그것도 알지? 우리 거라는 거 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아 놓으니 정말 대단하지?' 라는 거대한 자신감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현대'를 배경으로.

 

사실 폐막식까지 생각하면 아직도 뜯지 않은 선물 보따리가 잔뜩 있습니다. 이미 엘튼 존, 오아시스, 조지 마이클의 참여가 흘러나왔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도 한번쯤은 나와 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고, 뭐니 뭐니 해도 나라가 영국이다 보니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속에 나오는 'Land of hope and glory'를 수만명 관객들이 떼창하는 모습도 연출되지 않을까 싶고... 아무튼 다음 올림픽 개막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참 골치아플 듯 합니다. 폐막 행사도 참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웨버 옹은 "올해 올림픽 때문에 뮤지컬 흥행은 망했다"고 코멘트하신 내용만 나와 있군요. 아무리 웨스트엔드 흥행이 중요해도 국가적 대사에는 좀 참여해 주시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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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롯데 자이언츠의 11번은 영구결번이 됐군요. 과연 이제 와서 구단이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주장이 팬들로부터 제기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이 '최동원 잔혹사' 풍의 냄새를 풍기기는 합니다만, 최동원이 속해 있던 '70년대 야구'의 풍경을 바라볼 때 최동원의 혹사는 어찌 보면 거의 모든 투수들, 특히 에이스 급 투수들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현상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400승 투수인 재일교포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 한때 김정일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의 투구사를 보면 50~60년대 일본 프로야구 역시 '투수 혹사'라는 면에선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매년 투구 이닝이 300이닝이 넘고 '25승20패' '24승24패' 등의 연간 기록을 보다 보면 참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최동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을 안 세대입니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일 수도 있겠죠.


순서대로: 1편은 이쪽입니다. http://5card.tistory.com/m/post/view/id/954


고교생 최동원이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관심사였듯 연세대 에이스이자 한국 최고 투수 최동원의 졸업 후 진로는 국민적인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국내 실업야구 사정상 최동원을 데려갈 수 있을만한 팀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은행팀이 아닌 기업 팀, 즉 롯데, 한국화장품, 포철 등이나 그만한 스카우트 비용을 낼 거라는 게 기정사실이었죠. 특히 롯데는 김동엽 감독에 의한 창단 때부터 '롯데 자이언츠'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세미 프로 냄새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부산 지역과의 끈끈한 연고 의식으로 박영길 감독을 비롯해 경남고 출신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 역시 최동원이 롯데로 갈 것이라는 예상을 짙게 했습니다.

하지만 롯데 입단도 만만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는 야구팬들에게 '최윤식씨'와 '선판규씨'는 스타플레이어나 감독 못잖은 유명인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분은 최동원과 선동렬, 두 국보급 투수의 아버지들이고 그만치 열성적으로 아들을 보살핀 분들입니다.


대학 이후 최동원의 진로에 대한 입장들은 대부분 최윤식씨의 입을 통해 알려졌는데, 그 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들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 구타 사건 뒤엔 "동아대로 전학시켜 달라. 맞아 가면서 연세대에서 운동을 시키지 않겠다", 대학 졸업반일 때에는 "롯데에 가지 않고 그냥 군 입대를 시키겠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를 앞두곤 "시리즈가 끝나면 은퇴시키겠다"는 등의 말들이 최윤식씨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당연히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억지였고 이런 주장들은 최동원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일생을 둔 동갑내기 라이벌 김시진은 포철과 입단 줄다리기를 하다가 이른 군입대를 선택, 경리단 소속이 됩니다. 포철이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지출할 상황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그 '거액'은 얼마쯤이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81년. 곡절 끝에 최동원은 "무려 3000만원의 계약금에" 아마추어 롯데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됐습니다. 그해 롯데는 사실상 투수 최동원과 강만식을 스카우트하는 정도로 선수 보강을 마쳤습니다. 역시 이미 최강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경기 방식상 여러 명의 투수가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포철은 상당히 가난한 기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지금과 당시의 물가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보여주는 지표라고 해야겠죠.^^)

당시의 각 팀 전력을 정리한 기사입니다. 초기 프로야구를 휩쓴 스타들이 당시엔 어떤 팀 소속으로 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성인야구의 특성상 경리단과 성무, 두개의 군 팀이 가장 유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지난번 글에서 충분히 설명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81년 방식은 10개 팀이 4차례의 리그(전기 1,2차와 후기 1,2차)를 펼치는 것. 그래서 총 36게임을 치르게 됐고 롯데와 경리단이 각각 전,후기를 나눠 가져 코리언시리즈에서 맞붙었습니다.

관심이 가는 건 최동원의 등판입니다. 총 36경기 가운데 무려 30경기에 등판, 17승4패를 기록했습니다. 매일 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치다 싶은데... 전기리그만 놓고 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총 18경기에서 최동원이 13승1패를 기록한 겁니다. 전기 1,2차 리그를 합한 롯데의 성적은 18승2패.

이런 말이 안 되는 기록이 가능했던 건 당시의 진행 방식입니다. 일단 10팀이 풀리그를 벌이면 경기수는 총 45경기. 하루 3~4경기씩 약 2주에 걸쳐 대회가 진행됩니다. 매일 한 경기씩 완투하던 최동원에겐 이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대회 끝나면 또 몇달 푹 쉬지 뭐", 이런 식). 성인야구라고는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얘기했듯 30대 선수라곤 리그 전체에 한두명 있을까 말까 한 젊은 리그에서 최동원을 막을 적수는 김시진 정도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전기 1,2차 리그를 휩쓴 롯데는 후기 리그에선 다소 부진합니다. 최동원이 지친 탓인지, 아니면 굳이 코리언시리즈를 없앨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후기 우승은 경리단에게 돌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5판 3선승제의 코리언시리즈가 개막된 겁니다.

이 무렵, 메이저리그의 관심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같은해 9월, 결국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했다는 AP 통신의 보도, 그리고 계약이 "사기계약이라 무산됐다"는 최윤식씨의 발표, 이어 왜 사기계약인지에 대한 해설 기사 등등이 등장합니다.

이런 상황을 정리한 1981년 9월24일자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좀 길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전재합니다.

금테안경을 끼고 시속 1백5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한국야구의 간판스타 최동원(23·롯데자이언츠)이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컨리그 소속인 터론토 블루 제이즈팀과 입단계약을 맺었다는 23일의 AP통신 보도는 국내 야구계를 흥분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뉴스였다.
결론적으로 최동원의 캐나다 터론토에 프랜차이즈(전용구장)를 둔 블루 제이즈 입단은 현재 양측의 조건이 엇갈려 결렬상태에 있다고 최의 전권을 쥐고있는 부친 최윤식씨(52)가 23일 밝혔다.
<정부차원 타결모색>
그러나 최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 블루제이즈 구단은 스카우트의 관건이 되는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의 고위인사가 오는 27일 방한하는 캐나다 「트뤼도」수상 일행과 함께 와 한국정부측에 비공식으로 요청할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는 AP통신이 『블루제이즈측은 최의 병역문제를 28일 한국정부가 보류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농구 전 국가대표 김명자씨가 통역>
한편 최동원의 블루 제이즈 입단계약은 지난 15일 서울 플라자호텔 18층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고 부친 최씨가 말했다.
전 국가대표 여자 농구선수인 김명자씨(36)가 스카우터들이 와 14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롯데-성무와의 경기를 보고 15일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은 완투, 2-0으로 패했으나 스피드건으로 구속을 잰 이들은 만족을 표시했다.
김명자씨의 남편인 미국인「프랭키·위키」씨(미8군 골프클럽지배인)는 터론토에 오래 거주한 일이 있어 블루제이즈측은 이들 부부를 통역으로 내세운 것이다.
열렬한 스포츠맨인「위키」씨는 『만일 내 한 팔을 잘라 내 아들이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기꺼이 이를 해내겠다』고 극언할 정도로 흥분되어 이번 일에 성의를 다해 도와주었다는 최씨의 설명이다. 15일 밤 플라자호텔에서 블루제이즈 구단의 지난25년동안 스카우트요원으로 활약한 「엘리어트·웨일」인사담당관을 비롯, 「봅·주크」감독, 그리고 「웨인·모건」스카우터 등 3명을 혼자서 만난 최씨는 계약금 20만 달러(약1억4천 만원)에 연봉 20만 달러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메이저리그 규약상 신인에겐 첫해에 연봉 3만2천5백 달러(약2천2백75만원)이상을 줄 수 없으며 2년째부터 향후 4년 동안 총계 61만 달러(약4억2천7백만원)를 지급하는 조건의 계약서를 제시해왔다.
<깨알같은 계약서>
최씨는 약간 미심쩍기는 했지만 깨알같은 글씨로 장장 7면에 걸친 계약서를 얼른 알 수도 없어 사인을 한 뒤 사본을 하나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최씨는 메이저리그 신인선수의 연봉 최하한선이 3만2천5백 달러라는 조항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계약에 따라선 이 이상 제한 없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씨가 사기계약을 했으므로 계약서를 파기하고 안하는 경우 출국정지를 요청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당황한 이들은 계약은 무효로 하되 본사와의 관계로 계약서를 폐기할 수는 없다며 17일 떠났다. 최씨는 자기아들을 높이 평가하여 이역만리를 찾아온 손님들이어서 계약파기만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23일 느닷없이 외신으로 입단계약이 이루어졌다는 보도에 놀라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최동원은 최근 로스앤젤레스 다저즈 팀에서도 관심을 표시하고 있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되는 경우엔 이 블루제이즈와의 계약이 불씨로 남게 됐는데 최씨도 이점은 시인하고 있다.
한편 최동원은 오는 28일 병역문제가 해결되는 경우 블루제이즈 팀의 입단가능성이 남아있어 앞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요점만 말하면, 신인 연봉 상한선이라는 말을 믿고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하한선이었다는 것이고, 이를 속인 데 항의해 계약무효를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루제이스 측은 최윤식씨가 서명한 계약서를 파기하지 않았고, 향후 몇년간 기회 있을 때마다 최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은퇴설이 아버지 최윤식씨에 의해 제기됩니다. 이런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 최동원 측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별 실현 가능성 없는 '은퇴'같은 말이 나온 것은 좀 아쉽다고나 할까요.

○…한국야구의 간판투수인 최동원 (23·롯데) 을 둘러싸고 화제와 잡음이 꼬리를 물고있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인 터론토 블루제이즈 입단여부로 화재를 뿌렸던 최동원이 이번에는 은퇴설이 나돌아 야구계를 아연케하고 있다. 연세대 진학과 지난해 롯데입단 때도 잦은 후문을 낳았던 최동원의 이번 은퇴설은 잡음의 극치를 이룬 느낌.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51)는『잘하면 잘하는 대로 인정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는데도 조금만 잘못하면 탓하고 인기에 먹칠을 하는 현재의 국내야구풍토에서는 더 이상 야구를 시키고 싶지 않다』면서『롯데를 떠나기 위해서라도 오는 25일부터 열리는 롯데­경리단의 코리언시리즈를 끝으로 은튀 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해 롯데와의 심한 불화관계를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최씨는 『외국에 나가는 길이 있으면 내보내겠다』는 아리송한 말을 해 은퇴는 미국프로야구진출을 위한 연막으로 해석하는 야구인들이 많다.
이같은 최씨의 발언은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둔데다 체육특기자의 병역혜택이 발표된·직후에 일어난 것이어서 야구팬들의 기대를 저버린 약삭 빠른 태도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동원과 함께 청주에 전지훈련중인 박영길 롯데감독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더구나 코리언시리즈라는 큰 대회를 앞두고 일어난 것이어서 지극히 유감스럽다』고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뭏든 앞으로의 최동원의 진로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있다.

네. 진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렇게 뒤숭숭한 가운데 코리언시리즈가 시작됩니다. 후기리그 들어 최동원이 부진 아닌 부진을 보인 결과 롯데가 후기 우승을 경리단에 내줬다는 점에서, 혹시 최동원이 메이저리그 진출 실패에 따른 의욕 부진으로 흔들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기우였습니다.

(물론 롯데 구단이 메이저리그 진출 포기에 상응하는 다른 당근을 제시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또 이해 하반기부터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 새롭게 의욕에 불을 질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81년의 최동원-김시진 시리즈를 84년 한국시리즈의 전초전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필생의 동갑내기 라이벌과 맞붙어 6경기 전부를 등판하고 2승을 올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84년 시리즈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3승1무2패로 롯데가 경리단을 꺾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거죠.

당시의 보도.

끈기의 롯데가 2년만에 실업야구 왕자자리에 복귀했다. 초반2연패를 기록했던 롯데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코리언시리즈 6차전에서 7회초 9번 손상대의 천금같은 결승꼴로훔런으로 지난해 우승팀인 훈리단을 6-4로 물리치고 79년에 이어 2년만에우승을 되찾았다.
롯데는 월드시리즈에서의 로스앤젤레스다저즈가 2연패후 내리 4연승을 거두고 괘권을 안은 것처럼 초반 2연패 후. 3연승을 기록, 일대 역전승을 장식한것이다.
한편 롯데의 최동원은 최우수선수 (MVP)·최다승리투수 (17승4패) 그리고 신인투수상등 3관왕을, 이해창은 최고 수훈상을 각각 차지했다.
이날 롯데는 최동원을 6게임째 등판시켰고, 경리단은 권영호·김시진 (6회)을 계투시켜 숨가쁜 한판승부를 펼쳤다.


다만 이때 적인 경리단에 김시진과 권영호만 있었다면 84년에는 황금박쥐 김일융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이 하나 더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라마틱하다고 할까요. 어쨌든 이 81년 시리즈가 '최동원의 전설'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 당시를 사셨던 분들에게도 이 81년 시리즈는 큰 이슈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치 '실업야구' 자체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가 아니었죠. 코리언 시리즈 기사가 신문 스포츠면의 톱도 아니고 2단 기사 정도로 처리됐으니 말입니다. 81년 한국 야구계의 가장 큰 스타는 이미 최동원이 아니라 박노준이었고, 이 해의 가장 큰 사건은 최동원의 성인야구 데뷔와 스윕이 아니라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박노준의 발목이 부러진 것이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최동원이 우승을 했다 해도 '뭐 한국 야구는 원래 최동원인데...'하는 것이 일반 통념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이 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오히려 최동원이 실업야구에 진출해 우승하지 못했다면 '최동원도 이제 한물 갔구나'하는 게 뉴스가 됐을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이 드라마틱하게 바뀝니다. 1981년 10월말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발표가 나자 이듬해인 82년부터 당장 리그 시작이 확정될 정도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82년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라 83년에 개막한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도 당시의 '하면 된다' 분위기에서는 어림없었을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대회가 한국의 우승으로 끝났고, 선동렬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투수가 발굴됐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당시 대표팀의 면면을 소개하는 선에서 마쳐야 할 듯 합니다. 감질나시겠지만 하나 더 써야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야구협회는 20일 오는 9월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잠실구장및 서울운동장·인천구장에서 열릴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선수23명을 최종확정하고 단장에 김상겸 부회장을 선임했다.
12월 선발한 국가대표상비군 28명중 그동안 국내성적과 대만전지훈련 (2월)결과를 토대로 윤학길 김정수(이상 연세대) 이상군(한양대) 김봉근(동국대) 김상기(인하대) 등 투수5명을 제외하고 포수및 내·외야수들은 그대로 선발, 오는 26일부터 영동유드호스텔에서 합동훈련에 들어가기로했다.
최종확정돤 대표선수를 보면 실업에서는 최동원 임호균 (이상한전) 김시진 장효조(이상경리단) 김재박 이해창 (이상한화) 등 11명이며 대학에서는 선동렬 박노준 김정수(이상고려대) 박영태 조성옥 김상훈 (이상동아대) 오영일 김진우(이상인하대)등 12명으로 구성, 대학과 실업, 노장과 신예가 조화를 이루고있다. 사상 처음 대회를 유치한 한국은 이번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있으나 힘의 야구를 구사하고있는 쿠바·미국·일본등이 도사리고 있는데다 올해 프로야구출범으로 경험있는 많은 유망선수들이 프로로 진출, 우승을 차지하는데는 다소 어두운 전망이다.
이번대표팀의 평균연령은 21.1세에 평균신장 178.2cm, 타율2할8푼으로 되어있다.
한편 어우홍대표팀 감독(한전)은 『프로로 많은 선수를 빼앗겨 경험이 부족한것이 흠이지만 노련한 실업선수들과 패기의 대학선수들이 잘만 조화된다면 쿠바·미국등과 한번 겨뤄볼만하다』면서『14일동안 11게임을 치러야하기때문에 평균연령이 22.1세로 구성된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표팁명단
▲단강=김상겸 ▲총무=김진영(인하대감독) ▲감독=어우홍 ▲코치=배성서(한양대) 김 충 (상업은)▲투수=김시진 (23 189cm) 최동원 (25·179cm) 임호균 (26·l75cm·이상 한전) 선동렬(20·183cm) 박노준(21·178cm·이상 고려대) 오영일(22·185m·인하대) 박동수(22· 174cm·동아대) ▲포수=심재원(29·178cm·한화) 김진우(25·l88cm·인하대) 한문연(22·l73cm·동아대) ▲내야수=김상훈(23·180cm) 박영태(24·180cm·이상 동아대) 이석규(24·178cm ) 정구선(25·178cm·이상경리단)한대화(21·177cm·동국대) 김재박(28·174cm·한화) 이선웅(22·173cm·인하대)▲외야수=이해창 (29·180cm·한화) 장효조 (25·174cm·경리단) 박종훈 (23·176cm·상업은) 유두열 (27·172cm·한전) 조성옥 (22·176cm·동아대) 김정수(23·177cm·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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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에 대해 늘 나오는 얘기는 '단기전에서는 최강이었고 타자를 압도하는 기세가 일품이었지만 젊어서 너무 혹사당한 탓에 투수로서 단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환경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리 짧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대투수를 나름대로 조상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77~1981년의 시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고교야구였고, 성인야구에도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지만 후대에까지 전설로 불릴 만한 스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꼽자면 최동원, 장효조, 그리고 김재박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세 선수는 각자 자기 포지션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위세를 뿜어내고 있었죠.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교야구 사상 최강의 강타자들이었던 한양대의 이만수와 고려대의 김정수가 차세대 스타의 자리를 예약하고 있던, 그리고 선동렬과 박노준이 갓 고교야구 스타로 발돋움할 시점입니다.





77년 연세대에 입학한 직후부터 최동원은 곧바로 국내 최고 투수로 공인을 받게 됩니다. 고교야구 시절 한 경기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며 최고의 재목으로 꼽히기는 했지만, 당시 경남고의 전력은 최동원을 제외하면 큰 기대를 가질 수준이 아니었죠. 아무리 최동원이 잘 던져도 늘 이길 수 없는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세대는 달랐습니다. 고려대 입학 약속을 하루 아침에 뒤집고 최동원이 연세대에 입학한 77년은 바로 전력이 급상승하는 해였던 겁니다. 이미 박철순, 배경환 등 뛰어난 투수들이 있었던데다 실업야구의 강타자이자 국내 최고 포수 중 하나였던 박해종이 뒤늦게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합니다. 또 3년 선배로 '투수에서 포수까지 전 포지션을 뛸 수 있다'던 만능 선수 이광은과 그의 배재고 동기인 철완의 외야수 신언호가 있었고, 역시 강타자 김봉연도 이 해에 복학합니다. 최동원과 합께 입학한 강타자 양세종도 빼놓을 수 없죠.



(만약 최동원이 당시 고려대로 갔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 김윤환 우경하 등 강타자들과 또 한팀을 만들었겠지만 연세대만큼 강한 팀이 되지는 못했을 듯 합니다. '최동원의 연세대'를 이기기 위해 고려대는 이듬해부터 김경문 박종훈(78년)은 물론 79년에는 양상문 김호근 김정수 김남수라는, 당대 고교야구의 '빅4'를 모두 잡아오는 등 필사적인 추격을 펼칩니다....만, 최동원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전력의 뒷받침 속에서 최동원은 최고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힙니다. 그해 대학야구 4관왕에 오른 것은 물론, 곧바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자마자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을 해 버립니다. 물론 쿠바가 불참한 대회라는 것도 최동원의 행운 중 하나일 겁니다. 이 대표팀 마운드에서 최동원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가 승승장구,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몇가지 좋은 여건이 따랐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대로 경남고 졸업 직후 그를 포함해 전력이 최고조에 이른 연세대에 입학한 것. 그리고 둘째는 좋은 동년배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 대표팀입니다. 7명의 투수 중 3명이 실업, 4명이 대학 선수일 정도로 대학생의 비중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 설명합니다.)




고교시절부터 동갑내기 최동원-김시진-김용남은 최강의 트리오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77년, 최동원이 대학에 입학한 이후 김용남은 약간 빛을 잃고, 이들보다 2년 선배인 임호균을 합해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이 국가대표 마운드의 1,2,3번 투수가 됩니다.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팀이 이 최-김-임 트리오의 데뷔 무대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트리오는 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선동렬이라는 새로운 에이스가 등장할 때까지 한국 야구의 최고 투수 자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78년 고교야구에서도 양상문(좋은 투수라는 것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부산 출신에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제2의 최동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상윤, 장호연, 양일환 등 우수한 투수들이 대거 배출됐지만 이 세대 역시 최동원과 김시진을 넘어설 만한 대 투수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한국 야구의 주축으로 일찍 떠오르게 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 이들이 뛰어난 투수였기 때문이지만, 당시 실업야구의 조로현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대학 3~4년차, 졸업후 3~4년째까지가 전성기였고 그 뒤로는 아예 은퇴를 하거나 실력이 내리막을 걸었던 것이 이 시기에는 상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엘리트 선수의 코스는 대략 이렇습니다. 고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실업팀에 스카웃됩니다. 이후 2~3년간 선수로 뛰다가(대개 야간대학원 진학 등의 편법을 쓰는 거죠), 군에 입대합니다. 당시엔 성무(공군)와 경리단(육군)이 라이벌 관계로 실업야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대할 시점이면 서른 전후.

대단한 엘리트 선수가 아니면 은퇴를 해 일반 직원으로 변신하거나 - 은행 팀들이 실업야구의 주축일 때에는 많은 선수들이 은행원으로 변신했습니다 - 지도자가 되는게 대략의 길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은행 팀에 입단하면 '평생직장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대학에 스카웃될 수 있는 우수 선수들 가운데서도 고교 졸업 직후 은행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례를 보면 더 느낌이 옵니다. 김응용 감독이 한일은행 선수에서 은퇴해 감독이 된 건 만 31세 때인 1972년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69년 일찍 은퇴하기도 했지만 실업야구 기업은행 감독이 된게 만 30세 때인 1972년이죠. 코치도 아니고 감독이 서른살 언저리였다면 한국 성인야구가 얼마나 젊은 팀이었는지 아실만 할 겁니다.

(이때문에 프로 출범 직전인 1981년, 현역 선수였던 33세의 김우열이나 32세의 윤동균은 전 실업야구 리그를 통틀어 대단히 희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28세의 김봉연이 '대단한 노장' 대접을 받았으니 뭐 말할 것도 없죠.)


다시 77년으로 돌아가, 이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19세의 최동원이 한국 야구의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프로야구 출범이 선수들의 수명을 엄청나게 늘려 놓은 지금의 시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선수들은 체계적인 몸관리가 필요 없었던 겁니다.

어차피 야구는 '서른 넘으면 그만 두는 종목'이었고, 웨이트 트레이닝은 '쓸데 없는 근육을 만들어 배팅 스피드를 줄이는', 절대 하면 안되는 운동이었죠. 당시의 투수들이 어깨가 아파도 계속 던졌고, 지도자들이 그걸 그냥 용인했던 것은 '서른 넘으면 쓸 일도 없는 어깨'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던졌다가 오늘 또 던지고, 아프면 약 먹고 던지고 하는게 상식이던 시절입니다.

1978년 6월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저 위 기사를 보면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 대회에서 42이닝, 그것도 준결승-결승은 이틀동안 연장전 포함 27이닝을 혼자 던졌다는 얘깁니다. 요즘 프로야구의 '노예'라고 불리는 투수들은 여기에 비하면 왕족이죠.

하지만 기사 어디에서도 '혹사'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예 그런 개념이 없던 시대였던 겁니다. 최동원은 이런 70년대 야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투수가 1980년대 이후에 배출됐다면... 뭐 일찌감치 메이저리그에 가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군요.

아무튼 그 최동원은 바로 그 77년부터 미국 일본 프로야구의 주목을 받습니다. 오라는 데 많은 바쁘신 몸이 된 겁니다. 나중엔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다가 파기를 선언, 계약위반이니 뭐니 시끄럽기도 했고 스카우트 파문에 짜증이 난 최동원이 은퇴를 선언하는 등 진통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학 재학기간 중에는 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심이 쏟아졌죠. 재일교포가 구단주인 롯데 오리온즈(지바 롯데 마린스의 전신)로 가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가장 많았습니다.



거기다 79년에는 구타에 항의한 팀 이탈 사건도 벌어졌고, 이때 세상의 반응은 '아니 어떻게 최동원 같은 스타를 때릴 수가 있느냐'는 것과, '마운드에서도 건방져 보이더니 오죽하면 선배들한테 맞았겠느냐'는 것으로 양분됐습니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죠.

일단은 여기서 한번 자르겠습니다. 예상대로 길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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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만화에는 대개 주인공과 맞수인 완벽한 야구 선수가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 못잖게 유명했던 마동탁이죠. 그런데 한국 야구에는 그런 타자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만화같았던 타자입니다.

그 타자, 한때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에 비견되어 '작은 장훈'이라고 불렸던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고인이 됐습니다. 왕년의 야구소년 눈에 불가능이 없는 타자로 여겨졌던 거인이 이렇게 빨리 전설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요즘 정신이 사람 정신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강타자 장효조'를 얘기할 때 프로 진출 이후를 얘기하곤 합니다. 4회의 타격왕, .331의 통산 타율.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한 천재타자가 어느 야구소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날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뭐 직접 만났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1978년. 서울 동대문구장(당시 이름은 서울운동장)에서 드문 볼거리 하나가 등장합니다. 한미 대학야구. 미국 NAIA 소속 대학야구 선수 15명으로 구성된 팀이 내한해 한국 대학선발팀과 경기를 가졌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대학선발이라면 그냥 무명 선수들의 집합체 정도로 생각되겠지만, 프로가 없던 시절 대학선발팀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멤버는 이랬답니다.

◇대학선발야구단
▲단장=이봉모 ▲부단장=이팔관 ▲총무=신현철 ▲감독=김진영(중대감독) ▲「코치」=배성서(동국대감독) 강태정(건대감독) ▲투수=최동원(연대) 김시진(한대) 노상수(고대) 유종겸 선우대영(이상 중대) 김성한(동국대) 임호균(동아대) ▲포수=박해종(연대) 조종규(건대) ▲내야수=김봉연 정진호 양세종(이상 연대) 김진근(성대) 김한근(한대) 정학수(동아대) ▲외야수=김우근 송진호(이상 건대) 장효조(한대) 박종훈(고대) 양승관(인하대)

사실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은 당시 한국 야구의 넘버 1, 2, 3 투수들이었습니다. 김성한이 투수로 들어 있는데 놀랄 젊은(?) 야구팬들도 있겠지만 당시의 김성한은 조계현이나 이광은 등과 함께 손꼽히는 투타 겸업의 천재 선수였습니다. 프로 원년에 거둔 10승은 우연이 아니었죠.

최동원-박해종의 배터리는 당연히 국가대표 주전이었고, 박해종-김봉연-장효조 역시 국가대표에서도 클린업 트리오에 해당했습니다. 이 시절에도 실업야구가 있었지만 박해종이나 김봉연은 사실 실업야구에 먼저 진출했다가 대학으로 U턴한 경우라 나이는 일반 대학생보다 한참 위였습니다. 경험 면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거죠.

그 해의 국가대표 명단입니다.

▲감독=김응룡(한일은) ▲「코치」=한을룡(한전)·이재환(연대) ▲투수=이선희(경리단) 최동원(연대) 김시진(한대) 유남호(롯데) 박철순(성무) 권영호(한국화장) 이광권(한전) ▲포수=심재원(한국화장) 박해종(연대) ▲내야수=김봉연(연대) 천보성(성무) 김재박 김일환(이상 한국화장) 배대웅(포철) 구영석(상은) ▲외야수=장효조(한대) 김일권 이해창 김준환(이상 경리단) 김우열(제일은)

면면을 보시면 대부분 프로야구 초창기를 빛낸 스타플레이어들입니다. 아무튼 국가대표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던 쟁쟁한 선수들이 대학선발의 주축을 이뤄 미국에서 온 선수들과 붙었습니다. 

WBC를 거치고, 박찬호 추신수의 시대를 보면서 현재의 야구팬들은 미국 야구에 대해 별다른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 야구만 해도 장훈, 백인천의 활약 덕분에 크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체격 면에서 압도적인 '미국 야구'는 '절대 한국인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란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죠. 아마 지금도 현저한 '한국 농구와 미국 농구' 정도의 차이, 혹은 '한국 육상과 미국 육상의 차이' 정도를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미국 본토의 대학야구 선수들'은 어떤 수준일까 하는 궁금증 속에 대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7월23일, 한국은 당연히 에이스 최동원을 등판시켰고, 최동원은 5회까지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하고 타선은 4점을 뽑아 이길 듯한 기미를 보입니다. 하지만 6회 최동원은 투런 홈런을 맞아 4-3으로 쫓긴 채 마운드를 김시진에게 넘기고, 김시진이 역전 3점포를 허용하면서 5-7로 첫판을 내줍니다.

한국의 충격은 사뭇 컸습니다. 최고 투수인 최동원과 김시진, 임호균을 모두 동원해서도 미국 타선을 봉쇄하지 못했고, 타자들은 나름 분전했지만 거구의 미국 타자들에게 동대문구장은 작게만 보였습니다. 게다가 야수들의 다이빙 캐치, 외야에서 홈으로 '쏘는' 송구 등은 그때까지 한국야구에서 볼 수 없는 허슬플레이였습니다. '본토 야구는 강하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던 겁니다. 당연히 첫판 이후 비관론(...'론'이라봐야 동네 여론이지만)이 번졌습니다.

하지만 둘째판부터 상황이 일변했습니다. 첫날 '역시 김시진은 안돼(큰 경기에 약한 경향...ㅋ)' 소리를 듣던 김시진이 9이닝을 2실점으로 완투하고 타선이 대폭발하며 13대2, 대승으로 첫날 패배를 설욕한 것입니다. 이렇게 1대1이 된 상황, 3차전에 관심이 몰렸습니다.

여기서 장효조의 한방이 전설을 만듭니다. 1978년 7월25일, 당시만 해도 전력 사정으로 보기 쉽지 않았던 야간 경기(흔히 '나이터'라고 불렸죠) 때의 일입니다.


3차전은 한국의 승세가 초반 빛을 발했습니다. 선발 임호균은 5회까지 단 1안타로 호투했고, 타선은 박해종의 3점포를 포함해 5-0으로 앞섰습니다. 하지만 호투하던 임호균은 일순 흔들려 만루홈런을 허용해버립니다. 5-4로 쫓긴 상황. 1차전의 홈런 역전패가 팬들의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도 찬스가 돌아왔습니다. 7회. 1사 만루에서 4번 김봉연이 타석에 섰습니다. 하지만 삼진. 그런데 해설자가 묘한 말을 합니다. "병살타보다는 삼진당한게 나아요." 1차전 막판의 역전 찬스를 병살타로 날린 김봉연에 대한 질책인지, 아니면 5번 장효조에 대한 기대인지, 요즘 같으면 해설자들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해 버린 겁니다. (사실 김봉연은 1~3차전에서 연속 홈런을 치는 좋은 컨디션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서 2사 만루, 타석에는 한국에서 가장 잘 친다는 장효조. 물론 프로 데뷔 후의 장효조를 기억하는 분들에겐 '딱총'의 이미지가 강하겠지만 당시의 장효조는 당당한 홈런타자였습니다. 프로 데뷔 시즌인 1983년에도 18개의 홈런을 쳤을 정도로, 당시의 장효조는 장/단타를 가리지 않는 타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프로야구가 시작된 이후, 그의 체구가 그렇게 작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5-4로 쫓긴 7회, 2사 만루, 2-3의 극적인 상황에서 장효조는 왼쪽 담장을 살짝 넘기는 만루홈런을 터뜨려버립니다. 당시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밀어 친 홈런'. 9-4. 온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야구를 보면서 이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준 홈런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장효조는 소년에게 야구의 신이 되었습니다. 전혀 관심 없던 대학야구도 챙겨 보기 시작했죠. 대학야구에서도 장효조는 평균 4할 이상의 강타자였고, 타자 개인의 힘으로 경기를 뒤집어 놓는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국가대표에서도 그 이상 믿을 수 있는 타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삼성의 잇단 한국시리즈 패배와 함께 '찬스에 약한 타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아무튼 프로 진출 이후,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였지만 1978년 한미대학야구 3차전에서처럼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영화같은 활약'은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물론 이 분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1983년 타격왕을 차지하고도 신인왕을 박종훈 현 LG감독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대개 '신선하지 않다'는 이유(물론 아마 시절 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스타였던 장효조에게 새삼 신인왕을 주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로 주로 설명하지만, 많은 야구인들은 '안하무인'이라는 주변의 평가도 큰 역할을 했다고도 증언합니다.

또 호타준족이었지만 수비만큼은 도저히 칭찬할 수 없었다는 것 역시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에서는 주로 우익수로 출전했지만 아마 시절만 해도 1루수나 지명타자 출전이 많았죠. 특히 결정적인 포구 미스가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신의 솜씨라는 것 역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때 야구 기자였던 시절, 원로 심판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포수 미트로 들어오는 공을 보면 베테랑 심판들은 공이 들어 오기 0.1초 전에 '아, 삼진이구나', 혹은 '치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겁니다. 공의 방향, 스피드, 타자의 자세(어느 코스를 기다리는구나)를 본 상태에서의 종합적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측을 어김없이 비웃는 타자가 바로 장효조였다는 거죠. '절대 칠 수 없는 코스. 헛스윙이나 루킹 삼진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믿을 수 없는 각도에서 배트가 나와 커트를 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또 이럴 때마다 장효조 타자는 심판을 보면서 씩 웃었다고 합니다. '어때, 못 칠줄 알았지?'하는 표정으로. 이심전심인 거죠.

여기에 위 도표를 보시면 경기수에 비해 안타수가 엄청나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건 아무 공이나 치는 타자가 아니라 끝까지 기다리는 타자였다는 것이죠. 실제로 타격 1위는 통산 4번이지만 출루율 1위는 6번입니다.

1m72의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이런 경이적인 선구안, 앞에서 말한 배트 컨트롤, 거기에 '글러브 안에 들어온 공도 친다'는 배트 스피드. 그것이 '장효조의 전설'을 만든 것입니다.


그날의 신화가 생각나는 밤. 추모의 뜻을 담아 두서없이 정리해봤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사실 옛날 기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저도 제 기억이 맞는지 반신반의했습니다. 한점차로 쫓긴 상황, 2사만루 2-3 풀카운트에서 나온 만루홈런. 그런데 정말 기억 그대로더군요. 가끔 기억이 전설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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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감독은 나이답지 않게 요즘 단문 메시지를 즐기는 듯 합니다. 며칠 전, 차감독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골많이 넣는 공격수라고 페널티킥 잘 차는것 아니야. 배짱이 좋아야해. 나 어제 (일본 대표팀의 수비수)고마노가 실축하는거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더라. 승부차기, 그거 진짜 만만치 않아. 5분동안 3골씩 넣는 나도 그건 어렵다니까" 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서 기사화됐습니다.

물론 일본-파라과이전의 승부차기를 보고 승부차기의 어려움에 대해 쓴 글이지만 글 말미에 있는 '5분에 3골'이라는 말에 옛 생각이 되살아났습니다. 바로 70년대, 월드컵보다 한국인들에겐 더 인기있었던 '박스컵'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으실 겁니다. '차범근 신화'의 수많은 클라이막스 중 하나인 이 '5분에 3골'이 터진 건 바로 1976년의 일이었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경신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던 1972년, 이미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에 동시 선발됐습니다. 만 19세의 나이로 한국의 에이스가 될 가능성을 보인 것이죠. 그 뒤로 100m를 11초4에 뛰는 준족, 탁월한 골 결정력, 공을 몰고도 옆에서 그냥 뛰는 수비수보다 빠르다는 무서운 돌파력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발돋움합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긴 했지만, 번번이 올림픽과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놓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월드컵 예선에서는 호주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수시로 한국을 위협했습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일본보다 이들 동남아 국가들이 축구 강국의 면모를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이 시기 한국 축구팀의 주요 활동 영역은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과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였습니다. 특히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흔히 '박스컵'이라고 불렸던 이 대회는 한국이 주최국으로서 2개 팀을 출전시키고, 아시아 각국과 해외의 몇몇 클럽 팀들을 초청해 벌이는 대회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고교야구였지만 그 고교야구도 박스컵만큼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 개최국인 한국은 1진인 화랑과 2진인 충무를 박스컵에 출전시킵니다. 당연히 차범근은 1진인 화랑의 주전 라이트윙. 물론 충무도 허정무 조광래 신현호 박창선 김황호 등 몇년 뒤 한국 축구사를 장식할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이었습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볼때는 차범근만 빼면 충무의 라인업이 더 화려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당시 화랑에 걸린 기대는 당연히 홈팀으로서 우승. 하지만 바로 첫날 첫 경기에서 화랑은 엄청난 위기를 겪습니다. 1976년, 제6회 박대통령배 축구대회 개막일인 9월11일, 화랑은 아시아의 난적 말레이시아와 개막전을 치렀습니다.

              < 불행히도 이긴 경기가 비긴 경기보다 우선이라는 당시 판단 때문에 차범근이 헤드라인을 장식하진 못했습니다.>



이날 화랑의 출전 선수 명단은 이렇습니다. GK 김희천(김진복) FB 강병찬 김호곤 김철수(박성화) 황재만 HB 최종덕 박상인 FW 이영무 차범근 조동현 김진국. 문정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는 거의 대다수 국가들이 4-2-4를 축구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입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이 뛰어넘기 힘든 강팀은 분명 아니었지만, 언제나 한국과는 시소 게임을 펼쳤던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경기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한국이 전반에만 0-3으로 뒤졌던 겁니다. 특히 GK와 수비의 호흡 불일치로 자책골까지 허용한게 더욱 나빴습니다.

전열을 정비한 화랑은 후반 24분 박상인의 골로 추격했으나 34분 다시 한골을 허용해 1-4로 패색이 짙던 상황. 그러나 차범근이 38분, 42분, 43분 연속으로 세 골을 넣어 4대4, 기적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냈습니다.

당시의 차범근은 그야말로 누구도 막지 못할 선수였습니다. 말레이시아 선수들이 공을 끌고 나올 때마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인터셉트해 골로 연결시키는 솜씨는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 같은 차이를 보였죠.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의 마라도나를 연상하시는게 가장 좋은 비교일 듯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차범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새긴 '5분에 3골'의 전설입니다. 이전까지도 차범근은 한국의 희망이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까지 '한국 최고의 골잡이'를 물으면 '이회택'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겁니다. 아울러 당대에도 김진국 김재한 등 걸출한 스트라이커들이 이었고, 차범근은 '그중 하나'였죠. 하지만 이날, 4대4의 기적을 이끌어 낸 뒤 한국인들에게는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이 생겼습니다.

결국 이렇게 첫 경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화랑은 그 뒤로는 승승장구 예선을 통과, 결승에서 브라질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0대0으로 비기고 공동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대회에서 차범근은 말레이시아전의 해트트릭을 포함, 7골 4어시스트로 맹활약해 한국 우승의 일등공신이 됩니다.



물론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선수로 남긴 업적과 그의 전설에 대해서는 책 한권을 써도 부족할 겁니다. 이보다 전에도, 그 뒤에도 얘깃거리는 많지만 한번에 다 풀어놓기는 힘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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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싸웠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솔직히 말해 16강이 쉬운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얘기한 적 있지만 1986년 이후 지금까지 16강에 한번이라도 가본 나라는 40개국, 두번 16강에 오른 나라는 27개국뿐입니다.

우루과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한 16강전에서도 역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 대단하다는 포를란을 봉쇄했고, 더 많이 뛰었고, 기대 이상으로 미드필드를 장악했습니다. 아르헨티나전 대패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상대 공격을 차단해나갔습니다.

종료 휘슬과 함께 경기장에 쓰러져버린 선수들의 아쉬움이야 뭐 더 이상 얘기할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말마따나 이번 대회는 희망의 대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중심에 이청용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청용은 이번 대회 전이라고 무명 선수도 아니었습니다. 양박쌍용이라는 미디어의 호들갑이 대변해주듯, 이미 프리미어리거 이청용은 한국의 핵심 전력이었고, 큰 활약을 해줄 걸로 기대됐던 선수입니다.

한국 대표팀에서 최저 학력을 보유한 선수(중학교 중퇴^)지만 축구 지능은 탁월합니다. 승부욕도 뛰어납니다. 아르헨티나전에서도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고 상대 진영을 '쑤시고' 다니다가 결국 한골을 따낸 건, 선수들이 흔히 '구질구질하다'고 말하는 플레이이기도 하지만 그 시점의 한국으로서는 정말 절실한 한 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욕은 한국 축구의 힘이었습니다.

그런 근성이 바로 오늘날 볼턴 원더러스의 이청용을 만든 거란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이번 대회의 한국 축구가 희망만을 남긴 건 아닙니다. 일단 가장 큰 고민은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사라질 2002년 황금 세대의 퇴장입니다.

이번 대회 내내 한국 축구의 심장이었던 박지성은 4년 뒤 33세가 됩니다. 본인은 이미 은퇴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가장 믿음직한 선수였던 이영표 역시 이번 우루과이전이 국가대표로서의 은퇴 경기라고 말한 바 있죠. 이미 이운재와 안정환은 이번 대회 들어 주전 자리를 내주고 물러 앉았고, 차두리 역시 이번이 마지막 대회일 것이 분명합니다.



박지성 정도면 다시 한번 참가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본인의 뜻이 바뀌어야 할 것이고, 4대회 참가를 성사시킨다 해도 4년 뒤의 박지성에게 지금같은 폭발적인 활동능력과 기량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난세에 영웅이 나듯, 4년 사이에 누군가 새로운 스타들이 등장해서 그 자리를 메워 주길 바라지만 사실 한국 축구의 환경상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엷은 선수층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대표팀 내에 존재하는 선수들간의 '레벨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4년 뒤라고 해서 저절로 박지성-이영표의 빈 자리를 메울 선수들이 등장할 거라는 건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이청용과 기성용, 박주영의 존재 의미는 각별합니다. 박주영에 대해선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이번 대회 내내 아쉬웠던 것은 박주영의 투톱 파트너입니다. 차라리 마지막 순간 제외된 이근호가 나았을 거란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후방과 좌우에서 날아오는 공중볼의 키핑 능력에서는 지난 20년 사이 박주영보다 안정된 선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대회 들어 마지막 터치 한방이 아쉬웠지만, 오히려 박주영에게 공이 가기 전에 슈팅을 기피하던 다른 선수들을 봐선 그들에게 갈 수도 있었던 비난까지 박주영이 싸 안았다고 봐야 할 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몸싸움 능력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과거 청소년 대표 시절의 신영록 같은 스트라이커가 성장해 박주영과 짝을 이뤄 주길 바랍니다.



물론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문제라는 시각에는 당연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 역시 전체적인 한국 축구의 엷은 선수층의 문제라는 걸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어느 나라나 포텐셜이 뛰어난 선수는 수비보다는 공격수로 뛰기 마련이고, 결국 문제는 그렇게 재능있는 선수들로 공격 자원을 채우고 수비수까지 채울 수 있을 정도로 한국에 축구선수가 충분하냐는 문제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김주성이나 현재의 차두리처럼 공격 카드에서 수비수로 모습을 바꾼 선수들의 존재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곤 합니다. (사실 이런 면에선 수비형 미드펄더로 활동 영역을 축소한 2014년 박지성의 모습이 좀 기대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2014년의 한국은 이청용과 기성용, 박주영을 주축으로 새롭게 보강되는 선수들이 주축을 이룰 것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회 직전 빼어난 가능성을 보였던 이승렬이나 김보경의 좀 더 많은 출전시간이 아쉽습니다.

역시 여러번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한국 축구가 '16강을 목표로 하는 팀'에서 '8강을 목표로 하는 팀', 혹은 '우승후보'까지 가기 위해선 아직 더 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1명의 박지성이 있는 팀에서 11명의 박지성이 있는 팀으로, 그리고 스쿼드 전원이 박지성인 팀으로 가는 길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이번 대회에 한국을 좌절시킨 수아레스의 두번째 골은 어떤 호언장담보다도 '월드 클래스'의 공포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골이었습니다. 이번대회에 본 골 중에는 북한-브라질 전에서 마이콘이 넣은 브라질의 첫골과 함께 '개인기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웅변하는 것 같은 골이더군요.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이 터뜨린 두번째 골이 한국 축구사에 남을 대단한 골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에 위에서 말한 두 개의 골 같은 득점을 해낼 수 있는 선수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14년, 2018년이라고 해서 나온다는 보장은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성원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런 천재와 영웅들을 갖고,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됐습니다. 아마도 이런 희망이야말로 2010년의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수록, 22세에 이미 월드컵의 에이스로 떠오른 선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희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청용. 졌다고 부끄러워 마라. 고개를 들어라. 너의 월드컵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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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1986년,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예선을 통과해 한국이 월드컵 무대를 밟았을 때만 해도 모든 여론과 언론은 '16강 가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가공할 대진운과 한국의 실력으로 볼 때 그건 정말 무리하고 무모한 목표였습니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고, 한국 축구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 사이 한번도 빼놓지 않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해에 4강에 가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때 과연 한국이 세계 4강권의 실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하려는 얘기는 이겁니다. 이제 4강도 가 봤고, 4강이 진짜 실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번에 원정 경기에서 16강에 올랐으니 할 말이 있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국제적으로 '축구 좀 하는 나라'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긴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월드컵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축구 팬'들도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대체 16강이란게 뭐길래 이렇게 들썩들썩 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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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체 왜 본선 진출도 16강에 이렇게들 흥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신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16강이라는게 뭐가 어떻게 의미가 있는 건지도 별로 고민 안 해보셨을 겁니다.

한번 궁금해서 예전에 16강에 가 본 나라들이 얼마나 되는지 세 본 적이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하자면, 지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6개 대회에서 16강에 오른 나라들은 모두 96개국입니다. 그런데 아주 당연히, 중복 출전한 나라들이 있기 때문에 그 수는 꽤 적습니다. 모두 40개입니다.

독일, 스웨덴, 스위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 벨기에, 터키,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소련, 노르웨이, (이상 유럽),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칠레, 에쿠아도르, 콜롬비아(이상 남미),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이상 북중미), 카메룬, 가나, 나이지리아, 모로코(이상 아프리카),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호주(이상 아시아).

이중 13개국은 단 한번밖에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2번 이상 16강에 들어 본 나라가 27개국입니다. 즉 이 27개국은 어디 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세계 16강에 올랐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죠. 27개면 250개에 달한다는 피파 회원국 중에서 대략 상위 10%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자랑할 일인 겁니다.

그러니 16강에 한번도 못 가본 나라들은 지금 열거한 40개 정도의 나라들 사이에 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저 40개의 나라들은 더 나아가서 '웬만하면 8강 안에 드는 나라'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당장이라도 꼽을 수 있는 축구 TOP 10의 나라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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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16강에 오름에 따라 한국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16강에 두번 이상 오른 나라'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게 두번, 세번이 되면서 '8강에도 수시로 오를 수 있는 나라'가 되겠죠.

이 정도가 축구를 하는 나라로서는 최고의 영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축구의 세계에서 강국으로서의 인정은 한 대회에서 얼마나 반짝 잘 했느냐보다는 얼마나 자주 16강이나 8강에 올랐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그런 일이 있다는 건 그 나라 축구가 한두명의 기린아에 의해 좌우되는게 아니라, 혹은 어쩌다 대진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강하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개최국이 아닐 때의 성적이 좋겠죠.^^)

한국인은, 혹은 동양인은 다리가 짧아서, 키가 작아서, 체력이 약해서, 유연성이 없어서 안된다고 하셨던 분들도 많았지만 그런 분들은 아마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오른다는 것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AS 모나코에서 한국 선수가 뛴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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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선수 저변입니다. 아르헨티나와 상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저쪽은 박지성이 11명'이라고 했습니다. 틀린 얘깁니다. 저는 "19명의 박지성과, 3명의 골키퍼와, 1명의 메시가 있는 팀"이라고 봐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리스전에 아르헨티나가 1.5군을 내보낸다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팀에서의 1.5군과, 다른 나라의 1.5군을 비교한다는 건 넌센스죠. 예전에 '브라질이 영국처럼 네 팀을 내보내면 어떻게 될까'라는 우스개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답은 '월드컵 결승에서 브라질 1진과 2진이 붙는다'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단 1명의 박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뛰어난 선수 뒤에, 탈 아시아 수준의 선수들도 있고 국제 무대에 내놓기에는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국내에는 그보다 나은 선수가 없어서 대표팀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번째 경우의 선수들이라 해도, 어쨌든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판단하기에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출전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선수단이 나아가 11명의 박지성으로 베스트 일레븐이 채워지고, 그 뒤로 23명의 선수단이 박지성급으로 채워지는 날이 오면, 그제서야 메시 같은 당대의 에이스가 한국 팀에 등장하게 될 겁니다. 이걸 한 순간에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6강은 대단하고 의미있는 성과였고, 미래를 향한 중요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또 이런 대목에서 축구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그냥 인생의 재미 하나를 놓치고 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뭐 그 분들에겐 월드컵보다 중요하고, 훨씬 재미있는게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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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N에서 이번 경기의 MVP를 박주영으로 꼽았다던데, 박주영의 프리킥이 그린 아름다운 궤적도 환상적이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날 한국을 16강에 끌어올린 주역은 박지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전방에서 최종수비진까지, 안 가는데가 없더군요. 심지어 상대 공격 실패 후 흘러나온 공을 전방으로 걷어내는 것도 최종수비수가 아니라 박지성이라는 건(이건 최종수비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위에서도 얘기했듯, 우리가 이 시점에서 박지성 같은 선수를 보유하게 된 건 지난 86년 이후, 또는 지난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대표 축구를 육성시켜 온 수많은 공로자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우연히 박지성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5년 뒤, 혹은 10여년 뒤에 우리 국대의 1진이 11명의 박지성으로 짜여질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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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아침 올라온 응원샷 중 최고의 장면입니다. 아주머니 만세!


P.S. 이번 월드컵 들어 (1) 대진운 아주 좋다 (2) 그리스가 한건 해주길 빌어야 한다 (3) 1승1패 이후 16강 전망 밝다 (4) 박주영이 나이지리아전에서 한건 해준다 모두 대략 얼추 적중하고 있어서 매우 고무돼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 더 해볼랍니다. "덴마크, 16강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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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한판 승부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한국의 16강 향방을 가늠하게 됐습니다. 비관과 낙관이 교차했지만, 아무튼 역대 월드컵에서 조별 예전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 놓았을 때의 상황들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나은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수영복 챙겨서 휴가 떠나듯 가벼운 마음은 아니겠지만, 무리하게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깝게 2006년, 첫 두 경기에서 한국은 1승1무를 기록해 전적면에선 1승1패인 올해보다 나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지금보다 무척 나빴습니다. 2패를 기록한 토고가 최종전에서 2무였지만 외형상 최강인 프랑스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1승1무인 스위스와 비겨도 조 3위로 탈락하는 묘한 상황에 놓였었죠.

아무튼 그건 그렇고, 한국은 최종전에서 맞붙을 나이지리아와 5년 전에 치열한 명승부를 펼친 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결에서 박주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죠. 왠지 그 경기가 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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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U-20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은 정말 역대 최악의 조편성을 맞습니다. 같은 조의 멤버들이 바로 브라질, 나이지리아, 스위스였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슈퍼 이글 나이지리아는 특히나 청소년 레벨에서 강한 나라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죠. 그나마 스위스가 '해볼만 한 팀'으로 꼽혔는데, 결국 이 대회에서 두각을 보인 센데로스, 바르네타, 볼란텐 등이 스위스를 2006년과 2010년 잇달아 스위스를 바늘구멍같은 유럽 예선을 뚫고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 주역으로 성장합니다.

한마디로 상대 세 팀 모두 후덜덜, 조편성을 놓고 보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때 한국에도 박주영이라는 기린아가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상대들이 너무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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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스위스-나이지리아-브라질 순으로 대진이 짜여졌는데, 첫판인 스위스에게 1대2로 패하자 분위기는 상당히 흐려집니다. 그나마 해볼만하다던 팀에게 진 거죠. 그런데 2차전인 나이지리아전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이지리아에 0:1로 끌려가던 상황. 여기에 믿었던 박주영은 페널티킥까지 실축하며 기회를 날려 버립니다. 패색이 짙던 한국. 하지만 종료 2분전인 후반 43분, 박주영은 상대 진영 정면에서 얻은 프리킥을 절묘하게 왼쪽 구석으로 차 넣으며 동점을 이끌어냅니다.

이어 인저리타임에는 박주영의 슛을 골키퍼가 놓친 사이 백지훈이 달려들어 강슛, 나이지리아 선수들을 모두 운동장에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 좀 긴데 박주영의 동점골과 백지훈의 역전골 장면은 5분 이후에 나옵니다. 뒤쪽으로 돌려 보시길.)

비록 한국은 예선 최종전에서 브라질에 0대2로 패하고, 나이지리아가 스위스를 3대0으로 대파하며 예선탈락하지만 이 대회에서 나이지리아는 준우승의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이 대회에서 나이지리아를 이긴 팀은 한국과 우승국인 아르헨티나, 두 팀 뿐이었으니 이 대회에서 한국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 대회 4강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모로코로 그중 두 팀이 한국과 같은 조였다는 게 한국의 불행이었던 셈이죠.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의 핵이 바로 우리가 치를 떤 그 메시였습니다.^^)

어쨌든 한국과 나이지리아는 23일 맞붙게 됐는데, 묘한 우연이 또 등장합니다. 2005년 당시 U-20이었던 선수 중 3명이 현재 나이지리아 대표로 뛰고 있죠. 그중 주전급은 둘인 셈인데 그게 바로 그리스전에서 퇴장당한 공격수 카이타, 그 경기에서 부상당해 한국전에 나서지 못할 걸로 보이는 수비수 타이워입니다(다 회복됐다는 설도 있던데 아직 알수 없군요). 세번째 선수인 오바시는 나온다면 교체 멤버.

이대로라면 2005년 멤버 셋은 한국전에는 선발로 나오지 않을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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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은 당시의 스트라이커였던 박주영이 다시 전면에 나설 예정입니다. 비록 이번 대회 들어 그리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그가 없었어도 한국 축구가 지금 월드컵 본선까지 가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제 몫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 선수단 가운데선 주전 차기석에 밀려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GK 정성룡이 주전으로 성장했고, 당시 후보였던 이근호가 마지막까지 월드컵 본선 대표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밖에 당시의 주전이었던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리마리오'로 불렸던 김승용, 미남 미드필더 백지훈, 창의력 뛰어난 수비수로 불렸던 이요한이나 투지가 돋보였던 이강진 같은 이름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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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3일 경기에서 박주영이 다시 살아나 2005년의 명승부를 재현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시 한번 어깨를 펴고 질주하는 박주영의 골 세레모니를 보고 싶습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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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의 수'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을 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면밀한 진단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 누군들 화끈하게 그냥 실력으로 이겨서 올라가는 걸 원치 않겠습니까.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16강 경우의 수는 꽤 낙관적이라는 겁니다.

몇가지 분석 기사도 나온 듯 한데 매우 실망스러워서 직접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분명 1대4로 대패했으면 뭔가 큰 타격이 있을 법 한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대미지는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당초의 계산'에 아르헨티나에게 한국이 진다는 것은 이미 들어 있었던 상황이고, 가능하면 좀 적은 점수차로 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후반 초기에 분위기를 탄 것이 오히려 병이 됐다는 건 뭐... 지금 와서 한탄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죠.

아무튼 '대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꽤 높은 편입니다. 물론 그리스의 도움을 받은 결과죠. 세상은 원래 혼자 잘나서만 살 수는 없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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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냥 순차적으로 정리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시작해 3차전의 가장 좋은 경우부터. 일단 현재의 득실 상황은 이렇습니다. 한국은 -1로 그리스와 득실차에서 동률이지만 다득점에서 앞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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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이 나이지리아를 이겼을 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 경우 나이지리아가 3패가 되므로 그리스가 최종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으면 세 팀이 2승1패 동률이 됩니다. 물론 이 경우라도, 그리스가 조2위가 되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에게 1대0, 2대1로 이겨선 탈락입니다. 최소한 2대0, 또는 세 골 이상을 득점해야 합니다. (한국과 득실/다득점을 고려하면 이렇습니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이렇지만 실제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현재 드러난 전력으로 볼 때, 이미 2승인 아르헨티나가 꽤 느슨한 경기를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리스에게 이렇게 대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이지리아에게 이기는 순간 대세는 확정이라고 믿어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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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이 나이지리아와 비겼을 때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아무튼 이 경우에도 우리가 올라갈 가능성이 꽤 높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댄 것입니다.

한국이 최종전에서 비기고,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면 한국은 무조건 탈락입니다.

현재 전력을 볼 때 한국도 비기고 그리스도 비기는 그림이 꽤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 때는 당연히 골득실-다득점-승자승의 순서로 순위를 매깁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일단은 유리합니다. 현재 득실차는 -1로 같기 때문에, 둘 다 비긴다면 득실차는 그대로 -1로 유지됩니다.

그럼 다득점. 현재 한국은 3골이고 그리스는 2골이므로 두 팀 모두 0대0으로 비긴다면 한국의 승리입니다. 한국이 0:0으로 비기고, 그리스가 1:1로 비기면 다득점에서도 동률이 되지만, 이 경우에는 한국이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2대0으로 이겼으므로 승자승으로 한국이 올라갑니다.

따라서, 둘 다 비길 경우 그리스는 최소한 한국보다 2골을 더 넣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든 지든, 한국-나이지리아전의 향방을 모르는 상황이라면(두 경기가 같은 시간에 열립니다) 그리스는 무조건 2골 이상은 넣어야 가능성이 생기는 셈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그리스는 초반부터 엄청난 공격 일변도의 경기를 펼쳐야 한다는 얘긴데,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 수비가 특기인 그리스 같은 팀이 다득점을 노린다는 건... 그리 좋은 결과를 낼 걸로 예상되지는 않습니다.

결론:

한국이 0대0이면 그리스는 똑같이 비겨도 1대1로 비겨선 떨어집니다. 한국이 0대0일때 그리스는 2대2, 한국이 1대1이면 그리스는 3대3까지는 가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런 요소는 그리스로 하여금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최대한 공격적인 전형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리스보다는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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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이 나이지리아에게 졌을 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이 나이지리아에게 지는 순간 탈락이 결정됩니다. 이 경우라도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게 진다면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세 팀이 1승2패 동률이 되지만, 득실차에 의해 한국은 탈락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 0대1로 진다고 가정하면, 한국은 득실차가 -2, 나이지리아는 -1이 됩니다. 그럼 한국은 그리스-아르헨티나 경기의 결과와 무관하게 조 3위 이상은 올라갈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나이지리아는 절대 한국과 맥풀린 경기를 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이기려고 들 것입니다. 누가 봐도 아르헨티나가 최종전에서 그리스를 이겨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게 정상이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한국을 꺾고 득실차로 올라가는 방법을 노릴 것입니다. (물론 한국이 나이지리아에게 지고,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 이기거나 비긴다면 한국과 나이지리아는 자동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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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는 참고용. 본문 내용이 더 자세합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한국은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입니다. 역시 처음에 말한 대로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는 전제하에 내린 결론입니다. 물론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에 압승을 거둘 가능성이 결코 없지 않기 때문에, 100%는 아닙니다.

아무튼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다득점을 노릴 수밖에 없고, 나이지리아 역시 한국에게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습니다. 어느 팀이든 이기려고 달려드는 상황에서 허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와 나이지리아가 '비기면 끝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고, 그리스가 나이지리아 주전 선수 2명을 벤치로 보낸 상황에서 한국은 '비기기만 해도 거의 올라간다'는 다소 편안한 마음을 갖는다면, 아무래도 우리 쪽이 유리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아르헨티나전 초반처럼 극도로 어색한 수비 치중보다는 최소한 반격은 가능한 적극적인 자세를 기대합니다. 까짓 나이지리아가 잘 해봐야 어디 아르헨티나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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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메시와 이과인이 그리스전에서도 한국전처럼 해 주길 기대합니다. 이상이 절대 아마추어인 저의 분석입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환영합니다.

아무튼 구호로 정리하자면 가자! 16강!

또는 아르헨티나 화이팅!

P.S. 간밤에는 많은 분들이 이해하지 못하셨지만, 경기 결과를 놓고 보면 왜 어제 그리스-나이지리아전에서 무승부가 최선이었는지 이제 이해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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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아쉬운 패배는 트위터로 꽤 히트했던 나라도나와 오베스 사진으로 달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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