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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프로화가 선수들의 스포츠 정신을 망친다고 말하곤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위한 정신보다는 돈에 눈이 먼 잔치라고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정대세는 브라질전에 임해 반드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정대세는 경기전 북한 국가가 울려퍼지는 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정대세는 "드디어 이 자리에 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축구를 시작하고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대단한 자리다. 그 자리에서 브라질과 같은 대단한 팀과 대결을 펼친 것은 너무 감동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무슨 만화에 나오는 축구 소년같은 소감인지. 그리고 그 소년의 열정은 마침내 놀라운 일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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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은 졌지만, 그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아마 44년만에 세상에 처음 나오는 북한 대표팀이 그 '브라질'을 상대로 전반 45분을 이렇게 당당히 버텨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정대세 한 사람의 힘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밀집수비 작전 속에서 외롭게 원톱으로 떠 땀과 눈물을 흘리며, 허벅지가 찢어져도 뛰던 정대세는, 우리가 흔히 쓰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콘의 진정 거짓말 같은 신기의 킥이 들어가고, 2-0이 되면서 브라질은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정대세에겐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정대세의 머리에서 찬스가 만들어졌고, 경기는 북한의 1대2 패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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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이겼다면 정말 전 세계가 뒤흔들릴만한 대사건이었겠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놀랄만한 일입니다. 아마 축구를 보는 세계 인구의 80% 정도는 3대0, 4대0을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경기 후 정대세의 표정에서는 "이만하면 잘했다"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반전에서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도 세계 최강을 잡아내지 못한 아쉬움만 넘쳐났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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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선수에 대해 우리는 일찍부터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1984년생인 정대세는 나고야 출신의 재일교포 3세고, 흔히 '인민 루니'라고 불리며, 조총련계 학교를 거쳐 일본 프로에서 뛰고 있습니다. 2006년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해 4년간 39골을 터뜨린 J리그의 간판 골잡이이며, 2007년부터 북한 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자리잡았습니다.

물론 그의 내력은 아직도 그리 자세히 알려지진 않은 듯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본적이 경북인 대한민국 국적 보유자이며, 기회만 있었다면 한국에서 뛸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놀라곤 합니다. 아무튼 그는 한국 국적 보유자이면서 북한 대표팀 선수고, 북한 여권을 갖고 다니는 희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재일동포 2세인 아버지는 고향이 경북 의성이고 한국 국적이다. 어머니는 조선 국적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아버지 국적을 따르게 됐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민족학교(총련계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나를 포함해 재일동포를 길러주고 살려주고 교육시켜준 것은 조선이다.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어릴 때부터 조선대표로 뛰고 싶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과 남북의 역사적 배경을 얘기했더니 이해해줬다. 2007년 7월 조선대표가 됐고, 총련 등 주위 분들 덕분에 조선 여권을 받았다. 외국에는 북한 여권으로 나간다. 한국 갈 때는 영사관에서 임시 여권을 받는다 (2009년 8월8일 동아일보)

정대세는 30일(한국시간) AFP와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축구국가대표팀에 뽑히지 않은 것을 두고. 한국 사람들은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또 통일이 되었더라면(그래서 단일팀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일교포 3세로 ‘조선’ 국적을 가진 정대세는 2007년 6월 북한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며. 태극마크와 운명을 달리했다. 차세대 공격수 정대세의 합류 이후 베일에 싸였던 북한대표팀은 급격한 전력상승과 세대교체에 성공하며. 44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A매치 21경기에서 14골을 몰아치는 정대세를 놓고 한 때 ‘한국 국적의 정대세를 왜 진작 대표팀에 발탁하지 않았나’라는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염원을 읽은 듯 최근 추진되고 있는 2022 월드컵 유치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대세는 같은 날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만약 월드컵 경기가 평양에서도 열릴 수 있다면 그건 우리의 원대한 꿈.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남북의 정치적 봉합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포츠는 남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남북 공동 월드컵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5월30일 스포츠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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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국 대표팀이 그리스를 2대0으로 꺾을 수 있었던 데에는, 지난달 그리스와의 평가전에서 정대세가 2골을 넣으며 승부를 2대2 무승부로 몰고 간 것도 큰 자극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브라질을 상대로 한 북한의 분전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한 한국의 경기력에 좀 더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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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빡빡머리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트레이드마크인 정대세. 전에도 정이 가는 선수였지만 브라질전에서의 투혼은 그를 잘 모르던 사람이라도 이제는 좋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 듯 합니다.

그가 박주영과 투톱을 이뤄 남아공 월드컵 전장을 누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부디 그가 은퇴하기 전에 하루빨리 통일이 가시화되어 그가 존경한다는 박지성의 패스를 받으며, 박주영과 투톱을 이뤄 한 팀으로 뛸 수 있는 날이 오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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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첫승, 한국이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유럽 팀을 상대로 거둔 첫승, 그것도 경기 내용까지 완전히 압도하는 2대0의 완승, 정말 월드컵 신경쓰고 본지 근 30년만에 이렇게 여유있게 이겨버리는 경기는 처음이라 지금까지도 감흥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4팀이 각각 세 경기씩 해서 두 팀이 올라가는 조별 예선은 워낙 변수가 화려합니다. 세 팀이 각각 승점 9에서 승점 0까지 다양한 성적을 낼 수 있고, 그 성적들이 제각기 상대적이기 때문에 오만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조별 예선의 남은 경기에서 기대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합계 승점 5(그러니까 앞으로 최소 2무)만 올려라, 둘째는 그리스, 최소한 1승(아니면 1무)이라도 올려라. 이 두가지면 16강은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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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금까지 수많은 월드컵 조별 예선을 치러왔습니다. 1986년부터 4년간격으로 비슷비슷한 여정을 거쳐왔죠(2002년 제외). 첫 경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조언도 늘 등장했고, 첫 경기가 끝나고 나면 '아직 희망은 있다'는 구호가 등장했던 것도 매번 비슷합니다.

그런 과정들을 지켜 본 결과, 그리고 각 팀들의 부침을 바라본 결과 올해는 비교적 예년에 비해 괜찮은 조에 들어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 이거였습니다. 이번 조편성은 1986년 이후에는 가장 좋은 여건이라는.
http://isblog.joins.com/fivecard/621

뭐 이 내용에 대해서도 수많은 분들이 바람넣지 마라, 그리스 얼마나 잘하는지 아느냐, 나이지리아가 호구냐, 등등의 얘기를 하셨지만 어쨌든 그리스에게는 1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볼 때 한국은 16강의 호기를 잡은 것도 분명합니다.

첫 1승으로 우리는 승점 3점을 얻었습니다(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승리는 승점 3, 무승부는 승점 1입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떤 경기 운영이 필요할까요. 일단 16강 진출의 필요 승점은 5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걸 보기 위해 지난번 대회들을 훑어봤습니다. 1998년 이후, 승점 5를 올리고 16강에 가지 못한 팀은 단 한 팀도 없었습니다. 즉 1승2무면 16강행은 오케이라는 뜻입니다.

승점 4, 즉 1승1무1패면 어떨까요? 신기하게도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4점으로 16강에 간 경우가 6번, 못 간 경우가 6번입니다. 그러니까 4점은 결코 안전한 점수가 아닙니다. 마음 편하게 16강에 가기 위해서는 남은 두 경기를 모두 비겨 주는 것이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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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끔찍한 변수가 또 하나 남아 있습니다. 네 팀 중 한팀만 독보적인 성적(잘하건 못하건^^)을 내고 나머지 세 팀이 진흙탕에서 물고 물리는 플레이를 할 때, 이때는 드물게 희한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재의 조에서 아르헨티나가 혼자 3승으로 독주하고 한국과 그리스, 나이지리아가 1승1패씩 물고 물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아르헨티나는 승점 9로 단독 조 1위지만 나머지 세 팀은 1승2패, 승점 3으로 동률이 되어 득실차를 가려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이 나이지리아에게 지고,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기면 가능한 얘깁니다.

이와는 반대로 3패로 독보적인 팀이 나와도^^ 이상한 상황이 생깁니다. 지난 2006년 대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스위스, 한국, 토고가 한 조가 됐고 토고가 초반 2패로 동네북이 됐죠. 그리고 프랑스-토고, 스위스-한국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토고가 프랑스와 비기거나 이기지 못하는 한, 한국은 스위스를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는 아쉬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1승2무로 3자 동률이 되면 득실차에서 뒤진다는게 이미 계산이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3승하는 팀이야 잘하는 걸 어쩔수 없지만, 3패 팀은 이래저래 4팀 예선 시스템의 민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도 그리스가 혼자 동네북이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세 팀은 또 3자 동률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집니다. 비슷한 경우를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 D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와 얼마나 비슷한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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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 불가리아 대신 한국이 들어가면 올해와 똑같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는 3패를 했고, 세 팀이 2승1패로 동률을 이뤘습니다.

1994년에는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 현재의 32개국이 아니라 24개국이었고, 예선 조가 8개가 아니라 6개였으므로 2승1패를 하면 조 3위라도 16강 진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조 1, 2위만 16강에 갑니다. 그러니 저런 상황이 재발하면 골득실, 다득점까지 따져야 하는 피마르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상황이 극적으로 가려면 아르헨티나가 3승, 그리스는 3패를 하고 한국과 나이지리아가 1승1패 상황에서 최종전에 맞붙는 상황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야말로... 참 피말리는 건곤일척의 대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면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의 분전을 촉구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남은 경기에서 우리에게 진 그리스가 1승, 혹은 1무라도 올리고 탈락해 주면 16강으로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다가 그리스가 기적적으로 분전,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잡으면 또 상황은 일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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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모두에서 밝혔듯 4팀 조별 예선은 너무 변수가 많아 한 경기를 끝낸 상황에서 뭐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한국이 남은 경기에서 2무를 확보하거나, 그리스가 '용을 써서' 나이지리아를 잡고 아르헨티나에게 '만인의 예상대로' 대패하면 한국의 앞날은 밝아집니다. 어쨌든 목요일에는 한국을 응원하는 것 못잖게 그리스를 응원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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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동방불패' 이전에도 여러번 임청하를 접했지만 그게 임청하인지 몰랐던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촉산'에서 선녀, '폴리스 스토리'에서 기업형 악당 두목 애인 역할로 이미 국내에서 꽤 많은 관객들에게 노출됐었지만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아 그게 임청하였어?'라고 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바뀐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성룡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폴리스 스토리'는 4편까지 제작될 정도로 대단히 히트하고,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지만 사람들은 '폴리스 스토리'하면 장만옥만 기억할 뿐입니다. 1편에서 성룡과 경찰들은 한 기업형 악당을 처벌하기 위해 그의 내연의 여자인 임청하를 검찰측 증인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당연히 보호가 필요하고, 그 보호자 역할을 성룡이 맡죠. 이때부터 이미 성룡의 여자친구 역이었던 장만옥과는 묘한 긴장을 주고 받습니다. (이때의 장만옥을 생각하면, 그 뒤로 장만옥은 상당히 다이어트를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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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영화 속의 임청하는 단발 커트였습니다.^)



(도입부에서 비탈길의 판자촌 하나를 박살내고 내려오는 카 체이싱 신은 당시로선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2'를 먼저 보고 이 '폴리스 스토리'를 보신 분이 있다면 꽤 충격을 받을 겁니다. '나쁜 녀석들 2' 마지막 부분에도 이를 베낀 것이 분명한 액션 시퀀스가 나오기 때문이죠. 80년대 홍콩 영화, 특히 성룡 영화의 액션은 정교함 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대단했습니다.)

 

주윤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1986년작 '몽중인'은 '폴리스 스토리'에 비하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영화였지만, 임청하의 존재감은 이 쪽이 훨씬 강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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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국내에서는 '천녀유혼'의 대성공 이후, 그리고 '화중선' 같은 일련의 모방작들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간 이후에 등장했던 작품이라 큰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일부 격렬한 주윤발 팬들에 의해 기억되는 작품이죠. 아무튼 이 작품에서 주윤발과 임청하는 진시황 때 서로 사랑했다가 2000년이 지나 다시 교감하게 되는 비운의 커플을 연기합니다.

80년대의 임청하를 대표하는 작품은 아무래도 서극 감독의 '도마단(刀馬旦)'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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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하-종초홍-섭천문이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한 작품에 집결했다는 것도 화제지만, 특히나 임청하는 여기서 또다시 남장을 하고 묘한 중성적 매력을 뽐냅니다. 이 작품에서의 임청하는 남성 관객들보다는 여성 팬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습니다. 어찌 보면 다카라즈카 극의 남자 주인공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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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동방불패'의 성공 이후 '동방여신'이라는 아주 해괴한 제목을 달고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합니다. 이미 '도마단'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출시된지 한참 다음에 말입니다.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도마단'이란 경극에 나오는 여장부 역할을 말합니다.

이 비슷한 시기, 홍콩발로 장국영이 한때 임청하를 짝사랑했고,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는 풍설이 들려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임청하라는 여배우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죠. 대체 임청하가 누구길래 '영웅본색' '천녀유혼'의 대 스타 장국영이 그렇게 힘들어 한단 말인가 하는 궁금증 때문입니다. 당대 홍콩 최고의 여배우는 당연히 임청하와 종초홍이었지만, 전편에서도 말했듯 이들을 스타로 만든 멜로드라마는 한국 시장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격차가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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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에서 임청하의 스타성이 폭발한 것은 1992년, '동방불패'가 개봉됐을 때의 일입니다. 1990년, '소오강호'의 성공은 홍콩 영화계에 김용 원작 붐과 정통 무협 붐에 불을 지릅니다. 물론 '소오강호'는 어느 정도 원작 소설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만 속편격인 '동방불패'는 주요 캐릭터들을 이어받았을 뿐 거의 새로운 작품입니다. 원작의 동방불패는 무공을 위해 거세를 하긴 하지만 영호충과 로맨스를 일으킬 수 있는 캐릭터가 전혀 아니었죠.



하지만 영화 제작진은 이 역할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애절함을 더했고, 임청하라는 스타에게 이 역할을 맡깁니다. 이미 '도마단'에서 임청하의 중성적인 매력이 갖고 있는 폭발력을 확인한 서극과 정소동에게 임청하를 이용한 동방불패 캐릭터의 구현이라는 시도는 정말 '바로 이거다' 싶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미 촬영 당시 나이 37세, 하지만 놀랍도록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임청하는 이 작품 하나로 홍콩 영화의 구원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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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위 사진은 안 나오느니만 못했던 '동방불패 2'의 홍보용 사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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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불패'의 성공 덕분에 양우생 원작의 '백발마녀전', 김용 원작의 '녹정기'와 '천룡팔부' '동사서독(사조영웅문)', 고룡 원작의 '절대쌍교'가 모두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화되죠. 이들 대부분이 히트하면서, 임청하는 '정통 무협물의 여왕'으로 다시 부각됐고 70년대와 80년대를 넘어 90년대에까지, 3 decade에 걸친 스타덤을 구축합니다.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청하가 1인2역을 연기한 '동사서독'을 최근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놨습니다. 이번엔 DVD가 제대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 예고편.



그러나 90년대의 임청하는 스스로 성공일로의 경력을 끊어 버립니다. '중경삼림'의 히트 이후, 임청하는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합니다. 상대는 홍콩의 유명 의류 브랜드 에스프리 그룹의 거물인 형리원(邢李원, 마지막 글자는 火+原, Michael Ying Lee Yuen). 주윤발, 성룡 등 숱한 톱스타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그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작가 경요가 "임청하가 진정 사랑한 사람은 진한 뿐이었다"고 말했듯, 팬들은 "어쨌든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진한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군요.
나이든 뒤의 진한과 임청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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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임청하


이건 결혼 발표 보도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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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리원-임청하 부부

 

물론 형리원과의 결혼은 임청하를 여왕 중의 여왕으로 만들었습니다. 형리원은 한때 에스프리 그룹 지분의 45%를 보유하기도 했고, 2007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40대 거부 중 12위에 올랐을 정도의 자산가입니다. 두 사람은 지난 14년 동안 가끔 잡음이 일기도 했지만, 세 아이를 낳고 잘 살아왔습니다.

'에스프리 사모님'이던 시절의 임청하를 만난 사람 중 하나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송승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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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송승헌은 홍콩에서 서기, 막문위와 함께 영화 '버추얼 웨폰(당시에는 '석양천사'라는 한자 제목으로 불렸습니다)'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촬영장으로 임청하가 딸과 함께 구경을 왔다는 겁니다. '가을동화'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말입니다.

 

임청하는 송승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당연히 송승헌도 응했습니다. "어려서 본 '동방불패'에서의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더라"는 증언입니다. 언어 장벽 때문에 대화가 여의치 않아 "한국 배우들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라고 느끼기도 했다는군요.

식사를 마칠 무렵 형리원 당시 에스프리 사장이 등장해 인사를 나눴고, 이별이 아쉬웠는지 임청하는 송승헌 일행을 에스프리 본점 매장으로 데리고 가 "선물하고 싶다. 마음대로 골라라. 매장을 다 가져가도 좋다"고 말하는 큰 통(?)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송군이 "그럴 수는 없다. 사양하겠다"고 예의를 차리자(물론 브랜드가 에스프리여서 그랬을 수도 있죠^^), 못내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언제든 홍콩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었답니다.

(불행히도 송군은 이런 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찍은 기념사진은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임청하는 47세. 뭐 이 정도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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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헌의 홍콩 촬영 회고를 통해 이 이야기가 기사화된 것이 아마 임청하가 한국 미디어의 관심을 끈 사실상 마지막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뒤로 임청하에 대해 들려온 소식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가 있다는 등 단발성의 잡음 정도였습니다.

임청하는 공식적으로 은퇴 여부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종초홍이 그랬듯 그저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했을 뿐입니다. 아마 그 자신도 중단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두 편의 영화에서 나레이션을 맡아 영화계와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다시 한번 일선에 복귀한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궁금합니다. 임청하가 일선에 복귀한다면, 그가 시발점이 되어 지난해 남편의 사망으로 거액의 유산 상속자가 돼 화제를 모았던 종초홍이나 소식도 알 수 없는 섭천문 등이 장만옥과 유가령 등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왕년의 전설적 여배우군에 합류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보너스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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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노래가 빠지면 안되겠죠? 장국영이 부른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의 MV.



이상입니다.




임청하 지난 이야기를 못 보신 분은 이쪽으로

 


대개 이런데 관심이 있으면 다음 글들도 관심이 가시겠죠. 왕조현편입니다.

전편



후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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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화피' 때문에 왕조현에 대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엔 임청하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벌써 14년이나 됐군요. 임청하는 최근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감동을 주는 시나리오가 있다면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몇 차례 컴백설이 흘러나온 적이 있지만, 대개는 임청하의 이혼 가능성을 보도하면서 곁다리로 나온 소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혼설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컴백 가능성만이 부각되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임청하를 촬영장으로 다시 끌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나이 54세. 대개의 여배우들이 50대가 되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게 정상일 겁니다(간혹 과도한 성형 수술이나 미용 시술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1954년생인 배우들로는 성룡과 존 트래볼타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연배 여배우가 컴백 하건 말건, 누가 관심이 있을까 싶지만 임청하는 다르더군요. 대체 그 전설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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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홍콩영화를 대표한 것이 성룡을 중심으로 한 코믹 액션과 '영웅본색'으로 대변되는 느와르의 흐름이었다면, 90년대는 시대극을 표방한 리얼 액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는 1991년작 '동방불패'와 임청하가 있었죠. 이 시기의 홍콩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임청하와 '동방불패', '백발마녀전', '신용문객잔'과 '동사서독'을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임청하는 그 시기에 이미 30대 후반(37세)의 나이였죠. 그때까지 임청하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많은 한국 팬들은 임청하를 '젊은 날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다 나이 먹어서 뜬 배우' 정도로들 알고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에선 잘 몰랐지만, 임청하는 70년대부터 이미 중국어권을 통틀어 여배우 중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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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하는 1954년 대만에서 태어났고, 1972년 경요(瓊瑤) 원작 영화 '창외'에 캐스팅됩니다. 생일이 지나지 않은 탓인지 '17세'로 소개되기도 했군요.

 

이때부터 미모가 각광을 받아 일약 대만의 톱스타가 됩니다. 특히 대만 최고의 인기 작가 경요(흔히 '대만의 김수현'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주로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 발표하는 족족 메가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죠)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가 될 때 응당 주인공은 임청하가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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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요의 소설과 영상 작품들은 대만에서뿐만 아니라 홍콩과 싱가포르, 동남아 일대는 물론 중국 본토와 해외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이면 어디서나 인기 폭발이었기 때문에 임청하의 스타덤은 일찌감치 국제적이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스무살도 되기 전에 온갖 남자들의 구애로 요란한 스캔들이 시작됩니다.

 

임청하의 오랜 스캔들 중 첫 남자이자 끝까지 가는 남자는 바로 진한(秦漢, 1946년생)입니다. 이 스캔들이 절정에 올랐을 때에는 진상림(秦祥林, 1948년생)과의 삼각관계가 온 중국계 호사가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역시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어권에서는 당대의 미남 톱스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배우들이 잘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에서 흥행이 되는 중국어권 영화는 거의 대부분이 쿵후 액션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멜로드라마형 스타들은 드러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거죠. 아비와 진추하 주연의 '사랑의 스잔나' 같은 경우가 좀 드문 예외였고, 진추하조차도 그 이후의 스타덤을 이어 갈만한 히트작을 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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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진한, 오른쪽이 진상림.)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만 드라마. 초반 몇분은 그냥 지나치면 얼음여왕님의 앳된 비키니 장면이 나옵니다. 제목은 모르겠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진한.





임청하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는 세 스타가 공연한 1976년작 '아시일편운(我是一片雲, 역시 경요 원작)'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여기서 승자가 되는 진한은 국내에서는 관금붕 감독, 장만옥 주연의 '완령옥'에 중간 정도 비중으로 얼굴을 비춥니다. 이에 비해 진상림은 국내 팬들이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얼굴은 꽤 알려진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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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성룡, 홍금보와 함께 80년대에 '오복성' '복성고조' '하일복성' 시리즈에 참여하기 때문이죠. 다섯 멤버 중 얼굴만 번드르하고 실속은 없는 바로 그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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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네 사람 중 맨 오른쪽이 진상림. 옆의 배우 이름에도 성룡, 홍금보, 종초홍과 함께 진상림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아무튼 국내에 임청하가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은 1978년작 한-홍콩 합작 '백사전(眞白蛇傳)'인 것으로 보입니다. 흰 뱀이 변한 여자가 인간의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요물을 용서하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슬픈 전설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하고, 뒷날 왕조현 장만옥 주연의 '청사'와도 사실상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도 진상림이군요.

임청하가 언제 홍콩으로 본격 진출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977년 쇼 브라더스 영화 '홍루몽'에도 나오는 걸 보면 교류는 일찍부터 있었을 듯 합니다.

이한상 감독의 '홍루몽' 앞 부분입니다. 이때부터 소년 역으로 나오니 임청하의 남장은 정말 역사가 길다고 해야겠죠.




1980년, 당대의 검술 액션 1인자 정소추와 공연한 1980년작 '정인간도(情人看刀)'가 히트할 무렵에는 스타덤의 중심지가 대만에서 홍콩으로 이동해 있습니다. 그리고 1982년, '미니특공대(迷니特攻隊)'로 더 이상 멜로 스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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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1985년 국내에서 '대복성'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본 저로서도 이 영화에 임청하가 무슨 역으로 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지 3년이나 지나 개봉된 이 영화의 국내 제목이 원제와 전혀 무관한 '대복성'인 이유는 '오복성'의 히트 때문이라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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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과 왕우, 정소추와 임청하 등 호화 배역진이 출동한 이 영화의 배경은 참으로 황당무계합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열대지방의 전선(?)에서 뭔가 미션을 이행하기 위해 왕우가 인솔하는 특공대가 길을 떠납니다. 특공대원 중 성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이죠. 네. 리 마빈 주연의 '특공대작전(Dirty Dozen)'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길을 떠난 뒤로 여인족(?)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귀신나오는 집(?)에서 귀신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아무튼 결말은 장렬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영화 보신 분들 있나요? 영상을 보시면 기억이 좀 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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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순서대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국내에서 임청하를 볼 기회는 1978년 개봉된 '백사전', 1983년의 '촉산', 그리고 1985년의 '대복성'과 '폴리스 스토리'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역할은 '촉산'이죠. 물론 이때까지도 '악의 화신이 된 정소추 때문에 번민하는 예쁜 그녀'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지 임청하라는 이름은 전혀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1980년대 중반까지밖에 못 왔는데, 예상대로 너무 길어지는군요. 이번엔 이 정도에서 끊겠습니다. 나머지 얘기들은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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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입니다.



대개 이런데 관심이 있으면 다음 글들도 관심이 가시겠죠?

전편



후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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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현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특히 왕조현을 기억하는 분들이면 1965년생 정도에서 시작해 70년대 초반 생 남자에서 그칠 거리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재 20대인 분들도 그를 기억하고 있더군요.

참 영화 한 편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사실 '화피'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천녀유혼'에 대한 추억을 다시 나눌 일도 없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화피'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번 포스팅에 이어 이번에는 왕조현의 어두운 면을 다뤄 보겠습니다. 만 20세에 '천녀유혼'으로 일약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 왕조현은 왜 거기서 더 성장해 종초홍이나 임청하의 위치에까지 오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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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0세의 왕조현. 얼굴은 성숙했지만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입니다. 당연히 주위의 유혹도 많았겠죠. 그리고 스캔들은 18세때부터 시작됩니다.

홍콩으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왕조현은 '위사리전기(衛斯理傳奇)'라는 영화에 출연합니다. 이 영화는 위슬리라는 주인공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베스트셀러 모험소설 시리즈가 처음으로 영화화된 것이었죠. '위사리'란 위슬리의 한자 표기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허관걸.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성룡이나 주윤발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중화권에서는 이 두 사람에 결코 못지 않은 인기 스타였습니다. 특히 '미스터 부' 시리즈나 '최가박당' 시리즈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못지 않은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왕조현이 나온 '위사리전기'는 국내에서도 개봉됐습니다. 티벳의 포탈라이궁을 무대로 용의 기원과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특이한 발상이 눈길을 끄는, 그런대로 볼만한 영화였죠.




국내에서 '미스터 부'라는 제목으로만 개봉된 시리즈 4편 '마등보표'나 '최가박당'은 홍콩 코미디의 전성기를 열었다 해도 좋은 작품들입니다. 허관걸이 국내에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훨씬 뒷날의 '소오강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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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48년생인 허관걸과 67년생인 왕조현은 거의 아버지와 딸의 차이가 나지만 이 허관걸이 바로 왕조현의 첫 스캔들 상대가 됩니다. 그 뒤로도 상대역으로 만나는 연기자마다 모두 왕조현과 연인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분방한 생활을 하죠. 아무리 홍콩 기자들이 뻥이 세기로 유명하다지만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왕조현은 한 인터뷰에서 "촬영장에 나가면 다들 나를 친근한 막내동생처럼 대했다. 그만큼 나와 상대역 배우들은 대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 역시 스스럼없이 그들을 대하다 보니 가끔 감정이 불쑥불쑥 드러날 때도 있었다"고 술회한 걸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왕조현의 가장 오랜 연인이라면 가수 제진(齊秦, Chyi Chin)입니다.






역시 국내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기 가수 겸 배우인 제진은 1988년부터 10여년간에 걸쳐 왕조현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연인입니다. 홍콩 쇼비즈니스계는 수차에 걸쳐 이들의 결혼 날짜를 보도하지만 결국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진과 계속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더라면 왕조현의 이미지가 나빠질 일은 없었겠지만 왕조현은 엉뚱하게도 홍콩과 대만 실업계-연예계의 거물인 임건악(林建岳, Lam Kin Ngak)과의 염문설에 휩싸입니다. 임건악은 현재 홍콩 영화계의 최대 배급사로 꼽히는 미디어 아시아(환아)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서울공략' 개봉때 이명박 시장을 만난 임건악.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입니다.



문제는 임건악이 처자식이 있는 중년이었다는 것이죠. 관계는 공공연해졌지만 결국 왕조현은 부자 남자의 첩에 머물고 맙니다.



이런 소문이 왕조현에게는 치명적이었죠. 영화 '청사'가 개봉됐을 때, 홍콩에서는 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대만에서는 관객들이 이 영화의 관람을 보이코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1994년, 불과 27세의 나이로 왕조현은 첫번째 은퇴선언을 합니다. 1997년 일본 영화 '북경원인'과 일본 드라마 한편에 우정출연한 것 외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죠. 오랜 칩거에도 좋아진 것은 없었고, 영화 '유원경몽'의 촬영을 마친 뒤에는 두번째 은퇴 선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은퇴는 모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임건악과 결별하고, 임건악은 대만 출신의 모델 모니카와 정분이 납니다.  결별 이후 애인 제진과의 재결합 소문이 잠시 돌지만 이번에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난번에 말했듯 왕조현은 '미려상해-상하이 스토리(2004)'를 촬영하죠. 이 영화로 왕조현은 색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마침내 연기에 눈을 떴다'는 긍정적인 평가였죠.

'미려상해'의 공개 이후 왕조현은 문제의 '뚱보 사진' 공개로 곤욕을 치릅니다.





'차기작에서의 캐릭터를 위해 살을 찌우고 있다' '스트레스성 폭식이다' '장국영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 먹기만 한다' '평소에도 워낙 많이 먹는 습관이 있었다'는 등 온갖 해석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새로운 모습이 공개되죠. 이번엔 다시 멀쩡해진 왕조현입니다. 두달 동안 야채만 먹었다든가 뭐 그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미려상해' 이후 왕조현은 여전히 밴쿠버(위 사진의 溫哥華)에서 조용히 칩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며 활동이며 완전히 중단한 지 오래. 아직 활동 재개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겠죠.

** 밴쿠버 사시는 분들, 사진 한장 찍어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서양에서 태어났더라면 이 정도의 스캔들이 배우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왕조현은 임건악과의 연애로 상당히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물론 왕조현 본인이 좀 더 배우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커리어 관리에 관심이 많았다면 일찌감치 이뤄 놓은 아시아 권의 톱스타 자리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겠죠. 장만옥이나 공리, 양자경 같은 선배들은 물론이고 훨씬 어린 장자이가 오늘날 가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왕조현이 그 자리에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인터넷에 '왕조현의 최근 사진'이라고 돌고 있는 사진이지만 진위는 확실치 않습니다.)






아무튼 그나마 21세기에 촬영된 그녀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유원경몽'의 예고편입니다.



마무리는 그래도 '천녀유혼'으로 해야겠죠?



아쉽다는 여론에 따라 전설의 목욕통 신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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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왕조현에 대한 추억 밟기를 마무리합니다. 이번에 저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왕조현도 '화피(Painted Skin)'라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더군요. 국내에 '무림객잔'이라고 소개됐던 1992년작 영화의 원제가 '화피지음양법왕(畵皮之陰陽法王)'이었습니다. 왕년의 명감독 호금전이 역시 화피 이야기를 소재로 음양법왕이라는 악의 존재와 싸우는 도사와 서생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호금전과 임청하의 '신용문객잔'의 영향이겠지만 도대체 이 이야기와 '무림객잔'이란 제목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참...) 왕조현은 여기서도 귀신 역으로 나오고, 정소추와 홍금보가 공연합니다. 설정으로 봐선 별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진짜 끝.




전편입니다. 왕조현의 전설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못 보신 분은 이쪽으로.




영화 '화피'에 대한 내용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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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중인 중국산 판타지 영화 '화피'를 보고도 '천녀유혼'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영화 '천녀유혼'(최근 제작된 드라마 '천녀유혼'이 아닙니다)을 본 적이 없는 사람뿐일 겁니다. 21세기의 감각과 기술이 21년 전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죠.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짝이 없었던 80년대, 푸른 색 조명 아래 등장한 한 미녀의 고혹적인 자태는 한국 젊은이들의 삼혼칠백(三魂七魄)을 사정 보지 않고 안다리로 후려 버렸습니다. 개봉관인 아세아극장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천녀유혼'은 재개봉관으로 흩어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신드롬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미 개봉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에스케이프 걸'까지 '의개운천'이라는 중국영화풍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고, 이 영화 이후에는 '귀신같다'는 말이 더 이상 욕이 아니었습니다. 꼴사나운 산발 머리를 한 여자를 가리켜 '귀신같다'던 말은 어느새 사라지고, 예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를 보고 '귀신같다'고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왕조현의 위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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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는 조이 웡(Joey Wong)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왕조현은 1967년 1월 31일생입니다. 광동어로는 왕조인, 북경어로는 왕쭈샨, 대만식 북경어(북경어와 다른가보죠?) 왕츄션, 복주어로는 옹조헨이라고 불린다는군요. (네. 장난은 그만 치겠습니다.)

대만의 수도 대북에서 태어난 왕조현은 2남2녀의 둘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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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에는 '왕조현이 대만 대표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는 비장함 때문에 영화배우로 변신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왕조현은 어린 시절부터 쿠오 콴 아트스쿨에서 배우수업을 받은 연기자였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농구선수였고, 14세부터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5세때 농구화 CF 한 방을 찍고서 농구 선수로서의 미래와는 안녕을 고하게 되죠. 당연합니다. 이런 미녀를 농구계로 돌려보낼만큼 대만 연예계가 무능하지는 않았겠죠.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키였을 겁니다.





그의 프로필에는 키가 1m72로 돼 있지만 실물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1m80"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트릭을 쓰지 않고 그녀와 나란히 연기할 수 있는 남자 배우는 홍콩에는 거의 없었단 얘기죠.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주윤발과 공연한 1986년작 '의개운천(義蓋雲天)'입니다. 처음에는 '에스케이프 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가 몇년 뒤에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죠.

왜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을까요. 이유는 당연합니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열렸기 때문이고, 한자 제목(그것도 넉자라야 제 맛입니다)을 달아야 진정한 홍콩 영화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성기를 연 작품이라면 당연히 '영웅본색' 연작을 꼽아야겠지만 '천녀유혼'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1987년,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한국 남자들은 모두 이 여자에게 혼이 나갔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8번 본 제가 과장하는 건지도 모르지만(제 주위에는 10번 이상 본 사람도 즐비합니다) 이 영화는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그 신비로움은 왕조현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어떤 사진을 봐도 '천녀유혼'의 왕조현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특히 이 물통이 나오는 신에서의 아름다움은 정말 숨을 멎게 하죠. 이렇게 흘러갑니다.

아시다시피 '천녀유혼'은 포송령 원작 '요재지이'의 한 토막입니다. '요재지이'는 구우의 '전등신화',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마찬가지로 이곳 저곳의 민담을 소설에 가까운 형식으로 엮은 단편집 형태의 책입니다. 당연히 '천녀유혼' 이야기도 매우 짧습니다.

아내가 있는 영채신이라는 남자가 객지의 절에서 하룻밤 유숙하다가 섭소천이라는 절세미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지만 준엄하게 꾸짖고 물리칩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옆방의 서생들이 죽어 있죠.

어찌어찌해서 영채신은 역시 같은 절에 머물게 된 연적하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섭소천이 귀신이란 사실을 알고 유골을 파내 고향으로 돌아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줍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섭소천은 다시 영채신의 곁에 나타나 두 사람이 남매의 연을 맺고, 영채신의 아내가 병들어 죽자 재혼해서 아들 낳고 딸 낳고(...귀신이?) 행복하게 삽니다. 매우 동화적인 해피엔딩입니다.





이게 전부냐구요? 그렇습니다. 천녀(섭소천)를 괴롭히는 대마녀도, 인간세계에 실망해 숲으로 들어온 도사 연적하의 사연도, 흑산대마왕과의 혈투도, 천녀를 안장해 주면 영원히 그녀와 이별해야 하는 영채신의 애절한 사랑도 원작에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모두 서극과 정소동의 창작입니다.

자, '천녀유혼'을 보신 분이라면, 이 짧고 심심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가슴아픈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여기에 음악이며, 푸른 색과 붉은 색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조명 역시 장인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홍콩 영화의 르네상스는 짤짤이로 따온 게 아니었던 겁니다.


'영웅본색'이나 마찬가지로 '천녀유혼' 이후 엄청나게 많은 모방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인 '화중선'에는 왕조현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죠. 아무튼 그중 퀄리티를 유지한 작품이었던 '천녀유혼 2 - 인간도'를 제외한 모든 작품은 한마디로 허섭쓰레기에 불과했죠.






최근 TV 시리즈로 재탄생한 천녀유혼 시리즈. 이렇게 장면까지 거의 똑같이 재현해 냈지만 원작의 포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중론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은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홍콩 영화의 미적 감각을 지배했고, 또 한편으로는 왕조현이라는 배우의 연기 인생을 정리해 버렸습니다. 이 배우가 그 이후로 어떤 역할을 맡아도 '천녀유혼'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죠. 물론 이후의 배우 인생을 볼 때 그리 적극적으로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천녀유혼' 이전의 '의개운천'에서는 그래도 배우로서의 진지한 모습이 보였다고 할 수 있지만 '도신' 시리즈와 같은 현대물에서 왕조현은 그냥 예쁜 장식 같은 배우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스타의 자리를 유지하게 해 준 것이 '천녀유혼'의 또 다른 변형이랄 수 있는 '청사' 정도죠.




청사, 결말의 특수효과만 좀 자제했더라도 괜찮은 영화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장동건이 나왔던 '무극'과도 통하는 영화입니다. 산해경에 나오는 과부(widow가 아니라 발이 엄청 빨랐던 전설의 거인족 이름입니다) 전설에 기반을 두고, 해보다 빨리 달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역시 허무한 '천녀유혼'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캐릭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연기력의 부족이었죠. '천녀유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요부 연기가 현대극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관객들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왕조현이 현실로 내려오는 것, 즉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는지도...

물론 저 '우연'은 그런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왕조현의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장국영을 좋아하는 동료 가수 역으로 나왔던 매염방의 우수 어린 눈길이 기억에 남을 뿐. 그러고 보니 왕조현을 뺀 두 사람은 고인이 됐군요.





'천녀유혼'은 한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히트했고, 왕조현은 일약 아시아의 톱스타가 됩니다. 한국에서 찍은 이 CF는 지금까지도 그 시대를 산 분들의 기억에 생생할 겁니다.



자, 이 CF를 보고 나면 꼭 생각나는 CF가 있죠.



이후 왕조현은 1989년에는 '홍콩에서 온 여인'이라는 일본 드라마에도 출연하죠. 이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상당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스타덤에 오른 것이 장애가 됐습니다. '천녀유혼'이 공개됐을 때 만 20세. 홍콩 진출 이후 8년간 왕조현은 58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매년 7편 이상을 찍은 셈이죠.

이 정도의 작품수를 유지하면서 이미지관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당시 홍콩 영화계의 현실이었다고 보는게 좋을 겁니다. 그야말로 그냥 찍어 붓는 형태의 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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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발목을 잡은 것은 그녀의 사생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콩에서의 그녀는 스캔들의 여왕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자세히 하겠습니다) 결국 생활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한때 왕조현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대중을 경악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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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바로 그 다음편입니다.

왕조현이 왜 배우로 계속 성공하지 못했나, 후일담입니다.




영화 '화피'에 대한 내용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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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열기에 슬쩍 편승한 포스팅입니다. 준 PO에서 롯데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홈에서 2연패를 했군요. 지난밤 부산에서 쓰러진 소주병이 얼마나 될지... 상상이 갑니다.

삼성이 2연승을 하는 동안 눈길을 끈 점이라면 아무래도 삼성에 있는 롯데 연고, 특히 부산 출신 선수들의 분전이 돋보였다는 점입니다. 1차전에서 6타수 4안타를 친 1번 박한이와 4번 진갑용의 부산고 선후배가 롯데 마운드를 초토화시키는데 기여했다면, 2차전에서는 채태인이 이번 PO 첫 홈런을 때려냈죠. 채태인은 부산상고 출신입니다.

물론 부산 출신 선수는 당연히 롯데에 훨씬 더 많죠. 손민한-장원준-손광민으로 이어지는 부산고, 송승준-이대호-박현승으로 이어지는 경남고의 양대 명문고를 비롯해 대부분의 선수가 부산 경남 출신입니다. 하지만 이들보다는 적지에서 뛰는 삼성 소속의 부산-경남 출신 선수들이 사직구장에서 더 펄펄 날았다는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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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의 홈 사직구장은 뜨거운 응원 열기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홈 승률이 매우 낮은 구장이기도 합니다. 올해 롯데의 홈 승률은 63경기 중에서 32승 31패. 5할이 간신히 넘습니다. 여기서 마산 경기(1승5패)를 빼면 31승26패로 올라가긴 합니다만, 시즌 승률(.548)에 비해 낮은(.544) 승률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홈구장' 치고는 의외의 성적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분의 분석(http://toto5071.egloos.com/325459)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사직구장에서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건 2006년과 올해 뿐입니다. 이건 롯데의 최근 전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지난 2000년 이후 9시즌 동안 사직구장 승률이 시즌 전체 승률보다 높았던 해는 2003, 2005, 2006년의 세 시즌밖에 없더군요. 좀 의아해지는 성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 뜨거운 응원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자주 진다는 이유로 왕년에 자기 구단 버스에 불도 지른 적이 있을 정도(뭐 이건 부산이 아니라 마산에서 있었던 일이지만)로 뜨거운 롯데 팬들의 열성이 자칫 롯데 선수들을 주눅들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극성 엄마를 둔 수험생의 긴장...같은 것일까요?

반면 간간이 사직을 찾는 타 구단 소속의 부산-경남 출신 선수들은 왠지 모를 고향의 푸근함 때문에 실력을 다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풀이의 의미는 아닙니다. 손민한과 부산고-고려대 동창인 진갑용은 두산 시절에도 롯데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지만 엉뚱하게도 1년 먼저 입단한 최기문이 롯데로 트레이드되는 일도 겪었죠. 1,2차전에서 제 실력을 보인 선수들은 롯데도 탐내던 선수들이죠. 트레이드로 삼성에 간 신명철(마산고 출신)이라면 또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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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삼성에는 이밖에도 롯데 연고 선수들이 주요 전력으로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준PO 출전 선수 중에는 3차전 선발 예고된 윤성환도 부산상고 출신이고 신명철과 김창희(마산고), 강봉규(경남고) 등이 있죠. 이 선수들도 롯데를 상대로 계속 펄펄 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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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롯데는 아직도 부산-경남 출신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여기도 대구-경북 출신들이 꽤 됩니다. 투수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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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에 나온 강영식(대구상고),

야수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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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포철공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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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혁(대구상고)이 대표적이죠.

과연 대구 3차전에서는 삼성에서 뛰지 않고 있는 이들이 제 실력을 발휘해 삼성에 타격을 줄까요, 아니면 대구구장의 안방 텃세가 더 셀까요. 3차전을 보고 나면 어느 쪽의 운이 더 강한지 판가름이 날 것 같습니다.

그나자나 선수 명단을 보니 삼성은 정말 '순혈 대구-경북' 선수들이 정말 적군요. 하지만 오히려 향토 출신 선수들이 타지 출신들을 왕따시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 정서가 강했던 시절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 눈길이 갑니다.

◇롯데
▲감독= 제리 로이스터
▲코치= 박영태, 아로요, 김무관, 이철성, 한문연, 공필성
▲투수= 손민한, 송승준, 장원준, 이용훈, 조정훈, 염종석
김이슬, 강영식(대구상고), 최향남, 코르테스
▲포수= 최기문, 강민호(포철공고)
▲내야수= 박현승, 조성환, 박기혁(대구상고), 김주찬, 이대호, 정보명, 이원석, 박종윤, 김민성
▲외야수= 이승화,최만호,이인구,손광민,가르시아

◇삼성
▲감독= 선동열
▲코치= 한대화, 이종두, 김평호, 류중일, 조계현, 강성우
▲투수= 이상목, 전병호, 조진호, 정현욱, 윤성환(부산상고), 배영수, 오승환, 권혁, 안지만, 조현근, 에니스
▲포수= 진갑용(부산고), 심광호, 현재윤
▲내야수= 박진만, 신명철(마산고), 손지환, 조동찬, 채태인(부산상고), 박석민
▲외야수= 양준혁, 김창희(마산고), 강봉규(경남고), 박한이(부산고), 최형우, 우동균





p.s. 그나자나 선수도 죄다 바뀌고 저렇게 피도 섞였는데 대체 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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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과 전병호. 좌완에다 직구 시속은 간신히 130km에 턱걸이 할 정도. 다른 구단에는 그닥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투수들. 하지만 둘 다 모두 롯데 타자들에게는 선동렬만큼 두려운 투수로 통했고, 통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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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 나폴레옹 솔로>는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한국 아동 소설에도 우정출연을 하게 됩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조풍연 원작의 <백자바위의 마인>입니다.
6권짜리 장편이었던 이 소설은 70년대라는 배경 탓에 반공 소설의 굴레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007 뺨치는 첩보 SF 모험 활극 소설이었습니다.

백자(30m) 높이의 절벽에 비밀 본부를 설치한 마인(결국 정체는 북한이 파견한 거물 간첩입니다)은 부하인 마인단을 이용해 대한민국을 어지럽히고, 몇몇 영웅들이 그에 맞서 싸우는 줄거리입니다. 후반부에 가면 '앙클(?)이라는 첩보기관에서 파견된 나폴레옹 솔로'가 주인공들을 돕는 역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저작권 같은 것은 들어본 적도 없던 시절의 얘깁니다. 하기야 이런 식의 막 갖다 쓰기는 모리스 르블랑 선생의 주 특기였죠.

이 이야기는 70년대 후반 이원복 선생에 의해 <백자바위 마인>이라는 만화로 극화돼 클로버문고에 수록됩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만화판' 나폴레옹 솔로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법 닮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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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만화로 바꾸다 보니 중요하다 싶은 이야기가 상당 부분 삭제되어 있고, 원작에서는 사실 조연급인 소년 마호석이 주인공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만화도 구하기 힘들어진 셈입니다. 

나폴레옹 솔로의 파트너 일리야 쿠리야킨은 러시아 출신의 전향한 스파이. 둘 다 여자에 강한 캐릭터였지만 나폴레옹이 전형적인 플레이보이라면 일리야는 어느 정도 모성애를 자극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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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치면 남성훈-조민기 계열인 듯^^이 역할을 맡은 데이비드 매컬럼 역시 수많은 출연작을 갖고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스티브 매퀸,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 주연의 <대탈주 The Great Escape> 입니다. 묘하게도 출연진이 <황야의 7인>과 상당 부분 겹치고, 데이비드 매컬럼이 이 영화에 나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로버트 본과의 공통점입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감독은 <OK목장의 결투> 등을 남긴 웨스턴의 거장 존 스터지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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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보시면 아마 기억이 날 지도... 탈출에 성공한 뒤 기차역에서 상관의 적발을 막기 위해 일부러 이목을 끌다가 총에 맞아 죽는 역할이었습니다.매컬럼은 이 시리즈에는 나폴레옹 솔로의 뒤를 이은 넘버2지만 곧 자신이 주역인 시리즈를 갖게 됩니다. 바로 한국에서 <얼굴없는 사나이>란 제목으로 방송됐던 The Invisible Man이죠.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다음 번 글은 '투명인간의 역사'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참, 맨 위에 사용된 사진은 <0011 나폴레옹 솔로>의 정리판 형식으로 1983년 제작된 TV 영화 <The Return of the Man from U.N.C.L.E.>의 한 장면입니다. 지금부터 23년전이지만 이미 로버트 본의 귀밑머리는 희게 변해 있죠.

로버트 본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기회는 얼마전 시네마TV를 통해 방송됐던 BBC의 인기 시리즈 <허슬 Hustle>이었습니다. 여기서 본은 왕년의 실력을 살린 노련한 늙은 사기꾼으로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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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매컬럼은 지금도 가끔 XTM에서 방송되는 <NCIS>에 고정 출연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진 뒷줄에 있는 말라드 박사 역이죠. 나이를 먹으면서 젊은 날의 날카로운 모습보다는 곱게 늙은 노인의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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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원 0011 이야기는 이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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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솔로. 저는 브라운관을 수놓았던 그 헤아릴 수 없는 첩보원과 액션 영웅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멋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2:8의 정교한 가르마가 인상적인 이 멋장이 첩보원은 일리야 쿠리야킨이라는 소련 출신의 스파이와 한 조를 이뤄 많은 사건을 해결했습니다.<첩보원 0011>, The Man from U.N.C.L.E 이라는 외화에 대해 쓰기 전에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쓸데 없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습성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방송될 때에는 너무나 어렸습니다.그렇다 보니 나폴레옹 솔로와 일리야의 멋진 모습은 기억이 나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아무래도 드라마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주변에 대한 것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시리즈 오프닝입니다.




아다시피 나폴레옹이 속해 있는 기구 U.N.C.L.E은 the United Network Command for Law Enforcement의 약자로, THRUSH(Technological Hierarchy for the Removal of Undesirables and the Subjugation of Humanity)라는 악의 단체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선 가장 궁금한 것은 0011이라는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대체 왜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는 '첩보원 0011'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드라마에는 0011이라는 숫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의 구성에 이언 플레밍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임스 본드의 동료들인 살인번호 소유자들은 001부터 009까지의 코드를 사용합니다. 0011이 등장했던 유일한 시리즈는 일본 만화영화인 <달려라 009>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린이날이면 단골로 재탕해서 보여줬던 <달려라 009>의 극장판에서 0011은 쌍둥이 0010와 함께 001-009까지의 주인공들을 공격하던 전자 사이보그였습니다.  막강한 미녀 사이보그 0012와 함께 악의 편이었죠.(또 삼천포로 빠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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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0011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직역하면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을 이 시리즈를 놓고 일본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을 겁니다. '첩보물 하면 007'이던 시절, 처음부터 '나폴레옹 솔로'라고 해 봐야 통할 리가 없고, '엉클에서 온 사나이'라고 직역해 봐야 '삼촌에서 오긴 뭘 와?'라는 반응밖에 없었을테니, 뭔가 첩보 드라마의 냄새를 풍기게 하려면 역시 00넘버를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럼 왜 하필 0011일까요? 글쎄요, 001에서 009까지는 이미 007시리즈에서 다 써 먹었고, 0010은 뭔가 이진수같고 보기에 나쁘니 모양새가 그럴듯한 0011이 된 게 아닐까...했는데 사실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고편 동영상을 보시죠.




자, 동영상을 보시면 본부 출입을 위해 가슴에 인식표를 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0011의 비밀이 있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 내용의 번역입니다.


<뉴욕의 유엔 본부 가까이의 빌딩가운데에 있다.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최신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멤버가 본부에 들어가려면 , 빌딩의 큰길에 접한 세탁소 지하의 비밀 출입구를 사용한다.안에 들어오면 우선 게이트의 여성 오퍼레이터로부터 역삼각형의 인식 플레이트를 받아, 가슴에 댄다.플레이트는 부문 마다 색이 달라 각 멤버의 인식 번호가 쓰여져 있다(솔로는 11, 이리야는 2).이 플레이트는, 출입마다 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도포되어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미처리 플레이트를 댄 것만으로 침입하려고 하면 경보가 울린다. >

네, 이것이 0011의 정체였습니다. 이 작은 단서로부터 일본인들은 0011이라는 스파이의 번호를 만들어낸 거였군요. 이런 소심쟁이들같으니.

아무튼 이 인상적인 주인공 나폴레옹 솔로의 얼굴을 잘 보다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꽤 있습니다. 물론 이 나폴레옹 솔로 시리즈가 무려 9편의 극장용 영화로 재편집되어 상영되기도 했지만(정말 이런 면은 007 못지 않습니다), 이 나폴레옹 솔로 역을 맡았던 로버트 본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바로 <황야의 7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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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율 브리너, 제임스 코번, 스티브 매퀸, 찰스 브론슨이 나온 그 <황야의 7인> 에 이 사람이 나온단 말이야?"하고 하시는 분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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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김주성 하석주 고정운 홍명보 등 왕년의 스타들이 보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한국축구사 요약 족보 2탄. 좀 길어도 그냥 한방에 끝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축구 100년사 (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축구협회는 또다시 대표팀 이원화론을 들고나왔다. 이번에는 화랑과 충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이디어는 청룡-백호와 똑같았다. 아무튼 이 해 화랑팀의 일원으로 제6회 박스컵에 출전한 차범근은 첫 경기인 말레이시아전에서 1 대 4로 뒤지던 후반 38분부터 순식간에 3골을 넣으며 4 대 4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날 이후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남북 축구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록한 해였다. 청소년 대표팀은 1976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북한과 만나 0 대 1로 진 적이 있지만 성인 대표팀의 만남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북한을 두려워해 맞상대를 꺼렸던 한국은 1978년 메르데카컵과 박스컵의 우승으로 자신감을 갖고 북한과 격돌했다.

12월 20일 방콕 국립경기장. 결승에서 만난 양팀은 연장전까지 격돌했으나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골은 터지지 않았고 결과는 공동우승이었다. 경기 후 열린 시상식에서 “기진맥진했고, 비기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는 남한팀 주장 김호곤은 북한팀 주장 김종민에게 “우리, 손 잡읍시다”라고 제안하며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사진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선수가 어깨동무를 한 이 사진은 지금껏 남북화해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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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대결 당시 김호곤의 축구화.

차범근은 아시안게임 직후 서독 분데스리가 테스트를 받았고 이듬해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유럽 무대 진출의 막을 열었다. 1980년에는 허정무도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고 이후 김진국 박상인 박종원 등이 앞다퉈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이 해 12월에는 국내에서도 국가대표 이영무를 주축으로 한 1호 프로구단 할렐루야가 창단, 프로화를 재촉했다.

1981년 5공화국의 스포츠 드라이브는 축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됐고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개막됐다. 한편으론 멕시코 세계 청소년대회 출전권을 따냈던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주심 폭행사건으로 2년간 각종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면서 한국은 대타로 멕시코행 티켓을 따내는 행운을 차지했다.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대회를 앞두고 개최지가 고지대라는 점을 감안, 선수들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는 등 가혹할 정도의 체력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졌다. 마침내 그 해 6월. 한국은 스코틀랜드에 첫 경기를 0 대 2로 내주며 한숨을 자아냈지만 홈팀 멕시코와 호주를 각각 2 대 1로 연파하며 예선을 통과, 8강에 진출했다.

김종부 신연호 이문영을 주축으로 한 한국이 6월 11일 우루과이를 연장전 끝에 2 대 1로 꺾고 4강에 오르자 전국은 축구 붐으로 불타올랐고 외신은 연일 한국의 선전에 찬사를 날렸다. ‘붉은 악마’라는 호칭은 바로 이때 등장했다. 비록 6월 15일 브라질에 1 대 2로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첫 ‘세계 4강 진출’에 쏟아지는 갈채는 끊일 줄을 몰랐다.

박종환 감독은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됐고 축구협회는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88팀’을 맡겨 육성하게 했다. 이 88팀을 모체로 해 ‘올림픽 대표팀’이 마련됐고 성인 대표팀인 ‘월드컵 대표팀’은 문정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올림픽 축구 출전 선수는 23세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 규정이 나온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의 일이었으므로 굳이 올림픽 대표팀의 나이가 어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은 1984년 LA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월드컵 대표팀 역시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예선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감독직을 사퇴한 문정식 감독 대신 김정남 감독을 내세워 대표팀을 일원화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 나선 한국은 승승장구 끝에 최종 예선에서 일본을 2 대 1, 1 대 0으로 연파하고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비원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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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독일에서 뛰고 있던 차범근까지 가세한 한국 대표팀의 기세는 충천해 있었으나 국제대회에서 매번 한국을 괴롭혔던 대진의 불운은 여전했다. 첫 상대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0 대 3으로 뒤졌던 한국은 후반 28분 박창선의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사상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어 한국은 불가리아전에서 후반 26분 김종부의 동점골로 1 대 1 무승부를 기록, 첫 승점을 올렸다.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도 3 대 2까지 추격해 접전을 벌인 것은 그리 실망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1무2패, 예선 탈락이었지만 국민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월드컵 대표팀 멤버들은 홈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사실상 첫 월드컵 진출’이라는 점을 감안해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던 국민은 이회택 감독이 이끈 1990년 이탈리아 대회의 3전 전패, 김호 사단이 출전한 1994년 미국 대회의 2무1패,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해임된 1998년 프랑스 대회의 1무2패 등 거듭되는 월드컵 본선의 실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아시아 예선 통과는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최대 과제는 ‘월드컵 16강 진출’이었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정몽준 의원이 47대 축구협회장에 당선되면서 한국 축구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바로 2002년 월드컵 개최 추진 발표. 10월 카타르에서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득실차로 제치고 출전권을 따내는 ‘도하의 기적’(일본에서는 ‘도하의 참변’)을 이룬 직후, 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월드컵 유치전 참가를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5년 전인 1988년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천명해 놓은 상태. 결국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96년 5월 31일, 공동개최에 사인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개최를 천명했던 일본에 비하면 공동개최는 뒤늦게 뛰어든 한국의 승리인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한국 팀의 성적. 허정무 사단이 1998년 아시안게임 부진(8강)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성론이 축구계를 강타했다. 2002년에도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총체적 위기감으로 각성한 축구협회는 2000년 11월 14일,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에 0 대 5의 치욕을 안긴 네덜란드 감독 거스 히딩크를 사령탑으로 초빙한다.

물론 히딩크도 처음부터 신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히딩크 사단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002년 초 유럽 원정에서 각각 프랑스와 체코에 0 대 5로 무너지는 등 신통찮은 모습을 보이며 극렬한 비난 여론에 부딪혔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 이전의 모든 경기는 연습경기”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6월 4일, 한국은 부산에서 강호 폴란드를 2 대 0으로 가볍게 누르며 월드컵 진출사에 마침내 첫승을 신고했다. 이때 이미 대다수 국민은 ‘목표 달성’의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국은 6월 10일 미국과 1 대 1로 비긴 뒤 6월 14일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누르고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붉은 물결로 뒤덮였지만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히딩크 감독은 6월 18일 이탈리아와 16강전을 앞두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I’m still hungry)”는 명언을 남기며 선수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린 한국의 2 대 1 승리. 6월 22일 한국은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세계 4강에 올랐다. 1966년 북한이 영국 월드컵에서 이뤄낸 8강 신화를 넘어선 것이다.

비록 4강전에서 독일에 0 대 1로 패했고 3·4위전에서도 터키에 2 대 3으로 져 종합성적은 4위에 그쳤지만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히딩크는 한국인의 영웅이 됐다. 대표팀 서포터인 ‘붉은 악마’와 100만 인파를 동원한 거리 응원의 장관도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다.

3년 뒤인 2005년,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 6회 연속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으나 국민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미 신화가 된 ‘불패의 명장’ 히딩크의 그림자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만 보였던 두 후임자, 코엘류와 본프레레를 낙마시켰다. 과연 2006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나서는 한국 축구는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끝)



그 뒤의 일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아드보카트는 1승을 거뒀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은 핌 베어벡을 사령탑으로 내세웠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모두 4강에 그치며 국민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허정무 사단은 2010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천적 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두 장의 티켓을 다퉈야하는 위기를 맞았죠. 과연 허감독의 '옛날축구'가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월드컵 본선 연속진출 회수를 6에서 마감해버릴까요?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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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6월, 한국의 6회 연속 본선 진출이 결정된 쿠웨이트 국립경기장에서 창밖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경기전만 해도 쿠웨이트 3(손가락 세개), 한국 0이라고 재롱을 부리던 녀석들이 쿠웨이트가 박살이 났는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BE THE REDS 티셔츠를 흔들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산만하고 활기차보이는 녀석들이더군요.

한때는 야구, 축구, 농구를 취재했습니다. 지나간 사진들을 보다 보면 그때의 잔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그때 썼던 글들 중에도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 한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 축구 100년사 (1)>


축구인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축구 백년'을 거론해왔다. 과연 한국 축구의 시원은 어디일까. 삼국시대 화랑들이 했다는 축국(蹴鞠) 놀이까지 거슬리 올라간다면 1500년은 쉽게 넘어서겠지만, 근대 축구의 한국 상륙은 1882년 6월 인천 제물포에 기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이 보여준 공차기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후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를 통해 축구는 빠르게 전파됐고, 1900년 경에는 이미 여러 동호회가 축구 경기를 벌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일부에서는 1905년, 배재학당 프랑스어 교사인 마텔이 축구팀을 운영한 것이 진정한 한국 축구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올해가 진정한 '한국축구 100년의 해'가 되는 셈이다.

1921년, 조선-동아일보의 노력으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2월11일부터 3일간 전조선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첫날 중학부의 3경기가 모두 판정 불복으로 인한 기권으로 끝나는 등 어수선하고 미숙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로 인해 룰과 심판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이렇게 시작된 전조선 축구대회는 22년 제 2,3회가 연이어 열리는 성황으로 이어진다.

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됐고 이해 처음 열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경-평 축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특히 경성축구단의 김용식은 마라톤의 손기정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조선 최고의 운동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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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용식 옹.


조선 각지의 팀들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 39~40년에는 함흥축구단, 41년 평양일곡, 42년 평양병우 팀이 연속으로 우승해 식민 치하에서도 축구만큼은 한국이 일본을 압도한다는 자긍심을 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해방후의 혼란 속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45년 12월 곧바로 조선축구협회가 재결성(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됐고 46년 최후의 경-평전이 열리는가 하면 48년에는 FIFA 가입과 런던 올림픽 참가가 이뤄졌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48년 6월21일 서울을 떠난 16명의 선수들은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선편으로 홍콩에 도착했고, 여기서 다시 항공편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홍콩 체류중인 7월 6일 홍콩의 한 팀과 치른 경기(5대1 승)가 한국 대표팀의 첫 공식 국제경기였다. 한국은 8월 2일 멕시코와의 서전을 5대3으로 이겼으나 스웨덴에게 0대12로 대패,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했다.

한국전쟁중인 51년에도 김화집이 첫 FIFA 공식 심판으로 인정받는 등 국제적 역량을 키워가던 한국 축구는 54년 3월, 스위스에서 6월 개막되는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일본과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됐다. 이 대결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져야 마땅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 경기를 갖는 것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대표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대통령 앞에서 "지면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맹세를 하고 장도에 올랐다. 3월 7일. 정부수립 후 첫 한-일전에서 한국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뚫고 5대1의 대승을 거뒀다. 14일 벌어진 2차전은 2대2 무승부로 끝나 한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이뤄졌다.

본선 첫 경기는 6월 17일, 불행하게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가 상대였다. 48시간을 날아온 한국 선수들은 체력과 기술의 심각한 열세로 0대9로 대패했다. 2차전인 터키전에서도 0대7. 다시 한번 '세계의 쓴 맛'을 본 한국은 56년 홍콩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안컵, 58년 도쿄 아시안게임을 제패하며 아시아의 축구 강국으로 자리잡아갔다.

화려한 50년대에 비해 60년대는 한국 축구의 수난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국은 66년 영국 월드컵을 앞두고 예선 출전을 포기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아시아 축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북한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국가적인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한국의 입장을 합리화해주기라도 하듯 박두익이 이끈 북한은 이 대회 본선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경악케 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부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67년 '북한을 꺾고 아시아 최강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유명한 양지팀을 창단한다.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을 모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양지팀으로 차출, 군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애매한 신분에 칙사 대접을 하며 팀을 관리한 것이다. 당시 보기 힘들었던 잔디 연습구장과 두둑한 용돈으로 선수단의 기세는 올랐지만,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결국 71년 김형욱 부장의 경질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양지팀은 해체된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도 또다시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청룡(1진)과 백호(2진)라는 이름으로 2원화했다. 명분은 각종 국제대회 참가 선수의 폭을 늘려 선수들이 선수들이 많은 경험을 쌓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1진과 2진으로 나눈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축구협회는 71년 뮌헨 올림픽 예선 탈락으로 다시 청룡과 백호를 해체하고 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대표팀을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신고 3학년이던 한국 축구의 기린아 차범근이 성인 무대에 등장한다. 71년은 세계 각국의 유명 축구팀을 초청해 벌이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약칭 박스컵)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TO BE CONTINUED>



2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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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뉴스 사진입니다.)

올해들어 부진을 면치 못하던 양준혁이 요즘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프로야구 최고참 자리를 다투고 있는 이 노장의 분전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옛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95년 여름의 어느 날입니다. 당시 삼성은 어정쩡한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방망이는 괜찮았습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주역이던 방망이는 비록 김성래가 급격한 쇠퇴의 기미를 보였지만 양준혁을 중심으로 신인 이승엽, 무명 중고신인 이동수(결국 95년 신인왕이 됩니다), 그리고 백인천 타격 인스트럭터의 후광을 받은 신동주와 최익성 등이 수혈되면서 만만찮은 기세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투수력. 김태한과 박충식을 제외하곤 믿을 선수가 없었습니다. 오봉옥이 잠시 구원투수로 반짝했지만 불펜의 양과 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롯데전 전담요원 성준이 아직 건재했지만 일단 선발이 무너지면 대책이 없는 게 당시 삼성의 팀 사정이었습니다.

아무튼 팀 성적이 썩 좋진 않았지만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대구구장에 인조잔디를 깔고 관중석을 정비한 이후 대구구장은 연일 매진 행진을 벌입니다. 뭣보다 양준혁-이동수-이승엽의 클린업이 인기의 중심 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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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차에 팀의 중심이 된(물론 데뷔 시즌에도 중심이었지만) 양준혁은 영 삐딱한 성격이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친해지고 나면 의리도 두터운 친구였지만 아무튼 대구인 특유의 뻣뻣함이 돋보이는 인물이라 기자들에게는 기피인물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타플레이어이니 멀리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김성근 백인천 같은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습니다. "3할을 치잖습니까"라면 "양준혁 정도면 3할3푼에 홈런 30개 정도는 기본으로 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더군요. '스윙이 나빠 체격에 비해 홈런이 적게 나온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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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코치'가 1루에 나가 있을 때도 있었군요. 뒤는 더구나 신경식...^^
참, 대부분의 사진은 http://www.yangjunhyuk.com 에서 퍼 온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당시 1994년에 이어 95년에도 삼성을 맡았고, 동봉철 김태한 양준혁 등 88학번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준이나 류중일 같은 선수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고참 선수들은 대개 기자들에게도 '틱틱거리는' 걸로 유명했죠.

강기웅 김용국 이종두 같은 선수들은 팀 성적에 비해 스타의식이 지나친 선수들로 불렸습니다. 그걸 보고 기자들은 "아직도 삼성이 최강팀인줄 안다"고 말하곤 했죠. 결국 이들 선수들은 96년 백인천 감독에 의해 대거 정리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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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 길었는데, 양준혁은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사고를 한번 칩니다. 95년의 어느 여름날, 삼성과 LG가 대구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중반, 양준혁이 친 잘 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쭉 뻗어나갔는데, 어기적 어기적 하던 LG 중견수 최훈재의 글러브에 맞고 공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이때 전광판에는 E자 아래 불이 들어왔습니다. 안타가 아니라 최훈재의 실책이란 판정이 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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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외야로 공이 나간 경우, 에러보다는 안타 판정이 나는 게 대부분이긴 했기에 약간 의외다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에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기자실과 같은 층에 있는 기록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에러 판정에 격분한 양준혁이 기록실로 뛰어올라와 문을 발로 걷어 차며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분명 어느 쪽으로도 판정이 날 수 있었습니다. 에러로 판정을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경기후 이 소식을 들은 최훈재는 "아니 그건 내가 실수한게 맞는데 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공식 기록원의 판정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선수가 그것도 경기중에 기록실 문을 발로 차면서 안타-실책 판정에 항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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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는 양준혁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우루루 떴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양준혁은 무척 분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욕할 수가 있느냐는 항의를 해왔습니다.

다음날 낮, 경기장에서 양준혁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욕을 먹을 상황이다. 어떻게 선수가,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스타플레이어가 기록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했죠. 그는 이런 부분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관례상 외야수가 포구를 못 했을 때 실책으로 판정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럼 선수는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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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말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프로 선수는 안타 하나를 치는데 정말 목숨을 건다. 선수에게서 안타 하나를 빼앗는 것은 선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죠. 그럼 저도 "기자도 기사 하나 쓰는데 목숨을 건다"고 맞섰어야 하는데, 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제가 '기자계의 양준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훌륭한 기자 중에는아마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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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월이 흘러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2000개의 안타를 친 타자가 됐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날 그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 한개 한개의 안타에 대한 '목숨을 걸고 친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영광도 없었겠죠.

일본과 미국에서는 대 선수의 기준이 3000안타입니다. 경기 수도 많고, 병역 의무도 없는 나라와 비교하자니 한국에서의 기준은 낮춰질 수밖에 없죠. 양준혁이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서 활약했다면 지금쯤 3000안타를 넘어섰거나 넘보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앞으로 누가 나오건 당분간 2000안타를 넘볼 선수도 쉽지 않습니다. 과연 양준혁이 스스로 목표라고 밝힌 3000안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얘기 하나.

지금은 오히려 그런 얘기를 덜 듣지만, 신인 시절 그는 '머리가 크다'는 말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습니다. 삼성의 김상엽, 롯데의 주형광 임수혁과 함께 4대 거두로 불리기도 했죠. 94년인가 95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야구장에 나가 그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나: 어이 양군, 머리가 크면 정말 야구를 잘 하나?

늘 그냥 씩 웃고 말던 그가 한마디 하더군요.

양: 내가 요즘 눈여겨 봤는데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
나: 에이, 설마 자네랑 비교가 될까?
양: 아니, 말로 할 거 없이 내 모자 한번 써 봐요.

설마 하는 생각에 그가 벗어서 내미는 헬멧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쓰려는 순간, 이.럴.수.가.... 헬멧이 안 들어가는 겁니다. 허걱.;

그 다음부터 선수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저를 잘 알아보더군요. 대신 닉네임은 좀 길었습니다. '준혁이 모자도 안 들어가는 기자'라구요. 정말 생각해 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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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LG 시절의 모습. 역시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은 양준혁은 왠지 가짜같습니다.

마지막으로 2006 까지의 통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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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꿈의 성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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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모두 고개를 흔들던 이 타법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만세! 타법.^^

아무튼 부상 없이 무사히 선수생활을 마치고, 이미 대구상고 재학시절부터 꿈이었다는 '삼성라이온스 감독'이 되어 무궁무진 활약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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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매직이 유로 2008에서 부활했죠. 네덜란드까지 이길 줄은 정말 몰랐는데, 역시 네덜란드는 뒷심이 없는 팀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전력을 보면 어느 팀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절대 우승을 못하는 팀들이 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죠.

또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납니다. 히딩크 감독이 희동구가 된 사연에 관련된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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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뜨거운 열기가 온 나라 안에 넘쳐 흘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열기가 뿜어나온 것은 6월4일, 폴란드전에서 한국이 월드컵 본선 사상 첫 1승을 올린 다음부터라고 얘기해야 정확할 겁니다.

당시 다른 회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저도 한 술집에서 폴란드전의 승리에 들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 히딩크 시나리오가 뭔지 알지?"

인터넷에는 일찌감치 히딩크가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축구당을 만들어서 대통령에 출마한다, 뭐 히딩크교가 생긴다 어쩐다 하는 유머가 나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죠.

"그럼 그 속편을 빨리 우리가 발굴해야겠다."

속편 같은 건 본 적도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원작도 없는데 무슨 속편입니까.

"니가 만들어."

만들라니요. 이건 기자로서의 윤리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어차피 농담인데 뭘 그래. 그리고 니가 만들어서 유행시키면 될 거 아냐."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요즘 분위기면 그런 건 아무도 따질 사람 없으니까 걱정 말고 재미있게만 만들어라. 진짜로 유행이 되면 될거 아니냐' 는 지시였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히딩크를 영웅으로 만드는 분위기'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터이므로 다음날 뚝딱뚝딱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OK가 나서 신문에 실렸습니다.


http://www.sportschosun.com/news/news.htm?name=/news/life/200206/20020606/26f81001.htm

(옛 직장이지만 이제는 경쟁사 비슷한 처지라 그냥 퍼올수가 없어서 링크를 걸었습니다. 보실 분은 좀 불편하지만 직접 건너가서 보시길. ;)

다른 건 뭐 다 그저 그런 얘기들이고, 이미 인터넷에 떠돌던 이야기에 살을 입힌 것인데 두 가지는 좀 신경을 썼습니다. 하나는 '4강에 오를때'의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라는 이름을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결승에 오를 때'에서  '한국 국민이 되더라도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선거법 규정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후자는 선관위에 문의해서 알아본 내용이었거든요.

'희동구'라는 이름은 개화기 한국에 기여한 외국인들이 대부분 원두우(언더우드), 석호필(스코필드) 처럼 한국식 개명을 한 것을 본딴 것입니다. 굳이 '히동구'가 아니라 '희동구'라고 한 것은 '히딩크'의 '히'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라서 가능한 한 발음이 비슷한 한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한문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성은 당연히 기쁠 喜, 이름은 동방의 공이라는 뜻으로 東球 정도로 생각했고 본관인 상암은 당연히 상암 경기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동구'란 이름은 그 뒤로 엄청나게 널리 쓰였습니다. 간혹 '히동구'라는 경쟁 표기도 보였고 한자의 뜻까지 생각한 '희등구' '희동규'라는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희동구'가 대세가 되는 걸 보고 신이 났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희동구'라는 이름을 새긴 주민등록증도 인터넷에 등장하더군요. 발급일은 월드컵 개막일인 5월31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喜東丘라는 한자는 저 주민등록증을 만든 분이 붙이신 걸 겁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서 그 유명한 이규태 칼럼에도 '상암 희씨'라는 말이 나온 걸 보고 혼자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노파심에서 토를 달지만 제가 이 이름에 대해서 무슨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희동구'라는 이름은 누구도 조금만 생각하면 지을 수 있는 별명이고, 누군가는 우연히 같은 별명을 붙인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선동열 감독의 별명인 '무등산 폭격기'를 지은 것도 어느 기자일텐데 이 별명이 이렇게 히트했다고 해서 그분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가겠습니까. 그저 만만한 주위 사람들에게 '저게 어떻게 해서 나온 건줄 알아?' 하면서 흐뭇해하고 마는 거죠. )

이 전통을 잇듯 2006년 대표팀을 한때 지휘했던 조 본프레레에게는 '조봉래', 본선 대회를 이끈 아드보카트 감독에게는 어느새 '안두복'이라는 한국 이름이 붙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허정무 감독에게는 이런 이름이 필요없겠죠. 다 지나간 시절의 기억입니다.

아무튼 히딩크, 정말 대단합니다. 이제 나이들어 스웨덴 대표팀은 못 맡겠다고 손을 홰홰 젓지만 그래도 한번쯤 월드컵 우승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 개인적으로는 히딩크가 지휘하는 아프리카 팀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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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히딩크는 왕년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경기를 지휘하는 스타일이나 선수를 선발하는 스타일 등은 전혀 다르지만, 약팀의 무명 선수들을 강하게 조련해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어 놓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강팀에서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히딩크도 한때 바르셀로나 감독을 했고 김성근도 90-92년 삼성 감독을 했습니다. 성적은 둘다 그저 그랬죠), 우승은 시키지 못한다는 점도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다 아다시피 김성근 감독도 이제는 우승을 시킬 수 있는 감독이 됐죠.^^ 히딩크도 언젠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키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p.s. 저 회사의 웹 관리에 문제가 있는지 링크가 깨지고 기사가 안 나오더군요. 사실 기사라고 하기도 유치한 장난이지만, 모두가 행복했던 그 시절엔 아무도 그런 걸 문제삼지 않더군요.^^

그냥 본문을 첨부합니다. 2002년 6월6일 기삽니다.






히딩크의 축구당 창당, 귀화설 운운했던 히딩크시나리오에 이어 2탄격인 신 히딩크시나리오가 나돌아 화제다.'히딩크 사단'이 16강을 넘어 더 좋은 성적을 낸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막힌 스토리. 인터넷과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공전절후의 사태, 즉 히딩크 가상시나리오를 공개한다. < 편집자주>


한국 4강 오르면... 히딩크 귀화...'상암 희씨' 시조

한국을 빛낸 위인에 선정
 
16강에 오를때

히딩크는 "16강은 애당초 목표도 아니었다"는 코멘트로 한국 국민들을 열광시킨다. 종래의 '히사모'(히딩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히귀모'(히딩크를 귀화시키기 위한 모임)로 변해 '히딩크 잡기'에 나선다, 히딩크의 매니지먼트사에서는 몸값 관리를 위해 광고 모델제의를 전면 거절하고, 노래방 히트곡인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이 히딩크가 들어간 가사로 개사되어 나온다.

출판사 종신 모델로 고용
 
8강에 오를때
 
히딩크를 스카우트하려는 일본을 비롯한 축구 개도국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보디가드가 붙는다. 일단 히딩크는 2006년까지 대표팀을 맡게 된다. 히딩크의 캐릭터 상품 '히동크'가 등장해 인기를 끈다. 히딩크 붐으로 네덜란드에 '조기 축구 유학'을 보내려는 과열 학부모들 때문에 네덜란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 치열한 경쟁 끝에 '꼴찌가 우등생 되는 법'을 주제로 한 학습교재 출판사에서 히딩크를 종신 광고 모델로 고용한다.

4강에 오를때
 
히딩크가 밀려드는 권유와 압력에 귀화, '상암 희씨'의 시조 '희동구'로 개명한다. 히딩크의 조상이 한국인이었다는 설이 재야 사학계에서 제기된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사실은 희사부였다, 향가 '찬기파랑가'가 사실은 '찬희파랑가'였다는 주장 등이 나온다. 대선주자들의 입당 제의가 쏟아져 히딩크가 '정치 중립'을 선언한다. 톱스타 A양이 "히감독의 아이를 가졌다"고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국내 모든 대학이 경쟁적으로 히딩크학과를 개설한다.

대선출마 선거법 논란 일어

결승에 오를때

'히'자가 붙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상호를 '히언대 그룹'으로 바꾼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폭등한다. 국적을 취득한 히딩크가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설수 있느냐를 놓고, 선거법 16조의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법조문의 해석에 논란이 벌어진다. 국사 교과서 표지 모델이 히딩크가 된다.

'대통령 만들기' 헌법 개정

우승할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히딩크 스토리' 제작을 발표한다. 주인공 히딩크 역을 맡기 위해 션 코너리는 가발을 새로 맞추고, 해리슨 포드가 체중을 늘려 경합을 벌인다. 네덜란드 정부가 가족과 친지들을 동원, 히딩크의 한국 국적 취득을 반대하고 나서지만 히딩크는 한국인이 되고, 대통령선거가 그의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은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포기한다.

2004년 올림픽 金 재기
 
선전하지만 16강에는 실패할때
 
전 국민이 축구를 저주하게 되고 집집마다 내다 버린 피버노바가 길에 쌓인다.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대표팀 감독 자리를 위해 일부 선수들을 사주, 고의로 16강에서 탈락하게 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이 음모의 배후인물로 지목된 지도자들이 해외로 도피한다. 히딩크는 2004년 올림픽 팀을 맡아 금메달을 따내며 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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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으로 오래 끌었던 600만불의 사나이-특수공작원 소머즈 시리즈를 끝맺겠습니다. 지나간 얘기들에 관심있는 분들은 왼쪽의 '추억의 외화' 폴더를 이용하시면 간편합니다.)

600만불의 사나이의 최대 강적은 역시 무적의 금성우주차였습니다. Death Probe라고 불리는 이 우주차는 본래 금성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첨단 과학을 동원해 만든 무적의 과학 장비지만 악당들의 손에 들어가 테러용 무기로 사용됩니다. 이 우주차는 상하편으로 두 번, 무려 4회에 걸쳐 스티브 오스틴을 궁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우주차는 어려서 먹던 스카치 캔디같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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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도전 때에는 금성과 지구의 기압차에 착안한 오스틴이 이 우주차를 높이 들어올려 파괴해 버립니다. 두번째는... 악당들이 머리가 좋아져서 이번엔 기압차이를 고려하고 만드는 바람에 공중들기 공격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안 납니다.;; 산을 이용해서 녹여버렸던 것은 기억나는데 중간 과정이 전혀 깜깜하군요.

오스틴을 위협했던 적들은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오스틴과 소머즈가 함께 싸웠던 유명한 에피소드 중에는 Kill Oscar라는 것이 있습니다. 76년 10월에 방송된 부분인데, 무려 3부에 걸쳐 두 바이오닉 용사들은 악의 무리들이 만든 펨보트-여자 얼굴을 한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보트-들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심지어 이들의 상관인 오스카 골드맨까지도 로보트와 바꿔치기를 당하죠.

이때 오스틴은 골드맨의 발자국이 카펫에 깊이 패이는 걸 보고 연필을 던져 봅니다. 골드맨이 밟은 연필은 산산조각이 나 버리죠. 오스틴은 이를 보고 '골드맨, 다이어트좀 해라'...가 아니고 그가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와 싸우는데, 싸우는 도중에 끔찍한 광경이 노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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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껍질이 떨어진 오스카의 모습입니다. 어려선 저 모습을 보고 비위가 상해서 밥을 못 먹었습니다. 지금 봐도 사뭇 징그럽군요. 괜히 올렸습니다.

펨보트군단의 모습입니다.




유난히 인기 높았던 펨보트. 심지어 펨보트 인형까지 나왔군요.




오스틴의 적수들이 대부분 무식했던 반면, 소머즈의 강적들은 좀 특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에서 어떤 분이 지적했던 슈퍼컴퓨터 알렉스도 Doomsday is tomorrow라는 상하 에피소드에서 열연했습니다. 컴퓨터 주제에 은근히 소머즈를 좋아해서 욕을 먹기도 했죠.

소머즈의 친구로 등장한 맥스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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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클럽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타 맥스)

뭐라구요? 맥스 사진이 없으니까 아무 세퍼트 사진이나 갖다 놓은 것 아니냐구요? 아니 웬 의심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아니라는 증거를 대세요, 증거를! 세퍼트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튼 소머즈의 적 중에서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적은 바로 쌍둥이 소머즈, 소머즈와 똑같은 얼굴을 했던 여성입니다. 리사 갤로웨이라는 이 악역 캐릭터는 76년 Mirror Image, 77년엔 Deadly Ringer 상하편에 출연해 소머즈를 괴롭혔습니다.

첫 등장때 갤로웨이는 소머즈와 똑같이 성형수술을 하고 골드맨에게 접근해 OSI의 기밀을 빼내려다 결국 소머즈의 바이오닉 파워에 힘도 못 써 보고 감방행을 당합니다. 두번째 등장 때에는 악당들도 똑똑해집니다. 악당 중의 무슨 박사가 아드레날린(사실 저는 이 호르몬의 이름을 이 에피소드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제제를 이용해 초인적인 힘을 내는 방법을 발견하고, 갤로웨이에게 이 약을 투입해 진짜 소머즈와 구별할 수 없게 합니다. 물론 이들은 진짜 소머즈도 바이오닉 수술이 아니라 이 약이나 또는 다른 유사한 약을 이용해 슈퍼 파워를 낸다고 생각하죠.

갤로웨이 역할은 '당연히' 린제이 와그너의 1인 2역입니다. 우리의 주인공과 주인공을 흉내내는 사회 밑바닥 출신의 여자. 극중에서 소머즈는 적들을 찾아내기 위해 갤로웨이 행세를 하는데, 이때 '좋은' 소머즈와 '나쁜' 갤로웨이를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흡연/비흡연이었던 걸 보면 미국도 70년대에는 지독하게 보수적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쓰다 보니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바로 77년에 방송된 Jaime and the King이라는 에피소드입니다. 제목부터 벌써 고전 뮤지컬 영화 <왕과 나 King and I>의 냄새가 풍기죠. 여기서의 왕은 미국과 가까운 어느 중동 국가의 왕(뭐, 사우디 아라비아 말고 있겠습니까)입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비 왕(...중동에서 이 무슨...)이 아들의 가정교사로 미국 여자를 불러들입니다. 물론 소머즈는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가정교사를 가장하고 투입되는거죠.

소머즈는 이 에피소드에서 첩보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지만, 말썽꾸러기 왕자 제자 앞에서 벽에 걸린 거대한 방패를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낸 뒤 말합니다. "제가 나쁜 뜻이 있었다면 이런 힘을 갖고 순순히 물러났겠습니까?" 그리고는... 뭐 만사 해피엔딩이죠.

이 에피소드가 왜 기억에 나느냐, 바로 이런 장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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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기억나는 걸 보면 저는 아무래도 마냥 청순가련한 초등학생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아무튼 이것으로 기나간 600만불의 사나이와 소머즈 이야기는 마감하려 합니다. 사실 이렇게 길게 가려고 하지는 않았건만 쓰다 보면 다른 얘기가 생각나고, 또 다른 얘기가 떠오르고 해서 늘어지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쓰는 저 자신에겐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정리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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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최근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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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색슨이 스티브 오스틴과 제이미 소머즈에 이어 원더우먼을 위협한 것은 1976년 11월 6일과 13일에 걸쳐 방송된 Feminium Mystique 편이었습니다.

페미니움이란 원더우먼과 아마존 일족이 살고 있는 파라다이스 섬에서만 나오는 신비의 금속-총알을 막는 원더우먼의 팔찌를 만드는 원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이 금속을 노리고 나치들이 파라다이스 섬을 기습한 내용입니다. <사관과 신사>의 데브라 윙거가 원더우먼의 동생 원더걸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죠.

원더우먼이 힘의 원천인 허리띠를 빼앗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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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처지가 되기도 했었죠. 아무튼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존 색슨은 당연히 이 에피소드에서도 페미니움을 노리는 나치 특수부대 장교 역할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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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찾았습니다.;;




3대 슈퍼 영웅과 맞짱을 뜬 색슨의 활약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는 공포영화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영화, <지옥의 카니발>에 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영어로는 Cannibal Apocalypse, 이탈리아 원어로는 Apocalypse Domani라고 불리는 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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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면 뱃속으로 존 색슨의 얼굴이 보입니다. 여기서 색슨은 세계를 휩쓴 식인 바이러스-한번 좀비에게 물리면 의식이 없는 식인 좀비가 되어 버리는 이 병은 70년대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죠-에 맞서 싸우는 파월 용사 노먼 호퍼로 등장합니다. 물론 맞서 싸운다고 해 봐야 이미 그의 몸 속에는 식인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습니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의 전편처럼 느껴지는 영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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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색슨의 공포영화 이력도 상당히 화려합니다. 이 영화는 바로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의 신화가 시작된 영화, <나이트메어 Nightmare on Elm street>의 첫편입니다. 색슨은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헤더 랑겐캠프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합니다.

...오랜만의 좋은 역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찾아봐도 <나이트메어>에 나오는 존 색슨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엉뚱한 사람의 옛 모습을 보게 된 기념으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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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연기파 배우 조니 뎁이군요. 그러나 이 영화에선 몇 번째 안에 프레디 크루거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그냥 흔한 조연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역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죠.

존 색슨은 이후에도 <비벌리힐스 캅 3>, <황혼에서 새벽까지> 등에 출연했고 지난해에는 <CSI>에 얼굴을 비치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여왔습니다. 특히 지난해에는 70세를 맞은 기념으로 <호러 마스터스>라는 특별 행사에 출연해 이런 무서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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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합니다. 아무튼 일세를 풍미한 '잘 생긴 악역' '거물 악역' 배우의 대명사 존 색슨의 일대기를 살짝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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