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감독은 나이답지 않게 요즘 단문 메시지를 즐기는 듯 합니다. 며칠 전, 차감독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골많이 넣는 공격수라고 페널티킥 잘 차는것 아니야. 배짱이 좋아야해. 나 어제 (일본 대표팀의 수비수)고마노가 실축하는거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더라. 승부차기, 그거 진짜 만만치 않아. 5분동안 3골씩 넣는 나도 그건 어렵다니까" 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서 기사화됐습니다.
물론 일본-파라과이전의 승부차기를 보고 승부차기의 어려움에 대해 쓴 글이지만 글 말미에 있는 '5분에 3골'이라는 말에 옛 생각이 되살아났습니다. 바로 70년대, 월드컵보다 한국인들에겐 더 인기있었던 '박스컵'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으실 겁니다. '차범근 신화'의 수많은 클라이막스 중 하나인 이 '5분에 3골'이 터진 건 바로 1976년의 일이었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경신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던 1972년, 이미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에 동시 선발됐습니다. 만 19세의 나이로 한국의 에이스가 될 가능성을 보인 것이죠. 그 뒤로 100m를 11초4에 뛰는 준족, 탁월한 골 결정력, 공을 몰고도 옆에서 그냥 뛰는 수비수보다 빠르다는 무서운 돌파력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발돋움합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긴 했지만, 번번이 올림픽과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놓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월드컵 예선에서는 호주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수시로 한국을 위협했습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일본보다 이들 동남아 국가들이 축구 강국의 면모를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이 시기 한국 축구팀의 주요 활동 영역은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과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였습니다. 특히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흔히 '박스컵'이라고 불렸던 이 대회는 한국이 주최국으로서 2개 팀을 출전시키고, 아시아 각국과 해외의 몇몇 클럽 팀들을 초청해 벌이는 대회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고교야구였지만 그 고교야구도 박스컵만큼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 개최국인 한국은 1진인 화랑과 2진인 충무를 박스컵에 출전시킵니다. 당연히 차범근은 1진인 화랑의 주전 라이트윙. 물론 충무도 허정무 조광래 신현호 박창선 김황호 등 몇년 뒤 한국 축구사를 장식할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이었습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볼때는 차범근만 빼면 충무의 라인업이 더 화려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당시 화랑에 걸린 기대는 당연히 홈팀으로서 우승. 하지만 바로 첫날 첫 경기에서 화랑은 엄청난 위기를 겪습니다. 1976년, 제6회 박대통령배 축구대회 개막일인 9월11일, 화랑은 아시아의 난적 말레이시아와 개막전을 치렀습니다.
< 불행히도 이긴 경기가 비긴 경기보다 우선이라는 당시 판단 때문에 차범근이 헤드라인을 장식하진 못했습니다.>
이날 화랑의 출전 선수 명단은 이렇습니다. GK 김희천(김진복) FB 강병찬 김호곤 김철수(박성화) 황재만 HB 최종덕 박상인 FW 이영무 차범근 조동현 김진국. 문정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는 거의 대다수 국가들이 4-2-4를 축구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입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이 뛰어넘기 힘든 강팀은 분명 아니었지만, 언제나 한국과는 시소 게임을 펼쳤던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경기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한국이 전반에만 0-3으로 뒤졌던 겁니다. 특히 GK와 수비의 호흡 불일치로 자책골까지 허용한게 더욱 나빴습니다.
전열을 정비한 화랑은 후반 24분 박상인의 골로 추격했으나 34분 다시 한골을 허용해 1-4로 패색이 짙던 상황. 그러나 차범근이 38분, 42분, 43분 연속으로 세 골을 넣어 4대4, 기적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냈습니다.
당시의 차범근은 그야말로 누구도 막지 못할 선수였습니다. 말레이시아 선수들이 공을 끌고 나올 때마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인터셉트해 골로 연결시키는 솜씨는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 같은 차이를 보였죠.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의 마라도나를 연상하시는게 가장 좋은 비교일 듯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차범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새긴 '5분에 3골'의 전설입니다. 이전까지도 차범근은 한국의 희망이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까지 '한국 최고의 골잡이'를 물으면 '이회택'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겁니다. 아울러 당대에도 김진국 김재한 등 걸출한 스트라이커들이 이었고, 차범근은 '그중 하나'였죠. 하지만 이날, 4대4의 기적을 이끌어 낸 뒤 한국인들에게는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이 생겼습니다.
결국 이렇게 첫 경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화랑은 그 뒤로는 승승장구 예선을 통과, 결승에서 브라질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0대0으로 비기고 공동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대회에서 차범근은 말레이시아전의 해트트릭을 포함, 7골 4어시스트로 맹활약해 한국 우승의 일등공신이 됩니다.
물론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선수로 남긴 업적과 그의 전설에 대해서는 책 한권을 써도 부족할 겁니다. 이보다 전에도, 그 뒤에도 얘깃거리는 많지만 한번에 다 풀어놓기는 힘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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