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쿠사이의 고향 스미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까진 좋은데, 정작 호쿠사이의 그림을 그리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못했다.
전시실은 3층의 두개가 전부. 2층은 특별 전시 때만 사용한다고 한다.
전시실 하나만 보면 400엔, 두개 다 보면 700엔. 그런데 표를 사려고 서 있으면 옆에서 친절하게 얘기를 해준다. 400엔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부 레플리카라고.
뭐요 레플리카? 호쿠사이 미술관이라고 이름을 걸어놓고 레플리카?
뭐 기본적으로 우키요에는 전부 판화다. 그 판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느 것인지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건 좋았다.
그 유명한.... 그런데 물론 레플리카.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요시와라의 새해' 그림.
요시와라는 에도 시대의 유명한 유곽 지역. 새해를 맞아 요시와라의 여인들이 몸 단장을 하고 손님맞이 준비를 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요란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풀 스케일 하이 데피니션 레플리카'라고 쓰여 있다.
가나가와의 혼모쿠 해안 그림. 그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 그림의 자매편 쯤 되는데, 역시 레플리카.
조개줍기 그림. 언뜻 봐도 몇군데 벗겨진 것이 오래된 느낌이 든다. 혹시 이건...?
진품이네. 그 유일하게 하나 있는 진품에는 '사진찍지 말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아. 미안해. 벌써 찍었네. 이거 하나는 봐줘.
이런 식의 삽화들,
그러니까 이 두 그림은 모두 후가쿠 36경이라는 시리즈의 일부다. 후가쿠( 富嶽)는 후지산의 별칭.
당연히 후가쿠 36경에 담긴 그림에서는 모두 후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판화집에는 모두 46장의 그림이 실렸다는데(36경이라더니?) 당시에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과연 몇부나 찍었을지?
(물론 이 그림들도 모두 레플리카...)
사실 호쿠사이의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맘에 드는 건 이런 식의 귀신 요괴 그림들.
결국 현장에서 이런 우키요에로 그린 귀신 그림 모음집을 샀다.
그리고 우키요에 미술관을 따로 찾은 보람은,
호쿠사이의 아틀리에(?)를 재현해 놓은 공간.
제자 츠유키 릿츠가 그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대로 방을 재현해 놓았다.
방이 좀 추웠던 듯? 옆에 앉은 여인은 당연히 아내겠거니 했는데 위의 설명을 다시 읽어 보니 딸이라고.
아니 딸이 왜 나이가 더 들어 보여...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기야 당시의 우키요에는 포스터, 포장지, 책 표지로 마구 뿌려졌다고 하니 뭐 그럴수밖에. 대신 후손들에게는 꽤 좋은 일을 한 편이다. 호쿠사이의 이름만 내건 이 허접한 미술관도 꽤 많은 방문객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공로 중 하나는 만화를 발명(?) 했다는 것인데,
그의 작품집 중에는 호쿠사이만화(北斎漫画)라는 이름인 '그림 그리는 법 교본' 풍의 책이 여러 가지 있다.
대략 이런 식으로 된 책인데, 인물 표정의 단순화, 동작, 표정을 통한 의미 전달 등이 현대 만화의 기본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호쿠사이 만화가 줄거리와 대사가 있는 현대 만화와 바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cartoon의 한자 번역어가 '만화'가 된 것은 바로 이런 호쿠사이의 공헌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현재 모든 일본의 만화가/애니메이터의 조상은 호쿠사이라는 말이 자주 통용된다.
물론 이 미술관에 전시된 호쿠사이 만화는 진품인지.... 역시 촬영 금지.
그리 크지도 않은 전시실 2개 뿐인 호쿠사이 레플리카 뮤지엄은 30분 정도면 다 볼 수 있다. 더 있고 싶어도 더 볼게 없다.
기념품점에서 도록이나 카드를 사는 정도로 끝.
건물만 멋진 호쿠사이 미술관 안녕.
기운이 빠져 호텔로 후퇴하기로 했다.
오는 길에 다이몬 역 앞에 있는 도쿄 유수의 붕어빵집을 들렀다.
한국에서는 '붕어빵' 이지만, 아무래도 그 원조일 일본에서는 '타이야키'라고 부른다. 타이는 돔.
돔과 붕어의 몸값 차이가 있으니, 한국의 붕어빵과 일본의 타이야키는 몸값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팥, 고구마, 크림이 든 타이야키는 300엔. 계절 한정 상품인 사과가 든 것은 330엔.
한국에서 붕어빵이 이제 천원이라고 개탄을 했는데 여기선 이미....
그 이름도 거룩한 나루토 타이야키 본점. 나루토는 물결이 거세기로 유명한 세토나이카이의 해협 이름이다(닌자와 무관). 거기서 잡은 도미가 맛있다고 해서 타이야키 이름에 나루토를 붙이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센스....
(하긴 영덕 게빵이 있는 한국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안 될지도.)
잘 보니 토카치(홋카이도의 지명이다)의 명산 팥, 나루토의 고구마를 썼다는 것 같다.
근데 한국 붕어빵도 이렇게 번듯한 가게에서 위생복 입은 직원이 만들면 한개 3000원쯤 하려나?
3000원짜리 단팥빵이 있는 걸 보면 그리 놀라운 가격이 아닐수도.
돈 날아가지 말라고 누르는 역할의 도미도 있다. 천엔 내고 3개.
사과에는 애플파이 같은 사과 프리저브가 들었고,
팥에는 팥이 가득 들었다.
껍질이 한국 붕어빵보다 훨씬 얇은데다 팥도 연양갱 수준으로 달다.
양갱에 껍질을 살짝 붙인 느낌. 어우 달어. 난 인제 됐네.
이렇게 해서 레플리카 미술관을 다녀온 느낌으로 똑같이 퐁퐁 찍어내는 붕어빵으로 마무리. (뭐냐)
1994년인가 도쿄를 처음 갔을 때, 혼자였다. 날은 꽤 쌀쌀했고,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일본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마디도 못한다. 여행안내서에서 우에노라는 지명을 처음 봤다. 숙소가 신주쿠 주변이라, 녹색 야마노테센을 타고 한참을 갔다.
우에노공원이라는 이름 안에 동물원, 미술관,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적한 공원. 차가운 비가 스물스물 내리는 길을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진입로에 뜬금없이 군고구마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군고구마 냄새는 위협적이었는데 가격이 400엔. 당시 한국 기준으로 고구마 하나에 4천원은 너무 비쌌는데 심지어 웬만한 무 만큼 고구마가 컸다.
"하프?"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 외국인이 딱해서 그랬는지 아저씨가 절반을 뚝 잘라 주고 200엔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에노는 내 기억 속에 군고구마로 남았다.
어 하고 들어가보니 여기는 아시아관. 우에노 일본 국립박물관에는 3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한국, 중국, 태국 등의 유물을 전시한 아시아관, 일본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본관, 그리고 표경관이라는 건물이다. 건물은 표경관이 제일 예쁜데... 뭔가 헬로 키티 전시회를 하고 있다.
다 돌아보기엔 기운도 딸리고, 아무래도 관심있는 건 일본 유물. 본관으로. (사진은 재팬가이드. 건물 정면 사진을 못 찍음)
1938년에 지어진 건물. 고색창연한 1층 로비와 계단.
눈길을 확 사로잡는게 화려한 기모노.
뭐 제대로 기모노를 보자면 복식박물관 같은 것이 따로 있겠으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물건인 만큼 하나 하나 수로 놓인 장식이 어마어마한 공력이 들었음을 바로 알수 있게 한다.
사실 기모노에서부터 느껴지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시의 규모가 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처럼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고, 주제별로 일본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보여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는 느낌?
이를테면 죠몬시대, 아스카 문명, 무로마치 시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게 아니라 유키요에, 기모노, 그림, 칼, 요로이와 구조쿠(갑옷), 도자기, 불상 등 주제에 따라 유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 주제에 대해 전시된 유물이 그리 많지도 않다. '보셨죠? 이렇게 대단한 유물이 많아요' 라는 태도가 아니라, '뭐 이런 겁니다' 정도랄까. 대신 동선이 훨씬 여유롭고,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이를테면 영상)의 활용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유물의 설명이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여름에 도쿄 민예관을 다녀온 뒤로 도자기에 요즘은 눈길이 간다. 이런 19세기식의 화려한 스타일.
이건 17~18세기 에도 스타일. 에도 시대에도 '교야키(京燒)'라고 부른 것은 교토 도자기였다니. 바닥에도 '미조로가이케'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는 것은 이때 이미 도공들의 브랜드가 진행되었다는 얘기겠지. 철화, 청화, 백토가 모두 동원된 표현 기법도 세련되어 보인다.
이것이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모여 살았던 큐슈 이마리(伊万里) 도자기. 아직까지는 독자적인 스타일 보다는 중국 경덕진 도자기 스타일의 작품들을 만들 시절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그 이전 것들인,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도 꽤 많았다.
'겐토'라는 이름까지 붙여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명품으로 꼽히던 작품.
우리 눈으로 보기엔 그냥 흔한 밥공기 같은 이런 물건들이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이라 불리며 엄청난 귀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건 이런 정교한 완구류,
한국 유물 중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이런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 소풍 세트라니.
주문 생산일지, 공산품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렸다는 것은 취향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수준의 도시 문명이 통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우타가와 히로시게(이때까지는 우타가와도 한 사람인줄 알았다. 알고보니 우타가와는 우키요에 화가 패밀리의 이름. 스승이 우타가와면 제자도 데뷔 후 우타카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의 우키요에를 보다가, '내친김에' 스미다에 있는 호쿠사이 미술관을 가기로 맘 먹었다.
소싯적부터 함박스텍이 진정한 소울푸드라고 생각하며 자라온 터라 맛있다는 함박스텍이라면 닥치는대로 먹어왔다. 키와미야는 極味라는 이름 그대로 궁극의 맛을 지향한다는 집. 거의 순 살코기 덩어리인 함바그를 손님이 직접 숯불에 구워 먹는 컨셉이라니. 어찌 당기지 않을손가.
그러나 첫날은 보기좋게 실패하고, 둘쨋날은 오픈런으로 맞섰다. 11시 오픈이라니, 10시 반에 가면 충분하겠지.
물론 줄은 좀 서 있는데,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가겠다 싶었다.
줄서기가 어찌나 요란한지, 대표로 줄서기 금지가 난리. 하지만 곧 이것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꺾어져서도 몇명 더 서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픈런 성공이다 싶었는데... 바로 앞의 키작은 여자가 문제.
이윽고 셔터가 올라가고, 입장 준비 시작. 4인석 같은 것은 없고, 이런 식으로 빙둘러 카운터에 앉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열기 5분 전쯤 앞에 줄을 선 여자 옆에 어디선가 4명의 일행이 날아와 붙는다. 다들 여행가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메 열차에서 내렸거나, 열차를 타러 차비를 하고 나온 느낌. 줄세우기 담당 직원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길래 '미리 대표로 줄서기 없기'를 금지하고 있는 매장인 만큼 제지를 하겠거니 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 오픈런 줄이 딱 끊길 줄이야.
왜 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줄에 서 있던 여자가 일행이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는 손님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라나(번역기를 돌려서 알려줌). 이런 젠장.
다행히 회전은 꽤 빠른 편이어서 약 20분 뒤에 자리가 났다.
아무튼 이렇게 꽉 찬 카운터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20분 대기.
여러가지 조합이 있는데, 대략 괜찮아 보이는 스테이크+함바그 세트를 주문했다.
요만한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역시 요만한 함바그 한 덩이를 준다.
그리고 다양한 소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앞에서 직원이 직접 함바그를 동그랗게 빚고,
밥, 국(콩소메 수프), 양배추 샐러드를 준다. 이 세가지는 무한 리필.
그리고는 철판 위에 이렇게 살짝 레어 상태로 준다. 앞은 구운 마늘편.
이게 아마 스테이크 100g + 함바그 120g의 2480엔 짜리였던 듯.
여기에 400엔을 추가하면 밥, 수프, 양배추는 무제한 리필이다. 내 기준으로 딱 기분좋은 점심 사이즈.
그리고는 자기 앞의 철판에 알아서 더 익혀 먹는 구조.
레어 상태로 그냥 먹든, 더 익혀 먹든 그건 손님 마음이다.
각종 소스를 부어 놓는 틀.
일단 레어로 한점 맛을 본다.
워낙 마블링 천지의 고기라 역시 더 익히는 게 좋아 보인다.
치지지직
아 좋다. 육질도 양념도 A급. 흰 쌀밥과 아주 궁합이 좋다.
그리고 역시 우유맛이 진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줄서기 파동만 없었으면 참 괜찮은 맛집으로 기억에 남았을텐데, 유감이다. 그래도 그냥 가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생각. 먹어보길 잘 했군. 그런데 솔직히 줄이 너무 긴건.... 힘들다.
히비야역에서 아 저기인가보다 하고 빌딩 숲 속으로 쑥 들어왔는데 별세계였다.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예쁜 공간.
지도상으로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은 황거라고 불리는 천황의 거처와 도쿄역 사이에 있다. 말하자면 도쿄의 구 도심에서 심장부에 위치한 곳이다. 요즘은 옛날같지 않겠지만 미쓰비시라는 이름은 과거 제국을 꿈꾸던 시절부터 일본을 상징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종합상사였고, 성룡은 모든 출연작에서 미쓰비시 자동차를 타고 나왔다.
그 미쓰비시 그룹의 1호관, 그러니까 첫번째 사옥이 있던 자리라는 얘기. 물론 그 1호관은 지금으로 봐선 아주 조그만 3층짜리 건물이지만, 미쓰비시 그룹의 후예들은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주변을 으리으리한 수십층짜리 오피스 건물들로 둘러쌌다. 미술관을 나와서 알았지만, 도쿄 역까지 가는 동안 큰길 따라 '미쓰비시'라는 이름을 단 빌딩들이 죽 이어진다. 저 블록 하나가 전부 미쓰비시 타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 시계가 보이는 곳이 말하자면 미쓰비시 타운의 입구,
그 입구로 들어가 몇미터 이동하면 이런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게 바로 미쓰비시 1호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건물 한 켠에 내력이 적혀 있는데, 대강 1894년에 빅토리아 시대 양식을 살린 건물로 지어졌고, '한 블록의 런던'을 도쿄 시내에 재현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얘기. 처음부터 줄곧 보존된 것은 아니고, 한번 허물었다가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 안으로. 먼저 로트렉 전을 본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역과 찍을 수 없는 구역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 유명한 로트렉의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1870년대 파리에서 유명했던 카페/레스토랑/공연장을 겸한 공간의 이름인데, 거기서 펼쳐지는 공연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스터의 형태로 그려냈다. 가운데 앉아 검은 옷을 입고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이 로트렉 그림에 늘 등장하는 캉캉 댄서 제인 아브릴(깃털 모자가 포인트), 무대에 있는 것이 가수 겸 댄서 이베트 길베르라고.
그리고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작품. 제목은 <독일의 바빌론>인데 빅토로 조즈(Victor Joze)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용 포스터다. 당시 베를린 사교계의 타락과 혼란스러운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너무 노골적인 내용이라 당시 독일 대사관에서 판매 금지를 요청할 정도의 작품이었다고. 그래도 로트렉이 "그러면 안되지!"하고 직접 포스터를 그리는 등 출판의 자유(?)를 위해 애썼다는 전설이 있다.
작품 사이로 이동하다 찍은 정원. 밤에 가보면 야경이 그리도 아름답다고 한다. 아무튼 마음에 쏙 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소피 칼의 작품은 전면 촬영 금지. 이 전시의 제목은 '부재 absense'인데, 칼이 자주 사용했던 주제인 듯 하다. 현장의 설명 등을 읽어보면, 프랑스의 한 미술관에서 유명 작품들이 도난을 당하고, 미술품 도난이라는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해당 미술관에서는 그림이 있던 자리에 텅 빈 액자만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칼은 거기서 영감을 얻었던지, 제목만 있고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시를 시도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을 가려 놓고 제목만 보여준 뒤, 가린 커튼을 열어 작품을 보게 하는 전시를 시도했다.
(....근데 이런 것들을 굳이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심지어 전시의 설명 문구도 찍지 못하게 해서 과연 무슨 소득이 있을지 모르겠다.)
촬영이 허락된 소피 칼을 몇몇 작품들. 소피 칼은 유난히 작품에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한데, 문제는 그 텍스트가 전부 프랑스어라는 것. ㅠㅠ 무슨 말인지.
단순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이 <시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관 모양의 시계. 너무나 직관적인.
이어서 <그의 시선>, <누구세요>, <눈 주위의 멍>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坂本繁二郎とフランス 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1세대 유럽 유학파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사카모토 한지로(1882-1969)의 작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략 누가 봐도 당대 인상파의 영향이 짙은 그림들을 비슷한 시기의 밀레나 모네의 그림 등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전시. 그 시기에 일본은 벌써...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시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보니 은행잎이 한껏. 12월인데.
미쓰비시 1호관의 명물은 갤러리와 레스토랑이라는데,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와 보니 엄청난 장사진.
이 공간에서 식사를 할까도 했으나 역시 너무 줄이 길어 포기. 당초 계획(앞글 참조) 대로 도쿄역 지하의 표적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보행 인구가 별로 없어서인지, 12월 중순인데 아직도 가을 같은 느낌. 은행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있는 길이 참 보기 좋았다.
인천공항에서 나리타로 가는 항공편은 여러가지 있지만, 직장인들은 일단 출근했다가 저녁에 떠나 늦은 밤에 나리타에 내리는 경우가 꽤 있다. 이 경우,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도쿄 시내로 가는 것은 꽤 피곤한 일정일 수 있다. 이때 문득, '그렇다면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봤다. 나리타 주변에는 비슷한 생각을 한 여행자들 때문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다. 인천공항에도 구내에 호텔이 있는데, 나리타에는 구내에는 적당한 호텔이 없었지만 셔틀로 5분 거리에 다양한 호텔들이 있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잔 뒤, 아침에 나리타 공항으로 다시 가서 스카이액세스 편으로 도쿄 시내로 들어가면 매우 효율적인 이동이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검색해 본 뒤 '나리타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이라는 이름의 나리타 토부 호텔 예약. 호텔비도 다음날 아침 조식 부페 포함 10만원대 초반.
그러나... 광고는 역시 광고일 뿐. 호텔 방은 꽤 크기는 했지만 정말로 침대와 TV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썰렁하기만 한 방이었다. 침대도 별로. 베개도 별로. 심지어 공항 라운지가 무색하다(고 어떤 블로거가 그랬다)는 조식 부페는 정말이지 부페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 딱히 길게 언급하고 싶지 않다. 국내에서 가격으로 치자면 1만5천원? 2만원 짜리 정도?
그리고 오전 10시에도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하는 스카이액세스는 만석을 넘어 만원 전철에 가까운 수준. 아니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오길래 이 새벽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는 것인가....라고 생각을 해 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만치 공항 주변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시내로 들어가자는, 바로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결론은: 나리타 1박후 오전에 도쿄 시내 이동은 딱히 그리 권하고 싶지 않고, 나도 다시 시도하고 싶지 않다. 그냥 늦게라도 어떻게든 시내로 이동을 하고, 체크인을 한 뒤 늦잠을 자라, 그게 컨디션 조절에는 더 낫다. 괜히 다음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시내로 이동하고, 호텔에 짐을 맡기고 다시 나오고 하는게 더 피곤하다.
나리타 토부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공항이 조만치에 보인다.
....그런 상태로 아무튼 다이몬 역에 내려 오전에 리치몬드 호텔에 도착했고(앞글 참조), 체크인을 하고, 방 키를 받은 뒤 짐을 프런트에 보관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는 미츠비시 1호관 미술관. 이름이 왜 이 모양인지는 전혀 몰랐고, 일본어로 된 어떤 사이트에서 올 겨울 도쿄에서 봐야 할 중요한 미술 전시 중 하나로 꼽혔던 툴루즈 로트렉 X 소피 칼(Sophie Calle)의 전시를 보러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름다운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호텔에서 북쪽으로 이동, 히비야 역에서 내려 히비야 공원을 살짝 구경하고, 다시 길을 건너 미츠비시 1호관으로 이동해 이 전시를 본 뒤, 도쿄역으로 이동해 역 구내의 식당가에서 이름난 키와미야 도쿄역점의 함바그로 점심을 먹고, 동남쪽 긴자로 이동, 동네 구경과 약간의 쇼핑을 한 뒤 긴자의 빵가게들도 좀 구경하고, 어찌 어찌 시간을 보내다가 신바시 한 구석의 예약해둔 야키토리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귀환해 푹 자자.
그러나 이 계획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호텔을 나서 5분 정도 걸어 오나리몬 역에서 미타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바로 히비야 역. 일단 오나리몬 역으로 걸어갈 때까지만 해도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도쿄의 12월은 영상 5~10도 정도. 서울의 쾌적인 늦가을 날씨 같았고, 길 건너로 시바공원과 조죠지(増上寺), 그리고 도쿄타워가 보이는 길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히비야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갑자기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서쪽으로 황거가 있는 히비야 공원 앞은 아무 바람막이가 없는 지형 탓인지 엄청 독한 강풍이 불어 전철을 타기 전 느꼈던 온화한 날씨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현상을 느끼게 했다. 가능한 한 빨리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
일본의 양식 문화가 한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건 사실 상식이다. 19세기 개항 시절부터 해외 문물의 도입에 워낙 적극적이었던 일본. 온갖 나라의 온갖 식재료와 기술이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로 몰려든 결과일테고, 1980년대 버블 시대를 거치며 그 모든 취향이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됐을 터.
(이런 '취향'의 허세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생각한다.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실 터. 세기말적인 허세와 극도로 발달한 욕구가 '정말 이렇게까지 했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버블 시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어쨌든 서울에도 정통 나폴리식 피자를 굽는 집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얼마 전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몬디 군이 '아시아 최고의 피자'라고 극찬한 집이 도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또 도쿄를 가는 김에, 그럼 그런 집은 가 봐야지. 점심에는 예약을 받지 않아 상당한 웨이팅을 각오하고 고고.
웨이팅을 각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자집 '리스토(Risto)' 자체도 핫하지만 피자집이 있는 곳이 바로 도쿄의 최신 핫플레이스 아자부다이 힐스이기 때문.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건축가인 토마스 헤더윅의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곳. 안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는데, 바로 이렇게 기회가 생겼다.
일류 건축가들이라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헤더윅의 스타일은 뭔가 자연과의 공존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 짙다.
아자부 언덕을 올라가며 구축된 건물들이다 보니 뭔가 능선을 연상시키는 그런 설계.
명품 샵들이 그득한, 3층 정도의 건물들이 언덕 아래에서부터 죽 줄지어 올라가고(가 보면 실제로 건물들이 언덕을 기어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덕을 꽤 올라간 곳에 메인 빌딩인 타워 플라자를 비롯, 몇개의 건물들로 둘러 싸인 중앙 정원이 나타난다.
어느새 그 정원의 명물이 된 크레페 가게.
3층으로 올라가면 리스토가 나온다.
오픈 직전에 도착. 줄은 서 있지만 대기 없이 앉을 수 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덕. 뻬뻬가 화덕이란 뜻은 아니겠지?
피자 가격은 대략 저 정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비싼 거 인정. 시그니처인 별 모양 피자와, 하루 5개 씩만 만든다는 한정판 피자를 시켜봤다. 그게 뭐지.
"나폴리에선 와인을 피자 안주로 먹나?"
"아뇨. 이탈리아 사람도 와인이랑 피자는 같이 잘 안 먹어요."
"그럼 뭘 먹어?"
"대개 맥주랑 먹죠."
오호. 이딸리아에서도 피맥이 정석. 알베군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암.
주방장 특선 모듬 전채. 프로슈토, 모짜렐라, 말린 토마토 등등. 맛난 것들.
그리고 시그니처 별 피자. 물론 내용물은 아주 충실한 나폴리식 마르게리타 피자다.
당연히 맛있는데, 아주 충실하게 맛있다. 그리고 저 별의 뿔 모양 손잡이 속까지 매콤한 양념이 잘 되어 있다.
이것이 한정판이라는 Il futuro della salsiccia e friarielli. 생 소시지를 까서 채소와 함께 마구 볶은 뒤 반죽에 녹아들게 해서 같이 구운 피자. 맛있다. 뭐라 더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대책없이 맛있다.
아쉬워서 시켜 본 봉골레. 양이 너무 치명적이긴 한데, 저 국수가 믿을 수 없게 맛있다. 국수가 바지락과 홍합의 맛을 쪽쪽 빨아들인 그런 맛. 국수라기보다는 길게 늘인 수제비를 먹는 맛? 놀랍다.
그리고 나폴리탄 라구 파스타를 더 먹었는데, 이건 너무 맛있어서 그랬는지 사진찍는 걸 잊었나보다. 없어짐.
2018년에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정병모 선생이 민화에 대해 강연을 했고, 그때 마침 현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민화 전시회에 갔는데, 전시 작품 중 몇몇이 도쿄에 있는 '민예관'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예관이 뭐야, 찾아보니 그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사설 박물관의 이름이었다.
뭔가 마음 속에서 비밀의 문 하나가 열리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한국적 미감에 깊은 애정을 보인 일본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다였다. 그가 설립한 민예관이라는 곳이 도쿄에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한국 미술품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듣보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야나기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통 미술에 대해 특유의 선입관을 갖게 했다', 혹은 '결코 진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식민 통치의 한 측면이었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 이를테면 야나기는 조선사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어둡고 비참한, 사대를 강요당한 역사로 보았고, 조선의 미술이 한의 미술, 혹은 비애를 짊어진 미술로 드러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야나기의 '진심과 애정'이 바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려 했던 소위 문화통치의 도구로 쓰였다는 시각이다.
1924년 야나기가 경복궁 집경당에서 개관한 조선민족미술관
하지만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조선의 암울한 상황과,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야나기에게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오히려 후대 사람들이 무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시대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야나기 이전에는 과거 한국인이 이룩한 미적 작업 중에서도 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미학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스로를 자각할 능력이 없었다고나 할까. "깨진 사기 조각, 항아리 조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백자나 사발 같은 서민적인 작품에서 미감을 느끼고, 그것을 '백성의 예술', 즉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불러 준 사람이고, 무엇보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미술관의 존재, 특히 그 이름에 '민족'이라는 것을 넣는 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문화통치 시기였기 때문에 박물관 자체를 막지는 않았고, 1945년까지 존속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넘겨받았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일 것 같고, 왜 일본민예관이라는 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 같다. 구글 지도에서 일본민예관의 위치를 찾아봤다.
사실 일본을 꽤 오갔지만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정작 도쿄에는 어디에 뭣이 있는지 잘 모른다. 도쿄는 놀러 가기보다는 거의 출장으로 간 탓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고, 근래 휴가로 일본을 갈 때에는 홋카이도와 큐슈를 번갈아 다녔기 때문에 자유롭게 도쿄 곳곳을 오갈 수 있었던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부야 역에서 전철과 도보로 10여분 정도. 생각보다 변두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 여행 날짜를 잡고 나서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특별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가 걸려 있는 거다.
아무 근거 없지만 이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 (물론 뇌과학자 모 선생님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하셨지만 ㅎㅎ)
왠지 이때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케줄을 뽑았다. 일본 민예관이 있는 동네는 시부야구에서도 대략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고마바(駒場) 지역이다. 앞서 지도에서 보듯 도심에서 그리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일반적인 도쿄 여행자들의 동선과는 별 교차점이 없다.
시부야 역을 경유하지 않고 가는 방법. 도심에서 전철 치요다센을 타고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내리면 시부야구에서 운영하는 하치코버스(일종의 마을버스)가 다닌다. 요금 100엔.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시부야 역 방향으로 세 정류장을 가 우에하라 2초메 미나미에서 내린 다음, 고마바 지역에서 10분 정도 주택가 골목을 걸으면 일본 민예관이 나온다.
한적하고 곱게 단장된 길. 양쪽의 집들이며 주차된 차들을 보면 꽤 사는 분들이 사는 동네 맞는 듯.
좁은 길을 사이로 일본 민예관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집이 마주 보고 있다.
매표소에서 1100엔짜리 표를 끊으면 두 장의 표를 준다. 한장은 서관(야나기 본가) 관람권, 하나는 민예관 본관 관람권. 서관은 4시까지만 개방하니 그쪽을 먼저 보고 오라는 안내까지 해 준다(본가는 개방하지 않는 날도 많다).
사실 서관은 딱히 큰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늑하고 곱게 단장된 2층집. 고아(古雅)하다는 말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서재가 좋아 보였다. 볕 잘 들고 통풍도 좋을 듯한 넓은 창, 단단하고 기대기 좋을 듯한 넓은 책상, 벽 둘러 쌓인 책장. 지금이라도 그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 일어서기 싫을 듯한 방이다.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 두었으면 좋으련만, 집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라 아쉽지만 그냥 집을 나서야 했다.]
본관 전시. 역시 2층 집인데 보기보다 앞뒤로 넓은 집이었다. 전시 소개 포스터/도록의 표지가 모두 같은 그림이다. 사진 위의 맨 왼쪽, 가는 풀 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각항아리가 바로 야나기가 처음 조선 백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바로 그 작품이라고 한다. 아래쪽 전시 광경은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실 사진.
1층에선 이번 특별 전시와 별 상관 없는 유럽 공예품 등의 상설 전시중. 2층으로 올라가자 가장 눈길을 끌 만한 공간에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조선에서 넘어 온 것들. 대체 이걸 왜 전시해 놓았을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어도 당신들이 이 다음에 보게 될 명품들을 명품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라는 공치사일까. 내가 손대기 전에 이 귀물들이 얼마나 천대받고 있었는지 직접 보라는 뜻일까. 이 생각 자체가 유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공치사라 해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던 대로 민예관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고, 이번 전시에서는 대략 대여섯 점 정도만 촬영 허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도 평소보다는 후한 것이라고 한다. 도자기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기 전 도서관에서 '일본 민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도자기 일람'을 한번 살펴봤다. 가장 관심이 간 작품은 이런 것들이었다.
코믹한 표정의 민화풍 호랑이가 떡 자리잡은 백자 항아리.
그리고 세상에 이런 백자가 있나 싶었던 3중 찬합.
다행히 이번 전시품 중에 둘 다 있었다.
민화 속 호랑이가 그려진 백자동화호문호는 그리 섭섭지 않은 크기였고, 백자청화채찬합은 과연 찬합으로 쓸 수 있었을까 싶게 작았다. 찬합이란 용도대로라면 어른 한끼분 정도의 반찬을 담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어쨌든 한국 백자 중에서 저렇게 전체를 푸른 색으로 칠한 그릇은 처음 봤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두개만으로도 이 전시를 보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만 했다.
그밖에 사진 촬영이 허가됐던 품목들은 이렇다.
이 자기들을 설명하는 표찰(사진 오른쪽 아래를 보듯, 작품 이름을 설명해 놓은 것 외에는 아무 해설이 없다) 중 상당수에 염부(染付)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 염부가 청화백자의 청화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일본어로는 소메츠케라고 읽는다.
이건 금사리 자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뜻. 즉 한국식으로 저 표찰을 읽으면 '난초 문양과 글자가 들어간, 금사리에서 구워진 청화백자 항아리' 라는 뜻이다.
포도줄기와 잎이 그려진 청화백자 항아리.
여기엔 또 염부에 진사까지 붙은 염부진사 染付辰砂 라는 설명이 있다. 뒤의 화조문면취호(花鳥紋面取壺)라는 것은 꽃과 새가 그려진 각진(面取) 병이라는 뜻인데, 왜 굳이 병(甁)이 아닌 항아리(壺)라고 썼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대체 염부진사가 뭘까. 물론 찾아보면 다 나온다.
염부진사(染付辰砂)란 일본어로 소메츠케 신슈, 요즘 우리가 쓰는 용어로 하면 청화(靑華)+동화(銅畵)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즉 백자에 청색 안료를 넣은 청화, 산화철을 넣은 철화처럼 산화동을 넣어 그림을 그린 백자를 동화라고 부른다. 즉 대부분의 봉황 몸체는 청화로 그려 푸른색이고, 벼슬과 날개 일부에 산화동을 이용해 붉은 색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소메츠케 신슈라고 설명한 것.
이 봉황문 항아리도 도록에서 먼저 보고 실물이 궁금했던 것이라 감회가 깊었다.
반면 위쪽의 꽃 그림 병은 산화동으로만 그렸기 때문에 신슈(辰砂)라고만 쓰여 있다. 진사초화문병.
그러니까 이 특별전 중에서 가장 아껴둔 물건들을 이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그중에서도 몇개를 골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두고 있었다. 언뜻 봐도 참 좋은 물건들인데, 이 물건들을 눈으로만 보고 오려니 참 아쉽기 짝이 없었다. 물론 도록도 샀지만, 도록은 대부분 흑백이라...
못내 아쉬워서 휴식공간 앞에 있던 장식장을 한장 찍어 봤다.
가운데 줄 왼쪽이 바로 가기 전부터 보고 싶었던(위에서 언급한) 3중 찬합이다.
휴식공간 바깥쪽의 항아리들. 뭔가 어린 시절 집집마다 있던 장독대가 생각나 정겨웠다.
일본 미술관에 가면 언젠가부터 이런 테누구이(手拭)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몇개 사도 큰 부담이 없는. 그런데 예쁘다. 도록과 함께 기념품으로.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된 미술관. 간혹 한국에서도 전시하고, 수집 과정부터 '일제가 강탈해 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남의 손에 있는 것이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곧 또 만나게 되길.
P.S. 조선민족미술관 100주년 기념 전시는 8월25일까지 진행된다니 그 사이 도쿄에 가실 분들은 짬이 나면 들러 보시길. 결코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언젠가부터 찍고 이동하는 여행보다는 한 도시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여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성에 차려면 한 도시에 한달씩은 살아야겠지만, 어쨌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도시 사람들처럼 이동하고, 최대한 그 도시 사람들이 먹는 것들을 먹어보려 하고, 일상에 접근해 보려 하는.
뭐 아예 은퇴한 뒤라면 모를까, 일을 하면서 그렇게 다니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도시든 대중교통이 대략 익숙해지고, 도시의 방향과 길이 눈에 들어올 때쯤 되면 떠날 때가 된다. 정말 아무데서나 보이는 에펠타워.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반가웠는데 이제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아무튼 쌀쌀한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해 버리고 호텔을 나섰다.
세느강 북쪽의 텅빈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런데 정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은근히 바깥의 돌들이며 진입로도 어딘가 정성들여 돌보지 않은 태가 난다.
문 닫은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하지만 굳이 여기에 온 건 라울 뒤피의 '전기의 요정 La fee electricite'을 보기 위해서지.
이런 거대한 그림.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대작 벽화를 의뢰받고,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기를 형상화하는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에 착수한다. 그 결과 이런 대작이 나왔다.
이 작품에는 석판화 연작과 이 벽화가 있는데, 작년 서울 전시때는 이 작품을 약간 변형한 석판화 버전이 전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 둥근 홀 모양으로 되어 있는 2층 높이의 전시실을 가득 채운 대작.
잘 보면 수십명의 인물들이 있다. 무식해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과학/공학자들이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맥스웰, 모르스, 뢴트겐... (나머지 잘 모름)
에디슨, 퀴리 부부, 멘델레예프... 뭐 등등.
물론 이걸 보러 온 거지만,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시립'이라는 이름을 아무 미술관에나 달아줄 리 없다. 소장품들을 보면 그렇게 만만한 미술관이 아니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꽤 많다.
이건 마티스가 스트라빈스키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nol>의 1920년 초연을 위해 그린 무대와 의상.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황제를 감동시킨 나이팅게일의 노래. 어느날 선물로 바쳐진 기계 나이팅게일. 궁정인들이 기계 나이팅게일에게 열광하자 숲으로 돌아가버린 나이팅게일. 그러나 기계는 어느날 작동을 멈추고, 죽음의 사자가 황제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
어쨌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여러 모로 전설이다. 마신, 니진스키 같은 이름들과 함께 달리, 피카소, 마티스 같은 사람들이 무대미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마티스는 역시 마티스. 왠지 마티스의 스케치에서 '춤' 연작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캐서린 브래드포드의 <운동선수들 Athletes>.
....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그림.
뭔가 동화와 악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듯한 그림. 돈 밴 빌리트의 작품 <야크와 달들 Yaks, moons>.
돈 밴 빌리트는 캡틴 비프하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뮤지션이자 가수라는데, 처음 들어본다. 이럴 때마다 뭘 안다고 거들먹대는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라울 뒤피, <헨리 로얄 레가타의 조정 선수들 Regates a Henley, les rameur>.
그리고 그 연작. 헨리 로얄 레가타는 런던 테임스강에서 19세기부터 계속 열리고 있는 조정 경기라고.
빅토르 브라우너, <La Rencontre du 2 bis rue Perrel>. 제목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지만 조르주 루오를 연상시키는 숲과 정령인 듯 한 생명체의 묘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리 로랑생이 1923년에 그린 Jeannot Salmon의 초상. 지인 중에 닮은 사람이 있어 눈길이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의 <꿈 Le reve>. 문득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꿈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몇개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중국 화가 Zao Wou-Ki의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01.10.73>. 1973년 1월10일이란 뜻일까? 폭설이 내린 산중의 설경?
대략 미술관의 설명으로 봐선 중국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널리 활동한 화가인 듯 하다.
아무튼 이밖에도 수많은 피카소, 샤갈, 루오, 보나르 등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던 멋진 미술관.
오히려 무료라는 이유로, 그리고 일반적인 관광객들의 노선과는 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많은 발길이 몰리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파리에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뭔가 초겨울에는 을씨년스럽던 마당의 카페. 노천 좌석 뿐이라 동절기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지만, 여름 밤이면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일 듯.
사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이 건물은 팔레 드 도쿄라고 불리는 유서깊은 곳. 그러니까 1차대전 당시 유럽 연합국의 반 독일 노선에 참여했던 일본은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간주되어 이 건물에 수도의 이름을 남겼다.
물론, 서울에 있다면 꽤 중요한 명소 취급을 받았음직 한데 불행히도 여기는 파리. 이 정도의 연식과 이 정도의 사연을 가진 건축물은 그야말로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그래도 현장에 가 보면 확실히 멋지다.
그렇게 해서 잔뜩 흐린 파리의 하늘을 살짝 바라보며, 택스 프리 신청을 위해 들른 백화점 식당에서 사실상 마지막 끼니를 때웠다.
문어와 파스타. 꽤 비쌌지만 생각보다 고퀄의 식사.
그리고는 호텔에 들러 맡긴 짐을 찾고, 마지막 라운지 이용을 탈탈 털고,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파리 드골 공항의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아시아나 항공도 함께 쓰는)는 엄청난 규모와 꽤 괜찮은 시설이 눈길을 끌었는데, 불행히도 좌석이 그리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런 걸 언제 쓸까 싶은 공간이 많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는 바람에 뭘 좀 먹어 보려 음식을 집으면 수백걸음을 걸어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
게다가... 아니 대한민국 국적기가 라면을 이따위로밖에 못 만들다니.
어쨌든 14시간의 긴 비행 시간 동안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감사했다. 대한항공 비즈니스와 아시아나 스마티움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공간 이용 면에서는 대한항공이 좀 앞서지만 좌석을 내가 원하는 각도로 딱 맞춰 활용하는 것은 스마티움 쪽이 훨씬 나았다.
2023년 12월 파리를 방문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 알아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연말로 예정된 공연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손꼽히는 대도시 파리에서 꼭 가 보고 싶은 공연장은 뭐니뭐니해도 '오페라'라는 지명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영화든 뮤지컬이든, <오페라의 유령>을 보신 분이라면 '아 거기?'하실 바로 거기다), 그리고 라 빌레트에 새로 지어진 파리 필하모닉 홀이었다.
대부분의 공연 일정이 정해지는 것은 대략 6개월 전.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안에 중요한 공연들은 매진이 되어 버린다. 베를린 필하모닉 때도 그랬지만, 현장에 간 상태에서 '아, 베를린에 온 김에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라도 한번 보러 갈까?'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다. 아주 운이 좋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다. 다만 일찍 표가 열린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기도 좀 불안한 것이, 한번 사고 나면 환불은 불가능(정말이다). 산 사람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티켓을 파는게 최선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사야 한다.
2023년 12월,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은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었는데, 이건 본 순간 이미 매진이었다. 실제로 티켓을 팔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오페라 가르니에 후원회원을 위한 특별 공연 같은 형식으로 관객들을 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 꼽은 공연이 바로 이지 킬리앙 Jiri Kylian의 안무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공연하는 <Jiri Kylian Evening> 공연. 흔히 지리 킬리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체코어로 Jiri라는 남자 이름은 '이지'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아무튼 네덜란드 발레 시어터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연단체로 끌어올린 킬리안은 '현대 발레의 나침반'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은 안무가(집에 그의 DVD를 두개 갖고 있다). 특히 강한 인상을 받은 <Petit Mort> 도 이번 공연 리스트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이건 꼭 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연장이 바로 오페라 가르니에. 사실 이름이 오페라지만 이미 오페라를 위한 공간으로선 수명을 다했다. 지금은 공연 프로그램의 90%가 발레. 오페라는 새로 지은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거의 모두 소화된다. 혹자는 예쁘기만 한 공연장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발레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였는데, 며칠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공연이 매진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가. 다행히 대기 모드를 띄워 놓고 기다린 결과, 약 한달 뒤에 빈 자리가 나왔다(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늦게 푸는 좌석이 있는 것인지). 바로 낚았는데, 사실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19세기형 극장의 박스석이 어떤 분위기인지 맛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어쨌든 공연 당일. 토요일 밤의 파리 오페라 주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 날씨인데도 사람이 막 흘러다니는 분위기였다. 보수중이라 건물 앞부분은 차폐막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차폐막까지도 명품 광고... 그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시면 느낌이 오실 듯.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극장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에 맡긴다. 2층과 3층의 회랑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기둥의 장식들이 너무나 멋지다.
아마도 같은 유럽이라도 러시아나 발칸 제국 같은 변방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파리와 다른 도시들을 구별하는 기준처럼 보였을 것 같다. 내게도 '알겠나? 이게 바로 문명이야'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아마 21세기의 사람들이라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건축물에서 느꼈을 그런.
그동안 멋진 걸 많이 봐 왔지만,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더구나 이 멋진게 그냥 오래된 멋짐으로 남아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극장이잖아.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
각각 다른 안내원에게 몇 차례 티켓을 보여주고 간신히 찾아간 곳은 무대 바로 앞의 2층 박스석. 묘한 구조라 1층과 2층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박스석 중에는 가장 낮은 위치, 그러니까 무대와 거의 수평 위치에 있다.
박스석마다 입구가 있다.
저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박스 안에 한 6석 정도 좌석이 있다.
바로 건너편에 유명한 '유령의 박스'가 있다. 실제와는 무관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이후 저 자리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은 팬텀 아닌 일반 관객들이 그 자리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들면 <오페라의 유령> 도입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가 있고, 그 뒤에는 그 유명한... 샤갈이 그린 천정화가 있다. 사실 전날 퐁피두 센터에서 샤갈이 이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했던 스케치들을 보고 온 다음이라 감동이 더했다.
뭐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Gods and Dogs>, <Stepping Stones>, <Petit Mort>, <Sechs Tanze>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고개를 너무 내밀고 보느라 목이 좀 아팠지만(무대에서 너무 가까운 박스석은 비추. 절대 비추. 더 가까운 박스석의 관객들은 대체 어떻게 공연을 봤는지 궁금하다), 무용수들의 안무 소화는 완벽했다. 드문드문 동양인 무용수가 보여 혹시 박세은...? 일까 했는데 그 뒤를 이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합류했다는 강호현이었다. 매우 훌륭했다.
물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공연을 마친 뒤 76세의 이지 킬리앙이 직접 무대에 오른 것. 20세기의 문화 영웅들이 하나씩 하나씩 흘러간 별들이 되고 있는 지금, 현대 발레의 이정표를 세운 거인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절로 발길이 둥둥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구경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객석 바깥쪽에는 쉬는 시간마다 음료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파티 공간이 있다.
근데 진심 호화롭기 그지없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이런데, 19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봤다면 정말 이 공간이 어떻게 보였을지.
물론 전기의 도입 이후라야 제 역할을 했겠지만.
공연장, 좌석, 무대, 그 밖에 극장에서 펼쳐질 수 있는 파티를 위한 공간, 지금도 바로 쓰이고 있는 회랑 공간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파리 시민이냐, 관광객이냐의 차이는 이런 곳을 일상 공간처럼 향유하고, 저 자리에 여유있게 서서 칵테일이나 와인을 나누며 대화의 꽃을 피우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
물론 뭐니뭐니해도 극장의 완성은 무대.
낮시간에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의 내부 투어를 하는 가격이 15유로. 블로그들을 보다 보면 내부 광경에 감탄해 '언젠가는 이 안에서 직접 공연을 보리라'는 평을 남긴 분들이 많은데 그런 언젠가는 절대 오지 않는다. 다음에 파리에 가기로 되어 있는 분들, 방문 기간 중의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 정보를 꼭 살펴 보시길. 그리고 반드시 공연을 보시길. 거기서 공연을 보고 그 안을 둘러본 느낌은 그동안 파리에서 했던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인상적이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턱시도를 입고,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가신다면 더 기막힌 경험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그 안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그대로 하실 당신, 누구든 후회 없을 거라고 믿는다.
P.S. 파리 여행의 기록을 여기다 남기긴 남길 것인데, 한번에 다 숙제하듯 쓸 것도 아니고,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마음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파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전에도 그랬듯, 여행기는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곶감 뽑아 먹듯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한번씩 들러 보시길.^^ [라고 썼고, 그래서 이 회차는 전체 여행기의 16회로 끼워넣습니다. 제 자리로.]
오래전부터 다비드를 알게 된 것은 어린시절 들고 다녔던 동아출판사 완전정복 시리즈의 표지였던,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 나폴레옹 그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도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초상화 가운데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줄리에트 레카미에, 이 그림이 그려진 1800년 당시 23세. 남편은 39세의 은행 재벌 자크 로즈 레카미에. 그런데 결혼을 1793년에 했다니... 16세에 딱 두배인 32세 남자와 결혼하신 거다.
(사실 근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16년 차이가 뭐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66세와 50세, 뭐 괜찮은 나이 아닌가? ㅎ)
어쨌든 당시에도 미모와 지성이 파리를 뒤흔들어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셨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전설적인 분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그려진 수많은 초상화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오는데, 어떤 그림도 다비드의 그림처럼 빛나는 미모는 아니다. 왜 다비드가 출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무튼 그런 초상화들의 힘(?)으로 그 셀럽으로서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 퍼졌고, 수많은 숭배자(라고 쓰고 정부라고 읽을 수 있는)들이 각국에서 찾아왔고, 남편의 은행이 망해 살림이 어려워진 뒤 프로이센의 왕자가 구혼해 오자, 남편도 차라리 자기와 헤어지고 왕자와 결혼하는것이 좋겠다고 후원(?)에 나섰으나, 결국 남편과 헤어지지는 않고 근근이 사셨다는 그런 분이다.
암튼 거대한 나폴레옹을 다시 한번 보고, 수없이 많은 유명한 그림들이 잘 있나 확인해 본다.
사실 이 그림에는 다비드 본인이 들어 있다는 걸로도 유명한데,
저 그림 위쪽, 일반 관람객 사이에 섞여 열심히 실제 광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사람이 다비드라고. 물론 그림을 이렇게 그린 걸 보면 실제 다비드의 위치는 반대편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카메라도 없던 시절, 이런 종류의 기록화를 남기는 것도 아마 혼자 힘으로는 힘들지 않았을까.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물론이고 저 많은 왕족, 귀족, 거물들이 '내가 이렇게 생겼냐' '난 저날 저거보다 훨씬 잘 입고 갔다' '내가 숱이 그렇게 없냐'고 화가를 들볶았을테니, 아마도 현장에 제자들 수십명을 풀어 보이는 건 모두 그려오라고 하지 않았을지.
아무튼 저렇게 사진처럼 현장을 잘 표현했으니 왕정 - 혁명 - 나폴레옹 제정 시대를 이어서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비드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감히 ㅎㅎ)
또 루브르에 있는 외젠 들라크르와의 그림이라면 당연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꼽아야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못지 않게 인상적인 그림은 이 그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Mort de Sardanapale>이다.
전설적인 앗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전쟁에 패하고 항복 권유를 받자 노예들에게 자신의 애첩들을 모두 죽이고 처소에 자신의 말, 자신의 보물들을 모두 쌓아놓은 채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었던 그 어떤 것도 적에게는 넘겨주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 침상에 기대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이 벌인 참극을 바라보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의 표정이 무엇보다 강렬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이승에서의 삶, 극한의 사치와 즐거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반추하고 있을까. 아무튼 왠지 이 그림이 좋다.
물론 여기는 루브르. 저렇게 그림 하나 하나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담으려면 책 열권으로도 어림없다. 그리고.... 사실 비싼 레스토랑에 저녁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 영영 머물 수는 없다.
위 그림도 좋아하는 그림. 프란시스 에두아르드 피코의 <큐피드와 프쉬케 L'Amour et Psyche>.
구경하다 보니, 마침 루브르에서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Museo di Capodimonte 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교환 전시중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가본 일은 없으나, 피렌체의 우피치에 이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두번째로 소장 회화가 많은 미술관이라는 명성.
명성에 걸맞게 18세기 이전, 유럽 미술계를 지배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걸작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카라밧지오의 <그리스도의 태형 The Flagellazione>. 수십차례의 범죄 행각으로 수배 대상이었던 카라밧지오를 대체 불가능한 화가로 만든 라 루체, 광선의 위력이 살아있다.
그리고 이 나폴리에서 온 그림들을 보다 보니, 이건 '카라바조와 그 후예들' 전시회 아닌가. 은근히 반가웠다.
이를테면 마티아 프레티의 <성 세바스찬>. 화살에 맞아 순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수억장의 그림 중에서도 손꼽힐만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귀도 레니의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Atalante e Ippomene>. 남자보다 강한 여전사 아탈란테를 유혹하기 위해 세 개의 황금 사과를 받은 히포메네스는 '경주에서 나를 이기는 자와 결혼하겠다'는 아탈란테와 경주에 나서 중요한 대목마다 사과를 흘려 결국 아탈란테를 신부로 맞는데 성공한다... 는 이야기.
물론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아탈란테가 신랑 후보들을 유심히 본 다음, 맘에 안 드는 놈들에게는 전력질주해서 이기고(패자는 모두 죽였다), 맘에 드는 놈을 골라 져 줬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인 젠더 이슈의 부각과 함께 너무나 유명해진 그림. 17세기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유디스 Giuditta decapita Oloferne>가 역시 나폴리에서 와 있었다. 실제로 강간 피해자였던 젠틸레스키가 그림 속 유디트에게 자신을 투영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을 그려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성경 속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그린 그림들은 수만 종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확실히.
주세페 데 리베라의 <성 제롬과 심판의 천사 Saint Jerome et I'ange du Jugement>.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성 히에로니무스라는 이름보다 제롬이라는 이름을 쓰는 듯. 아무튼 성 세바스찬이 화살 꽃힌 나체의 청년으로 그려지듯, 황무지에서 두루마리에 뭔가 쓰고 있는 깡마른 노인은 백이면 백, 라틴어 성서 번역자 성 히에로니무스라고 알아볼 수 있다. (해골이나 사자가 있으면 특히 더)
아무튼 이렇게 카라밧지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 그림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나폴리에서 온, 주세페 데 리베라의 또 다른 작품. 제목은 <취한 실레누스 Silene ivre>. 그림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 아재스러움이 너무나 친근감을 갖게 한다.
사티로스 중의 한 사람인 실레누스(실레노스)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키워 준 반신. <정글 북>에서 모글리를 키워준 곰 발루가 아마 실레누스의 아바타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거의 모든 그림에서 술만 마시면 즐거운, 뚱뚱한 중년 남자로 그려진다. 아재의 신...
주세페 데 리베라, 혹은 호세 데 리베라의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Apollon et Marsyas>. 피리의 명인인 마르시아스는 감히 자신이 음악으로 아폴론 신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며 신에게 공개 도전한다. 거기 응한 아폴론은 리라 연주로 마르시아스를 무너뜨린 뒤,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로 인간의 오만을 응징한다.
데 리베라라는 이름만 봐도 스페인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이런 소재를 그린 것도 그렇고, 뭔가 광기가 느껴지는 필체도 그렇고, 어딘가 엘 그레코를 연상시킨다.
위 그림과 뭔가 비슷한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엘 그레코의 <성 루이, 프랑스의 왕>.
엘 그레코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아래 두 인물은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독지가들인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문 생산된 그림이라는 뜻. 그렇다 보니 엘 그레코 하면 떠오르는 광기가 많이 잠잠해져 있어 아쉽다.
아무튼 이 한도 끝도 없는 그림, 그림, 그림들...
마지막으로 라파엘로의 <큰 미카엘>로 알려진 <악마를 물리치는 미카엘 대천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의 성모>에는 인사를 하고 루브르 구경 마무리.
다빈치 선생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은 지금까지 20개 뿐인데, 그중에서도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다빈치의 작품이 확실한 것은 그나마도 몇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굴의 성모>도 '다빈치가 참여해서 그린 것은 맞는 것 같지만 타인의 기여가 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도의 단서가 붙은 작품.
(그런데 대체 어쩌다 이 다빈치 선생은 이렇게 대단한 화가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이 짧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이 이 분이 그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좀 무섭다.)
아무튼 이번에는, 세번째 루브르를 방문해 그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행동을 했다.
어라 이런 것들도 있네 싶은 수많은 전시실을 돌아 도착한 곳은
네. 화장실.
혹시 가 보셨습니까? 루브르 화장실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 많은 관광객들에 비하면 화장실 수는 정말 적고... 안에 들어가면 비정상적으로 넓은, 희한한 구조.
그리고 이 많은 그리스 도자기와.... (사실 이것도 화장실에 가까워서 한번 찍어 본 것)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 이를테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책을 전부 다 읽는다든가, 루브르 안에 있는 모든 소장품을 다 본다든가.
어쩌다 파리에 살 일이 생기면 감히 한번 도전이라도 해 보련만, 여행자란 항상 바쁘고, 아무리 여유있어도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 할 것은 항상 많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아예 루브르는 일정에서 빼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와 보고 나니, 역시 루브르를 방문하지 않고서 파리를 다녀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뭔가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유산들에게 그동안 잘 계셨나 인사드리고 오는 수준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상 부실한 2024년의 루브르 방문기를 이걸로 정리하며....
과연 금생에 파리 올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소. 그때까지 안녕히들 계시길.
도보로 세느강을 건너러 간다.
다리 위에서 봐도 예쁜 밤의 파리.
강 건너편의 루브르.
그렇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죽 내려간다.
10분 쯤 걷다 보니 보인다.
조엘 로부숑의 아틀리에. L'Atelier de Joel Robuchon.
현재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따낸 셰프'로 공인된 스타 셰프 조엘 로부숑의 소위 '본점'이라 불리는 레스토랑이다. 현재 파리에 2개, 도쿄, 런던 등을 합해 총 12개의 레스토랑을 통해 32개의 미슐랭 스타를 따냈다.
그런데... 정작 이 '본점'은 현재 별이 없다(가 보고 난 뒤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랬다). 같은 파리에 있는 에트왈 점은 원스타. 가장 많은 별을 가진 곳은 홍콩 지점으로 3스타.
뭐 아무튼 별 수가 뭐가 중요해! 여기가 본점이라고 본점!
(꼭 여기를 가라고 강추하셨던 문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만 별이 없나요. ㅎㅎ)
단체석이나 마주보는 테이블도 없는 건 아닌데, 대부분의 좌석이 바 형태도 되어 있다.
아무튼 파리에서도 부촌이라는 생제르맹 지역. 주변 분위기는 아주 좋다.
일단 코스를 주문하고, 샴페인도 한잔. 기분인데!
인테리어가 독특하다. (옆엣분은 '내 취향은 아니야' 라고 자르심.)
어느새 거의 전 좌석 만석.
자, 메뉴를 봅시다.
1. 아뮤즈부쉬
2. 라임을 곁들인 도미 카르파치오
3. 세가지 질감의 양파 수프
4. 푸아그라
5. 푸아그라와 트뤼플 소스를 곁들인 왕새우 라비올리
6. 무와 미소에 재운 대구 구이
7. 우유에 담근 양 갈비와 타임, 그리고 매쉬드 포테이토
8. 치즈
9. 바질과 열대과일 주스를 곁들인 밀크 아이스크림
10. 아라구아니(Araguani) 초콜렛 가나슈, 코코아
이상 10개 코스에 인당 159유로. 네네. 비쌉니다. 그러니 파리까지 와서나 한번.
식전빵. 말해 뭘 하나. 당연히 맛있다.
아뮤즈 부쉬. 호로록 짭짭. 뭔지 기억 잘 안 남. 아무튼 맛있었다.
도미 카르파치오. 라임 주스가 많이 들어가 있어 사실상 세비체. 당연히 맛이 없을리 없음. 국물까지 쪽쪽.
이 대목에서 레드와인 도 한잔!
세가지 풍미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양파 수프. 흔히 생각하는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아니고, 아주 진득한 맛.
푸아그라. 솔직히 말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난린가. 느끼하다.
개인적으로 대구 이리나 홍어 애가 훨씬 맛있다.
랑고스틴으로 만든 라비올리. 소스가 끼얹어져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냥 한입. 맛있어.
미소에 절인 대구...라고 되어 있는데, 옆에 무까지 있는 걸로 보아 일식 기분을 내려고 많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무를 쓸거면 국물에 푹 삶아서 양념이 가득 밴.... 얘들이 아직 고등어나 갈치조림에 들어간 무 맛을 모르는 것 같다.
양갈비 구이와 타임. 그리고 그 유명한 매쉬드 포테이토.
양갈비가 생각보다 너무 연약했는데 아무튼 맛은 당연히 좋았다. 매쉬드 포테이토도. 감자 더 드릴까요를 물어보는데, 한입거리씩 먹은 게 뱃속에 쌓이다 보니 배가 꽤 불러왔다.
이게 아마 주는대로 팍팍 먹어 치우는 느낌이었다면 배가 안 불렀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여기까지 먹는데 두시간 반 정도 걸렸다는 것. 음식이 나오면 먹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마 어마 어마하게 긴 거다. 음식과 음식의 간격이 약 20분 정도?
아 물론 이해한다고. 그렇게 천천히, 맛난 음식을 음미하면서, 와인도 한잔 하면서, 같이 온 사람과 대화도 나누면서, 그렇게 만찬을 즐기는게 이 프렌치 코스 디너의 진정한 의미라고 하겠지. 안다고.
그런데 느려도 너무 느려! 졸리다고! ㅠㅠ
어 왜 치즈 사진이 없지 ;; 아무튼 치즈가 나왔고, 먹었고, 첫번째 디저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입맛을 다시게 하는 새큼한 열대 과일 주스.
여기까지 먹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에? 아직 코스 안 끝났는데요 손님, 네네. 알아요 알아. 여기까지만 먹고 갈게요. 맛이 없어서도 아니고, 분위기가 나빠서도 아니고, 지겨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디저트는 포기할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산 처리하는 것도 꽤 느려서, 계산서와 함께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초콜렛과 생크림, 그리고 오레오쿠키 부순 가루로 만든 가나슈. 주위의 새큼달큼한 잼과 함께 먹는다. 그렇게 해서 코스 완주.
모든 코스가 당연히 맛있고(푸아그라 빼고), 재료의 수준이나 들인 공, 서빙하는 인건비를 생각하면 저 정도 가격이 그리 비싼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제발 음식은 조금만 빨리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파리 방문 중 가장 화려하고 긴 식사를 마쳤다.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에 먹는데만 대체 얼마를 쓴거냐)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짐을 싸서 프론트에 맡겨 놓고, 근처 멋진 데 가서 비싼 점심을 먹기로.
집(?)에서 세느강 쪽으로 가면 사마리텐 백화점이 나오고, 그 옆 건물의 꼭대기 층, 저 돔 같은 지붕에 콩 Kong 이라는 유명 레스토랑이 있다. 왕년의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와 유명해진 곳.
(처음엔 잘못된 정보로 저 장면 촬영지가 퐁피두 옥상의 조르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기였다.)
뭐 어찌됐건 이번엔 최근 더 핫한 곳으로.
사마리텐 백화점을 지나 강을 따라 서쪽으로 몇발짝 가면,
슈발 블랑 호텔이 나타난다.
신상 호텔. 밤에 보면 조명발이 더 예쁜데, 아무튼 이날 따라 날이 화창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퐁 뇌프를 아니 걸을 수가 없지.
<퐁뇌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 Neuf>... 이거 아시는 분들 최소 연식이.
저땐 줄리엣 비노쉬도 젊었고, 나도 젊었고...
(한때 누군가 소개팅 하라고 할 때마다 '줄리엣 비노쉬같이 생겼대'라는 말이 유행하곤 했었다. 당연히 곧이 들으면 안되는 말들... 요즘 기준으로는 김고은 닮았다는 말에는 절대 넘어가면 안된다던데.)
암튼 그 퐁 뇌프. 영화에 나오는 칙칙한 분위기 아님. 관광객 넘실넘실.
다리 위에서 다시 슈발 블랑을 보고, 예약 시간에 맞춰 입장.
저 건물 7층의 테라스가 튀어 나온 곳, 거기에 목적지인 르 뚜 파리 Le Tout Paris 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아 통창을 통해 레스토랑 안을 보는 순간, 아, 예쁘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알록달록 화사.
처음엔 욕심껏 창가쪽 자리를 잡았다가, 강렬한 직사광선 때문에 안쪽 자리로 다시 요청했다.
이렇게 앉아서 세느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어차피 전망은 테라스로 나가서 보는 게 더 낫다.
사실 날씨가 따뜻했다면 테라스를 예약했겠지.
(좋은 날씨에도 테라스에서는 식사는 안 되고, 술이나 음료만 된다고 함. 참고들 하시길.)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안쪽 테이블에서도 전망이 잘 보인다.
테라스에서 안쪽을 보면 이런 느낌.
굳이 창가 자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듯.
메뉴, 듣던대로 가격은 상당히 사악함. ㅎ
그래도 파리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니고... (아 모르겠다 막 시켜)
전채 요리.
음료 잔 안의 얼음에 박힌 백마 로고가 앙증맞다.
백마는 바로 호텔의 이름인 슈발 블랑 Cheval Blanc 을 상징하는 것. 로비에 이런 것도 있다.
문득 한비자에 나오는 아열의 백마비마( 白馬非馬: 백마는 말이 아니다) 고사가 생각나려다... 말았다.
식전에 왜 과자를 주나 싶긴 한데, 아무튼 주니 고맙다. 맛도 좋고, 모양도 예쁘고.
비싸다는 느낌을 완화하려고 뭘 자꾸 주는거냐.
심지어 식전빵도 예쁘다. 맛은 당연히... 여기 빠리라고요. 빵의 도시.
식전빵이 나오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겨서
화장실
화장실 앞 대기공간
그리고 바 테이블을 슬쩍 둘러봤다. 참 공들인 가꿈.
아무튼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 하나 나오는데,
농어. 서더리 부분을 잘라내고 고갱이만 구움. 당연히 맛있는데... 양이 적고 비싸다.
자... 크기 보고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블루 랍스터. 뭐 크기는 상상하시는 그 크기. 물론 맛은 있다.
그리고 아티초크 지짐.
모듬 구운 채소. 뭐 이것도 조금.
빵과 디저트는 제공, 여기서 탄산수와 버진 칵테일 한잔 해서 180유로 정도 나왔다.
사실 정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 비싼 가격이긴 한데, 파리라는 이공간, 그 중에서도 핵심 공간 체험료라고 생각하니 또 낼만 하다는 생각도 들고. (아 몰라. 어차피 파산)
본전을 뽑기 위해 테라스 구경. 볕이 드니 참 좋네.
시테 섬 왼쪽으로 공사중인 노틀담이 보인다.
당연히 반대쪽으로는 에펠탑이. 물론 이 전망을 밤에 보면 반짝반짝해서 더 좋다는 얘기가 있더라.
이건 이 호텔 옥상에 있는 셀레스테라는 바의 야경인데, 각도로 보아 르 뚜 파리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야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음. 아무튼 좋네.
딱 정면은 이런 풍경.
막 이런 것도 해보고.
특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다. 날씨 좋은 날 밤, 이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잔.... 그런 그림이네.
그러고보니 12월.
1층에는 예쁜 트리가 있다.
참 예쁘고 비싼... 기억을 담고.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동네 길을 지나 호텔로 짐 가지러.
워낙 날이 흐리다보니 파란 하늘이 매우 정겹다.
샤틀레 안녕~
그렇게 해서 시타딘레알에서 볼트를 불러 타고,
힐튼 오페라로 이동.
뭐... 파리 호텔 같다.
1층 카페 겸 레스토랑 겸 바.
'파리의 호텔'이라고 하면 생각날 듯한 그런 풍경이다.
방도 크고, 화장실도 크고, 옛날 호텔이라 좀 이상한 것도 있는데 아무튼 널찍널찍 좋다.
역시 비싼게 최고...
코너 방이라 큰 창도 두개나. (아 네. 하나는 반사)
욕실 바닥도 따뜻.
네네. 결혼 20주년, 돈 쓴 보람이 있군요.
서울에선 없어진 브리오슈 도레가 여기에.
아무튼 점심식사로 시간을 너무 소요한 관계로,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다.
아무튼 이번엔 호텔이든 뭐든 위치 중심으로.
전철로 두 정거장 내려가 코너를 돌면,
응 피라미드, 오랜만이야.
루브르는 1988, 1998에 이어 세번째 방문. 물론 세번째라고 해도 사실 늘 똑같다.
아무튼 이번엔 야간개장 하는 날 오후 4시 정도가 가장 덜 붐빈다는 어떤 분의 말을 믿고, 그 시간으로 예약했다.
줄이 진짜 별로 없네
씐나셨군요.
정말 좀 한산한가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
아무튼 식순에 따라 니케 여신에게 루브르 왔다고 신고를.
어휴 25년... 만에 보니 많이 낡았네.
그리고 눈썹 없는 그분께도 역시 인사를 드려야.
항상 느끼지만, 루브르에 온 사람의 한 1/5 정도는 니케 여신상과 모나리자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어디 안 가고 잘 계신거 확인했으니 됐네.
길 잃지 말고 잘 보세요.
사실 루브르에 맨 처음 와서 놀란 것은 "와,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들이 그냥 이방 저방에 다 걸려 있어!" 라는 것인데, 나이 먹어 생각해보니 우리가 어려서 본 미술 교과서들인 너무나 19~20세기 프랑스 주요 미술관 위주로 작성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루브르라는 이 공간의 위력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여기 걸린 작품들의 가치가 별로라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루브르에 와 보면 이 공간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 하나가 이 오이디푸스 그림과 아래쪽 잔다르크를 그린 장 오거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줄여서 그냥 앵그르).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초상을 그린 자끄 루이 다비드와 그림 속의 주인공인 나폴레옹.
잘 아시겠지만 다비드는 말하자면 나폴레옹의 어용화가(또는 어진화사)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 지금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아울러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응원에 힘입어 온 유럽과 이집트를 누비며 각국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리로 실어 날라 이 루브르의 드넓은 공간을 가득 가득 채운 주모자.
당연히 이 유명한 그림도 다비드의 작품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폴레옹 1세의 생김새는 거의 모두 다비드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메르시 아님'이라고 가게 이름을 정한 걸 보면 주인이 같은 가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저 메르시는 커피숍 입구고, 정작 편집샵으로 들어가려면 바로 옆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과 함께 샵 메르시가 등장한다.
그리고 샵 안에서 내다보면 이렇게 커피숍과 연결된다.
물론 연결된다는 것은 공간의 연결이고, 샵에서 커피숍 쪽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 아무래도 물건을 쓱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커피숍으로 갔다가 도망친 도둑들이 꽤 있었지 싶다. 어쨌든 편집샵 안은 생각보다 엄청 넓고 물건도 많고... 한국말도 많이 들리고... (아는 분들은 다 아는 데라고)
물론 태생이 물건 사는데 별 관심이 없는 터라(먹을 수 있는 물건 빼고) 이런 곳은 들어가는 순간, 제발 언제 나갈 수 있는 지 알려줘, 하는 심정이 된다. 대강 봐선 물건 값도 비싸다.
그렇게 비가 살짝 뿌리는 마레 거리를 조금 걷다가, 꽤 알려진 카르나발레 박물관/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동절기 휴관. 으슬으슬 추운 가운데 뭔가 차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보주 광장 주변의 유명한 카페라는 카레트 Carette 라는 곳을 갔으나, 역시 사진 한 장 찍고 싶지 않은 그저 그런 공간.
숙소로 돌아와 저녁 스케줄을 위한 재정비를 하고, 북쪽으로 출발했다.
일단 저녁을 먹으러 향한 곳은 벨레뷜르 지역의 동 후옹 Dong Huong.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난번에 파리에서 먹었던 쌀국수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터라, 이번에도 파리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쌀국수였는데, 불행히도 한번 좌절했다.
그래서 이번에 검색을 통해 다시 도전한 것.
현지 매체에서는 '파리에서 진정한 베트남 쌀국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몇 곳...' 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그런데 저 위평 為平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메뉴에는 為平牛粉이라고 써 놨던데... 뒤의 牛粉이야 소고기 쌀국수라는 뜻이겠지만 위평은 대체 뭣일지.
동 후옹이라고 쓰면 중국 남부의 동썅 桐鄕 이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식당 집안의 조상이 저 동썅에서 오신 분들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베트남어로 동 후옹이 또 다른 뜻이 있는지도.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고이꾸온을 주문했는데.... 한입 깨물었더니 고기 냄새가 역하다.
고기가 삶아 놓고 냉장고에서 일주일은 버틴 듯한 냄새. 갑자기 자신감이 땅으로 꺼졌다.
구운 고기는 언뜻 보기엔 먹음직스러웠으나 어떤 건 질기고, 어떤 건 설익고.
기본 쌀국수는 나름 괜찮았으나 기본적으로 국물이 너무 달다. 대체 4년, 코로나 사이에 파리의 쌀국수 집들이 단결해서 다들 설탕 한 숟가락씩 더 넣고 장사하자고 합의라도 한 것인가.
아무튼 총평은: 쌀국수는 그럴듯 했으나... 굳이 다른 지역에서 차 타고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는 걸로.
사실 목적이 라 빌레트에 있는 파리 필하모닉 홀을 방문하는 거였기 때문에 중간의 동 후옹을 갔던 거라서. 굳이 애써 동선을 낭비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1998년에 방문한 라빌레트는 파리 북쪽의 공원이었고, 그 한 구역이 엑스포 같은 형식의 청소년을 위한 미래 과학 홍보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과연 그 시설은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궁금했는데, 2015년에는 파리 필하모닉의 새 보금자리가 이곳 라빌레트에 지어졌다.
입구쪽에서 걸어가다 보면, 조명을 받아 빛나는 은갈치같은 괴물이 보인다.
오오 멋지다.
낮에 보면 이런 모습이라는 얘기. 장 누벨의 작품인데 안 멋질리가...
약간 빙빙 돌아서 입장해 보면 대기 공간이 이렇게 생겼다.
내부를 잠시 돌아보니 바는 4곳이나 있고, 다들 모두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은 아주 아주 아주 먼 곳에, 몇개 안 된다. 이상하게도 이 나라는 공중화장실을 굉장히 천대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공연장에서. 저렇게 한잔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화장실을 이렇게 멀고 적게 짓는 이유는 뭘까.
아주 아주 그럴듯한 내부 공간.
무대도 막 멋지고.
글쎄 간거 맞다니까요.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부분확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코러스석 쪽에 설치된 장애인 특별석.
개를 데리고 들어와 있다. 맹인용 인도견은 짖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콘서트 홀 안에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이것도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강아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쪽으론 선진국 맞는 느낌.
관객들이 꽉꽉 차고, 시작한다!
마켈레 등장.
이 동네 사람들은 음악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외에는 사진을 마구 찍어댄다. 당연히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
한국이 좀 특이한 듯.
클라우스 마켈레. 이 공연을 보고 있을 당시 27세. 세계 지휘계의 신성이자 아이돌. 훤칠한 키와 훈훈한 외모, 역동적인 지휘로 2021년부터 파리 필하모닉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아주 핫한 유자왕 언니의 남친이 되어 세계 클래식계의 핫 커플로 자리한지... 아직 잘 사귀고 있겠지?
어쨌든 이날 메켈레가 동향 북유럽의 16년 선배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노르웨이 출신)를 독주자로 불러들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임윤찬 덕분에 더욱 핫해진 이 곡.
임윤찬이 섬세하고 투명하다면 이 듀오는 지칠 줄 모르는, 데스메탈을 연상시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출해냈다. 장하다 스칸디나비안 브라더스, 역시 메탈의 고향! 바이킹 화이팅!
그런데 이날 콘서트는 왠지 여기가 하이라이트였다는 느낌. 그 다음 메인 연주곡은 12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 때마다 호두까기 인형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는 서구 관객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딱히 큰 감회가 없었다.
어쨌든 메켈레와 장 누벨의 홀을 경험했으니 여한은 없다. 파리 도착 후 시내에서는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날인데, 중간에 잠시 전철이 끊기는 사고(그러나 옆에 서 있던 한 파리 시민은 '이런 일 늘 있어요' 라며 별 짜증도 안 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있었으나 다른 노선을 이용해 무사히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