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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노리스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5년, 노량진의 한 다 방에서 손님들에게 틀어 준 무단 복제 비디오 한 편 덕택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당시 저를 비롯해 그 다방 안의 거의 모든 손님들은 그 영화가 한국에서 한달 뒤쯤 개봉될 예정인 화제작 ‘람보2’라고 믿고 있었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10여분이 지나자 손님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화질은 엉망이었고, 자막도 없었지만, 베트남 정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는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실베스터 스탤론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자막 없이 봐도 영화가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군인이었던 주인공은 세월이 흘러, 미군 포로 송환을 협상하기 위한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호치민 시를 방문합니다. 하지만 베트남 측은 미군 포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그는 직접 전우들을 찾기 위해 단신으로 밀림에 침투합니다. 그리고 일당백 아닌 일당만의 싸움을 벌이죠. 

줄거리가 지나치게 ‘람보2’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셨나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람보2’보다 1년 먼저 개봉한 ‘Missing in Action’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불과 제작비 150만 달러로 3000만 달러 가까운 흥행 수입을 올린 B급 영화의 전설이었고, B급 배우 척 노리스는 이 영화를 계기로 일약 블록버스터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전쟁 이후 철저하게 베트남과 거리를 두던 미국 정부는 1982년 리처드 아미티지 국방부 차관보를 파견, 베트남 정부와 포로 송환 협상을 벌입니다. 당시 미국의 수많은 베트남전 실종자 가족들은 이 협상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Missing in Action’이나 ‘람보2’ 모두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미국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베트남전 포로 문제를 혈혈단신으로 해결하는 슈퍼 영웅의 모습을 그려준 작품들이죠. 국민들은 여기서 대리 만족을 느낀 겁니다.

척 노리스는 이후 ‘사이렌스(Code of Silence)’, ‘매트 한터(Invasion USA)’, ‘델타 포스’ 등의 액션 영화들(제목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진정한 충격과 공포는 곧 찾아옵니다.) 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한국에서도 유명해집니다. 그리고 노리스가 먹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수입사들은 마침내 제가 본 그 영화, ‘Missing in Action’까지도 뒤늦게 수입하죠.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부르다크’라는 한국어 제목입니다.

대체 이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원제인 ‘Missing in Aciton’은 ‘실종자’라는 뜻인데, 그 제목이 별 파급력이 없다고 생각한 수입사는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브래독(Braddock)’이란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다크’라고 표기하죠. 농담이 아닙니다. 1986년 당시 대한민국의 수준은 딱 이 정도였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사실 스타가 되기 한참 전, 척 노리스는 한국에서 유 명해질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소룡의 전설적인 영화, ‘맹룡과강’(1972)에서 이소룡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출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절의 노리스는 세계 가라데 대회 챔피언 출신의 진짜 무술가였으며, 할리우드 스타 스티브 맥퀸의 무술 선생이었다는 것도 알려지게 되었죠.

그런데 점점 정보가 늘어나다 보니, 척 노리스는 주한미군으로 복무했고, 이때 태권도를 배운 친한파라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태권도 고수? 그런데 가라데 챔피언? 어떻게 된 거지?

 

확인해 본 결과, ‘한국에서 태권도를 수련한 척 노리스’는 딱 50% 정도 맞는 얘기였습니다. 1958년, 오산 공군기지에서 복무하던 척 노리스는 신재철이라는 한국인 스승에게 무술을 배웠는데, 당시 이 무술의 이름은 태권도가 아니고 ‘당수도’였습니다. 

이 당수도가 태권도의 전신이라고 해 버리면 간단하지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수많은 무술 도장 관장님들은 자신들의 무술을 제각기 당수도, 태수도, 권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1955년부터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만들어진 것은 1965년의 일입니다. 노리스의 스승 신재철 사범은 이 시기 한국 무술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무덕관 출신이었으므로, 노리스에게 자신이 수련한 ‘무덕관 당수도’를 가르쳤습니다.

무덕관의 제자들 중 일부는 태권도에 합류하지만 또 다른 제자들은 당수도, 수박도 등 다양한 분파로 갈라집니다. 노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자신의 ‘당수도’를 수련해 1966년 ‘미국 당수도협회’를 창설하죠. 물론 그 뒤로도 다양한 무술을 연구한 노리스는 ‘천국도’라는 자신만의 무술을 창안하고, 1979년 세계 통합무술연맹(UFAF)라는 독자적인 문파를 키워나갑니다. 노리스는 “나의 무술은 한국에서 배운 당수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 척 노리스를 태권도인으로 불러도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젊어서는 악역도 다소간 했지만 어느 시점 이후 노리스의 이미지는 ‘거대한 적들과 혼자 힘으로 맞서 싸우는 외로운 늑대’로 굳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맞서는 악당들은 정말 불쌍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집니다.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도 아마 그만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을테고,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워제너거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승부가 가능했을 겁니다. 

 

한국에서 척 노리스는 19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잠시 반짝 했던 액션 스타 정도로 기억되고 있지만, 미국에서 척 노리스의 위상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예 ‘척 노리스에 관한 진실(Chuck Norris Facts)’라는 유머 시리즈가 위키피디아에 하나의 독립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내용을 보면 ‘척 노리스는 태양을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자를 쓴다’ 같은 것에서, ‘척 노리스는 분모가 0인 분수를 만들 수 있다’는 수학적인 것까지 다양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에 척 노리스가 할수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 이 유머 시리즈의 주제죠.

나이 든 척 노리스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도한 영화 ‘익스펜더블2’에 등장합니다. 일세를 풍미한 노장 액션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이 시리즈에서, 노리스는 그들 중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는데, 여기서 자신에 대한 유명한 농담을 대사로 소화합니다.

 

스탤론이 묻습니다. “자네 독사에게 물린 적이 있다면서?” 노리스가 대답하죠. “있지. 그리고 5일 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더라고. 독사가.”

 

그렇게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홀로 정의를 수호하던 영웅, 한국인 스승을 둔 세계적 무술인인 그는 이제 하늘로 떠났습니다. 아마 그 덕분에 천국은 조금 더 안전한 곳이 되었을 듯 합니다. 부디 내내 평안하시길. 덕분에 그동안 많이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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