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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일본 민예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안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18년에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정병모 선생이 민화에 대해 강연을 했고, 그때 마침 현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민화 전시회에 갔는데, 전시 작품 중 몇몇이 도쿄에 있는 '민예관'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예관이 뭐야, 찾아보니 그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사설 박물관의 이름이었다. 

 

뭔가 마음 속에서 비밀의 문 하나가 열리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한국적 미감에 깊은 애정을 보인 일본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다였다. 그가 설립한 민예관이라는 곳이 도쿄에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한국 미술품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듣보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야나기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통 미술에 대해 특유의 선입관을 갖게 했다', 혹은 '결코 진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식민 통치의 한 측면이었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 이를테면 야나기는 조선사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어둡고 비참한, 사대를 강요당한 역사로 보았고, 조선의 미술이 한의 미술, 혹은 비애를 짊어진 미술로 드러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야나기의 '진심과 애정'이 바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려 했던 소위 문화통치의 도구로 쓰였다는 시각이다. 

1924년 야나기가 경복궁 집경당에서 개관한 조선민족미술관

하지만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조선의 암울한 상황과,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야나기에게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오히려 후대 사람들이 무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시대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야나기 이전에는 과거 한국인이 이룩한 미적 작업 중에서도 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미학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스로를 자각할 능력이 없었다고나 할까.  "깨진 사기 조각, 항아리 조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백자나 사발 같은 서민적인 작품에서 미감을 느끼고, 그것을 '백성의 예술', 즉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불러 준 사람이고, 무엇보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미술관의 존재, 특히 그 이름에 '민족'이라는 것을 넣는 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문화통치 시기였기 때문에 박물관 자체를 막지는 않았고, 1945년까지 존속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넘겨받았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일 것 같고, 왜 일본민예관이라는 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 같다. 구글 지도에서 일본민예관의 위치를 찾아봤다.

 사실 일본을 꽤 오갔지만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정작 도쿄에는 어디에 뭣이 있는지 잘 모른다.  도쿄는 놀러 가기보다는 거의 출장으로 간 탓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고, 근래 휴가로 일본을 갈 때에는 홋카이도와 큐슈를 번갈아 다녔기 때문에 자유롭게 도쿄 곳곳을 오갈 수 있었던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부야 역에서 전철과 도보로 10여분 정도. 생각보다 변두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 여행 날짜를 잡고 나서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특별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가 걸려 있는 거다. 

 

아무 근거 없지만 이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 (물론 뇌과학자 모 선생님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하셨지만 ㅎㅎ)

 

왠지 이때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케줄을 뽑았다. 일본 민예관이 있는 동네는 시부야구에서도 대략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고마바(駒場) 지역이다. 앞서 지도에서 보듯 도심에서 그리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일반적인 도쿄 여행자들의 동선과는 별 교차점이 없다. 

시부야 역을 경유하지 않고 가는 방법. 도심에서 전철 치요다센을 타고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내리면 시부야구에서 운영하는 하치코버스(일종의 마을버스)가 다닌다. 요금 100엔.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시부야 역 방향으로 세 정류장을 가 우에하라 2초메 미나미에서 내린 다음, 고마바 지역에서 10분 정도 주택가 골목을 걸으면 일본 민예관이 나온다. 

한적하고 곱게 단장된 길. 양쪽의 집들이며 주차된 차들을 보면 꽤 사는 분들이 사는 동네 맞는 듯.

좁은 길을 사이로 일본 민예관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집이 마주 보고 있다.

매표소에서 1100엔짜리 표를 끊으면 두 장의 표를 준다. 한장은 서관(야나기 본가) 관람권, 하나는 민예관 본관 관람권. 서관은 4시까지만 개방하니 그쪽을 먼저 보고 오라는 안내까지 해 준다(본가는 개방하지 않는 날도 많다). 

사실 서관은 딱히 큰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늑하고 곱게 단장된 2층집. 고아(古雅)하다는 말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서재가 좋아 보였다. 볕 잘 들고 통풍도 좋을 듯한 넓은 창, 단단하고 기대기 좋을 듯한 넓은 책상, 벽 둘러 쌓인 책장. 지금이라도 그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 일어서기 싫을 듯한 방이다.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 두었으면 좋으련만, 집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라 아쉽지만 그냥 집을 나서야 했다.]

본관 전시. 역시 2층 집인데 보기보다 앞뒤로 넓은 집이었다. 전시 소개 포스터/도록의 표지가 모두 같은 그림이다. 사진 위의 맨 왼쪽, 가는 풀 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각항아리가 바로 야나기가 처음 조선 백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바로 그 작품이라고 한다. 아래쪽 전시 광경은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실 사진. 

 

1층에선 이번 특별 전시와 별 상관 없는 유럽 공예품 등의 상설 전시중. 2층으로 올라가자 가장 눈길을 끌 만한 공간에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조선에서 넘어 온 것들. 대체 이걸 왜 전시해 놓았을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어도 당신들이 이 다음에 보게 될 명품들을 명품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라는 공치사일까. 내가 손대기 전에 이 귀물들이 얼마나 천대받고 있었는지 직접 보라는 뜻일까.  이 생각 자체가 유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공치사라 해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던 대로 민예관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고, 이번 전시에서는 대략 대여섯 점 정도만 촬영 허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도 평소보다는 후한 것이라고 한다. 도자기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기 전 도서관에서 '일본 민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도자기 일람'을 한번 살펴봤다. 가장 관심이 간 작품은 이런 것들이었다. 

코믹한 표정의 민화풍 호랑이가 떡 자리잡은 백자 항아리.

그리고 세상에 이런 백자가 있나 싶었던 3중 찬합.

다행히 이번 전시품 중에 둘 다 있었다.

민화 속 호랑이가 그려진 백자동화호문호는 그리 섭섭지 않은 크기였고, 백자청화채찬합은 과연 찬합으로 쓸 수 있었을까 싶게 작았다. 찬합이란 용도대로라면 어른 한끼분 정도의 반찬을 담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어쨌든 한국 백자 중에서 저렇게 전체를 푸른 색으로 칠한 그릇은 처음 봤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두개만으로도 이 전시를 보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만 했다.

그밖에 사진 촬영이 허가됐던 품목들은 이렇다. 

이 자기들을 설명하는 표찰(사진 오른쪽 아래를 보듯, 작품 이름을 설명해 놓은 것 외에는 아무 해설이 없다) 중 상당수에 염부(染付)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 염부가 청화백자의 청화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일본어로는 소메츠케라고 읽는다. 

이건 금사리 자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뜻. 즉 한국식으로 저 표찰을 읽으면 '난초 문양과 글자가 들어간, 금사리에서 구워진 청화백자 항아리' 라는 뜻이다. 

포도줄기와 잎이 그려진 청화백자 항아리.

여기엔 또 염부에 진사까지 붙은 염부진사 染付辰砂 라는 설명이 있다. 뒤의 화조문면취호(花鳥紋面取壺)라는 것은 꽃과 새가 그려진 각진(面取) 병이라는 뜻인데, 왜 굳이 병(甁)이 아닌 항아리(壺)라고 썼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대체 염부진사가 뭘까. 물론 찾아보면 다 나온다. 

염부진사(染付辰砂)란 일본어로 소메츠케 신슈, 요즘 우리가 쓰는 용어로 하면 청화(靑華)+동화(銅畵)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즉 백자에 청색 안료를 넣은 청화, 산화철을 넣은 철화처럼 산화동을 넣어 그림을 그린 백자를 동화라고 부른다. 즉 대부분의 봉황 몸체는 청화로 그려 푸른색이고, 벼슬과 날개 일부에 산화동을 이용해 붉은 색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소메츠케 신슈라고 설명한 것. 

이 봉황문 항아리도 도록에서 먼저 보고 실물이 궁금했던 것이라 감회가 깊었다. 

반면 위쪽의 꽃 그림 병은 산화동으로만 그렸기 때문에 신슈(辰砂)라고만 쓰여 있다. 진사초화문병. 

 

그러니까 이 특별전 중에서 가장 아껴둔 물건들을 이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그중에서도 몇개를 골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두고 있었다. 언뜻 봐도 참 좋은 물건들인데, 이 물건들을 눈으로만 보고 오려니 참 아쉽기 짝이 없었다. 물론 도록도 샀지만, 도록은 대부분 흑백이라... 

못내 아쉬워서 휴식공간 앞에 있던 장식장을 한장 찍어 봤다.

가운데 줄 왼쪽이 바로 가기 전부터 보고 싶었던(위에서 언급한) 3중 찬합이다. 

휴식공간 바깥쪽의 항아리들. 뭔가 어린 시절 집집마다 있던 장독대가 생각나 정겨웠다. 

일본 미술관에 가면 언젠가부터 이런 테누구이(手拭)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몇개 사도 큰 부담이 없는.  그런데 예쁘다. 도록과 함께 기념품으로.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된 미술관. 간혹 한국에서도 전시하고, 수집 과정부터 '일제가 강탈해 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남의 손에 있는 것이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곧 또 만나게 되길. 

 P.S. 조선민족미술관 100주년 기념 전시는 8월25일까지 진행된다니 그 사이 도쿄에 가실 분들은 짬이 나면 들러 보시길. 결코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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