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잘 하란 말이야
 
똥오줌 못 가리는 문과출신의 OPEN AI 사태에 대한 관전기.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이며 회사의 리더인 샘 알트만을 해고시킨 것까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이사회는 주주들이 아니라 사회 공익단체 간부 같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결국 잽싸게 나선 마이크로소프트가 알트만을 채용하겠다고 하고,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선다고 하고, 결국 알트만이 OPEN AI 대표로 복귀하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지켜봤다.
1. 샘 알트만(올트먼?)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관둔다고 500명이 따라서 관두겠다고 하는 일은 엄청난 일.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한폭의 드라마. 대체 평소에 어떻게 해줬길래?
2. 일리야... (이름이 길어서 못 외움. 수츠케버)는 연구는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인간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반란의 수괴가 하루만에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3. 이게 결국은 AGI로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세상에 인공지능 연구하는 회사가 OPEN AI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 회사의 CEO를 날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4.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게 목표였다면 일단 크게 울린 셈. 하지만 무슨 수로 저 열차를 세울수 있을까.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AGI를 나쁜(놈들이 키운) AGI보다 빨리 개발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샘 알트먼과 일리야 수츠케버
문득 또 생각. 저 일리야...님이 "인간이 평생 만나는 정보량을 단어 수로 계산하면 약 10억개, 아주 넉넉잡아 20억개라고 쳐도(20억개라면 약 6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단어씩 보는 셈), 이건 AI가 학습하는 정보량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양"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최소한 초기에는 오염된 정보/ 가짜 정보/ 틀린 정보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옆에서 '편견(일부러 이 표현을 썼습니다)'을 넣어 줘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 지나 그것도 결국 일부의 의견이라는 걸 다 아신, 통계학적으로 다음 어순에 들어갈 단어 찾기를 지나, 논리적 추론도 지나, 예측과 분석을 다 하게 되고, 진짜 자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신, 정말 최고의 현자가 되신 AI님에게는 이 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댁이 보기에 '진정 인류를 위하는 길'이란 어떤 길인가요?"
이 질문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더 분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그런데 문득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XX이야?')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질문은 다른 분이 해 주세요. ^^
 
디즈니+의 오타니 다큐, <오타니 쇼헤이: 비욘드 더 드림>을 봤다.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매우 실망.
 
이런 다큐를 만들 생각이라면 과연 시청자는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지구적 스타가 된 오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궁금해 한다. 대체 오타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오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시절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괴물이 나왔을까. 대체 어떤 훈련을 한거지? 야구 과외라도 했을까?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오타니도 친구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려서도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완성된 인간이었을까? 고교시절 같은 팀 동료들은? 니혼햄 시절 동료들은? 과연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첫사랑은? 
 
 
그렇다면 이 다큐에는 오타니의 초딩 동창, 고교시절 야구부 동료, 은근히 지켜본 같은 반 여학생, 이와테 지역에서 맞붙었던 다른 학교 라이벌이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 다큐에는 부모 형제는 물론, 과거 니혼햄 동료나 현재 엔젤스 동료 한명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야구계의 전설들이 나와서 오타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타니가 만나본적도 없는 마츠이 히데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와서 대체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오타니가 고1때 만들었다는 야구인생 계획표. 몸 만들기, 컨트롤, 키레('구위'라고 누군가 해석해 놨던데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시속 160km,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 8가지를 단련해서 고교 졸업때에는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는 것(일본은 여러 구단이 한 선수를 동시지명할수 있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이게 고1 소년이 세울수 있는 계획일까. 아무리 봐도 외계인.
 
(그런데 왜 타격에 대한 얘기는 없을까. 그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ㅎ)
 
 
그 밖의 멘트들은 역시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들이라 재미라곤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좀 섬뜩할 뿐. 오타니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나랑은 다른 인간이야. 나도 야구를 좀 잘 한 편이지만 나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면서 낄낄 웃은 C.C 사바시아에게 훨씬 호감이 가더라.

어쨌든 오타니 다큐는 누군가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주길. 

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김오랑 중령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던 천재. 금수저. 잘생긴 얼굴. 유혹의 재능. 섹스에 대한 집착.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영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과연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이니 스포일러가 있을까 싶지만, 감상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분은 그냥 여기서 멈추길.  

내 느낌대로 정리하자면,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어느 관종의 추락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주목을 즐거워하고, 항상 어떤 자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원하고, 더 큰 주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관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는 매우 강력한 '관종'의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어느날, 역사적인 폭탄 제작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연히, 관종답게,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 참여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 한다. 물론 충분히 자격도 있다. 그리고 미친듯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과를 냈다.

 

과연 이 폭탄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많은 과학자들이 -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 이 폭탄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에 대해 많은 기록은 ‘오펜하이머는 본보기로 실제 사용을 해야 전쟁 억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폭탄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을 대략 뭉그러뜨리는 정도 선에서, 실제 투하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다른 방법을 통한 인간 살해에 비해 딱히 더 부도덕할까?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이미 도쿄에선 몇 차례의 폭격에 의해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한 것보다 많은 사망자 수다. 만약 일본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면,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폈다면 수만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고, 일본인 사망자는 수십만, 수백만에 달했을 것이다. 핵폭탄 투하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펜하이머에게는 사용을 지지하는 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이미 일본의 패배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고, 그렇다면 미군을 포함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성과가 그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좋은 조건일테니까.

 

폭탄이 무사히 실험을 마치고, 군인들이 두 개의 폭탄(아마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일)을 로스 알라모스로부터 외부로 반출하는 시점. 여기서부터 놀란의 카메라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의 오펜하이머를 쫓기 시작한다. ‘저 폭탄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는 물론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이어 폭탄 투하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오펜하이머의 실망은 극에 달한다.

물론 언론은 ‘전쟁 종결자’ 오펜하이머를 놓치지 않고, 그는 명성의 최절정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을 방문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관종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낸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기대했을) 공감이나 동정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다. “폭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기서 알기나 할 거 같은가?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나야.” 두 개의 핵폭탄을 날려 전쟁을 끝낸 사람은 난데 어디서 일개 과학자 따위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 하느냐는 불쾌감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양심적 고뇌를 시작한’ 오펜하이머와 ‘인명 따위 관심없는 권력자’ 트루먼의 대립 같지만 사실 내게 보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건 관종과 관종의 대결이다(...문과와 이과의 대결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밀린 오펜하이머는 어색하게 퇴장한다. (문과 만세!)

대개의 관종들은 선량하고 나이브하다. 관종일수록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대체 어떻게 그 호의 뒤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관종의 패턴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자신을 고의로 음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을 가까스로 끝내고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체제 경쟁을 시작한 미국의 여론 앞에선, 이런 노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심쩍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소폭탄을 개발해선 안된다’는 의견은 ‘원폭은 되고 수폭은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소련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데’에 부딪히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UN이 공동관리하게 하자’는 의견은 ‘소련과 핵무기를 공유하자고?’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화상으론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오펜하이머가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영화에 따르면 스트로스의 공작에 의해) AEC에서 밀려난 것은 1954년,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을 받고 미국 상원이 그의 지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54년은 아직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던 시절이지만 그 뒤로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꼈고, 1959년이면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을 낳아 여론을 반전시킬 시기였다.

 

심지어 놀란의 영화상으로는, 오펜하이머는 ‘냉전의 시대에 용기있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해서’가 아니라 ‘스트로스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가 보복당해’ 공직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가 나라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고, ‘지나친 관종이라 주위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쨌든 70여년 동안 인류는 용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 데 성공했고, 이건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놀란은 거기에 오펜하이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인류가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관종끼 강한 천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소위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하는지에 관심 있어 보일 뿐.

너무 길어졌다.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영웅의 추락을 그린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오펜하이머의 추락 원인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오만과 공명심,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시, 억제할 수 없는 ‘관종’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몰락한다. 성격을 중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측면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탁월한 영화다.

3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핵 폭발 실험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킬리안 머피에서 시작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먼, 조쉬 하트넷,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케네스 브라나, 라미 말렉, 한때 넥스트 디카프리오였던 데인 드한까지... 단역까지도 올스타급으로 채운 라인업은 중국 영화 <건국대업>을 연상시켰는데, 현재 할리우드에서의 놀란의 위상을 보여주는 면모. 

아무튼 명작이지만, 두번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P.S.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는 바가바드 기타 11장32절 머릿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후로 수많은 힌두교 연구자들이 이 말이 적절하게 인용된 것인가에 의문을 던져 왔다.

이 말은 인도 신화에서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이며 무적의 용사인 크리쉬나가 자신의 사촌이며 동조자인 영웅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와 같은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데, 크리쉬나가 파리 죽이듯 인간 전사들을 살상하는 것을 보고, 전능한 신에게 대체 싸움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대답한다.

 

The Supreme Lord said: I am mighty Time, the source of destruction that comes forth to annihilate the worlds. Even without your participation, the warriors arrayed in the opposing army shall cease to exist.

Therefore, arise and attain honor! Conquer your foes and enjoy prosperous rulership. These warriors stand already slain by Me, and you will only be an instrument of My work, O expert archer.

 

크리쉬나가 말하는 힘의 비교 대상은 시간이다. 세상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모두 소멸될 뿐이다. 그러니 아르주나가 돕건 안 돕건, 그런 강대한 내가 참전한 이상 전장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물론 힌두교의 전제상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누가 죽고 누가 사는 일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연연하지도 말고, 그저 내 도구로서 승리를 즐겨라.

 

한마디로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영원을 다루는 신의 의도와 권능을 이해하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짖음인데, 과연 오펜하이머의 인용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크리쉬나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인지, 그냥 단장취의하고 ‘뭔가 강력한 것’이란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
 
보는 동안은 잘 봤다. 너무 자주 반복되는 추격 장면이 좀 지루했고 너무 말이 안 되는 줄거리가 몰입을 방해했지만, 일단 주제가 'Raiders' March' 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반가웠다. 마지막의 ‘대체 안 아픈데가 어디야’(1편의 대사다)에서 뭉클하기도 했다. 그런데 보고 나오는데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했다.
 
<옐로우스톤>의 스핀오프 중 하나로 현재 방송중인 미국 드라마 <1923>의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다. 족보상으로 <옐로우스톤>의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의 종증조부 쯤 된다. 타협을 모르는 늙은 카우보이.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지만 이미 말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카우보이의 시대가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굴의 투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그의 나이가 보는 이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에 나오는 해리슨 포드는 극중 70세(존스 박사는 1899년생이었던 것이다)인데 내용을 봐선 대체 왜 70세인지 알 수 없다. 처음 세 편의 시리즈에서 존스 박사는 각각 37세, 36세, 38세였다.
 
70세를 맞은 1969년, 존스 박사의 펀치력, 주력, 근력, 지구력은 30대 후반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여전히 몸으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한다. 성배로 물을 마신 덕분인가. 2043년쯤 나올 <범죄도시 23>의 마동석을 미리 보는 것 같다. 영화 배경이 1940년 정도였다면 딱 어울릴 시나리오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젊은 영웅’역할을 했어야 할 헬레나(피비 월러-브리지)는 방해꾼에 애물, 코믹 전담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소란스럽고 장황하다. 그냥 <플리백>을 보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제작사들은 만에 하나 늙은 챔피언이 은퇴하더라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젊은 챔피언이 그의 영광을 물려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 것 같다. 다행히 그 소원은 실현될 모양이다.
 
요즘 들어 자꾸 ‘위대한 왕국이 퇴색하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나네.
 

1.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추구할수밖에 없다는 낙관, 식량과 자원의 부족은 기술의 발달이 모두 해결해 줄 거란 낙관,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통제 불가능한 정보의 확산은 진정한 인류애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낙관...
마블의 혼란과 DC의 제자리걸음을 보면서, 과연 이 세가지 낙관이 모두 무너진 세계에서 슈퍼히어로 영화가 살아남을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오갤3>와 <플래시>를 본 뒤 이 느낌은 더욱 굳어졌다.
누가 이런 망가진 세상에서 한가하게 슈퍼히어로 집단 따위가(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정의로운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줄 거라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낙관의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2. 그런 시대에,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정말 끔찍한 제목. 이하 MI7)>의 현실 파악은 진정 탁월했다. 기후위기와 식량 및 자원의 부족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이 회의적인 분위기, 전 지구적인 이기주의의 확산으로 전쟁 발발의 위협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 정보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는 '엔티티'라는 고도로 진화된 AI가 등장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체 어떤 정부가, 어떤 기관이 이 엔티티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까.
 
예전 같으면 '세계의 경찰'이며 '가장 정의로운 국가'인 미국이 그 엔티티를 떠맡으려 했을 것이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누구도 70억 인구 전체가 다 같이 손잡고 밝은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 과연 우리의 영웅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3. 배경은 소름끼치게 현실적이지만, 물론, 본질적으로, MI7은 불로불사 톰 크루즈 아저씨의 동화다. 믿을 수 없는 선의로 가득찬 기사들과, 가면 하나로 다른 인간이 되는 마법이 공존하는 판타지 세계다. 그래도 어쨌든 '그냥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비록 그 주역들은 총알 한방이면 죽을 수 있는 약한 존재들이지만 불굴의 투지와 선을 향한 의지로 어떻게든 우리가 알던 세상이 유지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해서, 이 암울한 미래를 앞둔 인류가, 이제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4.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이런 세계를 설계하는데 최고의 장인임을 보여준다. 파트 원인데도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장악력. 탁월한 캐스팅과 적절한 교체. 고전과 미래를 넘나드는 미적 감각 모두 최고다.
개인적으로 MI 시리즈 중 최고이면서 코로나 이후 본 모든 영화 중 최고.

 
1. 바다가 있고 감독 류승완.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재미있는 여름 영화'의 간판으로 손색이 없다. 보고 나서도 만족. 
 
2. 2021년 촬영. 22년을 그냥 넘기면서 제작진이 했을 고민이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의 관객과 이후의 관객은 어떻게 다를까.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할까. 그리고 그 선택은 강력한 다이어트로 나타났다.
 
2시간9분. 네 주연과 고민시 외의 다른 캐릭터들은 이 다이어트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밀수>는 한눈팔지 않고 그냥 달린다. 물론 좋은 선택. 오해도, 갈등도, 굳이 오래 끌지 않는다.
불필요한 우리편의 희생(개인적으로 21세기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도 없다. 따져 보면 꽤 심각한 스토리인데 빠른 해결로 바로 치고 나가니 발걸음이 가볍고, 관객도 편안해진다. 확 눈에 띄는 김혜수-염정아 여성 투탑의 서사를 빼고도 이 시대에 잘 맞춰진 영화다.
 

 
3. 아쉬움이 있다면 조연 라인이 좀 낭비됐다는 느낌. 특히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로 구성된 해녀팀은 촬영중에는 꽤 큰 비중이었을 듯 한데 완성된 영화론 거의 존재감이 없다. 반면 이런 점을 생각하면 고민시의 활약이 놀랍다. 후반부는 고민시가 끌고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물론 이 영화 최고의 수혜자로 조인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연 넷 중에선 등장시간이 가장 짧은 캐릭터. 하지만 조인성이 과연 지금까지 이렇게 '여심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한 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훌륭한 변신을 보여준다. 조인성, 이제 느끼한 것도 된다!
 
5. 훌륭한 오락영화지만 아주 세심한 영화는 아니다. 이를테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왜 닻줄이 끊어져도 배는 정지해 있나 같은 사소한 의문이 여러 곳에서 떠오른다. 이런 부분들이 디테일 마니아들에겐 다소 불편할수도 있겠으나 대세에 지장 없음. 편히 보시길.
 
6. <앵두>,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무인도>까지. 전곡을 다 따라 부를수 있는 OST(반갑다). 엔딩은 <그 얼굴에 햇살이> 정도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P.S.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웅본색>을 언급했다던데, 그리 오래지 않아 오마주 지점이 나와 (코믹 장면은 아닌데)잠시 웃었다. 흰 바바리라도 입고 나오거나, 돈을 줄 때 바닥에 흩뿌려 줬더라면 더 선명했을지도.^^

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초딩 동창인 세르지오 레오네(좌)와 엔니오 모리코네(우)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놈놈놈과 석양의 무법자의 관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1. 또 시간여행과 멀티버스. 플래시의 능력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설정되었을때부터 시간여행 이야기는 언젠가 나오는게 필연이었겠으나, 막상 보고 나니 좀 그렇다. <플래시>의 리부트라기보다 <백투더 퓨처>의 리부트 느낌.
 
2. 대체 왜 마블이고 DC고 멀티버스에 꽂혀서 이 난리인가.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 다른 세계의 닥터 스트레인지... 결국 이런게 다 이제 슈퍼히어로가 빌런과 싸워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지킬수 있다는게 너무 뻔하고 순진한 소리란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아닐지. 지난번 <가오갤3> 때의 생각 반복.
 
3. 그런 의미에서 '플래시'는 추억 총소집으로 팬들을 감격시키는데 성공. 특히 가족애를 테마로 한 슈퍼마켓 신은 눈물이 찔끔 나오는 감동. 그동안의 수없이 반복된 리부트와 리빌딩이 결국은 멀티버스였다는 스토리텔링은 보너스. (근데 크리스찬 베일은 왜 왕따인가)
하지만 이 감동이 DC를 구원할수 있을지. 거기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슈퍼맨 레거시>? 글쎄.
 
4. "OH! FLASH! I LOVE YOU!" 이거 혹시 퀸의 명곡 'Flash' 에 대한 오마주인가? 이보다는 훨씬 노골적인 <쇼생크 탈출> 오마주 매우 웃겼다.
4-1. 감독이 시카고 팬인지. 왕년의 시카고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명곡이 두곡 나온다. 음악의 활용은 벌써부터 제임스 건의 영향인지 <가오갤> 느낌이 물씬.
 
5. 역시 내가 DC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배트맨의 캐릭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란걸 재확인. 다크나이트고 뭐고... 태생이 고구마다.
 
6. 에즈라 밀러는 연기력도, 역할 해석도 매우 훌륭하다. 18세 배리의 성격이 좀 짜증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성격.  (이 리뷰를 작성하고 나서 얼마 뒤 에즈라 밀러의 과거 행각을 들음. 아마도 미국에서 <플래시>의 흥행이 박살 난 데에는 밀러의 역할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생각됨. 그런데도 미국 영화가에서는 "제임스 건이 이끄는 새로운 DC 세계에서도 에즈라 밀러는 계속 출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플래시>의 가장 큰 성공은 역대 최고의 슈퍼걸 사샤 카예라고 생각. 등장, 각성, 캐릭터, 외모 모두 최고다.
 
7. 플래시의 캐릭터 중 최강의 먹방 히어로라는 점은 왜 충분히 상품화되지 않았을까. 단적인 예로 왜 플래시 초콜렛바 같은게 없을까? 에너지 보충을 위해 뛰면서도 줄창 먹어야 하는 플래시와 딱인데.

 

8. 결론: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2> 이후 지금까지 본 DC 영화중엔 최고. 하지만... DC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은건 아닌지.

써놨던 글인데 타이밍을 놓침. 어쨌든 길어서 블로그에 올림.


해가 갈수록 너무나 한심한 영화상이 되어 가고 있는 아카데미상에서 올해 그나마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다 싶은 부분은 피터 위어의 '공로상' 수상이다. 아카데미 공로상은 언젠가부터 '유명한 분인데 그동안 우리가 상을 못 드리고 외면해왔던 분들'에게 드리는 상이 되었다. 

피터 위어

이 상이 원래 그 해의 분위기라는 것(좋게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것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예년 같으면' 충분히 상을 받고도 남았을 영화들이 수상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상이 워낙 근엄한 상이다 보니 코믹 연기로 부각이 되거나, 영화가 좀 희한하거나 한 경우에도 상을 잘 주지 않았다. 성룡, 스티브 마틴, 데이빗 린치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다. 

 

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온전히 봐도 충분히 상을 받을만 했는데도 좀 불운한 사람들의 경우, 번번이 뭔가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영화'들에 밀려 수상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총 14번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콜시스의 경우 <디파티드>가 없었다면 공로상의 0순위 후보였을 터. 

 

피터 위어는 6회 후보에 올라 무관(골든글로브는 4회 무관)이니 스콜시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따르면 너무나 저평가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BAFTA에서는 <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 <마스터 앤 커맨더>로 3회나 감독상을 수상했으니 결코 상복이 없는 감독은 아니다. 다만 아카데미가 그를 철저하게 무시한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 위어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트루먼 쇼>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물론 올랐어도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가 있었던, 아카데미 기준으로 극강의 해였기 때문에 수상은 실패했을 수도 있겠으나, 나머지 후보작들의 면면을 보면 <트루먼 쇼>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을 영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짐 캐리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짐 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짐 캐리는 스콜시스나 위어는 저리 가랄 정도로 오스카가 철저하게 무시한 배우다. 캐리는 단 한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적이 없고, 심지어 짐 캐리가 출연한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다. <마스크>나 <덤 앤 더머>는 말할 것도 없고, <이터널 선샤인>도, <트루먼 쇼>도, <맨 온 더 문>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희극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의 결과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코미디언들도 비슷하다. 유명한 코믹 배우들은 커리어의 어느 시점에서 '어디 오스카가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작정하고' 출연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빌 머레이와 스티브 캐럴은 각각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폭스캐처>로 1회씩 오스카 후보로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죄송.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두 배우들이 '어디 나도 상 받는 영화에 한번 출연해 볼까?'라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영화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진지하게 빌 머레이를 평가했다면 <고스트 버스터즈>나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짐 캐리도 위의 몇몇 영화를 통해 존 카우프만, 피터 위어, 밀로스 포먼 같은 '오스카가 외면하기 힘든' 영화인들과 공동 작업을 했지만 결국 실패한 걸 보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캐럴이나 머레이보다 캐리를 더 싫어했던 모양이다.

곡절 끝에 이번에 위어가 공로상을 받았으니, 언젠가 캐리도 공로상은 받을 수 있기를. 아니, 그 전에 아카데미 회원들이 정신을 차려서, 연기상을 받을 수 있기를. 위어 형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뒤늦게)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충격을 받고(정말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해야 '영화 좀 본 사람'이 되는 것인지),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작 리스트를 보다가 대체 영화란, 극장이란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카데미상이 해야 할 역할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갔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장면인지, 저 영화의 장면인지 혼동할 정도로 세 영화는 매우 닮아 있다. 글자 그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남녀 주인공 중 한쪽과 그 자연재해가 초자연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그 운명의 연결을 거스르려 한다는 점 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이 한 가득이다. 물론 같은 감독이니 작화와 스타일도 당연히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강추. 안 보신 분들은 빨리 보러 가라. 아래 글은.... 물론 별 스포일러는 없다. 


그중 최신작인 <스즈메의 문단속>. 이번엔 큐슈 남동쪽의 미야자키가 무대다. 여고생 스즈메는 폐허를 찾는 '잘생긴 남자' 소타의 뒤를 쫓다가(심지어 등교를 포기하고!) 일본 땅 깊은 아래를 흐르는 큰 힘, 지진의 원인인 거대한 미미즈의 실체를 알게 된다. 심지어 스즈메의 실수로 미미즈를 잠재우고 있던 요석이 빠져버리고, 미미즈를 관리하는 가문의 후계자인 소타는 희한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미야자키-에히메-고베-도쿄-미야기까지, 일본 열도를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거의 종단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대모험이 시작된다.


비슷한 톤의 영화가 세 편째이다 보니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작 두 편에 비해 이야기의 양은 많고 진행은 훨씬 빨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작 두 편에서 이미 스타일을 읽었을테니 비슷한 패턴을 다시 보여줄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당연한 얘기는 얼른 건너뛰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얘기라 반가웠다. 

이런 진행 때문에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선이 너무 튄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어느 곳 어느 시절에, 남녀간의 감정에 매뉴얼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개연성이 필요하다면 소타의 외모가 개연성이겠지. 


세 편의 영화 중 대중성으로 따지면 단연 <너의 이름은>이 앞서고, 그 다음이 <스즈메의 문단속>, 그리고 <날씨의 아이> 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후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날씨의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과연 대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을 본인 아닌 다른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제기였다. 

 

거의 매일 폭우가 내리는 도쿄. '날씨의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가지 않는 한 비가 계속 내려 도쿄는 물에 잠길 운명이다. 그녀 하나의 희생으로 도시 하나를 구할 수 있다 해도, 과연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자신을 희생해야 할까? 혹은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 


유독 집단주의가 강조되는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서 이런 목소리를 내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이 감동의 포인트였다. 20세기의 풍요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일본에서, '왜 당신들이 망쳐 놓은 나라를 우리가 수습해야 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질문을 대변한 듯한 느낌. 하지만 <너의 이름은>을 사랑했던 많은 신카이 팬들은 이런 메시지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이진, 단지 지루했을 뿐인데.


그래서인지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통적인 윤리관으로 돌아갔다. 주인공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평온한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매우 상식적인 주제를 따른다. 스즈메는 어떻게 해서든 이 '당연한 희생'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그 '재난'이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12년전의 대 사건이라면, '막을 수 있었어도 나를 희생해서 그걸 막지는 않겠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그러면 다이진은 대체 무슨 죄로 그 지루하고 어두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가.

 

헤라클라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가지러 갔을 때, 직접 가는 것보다 아틀라스를 보내라는 조언 때문에 잠시 아틀라스 대신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는 일을 맡는다. 그런데 사과를 가지고 돌아온 아틀라스는 '왜 내가 계속 하늘을 떠받쳐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아틀라스도 잠시 풀려난 뒤의 해방감을 알아버린 뒤, 다시 교대해 주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일.

'그건 원래 네가 해야 하는 일이었잖아' 라는 이유로, 다이진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다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잠시 묵념, 네네. 이게 주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쪽이 더 맘에 든다니까요.)

어쨌든 작화의 연출이나 영상, 음악, 거의 모든 면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탑 크리에이터로서 손색없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한국처럼 문화적으로 근접한 나라가 아닌 글로벌 관객을 고려한 일본적 요소의 승화 부분에서도 - 물론 한국 관객들은 좀 더 이해의 폭이 크겠지만 - 특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미즈(일본어로 지렁이더라)의 형태는 아니지만 지진이 잦은 나라의 특성상 지하에 뭔가 초자연적인 거대한 존재(이를테면 용, 메기, 구렁이 등등)가 진동을 일으킨다는 전설, 그리고 역시 신적인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 진동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있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 때마다 대재앙이 덮쳐온다는 것....

그런 자투리들을 모아서 이만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진정 탁월하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아무튼 강추. 얼른얼른들 보세요.

 

 

타락한 도시 바빌론. 계시록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현대 문명권에서 sin city는 거의 공식적으로 라스베가스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데미안 셔젤에게는 할리우드가 바빌론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는 파리가 바빌론이었던 것처럼. 

 

영화 <바빌론>은 '그 타락이란게 대체 어떤 건지 보여주마'를 작심한 듯한 파티 신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콘텐트 비즈니스의 엄청난 매출 창출 능력이 현실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들어간 돈의 100배, 1000배의 이윤을 돌려줄 수 있는 새로운 사업. 그 파티 신 하나에 어마어마한 허영과 사치와 욕망이 녹아 흐른다. 압도적이고 효과적인 첫 장면.

타락의 끝, 바빌론 그 자체...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가 가리키는 시점은 1920년대의 할리우드, 무성영화가 유성영화(토키)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물론 데미안 셔젤은 토키의 충격보다는(이미 이 영화 곳곳에 인용되는 <싱잉 인 더 레인>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들이 그 '충격'을 중요한 소재로 다뤘다) 그 시절의 영화계 사람들이 느꼈을,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도 되는 거야?"라는 충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신성한 영화의 역사에 바치는 헌사'와는 조금 다르다. <바빌론> 속 영화계는 재능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말초적인 유혹에 미친 장인들과, 일확천금에 눈이 먼 장사꾼들의 파티장이다. 등장인물들은 아무데나 똥을 싸고, 걸핏하면 토한다. 마약이 알콜에 취한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누구도 <바빌론>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취한 브래드 피트가 석양을 안고 펼치는 환상적인 촬영 장면이나, 당대 할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했던 가십 칼럼니스트(아마도 실존인물인 헤다 호퍼나 루엘라 퍼슨스를 모델로 했을)가 피트를 향해 "당신 시대가 간 건 당신 탓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날 어떤 젊은이가 당신 영화를 보고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느낄 때,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 거야" 하고 위로하는 장면을 보면, 이런 장면에서의 셔젤은 진심으로 할리우드의 팽창기, 전설이 된 시대를 살아 보고 싶었던 영화소년의 자세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제정신을 잃고 술과 마약과 섹스와 향락과 사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잃은 할리우드를 빈정대는 듯한 셔젤, 그런데 그 정신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찬란한 성과와 다시 오지 않을 전설의 시대에 대해 미칠듯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셔젤. 이 두개의 셔젤은 영화 내내 쌈박질을 벌인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정체성도 좀 오락가락한다. 너무 노골적으로 팬심을 드러내기 부끄러웠던 것일까. 애정표현이라면 좀 비뚤어진 표현이긴 하지만, <바빌론>의 시대에 대한 셔젤의 진심은 너무나 충분히, 넘칠 정도로 느껴진다.

 

(이런 종류의 동경은 굳이 영화 <미드나잇 앤 파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나 친근하다. 만약 당신이 야구선수라면 트랙맨도, 갖가지 통계도, 에이전트도, 혹사 논란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 베이브 루스나 월터 존슨과 플레이하는 꿈을 꿀 지도 모른다. 가수라면 MP3가 없던 시절로, 글쟁이라면 인터넷이, 심지어 워드 프로세서가 없던 시절로.... 뭐 아무튼.)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영화가 꽤나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데 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겠'으나, 내겐 너무 길었다. 코로나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최소한 3시간은 되어야 티켓값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누군가 여기저기 전염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굳이 이렇게 지루하게 만들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상, 아무리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만들었다 해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그래도 스스로 생각할 때 영화라는 장르에 평균 이상의 애정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한번 보고 기억해 둘만한 영화. 이 영화에는 15분짜리 유튜브 압축본을 보고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 분명히. 그것이 욕이든, 감동이든. 이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나는 저거 무슨 영환지 다 알아' 하는 유치한 자부심 같은 걸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P.S.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에 감탄하게 되는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파리>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다시 돌아온 바빌론>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TMI)

확실히 코로나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극장을 찾는 것이 전보다 좀 더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래 리스트 중에서도 극장에서 본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네요. 심지어 극장에서 본 영화가 집에 앉아서 본 영화에 비해 만족도가 높았던 것도 결코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늘 그렇듯 제가 2022년에 봤다는 것이지 제작 연도가 2022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숫자는 순위가 아닙니다. 그냥 갯수를 세기 위해 붙인 넘버링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1. 프리가이

NPC,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들이 열심히 기관총을 쏠 때 한가하게 옆을 지나가는 백곰들이나 당신이 금괴 판매자를 찾아 중동의 낯선 항구를 방황할 때 옆으로 지나가면서 "메카에서는 향신료가 싸다네"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보잘것 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존재를 가지고 만들어 낸 보석같은 영화. 시대정신에 딱 맞습니다.

 

2. 리카르도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왈가닥 루시'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세대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때 미국의 연인이자 세계의 연인이었던 루실 볼이라는 여배우. 그 여배우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인종주의와 매카시즘의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둥둥 떠다니던 시절이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영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절대 그냥 주어진 것도 아니고, 태곳적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3. 프렌치 디스패치

영화든 소설이든 모든 것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영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촘촘하게 책으로, 잡지로 만들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웨스 앤더슨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문라이즈 킹덤>과 함께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 

 

4. 탑건: 매버릭 

당신은 왜 극장에 가고 영화라는 것은, 극장이라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장 최근의, 가장 설득력있는 답변. <탑건> 세대가 아닌 관객들까지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직 인류가 낭만, 성취, 우정 같은 동기들에 대해 애착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는...

그리고 영화 보는 동안이라도 스무살로 돌아간 듯한 느낌. 

 


5. 놉

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작품. 대체 우리가 모르는 하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뭔가 진지하게 얘기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병맛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블랙코미디인 척 하다가도 어느새 호러로 변신해 있는 영화. 영화 <놉> 자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거기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 그냥 한 편의 호러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강렬한 작품. 

P.S. 다니엘 칼루야는 조던 필 감독의 세 작품 모두에 출연하지는 않습니다.

 


6. 헌트 

한국 스릴러의 역사는 <헌트> 전의 작품과 그 뒤의 작품으로 나뉠 듯.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정치 부분을 건드리면서 시나리오 상태에서 이 정도의 짜임새를 갖춘 영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고, 이 모든게 신인 감독 이정재의 책임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정 놀라울 뿐. 

 


7. 헤어질 결심

이미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는 박찬욱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 대한 영화. 박해일의 죄가 '아내를 배신한 죄'가 아니라 '사랑을 외면한 죄'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벌 역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 그래서 이 영화를 멜로 영화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처참한 징벌극. 

 

8. 13 라이브스

극장개봉도 하지 않고 단지 아마존프라임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가장 강렬했던 영화 중 하나. 13명의 조난당한 소년 축구단 일행을 구하기 위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는데.... 너무나 담담한 시각이 가슴을 저미는 영화. '저렇게 모두들, 자기 할 일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던 거죠.

 

9. 아바타2 

솔직히 292분은 좀 무리라는 생각도 했지만 2022년에 본 영화 중 10편을 뽑는데 <아바타2>를 꼽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저는 불가능했습니다. <아바타3>이 나와도 꼭 볼 거구요. 물론 그 얘기 외에는 사실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게 함정. 그래도 같은 돈 만원(물론 저는 2만원) 내고 세시간 넘게 이런 시각적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정말 염가라고 생각합니다. 

 

10. 더 스위머

시리아 출신의 두 자매가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이하 생략) 내전과 학살의 땅. 먼 나라에 사는 우리는 그저 '거기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곳에도 젊음이 있고, 누려야 할 삶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무겁고 눈물부터 쏟아야 할 것 같은 톤이 절대 아니고, 거칠 것 없는 젊은이들 이야기답게 흥겹고 씩씩한 영화지만, 어느새 '난민'이라는 말의 무게가 가슴에 실리는 영화. 

 

경합:
범죄도시2

어쨌든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을 가장 위로해준 작품. 손석구 캐릭터가 왜 사람을 죽이는가에 대한 개연성 여부를 비롯해 스토리의 구멍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마동석의 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울려퍼지는, 500년 된 오동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쩍' 소리의 쾌감 앞에서는 비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듯. 

엘비스

바즈 루어만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호오가 엇갈리는 작품이지만, 잊혀져가는 엘비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정리를 더 이상 아름답게 해낼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톰 행크스의 악역이 신선했고, Suspicious Mind가 보고 나서도 한동안 귓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워스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제 이런 영화를 보기엔 너무 늙었...

 

긴급선언

한국 평론가들이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었던가. 

 

1. 개봉 첫주를 놓치면 루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예매 시도. '드디어 예매가 열렸다'는 제보를 받고 예매에 착수했는데 어찌나 세상에 손 빠른 사람들이 많은지 이미 대부분의 IMAX와 DOLBY CINEMA의 핵심 좌석은 사라진지 오래. 마침 누군가 현재 국내 최고의 관람 환경은 남양주에 위치한 현대아울렛 스페이스원(메가박스)라고 극찬했던 말이 생각나 예매 시도. 여기도 역시 대다수 좌석은 빛의 속도로 사라진 뒤였으나 그래도 센터 라인의 좌석 확보. 대신 토요일 오전 8시. 

2. <아바타>와 제임스 카메론에 대해서는 존경심 뿐. 1984년 겨울,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대체 영화의 장르가 뭔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 <터미네이터>의 충격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식당들이 설렁탕에 깍두기 반찬 하나, 짜장면 우동에 단무지 반찬 하나 놓고 장사 하던 시절에 갈비구이 반상에 16첩 반찬을 깔아 놓고 갑자기 방어회, 서산 무젓, 눈볼대 구이에 백합탕까지 시간 순으로 깔아 준 뒤 다 먹고 나가려는데 차가운 배숙에 개성식 주악으로 마무리까지 기막한 한끼 식사를 같은 돈 내고(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모든 영화의 관람 요금이 같다) 먹게 해 준 카메론 형님의 은혜란. 그 뒤로 <에일리언2>를 보고 비슷한 감동을 느꼈고,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배신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던 <어비스>도 아름답기만 했다. 아니 뭐가 어때서? 재미만 있는데. 

3. <아바타>때는 그래도 관객들이 새로운 세계관에 안착하게 하기 위해 꽤 긴 도입부와 안내 설정이 필요했지만, 이미 <아바타>를 13년 전에 본 관객들에겐 <아바타2>를 위한 새로운 적응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줄거리 역시 너무나 직관적. 이미 <아바타>의 엔딩에서 설리는 자신의 나비족 아바타에 정신을 이식, 아바타를 새로운 몸으로 삼아 판도라 행성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인간 과학자들이 적응을 위해 만든 나비족 아바타가 어찌나 완성도가 높던지 각종 운동능력은 물론이고 생식기능까지 완벽, 설리는 아내 네이티리(이 이름 기억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는 듯. 캐릭터 이름을 기억할 필요 없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등장)와 아들 딸 쑴풍쑴풍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의 보고 판도라 행성을 기껏 개척해놓고 포기할 인류가 아닌 터. 그 전보다 확실한 준비를 갖추고 다시 침략자들이 밀어닥친다. 더구나 숙적 쿼리치 대령까지 지난번의 패배는 체력 격차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듯, 나비족 아바타 몸을 새로 갖추고 달려든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수순. 쿼리치와 인간들의 1차 제거 표적이 자신과 가족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설리는 정든 할렐루야 마운틴을 떠나 멀리 멀리 새로운 곳에 숨는다. 그곳에는 해양 생태에 맞게 진화한 살짝 다른 나비족들이 살고 있다. 

4. 보시다시피 <아바타2>의 이야기 구조에는 큰 매력 포인트가 없다. 14년을 기다린 팬들에게 풀 떡밥은 <WAY OF THE WATER>라는 부제답게 끝없이 펼쳐지는 대양 생태계와 그 속에서 함께 헤엄치는 나비족들의 화려한 모습, 그리고 새로 도전해 온 인간들과의 치열한 전투 정도다. 그렇다. '볼거리'에 대한 만족이 <아바타2>에 대한 당신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그 밖의 것은 없다.

사실 많은 사람이 화질과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이야기하지만... 물론 아주 훌륭하다. 훌륭하긴 한데, 이미 많은 사람이 UHD와 4K 시대를 즐기고 있는 마당에, 이 정도의 영상이 과연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나 멋지다'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집에서 20인치 브라운관을 보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기절할 정도의 놀라움은 아니었다 정도로 해 두자. 

그래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볼거리는 매우 훌륭하나, 2시간 72분을 버티기에는 살짝 아쉽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 타이타닉(?) 시퀀스는 좀 너무 길고 성의가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아, 노파심에서 얘기하자면 이런 얘기들은 '그래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무조건 봐라. 극장에서 봐라. 가능한 한 큰 상영관에서 3D로 봐라. 이걸 다 전제로 하고 하는 얘기다. 이런 투정을 한다 해도 이건 그냥 가족간의 응석 같은 것일 뿐. 이번 생에 <아바타> 시리즈가 몇 편 더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어찌 안 보고 지나갈 수 있을까. 다 본다.

5. 카메론은 살짝 변했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가족애'를 좀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하며, 전 같으면 나비족 한 마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초토화시켜도 모자랄 상황인데, 악당들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하며... 너무 인자해진 메론이형이랄까.

이런 면모들을 볼 때 <아바타>의 속편이 몇편까지 만들어지든(일단 5편까지는 나온다 치고), 동화같은 해피엔딩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편에서 나비족은 모두 소수민족 배우들이 연기했던 반면, 이게 오히려 역차별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나비족 역할에도 상당히 많은 백인 배우들이 투입된 점도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6. 애당초 <아바타2>는 2015년 정도에 개봉 예정이었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사실 누가 카메론 옹에게 일 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할 것이며,  카메론 형 입장에서 보면 몇달 사이에 더 좋은 기계와 더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오는 판에 어느 단계에서 딱 끊고 완성작을 내놓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2편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3편은 좀 빨리 내주길.

아무튼 메론이형,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시고 앞으로도 좋은 영화 계속 만들어주세요!



P.S. 1. 사실 카메론 형은 흥행 못잖게 제작비 상한 파괴자로서도 1인자의 면모를 과시해왔다. <T2>때 최초로 제작비 1억불을 넘겼고 <타이타닉>에선 역시 최초로 2억불을 넘겼다. 그때마다 할리우드 최강의 스튜디오들이 드디어 우리 회사가 망하는구나 곡소리를 냈지만 그 곡소리들은 이내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아바타2> 개봉에 맞춰 카메론은 희한한 이야기를 했다. GQ 기자가 수지타산 이야기를 묻자 "영화 사상 최악의 비즈니스다. 이번 영화는 역대 3,4위권의 흥행을 기록해야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역대 1위가 <아바타>의 29억불, 4위가 <타이타닉>의 20억불 선인데. 이 말이 기사화되면서 "<아바타2>의 손익분기점은 흥행 20억불 선"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그런데 이 금액이 너무 어이없는 금액이다 보니 저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바타2>의 제작비는 최대 4억불 정도. 통상 손익분기점은 제작비+배급 비용+홍보비 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 상식인데, 누가 뭐래도 이 제작비 외의 추가 비용이 16억불이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추측한 바에 따르면,


1) 카메론이 <아바타2>를 통해 앞으로 남은 속편들의 제작비를 다 뽑기로 결심했다(카메론은 적으면 3편, 많으면 5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가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다음 작품부터는 그냥 리스크 0인 상태에서 제작을 할 계획이다.  <- 사실 말이 안 되지만 카메론이 한 말이니 이런 의미일수도 있겠다 정도?

2) <아바타2>를 만들기 위해 특수효과나 그래픽 관련 기업들을 아예 카메론이 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회사들의 인수비용을 모두 뽑을 생각이다. <- 역시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중 나름 합리적인 해석.

3) 사실 <아바타2>의 제작비가 4억불보다는 꽤 많고, 카메론은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흑자를 내 버릴 생각이다. <아바타>의 전 세계 흥행 성적은 29억달러로 역대 1위지만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면 약 7억불 정도, 역대 4위권이다.  <-뭐 이것도 할리우드=세계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능한 숫자...

4) 그냥 카메론의 과장법이다. <- ....충분히 가능

P.S.2. 그렇게 판도라 행성까지 가서 구하려고 다들 애썼던 암리타는 이미 지구에서 시판되어 팔리고 있다. 메론이형, 부디 이거 드시고 건강 지키시길. (AMR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불멸' '불사'라는 뜻이라고...)

흔히 스파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를 '첩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가 배신자인가' 혹은 '누가 진짜 스파이인가'를 찾는 이야기는 그 안에서도 별도의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인기 높은 소재입니다. 조직 내에 잠입해 우리편을 가장하고 있는 첩자를 영어로 두더지(mole)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장르를 두더지사냥(molehunt)라고 흔히 부르죠. 영화의 제목이 <헌트>인 것 역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의 <노 웨이 아웃>같은 거라면 당신은 옛날 사람... 네? <무간도>요? ;;)

<헌트>는 이 장르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탁월한 독자성을 갖춘 작품이고, 감히 말하자면, 한국 영화계가 이 장르에서 지금껏 만들어 낸 영화들 중 최고작으로 꼽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한국 영화에서 평균적으로 등장해 온, 너무나 밋밋하고 평면적인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불만이었던 관객이라면 <헌트>를 통해 그 갈증을 씻어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보입니다. 

겉으로는 수트를 차려 입었지만 속은 일상처럼 서로 죽고 죽이던 칼잡이들 그대로인, 무사들의 시대를 <헌트>는 실감나고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 3년차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웅평 귀순,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그리고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등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져나온 파란만장한 그 해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 수호의 핵심이던 중앙정보부를 전두환 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지만 여전히 대외 첩보와 민간 사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죠. 정권은 바뀌었지만 "당신들 누구야?" "남산에서 나왔다 이 새끼야!"는 그대로이던 그 때.

하지만 <헌트>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전두환, 노신영, 이웅평 같은 인물들의 실명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아예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의 무대도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바꿔 버리고 사건의 내용도 '국가 원수 시해 음모'라는 핵심을 제외하면 실제 사건과 사실상 일치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창작의 세계로 멀리 가 있죠.

아무튼 잠시 줄거리.

독재 정권 3년차의 안기부. 국내팀 담당 차장 정도(정우성)와 해외팀 담당 차장 평호(이정재)는 워싱턴에서 대통령 살해 음모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처리 과정에서 심하게 대립합니다. 서열상으로는 평호가 윗사람이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결코 편치 않은 사이.

특히 안기부 내부의 최고 기밀 정보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조직 상부는 내부 첩자를 파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들 두 사람이 상대방을 견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에게서 석연찮은 증거들을 발견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라이벌의 대결 속에서 '과연 누가 첩자일까'를 풀어가는 고전적인 구조.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 후반부에서 그 전형을 만들어 놓은, 두 라이벌 사이의 치열한 치고 받고를 중심으로 한 플롯의 핵심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기울지 않는 균형인데,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증언대로 이정재 감독의 솜씨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서의 연출은 사실 배우로서의 연기와 따로 떼 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죠. 두 배우의 대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화면 가득한 풀샷을 이겨내는, 잘 늙은(?) 두 남자의 투샷은 매우 아름답고 만족스럽습니다. 정우성 역시 농익은 연기가 그만입니다. 



이정재 감독은 시나리오 수정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놀랍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두 남자는 그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선을 그을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란 면에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도 한국의 1980년대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흑과 백, 양 극단 사이에 두터운 회색 층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북한이나 미국이라는 변수들까지 감안하면 계산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그 뒤,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의 관찰자들은 처음엔 흰색이나 희뿌연 회색으로 보였던 수많은 점들이 당시에는 선명한 검은 색이었던 점들보다 더 검게 보이게 되곤 하는, 기묘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커버하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였고, 오히려 주인공인 두 남자는 그런 시대에 나름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 혹은 그 '배신'과 '충성' 사이의 어느 쪽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영화는 분명 흥미진진한 오락 영화지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튼 누군가 <헌트>에 대해 '먹물들이 더 좋아할 영화'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는데, 제가 어쩔 수 없는 먹물 취향이라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적이면서 또 동지이기도 한 두 남자의 경쟁과 협력(?) 이야기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감히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에 비견할 만한 멋진 영화가 드디어 한국 영화사에도 등장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놓치지 말고 보시길. 

 

P.S.1. 올 여름,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했는데, 정작 최고의 캐스팅을 감춰둔 건 이 작품이었습니다. 유재명 주지훈 황정민 정경순 조우진 박성웅 등 어지간한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이 거의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없는 역으로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캐스팅 실력 실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진짜 귀순용사같았던 그 분. 

P.S. 2. 저분의 귀순을 환영하기 위해 그해 4월 여의도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130만명이 몰렸다고 하는데, 그 130만명 중 한명이었다는 옛 기억이 문득.... (비가 부슬부슬 오던 그날, 10KM는 걸은 듯. 절대 자진해서 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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