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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좀 하다가/영화를 보다가

프리 가이, 이 세상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1년 전쯤인가 NPC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모든 게임에는 NPC(Non Personal Character)라는 존재들이 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병풍 같은 존재들을 말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백곰 같은 경우도 있고, 가끔 플레이어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게임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말해주는 역할일 수도 있지만 어떤 독자적인 사고나 행동은 할 수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엑스트라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1년 전쯤, ‘이 세상이라는 게임에서 자신이 NPC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NPC’에 대한 포스팅을 했다가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다시는 NPC 어쩌고 하는 글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그 설정과 어울리는 영화가 나왔다.. 더보기
퍼펙트 센스, 매일 하나씩 감각을 잃어간다면 퍼펙트 센스(2011)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 이완 맥그리거, 에바 그린 주연 만약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한가지씩 감각을 잃어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후각이, 이어 미각이 사라진다. 인간들은 혼란에 빠지고, 냉소적인 셰프였던 마이클(이완 맥그리거)는 실업자가 될 위기에 놓인다. 수전(에바 그린) 연구팀은 급속도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주어진 오감으로 부족하다는 듯 가상 세계에까지 감각을 확장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감각들을 빼앗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로운 설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오감은 인간이 욕망을 갖게 하는 전제다. 감각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미각이 사라진 뒤에 미식이, 청각이 사라진 뒤에 음악이 사라지듯 시각.. 더보기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원작을 다시 보게 만드는. 1. 스필버그의 (2021)를 보고 나서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1961년 판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몇몇 장면을 빼면 거의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2.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극의 핵심인 ‘1961년, 뉴욕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백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 청소년들의 갈등’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의 이 문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이슈였지만 지금 보기엔 60년 전의 과거다. 1961판에서 제트파는 샤크파에 비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하다. 심지어 경찰도 노골적으로 제트파의 편을 든다. 그때는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2021년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제트파나 샤크파나 모두 곧 개발되어 없어질 지역(이미 영화 도입부에서 링컨 센터 건.. 더보기
개취로 뽑은 2021년 10편의 영화 2021년의 영화 열 편을 고르기는 여느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일단 2020년에 이어 극장에 몇번 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개봉 편수 역시 적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대작’의 숫자도 적었고, 매년 즐거움을 주던 마블도 이후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매우 실망입니다. 아무튼 극장 개봉, OTT 개봉을 구분하지 않고 꼽아 봤습니다. 똑같이 OTT로 공개했을 때 50분 3부작 드라마와 150분짜리 영화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같은 질문은 학계로 넘기고, 쪼개지 않고 한 편으로 된 작품은 영화로 분류합니다. 그렇게 10편. 아, 매년 똑같지만 이 리스트의 기준은 언제 제작되어 언제 개봉됐냐가 아니라, 제가 본 시기에 따라 가른 것입니다. 2018년, 2019년 제작 영화라도 제가.. 더보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 1. 의 강말금이 신인여우상 6관왕을 차지한 2021년 2월에야 이 영화를 보고 뒷북으로 한마디 하려니 좀 찔린다. 하지만 아직도 본 사람보다는 안 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테니 한마디. 미리 말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이상 크게 웃지 않는 사람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2. 줄거리.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강말금)은 같이 일하던 감독이 급사하는 바람에(죽음의 원인이 나오는데, 미리 얘기하지만 굉장히 어이없다) 일자리를 잃고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된다. 막상 한번 꺾이고 나니 마땅히 일을 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영화를 떠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인생 왜 이 모양인가 싶고 마침 눈이 가는 남자도 나타나는데 과연 어찌 될지. 3. 적잖은 나이. 모아둔 돈도 마땅히 장래가 보장된 일.. 더보기
헌트, 트럼프는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1. 뒷북. 는 인간 사냥에 대한 영화다. 소수의 부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냥터에 영문을 모르는 몇몇을 납치해다 풀어 놓고 잔혹한 사냥놀이를 진행한다. 이미 많이 써 먹은, 그렇지만 흥미로운 소재다. 그런데 반골기질이 넘치는 크레이그 조벨 감독은 이런 소재로 실사판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너무 늦게 본 걸 후회한다. 2. 인류애, 공감, 연민, 박애, 평등과 같은 덕목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중받아온 가치이긴 하지만, 오늘날처럼 사회 전반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은 사실 길게 잡아 봐야 100년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젠더, 동성애자, 외국인 근로자, 기타 사회적 약자들도 이런 가치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정서적 배려와 자원의 분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진보적인 가치'라고 여겨 왔.. 더보기
자산어보, 두 형제의 세계가 만났던 시대 의 감동을 느끼며 나오는 길. 객석에 관객은 10명이 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극장보다 안전한 곳도 많지 않을텐데(관객이 입을 벌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팝콘도 안 파는데). 뭣보다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들 좀 봐줘야 하는데. 1. 아시다시피 는 정약용 4형제중 둘째이며 흑산도로귀양가서 해양어류 연구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정약전의 이야기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지식욕과 출세욕이 가득한 젊은이 창대를 만나고, 지루하기만 했을법한 유배생활은 창대 때문에 다채로워진다. 2. 정약전(설경구)과 창대(변요한)는 실존인물. 물론 창대가 서자인지 상놈인지, 아비가 나주의 부유한 홍어상인인지는 알 수 없다(이런 캐릭터는 제작진의 창작). 3. 영화의 시작은 정조 승하 1년 뒤인 1801년. 교과서에 '삼정의 문.. 더보기
노매드 랜드, 유목 생활은 과연 낭만적일까 “엄마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홈리스(homeless)래요.” “아니. 나는 하우스리스(houseless)야. 그건 다른 거야.”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세상에 의해 강요된 ‘집 없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 뜻일까. 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도시 하나가 없어지다시피 하는 날벼락을 맞아 낡은 밴 한 대가 전 재산인 처지가 됐다. 그 밴에 몸을 싣고 돈벌이를 따라, 날씨를 따라, 때로는 친구를 따라 미국의 대평원을 이리 저리 달리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현대의 유목민이다. 유목이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몸이 가볍다.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쫓는 삶과는 거리.. 더보기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튼 꼭 극장에서 보시길. 1만몇년이라는 연도(서기인가?). 우주제국의 귀족들이 행성 하나씩을 자신의 영지로 갖추고 군림하는 시대. 명망있는 아트레이데스 공작 가문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환각제 '스파이스'의 산지 아라키스 행성을 관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가장 큰 강점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차분한 진지함'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이야기든, 스토리텔러가 이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빌뇌브의.. 더보기
돈룩업, 인류의 대동단결이란 가능한가 몇해에 한번씩 그해의 히트작을 겨냥해 '내 아이디어', 혹은 '(아무도 모르는)내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믿으란 말이냐'고 주장하는데, 드라마 신인작가 공모전 채점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혜성이 지구를 삼킬 거라는 영화가 거의 동시에 두편 나온 적이 있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998년. 와 이었다. 이 지금까지의 범 지구적 재난 영화들과 철저하게 다른 점은 인류의 단결에 대한 냉소다. 지금껏, 최소한 영화 속에서 세계 각국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계인의 침공, 혜성, 괴수, 질병, 기후위기에 일치 단결해 맞서.. 더보기
개취로 뽑은 2020년 10대 영화 극장과 영화는 아마도 코로나 사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 중 하나. 개인적으로도 극장을 몇번이나 갔나 싶습니다. 이번에 꼽는 영화들도 거의 모두 방구석에서 본 것들이죠. 그런데 문제는 만인의 극장이 된 넷플릭스의 단편, 즉 ‘영화’ 분야가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장편 시리즈 부문이 상대적으로 훨씬 낫고, ‘영화’라고 할 수 있는 2시간 내외의 단편 작품들은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의 이름이 간판에 걸려 있어도 신뢰감이 뚝 떨어집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길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용 영화는 프로듀서건, 투자사건, 배급사건, 온갖 시누이들이 ‘적절한 길이’를 요구합니다. 아주 긴 영화의 경우 어떻게 해서든 그 길이를 줄이라는 요구를 해대죠. 아예 나 처럼 1,2부로 나누어 개봉을 .. 더보기
브렉시트,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영화로 본다면 영국이라는 나라의 전통이겠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과감한 극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화 . 한국으로 치면 '역사적인 평가가 완성되지 않은 사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건드려도 될까. 명예훼손이나 사실 왜곡 시비로부터 제작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이다. 면전에서 사실상 욕설을 퍼붓고도 "Nothing personal"이라고 퉁칠 수 있는 문화랄까. 영화 의 주인공인 도미닉 커밍스(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실제로 브렉시트의 심장으로 불리는 인물. 당시 'EU 탈퇴'라는 이슈를 놓고 수많은 주장으로 뒤섞여 있던 탈퇴파의 오합지졸들을 하나로 규합, 아무도 예상 못한 승리를 거둬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 더보기
날씨의 아이, 일본인도 달라졌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를 선택했다. 어쩌면 며칠 전 한강을 건너다 본, 침수된 한강시민공원과 텅빈 올림픽대로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수도. 한번 보시기를 권함. 개인적으로, 보고 난 느낌은 때와 매우 비슷하다.^^) 섬에서 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16세 소년 호다카는 우연히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18세(!) '날씨 소녀' 히나를 알게 되어 그 능력을 활용할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날씨 소녀에게는 능력의 댓가로 겪게 되는 어떤 운명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감성보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끝없이 내리는 비는 누.. 더보기
작가 미상, 역사는 어떻게 작가를 만들어내나 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 으로 알려진 이 독일 감독의 2018년 작품. 은 독일어 원제인 , 즉 ‘작가 없는 작품’에서 직역한 것. 영어 제목인 는 소년 쿠르트에게 이모 엘리자베트가 해 준 말에서 따 왔다. 2.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따라가고 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두각을 보이던 시점에 서독으로 망명했다는 점, 동독에서 그렸던 대형 벽화는 그가 탈출한 뒤 즉시 지워졌다는 점 등이 영화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의 가족사 디테일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3.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의 원혼이 된 사람들은 유태인만이 아.. 더보기
개취로 뽑아본 2019년 10대 영화 아주 오랜만에 올해의 10대 영화를 꼽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기준은 개취구요, 대상은 '올해 본 영화 중 2018, 2019년에 제작된 영화'로 하겠습니다. 대상은 약 70~80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입니다. 순위는 크게 의미 없고, 생각난 순서? 1. 던 월 Dawn Wall 올해 최고로 이 영화를 고르는 데 전혀 고민이 필요 없었습니다. 요약하면 많은 일들을 겪고 난 한 남자가 묵묵히,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암벽 오르기에 끝없이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뻔하고 지루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왠지 눈가가 촉촉해지고, 주인공 토미 콜드웰을 응원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미친 영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