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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아내 헤드윅(잔드라 휠러)과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수용소 담장 바로 밖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뜰에는 넓은 잔디밭과 꽃들이 우거졌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가족들은 여름이면 부근의 강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때면 마당에 간단한 파티 테이블을 차려 놓고 의자에 기대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 아우슈비츠에서는 거대한 굴뚝이 밤새 연기를 뿜어냈다...

2. 영화는 회스 부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회스에게 유태인 학살은 음식쓰레기 배출이나 수돗물 공급과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었다. 아내 헤드윅은 유태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옷가지와 각종 물품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쓴다. 반면 자신들의 자녀와 가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애롭고 헌신적인, 훌륭한 부모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뿐. 헤드윅은 회스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그만두게 될 때 "나는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라며 흥분하고, 회스는 어떻게 하면 상부의 신임을 얻어 소장직을 되찾고, 헤드윅을 실망시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충격적이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충분하다. 나머지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딱히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이 영화의 결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튼 강추작. 박수가 아깝지 않다.

자, 그냥 표 사러 가세요. 나머지는 영화 보고 다시 오시길.

 

가운데가 루돌프 회스

3. 이 끔찍한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이 또한 놀랍다). 루돌프 회스는 실존인물이고, SS 장교 출신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다. 1943년 11월 잠시 다른 인물과 교체됐지만 44년 5월 복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나치가 아우슈비츠 주변 약 4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설치한 특별 구역의 이름인데, 이 동네에 멋진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마틴 아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쟁이 끝나고 회스 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추적자들은 먼저 북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로 변신해 있던 아내 헤드윅과 가족들을 찾아냈고, 헤드윅은 처음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고, 회스 또한 덴마크 국경 지역에서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체포됐다.

 

회스는 자신이 1941년부터 43년까지 SS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약 2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태우는 작업을 지휘했음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회스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리델. 매우 흡사하다.

4. 과연 회스의 가족들, 아내 헤드윅과 자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회스는 종전 후 재판에서 "최소한 아내와 장남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녁때마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연기, 그리고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문자들은 이 냄새와 연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살당한 유태인의 것임이 분명한 모피 코트를 뽐내는 헤드윅.

4.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주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회스의 장모는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지, 어느날 회스 앞에서 신발을 벗는 여자는 누구인지, 낚시를 하던 회스는 왜 갑자기 아이들을 물에서 꺼내 집으로 끌고 오는지, 왜 갑자기 회스는 구토 증세를 보이는지 등에 대해 깔끔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다. 

 

장모는 정말로 태연하게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 가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달아난 것이고, 회스와 아내는 아우슈비츠에서 상당수의 유태인들을 몸종처럼 부리고 때로 성노예 취급도 했을 것이고, 강물에서 시체 태운 재를 발견한 회스는 '아이들'이 그 재에 오염될까봐 깜짝 놀란 것이고... 구토는 아마도 잠시나마 '미래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와 같은 자각이 일시적으로 무의식을 뚫고 나와 신체에 반응을 일으켰음을 상징하는 것일텐데, 이런 해석들이 맞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기를 글레이저 감독이 바란 것일 뿐. 

 

벽에 사과를 박아 넣는, 뒤집힌 그림 속 소녀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몇몇 폴란드 사람들은 작업 중에 유태인 수감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밤에 몰래 진흙 속에 음식을 감춰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영화 내용중에는 '사과 하나를 놓고 두 수감자가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회스가 '둘 다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있다. 

5.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그저 명령에나 복종하고, 조직 안에서 과업의 완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고는 2차대전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이르면, 이건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무심함'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희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까.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가자지구의 학살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했다. 단지 홀로코스트의 고발만이 중요했다면, 당시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이제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괴한 현상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외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담 너머의 참상에 고개를 돌린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든 선진 문명국들의 풍요는 일정 부분 이상 '담 너머'의 희생에 일정 부분 이상 빚을 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생각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름끼치는 은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6.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 아카데미 작품, 각색, 감독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중 국제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은 로컬 영화제잖아요"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소위 국제영화상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 2024년 시상식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작품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모두 오른 반면,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국제영화상 후보에서는 빠졌다. 작품상이 아카데미상의 최고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국제영화상 후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다(물론 해당 국가에서 <추락의 해부>를 후보로 밀지 않으면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행 제도다). 

 

7. 다만 개인적으로 음향상에는 다소 의문이. 과연 이 영화의 검은 화면이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그렇게 대사 없는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었나?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굉음과 비명을 꼭 들려주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 감춰진 악의 선명함으로 충분했고, 굉음에 가까운 음향은 오히려 과잉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칭찬하고 싶은 걸작.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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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퓨리 로드>의 프리퀄 <퓨리오사>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디멘투스의 졸개들에게 납치된다. 

 

녹색의 땅을 지키는 전사들, 부발리니 중 하나인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출하기 위해 추격에 나선다. 물론 딸도 딸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녹색의 낙원의 위치를 알게 된 졸개들을 해치워야 했다. 폭주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과일이 열리는 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다. 이렇게 시작된 퓨리오사의 기구한 팔자가 어찌 어찌 진행되어 엄마와 떨어진 소녀가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가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영화.

주인공은 당연히 퓨리오사지만 그 밖에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다. 퓨리오사의 엄마와 엄마 친구를 빼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드 맥스: 퓨리 로드>에 이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은 최상위 서열의 지도자들에서 말단 전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뇌라고는 없는, 지배욕와 파괴,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공생을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구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건 여성들 뿐이다. 지식인의 흔적은 '히스토리언'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긴 한데, 거세된 환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순수한 폭력과 광기,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드레날린과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는 올림푸스나 발할라 풍의 남신/영웅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 대표자인 디맨투스 역을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은 것은 너무나 적절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헴스워스의 열연이 펼쳐진다.

 

(가스타운에 벽화로 그려진 워터하우스의 '물의 님프들' 또한 이 남신들이 주도해 온 신화 비꼬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물의 님프들. 1815

개인적으로 <퓨리오사>에 매우 만족하지만, 아쉽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난 전작 <퓨리 로드> 때문이다. 아냐 테일러 조이도 인상적인 열연을 펼치지만 그 역시 샤를리즈 테론의 그림자 안에 있다.

 

하지만 <퓨리 로드>만으로 알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동기들, 특히 녹색의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열망과 좌절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퓨리오사>가 없이 <퓨리 로드>만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퓨리오사>를 만들어 준 조지 밀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두 축, 가스타운과 총알농장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시간 반 내내 쏟아지는 광기어린(!) 폭력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퓨리 로드>에서 최강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빨간내복'이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쉬우나, 시타델의 전투 트럭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옥토보스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결코 전편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79세인 조지 밀러는 과연 얼마나 더 이런 괴물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imdb에 따르면 이미 여섯번째 매드 맥스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 것 같은데(톰 하디의 차기작 중에도 이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문득 조지 밀러 버전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것이 보고 싶어졌다. 

 


P.S. 과연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퓨리 로드>를 다시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두편 다 안 봤다고? 서둘러라.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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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가 TV에 의해 타락했다. 나는 대사가 싫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야말로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도 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번 크게 망해 봐야 이런 말을 안 하겠지'라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듄2>를 보고 나니, 그는 자기 말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더군요.

<듄2>는 <듄>에서 하코넨의 추적을 피해 사막 깊숙히 달아난 폴(티모시 살라메)이 원주민이며 뛰어난 전사들인 프레멘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영웅이 되어 반격에 나서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배경은 전편에 이어 '모래의 행성'인 아라키스의 사막이고, 이 행성의 이름이 고대어로 '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토리는 일단 올라 타면 종점까지 외길로 달립니다. 이렇게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원작 소설 <듄>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65년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 이후로 나온 SF 소설이나 영화. 만화 중에 <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그만치 영화에 등장하는 설정이나 진행들이 자연스럽게 기시감을 줍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

물론 원작으로 따지면 소설 <듄>도 1962년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난번 <듄> 1편 때도 얘기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신 분이라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외부에서 온 잘생긴 전사가 용감무쌍한 유목민들을 지휘해 자원을 탐내는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무대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

fivecard.joins.com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빌뇌브는 어마어마한 사운드와 영상의 힘으로 극복해버립니다. 데이비드 린이 사막이 주는 고독, 절망, 공포, 광기의 느낌을 영상으로 승화시켜 영화라는 장르의 역사상 절대 잊혀지지 않을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면 빌뇌브는 거기에 첨단 과학과 상상력을 투입해 결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뒤지지 않는 영상미를 창조해냅니다.

더구나 한스 짐머의 사운드. 등이 둥둥 울리는 CGV 골드클래스에서 본 탓도 있겠지만, 이 비주얼과 사운드에 젖어들지 못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쉽게 감동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얼른 보세요. 물론 이 뒷부분에 언급하겠지만, 비주얼과 사운드에 비해 정작 스토리에는 꽤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영화는 꼭 보셔야 할 겁니다. 그만치 볼거리는 대단하다니까요. 

이후 이야기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습니다. 뭐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단순한데다 이미 나온지 50년이 넘은,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써먹은 스토리에 얼마나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용 전개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나머지는 극장 다녀 와서 읽어보시길.

원래 남의 리뷰는 영화 보고 나서 보는 겁니다.

 

 

1. 경이적인 비주얼

영화 초반, 폴을 찾아 헤매는 하코넨 추격대가 모래벌레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바로 빌뇌브의 말을 납득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런 걸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이었지. 이런 걸 보여줄 자신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 외에도 거울처럼 대지의 표면을 비치며 날아오는 황제의 우주선, 폴이 남부의 원리주의자들을 규합하는 대성회(?) 장면, 모래벌레가 황제의 대군을 덮치는 장면, 폴이 모래벌레의 등에 오르는 장면 등을 보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듄2>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영화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으로 봤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을 느꼈으니, 아이맥스로 보신 분들은 엄청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납작해진 스토리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 스토리 면에서 <듄2>는 꽤 감점 요인이 있는 영화입니다. 원작 팬들은 원작 팬들대로 불만이 많은 듯 한데(저는 원작은 펼쳐본 적도 없습니다만...), 영화는 시작한 뒤로 내내 마음이 바쁩니다. 다 보고 난 느낌으로는 폴이 모든 프레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까지 정도가 영화 한 편으로 적당하지 않나 싶고, 그 뒤로부터 황제가 직접 나서고 폴의 프레멘이 황군(!)과 싸우는 내용으로 다시 한편을 만들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빌뇌브는 그보다는 마음이 급했던 듯 합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완성본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뭔가 압축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대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의 경우에도 나올 때 마다 '리싼 알 가입'!만을 외치는 아주 깊이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거니 할렉(조쉬 브롤린)도 앞 사람이 계속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도 '지금 아니면 이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없어! 나도 몇 장면 안 나온단 말이야!' 라고 항변하듯 '진행을 위한' 대사들을 토해냅니다. 심지어 최강 빌런인 페이드 로타 하코넨(오스틴 버틀러)의 잔혹함과 강력함을 보여주려 힘을 준 흑백 콜롯세움 신도 별 임팩트 없이 '자, 이놈이 얼마나 싸움도 잘 하고 무지막지한 놈인지 보셨죠?' 하는 식으로 매우 무성의하게(진심입니다) 처리됩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넣은 장면이라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영화 내내, '원래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멋진 장면 여러개 보여드렸으니 다들 만족하시죠?' 라는 식의 진행이라고나 할까요. (유튜브로 2시간 짜리 영화를 15분에 압축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진행에 별 불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식이다 보니, 엄청난 스타들이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 스타들에게 뭔가 연기력을 펼칠만한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라서 뭔가 마구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와 젠다이야가 빛을 발한다는 것이 위안거리. 특히 젠다이야는... 각도를 달리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3. 영웅은 왜 해로운가... 살짝 겉도는 메시지

주인공 이야기를 좀 하자면, 살라메가 연기하는 폴은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듄2>에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폴-무앗딥-아트레이데이스는 자신이 영웅이 될수록 전 우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을 걱정하는데, 솔직히 프레멘들에게 이런 고민은 무의미합니다. 이미 하코넨이 스파이스 채취를 위해 프레멘을 억압하고 나선 이상,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아무 미래가 없기 때문이죠. 

역사와 전설을 장식하는 그 수많은 영웅들이 대체 다수 인류에게 득을 끼친게 뭐냐...는 <듄> 시리즈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압제에 맞서 살아 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야 과연 이 영화가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듄> 시리즈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그 웅대한 세계관과 심오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빌뇌브의 <듄> 시리즈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느낌을 줍니다.

결국 빌뇌브는 원작에 충실할수록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갖고 애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 이렇게 기형적으로 스토리는 찌그러뜨리고 비주얼과 사운드를 강조한 영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듄> 시리즈 원작이 나온지 6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카리스마를 무기로 한 막무가내형 독재자들이 여기저기서 광신도같은 추종자들을 앞세워 팬덤 정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프랭크 허버트의 통찰이 낡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듄> 1편과 이번 <듄2>를 비교한다면 저는 1편의 승.

물론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듄2>는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큼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2시간45분 동안 그 그림만 보고 있어도 표값은 아깝지 않을 정도.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한 큰 스크린에서 보시길. 그런데 3편이 나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P.S. 아주 오래 전,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은 '국내 유일의 70mm 수용 상영관'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대략 5~10년에 한번씩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다시 개봉하며 큰 스크린의 위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IMAX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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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남부 산악지대의 어느 외딴 산장. 작가 부부와 시각장애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갑자기 남편이 죽은 채 발견됩니다. 집에서 눈밭으로 떨어진 듯한 시체. 경찰이 출동해 수사한 결과, 단순 사고나 자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경찰은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외딴 집. 용의자는 1명. 과연 그는 범인인가, 아닌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해서 관심을 느끼지 않을 관객들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야구로 치자면 8회까지 0-0으로 진행되는 치열한 투수전이라고나 할까요. '야구라면 8대7 정도로 진행돼야 재미있는 경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긴장감이 있습니다.

 

영화 <추락의 해부>도 마찬가지. 막상 수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그저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아내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산드라의 지인인 변호사 뱅상(스완 아르라우드)은 산드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재판 방청을 허락받은 11세 소년 다니엘이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은 분명히: 이 영화는 누가 범인인지 밝히고자 하는 미스터리 풀이 영화가 아닙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가 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치열한 법정 공방, 집안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독일인 아내, 당연히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재판, 양성애와 불륜, 표절과 아이디어 제공, 미성년자의 인권과 '선택'. <추락의 해부>의 초반 20분은 다소 지루하게 진행됩니다만, 그 뒤로는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공방이 펼쳐집니다. 상황은 치밀하고, 대사는 불꽃이 튑니다.

제목에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라는 말을 넣었는데, 과장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후 해괴한 멀티버스 영화나 젠더 PC를 앞세운 뻔한 영화들만 보다 이런 영화를 보니 절로 몸이 스크린 쪽으로 기울게 되더군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자신이 좋은 감독이면서 그보다 앞서 훌륭한 작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줍니다.

 

배우들 중엔 산드라 휠러와 변호사 스완 아르라우드의 연기가 특히 뛰어납니다. 휠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는데 수상을 감히 예상해 봅니다. 그밖에는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감독상 후보에 올라 있네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프랑스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프랑스 국내에서 120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이 숫자가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숫자일 수 있겠으나, 일단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고, 또 최근에는 빈대 공포 때문에 아예 극장을 가지 않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합니다. 저 정도 숫자로 이 영화는 관객의 '빈대 공포'를 극복하게 한 작품으로 꼽힌다는... 프랑스에서 엊그제 온 지인의 증언입니다. 

아무튼 2023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해서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강추. 

그리고 이 아래는 스포일러를 감내할 분들만 보시길.

근데 다시 보니 별 내용은 없네요. 

 

1.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산장 1층에서는 산장으로 찾아온 한 학생과 산드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유명 작가인 산드라를 인터뷰하러 산장까지 찾아온 여학생. 와인을 마시며 손님맞이를 하는 산드라의 태도가 어쩐지 좀 과도한 호의를 보인다 싶기도 한데, 갑자기 위층에서 엄청난 볼륨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누가 봐도 아래층에서 나누는 대화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혹은 대화를 고의로 중단시키고 싶다는 뜻의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좀 별난가 보네' 하게 되지만 결국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뒤로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2. 정말로 프랑스 법정은 저런가 싶을 정도로 감정 과잉의 법정 묘사가 독특합니다. 프랑스 사법제도는 잘 모르지만, 검사는 너무나 감정적으로 추론과 정황증거를 통해 산드라가 범인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현장에서는 범행에 사용된 흉기(검찰은 사뮈엘이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고 주장.

반면 산드라 측은 떨어지면서 머리가 손상된 것이라고 주장)도 발견되지 않았고, 당연히 목격자를 비롯해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근거로 계속해서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산드라에게 그 동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검찰 측의 주장은 한국이라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들로 보이는데(...혹시 아닌가요?), 심지어 판사까지도 묘하게 검사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한 기색을 보입니다. '프랑스인 남편을 죽인 독일 여자를 심판하는 프랑스 법정'의 모습이 묘하게 도드라집니다.

산드라 휠러

3. 이런 점들을 고려한 변호사는 법정에 설 산드라에게 증언 훈련을 시키면서 '이런 대목은 반드시 프랑스어로, 본인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보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배타성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 나라 사람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게 되긴 하는데, 같은 유럽 국가인 독일 출신 여성이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과연 제3세계 사람들은 저 나라에서 '공정한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4. 당연히 영화는 산드라가 범인일까 아닐까에 대한 공방으로 시작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사실 그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제가 됩니다. 전날 산드라와 사뮈엘이 펼친 싸움의 녹음(남편 사뮈엘이 의도적으로 산드라를 도발하고, 그 내용을 녹음한 것으로 보입니다)을 들어 보면, 이들 부부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정말 죽이고 싶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저 정도는 부부가 여러 해를 붙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길법한 스트레스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산드라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 한, 절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질 수 없겠다는 것이 더 선명해집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자는 영화가 아닙니다.

 

5. 즉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산드라가 만약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것은 법리나 규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저 복수와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의한 처단일 뿐입니다. 트리에 감독은 이런 상황을 통해, 합리성의 가정 위에 건설된 현대 사회에서 수시로 머리를 드는 편견, 혐오, '안'과 '밖'의 구별(매우 공교롭게도,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공감'과 매우 밀접한 감정입니다) 들을 이 영화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드라가 양성애자인 것, 산드라의 불륜, 산드라가 남편보다 성공한 작가인 것 등등이 모두 산드라의 목을 옭아매는 상황입니다.

6. 어찌 되었거나 산드라의 판결이 영화의 결말이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트리에 감독은 사건의 키를 쥐게 된 11세 소년 다니엘의 입장을 부각시킵니다. 다니엘의 '선택'이 산드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상황. 아동보호를 위해 나온 보모는 '법정 증언을 듣고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다니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결정'이라고 말해줍니다.

이 결정이라는 말은 묘한 느낌을 남깁니다. 당연히 엄마를 집에 데려오느냐, 감옥으로 보내느냐에 대한 결정인데,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가 아니라 '결정을 해'라고 한 것은, 다니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 지를 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저에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다니엘은 이 말을 듣고 아주 상식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즉 아빠를 잃은 11세 소년에게 현재의 상황이 그나마 남은 엄마와 함께 살 것인지, 엄마도 떠나 보내고 고아원에서 살 것인지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마지막 법정에서 다니엘이 증언한, '개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 아빠와 나눈 대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마지막 밤에 다니엘이 상상한 것인지 관객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다니엘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다른 기억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 기억들 중에서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유리한(즉 다시 말해 아빠가 어느 정도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기억을 선택한 것이 바로 다니엘의 '결정'이라는 것이죠. 다니엘이 말하지 않은 다른 기억들 중에는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불리한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매우 많은 감정과 표현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라서.

 

아무튼 다니엘의 마지막 주장은 매우 정연합니다. "이 재판은 결국 '왜?'에 대한 것 아닌가요?" 다양한 설명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중 가장 선명하고 단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 부모가 다 작가다 보니 참 영민하게 자랐군요, 다니엘. 

칸 영화제 수상. 좌측 2번이 쥐스틴 트리에.

7. 개인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는 이 '다니엘의 결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 각자의 진리, 각자의 원칙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고 진실을 파악하는 일에 대체 왜 그렇게 에너지가 낭비되어야 하는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텐데. 정의? 공정?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훨씬 더 중요할텐데. 

어쩌면 이런 트리에의 시선이, 지난 약 150년 간 다소 '좌경화된 지식인'들의 리더십이 지배했던 프랑스 사회, 혹은 유럽 문명에 대한 냉엄한 성적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8. 영화 내용으로 보면 산드라와 변호사 뱅상은 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고, 재판을 통해 산드라는 뱅상에게 강한 신뢰를 넘어 남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듯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키스할 수 있는 거리에서 딱 멈춰버립니다. 예전에 뭔가 감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도 무슨 이유가 있을 듯한.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뱅상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다 해도, 산드라에게는 재판 과정이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신의 밑바닥을 다 드러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보여준 남자와 뭔가 다시 시작해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시각으로는, 뱅상의 입장에서는... 산드라를 무죄로 풀어 준 것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즉 뱅상이 키스하지 않는 것에는 재판 과정에서 뱅상은 산드라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감춰져 있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다 제 생각. 

 

9. 그런데 생각해 보니 키우던 개를 생체 실험 도구로 삼다니... 이런 나쁜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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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햇동안 본 영화들 중 좋았던 영화를 꼭 10편만 추리기 어려웠던 해가 더 많았습니다. 한국영화 10편과 해외영화 10편을 따로 꼽아야 하나 생각해 본 적도 있을 정도로. 그런 만큼, 올해같은 해는 정말 없었습니다. 10편을 채우기가 너무 힘든 해가 올 줄은. 

물론 영화제들은 여전히 좋은 작품들에게 상을 안겼고 평론가들은 역시 걸작들을 꼽았지만 늙고 낡은 탓인지 이제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더군요. 온갖 영화제들이 앞다퉈 '의미있는' 작품들에게 '의미있는' 시상을 하려 애썼지만, 재미는 없고 의미만 있는 영화가 상을 받은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공정성/젠더/소수인종/소외자 이야기는 이제 그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면 탐구도 이제 그만. 멀티버스/슈퍼히어로도 이제 그만. 의미 의미 의미 지겨워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재미만 있으면 관객들은 다시 극장을 찾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퍼스트 슬램덩크

굳이 줄거리를 설명해야 할까.... 백호의 빠른 성장으로 전국 대회 진출에 성공한 북산고. 1라운드를 신나게 통과하지만 역대 최강 산왕공고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1년 전 우승 멤버가 셋이나 주전으로 남아 있는 산왕. 아무도 산왕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겁없는 북산 5인조는 '우리가 악역이 되자'며 달려든다.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기엔 두권 분량)인 산왕전을 한편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하 드라마의 허리를 뚝 잘라냈으니 그 앞의 서사나 각 인물의 캐릭터를 모르는 관객들에겐 다소 뜨악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잘 만들어진 이 영화 덕분에 오히려 슬램덩크를 몰랐던 세대가 만화 독자로 다시 유입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바람이 있다면.... 세컨드와 서드도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

 


화이트 타이거 (넷플릭스)

21세기에도 여전한 인도의 계급 사회. 최하 계층의 남자들은 그나마 좋은 직업인 '부잣집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부잣집 도련님은 "신분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심일지. 결국 사고가 터지고, 모든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난다.

라민 바르하니라는 감독의 이름은 영화를 다 보고 알았다. 인도 감독인가 했더니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란계 감독. 이 영화 이후에 찾아 본 <라스트 홈 (99 Homes)>도 만족스러웠다. 이것이 아라비안 나이트 때부터 다져진 페르시아의 스토리텔링 실력인가. 문득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떠올랐다.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의 속칭 '재난 3부작' 중 세번째. 큐슈 작은 도시에 사는 여고생 스즈메가 어느날 다른 차원을 여는 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일본을 보호하는 다이진이 사라지면서 그를 회복하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서쪽 끝에서 거의 동쪽 끝까지 일본을 종단하며.

<너의 이름은>보다 <날씨의 아이>에서 놀라운 성취를 느꼈기 때문에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더 한층 발전을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여 살짝 실망. 하지만 그 자체로도 좋았다. 그들만의 스토리를 현대적인 이야기로 바꿔 놓는 일본의 기법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보다 다이진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건 왜일까. 

스즈메의 문단속, 그런데 다이진은 불행해도 되는 걸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오펜하이머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순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을 통한 가공할 에너지 분출을 무기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쟁을 끝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나아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앨 수 있는 무기라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개발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 개발 작업의 총 지휘자인 천재 오펜하이머는 그 폭탄이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난 뒤...

그의 자서전 제목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너무나 적절한 명명이라는 생각.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의 관심은 핵무기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오펜하이머라는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본 <오펜하이머>는 '어느 순진한 관종의 몰락기'. 

오펜하이머, 관종의 추락에 대한 그리스 비극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오펜하이머, 관종의 추락에 대한 그리스 비극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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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7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이미 할 얘기를 해 놓아서 별로 더 보탤 얘기가 없음. 아무튼 이 냉엄한 현실에서 과연 슈퍼히어로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리매김이 어느 영화보다 돋보였다.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역대 최고의 MI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 역대 최고의 MI

1.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추구할수밖에 없다는 낙관, 식량과 자원의 부족은 기술의 발달이 모두 해결해 줄 거란 낙관,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통제 불가능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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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역시 굳이 더 보탤 얘기가 없다. 후배를 키우려면 토르나토레 같은 후배를 키워야.

토르나토레,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혼을 소환하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토르나토레,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혼을 소환하다

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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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보고 리뷰를 쓸 때만 해도 이렇게 뒷심이 강한 영화일줄 몰랐다. '그래도 500만은 하겠지'가 가장 희망적인 기대였는데. 과연 어디까지 달려갈지.

서울의 봄, 세상에 영웅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서울의 봄, 세상에 영웅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

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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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의외로 별로라는 평이 너무 많아 놀란 영화. '이순신이 왜 끝까지 전쟁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순신을 전쟁광처럼 그렸다' '이순신이 박정희냐("...난...괜찮다..." 때문인 듯)' 등등의 평.  당시 이순신의 입장이라면 이게 과연 전쟁의 진짜 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이 관객에게 제대로 어필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만 이해해도 이런 몰이해는 없었을 것 같은데. 더 친절했어야 하는 것인가.

노량, 압도적인 피날레, 시리즈의 최고작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노량, 압도적인 피날레, 시리즈의 최고작

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과 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 지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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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이젠 그도 '내가 어쩌다 영화를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냐 하면'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수퍼8'이 그의 유년기 이야기라면 이건 청소년기 이후의 성장기인 셈. 이제 노장이 된 스필버그도 '엄마 이야기'를 할 때면 조금 자신에게 너그러워 질 필요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스필버그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잘 들었고, 자신의 영웅을 되살려낸 마무리도 아름다웠다.

약간의 느슨함이 느껴지지만, 이 또한 추억의 이름으로 충분히 이겨낼 만 했다. 물론 평년의 기준으로 이 영화가 정말 한 해를 대표하는 영화에 들만 하냐고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평생의 즐거움에 대한 예우로라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우리 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작품을 보러 가며 문득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이 생각났다. 80대에 접어든 노장의 신작을 볼 수 있는 기회(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의 극장 정식 개봉은 허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에 꽤 먼 어느 대학 교정까지 찾아갔더랬다. 그러나 보고 난 소감은... '세계 영화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거장의 은퇴작이 고작 이런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라는 비참함. 

구로자와가 유작을 예감하고 만든(물론 그 뒤에도 몇편 더 만들었다) 작품인 <꿈>에서 유년기의 꿈으로 퇴행하듯, 미야자키 역시 은퇴를 공언했던 <그대들...>에서 유년기의 꿈 속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행히 그 꿈은 솔직했고, 어지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전의 작품들과 같은 흐름이라 좋았다. 각각의 장면들이 무슨 의미를 띠고 있고, 그 전의 어떤 작품들과 어떻게 이어진다는 어지러운 주석들도 필요 없어 보인다.

어쩌면 '나를 따라하는 자는 죽는다', 이 말 한마디가 하고 싶었는지도.

 

그리고 제작 연도 때문에 조금 애매해서 따로 언급하는 영화.

울프 콜 (The Wolf's Call, French: Le Chant du loup, 2019)

사실 2023년에 본 영화중 당당히 베스트에 올릴 만한 작품이었지만 2023년에 2019년작을 꼽는 것은 좀 심하다 싶어 번외로 뺀다. 냉전시대의 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핵 전쟁 억지력, 즉 '최후의 보복'인 SLBM 장착 핵 잠수함의 이야기인데 길게  설명하는 것 보다 안토닌 보드리 감독의 프랑스 판 <크림슨 타이드>라고 요약하는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물론 <크림슨 타이드>가 수작이었던 만큼, 비슷한 소재를 다룬 <울프 콜>이 긴장감 면에서 그보다 못했다면 아예 개봉과 함께 묻혀 버렸을 것이 당연한 상황. 하지만 반대로 <울프 콜>을 본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크림슨 타이드>를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오마 샤이, 마티유 카소비츠 등의 얼굴도 반갑다.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7)

이런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넷플릭스를 통해 본 영화. 과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실재했던 사건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상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음모설을 뿌리며 먹고 사는 기생충들이 존재한다. 한 음모론자가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는 여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영국 법에 따라 여교수는 홀로코스트가 실재했던 사건임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음모설, 가짜 뉴스, 가짜 역사...에 진짜 지식인들이 맞서 싸우는 방법을 보여주는 실무 교과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 다혈질 여교수 역의 레이첼 와이즈보다 그 주위를 둘러싼 냉정한 변호사 군단의 연기와 역시 담담하기 짝이 없는 믹 잭슨의 연출이 돋보인다. 

 

기타:

신작들에 실망하고 옛날 영화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냥 봐 줄 수 없는 영화들도 많았지만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바르샤바의 밤(a.k.a 장군들의 밤, The night of the Generals, 1966)>과 조셉 L 멘키위츠의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untess, 1956)>이 대단한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개인적으로 멘키위츠는 <지난 여름 갑자기>만으로도 최고의 감독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 왕년의 일본 액션 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陸軍中野學校, 1966)>도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였다(이 영화를 베낀 몇편의 한-일 영화들이 떠올랐다). 속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도 좋았지만 내게는 스가와 에이조 감독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野獣死すべし, 1959)>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역시 내게 이 시절 최고의 배우는 나카다이 타츠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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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번을 단 포인트가드 중 유명한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피닉스의 전설 케빈 존슨이 송태섭의 모델로 꼽혔던 것은 그리 크지 않은 키와 함께 7번이라는 번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2. 1m68이라는 설정신장때문에 먹시 보거스나 스퍼드 웹이 모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송태섭의 작화상 신체 비율은 이 미니 가드들의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왕년의 찰스 바클리마저도 길들일수 있었던 불같은 리더십을 보면 역시 케빈 존슨... 

2. 발군의 스피드, 넓은 시야, 패싱 감각, 호승심, 리더십, 그리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슈팅력이 특징인 송태섭. 하지만 팀의 주축인 센터와 3점 슈터가 졸업하는 이상 새 팀에서는 주장으로서 득점원으로도 잠재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선수. 그 송태섭의 시각으로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다는데, 가슴이 뛰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 가문 섭자 항렬의 3대 인물이 송태섭과 막걸리 장인 송명섭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북산 5인방이 하나씩 스케치에서 인물로 바뀌며 걸어나오는 인트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애니메이션 상의 경기 묘사에서 선수들의 동작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괜찮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4. 팬들 사이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피어스>라는 단편이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영화 <퍼스트 슬램덩크>는 처음엔 마치 <피어스>를 따라갈 듯 하다가... 결국은 전혀 다른 길로 간다. 



5. 하지만 문제는 송태섭이 주인공(?) 인데도 불구하고, 배경으로 계속 삽입되는 개인사(송태섭의 성장기)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뒤로 갈수록 그 성장기가 경기의 긴박감을 심하게 떨어뜨린다. 이 부분 매우 아쉽다. 

6. 어쨌든 북산이 이긴다(...스포일러인가?). 당신이 듣고 싶어 했던 그 주옥같은 명대사들도 상당수 나온다. 그리고 강백호의 클라이막스는 정말... 와... 멋지다. 역시 주인공은 강백호. 눈물이 괸다. 



7. 이러니 저러니 했지만, <퍼스트 슬램덩크> 소식을 듣자마자 '어 이건 봐야지' 생각한 사람은 무조건 달려가 볼 것. 이건 '잘 모르는데 요즘 핫하다니까' 볼 작품은 아니다. 이 극장판은 어디까지나 <슬램덩크>의 짤 한장만 봐도 그 장면의 대사가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그 밖의 사람들은... 모르겠다. 보든지 말든지. 

8. 자막으로 봤는데 더빙은 어떨지 궁금. 자막의 이름 표기는 모두 한국식이라 위화감은 없다. 단지 강백호 역의 일본 성우가 좀 심하게 아저씨 목소리... (참. 극장이 아저씨 판일줄 알았는데, 80% 이상이 10~20대라서 놀랐다) 

9. 아쉬움: 변덕규 안 나옴(무 깎는 신 매니아로서 매우 안타까웠음). 

10. 기왕 <퍼스트 슬램덩크>로 시작했으니 텐스, 트웬티스까지 극장판 오리지날로 계속 이어주십쇼. 

이노우에 사마. 오래 오래 사세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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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명량>과 <한산>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량>은 지나치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한 전개가 좀 부담스러웠고, <한산>은 '전투'라는 사건을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흐릿해져버린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노량>은 달랐다.

<노량>은 1598년 12월16일 밤부터 그 다음날까지 벌어진 해상 전투,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혈투를 글자 그대로 입체적으로 조명한 영화다. 이전의 두 작품에서 다소 평면적인 시야가 아쉬웠다면, <노량>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각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특히 외모 면에서) 생각이 들었던 김윤석의 존재감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압도적인 절제미'라고 부르고 싶다.

그 밖에도 해전의 스케일, 전투의 박진감 모두 전작들에 비해 진일보했다. '전투 한복판의 정적' 신, 전장의 북소리 신 역시 그 섬세함을 모두 칭찬하고 싶다. 특히  '정적' 신은 전투에 참가한 3국 병사들의 시선과 이순신의 시선, 이순신의 마음 속을 한 흐름에 담아낸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 

혹시라도 세 편 다 보는게 뭔가 좀 부담스러워서, 혹은 <서울의 봄>을 보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또 극장에 가는게 부담스러워서 관람을 꺼린 분들이라면 어서 극장으로 가시길 권한다. 

1. 노량해전은 어떤 전투일까. 한산해전이 희망 없는 전쟁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영웅의 대업을, 명량해전이 궤멸지경이었던 조선 수군을 기적처럼 되살린 영웅의 재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노량해전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전이자 영웅의 최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영화 <노량>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다른 두 전투와는 사뭇 다른 이 전투의 의미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량해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영화 속 진린의 대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가 그리 무리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1598년 12월. 이미 조선과 명, 그리고 토요토미 사후의 일본 조정은 일본군의 철병을 전제로 한 종전에 합의한 상태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적에겐 항자불살 降者不殺의 아량을 베푸는 것이 고전적인 동양 무인의 대의. 게다가 승리가 담보되지 않은 출전 명령을 거부하다가 졸병으로 강등된 적도 있는 장군 이순신이, 그동안 치열한 전투에 시달렸던 휘하 장병들을 불필요한 전투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설사 전투를 벌인다 해도, 적을 적당히 도망치게 내버려 둔 뒤 추격하며 전과를 올리는 것이 병가의 상식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순신은 왜군과의 화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그 결과 정면 대결이 펼쳐지고, 엄청난 전과를 거두기는 하나 자신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여기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만약 이 질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노량해전이라는 이상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영화 <노량>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대체 왜'에 충실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2. 영화에선 몇가지 소재로 설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아산에서 가족들을 돌보던 세째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인데, 이건 영화 속에서도 진린의 추정일 뿐, 이런 개인적인 동기로 수많은 장병들을 죽음의 전투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충무공의 캐릭터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는 두번째, 7년 동안 죽어간 동지들과 희생당한 백성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훨씬 와 닿는다. 물론 이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세번째,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일 때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송희립에게 다시 한번 잘라 말한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수는 없다. 열도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확실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제대로 끝냈다고 할 수 없다"고. (어쩐지 이 말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루쉰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 <노량>에서 이 말의 의미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이순신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결국 이 전쟁을 그대로 끝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은 임진왜란(1592)와 정유재란(1597)이라는 이중의 전쟁이다. 전쟁 초기. 일본 수뇌부,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이 조선에 출병한 이상 이 전쟁을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주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되며 왜군들은 1596년까지 서서히 철군을 진행했지만, 이 화의 조건의 구체적 내용이 상당부분 사기로 밝혀지며 히데요시는 격분하고, 1597년 다시 대규모의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한다. 이것이 정유재란. 

이미 정유재란을 겪어 본 이순신과 조선의 일선 지휘관들이 과연 1598년 12월의 후퇴를 영구적인 후퇴라고 믿었을까.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 과연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부분이 핵심인데, 영화 <노량>은 이런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는 하나, 아쉽게도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4.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를 통해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 전국 다이묘들이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느라 조선 재침공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유성룡이나 윤두수 같은 정치인들이라면 다양한 정보를 조합해 재침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당시의 이순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입장이라면,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산산조각을 내고 감히 재침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피해를 주는 것만이 확실히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군사들과 백성들, 그 가족들이 다시 전쟁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비록 그 마지막 전투에서 휘하 장병들이 죽고 상하고,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5. <노량>은 여기에 보태, 그렇다면 일본 측 장수들은 어째서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순천 왜성에 갇힌 고니시야 탈출하지 못하면 바로 끝장이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구조에 어째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좀 궁금하다. 

<노량>이 내놓은 답은 자존심.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은 일본 전국시대에도 용명을 떨친 강병을 갖고 있었고,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바로 그 사람이자(영화 속에도 소개된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최대 승리라 할 수 있는 사천왜성 공방전에서 명군에 거의 1만 가까운 사상자를 낸 명장이었다.

시마즈가 노량해전에 목숨을 건 실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영화 <노량>에서는 고니시가 시마즈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공까지 세운다면 일본으로 돌아가도 감히 누가 당신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시마즈의 자존심과 자신감이라면, 충분히 물만한 떡밥이다.

사실 이순신이 왜군의 재침을 우려했다면, 반대로 고니시는 이순신을 앞세운 조명 연합군의 열도 보복 침공을 걱정했을 수도 있다(이것 역시 실제 역사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지만, 당시 왜군 다이묘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일본군 최강의 카드인 시마즈 군을 동원해 이순신을 공격하고 자신이 살 길도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량>은 이순신, 고니시, 시마즈에게 목숨을 걸고 노량 바다에 뛰어들 동기를 마련해준다. 지금까지의 <한산> <명량>은 물론, 거의 모든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입체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런 잘 설계된 대립이 대다수 관객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부분의 대사에 좀 아쉬움이 있다.

 

6. 또 하나의 아쉬움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순신 관련 드라마나 영화에서 진린과 이순신은 거의 버디 무비의 두 주인공처럼 묘사되곤 했다. 이것은 실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인데(진린은 일찌기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충절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다), <노량> 제작진은 이런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서였을까. 진린/등자룡과 이순신의 매력적인 티키타카를 기대했던 관객으로서 좀 아쉽다.

물론 이 글 시작 때 말했듯, 이런 사소한 아쉬움에 비해 <노량>은 매우 세련된, 멋진 영화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뭘 하고 있나. 빨리 예매를. 

 

이후는 다소 뜬금없는,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들. 

P.S. 1. 고니시의 사신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리마(이규형)의 갑주가 임진왜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지 않았던 스페인풍의 남만동구족 갑옷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포르투갈과의 교류가 많았던 고니시의 군대이니 고위 장교인 아리마는 포르투갈 수입 갑주를 입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긴 하다.

P.S.2. 이순신의 조총 피격 장면은 어쩐지 어린시절 본 김진규 주연 <난중일기(1978)>의 같은 장면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한민 감독도 이 영화를 기억할까. 

P.S.3. 이면은 사망 당시 20세 추정. 그런데 굳이 여진구에게 덕지덕지 수염을 붙일 이유가...?

P.S.4. 여담이지만 노량해전에 대한 일본 측 해석 중에는  '일본군이 꽤 큰 피해를 입었다 해도 어쨌든 고니시의 일본 귀환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했고, 조선 최고 사령관 이순신을 전사하게 하는 전과까지 세웠으니 이것은 승리한 전투'라는 시각이 있다. 

P.S.5. 패전하고 후퇴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분하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같은 대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약 300년 뒤 시마즈의 후예인 사츠마의 유신지사들은 정한론과 한일합방의 주역이 된다. 이순신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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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잘 하란 말이야
 
똥오줌 못 가리는 문과출신의 OPEN AI 사태에 대한 관전기.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이며 회사의 리더인 샘 알트만을 해고시킨 것까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이사회는 주주들이 아니라 사회 공익단체 간부 같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결국 잽싸게 나선 마이크로소프트가 알트만을 채용하겠다고 하고,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선다고 하고, 결국 알트만이 OPEN AI 대표로 복귀하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지켜봤다.
1. 샘 알트만(올트먼?)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관둔다고 500명이 따라서 관두겠다고 하는 일은 엄청난 일.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한폭의 드라마. 대체 평소에 어떻게 해줬길래?
2. 일리야... (이름이 길어서 못 외움. 수츠케버)는 연구는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인간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반란의 수괴가 하루만에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3. 이게 결국은 AGI로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세상에 인공지능 연구하는 회사가 OPEN AI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 회사의 CEO를 날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4.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게 목표였다면 일단 크게 울린 셈. 하지만 무슨 수로 저 열차를 세울수 있을까.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AGI를 나쁜(놈들이 키운) AGI보다 빨리 개발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샘 알트먼과 일리야 수츠케버
문득 또 생각. 저 일리야...님이 "인간이 평생 만나는 정보량을 단어 수로 계산하면 약 10억개, 아주 넉넉잡아 20억개라고 쳐도(20억개라면 약 6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단어씩 보는 셈), 이건 AI가 학습하는 정보량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양"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최소한 초기에는 오염된 정보/ 가짜 정보/ 틀린 정보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옆에서 '편견(일부러 이 표현을 썼습니다)'을 넣어 줘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 지나 그것도 결국 일부의 의견이라는 걸 다 아신, 통계학적으로 다음 어순에 들어갈 단어 찾기를 지나, 논리적 추론도 지나, 예측과 분석을 다 하게 되고, 진짜 자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신, 정말 최고의 현자가 되신 AI님에게는 이 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댁이 보기에 '진정 인류를 위하는 길'이란 어떤 길인가요?"
이 질문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더 분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그런데 문득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XX이야?')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질문은 다른 분이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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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오타니 다큐, <오타니 쇼헤이: 비욘드 더 드림>을 봤다.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매우 실망.
 
이런 다큐를 만들 생각이라면 과연 시청자는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지구적 스타가 된 오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궁금해 한다. 대체 오타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오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시절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괴물이 나왔을까. 대체 어떤 훈련을 한거지? 야구 과외라도 했을까?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오타니도 친구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려서도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완성된 인간이었을까? 고교시절 같은 팀 동료들은? 니혼햄 시절 동료들은? 과연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첫사랑은? 
 
 
그렇다면 이 다큐에는 오타니의 초딩 동창, 고교시절 야구부 동료, 은근히 지켜본 같은 반 여학생, 이와테 지역에서 맞붙었던 다른 학교 라이벌이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 다큐에는 부모 형제는 물론, 과거 니혼햄 동료나 현재 엔젤스 동료 한명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야구계의 전설들이 나와서 오타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타니가 만나본적도 없는 마츠이 히데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와서 대체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오타니가 고1때 만들었다는 야구인생 계획표. 몸 만들기, 컨트롤, 키레('구위'라고 누군가 해석해 놨던데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시속 160km,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 8가지를 단련해서 고교 졸업때에는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는 것(일본은 여러 구단이 한 선수를 동시지명할수 있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이게 고1 소년이 세울수 있는 계획일까. 아무리 봐도 외계인.
 
(그런데 왜 타격에 대한 얘기는 없을까. 그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ㅎ)
 
 
그 밖의 멘트들은 역시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들이라 재미라곤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좀 섬뜩할 뿐. 오타니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나랑은 다른 인간이야. 나도 야구를 좀 잘 한 편이지만 나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면서 낄낄 웃은 C.C 사바시아에게 훨씬 호감이 가더라.

어쨌든 오타니 다큐는 누군가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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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김오랑 중령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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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던 천재. 금수저. 잘생긴 얼굴. 유혹의 재능. 섹스에 대한 집착.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영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과연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이니 스포일러가 있을까 싶지만, 감상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분은 그냥 여기서 멈추길.  

내 느낌대로 정리하자면,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어느 관종의 추락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주목을 즐거워하고, 항상 어떤 자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원하고, 더 큰 주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관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는 매우 강력한 '관종'의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어느날, 역사적인 폭탄 제작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연히, 관종답게,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 참여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 한다. 물론 충분히 자격도 있다. 그리고 미친듯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과를 냈다.

 

과연 이 폭탄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많은 과학자들이 -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 이 폭탄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에 대해 많은 기록은 ‘오펜하이머는 본보기로 실제 사용을 해야 전쟁 억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폭탄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을 대략 뭉그러뜨리는 정도 선에서, 실제 투하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다른 방법을 통한 인간 살해에 비해 딱히 더 부도덕할까?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이미 도쿄에선 몇 차례의 폭격에 의해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한 것보다 많은 사망자 수다. 만약 일본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면,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폈다면 수만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고, 일본인 사망자는 수십만, 수백만에 달했을 것이다. 핵폭탄 투하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펜하이머에게는 사용을 지지하는 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이미 일본의 패배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고, 그렇다면 미군을 포함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성과가 그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좋은 조건일테니까.

 

폭탄이 무사히 실험을 마치고, 군인들이 두 개의 폭탄(아마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일)을 로스 알라모스로부터 외부로 반출하는 시점. 여기서부터 놀란의 카메라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의 오펜하이머를 쫓기 시작한다. ‘저 폭탄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는 물론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이어 폭탄 투하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오펜하이머의 실망은 극에 달한다.

물론 언론은 ‘전쟁 종결자’ 오펜하이머를 놓치지 않고, 그는 명성의 최절정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을 방문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관종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낸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기대했을) 공감이나 동정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다. “폭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기서 알기나 할 거 같은가?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나야.” 두 개의 핵폭탄을 날려 전쟁을 끝낸 사람은 난데 어디서 일개 과학자 따위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 하느냐는 불쾌감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양심적 고뇌를 시작한’ 오펜하이머와 ‘인명 따위 관심없는 권력자’ 트루먼의 대립 같지만 사실 내게 보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건 관종과 관종의 대결이다(...문과와 이과의 대결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밀린 오펜하이머는 어색하게 퇴장한다. (문과 만세!)

대개의 관종들은 선량하고 나이브하다. 관종일수록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대체 어떻게 그 호의 뒤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관종의 패턴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자신을 고의로 음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을 가까스로 끝내고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체제 경쟁을 시작한 미국의 여론 앞에선, 이런 노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심쩍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소폭탄을 개발해선 안된다’는 의견은 ‘원폭은 되고 수폭은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소련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데’에 부딪히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UN이 공동관리하게 하자’는 의견은 ‘소련과 핵무기를 공유하자고?’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화상으론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오펜하이머가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영화에 따르면 스트로스의 공작에 의해) AEC에서 밀려난 것은 1954년,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을 받고 미국 상원이 그의 지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54년은 아직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던 시절이지만 그 뒤로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꼈고, 1959년이면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을 낳아 여론을 반전시킬 시기였다.

 

심지어 놀란의 영화상으로는, 오펜하이머는 ‘냉전의 시대에 용기있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해서’가 아니라 ‘스트로스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가 보복당해’ 공직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가 나라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고, ‘지나친 관종이라 주위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쨌든 70여년 동안 인류는 용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 데 성공했고, 이건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놀란은 거기에 오펜하이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인류가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관종끼 강한 천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소위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하는지에 관심 있어 보일 뿐.

너무 길어졌다.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영웅의 추락을 그린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오펜하이머의 추락 원인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오만과 공명심,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시, 억제할 수 없는 ‘관종’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몰락한다. 성격을 중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측면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탁월한 영화다.

3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핵 폭발 실험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킬리안 머피에서 시작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먼, 조쉬 하트넷,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케네스 브라나, 라미 말렉, 한때 넥스트 디카프리오였던 데인 드한까지... 단역까지도 올스타급으로 채운 라인업은 중국 영화 <건국대업>을 연상시켰는데, 현재 할리우드에서의 놀란의 위상을 보여주는 면모. 

아무튼 명작이지만, 두번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P.S.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는 바가바드 기타 11장32절 머릿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후로 수많은 힌두교 연구자들이 이 말이 적절하게 인용된 것인가에 의문을 던져 왔다.

이 말은 인도 신화에서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이며 무적의 용사인 크리쉬나가 자신의 사촌이며 동조자인 영웅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와 같은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데, 크리쉬나가 파리 죽이듯 인간 전사들을 살상하는 것을 보고, 전능한 신에게 대체 싸움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대답한다.

 

The Supreme Lord said: I am mighty Time, the source of destruction that comes forth to annihilate the worlds. Even without your participation, the warriors arrayed in the opposing army shall cease to exist.

Therefore, arise and attain honor! Conquer your foes and enjoy prosperous rulership. These warriors stand already slain by Me, and you will only be an instrument of My work, O expert archer.

 

크리쉬나가 말하는 힘의 비교 대상은 시간이다. 세상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모두 소멸될 뿐이다. 그러니 아르주나가 돕건 안 돕건, 그런 강대한 내가 참전한 이상 전장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물론 힌두교의 전제상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누가 죽고 누가 사는 일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연연하지도 말고, 그저 내 도구로서 승리를 즐겨라.

 

한마디로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영원을 다루는 신의 의도와 권능을 이해하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짖음인데, 과연 오펜하이머의 인용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크리쉬나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인지, 그냥 단장취의하고 ‘뭔가 강력한 것’이란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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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
 
보는 동안은 잘 봤다. 너무 자주 반복되는 추격 장면이 좀 지루했고 너무 말이 안 되는 줄거리가 몰입을 방해했지만, 일단 주제가 'Raiders' March' 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반가웠다. 마지막의 ‘대체 안 아픈데가 어디야’(1편의 대사다)에서 뭉클하기도 했다. 그런데 보고 나오는데 조금씩 슬퍼지기 시작했다.
 
<옐로우스톤>의 스핀오프 중 하나로 현재 방송중인 미국 드라마 <1923>의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다. 족보상으로 <옐로우스톤>의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의 종증조부 쯤 된다. 타협을 모르는 늙은 카우보이.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지만 이미 말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카우보이의 시대가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굴의 투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그의 나이가 보는 이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다이얼>에 나오는 해리슨 포드는 극중 70세(존스 박사는 1899년생이었던 것이다)인데 내용을 봐선 대체 왜 70세인지 알 수 없다. 처음 세 편의 시리즈에서 존스 박사는 각각 37세, 36세, 38세였다.
 
70세를 맞은 1969년, 존스 박사의 펀치력, 주력, 근력, 지구력은 30대 후반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여전히 몸으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한다. 성배로 물을 마신 덕분인가. 2043년쯤 나올 <범죄도시 23>의 마동석을 미리 보는 것 같다. 영화 배경이 1940년 정도였다면 딱 어울릴 시나리오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젊은 영웅’역할을 했어야 할 헬레나(피비 월러-브리지)는 방해꾼에 애물, 코믹 전담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소란스럽고 장황하다. 그냥 <플리백>을 보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제작사들은 만에 하나 늙은 챔피언이 은퇴하더라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젊은 챔피언이 그의 영광을 물려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 것 같다. 다행히 그 소원은 실현될 모양이다.
 
요즘 들어 자꾸 ‘위대한 왕국이 퇴색하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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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를 추구할수밖에 없다는 낙관, 식량과 자원의 부족은 기술의 발달이 모두 해결해 줄 거란 낙관,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통제 불가능한 정보의 확산은 진정한 인류애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낙관...
마블의 혼란과 DC의 제자리걸음을 보면서, 과연 이 세가지 낙관이 모두 무너진 세계에서 슈퍼히어로 영화가 살아남을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오갤3>와 <플래시>를 본 뒤 이 느낌은 더욱 굳어졌다.
누가 이런 망가진 세상에서 한가하게 슈퍼히어로 집단 따위가(한 꺼풀만 벗기고 보면 '정의로운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줄 거라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낙관의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2. 그런 시대에,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정말 끔찍한 제목. 이하 MI7)>의 현실 파악은 진정 탁월했다. 기후위기와 식량 및 자원의 부족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이 회의적인 분위기, 전 지구적인 이기주의의 확산으로 전쟁 발발의 위협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 정보의 흐름을 지배할 수 있는 '엔티티'라는 고도로 진화된 AI가 등장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체 어떤 정부가, 어떤 기관이 이 엔티티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까.
 
예전 같으면 '세계의 경찰'이며 '가장 정의로운 국가'인 미국이 그 엔티티를 떠맡으려 했을 것이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누구도 70억 인구 전체가 다 같이 손잡고 밝은 미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 과연 우리의 영웅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3. 배경은 소름끼치게 현실적이지만, 물론, 본질적으로, MI7은 불로불사 톰 크루즈 아저씨의 동화다. 믿을 수 없는 선의로 가득찬 기사들과, 가면 하나로 다른 인간이 되는 마법이 공존하는 판타지 세계다. 그래도 어쨌든 '그냥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비록 그 주역들은 총알 한방이면 죽을 수 있는 약한 존재들이지만 불굴의 투지와 선을 향한 의지로 어떻게든 우리가 알던 세상이 유지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해서, 이 암울한 미래를 앞둔 인류가, 이제 구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4.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이런 세계를 설계하는데 최고의 장인임을 보여준다. 파트 원인데도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장악력. 탁월한 캐스팅과 적절한 교체. 고전과 미래를 넘나드는 미적 감각 모두 최고다.
개인적으로 MI 시리즈 중 최고이면서 코로나 이후 본 모든 영화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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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가 있고 감독 류승완.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재미있는 여름 영화'의 간판으로 손색이 없다. 보고 나서도 만족. 
 
2. 2021년 촬영. 22년을 그냥 넘기면서 제작진이 했을 고민이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의 관객과 이후의 관객은 어떻게 다를까.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할까. 그리고 그 선택은 강력한 다이어트로 나타났다.
 
2시간9분. 네 주연과 고민시 외의 다른 캐릭터들은 이 다이어트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밀수>는 한눈팔지 않고 그냥 달린다. 물론 좋은 선택. 오해도, 갈등도, 굳이 오래 끌지 않는다.
불필요한 우리편의 희생(개인적으로 21세기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도 없다. 따져 보면 꽤 심각한 스토리인데 빠른 해결로 바로 치고 나가니 발걸음이 가볍고, 관객도 편안해진다. 확 눈에 띄는 김혜수-염정아 여성 투탑의 서사를 빼고도 이 시대에 잘 맞춰진 영화다.
 

 
3. 아쉬움이 있다면 조연 라인이 좀 낭비됐다는 느낌. 특히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로 구성된 해녀팀은 촬영중에는 꽤 큰 비중이었을 듯 한데 완성된 영화론 거의 존재감이 없다. 반면 이런 점을 생각하면 고민시의 활약이 놀랍다. 후반부는 고민시가 끌고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물론 이 영화 최고의 수혜자로 조인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연 넷 중에선 등장시간이 가장 짧은 캐릭터. 하지만 조인성이 과연 지금까지 이렇게 '여심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한 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훌륭한 변신을 보여준다. 조인성, 이제 느끼한 것도 된다!
 
5. 훌륭한 오락영화지만 아주 세심한 영화는 아니다. 이를테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왜 닻줄이 끊어져도 배는 정지해 있나 같은 사소한 의문이 여러 곳에서 떠오른다. 이런 부분들이 디테일 마니아들에겐 다소 불편할수도 있겠으나 대세에 지장 없음. 편히 보시길.
 
6. <앵두>,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무인도>까지. 전곡을 다 따라 부를수 있는 OST(반갑다). 엔딩은 <그 얼굴에 햇살이> 정도도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P.S. 류승완 감독이 인터뷰에서 <영웅본색>을 언급했다던데, 그리 오래지 않아 오마주 지점이 나와 (코믹 장면은 아닌데)잠시 웃었다. 흰 바바리라도 입고 나오거나, 돈을 줄 때 바닥에 흩뿌려 줬더라면 더 선명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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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초딩 동창인 세르지오 레오네(좌)와 엔니오 모리코네(우)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놈놈놈과 석양의 무법자의 관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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