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야쿠자의 아들 기쿠오(요시자와 료)는 부모를 잃고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제자가 되어,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요코야마 류세이)와 함께 자라고, 함께 수련한다. 이들은 한지로를 계승해,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전문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로 성장한다.
두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지로는 기쿠오의 재능이 아들 슌스케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쿠오는 그 재능을 한껏 펼치고 싶은 야심을 품고, 슌스케는 아버지의 선택과 친구의 재능 앞에 좌절한다. ...그렇게 50년이 흐른다.
이상일 감독의 <국보>. 화려하고 재미있다. 전혀 난해하지 않고, 선명하다. 3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른들 극장에서 보시길. 극중 가부키 장면의 화려함이 압도적이고, 묘하게 닮은 두 주인공의 열연에 절로 빠져든다. 정리 끝.

1. 영화에도 등장하듯 일본에는 '인간 국보'라는 개념이 있다. 공식 용어로는 '중요 무형문화재 보지자', 대략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온다. 아마 한국의 인간문화재 제도가 이 제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한 분야의 인간 국보가 되면 그 분야에서는 절대적인 해석 권력이 되며,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제목이 <국보>인 것은, 바로 이 제도를 전제로 한 것이다.
2. <국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당연히 '혈통'과 '재능'이다. 가부키는 가문이 지배하는 사회고, 그 가문의 이름이 곧 배우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대를 건너가면서도 4대 5대 6대로 이어져 다른 인물이지만 선대 같은 인물을 그대로 계승한다. 계승의 근거는 혈통이고, 스타 가문의 후계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스타고, 적손이 아니라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대가 끊어지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후계자가 될 수 없다. 명문가 출신의 후계자는 주인공을 맡고, 조연 가문의 후계자는 조연을 맡는다. 가부키 명문가의 자손들은 사회적으로도 귀족 대우가 기본이고, 연예계 활동을 할때도 남다른 대접을 받는다.
사실 재능이냐 혈통이냐를 따지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엘리트 교육을 받기때문에 실력으로 꼬투리를 잡히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여배우인 마츠 다카코가 유명 가부키 패밀리의 딸이고, 신인일 때부터 "(가문의 힘 덕분에)마츠 다카코는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뜰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3.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를 보러 가기 전, 내가 가부키에 대해 아는 게 고작 이런 것들이라는 깨닫고 뭔가 예습이 필요성을 느꼈다. 넷플릭스를 뒤져 보니 <이쿠타 토마의 도전>이라는 게 있다. 유명 배우 이쿠 토마가 글자 그대로 친구의 꾐(?)에 빠져 가부키 연기에 도전하는 내용의 소프트 다큐다.
일드 많이 보신 분이면 눈에 익었을 배우 오노에 마츠야(2대)가 바로 그 친구인데, 이 배우가 가부키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들이 하는 가부키는 정통 가부키라기보단 대중화를 지향하는 신 가부키라 로보트도 나오고, 개그도 나온다. 아무튼 <이쿠마 토마의 도전>을 보면 가부키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을수 있고, 그렇게 해서 이들이 공연하는 0가부키 <아카도 스즈노스케>가 전편이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 <국보> 관람에 상당히 이해가 됐다.

이 작품에서 온나가타 역을 맡은 나카무라 간교쿠는 오종종한 체구의 미인형(?)으로, <국보>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비련의 여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한국식 로코 주인공 같은 발랄한 온나가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온나가타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4.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했듯 예술 세계에서의 재능과 노력의 대립이라면 <아마데우스>가 있고, 극중 세계와 바깥 세계, 여기에 성 정체성의 문제를 덧붙인 걸작으로는 <패왕별희>가 있다. 그렇다면 <국보>는 여기에 어떤 이야기를 보태야 할까.
이상일 감독은 온나가타, 남자들만의 세계인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두 남자의 50년에 걸친 우정과 경쟁을 철저하게 '남자의 눈'으로 그렸다. 온나가타라는 역할의 역사를 남색(!)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테지만, 감독은 그렇게 뻔한 길의 유혹을 벗어났다. 두 주인공은 극중에서 여자 역을 하고 여성성을 표현하는 데 몰두할 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고 있는 것은 넘치는 확고한 남성성이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스포일러가 됩니다. 영화를 보고 오실 분은 여기서 정지.]
5. 여성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현실과 무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불량배들의 폭력에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은 여장남성과 관련 소재를 다룬 작품들의 클리셰라 하겠는데(<헤드윅>이나 <프리실라>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보>에도 이 장면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만약 감독이 이 장면을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구성했다면 <국보>는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실 <국보>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기에는 너무나 남성 중심적인 영화다.
<국보>의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역할은 하루에라는 역인데, 바로 이 하루에를 통해 <국보>가 갖는 묘한 시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루에는 처음에는 기쿠오에게 인생을 바친 헌신과 후원을 약속하고, 나중에는 슌스케의 아내가 되어 후계자를 낳아 주는 역할이다. 그러나 하루에게 왜 이렇게 변신을 하고, 그 변신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는지는 영화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국보>에서 이상일 감독의 연출 방식은 '...이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은 얘기는 다 할 시간이 없어요' 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루에는 '가부키 세계' 혹은 '예술 세계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보여진다. 모든 예술은 탁월한 재능을 사랑하지만, 결국은 예술도 하나의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하루에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 아니었을까. 사실 약간 억지인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인물이다. 감독이 하루에라는 캐릭터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었다면, 최소한 슌스케의 아내가 된 뒤에 기쿠오에게 뭐라도 이해를 구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겠지만, <국보>의 하루에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묘하게 등장인물들이 분장실 거울을 통해 다른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거울 속에 있는 나(남성)는 나인가, 아니면 극중 인물인 여성인가, 아니면 극중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준비하고 존재하는 내 안의 여성인가. <국보> 속의 '여성'이란 이런 존재다. 이 가상의 여성이 강조되기 위해, 실제 여성 캐릭터들은 소품이나 별 치이 없게 다뤄지는 셈이다.
이런 내용을 통해 영화 <국보>는 철저하게 남자들의 이야기와 남자들의 세계라는 가부키 월드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생각. 물론 더 나아가면 일본이라는 사회의.... (뭐 이건 그냥 넘어가자)

6. 놀라운 것은 배우들의 호연. 키쿠오와 슌스케의 소년 시절 역할을 한 두 배우, 성인 연기를 한 두 배우 모두 감동적인 열연을 펼친다. 1년 넘게 가부키를 수련해야 했다는데, 화면을 보면 그 성과가 놀랍다(혹시 가부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영 미흡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 관객으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고 이색적인 가부키 무대의 연출 또한 대단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게를 LGBT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당연히 없지 않겠으나, 누차 말했듯 이 영화는 남성성의 강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끌릴 수도 있겠으나, 그 끌림은 근대 이후 설정된 우정(그리스 시대의 우정이 아니다)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선이 비슷한 두 배우를 캐스팅 한 것은 결국 또 하나의 거울, 즉 내가 너를 보듯 너는 나를 보면서, 나의 이런 인생을 너만은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엔딩. 이상일 감독은 죽 이어진 스타일대로, 구체적인 해석이나 설명 없이 영화를 맺는다. 과연 기쿠오는 무엇을 얻었나. 인간 국보가 된 것이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의 성취인가. 평범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포기하고 도달한 것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 답은 어디에도 없다.
문득 이문열의 <금시조>가 떠오른다.

7. 아무래도 가부키라는 장르를 지금껏 한번도 접근하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받아 온 항일교육, 즉 왜색을 멀리하고 일본 문화의 요소들 가운데 부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 데 대한 죄책감의 지배를 받은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국보>가 호평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런 구세대의 잔재에서 어느 정도 대한민국이 자유로워졌다는 뜻. 혹은 케이팝과 케이컬처라는 이름의 문화적 자부심이 '가부키 정도는 뭐라도 괜찮아'라는 안심을 준 것일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런 요소들 외에도 가부키라는 장르에 가까이 다가가기 쉽지 않았던 것은 그 '형식 과잉'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영화 <국보>는 그런 형식 과잉의 예술에 대한 거부감을 어느 정도 씻어주고 있다.
다음번 일본 방문 때에는 한 막이라도 가부키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만화 <가부쿠몬>부터 구해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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