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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놨던 글인데 타이밍을 놓침. 어쨌든 길어서 블로그에 올림.
해가 갈수록 너무나 한심한 영화상이 되어 가고 있는 아카데미상에서 올해 그나마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다 싶은 부분은 피터 위어의 '공로상' 수상이다. 아카데미 공로상은 언젠가부터 '유명한 분인데 그동안 우리가 상을 못 드리고 외면해왔던 분들'에게 드리는 상이 되었다.
이 상이 원래 그 해의 분위기라는 것(좋게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것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예년 같으면' 충분히 상을 받고도 남았을 영화들이 수상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상이 워낙 근엄한 상이다 보니 코믹 연기로 부각이 되거나, 영화가 좀 희한하거나 한 경우에도 상을 잘 주지 않았다. 성룡, 스티브 마틴, 데이빗 린치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다.
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온전히 봐도 충분히 상을 받을만 했는데도 좀 불운한 사람들의 경우, 번번이 뭔가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영화'들에 밀려 수상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총 14번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콜시스의 경우 <디파티드>가 없었다면 공로상의 0순위 후보였을 터.
피터 위어는 6회 후보에 올라 무관(골든글로브는 4회 무관)이니 스콜시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따르면 너무나 저평가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BAFTA에서는 <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 <마스터 앤 커맨더>로 3회나 감독상을 수상했으니 결코 상복이 없는 감독은 아니다. 다만 아카데미가 그를 철저하게 무시한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 위어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트루먼 쇼>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물론 올랐어도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가 있었던, 아카데미 기준으로 극강의 해였기 때문에 수상은 실패했을 수도 있겠으나, 나머지 후보작들의 면면을 보면 <트루먼 쇼>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을 영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짐 캐리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짐 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짐 캐리는 스콜시스나 위어는 저리 가랄 정도로 오스카가 철저하게 무시한 배우다. 캐리는 단 한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적이 없고, 심지어 짐 캐리가 출연한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다. <마스크>나 <덤 앤 더머>는 말할 것도 없고, <이터널 선샤인>도, <트루먼 쇼>도, <맨 온 더 문>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희극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의 결과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코미디언들도 비슷하다. 유명한 코믹 배우들은 커리어의 어느 시점에서 '어디 오스카가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작정하고' 출연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빌 머레이와 스티브 캐럴은 각각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폭스캐처>로 1회씩 오스카 후보로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죄송.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두 배우들이 '어디 나도 상 받는 영화에 한번 출연해 볼까?'라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영화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진지하게 빌 머레이를 평가했다면 <고스트 버스터즈>나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짐 캐리도 위의 몇몇 영화를 통해 존 카우프만, 피터 위어, 밀로스 포먼 같은 '오스카가 외면하기 힘든' 영화인들과 공동 작업을 했지만 결국 실패한 걸 보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캐럴이나 머레이보다 캐리를 더 싫어했던 모양이다.
곡절 끝에 이번에 위어가 공로상을 받았으니, 언젠가 캐리도 공로상은 받을 수 있기를. 아니, 그 전에 아카데미 회원들이 정신을 차려서, 연기상을 받을 수 있기를. 위어 형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뒤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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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충격을 받고(정말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해야 '영화 좀 본 사람'이 되는 것인지),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작 리스트를 보다가 대체 영화란, 극장이란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카데미상이 해야 할 역할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갔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장면인지, 저 영화의 장면인지 혼동할 정도로 세 영화는 매우 닮아 있다. 글자 그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남녀 주인공 중 한쪽과 그 자연재해가 초자연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그 운명의 연결을 거스르려 한다는 점 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이 한 가득이다. 물론 같은 감독이니 작화와 스타일도 당연히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강추. 안 보신 분들은 빨리 보러 가라. 아래 글은.... 물론 별 스포일러는 없다.
그중 최신작인 <스즈메의 문단속>. 이번엔 큐슈 남동쪽의 미야자키가 무대다. 여고생 스즈메는 폐허를 찾는 '잘생긴 남자' 소타의 뒤를 쫓다가(심지어 등교를 포기하고!) 일본 땅 깊은 아래를 흐르는 큰 힘, 지진의 원인인 거대한 미미즈의 실체를 알게 된다. 심지어 스즈메의 실수로 미미즈를 잠재우고 있던 요석이 빠져버리고, 미미즈를 관리하는 가문의 후계자인 소타는 희한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미야자키-에히메-고베-도쿄-미야기까지, 일본 열도를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거의 종단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대모험이 시작된다.
비슷한 톤의 영화가 세 편째이다 보니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작 두 편에 비해 이야기의 양은 많고 진행은 훨씬 빨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작 두 편에서 이미 스타일을 읽었을테니 비슷한 패턴을 다시 보여줄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당연한 얘기는 얼른 건너뛰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얘기라 반가웠다.
이런 진행 때문에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선이 너무 튄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어느 곳 어느 시절에, 남녀간의 감정에 매뉴얼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개연성이 필요하다면 소타의 외모가 개연성이겠지.
세 편의 영화 중 대중성으로 따지면 단연 <너의 이름은>이 앞서고, 그 다음이 <스즈메의 문단속>, 그리고 <날씨의 아이> 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후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날씨의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과연 대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을 본인 아닌 다른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제기였다.
거의 매일 폭우가 내리는 도쿄. '날씨의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가지 않는 한 비가 계속 내려 도쿄는 물에 잠길 운명이다. 그녀 하나의 희생으로 도시 하나를 구할 수 있다 해도, 과연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자신을 희생해야 할까? 혹은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
유독 집단주의가 강조되는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서 이런 목소리를 내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이 감동의 포인트였다. 20세기의 풍요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일본에서, '왜 당신들이 망쳐 놓은 나라를 우리가 수습해야 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질문을 대변한 듯한 느낌. 하지만 <너의 이름은>을 사랑했던 많은 신카이 팬들은 이런 메시지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통적인 윤리관으로 돌아갔다. 주인공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평온한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매우 상식적인 주제를 따른다. 스즈메는 어떻게 해서든 이 '당연한 희생'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그 '재난'이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12년전의 대 사건이라면, '막을 수 있었어도 나를 희생해서 그걸 막지는 않겠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그러면 다이진은 대체 무슨 죄로 그 지루하고 어두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가.
헤라클라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가지러 갔을 때, 직접 가는 것보다 아틀라스를 보내라는 조언 때문에 잠시 아틀라스 대신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는 일을 맡는다. 그런데 사과를 가지고 돌아온 아틀라스는 '왜 내가 계속 하늘을 떠받쳐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아틀라스도 잠시 풀려난 뒤의 해방감을 알아버린 뒤, 다시 교대해 주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일.
'그건 원래 네가 해야 하는 일이었잖아' 라는 이유로, 다이진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다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잠시 묵념, 네네. 이게 주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쪽이 더 맘에 든다니까요.)
어쨌든 작화의 연출이나 영상, 음악, 거의 모든 면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탑 크리에이터로서 손색없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한국처럼 문화적으로 근접한 나라가 아닌 글로벌 관객을 고려한 일본적 요소의 승화 부분에서도 - 물론 한국 관객들은 좀 더 이해의 폭이 크겠지만 - 특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미즈(일본어로 지렁이더라)의 형태는 아니지만 지진이 잦은 나라의 특성상 지하에 뭔가 초자연적인 거대한 존재(이를테면 용, 메기, 구렁이 등등)가 진동을 일으킨다는 전설, 그리고 역시 신적인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 진동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있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 때마다 대재앙이 덮쳐온다는 것....
그런 자투리들을 모아서 이만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진정 탁월하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아무튼 강추. 얼른얼른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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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도시 바빌론. 계시록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현대 문명권에서 sin city는 거의 공식적으로 라스베가스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데미안 셔젤에게는 할리우드가 바빌론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는 파리가 바빌론이었던 것처럼.
영화 <바빌론>은 '그 타락이란게 대체 어떤 건지 보여주마'를 작심한 듯한 파티 신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콘텐트 비즈니스의 엄청난 매출 창출 능력이 현실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들어간 돈의 100배, 1000배의 이윤을 돌려줄 수 있는 새로운 사업. 그 파티 신 하나에 어마어마한 허영과 사치와 욕망이 녹아 흐른다. 압도적이고 효과적인 첫 장면.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가 가리키는 시점은 1920년대의 할리우드, 무성영화가 유성영화(토키)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물론 데미안 셔젤은 토키의 충격보다는(이미 이 영화 곳곳에 인용되는 <싱잉 인 더 레인>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들이 그 '충격'을 중요한 소재로 다뤘다) 그 시절의 영화계 사람들이 느꼈을,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도 되는 거야?"라는 충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신성한 영화의 역사에 바치는 헌사'와는 조금 다르다. <바빌론> 속 영화계는 재능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말초적인 유혹에 미친 장인들과, 일확천금에 눈이 먼 장사꾼들의 파티장이다. 등장인물들은 아무데나 똥을 싸고, 걸핏하면 토한다. 마약이 알콜에 취한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누구도 <바빌론>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취한 브래드 피트가 석양을 안고 펼치는 환상적인 촬영 장면이나, 당대 할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했던 가십 칼럼니스트(아마도 실존인물인 헤다 호퍼나 루엘라 퍼슨스를 모델로 했을)가 피트를 향해 "당신 시대가 간 건 당신 탓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날 어떤 젊은이가 당신 영화를 보고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느낄 때,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 거야" 하고 위로하는 장면을 보면, 이런 장면에서의 셔젤은 진심으로 할리우드의 팽창기, 전설이 된 시대를 살아 보고 싶었던 영화소년의 자세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제정신을 잃고 술과 마약과 섹스와 향락과 사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잃은 할리우드를 빈정대는 듯한 셔젤, 그런데 그 정신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찬란한 성과와 다시 오지 않을 전설의 시대에 대해 미칠듯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셔젤. 이 두개의 셔젤은 영화 내내 쌈박질을 벌인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정체성도 좀 오락가락한다. 너무 노골적으로 팬심을 드러내기 부끄러웠던 것일까. 애정표현이라면 좀 비뚤어진 표현이긴 하지만, <바빌론>의 시대에 대한 셔젤의 진심은 너무나 충분히, 넘칠 정도로 느껴진다.
(이런 종류의 동경은 굳이 영화 <미드나잇 앤 파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나 친근하다. 만약 당신이 야구선수라면 트랙맨도, 갖가지 통계도, 에이전트도, 혹사 논란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 베이브 루스나 월터 존슨과 플레이하는 꿈을 꿀 지도 모른다. 가수라면 MP3가 없던 시절로, 글쟁이라면 인터넷이, 심지어 워드 프로세서가 없던 시절로.... 뭐 아무튼.)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영화가 꽤나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데 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겠'으나, 내겐 너무 길었다. 코로나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최소한 3시간은 되어야 티켓값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누군가 여기저기 전염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굳이 이렇게 지루하게 만들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상, 아무리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만들었다 해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그래도 스스로 생각할 때 영화라는 장르에 평균 이상의 애정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한번 보고 기억해 둘만한 영화. 이 영화에는 15분짜리 유튜브 압축본을 보고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 분명히. 그것이 욕이든, 감동이든. 이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나는 저거 무슨 영환지 다 알아' 하는 유치한 자부심 같은 걸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P.S.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에 감탄하게 되는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파리>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다시 돌아온 바빌론>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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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코로나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극장을 찾는 것이 전보다 좀 더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래 리스트 중에서도 극장에서 본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네요. 심지어 극장에서 본 영화가 집에 앉아서 본 영화에 비해 만족도가 높았던 것도 결코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늘 그렇듯 제가 2022년에 봤다는 것이지 제작 연도가 2022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숫자는 순위가 아닙니다. 그냥 갯수를 세기 위해 붙인 넘버링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1. 프리가이
NPC,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들이 열심히 기관총을 쏠 때 한가하게 옆을 지나가는 백곰들이나 당신이 금괴 판매자를 찾아 중동의 낯선 항구를 방황할 때 옆으로 지나가면서 "메카에서는 향신료가 싸다네"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보잘것 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존재를 가지고 만들어 낸 보석같은 영화. 시대정신에 딱 맞습니다.
2. 리카르도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왈가닥 루시'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세대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때 미국의 연인이자 세계의 연인이었던 루실 볼이라는 여배우. 그 여배우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인종주의와 매카시즘의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둥둥 떠다니던 시절이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영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절대 그냥 주어진 것도 아니고, 태곳적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3. 프렌치 디스패치
영화든 소설이든 모든 것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영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촘촘하게 책으로, 잡지로 만들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웨스 앤더슨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문라이즈 킹덤>과 함께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
4. 탑건: 매버릭
당신은 왜 극장에 가고 영화라는 것은, 극장이라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장 최근의, 가장 설득력있는 답변. <탑건> 세대가 아닌 관객들까지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직 인류가 낭만, 성취, 우정 같은 동기들에 대해 애착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는...
그리고 영화 보는 동안이라도 스무살로 돌아간 듯한 느낌.
5. 놉
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작품. 대체 우리가 모르는 하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뭔가 진지하게 얘기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병맛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블랙코미디인 척 하다가도 어느새 호러로 변신해 있는 영화. 영화 <놉> 자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거기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 그냥 한 편의 호러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강렬한 작품.
P.S. 다니엘 칼루야는 조던 필 감독의 세 작품 모두에 출연하지는 않습니다.
6. 헌트
한국 스릴러의 역사는 <헌트> 전의 작품과 그 뒤의 작품으로 나뉠 듯.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정치 부분을 건드리면서 시나리오 상태에서 이 정도의 짜임새를 갖춘 영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고, 이 모든게 신인 감독 이정재의 책임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정 놀라울 뿐.
7. 헤어질 결심
이미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는 박찬욱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 대한 영화. 박해일의 죄가 '아내를 배신한 죄'가 아니라 '사랑을 외면한 죄'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벌 역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 그래서 이 영화를 멜로 영화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처참한 징벌극.
8. 13 라이브스
극장개봉도 하지 않고 단지 아마존프라임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가장 강렬했던 영화 중 하나. 13명의 조난당한 소년 축구단 일행을 구하기 위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는데.... 너무나 담담한 시각이 가슴을 저미는 영화. '저렇게 모두들, 자기 할 일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던 거죠.
9. 아바타2
솔직히 292분은 좀 무리라는 생각도 했지만 2022년에 본 영화 중 10편을 뽑는데 <아바타2>를 꼽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저는 불가능했습니다. <아바타3>이 나와도 꼭 볼 거구요. 물론 그 얘기 외에는 사실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게 함정. 그래도 같은 돈 만원(물론 저는 2만원) 내고 세시간 넘게 이런 시각적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정말 염가라고 생각합니다.
10. 더 스위머
시리아 출신의 두 자매가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이하 생략) 내전과 학살의 땅. 먼 나라에 사는 우리는 그저 '거기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곳에도 젊음이 있고, 누려야 할 삶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무겁고 눈물부터 쏟아야 할 것 같은 톤이 절대 아니고, 거칠 것 없는 젊은이들 이야기답게 흥겹고 씩씩한 영화지만, 어느새 '난민'이라는 말의 무게가 가슴에 실리는 영화.
경합:
범죄도시2
어쨌든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을 가장 위로해준 작품. 손석구 캐릭터가 왜 사람을 죽이는가에 대한 개연성 여부를 비롯해 스토리의 구멍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마동석의 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울려퍼지는, 500년 된 오동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쩍' 소리의 쾌감 앞에서는 비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듯.
엘비스
바즈 루어만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호오가 엇갈리는 작품이지만, 잊혀져가는 엘비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정리를 더 이상 아름답게 해낼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톰 행크스의 악역이 신선했고, Suspicious Mind가 보고 나서도 한동안 귓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워스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제 이런 영화를 보기엔 너무 늙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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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봉 첫주를 놓치면 루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예매 시도. '드디어 예매가 열렸다'는 제보를 받고 예매에 착수했는데 어찌나 세상에 손 빠른 사람들이 많은지 이미 대부분의 IMAX와 DOLBY CINEMA의 핵심 좌석은 사라진지 오래. 마침 누군가 현재 국내 최고의 관람 환경은 남양주에 위치한 현대아울렛 스페이스원(메가박스)라고 극찬했던 말이 생각나 예매 시도. 여기도 역시 대다수 좌석은 빛의 속도로 사라진 뒤였으나 그래도 센터 라인의 좌석 확보. 대신 토요일 오전 8시.
2. <아바타>와 제임스 카메론에 대해서는 존경심 뿐. 1984년 겨울,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대체 영화의 장르가 뭔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 <터미네이터>의 충격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식당들이 설렁탕에 깍두기 반찬 하나, 짜장면 우동에 단무지 반찬 하나 놓고 장사 하던 시절에 갈비구이 반상에 16첩 반찬을 깔아 놓고 갑자기 방어회, 서산 무젓, 눈볼대 구이에 백합탕까지 시간 순으로 깔아 준 뒤 다 먹고 나가려는데 차가운 배숙에 개성식 주악으로 마무리까지 기막한 한끼 식사를 같은 돈 내고(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모든 영화의 관람 요금이 같다) 먹게 해 준 카메론 형님의 은혜란. 그 뒤로 <에일리언2>를 보고 비슷한 감동을 느꼈고,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배신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던 <어비스>도 아름답기만 했다. 아니 뭐가 어때서? 재미만 있는데.
3. <아바타>때는 그래도 관객들이 새로운 세계관에 안착하게 하기 위해 꽤 긴 도입부와 안내 설정이 필요했지만, 이미 <아바타>를 13년 전에 본 관객들에겐 <아바타2>를 위한 새로운 적응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줄거리 역시 너무나 직관적. 이미 <아바타>의 엔딩에서 설리는 자신의 나비족 아바타에 정신을 이식, 아바타를 새로운 몸으로 삼아 판도라 행성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인간 과학자들이 적응을 위해 만든 나비족 아바타가 어찌나 완성도가 높던지 각종 운동능력은 물론이고 생식기능까지 완벽, 설리는 아내 네이티리(이 이름 기억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는 듯. 캐릭터 이름을 기억할 필요 없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등장)와 아들 딸 쑴풍쑴풍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의 보고 판도라 행성을 기껏 개척해놓고 포기할 인류가 아닌 터. 그 전보다 확실한 준비를 갖추고 다시 침략자들이 밀어닥친다. 더구나 숙적 쿼리치 대령까지 지난번의 패배는 체력 격차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듯, 나비족 아바타 몸을 새로 갖추고 달려든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수순. 쿼리치와 인간들의 1차 제거 표적이 자신과 가족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설리는 정든 할렐루야 마운틴을 떠나 멀리 멀리 새로운 곳에 숨는다. 그곳에는 해양 생태에 맞게 진화한 살짝 다른 나비족들이 살고 있다.
4. 보시다시피 <아바타2>의 이야기 구조에는 큰 매력 포인트가 없다. 14년을 기다린 팬들에게 풀 떡밥은 <WAY OF THE WATER>라는 부제답게 끝없이 펼쳐지는 대양 생태계와 그 속에서 함께 헤엄치는 나비족들의 화려한 모습, 그리고 새로 도전해 온 인간들과의 치열한 전투 정도다. 그렇다. '볼거리'에 대한 만족이 <아바타2>에 대한 당신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그 밖의 것은 없다.
사실 많은 사람이 화질과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이야기하지만... 물론 아주 훌륭하다. 훌륭하긴 한데, 이미 많은 사람이 UHD와 4K 시대를 즐기고 있는 마당에, 이 정도의 영상이 과연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나 멋지다'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집에서 20인치 브라운관을 보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기절할 정도의 놀라움은 아니었다 정도로 해 두자.
그래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볼거리는 매우 훌륭하나, 2시간 72분을 버티기에는 살짝 아쉽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 타이타닉(?) 시퀀스는 좀 너무 길고 성의가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아, 노파심에서 얘기하자면 이런 얘기들은 '그래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무조건 봐라. 극장에서 봐라. 가능한 한 큰 상영관에서 3D로 봐라. 이걸 다 전제로 하고 하는 얘기다. 이런 투정을 한다 해도 이건 그냥 가족간의 응석 같은 것일 뿐. 이번 생에 <아바타> 시리즈가 몇 편 더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어찌 안 보고 지나갈 수 있을까. 다 본다.
5. 카메론은 살짝 변했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가족애'를 좀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하며, 전 같으면 나비족 한 마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초토화시켜도 모자랄 상황인데, 악당들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하며... 너무 인자해진 메론이형이랄까.
이런 면모들을 볼 때 <아바타>의 속편이 몇편까지 만들어지든(일단 5편까지는 나온다 치고), 동화같은 해피엔딩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편에서 나비족은 모두 소수민족 배우들이 연기했던 반면, 이게 오히려 역차별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나비족 역할에도 상당히 많은 백인 배우들이 투입된 점도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6. 애당초 <아바타2>는 2015년 정도에 개봉 예정이었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사실 누가 카메론 옹에게 일 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할 것이며, 카메론 형 입장에서 보면 몇달 사이에 더 좋은 기계와 더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오는 판에 어느 단계에서 딱 끊고 완성작을 내놓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2편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3편은 좀 빨리 내주길.
아무튼 메론이형,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시고 앞으로도 좋은 영화 계속 만들어주세요!
P.S. 1. 사실 카메론 형은 흥행 못잖게 제작비 상한 파괴자로서도 1인자의 면모를 과시해왔다. <T2>때 최초로 제작비 1억불을 넘겼고 <타이타닉>에선 역시 최초로 2억불을 넘겼다. 그때마다 할리우드 최강의 스튜디오들이 드디어 우리 회사가 망하는구나 곡소리를 냈지만 그 곡소리들은 이내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아바타2> 개봉에 맞춰 카메론은 희한한 이야기를 했다. GQ 기자가 수지타산 이야기를 묻자 "영화 사상 최악의 비즈니스다. 이번 영화는 역대 3,4위권의 흥행을 기록해야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역대 1위가 <아바타>의 29억불, 4위가 <타이타닉>의 20억불 선인데. 이 말이 기사화되면서 "<아바타2>의 손익분기점은 흥행 20억불 선"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그런데 이 금액이 너무 어이없는 금액이다 보니 저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바타2>의 제작비는 최대 4억불 정도. 통상 손익분기점은 제작비+배급 비용+홍보비 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 상식인데, 누가 뭐래도 이 제작비 외의 추가 비용이 16억불이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추측한 바에 따르면,
1) 카메론이 <아바타2>를 통해 앞으로 남은 속편들의 제작비를 다 뽑기로 결심했다(카메론은 적으면 3편, 많으면 5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가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다음 작품부터는 그냥 리스크 0인 상태에서 제작을 할 계획이다. <- 사실 말이 안 되지만 카메론이 한 말이니 이런 의미일수도 있겠다 정도?
2) <아바타2>를 만들기 위해 특수효과나 그래픽 관련 기업들을 아예 카메론이 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회사들의 인수비용을 모두 뽑을 생각이다. <- 역시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중 나름 합리적인 해석.
3) 사실 <아바타2>의 제작비가 4억불보다는 꽤 많고, 카메론은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흑자를 내 버릴 생각이다. <아바타>의 전 세계 흥행 성적은 29억달러로 역대 1위지만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면 약 7억불 정도, 역대 4위권이다. <-뭐 이것도 할리우드=세계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능한 숫자...
4) 그냥 카메론의 과장법이다. <- ....충분히 가능
P.S.2. 그렇게 판도라 행성까지 가서 구하려고 다들 애썼던 암리타는 이미 지구에서 시판되어 팔리고 있다. 메론이형, 부디 이거 드시고 건강 지키시길. (AMR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불멸' '불사'라는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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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스파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를 '첩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가 배신자인가' 혹은 '누가 진짜 스파이인가'를 찾는 이야기는 그 안에서도 별도의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인기 높은 소재입니다. 조직 내에 잠입해 우리편을 가장하고 있는 첩자를 영어로 두더지(mole)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장르를 두더지사냥(molehunt)라고 흔히 부르죠. 영화의 제목이 <헌트>인 것 역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의 <노 웨이 아웃>같은 거라면 당신은 옛날 사람... 네? <무간도>요? ;;)
<헌트>는 이 장르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탁월한 독자성을 갖춘 작품이고, 감히 말하자면, 한국 영화계가 이 장르에서 지금껏 만들어 낸 영화들 중 최고작으로 꼽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한국 영화에서 평균적으로 등장해 온, 너무나 밋밋하고 평면적인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불만이었던 관객이라면 <헌트>를 통해 그 갈증을 씻어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보입니다.
겉으로는 수트를 차려 입었지만 속은 일상처럼 서로 죽고 죽이던 칼잡이들 그대로인, 무사들의 시대를 <헌트>는 실감나고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 3년차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웅평 귀순,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그리고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등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져나온 파란만장한 그 해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 수호의 핵심이던 중앙정보부를 전두환 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지만 여전히 대외 첩보와 민간 사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죠. 정권은 바뀌었지만 "당신들 누구야?" "남산에서 나왔다 이 새끼야!"는 그대로이던 그 때.
하지만 <헌트>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전두환, 노신영, 이웅평 같은 인물들의 실명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아예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의 무대도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바꿔 버리고 사건의 내용도 '국가 원수 시해 음모'라는 핵심을 제외하면 실제 사건과 사실상 일치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창작의 세계로 멀리 가 있죠.
아무튼 잠시 줄거리.
독재 정권 3년차의 안기부. 국내팀 담당 차장 정도(정우성)와 해외팀 담당 차장 평호(이정재)는 워싱턴에서 대통령 살해 음모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처리 과정에서 심하게 대립합니다. 서열상으로는 평호가 윗사람이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결코 편치 않은 사이.
특히 안기부 내부의 최고 기밀 정보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조직 상부는 내부 첩자를 파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들 두 사람이 상대방을 견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에게서 석연찮은 증거들을 발견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라이벌의 대결 속에서 '과연 누가 첩자일까'를 풀어가는 고전적인 구조.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 후반부에서 그 전형을 만들어 놓은, 두 라이벌 사이의 치열한 치고 받고를 중심으로 한 플롯의 핵심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기울지 않는 균형인데,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증언대로 이정재 감독의 솜씨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서의 연출은 사실 배우로서의 연기와 따로 떼 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죠. 두 배우의 대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화면 가득한 풀샷을 이겨내는, 잘 늙은(?) 두 남자의 투샷은 매우 아름답고 만족스럽습니다. 정우성 역시 농익은 연기가 그만입니다.
이정재 감독은 시나리오 수정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놀랍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두 남자는 그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선을 그을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란 면에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도 한국의 1980년대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흑과 백, 양 극단 사이에 두터운 회색 층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북한이나 미국이라는 변수들까지 감안하면 계산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그 뒤,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의 관찰자들은 처음엔 흰색이나 희뿌연 회색으로 보였던 수많은 점들이 당시에는 선명한 검은 색이었던 점들보다 더 검게 보이게 되곤 하는, 기묘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커버하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였고, 오히려 주인공인 두 남자는 그런 시대에 나름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 혹은 그 '배신'과 '충성' 사이의 어느 쪽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영화는 분명 흥미진진한 오락 영화지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튼 누군가 <헌트>에 대해 '먹물들이 더 좋아할 영화'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는데, 제가 어쩔 수 없는 먹물 취향이라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적이면서 또 동지이기도 한 두 남자의 경쟁과 협력(?) 이야기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감히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에 비견할 만한 멋진 영화가 드디어 한국 영화사에도 등장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놓치지 말고 보시길.
P.S.1. 올 여름,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했는데, 정작 최고의 캐스팅을 감춰둔 건 이 작품이었습니다. 유재명 주지훈 황정민 정경순 조우진 박성웅 등 어지간한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이 거의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없는 역으로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캐스팅 실력 실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진짜 귀순용사같았던 그 분.
P.S. 2. 저분의 귀순을 환영하기 위해 그해 4월 여의도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130만명이 몰렸다고 하는데, 그 130만명 중 한명이었다는 옛 기억이 문득.... (비가 부슬부슬 오던 그날, 10KM는 걸은 듯. 절대 자진해서 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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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어질 결심>. 당장 보지 않으면 큰 일 날듯한 호평의 쓰나미. 더 이상 늦어지면 안되겠다는 조바심으로 극장에 달려갔다. 결론은... 역시 걸작. 아마도 <색계>보다는 이 영화가 탕웨이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다.
2. 눈감고 봐도 박찬욱의 영화. '멜로 스릴러'라는 평이 꽤 있었지만 이런 영화를 멜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블랙코미디이고, 훌륭한 스릴러이며, 언제나처럼 박찬욱이 천착해온 죄와 징벌에 대한 교훈담.
3. 아름다운 영상과 무시무시한 음악, 함축적인 대사. 히치콕의 <현기증>과 <이창>을 시작으로 이미지를 차용한 듯한 고전 영화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무대의 색감과 짐짓 어설픈(?) 배치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방랑자>가 떠올랐다. 고경표의 호연 덕분에 그런 느낌이 좀 더 들었을 수도 있다.
4. 석줄 요약: 형사 해준(박해일)은 산에서 추락사한 중년 남자의 사인을 조사하다 미모의 젊은 아내 서래(탕웨이)를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에 빠진다. 모든 정황은 자살을 가리키는데도 해준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그녀를 일찍 떠나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사건에는 정말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아직 남은 것인가.
아무튼 꼭 보시라는 말과 함께 이하는 스포일러. 웬만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안 보시는 게 좋을 듯.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래 글은 매우 개인적인 해석이고,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을 듯.
5. 거의 모든 영화에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고전 그리스 비극처럼 벗어날수 없는 운명 속에서 선을 넘고, 그 댓가를 치러 관객들에게 교훈을 남긴다.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은 서래지만 두 죄인 중 더 큰 죄인은 해준. 그는 자신의 감정 앞에 솔직하지 못한 죄,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죄를 범하고, 상대적으로 더 큰 벌을 받는다. 해준은 그녀가 자신을 절벽 끝에서 민다면 저항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고' 밀려 떨어질 각오는 되어 있지만 적극적으로 그녀를 구원하려는 시도는커녕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조차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체 그를 묶고 있는 굴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가 가장 중시하는 듯한 가치인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직업인으로서 원칙의 고수를 위해서? 품위의 근간인 자부심을 위해서? 그렇게 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형식만 남은 중산층 부부의 안온한 삶? 그리고 영화는, 그가 그것조차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6.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위선에 대한 우화로 읽는 시각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그렇게 도덕을 말하고, 당위를 말하고, 기회만 있으면 정의를 말하지만 그 결과가 대체 무엇인가. 당신은 누구를 구하고 대체 누구를 잃었나. 무엇을 지킬수 있었나. 한편 이 이야기는 왕조 시대가 끝난 지 100여년, 민주주의 국가 건설 70년이 지났는데도 개개인의 해방은 요원하기만 한 한국 사회에 대한 조소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잘못을 경계하라는 교훈담이다.
7.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읽는 시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서래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안 탓에 인생의 무게를 새롭게 느끼고,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벌을 받는다. 해준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 댓가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얻었다(아마도 그의 불면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무서운 징벌의 이야기를 과연 멜로라고 부를수 있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해서 파멸에 이르는 멜로드라마지만, 이 영화는 사랑을 이해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어 천벌을 받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나 그리스 신화의 파에드라 이야기가 멜로드라마라면... 이것도 멜로드라마겠지.
8. 언어는 과연 장벽인가. 해준이 쓰는 한국어와 아내 정안(이정현)이 쓰는 한국어는 사실 다른 언어다. 박해일의 언어가 관념의 세계에 머물 때가 많은 반면, 이정현의 언어는 사물과 1대1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정안은 수시로 이주임 이야기를 통해 박해일에게 '경고'를 던지고 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어눌한 한국어와 번역기를 사용한 대화지만 서래와의 소통이 훨씬 잘 이뤄지는 것을 영화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탄할 만한 연출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서로의 언어에 능통하지 않은 남녀간의 감정 교류에 대한 영화로서 대단히 야심찬 시도인데, 불행히도 칸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듯 하다.
...대개의 문화권에서 심장과 마음은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 영어로도 heart는 심장이면서 마음이다. 문득 한국어는 '마음'과 '심장'을 선명하게 구분하는 특이한 언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9. 절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고의적으로 쉽게 스며들기를 포기한 영화. 대중적인 히트는 불가능하겠지만, 고전으로 남을 영화. 그런데 과연 20대 관객들이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인지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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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탑건: 매버릭>.
감상은 “너무 좋았다.”
한마디 더 보태면 “이렇게 좋아도 되는거냐.”
전편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이 영화는 보물이자 보약이다. 그날의 기억이, 그날의 느낌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극장 가득 울려퍼지는 Top Gun Anthem과 Danger Zone을 들으면서 벌써 눈물이 나려 한다. 오토바이는 타 본 적도 없는데도 활주로를 따라 매버릭이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선 그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영화는 뭔가 숨은 의미를 찾거나 할 여지가 없는 직구의 연속. AI라고 만능 아니다. 아직 인간이 할 일 많다. 젊은이들에게 주눅 든 노인네들, 아직 멀었어! 기운 내! 할 수 있어! 뭐 이런 메시지는 너무나 자명해서 거론하는게 창피할 정도. 거기다 제작진은 다른 생각은 모두 접고, “어떻게 하면 1편을 본 관객들에게 좋은 기억을 줄 수 있을까”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친구들일텐데^^, 정말 정성이 가상하다.
다음은 그저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기억나는 것들의 모음이다.
1. 오래 전, 고교생 록밴드를 인터뷰 할 일이 생겼다(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아이돌의 시대. 밴드라지만 니들이 무슨 밴드 음악을 하겠니, 라는 생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어떤 밴드 곡을 커버해요?” 그런데 대답이 예상을 벗어났다. “토토요.”
태어나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너희가 토토를 안단 말이냐. 밀려오는 감동. 갑자기 멤버들이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꼰대질을 했다. “너희가 한번 들어봤으면 하는 연주곡이 있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Top Gun Anthem을 틀었다. “들어본 적 있니?” “아뇨. 근데 너무 좋은데요.” 그럼. 좋지. 안 좋을 리가 있니.
2. 36년만의 속편. <탑건: 매버릭>은 정말 흔한 속편 영화들이 닿을 수 없는 깊이의 영화다. <록키>로 치자면 1976년의 첫 편에서 바로 2006년작 <록키 발보아>로 넘어 온 느낌. 하지만 그 사이에는 4편의 <록키> 시리즈가 있다.
<탑건>과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소화하는 젊은 매버릭과 늙은 매버릭은 어딘가 <허슬러>(1961)과 <컬러 오브 머니>(1986)의 폴 뉴먼을 연상시킨다. 원작에서 25년 뒤. 나이는 먹었지만 불 같은 호승심은 그대로인 초로의 남자. 젊은이들과 진심으로 부딪혀 승부하는 남자(공교롭게도 그 남자가 바로 톰 크루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건: 매버릭>은 다른 어떤 영화도 도달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다. 1962년생인 톰 크루즈라는 사기 캐릭터다. 본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으니 대략 57~8세 무렵의 모습이겠지만, 그 나이에 성적으로 어필하는 ‘매력발산 표정(매우 중요한 요소다)’을 유지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상의탈의를 할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있었을까. 앞으로는 나올 수 있을까.
4. 어쨌든, 1편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세심하게 구성된 영화지만, <탑건: 매버릭>을 가장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역시 <탑건>을 봐야 한다. 본지 10년이 넘은 사람이면 한번쯤 다시 볼만하다. 지금 봐도 1986년작은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탑건: 매버릭>은 <탑건>에서 약 30년 뒤의 현재. 가는 데마다 사고를 쳐서 장성 진급도 못하고 말년 대령으로 늙어가고 있는 매버릭은 어찌어찌 하다가 갑작스런 필요에 의해 다시 탑건으로 불려간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2명의 탑건 출신 엘리트 파일럿들. 그들 중 6명을 선발해야 하는 긴박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두둥)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경고. 그래봐야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만, 어쨌든 경고. 영화 보고 오세요.)
5. 1986년 <탑건>이 나왔을 때 과연 영화 속 가상적국은 어디일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사실 그 시절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라크가 1번 후보였다. 매버릭의 항공모함은 인도양 해상에 떠 있었고,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미그기 운영 국가는 이라크였기 때문이다. 사실 꼬리날개의 별 모양은 북조선 공군의 상징이지만, 그걸 갖고 북한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도양에 북한이 웬 말이냔 말이다.
그럼 <탑건: 매버릭>의 가상 적국은? 이번 영화의 작전 지역이 태평양 함대 구역이라는 점, 5세대전투기를 운영하는 나라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유력한 후보는 러시아와 중국이다. 하지만 항공모함에서 내륙으로 접근하는 경로나 눈이 쌓인 지형이 있는 나라라면 러시아 외의 답을 생각하기 어렵다. 전투기의 생김새도 중국산 J-20보다는 러시아제 Su-57과 훨씬 더 비슷하다. (혹자는 F-14가 그 기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란을 후보국으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이란 수준에 5세대 전투기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6. 그런데 왜 그 나라에 F-14가 있는 걸까. 사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굳이 가능하게 하자면 ‘이란을 통해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다. 1970~80년대, F-14는 성능도 성능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전투기였기 때문에 해군은 F-14를, 공군은 F-15를 주력기로 채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천조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해군이 공군보다 부자다). 그런 비싼 F-14를 수입해다 쓴 외국은 원리주의 혁명 이전의 이란 뿐이었다. 친미주의자였던 팔레비 왕은 오일 머니를 아낌없이 투입해 F-14로 플렉스를 했는데, 팔레비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쫓겨나지만 이때 산 F-14들은 결국 돈값을 한다. 이란-이라크 전 당시 이 F-14들을 앞세운 이란 공군은 이라크 공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호메이니가 팔레비 덕을 본 셈.
물론 아무리 F-14가 미국 바깥의 어떤 나라에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다고 쳐도, ‘그 나라’에 F-14가, 하필이면 그 기지에, 급유도 되어 있고 완전무장까지 된, 당장 비행 가능 상태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좀 심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관객들에게 ‘톰 크루즈가 다시 F-14 조종석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제작진의 지나친 욕심이 빚은 결과. 좋은 뜻이었으니 그냥 넘어가자.
7. 이밖에도 진짜 전문가들이 보면 온통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겠지만, 마지막의 ‘적기’가 갑자기 3대가 되는 이유는 진심 궁금하다. 작전중이던 적기는 분명 2기였고, 마지막 3기째는 대체 어디서 불쑥? 굳이 설명하자면 매버릭이 기체를 이륙시키는 걸 보고(사실 이걸 막기 위해 크루즈 미사일로 먼저 공격한 것인데 그 활주로에서 기체를 이륙시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어떤 용감한 조종사가 3번 기체를 무리하게 이륙시켰다? ㅜㅜ
8. 찰리(켈리 맥길리스) 대신 페니(제니퍼 코넬리)가 나오는 이유는: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1편에서 구스의 아내 캐롤(당시 무명배우였던 멕 라이언이 이 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띄었다)이 술자리에서 “제독의 딸 페니 벤자민”이라는 매버릭의 전 여친 이름을 거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1편에서 매버릭이 탑건 교관으로 돌아오면서 찰리와 재회하지만, 교관 노릇도 두달만에 때려쳤다는 걸 보니 연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 듯.
9. 아무튼 무슨 구조나 숨은 의미를 따질 영화는 절대 아니고, 다시 한번 권한다. 지금이라도 <탑건>을 보고 보러 가시길. 관람 경험이 훨씬 더 풍성해진다.
10. 마지막 자막은 1편의 감독인 고 토니 스코트에 대한 헌사. 가슴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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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인가 NPC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모든 게임에는 NPC(Non Personal Character)라는 존재들이 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병풍 같은 존재들을 말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백곰 같은 경우도 있고, 가끔 플레이어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게임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말해주는 역할일 수도 있지만 어떤 독자적인 사고나 행동은 할 수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엑스트라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1년 전쯤, ‘이 세상이라는 게임에서 자신이 NPC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NPC’에 대한 포스팅을 했다가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다시는 NPC 어쩌고 하는 글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그 설정과 어울리는 영화가 나왔다.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프리 시티에서 은행원으로 살고 있다. 은행 업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주 업무는 ‘선글라스 낀 남자(혹은 여자)’들이 총을 들고 은행에 나타났을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리는 정도다. 프리 시티에서 선글라스는 초인류의 상징이다. 그들은 은행을 털어도, 사람을 죽여도, 차나 건물을 파괴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돈을 내고 게임을 해야 이 게임이라는 세계가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일반 시민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냥 그게 일상이고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늘 똑 같은 인사를 나누고 똑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에겐 그게 세상의 전부고, 세상의 이치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 프리 시티는 게임의 공간이고, 가이는 게임 ‘프리 시티’의 NPC다. 그런 가이 앞에 어느날 심쿵하는 매력의 여성 캐릭터 밀리(조디 코머)가 나타나고, 그 순간 가이는 NPC의 굴레를 넘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세상의 질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매트릭스>가 이미 20년 전 영화고 <레디 플레이어 원>이 벌써 4년 전 영화인 세상에서 이 설정이 대단히 신기할 것도 없고, 플레이어 아닌 NPC를 주인공으로 놨다고 해서 놀라 자빠질 일도 아니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그렇게 한번 시각을 바꿨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움직임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리얼 스틸>의 숀 레비가 감독인 만큼 따뜻한 유머와 밝은 분위기는 기본. NPC에겐 NPC의 길이 있다. 메인 캐릭터에겐 메인의 길이 있듯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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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센스(2011)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 이완 맥그리거, 에바 그린 주연
만약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한가지씩 감각을 잃어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후각이, 이어 미각이 사라진다. 인간들은 혼란에 빠지고, 냉소적인 셰프였던 마이클(이완 맥그리거)는 실업자가 될 위기에 놓인다. 수전(에바 그린) 연구팀은 급속도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주어진 오감으로 부족하다는 듯 가상 세계에까지 감각을 확장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감각들을 빼앗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로운 설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오감은 인간이 욕망을 갖게 하는 전제다. 감각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미각이 사라진 뒤에 미식이, 청각이 사라진 뒤에 음악이 사라지듯 시각과 촉각이 사라진 뒤에 성욕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충족할 수 없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퍼펙트 센스>는 감각이 하나 하나 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다는 절망과 파괴,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든 최대한 남아 있는 감각을 이용해 삶을 유지하려 하는 방향(물론 오감은 욕망의 전제이기 전에 모든 생명체의 안전을 위한 도구이지만, 영화는 거기까지 커버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선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은 레스토랑을 찾고, 와인을 마시며 얼굴을 마주한다. 청각을 잃은 뒤에는 빠른 속도로 수화를 익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라이브 바에서는 밴드가 음악을 연주한다. 청중들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 음악을 느끼려 애쓴다.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사회. 격리. 강제 수용. 텅빈 거리. 11년 전 영화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팬데믹 시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는 영화. 초기 개발 단계의 제목은 ‘The last word’였다고 한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그 단어다. 흥미로운 설정을 100% 활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으로 대변되는 낙관이 강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만약 이런 세상도 올 수 있다면 코로나 따위가 대체 무슨 문제일까.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용기를 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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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를 보고 나서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1961년 판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몇몇 장면을 빼면 거의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2.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극의 핵심인 ‘1961년, 뉴욕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백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 청소년들의 갈등’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의 이 문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이슈였지만 지금 보기엔 60년 전의 과거다. 1961판에서 제트파는 샤크파에 비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하다. 심지어 경찰도 노골적으로 제트파의 편을 든다. 그때는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2021년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제트파나 샤크파나 모두 곧 개발되어 없어질 지역(이미 영화 도입부에서 링컨 센터 건설을 위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의 추방이 예정된 난민들이다. 2021판의 제트파에게 경찰은 노골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너희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그렇지 못한 탓에 너희는 여기 살게 된 것"이라고 비웃는다.
이건 누가 봐도 21세기의 주제인 양극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의 시각이다. 개발은 부자들의 편의에 의해 이뤄지고, 그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너희의 형편이 나쁜 것은 다 쟤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하층민들의 갈등을 부추긴다. 이 ‘쟤들’에는 때로 ‘전라도 홍어’가 들어가기도 하고 ‘다문화’가, ‘멕시코 이민’, ‘예멘 난민’이 들어가기도 한다. 극의 주제가 되는 갈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가 더욱 강조된다.
3. 사실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는 했지만 미국이라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인종, 혹은 민족간 차별은 ‘미국을 건설한’ 영국 식민지의 후손들, 즉 필그림 파더스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종집단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영화로만 봐도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남북전쟁 시절까지도 같은 백인들끼리 먼저 온 쪽이 나중 온 쪽을 차별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백인 중에서도 유럽 출신들 중 아일랜드나 이탈리아계 이민들에 대한 묘한 차별은 뿌리가 깊다. 1947년작인 그레고리 펙 주연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을 보면 그 시절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서 얼마나 배척받는 집단이었는지 참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며 어느 정도 희석되어 과거의 유산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트럼프 시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시도 덕분에 미국의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못 사는 이웃들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메이크는 스필버그의 오랜 꿈이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마음을 굳힌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종 집단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것은 그 사회의 하층민들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줄어드는 일자리의 경쟁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왜 안 그래도 없이 사는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게 만드나.” 이게 2021판의 핵심 메시지로 읽힌다.
아, 물론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러브 스토리라는 건 바닥에 깔고 하는 얘기다.
3. 스필버그는 대단한 용기를 낸 셈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작곡), 스티브 손드하임(작사), 제롬 로빈스(안무), 로버트 와이즈(감독)라는 불멸의 라인업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스필버그라고 해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어느 것이 더 리메이크하기 힘든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듯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필버그는 원작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2021년판의 모든 캐릭터는 1961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다 가게 주인인 중늙은이 닥이 여자로 바뀐 것 외에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대로. 아이스의 비중이 거의 사라지고 치노가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아울러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신들이 대폭 축소됐는데, 이건 ‘이 관계가 궁금하면 1961년판을 참고하세요’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2021판은 누가 뭐래도 1961판의 연장선상에서 존재하고, 1961판에 대한 대단히 긴 프로모션 영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면 1961판을 봐’ 라는 식의.
물론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특히 1961판을 전설로만 생각해온 세대에게 2021판은 새로운 해석이 아닌 독자적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분들, 즉 2021판을 오리지널로 접하게 된 분들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다. 그냥 지루한 옛날식 뮤지컬일 수도 있을테니.
4. 이런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2021판에 대한 만족도는 누가 봐도 ‘추억’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2021판은 ‘Maria’, ‘Tonght’, ‘Somewhere’ 같은 클래식 넘버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개인적으로 ‘Mambo’ 씬에서 울컥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극장이라는 게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는 생각도).
아마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매우 중요한 국가 문화 유산인 미국 관객들에겐 그런 ‘생생한 추억’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 밖의 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개인차가 클 수밖에 없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처럼 추천/비추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볼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보러 가고 있을 것이고, 별로 당기지 않는 이들은 괜히 호평에 눈이 멀어 보러 갔다가 ‘아 지루해’ 하고 나올 수밖에 없을 듯. 그러니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당신은 이 영화가 당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다. 혹시 완성도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만듦새는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원작의 틀 안에서.
개인적으로 레이첼 지글러 캐스팅은 10,0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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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영화 열 편을 고르기는 여느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일단 2020년에 이어 극장에 몇번 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개봉 편수 역시 적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대작’의 숫자도 적었고, 매년 즐거움을 주던 마블도 <인피니티 워> 이후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매우 실망입니다.
아무튼 극장 개봉, OTT 개봉을 구분하지 않고 꼽아 봤습니다. 똑같이 OTT로 공개했을 때 50분 3부작 드라마와 150분짜리 영화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같은 질문은 학계로 넘기고, 쪼개지 않고 한 편으로 된 작품은 영화로 분류합니다. 그렇게 10편.
아, 매년 똑같지만 이 리스트의 기준은 언제 제작되어 언제 개봉됐냐가 아니라, 제가 본 시기에 따라 가른 것입니다. 2018년, 2019년 제작 영화라도 제가 2021년에 봤으면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2011년, 1958년작도 좋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적당히 뺐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노매드랜드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든 영화지만 어쩐지 너무나 비현실적인 건 아닌가 싶은 구석이 있다. 이것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의도일까, 아니면 젊음에서 오는 치기인가.
노매드 랜드, 유목 생활은 과연 낭만적일까 (tistory.com)
모가디슈
분명히 더 많은 이야기를 찍어 두었을 것 같은데, 만들어진 영화는 그 나머지를 그냥 상상에 맡긴다. 힘을 주다 만 느낌이 아쉽긴 하지만 담담한 진행이 나쁘지 않다. 어쨌든, 북한이고 남한이고, 극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배려.
자산어보
서로를 인정하는 좋은 스승과 제자도 모든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 서로 애정을 가진 두 사람이 갈린 의견 때문에 헤어졌다가 이견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을 극복한 놀라운 영화.
자산어보, 두 형제의 세계가 만났던 시대 (tistory.com)
프라미싱 영 우먼
한 젊은 남자에게 한 젊은 여자가 ‘당했을 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를 이런 일로….’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과장된 톤이지만, 그 과장 덕분에 영화는 평이함을 넘어서는 힘을 갖는다. <크라운>의 카밀라이자 <킬링 이브>의 작가 중 한명인 에메랄드 페넬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영화.
듄
스타 파워와 스타 감독. 아낌없는 물량.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 부르고 싶은 아름다운 대작. 2021년 단 하나의 영화만 골라 보라는 질문에도, 2022년 23년에 가장 속편이 기대되는 영화를 고르라고 해도 <듄> 이외의 다른 답을 할 수는 없을 듯.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tistory.com)
돈 룩 업
머저리들만 나오는 아담 맥케이의 <석세션>에는 매우 실망했지만 어떻게 머저리들에 의해 몇 안되는 현자들의 목소리가 묻혀 가는가를 보여준 <돈 룩 업>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와 그 무리를 희화화하는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문제를 전 지구적인 공감대를 갖도록 풀어 낸 것은 맥케이와 초특급 배우들의 힘. (사실은 저 아래의 <헌트>와 함께 봐야 균형이 맞는 영화다)
돈룩업, 인류의 대동단결이란 가능한가 (tistory.com)
미나리
코로나 수혜작인가? 이런 작은 목소리에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한 점에서라면 반드시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갖고 있는 담담하면서도 솔직함이 이 영화의 힘. 이런 식의 이야기는 반드시 그 뒷얘기가 궁금하지 않아도 좋다.
소울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그런데 픽사라는 세계 최강의 크리에이터집단은 어떻게 매번 세계인의 기대를 넘어서는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그걸 음악과 재능과 인생에 대한 한 폭의 그럴 듯한 우화로 엮어낸 솜씨에는 찬사를 아낄 수 없다.
찬실이는 복도많지
늦게 본 게 미안했던 영화. 개인적으로 주변의 지인들이 자꾸 겹쳐지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해 지나친 호평을 하게 된 게기가 아닐까 자기검증도 해 보게 되지만, 어느 순간엔가 주인공 찬실이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쭉쭉 뿜어나온다. 강말금, 김영민, 두 배우의 열연과 김초희 감독의 힘.
더 헌트
<돈 룩 업>이 트럼프와 그 무리를 조소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더 헌트>는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지지세력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입으로만 정의를 부르짖고,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 하지만 돈벌이 욕심은 결코 뒤지지 않는 자들을 겨냥한 칼날이 제법 매섭다. 신나는 칼춤 한 판.
헌트, 트럼프는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tistory.com)
HM
씨스피러시
이쯤해서 한번 거론을 하지 않으면 안될듯한 다큐멘터리 한 편. 우리가 바다에 버리는 PET 병이 자구를 망친다고? 그렇게 해서 생긴 쓰레기 섬이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킨다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바다와 인간, 해양 생물과 인류의 생존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 만약 ‘어업’ 자체가 문제라면 당신은 어쩔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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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실이는 복도많지>의 강말금이 신인여우상 6관왕을 차지한 2021년 2월에야 이 영화를 보고 뒷북으로 한마디 하려니 좀 찔린다. 하지만 아직도 본 사람보다는 안 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테니 한마디. 미리 말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이상 크게 웃지 않는 사람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2. 줄거리.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강말금)은 같이 일하던 감독이 급사하는 바람에(죽음의 원인이 나오는데, 미리 얘기하지만 굉장히 어이없다) 일자리를 잃고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된다. 막상 한번 꺾이고 나니 마땅히 일을 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영화를 떠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인생 왜 이 모양인가 싶고 마침 눈이 가는 남자도 나타나는데 과연 어찌 될지.
3. 적잖은 나이. 모아둔 돈도 마땅히 장래가 보장된 일자리도 없는 찬실이 이야기인데 영화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영화계란 특정 직종이 문제가 아니라, 서른 넘고 마흔 넘어서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영화. 영화 속에서도 찬실이의 팔자는 전혀 풀리지 않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찬실이가 운이 좋다>는 제목이 그리 엉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4. 여자 감독들이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들은 그 감독과 주인공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강말금이라는 배우의 발견이 어찌 보면 이 감독의 행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윤승아, 김영민 같은 배우들도 이 영화에서 유난히 생기가 넘치는 걸 보면 ‘감독의 역량이 빛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5. 내친 김에 <산나물처녀>까지 보고 나니 때로 어이없게까지 느껴지는 감독의 유머감각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윤곽이 잡힌다(내 취향이다).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6. 우디 앨런 주연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Play it again, Sam>에는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고, 토니 스코트의 <트루 로맨스>에 엘비스가 나온다면 이 영화에는 장국영이 나온다. 끝. (혹시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가 더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편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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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북. <헌트>는 인간 사냥에 대한 영화다. 소수의 부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냥터에 영문을 모르는 몇몇을 납치해다 풀어 놓고 잔혹한 사냥놀이를 진행한다. 이미 많이 써 먹은, 그렇지만 흥미로운 소재다. 그런데 반골기질이 넘치는 크레이그 조벨 감독은 이런 소재로 <사우스 파크> 실사판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너무 늦게 본 걸 후회한다.
2. 인류애, 공감, 연민, 박애, 평등과 같은 덕목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중받아온 가치이긴 하지만, 오늘날처럼 사회 전반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은 사실 길게 잡아 봐야 100년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젠더, 동성애자, 외국인 근로자, 기타 사회적 약자들도 이런 가치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정서적 배려와 자원의 분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진보적인 가치'라고 여겨 왔다.
3. 각 국가와 환경에 따라 진보/보수의 경계가 다르고, 쟁점도 당연히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진보적인 가치로 여겨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보니 일반적으로 '보수=부를 독점하고 있는 부자들' '진보=착취당하는 민중의 깡마른 대변자'라는 식의 등식이 성립해왔는데, 21세기 들어 상황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점점 더 복잡해져가고 있다. 한국도 포함해서.
4. 이를테면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는 '돈 많고 잘난척하는 진보적 엘리트 놈들'에게 '못 배우고 보수적인 촌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한 사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 쪽이 선이고 다른 쪽은 악이라는 식의 구분은 이미 무의미. 즉 <헌트>에서 보듯 배운 것들이 이렇게 타락하고 오만했으니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나온 것도 놀랍지 않다는 설명인 셈이다.
5. 영화 <헌트>에서 인간 사냥을 하는 쪽은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 쪽, 당하는 쪽은 트럼프 지지자 쪽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양쪽을 바라보는 시선도 공평하다. 한 쪽에선 '너희같이 무식하고 생각없는 것들은 이렇게 당해 봐야 해' 라고 하고, 반대 쪽에선 바로 '매일 인권과 공정성, 심지어 동물권까지 외치는 것들이 왜 이렇게 위선적이냐' 고 야단을 친다. 모두까기의 끝판왕이랄까.
6. <사우스파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피가 좀 나와서 그렇지 영화 <헌트>는 심하게 웃긴다. 보는 내내 폭소가 터진다. 가장 기억나는 장면(대사)들:
"그리고 기후변화는 진짜야!"
"아프로 아메리칸, 이제 다시 블랙이라고 불러도 된대." "누가 그래?" "NPR(미국 공영 라디오)에서." "그거 백인 남성들이 만드는 거잖아."
"기모노? 그거 문화도용(appropriation)인거 알아?"
"(설마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을 네가 읽었단 말이야?"
"캐비어 좋아해요?" "아뇨. 먹어본적 없어요. 규정상 전 못먹게 되어 있어요." "앉아요. 이제 먹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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