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스타트렉 다크니스]

 

'스타트렉 다크니스(Startrek into the darkness)'는 J.J.에이브럼스의 두번째 스타 트렉 시리즈 영화입니다. '스타 트렉-더 비기닝(2009)' 이후 4년만에 나온 영화죠. 대부분의 시리즈 영화들이 2년 간격을 준수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간격이 좀 길었던 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기다려 온 팬들에게도 기다림은 상당히 지루했죠.

 

그리고 그 지루함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물합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밀림 속에서 갑자기 앙코르와트를 발견하는 듯한 즐거움입니다. 아이맥스나 큰 화면을 강추.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스타트렉' 오리지널 TV 시리즈의 등장인물과 설정을 깔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자, 다 아시는 내용은 생략하고 시작합니다'라는 식의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스토리텔링의 제왕인 J.J 에이브럼스는 과거 팬들의 향수('스타트렉' 시리즈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60년대에 이 오리지널 시리즈를 봤던 세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새로 생성된 수많은 '젊은' 팬들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드 팬이라고 해서 반드시 60~70대라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거죠)를 달래면서도 새로운 팬들을 확보할 수 있는 현명한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바로 리부트의 형식으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되, 시점을 오리지널 시리즈보다도 한참 더 앞선, 그러니까 유명한 등장인물들이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부터 새로 벽돌 쌓기를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커크나 스팍 같은 유명한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보면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처음 우주함대에서 인연을 맺게 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 에이브럼스의 새 영화 시리즈를 보는 사람들은 올드 팬이나 새로운 팬이나 동등한 위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불만 많은 올드 팬들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죠. 몇몇 팬들은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아주 느슨하게 영향을 받은 왕년의 영화 '스타트렉: 칸의 분노(Star Trek: the Wrath of Khan, 1982)과의 관계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리메이크면 떳떳하게 리메이크라고 해라!'라는 식인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일단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줄거리.

 

미지의 행성을 관찰하고 있던 우주전함 엔터프라이즈. 외계에서 어떤 문명을 접하든 그 문명의 역사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것이 우주함대(Starfleet)의 절대 의무(Prime Directive)지만 이들은 그 행성에서 두 부분의 선을 넘습니다. 첫째는 스팍(재커리 퀸토)이 화산을 진정시켜 행성의 멸망을 막은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커크(크리스 파인)가 스팍을 구조하기 위해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을 행성민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주함대로부터 징계를 받고 커크는 함장직을 내놓게 됩니다. 한편 모종의 음모에 의해 우주함대의 수뇌부에 테러 공격이 가해지고 고위 지휘관들이 살해당합니다. 테러의 배후에는 존 해리슨(베네딕트 컴버배치)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들을 추적하기 위해 다시 우주함대가 출동합니다.

 

그리고 이 테러의 배후에는 정치적인 음모와 과거의 배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집니다.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환상에 가까운 비주얼의 도가니입니다. 내용은 없고 비주얼만 화려한 영화만큼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것도 없지만, 적절한 플롯의 배치에 가해진 비주얼의 위력은 정말 '궤멸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효과적입니다.

 

특히 곳곳에서 등장하는 스펙터클은 더욱 효과적입니다. 화려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하죠. 영화 초반, 미지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추격 신과 함께 바닷 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하늘로 솟구치는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은 제아무리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려 마음 먹은 관객도 한방에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발휘합니다.

 

 

 

젊은 주인공들 역시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기존의 시리즈가 커크-스팍의 관계에 집중됐던 느낌(이래서 이 둘의 관계를 BL쪽으로 풀어 보려는 마니아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이라면, 의사 맥코이(칼 어반)나 기관장 스코티(사이먼 펙), 그리고 항해사 우후라(조이 살다나) 등의 비중이 만만찮습니다. 조타수 술루(존 조)나 엔지니어 체코프(안톤 옐친)도 시리즈를 거듭하다 보면 주연급이 될 지도...

 

(아니면 아직 그리 핵심 멤버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소한 트러블이 생기면 다음 시리즈에서는 다른 배우로 교체될지도...^^)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시리즈를 살리는 핵심적인 키는 바로 이 괴물같은 배우에게 있습니다. 사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조금 더 빨리 스타덤에 올랐더라면 이번 악역 대신 스팍 역을 제안받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외계인스러운 외모는 물론이고, 일반 지구인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하는 이성 제일주의자의 컨셉트라면 스팍이나 셜록이나 막상막하. 하긴 제안을 받았다 해도 '너무 똑같은 역할을 계속 맡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컴버배치가 거부했을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컴버배치라는 거물 악역의 등장으로 시리즈는 또 한번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최소한 한번 이상은 우려먹을 듯한 느낌.

 

 

 

4년 전,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을 보고 나서 '60년대 SF로의 회귀'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때는 '과학 기술의 미래에 대한 낙관', 내지는 '미국적인 프론티어 정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에서 그랬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서가 90년대 이후 '지나치게 심각해진' SF 영화들에 싫증났던 기존 관객들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했던 것이고, 이번 '다크니스'에서도 그런 경향은 여전히 유지됐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2대차전 시절의 할리우드 영화같은 느낌이 추가됐다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분위기'야말로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9.11과 테러의 위협에 노출된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메시지라면, 꽤 의미 있는 변화가 느껴집니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선 사실 꽤 강도 높은 군국주의가 읽히곤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 늘 강조되는 모토는 '소수의 희생을 통한 다수의 번영'입니다. 주인공들은 '나 하나를 희생시켜서 이 전함이, 혹은 이 전함 한 척을 희생시켜서 전 함대가, 혹은 이 함대를 희생시켜서 인류 전체가' 보호받을 수 있다면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는 각오로 가득합니다.

 

(어떤 때 보면 전함 엔터프라이즈가 아니라 '진충보국'을 가슴에 새긴 1940년대 전함 야마토의 승무원들 같기도 하죠.)

 

이 맥락에서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특히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적(테러)과 맞서기 위해선 우리도 적잖은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안온한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적들만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희생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고 강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쩐지 이 영화는 2차대전 시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이던 애국주의를 보강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입장은 영화 초반에 견지됐던, '외부 문명의 운명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우주함대 본연의 프라임 디렉티브와는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건 현실에서도 '최강의 문명국가'가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죠. 보편적인 도덕률에 따라 개입할 것인가, 누군가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켜볼 것인가.

 

 

 

 

뭐, 이 양반에게 깊이 파고 들면, '어차피 먼 미래의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할테지만요. 아무튼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올 상반기 최고의 오락영화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인 순위에선 '아이언맨3'를 이미 제쳤습니다.^)

 

마지막은 참 코믹한 패러디. 눈빛만으로도 엮으면 이렇게 엮이는군요.^^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728x90

[뜨거운 안녕]이란 영화가 조용히 개봉했습니다. 아, 물론 주인공들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도 했고, 유시민 전 장관이 공개적으로 추천한 영화입니다. '조용히'라고 얘기한 건 '아이언 맨', '전국노래자랑'이나 '스타 트렉'처럼 요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안녕'이라는 제목을 보고 자니 리라는 옛날 가수를 떠올리려면 꽤나 아저씨여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1970년대 히트곡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 제목은 '불사조'였다고 합니다.

 

영화 '뜨거운 안녕'은 '인기 절정의 사고뭉치 아이돌 스타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들로 가득한 호스피스에 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가정에 굉장히 충실하게 사람을 웃기고 울립니다.

 

 

 

 

줄거리. 인기는 최고고 실력도 있지만 성질머리는 최악인 아이돌 록스타 충의(이홍기). 어느날 술집에서 사고를 치고 '당분간 자숙'하는 의미로 지방에 있는 한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겠다고 서약합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 직전부터 자신의 감독자인 다른 자원봉사자 안나(백진희)에게 정통으로 찍혀 버립니다. 험난한 병원 생활을 예감하고 한숨짓는 충의. 봉사고 뭐고 병원에서 도망쳐 잠수를 탈까 고민하는 그의 앞에 다른 환자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환자 주제에 자원봉사자에게 담배를 달라는 건달 출신 무성(마동석), 밤마다 병원을 빠져나가는 봉식(임원희), 대체 왜 병원에 있는지 의심스러운 어린 소녀 하은(전민서)... 충의는 외칩니다. "대체 이 병원 정체가 뭐야?"

 

 

 

 

호스피스(hospice)라는 개념이 한국에 상륙한지도 30년이 넘었고, 꽤 많은 병원들이 호스피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곳이 있다'는 곳 조차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호스피스란 말기암 등 불치병으로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한 환자들이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정신적인 안정과 위안에 초점을 맞춘 병원을 말합니다.

 

충의군이 처음부터 호스피스의 개념을 머리에 담고 갔다면 큰 혼란이 없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런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른이든 아이든, 병원 전체가 이미 가망 없는 환자들로 채워져 있다는 걸 알고 그는 꽤 큰 혼란에 빠집니다.

 

사실 이런 병원의 존재는 코미디 소재라기보다는 뭔가 음울하고 측은한 분위기일 것 같지만, 오히려 '뜨거운 안녕'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남택수 감독은 그 분위기를 영화의 소재로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떠돌이 악사가 조폭 출신에게 "그래, 쳐 봐라, 아주 죽여라. 뭐 제삿날 받아 놓은 놈이 뭐가 겁나겠냐?" 라는 식으로 함부로 대들 수 없겠죠.

 

오래 전의 못된 농담 중에 할아버지가 소방관과 싸우면 이기는 이유로 상대가 '물불을 안 가리는' 소방관이라도 '막 가는 인생'인 할아버지를 당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입원 환자 전원이 '막 가는 인생'인 상황입니다. 시트콤 등 TV 예능 PD 출신인 남택수 감독에겐 이런 설정이 아주 편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막 가는 인생들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늘 적자 투성이인 병원이죠. 그 병원을 지키기 위해 환자들이 뭔가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밴드 '불사조'라는 설정입니다.

 

사실 충의는 '아이돌'이라고는 하지만 뮤지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아이돌이라도 슈퍼주니어 멤버보다는 실제 이홍기의 모습인 FT아일랜드의 보컬에 충실한 설정입니다. 하긴 그래야 악기도 연주하고 곡도 쓰는 배경과 맞을 수밖에.

 

 

 

이홍기와 백진희가 담당한 영화의 비주얼은 상큼하고 쾌적합니다. 물론 연기력을 따진다면 둘 다 어느 정도 점수 이상은 아직 무리겠지만, 다행히도 '뜨거운 안녕'은 그리 심각한 수준까지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착한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을 울리기 위해 넣은 장면도 심각하게 정서적인 장애를 낳을 정도는 아닙니다.

 

 

 

대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중심 축은 마동석에게 가 있습니다.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 신설된 남우조연상의 첫 수상자였던 마동석은 "연기상 수상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줍니다. 전직 조폭이지만 이제는 시한부 인생이 되어 '많이 착해진' 무성. 유난히 소시지에 탐닉하고 담배도 수시로 피워대는 무성이지만 그래도 말기암이라는 환경은 그의 마지막 동심을 끌어냅니다. 죽을 날이 되어서야 지나온 날들을 반성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한가지 희망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는 하느님을 원망하는 무성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웃음과 눈물의 70% 이상을 마동석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차별화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음악의 존재.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 환자(심이영)에게 충의가 불러 주는 이문세의 '소녀'를 비롯해 영화 곳곳에 박혀 있는 노래들은 충분히 힐링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사실 시장에는 '무공해 영화' 혹은 '힐링 영화'를 표방하면서 지독하게 눈물 짜내기의 설정을 통해 보고 난 관객의 피로감을 더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뜨거운 안녕'은 오히려 지나치게 양심적인 영화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도 깔끔하고 쾌적한 느낌, 인공 조미료를 지나치게 쓰지 않은 정갈한 산채 정식같은 느낌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강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힐링 무비는 바로 이런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생활 주변을 돌아볼 때 힐링이 필요하다 싶은 분들께 강추.

 

 

 

728x90

[위대한 개츠비] 다른 수많은 유명한 고전 문학 작품들이 그렇듯, [위대한 개츠비]는 실제로 읽은 사람에게나 읽지 않은 사람에게나, 어느 정도 일정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하얀 색 랄프 로렌 풍 수트로 대표되는 1920년대 풍 패션을 떠올립니다. 이건 당연히 레드포드가 주연한 1974년작 영화의 영향이겠죠.

 

그리고 참 의외였던 것은 많은 남자들이(그리고 심지어 많은 여성들도) 제이 개츠비를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이상적인 남자의 표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소설은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려낸 이 유명한 인물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집요한 집착(^^)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단면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즈 루어만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놀랍도록 완벽하게 원작의 정서를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원작과 원작자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에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줄거리.

 

1922년 뉴욕. 중서부 명문가 출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뉴욕에서 성공하겠다고 결심한 예일대 출신의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는 8촌 여동생 데이지(캐리 멀리건)와 그 남편이며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대부호 가문의 후계자인 톰(조엘 에저튼)을 방문합니다. 거기서 여성 골프 선수인 조던 베이커(엘리자베스 드비키)로부터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남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닉이 알게 된 옆집 남자 개츠비는 '엄청난 저택의 주인이며 뭘로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말마다 수백명을 불러다 파티를 여는' 신비한 남자. 어느날 닉에게 개츠비의 파티 초대장이 전달됩니다. 파티장에서 닉은 조던과 재회하고, 신비의 인물 개츠비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놀랍니다.

 

그리고 닉에게 계속 호의를 베풀던 개츠비는 어느날 예기치 못한 부탁을 해 옵니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데이지를 향한 사랑에 일평생을 바친 제이 개츠비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입니다. 일단은 조금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개츠비와 스콧 피츠제럴드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1920년대라는 시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9년 내려진 금주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술을 사고 팔지 못하게 된 시대. 그렇다고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술을 마시지 않을 리는 없으니 엄청난 밀주 조직과 비밀 클럽, 사설 파티가 유행하게 됩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선을 강요하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도덕이 몰락하고, 경로가 확실치 않은 자금이 투기에 사용되며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풍요로운 시대가 됩니다.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는 재즈가 대중의 음악으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의 시대, 즉 뒷날 재즈 에이지 Jazz Age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인 것이죠. 아울러 플래퍼 Flapper의 등장과 함께 여권 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대에 등장한 개츠비는 전통적인 '미국의 질서'에 대한 도전입니다. 전통적인 세습 명문가 출신이 아닌 갑부. 그런 개츠비에게 데이지를 빼앗길 수 없다는 톰의 분노는 기존 주류 사회의 집단적 반발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은근히 개츠비를 응원하는 닉의 시선 역시 우연의 소산은 아니죠. 도덕적 리더십을 잃은 세습 부유층의 이기적인 행태를 바라보는 피츠제럴드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물론 피츠제럴드 본인의 경험이 깔려 있죠.)

 

 

 

 

사실 개츠비며 데이지는 모두 그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개츠비는 20세기 이후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교육/문화의 측면에서 상류층과 격차를 좁힌 젊은 세대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격차를 극복하는 것은 그와 전혀 다른 차원의 장벽이라는 것이죠. 이런 시각에서 보면 데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성공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의 상징인 셈입니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스토커 적인 집착(^^)을 단순히 '일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낭만적인 이야기'로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그 당시의 시점에서 자신이 데이지를 행복하게 해 줄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도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이건 순전히 '개츠비 혼자의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산업 사회에서 많은 젊은 개츠비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는데, 이때 어떤 여자들은 개츠비(부자가 되기 전의 가난한)를, 어떤 여자들은 톰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개츠비들은 여자에게 선택을 요구하기 이전, 스스로 '지금의 내 상태론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가슴아프지만 지금은 내가 더 커야 해.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뒤 돌아와 말하겠어. 이제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자기 혼자의 생각인데 개츠비는 '당연히 데이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후 수많은 개츠비들의 비극이 뒤를 따르는 것이죠.

 

(물론 '많은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능력이 없더라도 젊은 개츠비를 선택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개츠비의 판단은 실제로 정확했을 겁니다. 돈이 없으면 개츠비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참하게 제외되고, 데이지는 어딘가에 있을 재력가 톰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결과적으로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순전히 '개츠비의 시선에서 내려진 판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단 지금은 내가 더 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개츠비에게 '미래의 어느 시점에 데이지를 되찾을' 기회가 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살아 보시면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아시게 됩니다.

 

(네. 이렇게 해서 많은 개츠비들이 과거의 데이지들을 '건축학 개론'의 수지로 만드는 겁니다. 바로 '쌍년'으로 말이죠.)

 

그런데 스콧 피츠제럴드의 개츠비는 그 희박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나로부터 그녀를 앗아간' 그 남자보다 훨씬 더 큰 재산과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 남자. 그럼 상황은 어떻게 될까요.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그 '절대적인 사랑'이 과연 얼마나 진짜 사랑이냐는 데 있습니다.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는 사랑하는 여자의 수준을 넘은 '전 인생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라도 톰을 사랑한 적이 있어선 안 되는', 그러니까 '완벽하게 나만의 것'인 존재여야 하는 거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려 가며 주말마다 초대형 파티를 여는' 광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건 돈만 많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바즈 루어만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갖고 있는 그런 함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루어만의 특기인 비현실적인 과장의 미학이 바로 이런 개츠비의 허세와 아주 좋은 궁합을 보이고 있다고 할까요.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호오가 엇갈린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그건 루어만의 원작에 대한 애정과 원작자에 대한 존경에 대해 관객이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에 달린 거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이 리뷰의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원작과 원작자이기 때문에, 저는 그 의도를 잘 살렸다고 보여지는 이 루어만의 영화에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반드시 그렇게 느낄 거란 보장은 없겠죠.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인 강추. 놓쳐서는 안 될 영화입니다. (그런데 3D로 봐야 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S.1. 울프심 역을 맡은 아미타브 바흐찬은 인도 영화계의 절대적인 스타. 한때 '세계 최고의 미녀'로 불렸던 인도 여신 아이슈와라 라이의 시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사실 원작에 개츠비가 미남이란 얘기는 없죠.

 

그래도 레드포드가 낫냐, 디카프리오가 낫냐 하는 얘기는 무의미한 듯.

(답이 너무 뻔한 거 아닌가요.)

 

 

 

 

P.S.2. 패션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1920년대, 재즈 에이지라 불리는 시대의 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물론 빼놓을 수 없겠죠.

 

 

 

 

 

P.S.3.  많은 분들이 화려한 음악 - 감독이 바즈 루어만이니 이건 너무나 당연 - 을 얘기합니다. 그 중에서 한 곡, 위의 파티 장면에서 화려하게 편곡되어 등장하는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가 이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인 건 맞는데, 사실 이 곡의 발표 시점은 1924년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 설정이 1922년이니 역사 왜곡인 셈이죠. (아, 물론 비욘세의 Crazy in love도 나오지만 그건 그냥 패스.^^)

 

P.S.4. 원작에서든 영화에서든, 개츠비와 닉이 처음 대화를 트게 되는 계기는 군대 얘기였는데, 원작과 영화에서 표현되는 소속 부대가 다릅니다. 루어만은 왜 부대를 바꿨을까요?

 

P.S.5. 많은 분들이 "대사를 글자로 화면에 띄우는 건 너무 오바 아니냐"는 지적을 하시더군요. 이건 아무래도 '자, 재미있지? 원작 읽어보고 싶지? 원작 사서 읽어'라는 루어만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만치 루어만이 원작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크다는 뜻이 아닐까요.

 

 

@fivecard5를 팔로하시면 새글 소식을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아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728x90

[아이언맨3], 개인적으로 가장 기다렸던 슈퍼히어로 무비입니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극장판을 전제로 생각할 때 제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영웅은 아이언 맨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존 파브로의 유머러스한 연출이 큰 역할을 했던 듯 합니다.

 

이번 '아이언맨3'는 처음으로 존 파브로가 감독하지 않은 시리즈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불안감도 갖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속편입니다. 히트작의 속편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툭툭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3편 이상 상승세를 이어가는 시리즈가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세 편도 쉽지 않죠.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합니다. 지금까지 '아이언맨' 시리즈를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강추.

 

그런 면에서 '아이언맨3'는 '믿고 쓰는 아이언맨 표'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대다수 기존 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에선 반발도 있더군요. 한 쪽은 '어벤저스'의 지나친 개입이 기존 아이언맨 시리즈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 또 한 쪽은 어설픈 배트맨 흉내가 아이언맨의 정체성을 해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간단한 줄거리.

 

스토리는 '어벤저스'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뉴욕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의 저변에는, '과연 아이언 맨 수트를 입지 않은 나는 대체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악당 만다린(벤 킹슬리)이 등장해 전 세계를 위협하고, 미국 정부는 로드 대령에게 아이언맨 개량 수트를 입힌 뒤 새로운 슈퍼히어로 '아이언 패트리어트'라고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한편으론 새로운 싱크탱크의 주역 킬리언(가이 피어스)이 뇌의 특정 구역에 화학물질을 투입해 인간의 형질을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를 가져와 스타크 컴패니와의 협업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스타크 사의 경영자인 페퍼 포츠(기네스 팰트로)는 자칫 인간을 무기화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협조를 거절합니다.

 

 

 

 

'아이언맨3'는 여러 가지로 시리즈의 전환점이 되는 영화입니다. 우선 아이언맨이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등 다양한 주인공들과 공조해서 액션의 규모가 전 우주적으로 확대된 '어벤저스' 이후 처음 나오는 시리즈입니다. '우주의 괴물들'과 싸우다 온 수준의 아이언맨이 다시 지구 수준의 악당들과 싸워야 한다면, 왠지 갑자기 적이 왜소해 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드래곤볼로 치자면 셀과 싸우다 갑자기 다시 피콜로와 싸워야 한다는 수준으로 설정이 축소된다면 누가 봐도 어색하겠죠.

 

하지만 슈퍼맨도 아닌 아이언맨이 갑자기 범 우주적인 적들을 맞아 싸울 수도 없는 일이니 제작진은 머리를 쥐어 짤 수 밖에.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 집필진도 싹 바뀌고, 감독도 셰인 블랙으로 교체됩니다. 1,2편의 감독 존 파브로는 이번엔 그냥 해피 역으로 연기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감독 겸 연출을 맡던 배우가 같은 시리즈에서 감독을 그만두고 배우로만 남게 되는 것 역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일단 악당들이 엄청나게 강력해졌습니다. 약물을 이용해 인간을 강화하는 익스트리미스를 사용하면 인간 개개인이 별다른 장비 없이도 아이언맨을 맞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집니다.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킬 정도죠.

 

(솔직히 아무리 인체를 강화한다 해도, 맨주먹으로 강철 인간을 상대한다는 건 일단 피부가 배겨내지 못할 일이지만 '아이언맨3'는 그런 건 간단히 무시해버립니다. 하긴 뭐 맨손으로 탱크를 때려부수는 헐크도 있다고 하면 그만인가요... 아무튼 '아이언맨3'의 세계에서 아이언맨은 별다른 슈퍼히어로도 아닙니다. 익스트리미스 강화 인간과 1:1로 싸우는 것도 힘겨워 보일 정도.)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평소 고민 안 하기로 유명한 토니 스타크가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벤저스'의 연장선에서라면 논리상으론 충분히 그럴 법 합니다. 다른 슈퍼히어로들은 어쨌든 자신들에게 내재된 능력을 통해 자신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다르죠. 수트가 그의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민이 중요하다보니 '아이언맨3'는 전작들에 비해 토니 스타크의 맨손 활약이 훨씬 많은 작품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이언맨3'인 동시에 '토니 스타크1'인 셈이죠.

 

 

 

 

 

과연 이게 관객들에겐 어떻게 여겨질까요. 1,2편의 팬들에게라면 3편은 위에 든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이단적입니다. 고민이라는 걸 할 이유가 없는 캐릭터인 토니 스타크가 심각한 표정이라니. 이건 팬들에 대한 배신이죠.

 

물론 원작 팬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얘기하는 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통해 구현된 스크린 상의 '아이언 맨' 시리즈를 말하는 겁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은 '관객을 걱정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대의명분에 집착하는 슈퍼맨이나, 안 그래도 심각한데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 더 심각해진 배트맨과는 다른 면이죠. '마스크 속에 있는 나와 마스크를 통해 표현되는 나'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건 배트맨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아이언 맨'을 보러 와서까지 그런 찌질궁상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아이언 맨' 시리즈가 '순수하게 시작했던 과학자들의 타락'이나 '새로운 인지 영역의 개발에는 그만한 책임과 도덕성이 따라야 함' 같은 교훈을 심는 도구로 변질되는 것 또한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일촉즉발의 시한폭탄 같은, 하지만 동기는 순수하고 판단은 나름 합리적인 그런 존재일 때가 매력적이지 인상을 쓰면서 윤리 강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언 맨3'는 약간 위태로운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만 전체적인 톤에서는 아직 '아이언 맨' 시리즈의 전통을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토니 스타크의 수다도 여전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함축적인 개그도 전과 같습니다. '어린이라고 봐 줄줄 아냐' 야말로 토니 스타크 스타일이죠.

 

결론적으로: '아이언 맨3'는 '어벤저' 이후 마블 코믹스의 각 시리즈들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그 이후 첫 결과를 보여줬다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사실 위에서 든 점들 처럼 약간 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 합니다. 특히 지하에 잠자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아이언맨 수트들이 총동원되는 모습도 좋았구요.

 

다만 '좀 더 깊이 있어 보이기 위해' 자꾸만 아이언 맨을 배트맨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절대 사양입니다. 이런 시도는 시리즈의 성격을 아예 바꿔 버릴 여지가 있기 때문에 매우 우려됩니다. 원작 코믹스에는 아이언맨도 이런 고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극장판 아이언 맨 시리즈'의 팬들은 자신들의 히어로가 같잖은 철학을 깔고 나오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아이언 맨이니까 鐵學일까요.^^)

 

 

 

 

 

P.S.1. 아무튼 마블 코믹스의 앞으로 나올 시리즈들은 '어벤저스'를 중심으로 모두 한 타임라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유기적 관계를 보다 강화할 조짐입니다. '아이언맨 3'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다른 히어로들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심지어 브루스 배너(헐크, 마크 러팔로)는 쿠키 영상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쿠키 영상들에 비하면 굳이 볼 이유가 없을 정도입니다. 영화 끝나면 바로 극장을 뜨셔도 좋습니다.

 

 

 

P.S.2. 토니 스타크가 대머리 악당에게 한방을 먹인 뒤 'Did you like it'인가 'Did you get it'이라고 말한 뒤 이 악당을 'Westwolrd?'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의 초기작인 영화 'Westworld'를 말하는 겁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 성인들이 즐길 수 있도록 과거 서부를 재현한 로봇 공원 'Westworld'가 개관되는데 갑자기 기계 이상으로 로봇들이 관광객들을 살육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왕년의 대머리 스타 율 브리너가 무표정한 총잡이 로봇으로 등장하죠(바로 위 사진). '아이언맨3'의 악역들은 이 웨스트월드나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 나오는 제임스 배지 데일이 약간 율 브리너와 닮은 듯도 하군요.

 

P.S.3. 담요(판초 대신^)로 몸을 감고 눈밭에서 아이언맨 수트를 끌고 가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은 어딘가 관을 끌고 가는 오리지널 '장고'의 모습을 연상시키더군요. 타란티노의 '장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장면이.

 

P.S.4. 영화 내내 '크리스마스'를 강조하는 건 아마도 이 영화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되었어야 할 작품이라는 걸 강하게 암시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개봉이 5개월이나 늦어진 걸까요.

 

 

 

 

P.S.5. 알록달록한 아이앤 패트리어트. 어느 나라나 공무원들이 하는 짓은 다 비슷하더라는 고급 유머.

 

P.S.6. 이 글 제목은 당연히 황석영 선생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패러디입니다. 거기선 좋은 제목이었지만, '아이언 맨' 시리즈에까지 이런 식의 식상한 접근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미로 써 봤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타이타닉'의 마지막 시퀀스가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장고:분노의 추격자] 퀜틴 타란티노가 만든 '장고'의 리메이크에는 '장고: 분노의 추격자'라는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원제인 Django Unchained 와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은 아닙니다만, 뭐 '사슬에서 풀려난 장고'라고 할 것도 아니고, 영화 내용과는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많은 구세대들들은 '장고'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몇가지의 선명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수염이 바늘처럼 송송 자라난 프랑코 네로의 얼굴, 말을 타고 멋지게 달리는 대신 관을 끌고 다니는 괴상한 카우보이,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관 속에서 튀어나오는 *** (과연 1966년작 영화의 내용을 갖고 스포일러를 따져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가려 두겠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 '장고'는 최고의 오락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드레날린 아티스트 퀜틴 타란티노가 리메이크한다는데, 기대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죠.

 

그리고 많은 아저씨 관객들은 외쳤습니다. "젠장, 장고라니! (말년에) 관뚜껑 그림자도 못 봤는데 장고라니!"

 

 

 

가장 기대에서 어긋났던 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격자'는 1966년작 오리지날 '장고'와 사실상 아무 상관 없는 영화였다는 점입니다.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 외에는 전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로 위 사진, 스쳐 보기만 해도 '장고다!'라고 할 수 있는 저런 모습의 '오리지날 장고 비주얼'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혀.

 

 

 

 

사슬에 묶여 이동하고 있던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미국 서부 사막을 떠돌던 슐츠 박사(크리스토프 발츠: 발츠라고 읽을지 월츠라고 읽을지 늘 갈등되는 상황)의 도움으로 구조됩니다. 그리고 장고에겐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연인 브륀힐데(케리 워싱턴)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죠.

 

일단 장고에게 킬러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슐츠는 그를 현상금 사냥의 조수로 쓰는 한변, 브륀힐데를 산 대농장주 칼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찾아내 장고와 브륀힐데를 재회할수 있게 해 주려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구세대들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습니다. "아니 대체 이 영화에 왜 장고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일단 '오리지널 장고'를 구성하는 시각적 표현물, 즉 푹 눌러 쓴 모자와 밤송이 수염, 지저분한 외양과 질질 끌고 다니는 관 같은 것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도 안 끌고 다니는 장고가 장고냐'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물론 타란티노는 당연히 할 말을 다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장고' 이후에 수십편의 영화가 '장고'라는 주인공을 이리저리 울궈먹었는데 그걸 다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도 있다는 거냐. 전혀 계승할 생각 없었다. 그런 걸로 따지지 마라. 뭐 영화 속에서 20세기 역사도 제 멋대로 바꾼 적 있는 타란티노니까 가질 수 있는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장고'라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 없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솔직히 플롯 면에서 뛰어난 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타란티노의 영화답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단순 과격의 정서입니다. 관객에게 쓸데없는 추론을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 같기도 합니다.

 

각각의 사건은 꽤 매끄럽게 연결되지만, 개별적인 사건들이 대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갖고 있나를 따지는 건 매우 곤란합니다. 그건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서부극'이라는 뜻의 '웨스턴'이라고 부르는 대신 '서던(Southern: 이 영화의 무대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남부라는 뜻에서. 물론 서부극의 주 무대인 텍사스는 더 남쪽 아니냐고 하실 분도 계시지만, 당시의 텍사스는 '미국'이 된지도 얼마 안 되는 서쪽의 황무지였죠)이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너무도 뼈속까지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수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의 위치를 따지자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과 테렌스 힐의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의 딱 중간 정도?

 

 

 

사실 그렇다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일부 평론가/기자 양반들의 지나친 의미 부여가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독일계로 설정되어 있는 슐츠 박사라는 인물입니다. 이 역할을 연기한 크리스토프 발츠는 전작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Ingrorious Bastards)'에서 나치 장교 역을 맡았죠. 솔직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또 독일계 미국인이 오히려 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이것 역시 무슨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는 얘깁니다. 그냥 할 수 있는 얘기는, 크리스토프 발츠라는 배우가 엄청난 흡인력으로 관객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 정말 최곱니다.

 

영화의 결말을 건드리게 될까봐 살짝 위태롭기도 하지만,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악당 캔디 역시 '극악무도한 미친 놈'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약간 부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비즈니스'를 할 생각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잃는 것은 우리 편, 즉 정의의 편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정의의 편(?)은 모든 문제를 좀 더 평화롭고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감독이 타란티노이다 보니 불행히도 그런 진행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냥 즐겁게, 피의 향연을 즐기면서, 마음 편히(?) 보시면 되는 영화.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자신의 다른 영화를 볼 때보다 조금 더,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어린이가 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영화가 유치하거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유치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이 영화는 '우리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야'라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즐기는 정도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나 그 가이드를 충실히 이행했느냐에 달렸습니다. 평소의 자신은 극장 밖에 두고, '장고'를 본 뒤에 다시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어설픈 의미 부여나 심층적인 해석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마시구요.

 

어쨌든 개인적으론 매우 강추. (물론 역시 개인적으로, 관뚜껑이 안 나오는 아쉬움은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더군요.)

 

 

 

P.S. 올드 '장고'를 아쉬워하는 노친네들에 대한 배려로 프랑코 네로는 한 장면 나옵니다. 술집에서 만나는 아저씨 역으로.^ 아, 물론 '마이애미 바이스'의 돈 존슨도 한 장면 걸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물론 주제가도 가져다 씁니다. 이건 '대체 오리지날 장고라는 게 뭐야' 할 분들을 위한 오리지날 장고 주제가의 뮤직비디오(?). 친절하게 '장고' 한 편에서 장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지 카운트도 해 줍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포스터나 홍보물을 보면 이 영화를 수입해 흥행시켜야 하는 담당자들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다른 상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영화는 타겟팅이 중요할테지요. 즉 '어떤 사람이 볼 만한 영화다'라는 것이 바로 계산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소수의 영화광들은 일단 스크린에 틀어 주기만 하면 뭐든 보겠다는 마음이 들 지 모르지만 '프린세스 다이어리'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과 '제로 다크 서티' 같은 초절정 드라이 액션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측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은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한 듯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맛(?)간 남자/사랑에 훅(?)간 여자'라는 식의 헤드라인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한 변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가지 쯤 되는 사랑의 오만가지 양상을 비틀고 비틀어 영화를 만들다가 마침내 '둘 다 맛이 간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 사랑 이야기를 해 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냥 둘이 그렇게 해서 잘 먹고 잘 살았대(Happily ever after)'를 미덕으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에서 나온 물건 치고는 그 잔향이 만만찮습니다.

 

그야말로 아찔하다고나 할까요. 미리 설레발을 치자면, 아직 3월이지만 제게는 이 영화가 '올해의 영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엄마의 도움으로 퇴원하는 팻(브래들리 쿠퍼). 아내의 불륜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 줄을 놓아 버려 입원하는 신세가 됐지만 막상 퇴원하자마자 어떻게 하면 아내를 되찾을까 하는 생각 뿐입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자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남편과 사별한 뒤, 역시 정신 줄을 놓고 주변 온갖 사람들과 섹스를 해 맛간 여자 취급을 받으며 주위로부터 고립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팻에게 어렴풋이 호감을 갖지만 팻은 티파니 앞에서도 늘 아내 얘기 뿐입니다.

 

 

 

 

분명히 이 영화는 코미디입니다.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상,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이성적인 행동을 할 리는 없습니다. 쓰레기봉투를 쓰고 조깅을 하고, 농구 유니폼이 정장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조건 따라 뛰기'라고 생각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독특한 점은, 이 영화 속의 비정상적 인물들이 나름대로는 열심히 생각해서 최선의 방책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팻이며 티파니, 그리고 일종의 스포츠 도박 중독인 팻의 아버지와 그 친구까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미친 듯 행동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최선의 길을 택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죠. 거기서 더 나아가 감정이입까지 가능하게 해 줍니다. 저런 우스꽝스러운 행동 속에, 멀쩡한 남들이 다 하는 고민과 눈물, 밀당과 감정의 폭발이 다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할리우드의 마법이 한몫을 거듭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팻과 티파니처럼 살짝 맛이 간 사람들은 브래들리 쿠퍼나 제니퍼 로렌스처럼, 1000명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당장 눈에 띌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죠. 우리 주변에 그런 살짝 미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쓰레기 봉투를 뒤집어 쓰고 뛰어도 멋지게 보일 만큼 잘 생기고 쭉빵 미인이라면 평가가 달라지는게 당연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타고난 미모와 감독의 지원에 의해 두 배우는 '비호감형 캐릭터'들을 사랑스러운 주인공으로 승화시킵니다. 두 배우 모두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 그리고 제니퍼 로렌스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 모두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에 팻의 아버지는 로버트 드 니로, 그리고 수시로 탈출을 시도하는 팻의 병원 동기(?) 대니 역으로 크리스 터커가 나옵니다. 친근감을 느끼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죠.)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두 편의 영화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잭 니콜슨 주연 '이보다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또 하나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드렁크 러브'입니다. 두 편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사랑'을 담은 영화죠. 특히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이라는 명대사로 지금껏 기억되는 '이보다...'는 괴상한 행동을 일삼던 작가 잭 니콜슨이 '사랑에 의해' 길들여지는 과정을 담아 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갈채를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가 여자들보다는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이유는, "나도 나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생각하게 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공감을 저절로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비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주는 구원의 메시지는 쌍뱡향입니다. 팻과 티파니는 모두 결함이 큰 사람들이지만, 구원은 어느 한 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물론 양쪽이 서로에 대개 기울이는 정성과 노력이 균등하지는 않지만(어느 순간까지는 굉장히 한쪽이 더 적극적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 뿐만 아니고 현실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순간 서로는 서로의 구원자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대단히 낙관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모르셨다구요. 그럴 리가 없지요. 이 영화는 제목부터 그런 뜻인데 말입니다.

 

silver lining은 구름 가장자리의, 밝고 투명하게 보이는 윤곽 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록 지금은 구름이 가리고 있지만 그 뒤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죠. 이 말 자체가 '희망'의 상징입니다(물론 영화 속에서도 그 말이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playbook은 '계획'이란 뜻이지만 미식축구에서 다양한 공격 포맷을 도식화해서 기록한 '작전집' 정도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포스터 중 하나는 아예 그런 '작전도'를 이용한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행복을 찾기 위한 작전집', '행복 찾기 대작전'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은 다른 이유로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파게 될 수도 있고, 경제난이 이들의 앞에 암운을 드리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라는 물건은 거기까지 가기 전에 끝을 맺어 주죠.

 

전작에서부터 가족간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만약 OCD(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강박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많은 사람들(흔히 '일반인'이라고 하죠)이 성취하는 것, 혹은 목표로 하는 것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과연 행복과 성취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남들이 8점을 노리고, 우승을 노릴 때 5점이면 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도 행복과 만족이 올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해 주고, 1등병이나 경쟁 지상주의에 찌들어가는 현대인(특히 한국인)에게 힐링 무비의 역할을 할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모르겠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치유를 받아들일지는.

 

아무튼, 본래 강추지만, 치유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특히 강추.

 

 

P.S.1. 영화적으론 좀 사족같지만 이런 아버지의 충고는 굉장히 와 닿습니다.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 팻의 아버지가 팻에게 티파니를 놓치지 말라고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Let me tell you, I know you don't want to listen to your father, I didn't listen to mine, and I am telling you you gotta pay attention this time. When life reaches out with a woman like this it's a sin if you don't reach back, I'm telling you it's a sin if you don't reach back! It'll haunt you the rest of your days like a curse. You're facing a big challenge in your life right now at this very moment, right here. That girl loves you. she really really loves you. I don't know if Nicky(팻의 전처) ever did, but she sure as shit doesn't right now. So don't fuck this up.

 

P.S.2. 좋은 가사. 저는 스티비 원더의 원곡보다 이 버전 추천.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신세계].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를 보면서 '무간도'와 '대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이 두 영화 이후에 나온 갱 영화나 언더커버 캅에 대한 영화가 두 영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평을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세계'가 이 두 영화에 대해 지고 있는 빚은 흔히 말하는 '영향'을 넘어 서 있습니다. 이른바 오마주의 세계라고 할까요.

 

사실 개인적으로 '신세계'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무간도'가 아니라 '무간도2'입니다. 전편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지는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무간도'를 훨씬 능가하는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편(수천편?) 쯤 만들어졌을, '대부 오마주' 영화들 가운데서도 손꼽을만한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안 보신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신세계'는 굳이 말하자면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의 '대부 오마주' 영화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을 꼽자면 아마도 '신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풍미'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되겠죠.

 

 

 

 

국내 최대 폭력조직이며 합법적인 기업으로 진화한 골드문파의 보스 석회장(이경영)은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고 풀려난 직후 의문의 사고로 사망합니다. 후계자가 필요해진 상황. 연합 조직인 골드문파의 특성상 최대 계파인 재범파의 보스 중구(박성웅)와 여수 화교 중심의 파벌인 북대문파의 정청(황정민)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릅니다.

 

이런 상황은 본래 경찰이지만 비밀리에 조직에 잠입한 자성(이정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8년 노력한 끝에 정청의 오른팔이 된 자성은 자신을 투입한 강과장(최민식)에게 그만 풀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강과장은 자성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소위 '신세계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죠.

 

 

 

일각에서 흐름이 좀 느리다는 평이 있었지만 2시간14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일단 세 남자의 대립이 촘촘하게 짜여 있고, 세 주인공의 조합은 예상대로 매우 훌륭합니다. 셋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무래도 황정민이겠죠.

 

'달콤한 인생'에서 건달 중의 상건달 - 흔히 말하는 '양아치'에 가까운 - 역할로 연기력을 과시했던 황정민은 그와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한 인물 정청 역을 맡아 신기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이 정말 본능만 있는 벌레같은 인간이라면, '신세계'의 정청은 동네 아저씨같은 인간미와 하이에나같은 악착스러움에다 뱀 같은 냉정함까지, 한 작품 안에서 이런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주연을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만만찮은 비중을 자랑한 박성웅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구가 지나치게 냉정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 그런 냉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미친개가 되는, 좀 더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 합니다.

 

사실 '신세계'는 전형적인 영화이긴 합니다만, 배우들이 연기하기는 또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판타지 느와르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한국 경찰과 조폭의 관계에서 이런 식의 언더커버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경찰이 8년씩 조폭 밑에 들어가서 발각되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일할 수 있으며, 수시로 인사조치가 있는 한국 조직의 특성상 어떤 중간 간부가 -이를테면 강과장이- 8년씩 그런 장기 프로젝트를 보안 위험을 감수해 가며 추진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선 불가능한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이나 미국 같이 넓은 나라에서는 혹시 또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처럼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알고, 출신 지역이나 학력만 추적해 봐도 어느 집 누가 뭘 하는지 다 드러나는 나라에서 과연 이런 식의 철저한 은폐가 가능할까요. 더구나 경찰/검찰과 조폭의 인맥이 이렇게 촘촘하게 엮여 있는 나라에서 말이죠.^^ - 물론 '신세계' 같은 영화를 볼 때에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영화니까 말입니다.

 

다만 '무간도'나 '디파티드' 같은 영화들은 가능한 한 그 현실과의 괴리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개연성을 보강하고 있는 반면, '신세계'는 그런 부분에서 덜 치밀합니다. 예를 들어 송지효가 연기하는 바둑 선생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이 영화의 판타지적인 면을 더 강조해 버리는 면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야쿠자 영화를 의식한 듯한 두 차례의 장례식 장면도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물론 많은 관객들은 무협영화나 '스타 워즈'를 보듯, 이 '언더커버 판타지'를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세계'를 볼 겁니다. 그리고 이 장르에 애정을 갖고 있는 관객이라면 '신세계'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관객 상당수가 '무간도'나 '도니 브래스코'류의 영화에 노출되어 있었을 거라고 전제하면, 자성이 당연히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 같은 장면은 과감하게 제거하는게 당연했을 겁니다. '우리 외국 나가서 살까?' 정도의 대사로 쉽게 넘어가도 무방합니다.

 

다만 영화 전반적으로 유머감각이 다소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러 있는 건 좀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연변 거지 개그는 무거운 흐름을 풀어 주는데 꽤 역할을 합니다만, 오히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한우 개그 같은 것은 들어 냈어도 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신세계'는 그동안 '대부'의 영향권에서 다소 먼, 비교적 독자적인 길을 걸어 온 한국 느와르가, 전 세계적인 '정통'에 다가선 물건을 내놨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아주 매끄럽고 정교하지는 않지만, 묵직한 풍미를 자랑하는 관객에게는 좋은 선물입니다. 특히 여성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다는 장점이 있죠. 전체 영화보다는 배우들의 호연이 더 잘 부각되지만, 휴일을 즐기는 데 후회 없는 선택일 듯 합니다. 추천.

 

 

 

 

P.S.1. 언더커버 캅이 자기 패거리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이란 소재에 관심 있는 분들이 꼭 보셔야 할 영화는 '도니 브래스코'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논픽션에서, 마약 조직에 투입돼 상당 기간 동안 조직원 행세를 했던 주인공은 이런 후일담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직이 일망타진되고 작전이 마무리됐을 때, 법정에서 만난 한 조직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이봐. 내가 잡혔을 때 경찰은 내게 전화를 딱 한 통 걸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어. 나는 그 전화를 변호사도 아니고, 두목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너에게 걸었지. 도망치라고. 그런데 네가 경찰이었다니.' "

 

이런 말을 듣고도 동요가 없다면 그건 정말 냉혈한이겠죠.

 

 

 

 

P.S.2.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 박훈정 감독은 고의로 대답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이건 속편 제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면 석회장을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강과장이 언급하는 '언더커버에서 끈을 끊어 버리고 진짜 조폭이 된 전직 경찰'은 누구일까 하는 것 등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예견하듯,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그 내용은 '신세계'의 프리퀄, 그러니까 이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 이야기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신세계'의 흥행 성공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는 만큼 배우들만 동의하면 우리는 그 궁금증을 속편에서 해소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 그 답이 정 궁금한 분들은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서 '신세계'의 흥행 스코어를 좀 더 올려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아르고]라는 제목만 듣고 벤 애플렉이 신화에 대한 영화를 만드려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특수효과의 거장 래리 해리하우젠의 [아르고 황금 대탐험(Jason and the Argonauts)]의 리메이크 쯤 되는 영화가 아닐까 말이죠.

 

그런데 의외로 영화는 매우 건조한 느낌의 첩보(?) 영화였고, 사실 아르고라는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정보가 들어오는데, 약간 황당무계한 이 영화의 내용이 모두 실화라는 겁니다.

 

지난 연말에는 개봉하자마자 밤 12시대 외에는 개봉관이 없는 상태로 2~3주만에 사라지는 바람에 [아르고]는 자칫하면 전설 속의(?) 영화가 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아르고]가 각종 영화상의 주요 후보로 떠오르면서 다시 이 영화를 볼 방법이 생기더군요.

 

 

 

1979년, 이란 혁명의 뒤끝에서 축출된 팔레비 전 이란 국왕이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이란 내부에서는 팔레비를 내놓으라는 국민들의 분노가 솟구치고, 급기야는 미 대사관이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그대로 인질 상태로 억류됩니다.

 

하지만 정작 대사관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대사관이 점거되기 직전 도망친 6명의 대사관 직원들이 문제가 됩니다. 대사관 안에 억류된 사람들은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고, 이란 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만큼 이란의 원리주의 정부가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건드릴 수 없지만, 대사관 밖의 사람들은 이란 민간인들에게 발견되는 즉시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인 것이죠.

 

일단 그 6명이 캐나다 대사 관저에 숨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대사관 안의 사람들보다 이들을 우선적으로 탈출시켜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집니다. 문제는 방법이죠. 이미 서구 백인들은 거의 모두 이란을 떠나 있는 상황. CIA는 이란으로부터 사람을 빼내 온 전문가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을 불러들입니다.

 

 

 

 

'아르고'는 실화를 근거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실제 사건의 궤적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이 영화가 어떤 결말을 맺을 지 알고 있다는 것이죠. 네. 1980년 1월 29일, 토니 멘데스는 이 6명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어떻게 하면 마지막까지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시킬 것인가' 입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사건, 혹은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가장 먼저 봉착하는 한계입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몇몇 영화들은 실제 역사에서 한사코 벗어나려 하고(그래서 늘 '영화와 실제는 별개'라는 이야기가 나오곤 하죠), 가끔 유별난 영화들은 아예 역사 자체를 무시하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퀜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 입니다. 이 영화는 아예 죽어선 안 될 유명 인물을 죽여 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아예 역사를 바꿔 버리겠다는 심사죠.

 

(물론 타란티노나 되니까 '아니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라는 식의 엄청난 짓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벤 애플렉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또 절묘한 편집을 통해, 유명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관객이 억류자들의 운명을 걱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감독 벤 애플렉'의 놀라운 역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당시 이란의 원리주의 정권을 악의 상징으로 규정해버리거나, CIA를 정의의 사도들로 묘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칭찬할 만 합니다. 애당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내용을 깔아 놓고 시작하죠.

 

거대한 폭발이나 대단한 볼거리 보다는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움직임, 조금씩 변화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디테일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아르고'는 참 훌륭한 스릴러의 전범 같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화면에서 3분에 하나씩 뭔가 터져 주지 않으면 잠이 들어 버리는 분들에겐 중간에 잠들어 깨어 보니 끝나 있는 영화일 수도 있을 겁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머지는 자잘한 얘깃거리입니다.

 

 

 

 

당시 이 사건은 국내에서도 꽤 크게 보도됐더군요. (왼쪽 위 사진은 다른 기사의 사진입니다. 혼동 없으시기 바랍니다.) 영화에서도 다뤄졌듯, 이때까지 이 탈출은 철저하게 캐나다 정부의 공작으로만 발표됐습니다. 대사관에 억류돼 있던 나머지 인질들의 안전 때문이죠.

 

 

 

실제 제작됐던 포스터 'ARGO'. 아래의 영화 속 포스터와는 좀 다른 모습입니다. 아래와 같은 포스터도 실제로 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CIA가 하는 일마다 이렇게 '영화처럼' 매끄러웠던 건 아니죠.

 

 

병력을 동원해 대사관 인질들을 구조해 보려던 시도는 이렇게 헬기 추락 사고와 함게 비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SEAL 대원들이 사진처럼 희생됐죠. 척 노리스 주연 '델타 포스'는 이 실패에 대한 정신 승리의 의미를 갖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왜 등장하지 않았을까 궁금할 정도로 영화 같은 실제 사건.

 

 

그러니까 'ARGO' 작전의 마지막에 실제 탈출자들이 탑승한 비행기의 이름이 'ARGAU'였다는 것인데, 참 희한하군요.

 

 

 

그리고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제 인물들과 상당한 싱크로를 염두에 두고 캐스팅된 것이 분명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은 그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실제 토니 멘데스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사실 벤 애플렉 같이 생긴 요원은 상당히 써먹기 불편하겠죠. 어디 가나 눈길을 끌테니.

 

728x90

[베를린]이 시사회를 연 뒤부터 '물건이 하나 터졌다'는 소문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간간이 '재미있는데 와 닿지 않는다'는 평도 섞여 있었지만, 아무튼 최근에 개봉했던 수많은 영화들에 비해 [베를린]이 '급이 다르다'는 느낌은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사실 직접 보기 전에 오는 이런 호평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호평들에 발맞춰 기대치도 그만치 급격하게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오른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실망하기도 쉽고, 사소한 꼬투리도 크게 보이는 면이 있죠. 반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기대는 안 하는게 좋겠다'고 말하는 영화에서는 의외의 장점이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 홍보사 직원들은 시사회에 오는 기자들에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도 합니다. 무조건 걸작이라고 칭찬하는게 능사는 아니라는 거죠.^^)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큰 기대를 하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물건'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사실 그 정도를 넘어서 최근 수년 내 개봉했던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베를린의 한 호텔. 러시아인 무기상과 아랍 테러리스트, 그리고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이 한 객실에서 비밀리에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산 무기를 아랍 조직에 팔기 위한 비즈니스 미팅인 것이죠. 호텔 밖에는 이 미팅을 감시하는 정진수 반장(한석규)의 국정원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현장을 덮치려는 순간, 스스로를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들이라고 밝히는 무리들이 먼저 방을 습격합니다. 이들은 북한 요원인 표종성에게 '너에겐 관심 없으니 자리를 뜨라'고 요구하죠. 정진수 팀은 방을 떠난 표종성을 추적해 결국 머리에 총을 겨누기까지 하지만 현장에서 놓쳐 버리고 맙니다.

 

국정원 베를린 지부는 초상집. 반면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은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일까 의아해 하고, 북한은 베를린 대사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 아래 군부 실세의 아들이며 엘리트 요원인 동명수(류승범)를 파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사관 통역요원이며 표종성의 아내인 련정희(전지현)에 대한 의혹이 발생합니다.

 

 

 

 

'베를린'은 굳이 강점과 약점을 말하기가 힘든 영화입니다. 우선 시나리오 단계에서 완결성이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말 안 되는 장면', 그리고 감정선을 강화한답시고 영화의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지루한 장면이 없습니다. 액션이 화면을 지배하고, 질주하는 스포츠카에서 물건을 떨구듯 관객에게 액션 틈틈이 사건을 툭툭 던지는 진행이지만, 그렇다고 뒤에 가서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빈틈이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 부분이 이럴진대 액션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 부분은 이미 10년 전에도 국내 1인자였던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니 말입니다. 배우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죠. 많은 사람들이 한석규-하정우-류승범-전지현이라는 라인업에서 이미 사기 라인업이라는 생각을 했을테니 말입니다. 여기에 이경영 곽도원 최무성 김서형 같은 조연진들까지, 짜임새로는 '도둑들'을 능가하는 올스타 팀입니다.

 

특히 90년대의 최강 멜로드라마 주역에서 '색깔있는 악역' 중심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짜고 있는 한석규의 모습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에서 하정우와 류승범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21세기 이후 한국 영화 최고의 대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전부터 류승완 감독의 능력 중에서 '류승범이라는 동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적잖은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베를린'에서 이 생각이 더욱 굳어집니다.

 

(얼마전 '무비위크'에 '왜 돈 들인 영화일수록 촌스러워질까' 라는 식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도 '베를린'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글을 쓰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아래 부분,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영화 보시는 데 방해될 것 같진 않습니다. 혹시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좀 불편하신 분이라면, 미리 보시는 것도 좋을 정도 수준입니다.

 

이번엔 알아서 판단하시길.^^

 

그리고 어쩌나 저쩌나, '베를린'은 강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한국판 본 시리즈' 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제이슨 본이 생각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본 시리즈'를 단 한편도 보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하이테크 시대에 걸맞지 않는 맨손 격투 위주의 액션 신, 그리고 숨쉴 새 없이 흘러가는 진행 속도, 마지막으로 개개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국가와 조직 사이의 '큰 그림' 속에서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 등에서 이 영화는 '본 시리즈'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본 시리즈'가 한 획을 그은 뒤, 스파이 액션 장르의 영화 가운데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일단 본 시리즈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007 시리즈가 아예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007판 제이슨 본 시리즈'로 간판을 바꿔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두고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무비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국내 관객들은 '베를린'을 가리켜 '본 시리즈의 복사판'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듯 합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장 강하게 하는 분들은 본 시리즈와 '베를린' 외에는 본 영화가 거의 없는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미국 드라마 '24'와 '베를린'만을 본 사람이라면 "이거 뭐야. '24'의 복사판이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죠.

 

(이런 예는 사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음악 쪽 얘기지만, 한 10년 전에는 "모든 애시드 재즈 뮤지션들은 스티비 원더의 표절"이라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죠. 90년대에는 신해철이 "오오 듀스는 서태지의 표절이구나"라는 말로 댄스 뮤직에 무지한 사람들을 비꼬기도 했고. 또 일부 관객들은 '한국판 본 시리즈'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밖에 의외의 반응 중에는 '와 닿지 않는다' 는 것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 영화의 강점으로 '불필요한 감정선을 제거했다'는 점을 꼽는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반응입니다. 하정우와 전지현의 묘한 부부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한다'는 입장인데, 그 부분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과 국가의 명령이 인생에 있어 최우선인 '공화국 영웅' 표종성과 부부로 살기 위해서 련정희는 많은 것을 희생했을 겁니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부부로 맺어졌는지, 그리고 첫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쪽은 관객의 상상력이 채워 줘야 할 부분이죠. 영화상으로는 전지현의 쓸쓸한 눈빛이면 충분하지 않았나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전지현의 발전은 참 놀랍습니다. 이미 인생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 여자. 수많은 상처를 안으로 향하게 해서 가슴 속 응어리가 천근은 될 듯한 여자의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승맞으면서도 강인함을 품은 이런 여자의 역할을 전지현이 제대로 연기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역시 세월과 경험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엄밀히 말해 가장 동기가 불분명한 인물은 한석규가 연기하는 정진수 반장인데, 이 부분은 표종성의 대사인 "난 외려 당신(정진수)이 왜 이 일에 목숨거는지 이해가 안 되오"로 만사 OK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어디에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영화 보면서 엄청나게 웃었던 장면.)

 

 

 

 

그밖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는 평에 대해서는 감히 반박하기 쉽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모사드와 CIA, 아랍 테러 조직이 한 자리에 있으면 대략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북한의 해외 대사관이 외화 벌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사전 이해가 없는 사람(더 단적으로 말해 모사드가 이스라엘 정보기구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의 도입부는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도 이 영화 전체가 그리 친절하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화 앞 부분에 '모사드' '슈퍼노트(자막에는 그냥 '위조지폐'라고 나왔죠)' 같은 단어들이 아무 추가 설명 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거 말 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여기에 대한 불만이 적잖이 있는 듯 합니다.

 

이 맥락에서 더 많은 관객을 위해서 좀 더 친절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는 의견은 일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은 감독보다는 제작자가 더 강력한 입장을 내세웠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불친절함'이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겠습니다.

 

(뭐, 그런데 "대체 블라디보스톡은 생뚱맞게 왜 가는 거냐?"는 수준의 관객들도 적지 않은 것 같고...^^  <- 영화를 보신 분이라야 무슨 말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한국 영화가 발전하는 데 있어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을 벤치마킹 하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를린'과 본 시리즈의 관계는 'R2B'와 '탑 건'의 관계 혹은 '타워'와 '타워링'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적이고 깔끔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취향도 있겠지만 '베를린'을 보지 않고 2013년에 영화를 봤다고 말하시면 참 곤란할 듯 합니다. 초대행 배급사의 극장 싹쓸이 만행이 불쾌하신 분들이라도, 그런 어마어마한 힘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 쓰인다면 고개를 끄덕이실 수 있지 않을까요.

 

P.S. 많은 분들의 생각과는 달리 속편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하네요.

 

P.S.2. '세계에서 가장 밥을 맛있게 먹는 배우' 하정우의 솜씨는 그 짧은 시간에도...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기 전부터 엄청난 호평이 밀려왔습니다.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이안 감독은 정말 최고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최고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다.... 이 정도로 호평 일색인 평가는 그야말로 오랜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하더군요. 스스로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인 것도 잘 알고 있는데다 지나친 호평은 기대를 낳고, 역시 과도하게 부풀려진 기대는 항상 실망을 낳는다는 것도 이미 익숙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로 꼽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3D IMAX, 최소한 반드시 3D로는 보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는데 그 말에 동의합니다. 수많은 액션 대작들, 심지어 '호빗'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 영화만치 3D가 효과적인 작품도 드물 듯 합니다.

 

 

 

 

일단 줄거리. 영화는 얀 마텔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략 크게 벗어나는 내용은 없는 듯 합니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던 작가는 인도 폰티체리에서 만난 노인의 조언에 따라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인도인 파이(이르판 칸, 연령대에 따라 여러 배우가 연기합니다)를 찾아갑니다. 거기서 파이는 '신의 존재를 믿게 할만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며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폰티체리에서 동물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 파리의 한 수영장 이름에서 따 온 것이지만 피신(pscine: 프랑스어로 '수영장'이란 뜻이더군요)이란 이름이 영어의 오줌싸기(pissing)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원주율을 뜻하는 파이로 개칭합니다.

 

힌두교와 기독교, 이슬람까지 모든 종교에 빠져들던 소년 파이는 부모의 캐나다 이주 계획에 따라 일본 화물선을 타고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배는 필리핀을 지나 태평양 한복판에서 침몰해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파이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구명보트에서 위험천만한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예고편에서도 보여지듯, 영화의 3/4 정도는 망망대해 위의 배 안에서 파이와 호랑이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 궁금해합니다. 대체 좁디 좁은 배 안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소년이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지? 당연히 드는 생각일 겁니다. 물론 그 내용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이기 때문에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한 지인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바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보고 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죠. 영화 속의 바다는 그야말로 환상의 대우주입니다. 특히 수천마리의 해파리가 이뤄내는 바닷 속 장관, 고래의 등장, 해뜰 때와 해질 때의 수평선, 날치떼의 습격 등은 그야말로 CG의 영상미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장면들입니다. 이런 장면들만으로도 '라이프 오브 파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안 감독의 영화답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면적인 이야기 속에 또 한 층의 이야기를 깔아 두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정교하게. 다만 이 이야기는 아직 안 본 분들의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고 하고자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반드시 영화를 보신 뒤에 와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경고!

 

 

 

 

 

 

 

 

 

소설가가 파이를 찾아가 만나는 첫 장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입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모태로 하고 있는 바로 그 영화죠.

 

물론 소설가들은 언제나 소재를 찾아 해메기 마련이고, 소설가가 누군가로부터 독특한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하는 스토리는 매우 흔합니다. 그런데 '스모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설가는 오기 렌에게 말하죠. "자네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야." 그리고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엔딩 역시 이 장면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마지막 장면, 멕시코의 병원에서 파이는 실제로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낸 그럴싸한 이야기'로 위기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이렇죠. 멕시코의 병원에서 파이는 사고 수습을 위해 찾아온 일본 해운회사 직원들에게 시달립니다. 이들은 "호랑이나 식인 섬이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말고, 납득할만한 '진짜 이야기'를 해 달라"며 파이를 괴롭히죠. 파이는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파이가 '그냥 생각해 낸 이야기' 일까요?

 

지금까지 관객이 본 영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에는 동물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리 다친 얼룩말은 실제로도 다리를 다친 선원으로,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로, 하이에나는 배 위에서도 파이 가족을 괴롭혔던 주방장으로 묘사됩니다.

 

원작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안 감독은 이 대목에서 의도적으로 제2의 해석을 열며 관객의 의심을 자극합니다. 파이는 정말 배 위에서 동물들과 살았던 것일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구명 보트 위에서 서로 죽고 죽인 것은 실제론 사람들이었지만 차마 인간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파이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들을 모두 동물로 바꿔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누구일까요. 파이 자신이 아니라면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친 주방장이 선원과 엄마를 죽이자 파이는 내면의 야수성이 폭발하며 주방장을 죽여 응징합니다. 하지만 파이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신을 호랑이로 삼아 본래의 자아와 떼어놓습니다.

 

파이의 분열된 자아는 배 안과 배 밖에 있습니다. 참극이 일어난 배를 떠나 구명대 위로 피신한 파이는 자신의 야수성을 배 안에 남겨두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을 찾기 싫은 파이는 '보트로 돌아가면 호랑이가 나까지 해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이안 감독은 이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해석'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를 여기 저기 깔아 두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살해하기 전까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숨어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하이에나와 공존하기도 하죠. 진짜 호랑이라면 하이에나가 '죄'를 지어 응징해야 할 때까지 가만히 살려두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파이가 배 안의 식량과 물을 모두 구명대 위로 옮겨 놓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이유 또한 없겠죠.

 

물론 이안 감독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거였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의도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냥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심지어 파이 자신도 -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집착하는 것은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제대로 감상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

 

 

 

 

그러던 어느날, 파이는 우연한 사고로 보급품을 모두 잃고, 마침내 '리처드 파커'와 공존해야 할 필요를 깨닫습니다. 채식을 포기하고 야수성을 받아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파이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본능을 달래기 시작합니다. 고기 한점 한점을 먹이며(먹으며) 말이죠.

 

식인의 섬은 참 기묘한 상징입니다. 특히나 미어캣으로 가득 찬 섬이라니... 파이의 환상 치고는 참 희한합니다. 정답이라는 근거는 없지만(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답'이라는 말 자체가 이 영화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한가지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어쩌면 파이는 바다 위에서 또 다른 표류자를 만나거나, 인간이 살고 있는 어떤 섬에 도착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굳이 그 존재들이 미어캣으로 표현된 것은, 자신에 의해 희생된 - 자신의 먹이가 된 - 존재들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의 발현일 수 있습니다.

 

그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미어캣 - 두 다리로 걷는 동물 - 이라는 형상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였는지도 모르지요.

 

 

 

 

여기서 파이는 꽃인지, 과일인지 모를 덩어리 안에서 인간의 이빨을 발견합니다. 끼워 맞추자면 이건 파이 자신의 용변일 수도 있습니다(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에 용변을 매화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와 마주치는 순간입니다만, 파이는 역시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섬(식인이 일어난 공간)이며, 그 섬을 떠나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죄악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는 섬을 떠나는 배 안에 '리차드 파커를 위한 식량(미어캣)을 챙기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인간이 사는 문명의 땅에 도착한 파이. 이제 더 이상 야수성과 공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파커는 밀림 속으로 떠나갑니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겠죠. 파이가 또 한번 야만의 환경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면 언제든 호랑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되고 나면 '파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한줄 평들은 '자연과 소년의 아름다운 조화' '공존의 미학'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이면은 무시무시한 이야기거든요. 마지막 장면, 파이가 평범한 가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민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인 존재인지를 드러내 주는 장치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채식주의자인 '온화한 파이'의 모습도.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이라는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사건을 그대로 서술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 보다는 실제 일어난 일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에 비유해 우회적으로 표현하곤 했죠. 넓게 보면 인격화된 신의 존재도 결국은 이런 비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영화 '파이 스토리'는 인류가 어떻게 해서 우화라는 것을 탄생시켰는지, 혹은 어떻게 해서 비유법과 과장법을 발달시켜 왔는지에 대한 깔끔한 설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소름끼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대자연 전체를 대상으로 볼 때 삶이라는 것은 항상 우아한 행위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의 교훈은 오히려, '삶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사소한 교훈이나 도덕, 가치나 율법 따위보다 항상 상위에 있다'는 준엄한 가르침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문명은 낳은 자와 태어난 자,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와 섬김에 대해 가르치지만 여왕개미는 위기에 놓이면 자기가 낳은 알과 애벌레를 먹고 생존하라는 본능에 따릅니다. 이것은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생명의 법칙이죠. 자연은 본래 도덕 이전에 존재합니다. 이른바 노자가 말한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가르침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야수의 공포를 길들이며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물아일체의 경지(크리쉬나의 입안에 있는 우주처럼..) 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켠에서는 그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치열한 생존의 원칙을 - 인간들이 문명을 앞세워 가끔 부정하곤 하는 - 일깨워주기도 하는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어쩌면 이런 감춰진 이야기가 없었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흔한 어린이용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더없이 매력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이른바 '우화의 탄생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P.S. 인도 철학...까지는 몰라도 인도 신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본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온갖 신들을 주워섬기던 파이는 정작 번개를 보면서 인드라를 떠올리지는 않더군요.^^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레미제라블]을 극장에서 보기를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클로드 미셸 숀버그의 [레미제라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입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무대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원작의 스펙터클은 어떻게 구현됐을까, 일단 이름값으로는 최강인 스타들이 어떤 식으로 노래를 소화할까. 당연히 궁금했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톰 후퍼 감독의 고민과 노력에 대한 칭찬입니다. 이번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면, 왜 여태까지 이 뮤지컬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 원작 소설 '레미제라블'은 최근 5권으로 완역본이 나왔을 정도의 대작입니다. 이미 수차례 영화화됐지만 만만찮은 규모의 물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대작이죠. 이런 규모의 작품과 무대용 뮤지컬을 조화시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시카고'나 '아가씨와 건달들'과는 다른 작품이라는 얘기죠.

 

물론 '그래서 그 결과물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걸작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좀 망설이게 됩니다만. 

 

 

 

 

'레미제라블'을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 오래 전 이 뮤지컬에 대해 처음 글을 썼을 때도 했던 얘기지만 - 우리나라의 많은 분들은 '레미제라블'이 그냥 "미리엘 주교가 전과자 장발장에게 '자네 왜 은식기만 가져가고 은촛대는 놓고 갔나'라고 말해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19세기 초,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던 하층민들의 세계를 진지하게 그려보려 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결국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는 1832년 6월 파리 슬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봉기로 이어집니다. 물론 민중의 힘에 기반한 혁명이 아니고 일부 학생들의 봉기였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죠.

 

 

 

 

뮤지컬에서도 수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스토리의 진행상 가장 중요한 노래는 학생들이 봉기를 결의하고 부르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봉기 전날 밤, 등장인물 전원이 다음날 아침 각자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까를 놓고 부르는 'One Day More'입니다. 각자 흩어져 자기의 삶을 살던 인물들이 이 봉기를 통해 같은 시공간에 모이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죠.

 

(그 결과도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이 봉기의 핵심 지도자인 앙졸라는 실패와 함께 이슬로 사라지지만 본래 명문가의 후손인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구조되어 본가로 돌아가 코제트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게 되죠. 여담이지만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중에서도 비슷한 궤적을 걸은 분들이 적지 않다는...)

 

 

 

 

아무튼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톰 후퍼 감독은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 결과 내린 결정은 '아무래도 영화라는 장르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노래를 희생시키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대 뮤지컬에 익숙한 분들이 팡틴 역의 앤 해서웨이가 부르는 'I Dreamed a Dream'이나 에포닌 역의 사만사 바크스가 부른 'On my own'을 들으면 뭔가 아쉽고 싱겁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자베르 역의 러셀 크로가 부른 'Stars'는 더 말할 것도 없을 정도.

 

많은 분들이 '아무래도 영화배우들이 전문 뮤지컬 배우들보다 노래를 못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합니다. 게다가 무대 뮤지컬에서 당연히 사용하는 전용 극장의 울림(심지어 노래방 마이크도 에코 빼고 들으면 이상하죠^^)이 사라진 노래들이라 더욱 박력 없게 들리기도 합니다. 사만사 바크스는 레미 25주년 기념 공연에도 출연한 정통 뮤지컬 배우 출신이지만 이 영화에선 완전히 힘을 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영화 전편을 볼 때 톰 후퍼 감독은 이 작품을 제대로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무대 뮤지컬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판단은 영화 전반부까지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앤 해서웨이가 부르는 'I Dreamed a dream'은 무대 뮤지컬과는 기능이 다릅니다. 무대에선 이 노래가 공연 시작 후 40분 가량이 경과된 상황에서 관객들을 강하게 움켜쥐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관객을 압도하는 파워가 필요합니다.

 

(아래 예고편에서 그 노래의 하이라이트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노래만 따로 들었을 때에는 '고작...?'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 속에서 들으면 확 달라집니다.)

 

 

 

무대 뮤지컬과는 달리 톰 후퍼의 영화에서 이 노래는 배우의 가창력이 아니라, 영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 무대판에서 이 노래의 시점은 팡틴이 창녀가 되기 전이지만, 영화에서는 창녀가 된 뒤에 신세한탄을 하는 시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감독은 그 상황에서 무대의 배우들이 부르듯 절규하는 팡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어색하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의도야 어떻든 해서웨이의 가창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이 노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대표하는 트랙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독의 선택은 뒤로 가면서 조금씩 문제를 드러냅니다. 중간 휴식도 없이, 모든 대사가 노래로 처리되는 영화를 계속 본다는 것은 일반 관객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대라면 관객들도 박수를 쳐야 할 노래와 쉬어 갈 노래 사이에서 나름 체력관리(?)를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생동감이 떨어지는 영화 관객들은 90분쯤 지나면 눈에 띄게 지쳐갑니다. (제 옆자리의 중년 남성 관객은 어찌나 한숨을 크게 쉬던지...)

 

무대든 극장이든 가장 힘을 줘야 할 부분인 바리케이트에서의 대치 장면도 그리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극장용 영화에서 뭔가 민중 봉기를 그려내려면, 관객들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스펙터클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배경을 펼쳐 놓으면 톰 후퍼 감독이 기대하는 '배우들이 현장에서 노래하며 연기하는' 뮤지컬로 그려내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극장용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바리케이트 장면은 골목 하나를 배경으로 한 초 미니 사이즈로 표현됩니다.

 

 

(위 사진의 거대한 바리케이트는 엔딩 신에만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오해 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레미제라블'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일단은 워낙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원작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다음엔 정상급 배우들의 열기 넘치는 호연 때문이죠. 톰 후퍼 감독은 노래 하나 하나에 클라이막스를 두기 보다는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데 역점을 뒀고, 배우들은 그 연출에 맞춰 최고의 기량을 뽐냈습니다.

 

주요 배우별로 얘기하자면 최고의 캐스팅은 아무래도 앤 해서웨이입니다. 노래로 전설적인 브로드웨이 스타들과 경쟁하는 대신 팡틴의 캐릭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영화 전체를 견인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할만 합니다.

 

 

 

 

휴 잭맨도 노래와 캐릭터 모두 AA급으로 매길만 합니다(사실 장발장 역은 노래에 큰 비중이 있는 역할은 아니죠^^). 반면 러셀 크로. 연기야 흠잡을 데가 없지만 노래는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습니다. 기본은 해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좀 아깝습니다. 코제트 역 같은 단역을 이런 배우에게 맡기는 건 누가 뭐래도 낭비죠.

 

 

 

 

결론적으로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서, 뮤지컬의 영화화가 성공적이려면 노래/춤의 비율이 최소한 6:4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카고'나 '그리스'같은 작품이죠. '레미제라블' 처럼 노래와 춤의 비율이 9:1 이고 처리해야 할 드라마의 볼륨이 큰 작품을 '뮤지컬 영화'로 만들기 위해선 타협이 불가피합니다. 어떻게 해도 입체감이 희생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감독이 숭숭 생략하고 넘어가는 무대 뮤지컬과는 달리 원작의 스토리를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의지까지 갖고 있다면 더욱 더 힘든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톰 후퍼의 '레미제라블'은 최고라고 하기엔 좀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최선의 영화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어도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영화화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보다 더 잘 만들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서를 달자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아무래도 무대 공연을 봐야 할 것 같군요.

 

 

 

P.S. 사실 콤 윌킨슨의 출연은 전혀 모르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윌킨슨이 출연해 줘야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 역이라니.^^

 

오리지널 웨스트엔드의 장발장으로 유명한 윌킨슨이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가장 어울렸던 역할은 '맨 오브 라만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국내건 국외건, 누구도 그가 불렀던 'The Impossible Dream'을 능가하지는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안 들어주면 또 서운하겠죠.^^)

 

 

 

P.S. 가장 감독에게 불만이 컸을 것 같은 배우는 앙졸라 역의 아론 트베잇. 훌륭한 목소리와 외모를 보여줬지만, 앙졸라 역의 핵심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앞부분 독창을 없애 버렸으니, 발코니 신이 없는 로미오가 된 셈이죠.

 

앙졸라 뿐만 아니라 이 노래의 배경을 야외로 끌고 나오자는 발상은 오랜 고민의 결과인 듯 하지만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카페를 배경으로 했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을 거라는 생각. 뭐 이 장면도 영화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한 분들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런 분들에겐 반드시 무대 공연의 박력을 느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한 글:   http://fivecard.joins.com/130

현재 국내에서 투어 중인 '레미제라블'에 대한 글:   http://fivecard.joins.com/1079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호빗: 우연한 여행(이하 '호빗')]은 개봉 전 말이 많았던 영화입니다. [호빗]을 본 많은 사람들이 - 심지어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 이 영화가 3부작으로 기획됐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큰 작용을 한 듯 합니다. '뭐야, 왜 이렇게 끝나?'에서부터 '아니 왜 사건의 진도가 이렇게 안 나가?' 까지 다양한 불만이 나왔습니다.

 

사실 '호빗'이 3편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건 좀 무리로 보이긴 합니다. '반지의 제왕'이야 원작이 3권(한국에선 6권)이니 3부작이라도 뭐랄 사람이 없겠지만 '호빗'은 원작도 그리 두껍지 않은 1권인데 대체 그걸로 어떻게 영화 세 편을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하지만 그런 혹평들이 기대를 털어내게 해 준 덕분인지, 직접 본 '호빗'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피터 잭슨은 '호빗'을 원작 그대로 3부작으로 쪼갤 생각은 애당초 없었던 모양입니다. 큰 줄거리는 소설 '호빗'을 따라가되, 원작에 나오지 않는 부분들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메꿔 넣어, '반지의 제왕' 마니아들이 즐거워할 만한 프리퀄의 요소를 훨씬 풍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반지의 제왕'의 구도를 재현하려 한 근거는 바로 이런 인물에서 드러납니다. 사진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난쟁이' 킬리입니다.

 

...이런게 난쟁이라니! 이건 사기야! 게다가 활도 잘 쏜다니. 아무래도 이건...^^

 

 

 

일단 간단한 줄거리.

 

전혀 모험 따위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호빗 빌보 배긴스(마틴 프리먼)은 어느날 회색 마법사 간달프(이언 맥캘런)의 방문을 받습니다. 빌보는 '함께 모험을 떠나자'는 간달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바로 다음날 '참나무 방패 소린'(리처드 아미티지)이 이끄는 열 세 난쟁이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난쟁이들의 목표는 강력한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난쟁이들의 도시 예레보르를 탈환하겠다는 것. 난쟁이들의 먹성에 식품 저장고가 텅 비는 참사가 벌어지지만, 곡절 끝에 빌보는 소린 원정대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은 초원, 눈덮인 벼랑, 오크, 고블린, 트롤, 엘프 등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영화는 아주 친절한 편은 아닙니다. '본래 호빗들은 손님 접대를 좋아한다' '호빗들은 요리를 잘 한다' '난쟁이들은 매우 조용히 움직이고, 호빗들은 그보다 더 조용히 움직이기 때문에 은밀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호빗만큼 이점을 가진 종족이 없다'는 등의 설명이 있다면 영화 '호빗'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겠지만, 이런 설명들은 영화에선(대화 중에 나오긴 합니다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말로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입니다. 온 국민이 다 극장에서 본데다 기회만 있으면 케이블TV 영화 채널에서 시도 때도 없이 틀어 준 결과, 초등학생에서 할아버지까지 전 세대가 너무나 친숙하게 여기게 된 '반지의 제왕' 3부작 덕분이죠. 영화의 국적을 불문하고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사상 이보다 더 친숙한 영화는 없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이 분까지 나오시니 뭐 친숙함은 이루 말할수가...)

 

영화의 흐름은 어쩌면 피치 못하게 '반지의 제왕' 1편의 진행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원정대가 조직되고, 주인공 호빗이 예기치 못하게 그 일원이 되고, 험한 길을 가면서 괴물들과 싸운다는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원정대의 실질적인 리더는 (그때나 지금이나) 간달프. 그리고 원정대의 표면적 리더는 (그때나 지금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미중년 전사.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원정대에 활기를 불어 넣는 꽃미남 궁수가 있습니다. 아라곤이 했던 역할을 소린이, 레골라스가 했던 역할은 킬리가 한다고 보면 딱 떨어질 구도입니다. 김리 역할은.... 뭐 10명이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반지의 제왕'의 구도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속셈이 너무 보인다는 얘기.

 

 

(카리스마틱 리더 소린 역의 리처드 아미티지,)

 

 

(기형 난쟁이 킬리 역의 에이단 터너. 이제 올란도 블룸은 끝난 거죠.)

 

 

(열 세 난쟁이 중 하나인 이분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주역 김리의 아버지인 글로인입니다. 배우 이름은... 근데 알아서 뭐 하실라구요?)

 

이런 구도는 사실 약간 위험하기도 합니다. 많은 관객들이 편안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면도 있지만, '뭐야, 재탕이야?'라는 느낌을 줄 여지도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관객들이 지루하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관객들은 '고작 세 편'으로 끝난 '반지의 제왕'을 좀 더 오래 오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 '호빗'을 세 편으로 만든다는 의도 자체가 바로 이런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봐야 할 겁니다.

 

 

 

'호빗'의 주인공 마틴 프리먼이 엘라이자 우드만큼의 인기를 얻기는 쉽지 않을 듯 하지만, 의외로 대사도 별로 없는 킬리 역의 에이단 터너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다른 난쟁이들이 체형 비율에서도 난쟁이 표준인 4~5등신을 유지하는 반면 킬리는 키만 작을 뿐 신체 비율도 8등신입니다. 여성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 캐스팅의 냄새가 뚜렷합니다.

 

'호빗'을 보기 위해 원작 '호빗'을 새로 사서 읽을 필요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사실 원작을 읽어도 큰 방해는 되지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경우와는 달리 원작보다 영화가 훨씬 풍성하니까요).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에 앉으시면 다른 고민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다소 쫓기듯 진행됐던 '반지의 제왕'에 비해 '호빗'은 훨씬 여유있고, 느긋한 영화라는 점만 기억하시면 세 시간이 짧게 느껴지실 겁니다.

 

 

단지 이렇게까지 '반지의 제왕'의 주역들이 다 나와버리면 전편의 아라곤과 아르웬이 참 그리워진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케이트 블랜칫이 시리즈 최고의 미녀라는 건 아무래도 '호빗'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그렇다고 수염 난 드워프 여주인공을 등장시킬 수도 없고...^^)

 

시리즈 2편에 가면 타우리엘이라는 새로운 엘프가 나올 듯 한데 그거나 기대해봐야겠군요.

 

 

 

 

P.S.1. HFR(High Frame Rate)을 적용한 초당 48프레임의 3D로 봤는데 기존의 영화와는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너무 선명해서 영화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판타지 영화 특유의 약간 부드러운 터치와 몽환적인 영상이 사라지고, 장시간 카메라를 고정하고 찍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화면이 이어지다 보니 오히려 영화의 현실감이 떨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반면 HFR을 먼저 보고 그냥 디지털 2D로 다시 보신 분은 '두번째는 화면이 뿌예서(?)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 하시는 걸 보면, 역시 적응하기 나름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영화가 아니라 자연 다큐 혹은 전편을 거대한 세트에서 촬영한 시트콤 같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특히 낮 장면이.)

 

P.S.2.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절대 알아볼 수 없는 두가지 역으로 모두 합해 약 20초간 나옵니다. 출연료를 받았을지가 매우 궁금.^^ 아무튼 셜록과 왓슨의 대결은 1편엔 없습니다.

 

P.S.3. 과이히르(영화에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호빗' 후반부를 보시면 누군지 저절로 아시게 됩니다)를 불렀으면 좀 더 태워달라고 하지 그렇게 엉뚱한 데에 내려주면...^^

 

 

 

 

P.S.4. 본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드워프 종족의 특징은 '키가 작고, 손재주가 뛰어나고, 협동심이 강하고, 배타적이며, 보기보다 싸움도 잘 한다'는 것인데 일각에서는 이 드워프가 어찌어찌해서 북유럽 지역으로 흘러들어온 아시아 계 민족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톨킨이나 잭슨의 해석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얘깁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어쨌든 피터 잭슨, 마틴 프리먼, 엘라이자 우드는 현실에서도 호빗 사이즈 인증.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루퍼]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무한 루프'라는 말을 느끼게 합니다. 끝없는 순환의 고리를 가리키는 말이죠. 타임 머신을 다룬 SF 팬들에게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라이언 존슨 감독의 '루퍼'는 그동안 '터미네이터' 이후 수백편 쯤 등장했던 '미래에서 온 킬러'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의 성패는 당연히 얼마나 참신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퍼'는 근래 나왔던 몇몇 영화들 가운데서 단연 첫손에 꼽힐 만한 매력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라이언 존슨 감독의 데뷔작 '브릭'을 보신 분이라면 이 감독의 기발함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금주법 시대의 시카고나 1950년대 LA 암흑가를 배경으로 할 만한 이야기를  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바꿔놓았던 희한한 영화였죠.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10대를 갓 지난 조셉 고든 래빗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고든 래빗이라는 거야?"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특수분장의 힘.^^)

 

먼저 '루퍼'의 기본 설정.

 

근미래인 2044년. 이 시기에는 30년 뒤인 2074년의 악당들과 손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깅 기술(?)의 발달로 시체의 완벽한 처리가 힘들어진 2074년의 범죄조직은 그들의 죽여야 하는 사람들을 타임 머신 기술을 이용해 2044년으로 보내고, 2044년의 악당들은 미래에서 전달되는 살해 대상들을 죽이고 시체를 정리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 댓가로 은괴를 받죠. 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자들을 루퍼(looper)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미래의 조직이 이 루퍼들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고, 2074년의 루퍼들을 2044년의 그 자신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걸 '해고'라고 부르죠. 얼굴을 가린 채 미래에서 날아오는 살해 대상에게 샷건을 날린 뒤, 평소 '동봉되어' 오던 은괴 대신에 금괴 뭉치를 발견하면 그건 죽은 사람이 그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화의 앞부분은 이 설정을 관객에게 가르쳐 주는데 소요됩니다. 사실 이런 설정이라면 그 다음에 진행될 과정은 뻔한 셈이죠. 루퍼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조(조셉 골든 레빗) 앞에 미래의 자신(브루스 윌리스)이 나타나고, 순간 당황한 조가 미래의 자신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영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그리 뻔하지 않습니다.^^

 

 

 

 

타임머신을 다루는 영화 가운데 몇몇은 평행우주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대부분은 단선적인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개 과거를 바꿔 놓으면 바로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쪽이 스토리를 만들어내기기 때문일텐데, '루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조의 친구 세스(폴 데이노)가 미래의 세스를 죽이는 데 실패했을 때, 조직은 미래의 세스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세스를 죽이면 미래의 세스는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바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2044년의 시공간에 '현재의 조(젊은 조)'와 '미래의 조(늙은 조)'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현재의 조는 미래의 조에 대해 모르지만 미래의 조는 현재의 조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현재의 조가 미래의 조에게 있어 '기억'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30년 전의 기억이라 약간 희미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본 설정에서 더 나아가 '루퍼' 속 세계에서는, 현재의 조가 그때 그때 하는 행동이 모두 미래의 조의 기억에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젊은 조가 어디 가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든, 늙은 조는 거의 실시간(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으로 젊은 조가 보고 느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젊은 조의 모든 행동은 늙은 조의 '기억'이기 때문이 그렇다는 얘기죠.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데도 그 '기억'의 매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게 어찌 보면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니, 까짓 '어차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억의 작용'은 '루퍼'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루퍼'를 매력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부분 외에도 '루퍼'의 시간 여행 설정에는 상당히 허점이 많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인 상황이죠. 그리고 따지자니 우리가 시간여행을 해본 것도 아니고...^^)

 

 

 

라이언 존슨의 영화 두 편('브릭'과 '루퍼')을 보고 나면, 그는 좋은 시나리오 작가이긴 하지만 아직 좋은 감독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구변은 좀 모자란 친구'와 같다고나 할까요. 화면 속 사건들은 재기넘치고 흥미롭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감독으로서의 스킬은 아직 더 갈고 닦아야 할 듯 합니다.

 

간혹 '루퍼'를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야기에 완급 조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슨의 이야기는 그냥 고저장단 없이 계속 일정한 톤으로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이게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스타일이라면 좀 곤란한 스타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퍼'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독특한 방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내가 30년 뒤의 세게에서 날아온 '내일의 나'를 죽여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게 꽤 많은 돈을 주면서, '이 돈은 30년 뒤에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퇴직금'이라고 말하는 상대가 있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죠.

 

'30년 뒤에 죽는 대신 거금을 받을래, 아니면 그냥 목돈 없이 살래?'라는 선택이 주어진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인생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의 대부분은 개개인의 선택 밖에서 결정되곤 합니다. 그리고 '루퍼'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현재의 세계에서 루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선택인 셈이죠.

 

그 일을 해서 현재의 세계에서 먹고 사는 이상 딱 30년이든, 그보다 약간 긴 시간이든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략은 짐작하게 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루퍼들은 '언제든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미래를 향해 총을 쏘게 될 사람들'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뭇 상징적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벌어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향해 총질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을 봐도 그렇고, 인류 전체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 (물론 어찌 보면 직장생활에 대한 우화로 읽히기도 합니다.^^)

 

 

 

'루퍼'의 세계관에서 또 한가지 매력적인 점은 모든 인물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인물에게 분명한 명분이 있고, 그 명분의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인공과 상대역(악역?)이 경쟁할 때, 싸울 이유가 한 쪽에만 있거나, 승부가 어느 한 쪽의 태만이나 무능으로 결정된다면 참 그보다 맥빠지는 일도 없죠.

 

하지만 '루퍼'의 주역들은 모두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정말 이래도 될까. 나 하나 잘 되자고 이렇게 남을 희생시켜도 되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건 나 자신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며 전력을 다합니다. 자연스럽게 설득력이 솟아납니다.

 

 

 

 

물론 '루퍼'의 성취는 좋은 배우들의 가세 덕분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닮아 보이기 위한 특수분장으로 아예 인상을 바꿔 버린 조셉 고든 래빗은 다소 나약해 보이는 평소 이미지를 벗고 또 한번 연기 폭을 넓혔습니다.

 

 

 

 

에밀리 블런트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때만 생각해선 큰일 날 변화를 보여줍니다.

 

 

'루퍼', 아무튼 자신있게 권할만한 작품입니다. 상영관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라이언 존슨의 전작 '브릭'도 은근히 볼만한 작품입니다. 특히 '밀러스 크로싱'이나 '말타의 매' 같은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법 합니다. 꽤 오래 전에 썼던 리뷰입니다.

 

'브릭'을 보면 '말타의 매'가 보인다 http://blog.joinsmsn.com/fivecard/9125446

 

P.S.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 역으로 나온 중국 여배우는 허청(許晴, Xu Qing)입니다. 진개가의 왕년 역작 '현위의 인생' 등에 나왔다는데 그 뒤로는 TV 활동에 더 주력한 모양이군요.

 

아, '코요테 어글리'로 깜짝 스타가 될 줄 알았던 파이퍼 페라보는 갈수록 역할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선 젊은 조가 은근히 좋아하는 애 딸린 스트리퍼 역입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스카이폴]의 예고편은 너무나 멋졌습니다. 스피디하면서도 품격있고, 스토리를 내비치는 듯 하면서도 정작 궁금할만한 점은 그대로 남겨둔, 그야말로 예고편의 클래식이라고 부를 만 했습니다.

 

특히나 감독의 이름은 샘 멘데스. 물론 아직도 1999년작인 '아메리칸 뷰티'의 명성을 뛰어넘을만한 영화를 내놓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정교하고 세련된 연출은 일찌기 정평이 난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상당히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물론 만족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겁니다. 액션 영화가 갖고 있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 정교한 이야기 구조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 007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낙천적 세계관에도 역시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 그저 다니엘 크레이그만 멋지게 나오면 다른 건 무시해도 좋은 사람, 이 영화의 PPL에 자사 상품을 넣은 사람, 그리고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지상 최고의 영화이고, 심지어 주인공만 바꿔 이 영화들을 다시 찍어도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박수갈채를 보낼 영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목부터 이상합니다. '스카이폴'이 아니고, '다크 본드' 혹은 '다크 본드 라이징'이라고 지었어야 할 영화죠.

 

 

 

일단 대략의 줄거리.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는 이스탄불에서 빼앗긴 하드 디스크를 회수하는 작전에 투입됩니다. 나토 공작원들의 리스트가 담긴 디스크를 회수하기 위해 M(주디 덴치)은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태도. 본드와 탈취범이 격투를 벌이고 있는 일촉즉발의 순간, M은 저격수에게 냉정하고도 잔혹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런던의 MI6 본부가 사이버 테러로 공격당하고, 사라진 리스트에 포함됐던 스파이들이 여기저기서 정체가 드러나 살해당합니다. M은 은퇴 압력을 받게 되고, MI6에 대해 원한을 품은 듯한 적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23번째, 원조 '카지노 로얄'과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을 포함하면 25번째 007 영화인 '스카이폴'은 놀랄만큼 매끄러운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합니다. 오프닝의 마지막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며, 몇몇 관객들의 마음 속에 '이게 뭐야!'라는 생각을 불어 넣지만, 이어지는 아델의 주제가 'Skyfall'과 거기에 곁들여진 매혹적인 영상 구성이 다시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하지만 바로 위에 쓴 '줄거리' 까지의 부분, 그 이후로 영화는 도저히 건질 수 없는 수렁으로 점점 빠져듭니다. 최소한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량도, 배우도, 만듦새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입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스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관객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그 반대로 졸음의 세계로 내몰아 버립니다.

 

 

 

 

이 영화는 앞 시리즈에 대한 철저한 부정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수준의 지능을 가진 M이라면 도저히 MI6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고, 역시 제임스 본드가 이 영화 수준의 지능이었다면 '카지노 로열'이나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당수 관객에게 이 영화는 '다크 나이트'를 두번 보는 효과를 강요합니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무책임한 인용(내지는 내놓고 리메이크)의 연속입니다. 007은 대놓고 배트맨 흉내를 내고, 악당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는 아예 조커의 쌍둥이입니다. "007도 만들고 싶고, 생각있어 보이고도 싶은" 욕심이 이 영화를 망친 주범입니다.

 

길게 얘기해 봐야 스포일러만 나올 듯 하니 일단 여기서 한번 접겠습니다. 전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 애스턴 마틴 DB5의 광팬이시거나, 아래 상품들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스카이폴'은 근래 본 영화들 중 가장 화려한 광고판입니다. 아래 주장에 따르면 PPL 수입이 2900만파운드에 달한다는군요.

 

The London 'Mirror' newspaper reported that about £29 million or about a third of the film's budget was raised from commercial deals. Product placements, brand integrations and promotional tie-ins for 'Skyfall' include Heineken Lager Beer; Coca Cola's Coke Zero; Visit Britain Tourism's 'Live Like Bond' campaign; Procter & Gamble fragrance; Virgin Atlantic; 'Literary Review' magazine; Tom Ford clothing; Omega Watches including a 50th anniversary 007 watch; Swarovski jewelery; the London 2012 Olympics; Hornby Scalextric car sets; Jaguar & Land Rover vehicles; Activision's video-game; Sky TV's Sky Movies 007 HD Bond channel and Sony Electronics products including Bravia TVs, Vaio laptops & computers, and Xperia tablets & smart-phones, the Sony Xperia TL phone and Heineken beer being two of the products making brandcameos in the film.

 

 

 

 


(정작 애스턴 마틴은 스폰서 리스트에서 잘 보이지 않는...?)

 

 

 

(심지어 이런 것도 70불이나...^^)

 

그리고 아래는 줄거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이야기들. 영화 보실 분들은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부터 M은 장기를 이기기 위해 하위 기물들을 닥치는대로 희생시키는 잔혹한 체스꾼의 면모를 과시합니다. 죽어가는 요원을 발견한 본드에게 "내버려두고 범인이나 추적하라"고 강요합니다. 본드가 기차 위에서 탈취범과 맨손 격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선 저격 라이플을 조준하고 있는 요원 이브(나오미 해리스)에게 기다리지 말고 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물론 M의 이런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바보가 아니라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악당 실바가 MI6와 M을 증오하게 된 이유를 강조하기 위한 토대를 다지자는 것이죠. 뭐 스파이 마스터가 이 정도의 냉철함을 갖고 있다는데 뭐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첫 시퀀스의 억지가 바로 '스카이폴'의 정체를 결정해 줍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본드와 탈취범은 기차 지붕 위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브는 저격 가능지점에서 총을 겨누고 있죠. 기차는 곧 터널로 들어가고, 격투중인 두 사람은 곧 이브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본드가 이긴다면 다행이지만, 진다면 하드 디스크 회수는 어려워집니다.

 

 

 

 

이 대목에서 M이 "쏴버려"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이길지 모르니 지금 네가 막아야 한다. 어쨌든 최대한 적을 겨냥하고 쏴라. 본드가 맞아도 그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이 상태로 터널에 들어가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브가 다마고치가 아니라면 "쏴버려"라는 말이 이런 뜻임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이브는 단 한발의 총을 쏘고, 본드가 그 총에 맞고 철교 아래로 떨어지고, 탈취범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가운데 "AGENT DOWN"이라고 보고해 버립니다. 마치 명령이 본드만 쏴 버리라는 뜻인 듯 말이죠. 정상인이라면 표적을 가리는 본드가 사라진 뒤 100발을 더 쏴서 탈취범을 쓰러뜨렸을 겁니다.

 

이 장면을 보고 나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건 이브가 MI6의 적이라는 복선일까? (아닌데, 복선 치고는 너무 노골적인데...?) 아니면 맨데스는 '왜 이브가 단 한방만 총을 쏘고 탈취범은 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전혀 느끼지 않은 걸까? (에이 설마...?) 혹시 이브가 자신이 쏜 총에 본드가 맞는 걸 보고 너무 놀라서 자신의 임무를 망각해버린 걸까? (훈련받은 요원이...?)

 

그런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2번이더군요. '스카이폴'을 보다 보면 MI6는 천하의 무능한 세금 도둑 기관입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배트맨 시리즈의 뉴욕 경찰이지 007 영화의 MI6가 아닙니다. 제임스 본드 혼자 기를 쓰고 뛰는 동안 관객을 머리 속엔 의문이 떠오릅니다. '대체 MI6엔 다른 요원은 하나도 없나?'

 

 

 

 

그럼 그동안은 007이 제임스 본드의 독무대가 아니었느냐는 반론이 나올 법 합니다. 당연히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과정은, '이 정도는 남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어. 나 혼자 해결해도 충분한 걸'이라는 식이었죠. 반면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는 뭐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데도, 조직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합니다. 실바가 탈출한 가운데서도 본드 혼자 실바를 쫓아 뛰어갈 뿐, 목표가 M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Q는 현장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합니다.

 

(네. M에게 '얼른 피신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긴 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청문회장 주변에 '위험 인물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고 경비를 강화하지 않았을까요. 실바 일행이 도착할 때 청문회장은 사실상 무방비상태입니다.)

 

정말 웃기는 최후의 대결 장면. Q와 본드, 그리고 새로운 M이 되는 말로리(레이프 파인즈)는 기껏 머리를 쓴답시고 써서 스코틀랜드의 스카이폴 저택으로 실바 일당을 유인합니다. 그리고 본드는 장비 하나 없이 두 노인과 함께 몇명이 올 지 모르는 적을 맞서 싸울 준비를 합니다. (이건 뭔가요. '나홀로 집에?' 아니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패러디?) 그 많은 다른 MI6 요원이며 SAS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이 영화의 MI6는 '지원'이란 개념이 없는 걸까요?

 

한마디로 처음 30분을 제외하면 뭔가 시원한 맛이라곤 없습니다. 일상의 권태와 피로를 잊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짜증을 더해 주는 007이란... 참 상상하기 힘듭니다. 과연 그런 것이 007의 본분일까요.

 

 

 

 

언제부터 007 영화에서 논리적인 진행을 따졌느냐고 묻는 분들, 맞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007은 '어쨌든 우리 편이 다 이겨' 혹은 '본드 혼자도 다 처리할 수 있어'라는, 아주 낙관적이고 동화적인 세계 위에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크레이그 이후의 본드는 종래의 본드보다는 제이슨 본을 더 추종하는 캐릭터입니다. 세계관도 진짜 피가 튀는 세상으로 바뀌었죠. 리얼 액션은 리얼 월드의 리얼 플롯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제이슨 본 시리즈가 이따위의 형편없는 플롯으로 만들어졌다면 2편과 3편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샘 멘데스가 "007을 연출하면서도 생각 있는 지적인 감독으로 보이고 싶다"는 이상한 야망을 품은 것이 실패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불편한 야심 탓에 '액션 영화에도 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고의 성공사례'에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고, 아예 그의 최고 성공작에 007의 껍질만 입혀서 다시 만들어 보겠다는 정신나간 판단을 하게 된 듯 합니다.

 

그 결과는 엉망진창의 혼란입니다. 실바 같은 위험한 적에게 "다음 총알은 빗나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제임스 본드가 과연 제임스 본드일까요(본드라면 그냥 쏜 다음에 농담 한마디를 남기죠). 악당은 노골적으로 조커 코스프레를 하고, 본드는 배트맨이 빙의된 양 본분을 잊고 살인을 주저합니다. 물론 그 한 순간 뿐, KILLER LICENSE의 소유자답게 그 앞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재개합니다. 한마디로 본드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것은 샘 멘데스의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정작 메시지는 공허합니다. 정말 공허합니다. 영화 속에서 M은 "이 냉전도 사라진지 오래인 고도 정보화 사회에 구태의연한 스파이 조직이 필요하냐"는 비판에 봉착합니다. 거기에 M은 "그래도 필요하다"는 논지로 맞서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 영화를 가리켜 "오늘날에도 왜 007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던지는 영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형적인 '받아쓰기'입니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영화에 '고전적 첩보원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내용'이 나오긴 하는 걸까요? 오히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본드 같은 바보 요원보다는 Q 같은 똑똑한 해커들을 양산하는 것이 21세기 형 지능 범죄와 머리 좋은 악당들을 막는 데 훨씬 더 바람직한 방안으로 보입니다.

 

샘 멘데스는 이 영화 이후에 다시 007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 없다고 했답니다. 시리즈의 운명을 위해서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M(레이프 파인즈,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볼드모트가 좋은 역이라는 점입니다), 새로운 머니페니(나오미 해리스, '캐리비안의 해적'과는 전혀 다른 모습^^), 새로운 Q(벤 위쇼, '향수'의 그르누이군)의 진용은 나쁘지 않습니다. 부디 새로운 멤버들이 새로운 감독과 협력해서 다시 새로운 007의 역사를 잘 써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영화의 소득 중 하나라면 33세의 모델 출신 베레니스 말로히. 중국계 캄보디아인과 프랑스인의 혼혈이라고 하는데 최소 4개 민족이 섞인 듯한, 오래 전 실크로드 한복판에서나 보였을 법한 독특한 외모가 특징입니다. 강렬합니다.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728x90

'테이큰'은 그저 그런 액션 영화들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할리우드에서 한발 앞선 잔혹성으로 차별화에 성공한 사례로 꼽힙니다. 리암 니슨이 연기한 브라이언 밀스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에 비해 생명 존중 사상이 심하게 부족한 캐릭터였죠.

 

밀스는 모든 도구를 사용해 확실하게 악당들을 해치워주는 확실한 실력과, 절대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덕분에 25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였던 '테이큰'은 미국에서만 1억 달러 넘는 흥행 성공을 거뒀습니다. 덕분에 '테이큰2'가 만들어지게 됐죠.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시퀀스와 쉽게 마주치게 됩니다. 주인공의 조력자가 범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으면 주인공은 "쏘면 안돼! 그놈을 데려다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한 뒤에 감옥에 쳐 넣어 죄값을 치르게 하자구!"라고 주절주절 떠들고, '우리편'이 주인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악당은 벌떡 일어나 기관총으로 '우리편'의 몸에 수십개의 구멍을 내 놓는 뭐 이런 진행 말입니다. 하지만 '테이큰' 시리즈라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죠.

 

'테이큰'이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미국 관객들도 판에 박힌 '소심한 주인공'에는 질려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테이큰2'는 1편으로부터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동유럽의 어느 작은 마을, 1편에서 밀스(리암 니슨)에게 죽음을 당한 인신매매 조직원들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좌장인 무라드(라데 세르베지야)는 밀스를 찾아 복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밀스는 딸 킴(매기 그레이스)의 안전에 더욱 민감해지고, 전처 레니(팸키 젠슨)는 남편과 문제가 생깁니다. 밀스는 모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이 이스탄불에서 일을 마치면 함께 휴가를 즐기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세 가족(?)은 밀스를 잡기 위해 이스탄불로 찾아온 무라드 일파에 의해 안전을 위협받게 됩니다.

 

 

 

 

감독은 1편의 피에르 모렐에서 '트랜스포터3'의 올리비에 메가톤(물론 예명입니다. 그런데 설마 메가톤이라는 성이 실제로 있을까 하는 의문이...)으로 바뀌었지만 그로 인한 위화감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1편의 주역들이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데다, 왕년의 명감독 뤽 베송이 제작자 겸 시나리오 라이터로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테이큰2'의 긴장감은 1편에 비해 심하게 떨어집니다. 니슨이 연기하는 밀스는 여전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1편에 비해 악당들이 뭔가 강화됐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적 장치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무도 밀스 가족의 안전한 구출을 의심하지 않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배우 라데 세르베지야(Rade Serbedzija)는 훌륭한 악역을 보여주지만 이미 주인공 니슨부터 맥이 풀린 느낌을 주는 만큼, 그의 힘으로 영화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뭐 영화가 잘 되고 못 되고에 대해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듯 합니다. '테이큰'을 보신 분에겐 그냥 또 다른 '테이큰'일 뿐이고, 자극의 강도는 확실히 약하다는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여기까지. 이후부터는 이 영화에 나타난 '미국 시민의 생명의 가치'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스포일러(라는 것이 과연 이 영화에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가 싫은 분들은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목의 '미국 시민'이라는 말은 American Citizen의 번역입니다. 모든 미국인이 city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민'이라고 번역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지만 '시민권' 등의 말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알란 파커 감독의 1978년작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터키에서 마약 밀매 관련 협의로 체포된 미국 청년이 터키의 법에 따라 형무소에 수감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터키 사람들이 보기에 이 영화는 편견의 덩어리입니다.

 

'터키에서 죄를 지으면 터키 사법제도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정당한 질문 앞에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매우 뻔뻔스럽습니다.  "아니 우리 미국 시티즌을 너희 나라의 법 따위로 구속한다고? 심지어 너희 나라의 감옥 따위에 가둔단 말이야?" 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뭐 이런 생각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엔 좀 과도한 판타지도 등장합니다. 세계 어디에 있건 미국 시민은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미국 정부가 그를 위해 하는 행위는 다소 거칠어 보여도 일단 정당하다는 식의 미화 말입니다.

 

앙트완 후쿠아의 '태양의 눈물'에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인 여성 모니카 벨루치(그것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것도 아니고 미국 남자와 결혼해 미국 시민이 된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 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유발된 판타지라기엔 좀 너무 심합니다. 당연히 이 특공대는 아메리칸 시티즌 구출을 위해 현지인들을 거리낌없이 살해합니다. (뭐 정당방위처럼 보이긴 하죠.^^)

 

 

 

아마도 이같은 성향의 최고봉은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2'가 아닐까 합니다. 미국 마이애미 경찰의 특수기동대는 아예 대규모 인원이 무기와 장비를 갖고 쿠바에 침투해 작전을 펼칩니다.

 

이게 독립국가인 쿠바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고, 말하자면 전쟁 행위라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조용히 작전을 치르고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또 모를까, 백주에 살상행위(물론, 대상은 끔찍한 악당들이죠)를 실컷 저지른 다음, 쿠바 영토 끝에 있는 미국령 관타나모로 탈출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테이큰'에서도 전직 첩보원 밀스는 프랑스의 사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프랑스 경찰의 친구(?)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의 행동에 다른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영화 속에서 무마됩니다.

 

하지만 '테이큰2'에서는 도를 넘습니다. 밀스는 터키 경찰을 살해하고(물론 그 경찰이 터키 폭력조직과 내통한다는 설정이지만, 밀스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그가 자신에게 총을 겨눈다는 이유로 사살합니다), 그로 인한 터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시내를 다 뒤집어놓는 자동차 경주 끝에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심지어 그러고 난 바로 다음날, 밀스는 총기까지 휴대하고 다시 이스탄불 시내를 휘젓습니다. 네. 전처가 악당들의 손아귀에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건 관객들이 잘 알고 있지만 남의 나라에서 이건 좀 너무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어처구니없는 영화 속 이야기지만, 한국 해경 선박을 들이받은 중국 어선의 어부들을 별 책임도 묻지 않고 풀어주는 한국 경찰의 처지를 보거나, 심지어 한국 해경을 살해한 중국 어부들을 자기네 나라로 돌려보내라고 주장하는 일부 중국내 세력들의 시위를 보고 있으면, '테이큰' 시리즈 속의 이야기들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얘기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P.S. 밀스는 폭력과 피가 피를 낳는 복수의 고리를 끊으려 제의를 하지만 결국 그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밀스는 결국 다시 폭력을 행사하죠. 이게 만약 미국과 테러리즘에 대한 거대한 비유라면, 이런 논리는 9.11 전에나 통했을 법한 것입니다. 지금은 미국 본토도 안전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이큰2'에선 밀스 가족이 미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찾지만, 만약 '테이큰3'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LA 시내가 생지옥이 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총지휘하고 있는 것이 프랑스인 뤽 베송이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혹시 '테이큰' 시리즈는 은근히 미국민에게는 반성을, 비 미국인들에게는 반미감정을 촉진하려는 프랑스제 프로파간다였던 걸까요?^^)

 

조 아래쪽 추천 상자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추천이 가능합니다. 한번씩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의 추천 한방이 더 좋은 포스팅을 만듭니다.

@fivecard5를 팔로우하시면 새글 소식을 더 빨리 알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