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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인 듯 합니다. 우연히 밤에 택시를 탔는데 일상적인 강원도 사투리보다 더 강한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기사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서부터 많이 듣던 사투리였기에 '이북 쪽이신가봅니다?'했더니 함경도 쪽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저보고 어떻게 아느냐길래 '저도 함경도 쪽'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그분이 탈북자. 그런데 그 무렵만 해도 탈북자가 택시 운전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직업적 본능(?)도 살아나고 해서 이것 저것 대화를 나누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군요.

 

"부모님한테 효도하세요. 그때 피난 내려와서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여기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게요. 하긴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탈북자가 등장하는 영화는 이미 한 장르로 자리잡을 만큼 커졌습니다. 물론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다룬 차인표 주연의 '크로싱' 같은 영화 보다는 '북한 남성=그다지 근육질은 아니지만 마르고 탄탄한 특수부대 요원'이란 다소 비정상적인 고정관념을 확대시키는 영화가 지나치게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게 현실이죠. 아무튼 그중 많은 기대를 모았던 영화가 '용의자'입니다.

 

먼저 줄거리.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탈북자 지동철(공유). 다시 운전기사로 일해 달라는 박회장(송재호)의 청을 거절한 날 밤, 동철은 박회장을 살해하러 저택에 침입한 괴한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격투를 벌이지만 박회장은 이미 치명상을 입고 동철에게 유언을 남긴 뒤 숨을 거둡니다.

 

영화의 흐름상 당연히 동철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공수부대 교관 민대령(박희순)은 왕년의 정보국 동료였던 김실장(조성하)의 호출을 받아 지동철 수색에 나섭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대령은 자신 외에도 동철을 뒤쫓는 팀이 있고,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릇된 오해를 받고 추격당하는 특수 요원'이라는 주제에는 누구나 본 시리즈를 떠올리겠지만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수백편, 수천편을 꼽아도 될 정도로 많습니다. 특히나 영화 뿐만 아니라 '24' 같은 드라마는 비슷한 플롯에 따라 수십편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찍어내 이 장르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동철을 연기하는 공유가 음식이라곤 단 한번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어쩐지 이 영화가 '본' 시리즈보다는 '24'쪽에 오마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언하자면 '24'의 잭 바우어는 매 시즌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는 걸로 유명하죠.^^)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터질 지경인 이 영화의 카 액션에는 엄청난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대단한 액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든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 완성도의 자동차 액션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경찰차를 이용해 경찰차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는 신은 강렬하고 인상적입니다. 물리적으로 과연 그런 돌파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 일단 앞 경찰차가 브레이크만 강하게 밟아도 불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 아무튼 보기 좋았습니다.

 

 

 

 

반면 몇 차례 등장하는 근접 전투 신은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보아 온 탓에 이제 좀 질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나 두 명의 격투 상대자가 최대한 몸을 접근시킨 뒤 손날과 팔꿈치로 서로 동시에 공격과 방어를 하며 주위의 장애물들에 몸을 부딪는 '격투 전문가들의 싸움' 장면들은 최근 10년 사이 너무 많은 영화에서 사용돼 이제 좀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다음 세대의 격투 신은 과거처럼 팔과 다리를 화려하게 휘젓는 쪽으로 다시 유행이 옮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영화 '용의자'는 희대의 걸작은 아니지만,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일단 문제점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꼽자면, 이야기 자체가 그리 독창적이라고 보기 힘들고, 이야기의 짜임새 또한 그리 정교하지 않습니다. 특히 결말을 앞둔 마지막 30분 정도에선 논리적인 설명을 포기한 듯한 진행이 계속됩니다. 네. 이런 부분들이 '용의자'의 약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 마지막 30분 동안, 동철과 딸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비록 상당 부분 전형적인 흐름을 따르고 있지만, 관객들이 동철의 운명을 충분히 걱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감정의 배분이 잘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찌 보면 강인한 인상이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웃음을 갖고 있는 공유라는 연기자의 적절한 캐스팅이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캐스팅만 해 놓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죠. 어떻게 그 동철에게 관객의 감정을 집중시키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원신연 감독은 이 부분에서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심각하게 생각해 보면, 생존률 3%라는 북한 최고의 특수부대에서 수없이 생사를 넘나들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나찰의 세계에서 버텨 온 남자가 과연 그렇게 선량한 눈빛과 웃음을 지닐 수 있겠느냐는 회의가 들긴 합니다. 만약 진짜 특수부대 출신 - 자칭 특수부대 말고 진짜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부대 - 을 만나 보신 분들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어떻겠습니까. 이건 다큐가 아니라 그냥 영화인 걸. 그리고 2004년, 공유의 영화 데뷔작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공유의 오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관객이 동철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 이상, 나머지 요소들은 꽤 무시해도 좋습니다. 대략 국정원 차장급의 간부가 분명하지도 않은 트집으로 지상파 방송사 기자를 해직시킬수 있다는 부분, 기자들이 닭처럼 '특종!'이라고 외치며 우왕좌왕하는 부분, 다른 경찰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때 항상 혼자 유유히 침투하는 슈퍼 능력자 민대령의 석연찮은 동선 등 이 영화의 플롯에는 좀 무리다 싶은 부분들이 분명 눈에 띕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은 슬쩍 묻혀 버립니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여자분들은 공유의 팬이거나, 아니었더라도 보고 나서 마음 속에 공유를 담아 가게 될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용의자'는 뭔가 생각 많이 하지 않고 볼만한 뇌 휴식용 영화를 원하는 분들에게 아주 훌륭한 선택입니다. 상영시간은 매우 짧게 느껴지고, 특히 액션 마니아들에게는 충분한 시각적 포만감을 제공합니다. 공유의 열연이 과연 올 한해, 대작 사극들이 수없이 격돌하는 2014년 남우주연상 레이스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P.S. 거의 첫 장면, 동철과 박회장이 만나는 허름한 식당의 이름이 '봉남집'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당연히 '통미봉남'이 연상되어서였죠. 이밖에도 몇몇 대사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남북관계의 현주소에 대한 꽤 심도 있는 학습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만, 영화상으로 그리 효과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관객이 재미 없어 할 부분은 모두 뺀 결과겠지요.

 

P.S.2. 동철이 만삭의 아내에게 사다 준 물건은 크레파스라는군요. 아울러  언제부터 한국 대북공작원들의 전용차가 VW CC가 된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PPL]

 

 

 

P.S.3. 잠시 삼천포로 빠졌다가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김성균. 역시 반갑더군요.

 

P.S.4. '용의자'에 대한 관객의 만족도를 생각하면, 하정우 주연 '황해'도 좀 결말을 바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P.S.5. 물론 이런 용의자는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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