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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2]

 

사실 '레드2' 를 보러 가서도 '레드'의 핵심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3년이라면 요즘 블럭버스터의 속편 제작 주기에 비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JJ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가 4년만에 나왔고,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즈' 사이도 4년이었죠.

 

하지만 그리 전통있는 프랜차이즈라고 보기 힘든 '레드'의 경우 3년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시리즈 간의 긴밀한 연속성을 제기하기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2'는 보는 시간 내내 영화의 길이를 느끼기 힘들었던 수작이었습니다. 생명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감안하면 참 막장형 영화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면 이만큼 충족감을 주는 영화도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순도 높은 '오락만을 위한 영화' 입니다.

 

 

 

 

전작에 이어지는 이야기. 왕년의 스파이 에이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사라(메리 루이즈 파커)와 소시민으로 알콩달콩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 마빈(존 말코비치)은 곧 폭풍이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결국 프랭크와 사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마빈이 타고 있는 차가 폭발해버립니다[스포일러 아님]. 그리고 마빈의 장례식장에서 프랭크는 기관원들에 의해 연행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전 세계를 무대로 전개됩니다. 프랭크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전편에서도 활약한 이들의 동료 빅토리아(헬렌 미렌)를, 미국은 세계 최고의 킬러 배한조씨(이병헌. 이 이름에 대해선 저 밑에 자세히 정리)를 기용합니다. 이들 사이에 프랭크와 과거 사연이 있었던 러시아 스파이 카티아(캐서린 제타 존스), MI6에 의해 연금된 천재 과학자 베일리(앤서니 홉킨스) 등이 엎치락 뒤치락 연루됩니다.

 

 

 

 

사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데 뇌는 별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노장들이 실제로는 한창 팔팔한 현역들을 능가하는 기량의 소유자들이라는 스토리의 영화들은 이미 한두편이 아니죠. 최근작으로는 실베스터 스탤론 계열의 근육질 아저씨들이 대거 등장한 '익스펜더블' 시리즈가 있고, 추억의 영화로는 '지옥의 특전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던 Wild Geese(1978) 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옥의 특전대'의 주역인 리처드 버튼은 영화 개봉 당시 53세, 로저 무어는 51세, 리처드 해리스는 48세. 70년대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노장'으로 불릴 만한 나이였죠. 반면 '레드2'의 브루스 윌리스는 58세, 존 말코비치는 60세. 헬렌 미렌은 68세. 앤서니 홉킨스는 76세... 평균 수명 연장과 과학의 발달에 따른 할리우드 스타 정년 연장이 실감납니다.)

 

 

 

 

아무튼 이 '지옥의 특전대' 때 이미 베테랑들의 노익장 과시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음모에 대항한다는 주제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21세기 판인 '레드' 시리즈에서 달라진 것은 좀 더 확실해진 인명 경시 사상.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존 말코비치는 아예 브루스 윌리스에게 대놓고 "사람 죽인 지 한참 지나 인생이 지루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입니다.

 

그 강력한 힘을 갖고도 사람 하나 죽일까 말까 30분씩(물론 영화상으로. 실제 시간은 더 걸릴 수도) 고민하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이 분들은 태연히 살인을 저지릅니다. 컴퓨터 게임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플롯이 너무 단순해 비어 보일 수 있는 영화의 틈바구니는 세계적인 명배우들이 잘 알아서 메꿔 줍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배우는 '여왕 폐하' 헬렌 미렌. 아마도 이 영화에서 헬렌 미렌이 미친 척 하기 위해 읊조리는 대사는 세실 어쩌고 하는 대목으로 봐서 2005년 출연했던 BBC 사극 '엘리자베스 1세'에 나오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더 퀸'에서는 현역 여왕 역으로 오스카를 따냈죠. (사실 정통 셰익스피어 극 출신인 이 양반은 젊어선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에서 모르가나 여왕 역으로 팜므 파탈의 위용을 떨친 분입니다.)

 

아무튼 그런 관록을 스스로 희화화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 미렌은 카리스마 넘치는 코믹 연기(영화를 보시면 이게 말이 된다는 걸 납득할 수 있습니다^^)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특히 이병헌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의 액션을 보면 '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헬렌 미렌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물론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박지성이 출전하는 맨유 경기나 류현진이 던지는 다저스 경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병헌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가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되는데, 이 무시무시한 배우들 속에서 이병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움을 줍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토르'의 아사노 타다노부 등에 비해 훨씬 돋보이는 역할이라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지아이조' 시리즈에 이어 너무 자객 이미지가 강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사나다 히로유키의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아시아 출신의 남자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리자면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적지 않은 나이에 영어 연기에 도전해 이 정도의 성취를 거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과가 썩 시원치는 않아 이제 알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만약 '레드3'가 만들어진다면 이병헌의 역할은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 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해외의 이병헌 팬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어의 '좆됐다'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죠.^^)

 

나머지 배우들은 '딱 다 알만한 캐릭터'를 '딱 다 납득이 갈 만한 수준'으로 연기해 줍니다. 아쉬움도 없고, 그렇다고 큰 기대흘 할 만큼도 아닙니다. 극장에서 가치관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 영화. 인생의 의미나 구원의 메시지를 찾고 있는 분들에겐 비추. 당연히 헬렌 미렌이나 존 말코비치를 모르는 분들에게도 비추.

 

 

 

P.S. 이병헌의 극중 캐릭터 이름은 Han Cho Bai 인데 이게 한국 이름이라면 '배한조'라고 봐야겠죠^^. 뭐 한일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 제작진이 이 캐릭터의 킬러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의 전설적인 닌자 핫토리 한조의 이름에서 대강 섞어 만든 듯 합니다만... 뭐 이런 영화에 그런 디테일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겠죠.

 

IMDB에 따르면 극중 이병헌의 어린 시절 사진에 나오는 분은 실제 이병헌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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