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주된 텍스트는 '난중일기'입니다. 특히 해전 당일의 진행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1598년 음력 9월16일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본인과 아들 이회, 그리고 송희립 나대용 안위 김억추 등 당일 전투에 참여한 부하 장수들은 물론이고 승려 혜희, 정찰꾼 임준영, 항복한 왜의 무사인 준사 등등 조연급의 인물들도 모두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 실제 역사는 역사,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어서 '명량'이 나쁜 영화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단 '명량'을 실제 역사로 착각하는 일을 방지하거나, 혹은 그저 호기심에서 '명량'과 역사상의 기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이순신(1545~1598)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생을 간략하나마 한 페이지로 정리한다는 것은 감히 저지를 수 없는 불손한 짓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 ‘명량’에 기록된 ‘1598년 9월’ 이란 제한한 시간 안에서, 각종 기록에 담긴 이순신의 전적을 다뤄보고자 한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개전 한달만에 일본이 조선의 수도 한양을 빼앗는 등 파죽지세의 면모를 보였으나 이후 명의 원군이 참전하고 강화 논의가 시작되며 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화의가 깨지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분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시작됐다.
그해 3월,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난 이순신은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에 따라 통제사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남은 전선은 겨우 열 두척. 뭔가를 해 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난중일기’의 9월은 우울하기만 했다. 가까스로 남해의 서쪽 끝, 벽파진에 본부를 차렸지만 언제 적이 쳐들어올 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말단 병졸은 물론 지휘관들도 공포에 질렸다. 9월2일, 전체 조선 수군의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전투를 피해 탈영할 정도였다.
9월7일에는 왜 수군의 척후대가 방어 태세를 살피기도 했다. 14일, 왜군이 마침내 한줌 남은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한양으로 진공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결전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음력 9월16일의 기록도 평소보다 길지 않다. 130여척의 일본 함대는 명량해협으로 직진했다. 해류의 불리함이고 뭐고 압도적인 규모를 이용해 뭉개 버리겠다는 자세. ‘명량’에서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가 선봉에 섰다.
전날 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를 부르짖어 투지에 불을 질렀지만, 막상 일본의 대함대를 마주한 장졸들은 겁을 먹고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특히 이순신이 일기에서 “저런 자가 어떻게…”하고 한탄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800미터(두 마장)나 뒤쳐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최전방에 선 이순신은 대장선의 앞선 화력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왜선들의 접근을 막으며 꿋꿋하게 버텼다. ‘명량’에선 그리 강조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전투 과학 기술은 이순신의 전술과 울둘목의 해류 못잖게 이날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함인 세키부네에 견고함이나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고, 조선의 천지현황 총통도 사정거리나 파괴력에서 조총을 압도했다.
일본 수군은 갈고리를 걸어 상대 배에 뛰어드는 전술에 능했으나, 조선군은 현대전의 크레이모어를 연상시키는 대인살상병기 조란탄(鳥卵彈, 작은 탄두 수십개를 동시에 산탄처럼 쏘아 보내는 포탄)를 활용해 접근전을 원천봉쇄했다. 이순신의 눈부신 투지에 물러섰던 부하들도 하나둘씩 전선에 합류, 기적 같은 승리를 합작해냈다.
일본 수군은 구루지마가 전사하는 등 31척을 잃고 후퇴했다. 임진왜란 7년을 통틀어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급 지휘관이 전사한 것은 명량의 구루지마가 유일하다.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잃지 않았고, 대장선에서는 사망자가 2명, 부상자가 3명 나왔을 뿐이었다(이런 피해라면 대장선에선 ‘명량’에 그려진 백병전이 펼쳐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명량대첩의 개략적인 결과다.
1. 백병전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영화 '명량'은 매우 충실하게 '난중일기'의 당일 기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납니다. 위에서 밝힌 대장선의 피해 규모를 볼 때, 백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물론 대장선이 아닌 안위의 배에서는 백병전이 펼쳐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장선이 혼자 앞으로 나가 왜 수군 전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대장선과 왜 수군 선발대의 원거리 타격 능력이 이지스함과 일반 함선 정도로 차이가 났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조금 더 들어가면, 조선 수군의 승리 뒤에는 조선의 뛰어난 선박 제조술과 화포 기술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명량'에서는 명량해전 후반에 조선 배가 일본 배를 들이받아 부수는 충파(衝破) 장면이 나오는데, 본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어는 당파(撞破)입니다(충파라는 용어는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존의 많은 사람들은 이 당파를 '조선 배로 일본 배를 들이받아 깨뜨리는 전술' 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의 해석으로는 이 당파가 직접 배와 배가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는 쪽입니다. 일찌기 1985년 드라마 '조선왕조500년-임진왜란' 편에서는 원균이 이 당파전술의 창시자(?)이며,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배보다 훨씬 견고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던 전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각종 문헌에서 사용된 '당파'를 해석해 본 결과 원거리 병기로 적함을 격침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입니다. ]
이 시기 해전의 전투 방법이라면 1) 배와 배끼리 동반 침몰을 각오하고 들이받는 것 2) 화포나 활 등 원거리 병기로 공격하는 것 3) 갈고리를 걸고 상대 배로 넘어가 백병전을 펼치는 것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일단 2)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의 당시 주된 전법은 3) 쪽에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으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육전에서는 왜군의 조총이 핵심 병기 역할을 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군의 화포가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천지현황 총통과 위에서 말한 조란탄 같은 대량살상병기, 그리고 유명한 비격진천뢰처럼 목표물에 적중한 뒤 2차 폭발을 가져오는 신형 포탄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2. 거북선이 동원될 수 있었나?
명량해전을 앞두고 거북선을 새로 건조중이었다거나, 배설이 그 배에 불을 질렀다거나 하는 것은 본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물론 실제로 거북선을 건조하려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설은 그저 전투가 두려워 혼자 탈영을 했고, 뒷날 육지에서 체포되어 참수됐다는 기록만 전해집니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 위에 창칼을 꽂은 지붕이 덮여 있어(이것이 철갑이든 아니든^^) 왜군이 3)의 전법을 아예 시도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왜군들의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원거리 화력에서 뛰어난 조선 수군이 굳이 적의 강점인 백병전의 위협을 불사하고 배와 배끼리 들이받는 근접전을 선택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다만 거북선의 경우에는 적의 승선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보다 근접해서 화약무기를 활용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명량'에서 배 만드는 노인이 감동에 찬 목소리로 "구선(龜船: 거북선)이 돌아왔다!"고 외치는 것은 사실 좀 공허합니다.
3. 일반 백성들은 어떤 역할을 했나
영화 '명량'이나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나 윤휴 등이 작성한 이충무공의 행장에는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조선 수군이 일자진을 친 뒤에서 허장성세로 우리 함대의 수가 많은 것처럼 꾸몄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피란민들이 달아나지 않고 함대의 뒤에서 응원했다는 것은, 이 피란민들이 충무공에 대해 갖고 있던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연전연승하는 스타라서 그루피처럼 따라다닌 것이었다면 이렇게 수세에 몰렸을 때에는 백성들부터 달아났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명량'에서 백성들이 어선을 동원해 난류에 휘말린 대장선을 끌어 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런 기록을 기초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6년작 영화 '난중일기'에는 울돌목 수중에 긴 쇠사슬을 설치하고, 수천명의 백성들이 이 사슬을 잡아 끌어 해전을 돕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철쇄설'이라고 해서 한때 유행했던 전설입니다. 기원은 알 수 없으나 - 아마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쇠사슬 수전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만 -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고 있던 이야기이지만, 근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강 싸움이라면 모를까, 울돌목에서 사용했을 만한 거대한 쇠사슬을 만들어 전투에 썼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합니다
4.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마다시인가?
'난중일기'에는 항복한 왜군 준사(영화에도 나옵니다)가 물 위에 뜬 비단 옷 입은 왜장의 시체를 보고 "저게 마다시(馬多時)"라고 했으므로 시체를 건져서 내걸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목을 잘라 높이 건 시체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것입니다.
구루지마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쟁 중 전사한 왜군 지휘관 중 최고위급의 지위관 (다이묘 전사자는 구루지마 뿐) 이므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마타시가 이 구루지마의 별칭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역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장 간 마사카게(菅正陰)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사카게의 별명이 마타시로(又四郞)였다는군요.
5. 이순신은 왜 명장인가?
그럼 판옥선과 거북선이 우수하고, 조선의 화포가 뛰어나서 이건 거냐? 그게 다냐?
이런 질문을 하실 분들이 반드시 있을 듯 해서 덧붙입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충무공의 진정한 위대함은 비슷한 전력의 전투선단을 이끌고 용맹과 지략으로 적을 물리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해 장기간에 걸쳐 이처럼 적과 비대칭의 전력을 구성하고, 교전시에는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해 학살 수준의 전투를 벌여 적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전략가의 면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피난민 구제에도 힘써 백성들이 정보 제공과 식량 및 자원 조달에 자진해서 나서게 하는 총체적인 역량을 고려할 때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기간의 시스템 구축, 단기전에서의 역량은 물론 심리전과 정훈병과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그냥 명장'들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전략가이면서도 인간적으로도 휘하 장병들과 백성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명량'의 이순신 묘사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명량, 영웅만들기에 성공했나. http://fivecard.joins.com/1266
‘난중일기’에 130척으로 기록된 왜적 함대 규모는 점점 부풀려져 19세기의 이긍익은 “600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이 당시 거느렸던 병력 규모로 볼 때 “다 해봐야 고작 수십척”이라고 맞선다.
일본 측 해석에 따르면 명량해전은 대첩도 아니요, 전체 판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 교전이다. 비록 일본이 선봉을 격파당했지만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의 교전 직후 후퇴했고, 다음날 일본의 본진이 명량을 지나 서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전략적으로는 일본이 승리한 전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전투 직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군산 앞바다까지(9월21일) 일시 후퇴했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 군세를 회복해 이듬해 2월에야 고금도에 진을 치고 전남 서부 해안을 확보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량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는 점, 이후 단 한번도 이순신 수군을 박멸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재개하지 못했다는 점 등은 이런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이순신의 전적은 한일간의 역사적 자존심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부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역시 한국 측은 “대승한 반면 충무공이 유탄에 맞아 서거”했다고 보는 반면 일본 극우 세력은 “이순신이 죽었고 일본군의 주력이 한반도 탈출에 성공했으니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전혀 좁혀지지 않을 해석의 차이가 한-일간의 심리적 거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끝]
일본이 생각하는 이순신에 대해선 나중에 짬을 내서 자세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개는 일본의 억지가 돋보입니다만,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와 넬슨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했다는 얘기는 사실 여부를 놓고 논란이 꽤 거세더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연재를 하다가 > 이달의 문화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녀들, 조선초 고려 왕씨의 후예들은 어떻게 됐을까 (2) | 2015.02.13 |
---|---|
임해군, 잘난 동생이 문제였을까 (3) | 2013.11.13 |
'관상'의 점쟁이 송강호, 실제 모델은? (2) | 2013.11.01 |
'관상'의 한명회, 김의성의 존재감 (17) | 2013.10.31 |
봉림대군, 효종은 성공한 왕이었나? (1) | 2013.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