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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디오라는 기계가 음악을 듣는데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One Summer Night>이라는 노래는 너무나 친숙했습니다. 매년 2월, 졸업식 시즌이면 <Graduation Tears>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TV에서 어린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면 <Tommy Tom Tom>이라는 노래가 들려왔거든요.

이 유명한 노래들이 모두 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라는 1976년작 한국-홍콩 합작 영화에 나온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진추하 (陳秋霞) 라는 여가수 겸 배우의 것이라는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저의 청소년 시절에도 이미 '흘러간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세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TV에서 방송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린 거죠.

(이 영화는 '합작' 영화였기 때문에 1976년 집계된 '올해 최대 관객 동원 한국영화'에 오릅니다. 약 17만 관객. 저는 그해에 한국영화 흥행 2위였던 <로보트 태권 V>를 대한극장에서 봤습니다. ㅎㅎ)

유튜브 시대 이후,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볼 기회는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명절을 맞아, 아주 우연히 OTT 웨이브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명절 때이므로', 드디어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One Summer Night'을 부르는 극중 진추하와 아비(종진도)

 

2. 그런데 영화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대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스잔나>냐는 것입니다. 일단 '수재너'가 아니라 '스잔나'인 것은 일본식 발음의 흔적인 것이 분명한데, 이 영화에는 '스잔나'라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홍콩 제목은 <추하(秋霞: 진추하의 이름과 같음)>이고, 영어 제목은 <Chelsia, My Love>입니다. 극중 진추하의 배역명은 한자로 추하, 영어로는 첼시죠. 어디에도 스잔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에는 느닷없이 스잔나? 

아마도 추측컨대 - 물론 이 추측이 진짜 이유인지 확인해 줄 사람은 아마도 생존자 중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 1967년작인 또 다른 홍콩 영화 <스잔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스잔나>와 구별을 위해 <리칭의 스잔나>라는 제목으로 불리곤 하는 이 영화는 1970년 한국에 수입되어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1970년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허리우드 극장 개관 1주년 기념 특선 푸로'로 그 유명한 영화 <스잔나>의 한국 공개 결정이 내려졌다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홍콩에서 만들어져 히트한지 3년만의 일입니다. 이후 이 영화는 3개월간 롱런하며 전설적인 히트작으로 기록됩니다.

아마도 <사랑의 스잔나>를 처음 기획했던 한국 관계자들은 메이드 인 홍콩인 로맨틱 영화라는 점에서, '제2의 스잔나'가 되어 <스잔나>의 빅 히트를 재현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그 결과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사랑의 스잔나>라는 제목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도 누군가는 '대체 이 제목은 뭡니까? 이 영화에는 스잔나가 안 나오잖아요!'라는 항변을 했을 것이겠으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었고 보면 자연스럽게 반론은 묻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다 추측일 뿐이나, 이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랑의 스잔나>의 히트를 등에 업고, 진추하-아비가 다시 주연을 맡아 급조된 영화 <추하 내사랑>의 제목이 <속 사랑의 스잔나>가 아니었던게 더 신기할 정도라는... 

 

3. 웬만한 분들은 다들 아시는 줄거리. 

홍콩 갑부 이사장 댁에 딸이 둘 있는데, 큰딸 추하(진추하)는 어려서부터 심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친구인 방박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해줍니다. 이사장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고, 애틋함 때문에 맏딸 추하를 편애하는데 이때문에 동생 추운은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라납니다. 

세월은 흘러 추하는 음악에 재능있는 숙녀로 자라나고, 방박사의 아들 자량(아비)은 추하를 짝사랑하지만, 이것 또한 자량을 좋아하는 추운의 성격을 더욱 비뚤어지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추하는 청각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국휘(한국 배우 이승룡)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나 부모의 이야기를 엿들어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추하는 국휘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좌절한 국휘는 한국으로 떠납니다(물론 국휘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곡절 끝에 추하의 비밀을 알게 된 추운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언니의 마지막 추억을 위해 온 가족의 한국 여행을 제안해 언니와 국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역시 모든 것을 알게 된 국휘는 이사장 내외에게 추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추하에게 눈 쌓인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용평 스키장으로 향합니다. 

(경복궁, 세종로도 잠시 나옵니다만, 홍콩에서 한국으로 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설경입니다. 지금도 동남아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용평 스키장이듯, 이들도 개장한지 얼마 안 된 용평 스키장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드래곤밸리 호텔의 옛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 관객이 홍콩/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어쨌든 '다른 나라'에 갔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었을테고, 그렇다 보면 홍콩의 요트 파티 같은 장면이나, 한국의 스키장 장면이 상대 국가 관객들에게 강한 느낌을 줬을 듯 합니다. 특히나 해외 여행이 극히 힘들고 꽉 막힌 내수용 문화에 답답함을 느꼈을 당시 한국 청년들로선 홍콩 젊은이들의 분방한 장면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듯.)

뭐 사실상 영화의 거의 모든 내용입니다만, 사실 이런 내용을 모두 안다 해도 감상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뭔가 이야기가 부실해진다 싶으면 진추하가 나와 노래를 하고, 노래들이 또 워낙 다 명곡들인 탓에 없던 개연성과 없던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물론 아니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듯한 한국 가곡 <봄처녀>는 여기 해당되지 않으나... 이 노래들 덕분에, 이런 뻔하디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영화 보기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4.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저보다 한 세대 윗분들 중 절대 다수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을 아비, 즉 종진도로 기억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한국에서의 히트곡인 <One Summer Night>을 함께 부른 것도 아비이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한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엄연히 한국 배우인 이승룡입니다. 

바로 이 분

사실상 <사랑의 스잔나> 주인공으로 픽업된 신인인 듯 한데, 그 이후로 이분은 배우 생활은 그리 오래 계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우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 날이고 보면, 참 인기도 무상하다 싶죠.

 

5. 그리고 이 영화를 늦게 본 덕에 발견한 한가지.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사실 이 영화에서 진추하나 아비 보다 더 친근한 배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대의 걸작 <영웅본색 2>의 최종 빌런, 보스 고사장 역으로 나오는 배우 관산(關山)이 진추하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웅본색2>의 석천(좌)과 관산

한가지 더욱 신기한 것은 배우 관산이 오리지날 스잔나, 즉 <리칭의 스잔나>에서도 여주인공 이청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관산은 한국 관객들에게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흥행 대작의 조연으로 인상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TMI: 관산의 진짜 딸도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황비홍>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관지림(關之琳).

 

6.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나서 알게 된 건 아비, 즉 종진도라는 스타의 재발견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서극의 <상하이 블루스>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종진도가 바로 그 <사랑의 스잔나>의 주연 배우 아비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B라는 이름 외에도 케니 비(Kenny Bee)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본래 위너스(Wynners)라는 밴드로 활동했는데, 이 밴드가 배출한 또 하나의 슈퍼스타가 알란 탐, 담영휘입니다.

아비, 즉 종진도는 1953년생으로 성룡과 임청하보다 한살 위, 주윤발보다 두살 위, 고 장국영보다 세살 위, 진추하보다 네살 위로 1980년대 홍콩 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끈 세대의 대표적인 배우 겸 가수입니다. 홍콩/중국어권에서는 앞서 말한 슈퍼스타들에 비해 전혀 손색 없는 유명 스타지만 일단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하다는 점, 그리고 묘하게도 종진도의 히트작들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거나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홍콩의 거의 모든 스타들은 배우와 가수를 겸업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쪽의 재능이 다른 한쪽보다 앞서기 마련인데,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한 스타들은 중국어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스타덤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홍콩의 대표 가수'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알란 탐(담영휘)에게는 성룡과 공연한 <용형호제>, 유덕화와 공연한 <지존무상>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들이 있고, 여가수의 대표주자라 할만한 왕비(왕정문)에게는 <중경삼림>이 있는 반면 종진도에게는 그렇게 이거나 싶은 영화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진도가 사극/무술 계열의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은 것도 문제. 한국에서 수입하는 홍콩/대만 영화들은 20세기 말까지 대부분 무협/사극 장르의 작품들이었고, 그때문에 현대물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중국어권을 벗어나면 거의 무명 배우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얘기했던 20대의 임청하(<동방불패> 이전의 임청하를 아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나 임청하의 애인이었던 진한, 진상림 같은 스타들은 한국에서는 '누구?' 하는 대접이었죠. 

그와 관련된 글: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얼마 전 영화 '화피' 때문에 왕조현에 대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엔 임청하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벌써 14년이나 됐군요. 임청하는 최근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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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무튼 <사랑의 스잔나> 개봉 당시 23세였던 종진도와 19세의 진추하는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고, 서로에게 거의 첫사랑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곱게 늙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후문. 

알란탐과 진추하. 젊어 보이지만 알란탐이 7세 연상.

진추하는 젊은 날을 지나며 활동을 줄였지만 종진도는 나이 먹은 뒤에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는 전언.

중후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이 커플. (저도 이 세대까지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세대에도 이렇게 상징적인 커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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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동방불패' 이전에도 여러번 임청하를 접했지만 그게 임청하인지 몰랐던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촉산'에서 선녀, '폴리스 스토리'에서 기업형 악당 두목 애인 역할로 이미 국내에서 꽤 많은 관객들에게 노출됐었지만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아 그게 임청하였어?'라고 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바뀐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성룡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폴리스 스토리'는 4편까지 제작될 정도로 대단히 히트하고,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지만 사람들은 '폴리스 스토리'하면 장만옥만 기억할 뿐입니다. 1편에서 성룡과 경찰들은 한 기업형 악당을 처벌하기 위해 그의 내연의 여자인 임청하를 검찰측 증인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당연히 보호가 필요하고, 그 보호자 역할을 성룡이 맡죠. 이때부터 이미 성룡의 여자친구 역이었던 장만옥과는 묘한 긴장을 주고 받습니다. (이때의 장만옥을 생각하면, 그 뒤로 장만옥은 상당히 다이어트를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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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영화 속의 임청하는 단발 커트였습니다.^)



(도입부에서 비탈길의 판자촌 하나를 박살내고 내려오는 카 체이싱 신은 당시로선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2'를 먼저 보고 이 '폴리스 스토리'를 보신 분이 있다면 꽤 충격을 받을 겁니다. '나쁜 녀석들 2' 마지막 부분에도 이를 베낀 것이 분명한 액션 시퀀스가 나오기 때문이죠. 80년대 홍콩 영화, 특히 성룡 영화의 액션은 정교함 뿐만 아니라 규모에서도 대단했습니다.)

 

주윤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1986년작 '몽중인'은 '폴리스 스토리'에 비하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영화였지만, 임청하의 존재감은 이 쪽이 훨씬 강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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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국내에서는 '천녀유혼'의 대성공 이후, 그리고 '화중선' 같은 일련의 모방작들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간 이후에 등장했던 작품이라 큰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일부 격렬한 주윤발 팬들에 의해 기억되는 작품이죠. 아무튼 이 작품에서 주윤발과 임청하는 진시황 때 서로 사랑했다가 2000년이 지나 다시 교감하게 되는 비운의 커플을 연기합니다.

80년대의 임청하를 대표하는 작품은 아무래도 서극 감독의 '도마단(刀馬旦)'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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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하-종초홍-섭천문이라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한 작품에 집결했다는 것도 화제지만, 특히나 임청하는 여기서 또다시 남장을 하고 묘한 중성적 매력을 뽐냅니다. 이 작품에서의 임청하는 남성 관객들보다는 여성 팬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습니다. 어찌 보면 다카라즈카 극의 남자 주인공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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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동방불패'의 성공 이후 '동방여신'이라는 아주 해괴한 제목을 달고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합니다. 이미 '도마단'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출시된지 한참 다음에 말입니다.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도마단'이란 경극에 나오는 여장부 역할을 말합니다.

이 비슷한 시기, 홍콩발로 장국영이 한때 임청하를 짝사랑했고,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는 풍설이 들려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임청하라는 여배우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죠. 대체 임청하가 누구길래 '영웅본색' '천녀유혼'의 대 스타 장국영이 그렇게 힘들어 한단 말인가 하는 궁금증 때문입니다. 당대 홍콩 최고의 여배우는 당연히 임청하와 종초홍이었지만, 전편에서도 말했듯 이들을 스타로 만든 멜로드라마는 한국 시장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격차가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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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에서 임청하의 스타성이 폭발한 것은 1992년, '동방불패'가 개봉됐을 때의 일입니다. 1990년, '소오강호'의 성공은 홍콩 영화계에 김용 원작 붐과 정통 무협 붐에 불을 지릅니다. 물론 '소오강호'는 어느 정도 원작 소설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만 속편격인 '동방불패'는 주요 캐릭터들을 이어받았을 뿐 거의 새로운 작품입니다. 원작의 동방불패는 무공을 위해 거세를 하긴 하지만 영호충과 로맨스를 일으킬 수 있는 캐릭터가 전혀 아니었죠.



하지만 영화 제작진은 이 역할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애절함을 더했고, 임청하라는 스타에게 이 역할을 맡깁니다. 이미 '도마단'에서 임청하의 중성적인 매력이 갖고 있는 폭발력을 확인한 서극과 정소동에게 임청하를 이용한 동방불패 캐릭터의 구현이라는 시도는 정말 '바로 이거다' 싶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미 촬영 당시 나이 37세, 하지만 놀랍도록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임청하는 이 작품 하나로 홍콩 영화의 구원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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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위 사진은 안 나오느니만 못했던 '동방불패 2'의 홍보용 사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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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불패'의 성공 덕분에 양우생 원작의 '백발마녀전', 김용 원작의 '녹정기'와 '천룡팔부' '동사서독(사조영웅문)', 고룡 원작의 '절대쌍교'가 모두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화되죠. 이들 대부분이 히트하면서, 임청하는 '정통 무협물의 여왕'으로 다시 부각됐고 70년대와 80년대를 넘어 90년대에까지, 3 decade에 걸친 스타덤을 구축합니다.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청하가 1인2역을 연기한 '동사서독'을 최근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놨습니다. 이번엔 DVD가 제대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 예고편.



그러나 90년대의 임청하는 스스로 성공일로의 경력을 끊어 버립니다. '중경삼림'의 히트 이후, 임청하는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합니다. 상대는 홍콩의 유명 의류 브랜드 에스프리 그룹의 거물인 형리원(邢李원, 마지막 글자는 火+原, Michael Ying Lee Yuen). 주윤발, 성룡 등 숱한 톱스타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그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작가 경요가 "임청하가 진정 사랑한 사람은 진한 뿐이었다"고 말했듯, 팬들은 "어쨌든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진한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군요.
나이든 뒤의 진한과 임청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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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임청하


이건 결혼 발표 보도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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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리원-임청하 부부

 

물론 형리원과의 결혼은 임청하를 여왕 중의 여왕으로 만들었습니다. 형리원은 한때 에스프리 그룹 지분의 45%를 보유하기도 했고, 2007년에는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40대 거부 중 12위에 올랐을 정도의 자산가입니다. 두 사람은 지난 14년 동안 가끔 잡음이 일기도 했지만, 세 아이를 낳고 잘 살아왔습니다.

'에스프리 사모님'이던 시절의 임청하를 만난 사람 중 하나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송승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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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송승헌은 홍콩에서 서기, 막문위와 함께 영화 '버추얼 웨폰(당시에는 '석양천사'라는 한자 제목으로 불렸습니다)'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촬영장으로 임청하가 딸과 함께 구경을 왔다는 겁니다. '가을동화'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말입니다.

 

임청하는 송승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당연히 송승헌도 응했습니다. "어려서 본 '동방불패'에서의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더라"는 증언입니다. 언어 장벽 때문에 대화가 여의치 않아 "한국 배우들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라고 느끼기도 했다는군요.

식사를 마칠 무렵 형리원 당시 에스프리 사장이 등장해 인사를 나눴고, 이별이 아쉬웠는지 임청하는 송승헌 일행을 에스프리 본점 매장으로 데리고 가 "선물하고 싶다. 마음대로 골라라. 매장을 다 가져가도 좋다"고 말하는 큰 통(?)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송군이 "그럴 수는 없다. 사양하겠다"고 예의를 차리자(물론 브랜드가 에스프리여서 그랬을 수도 있죠^^), 못내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언제든 홍콩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었답니다.

(불행히도 송군은 이런 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찍은 기념사진은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임청하는 47세. 뭐 이 정도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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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헌의 홍콩 촬영 회고를 통해 이 이야기가 기사화된 것이 아마 임청하가 한국 미디어의 관심을 끈 사실상 마지막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뒤로 임청하에 대해 들려온 소식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가 있다는 등 단발성의 잡음 정도였습니다.

임청하는 공식적으로 은퇴 여부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종초홍이 그랬듯 그저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했을 뿐입니다. 아마 그 자신도 중단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두 편의 영화에서 나레이션을 맡아 영화계와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다시 한번 일선에 복귀한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궁금합니다. 임청하가 일선에 복귀한다면, 그가 시발점이 되어 지난해 남편의 사망으로 거액의 유산 상속자가 돼 화제를 모았던 종초홍이나 소식도 알 수 없는 섭천문 등이 장만옥과 유가령 등 아직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왕년의 전설적 여배우군에 합류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보너스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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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노래가 빠지면 안되겠죠? 장국영이 부른 '백발마녀전'의 주제가 '홍안백발'의 MV.



이상입니다.




임청하 지난 이야기를 못 보신 분은 이쪽으로

 


대개 이런데 관심이 있으면 다음 글들도 관심이 가시겠죠. 왕조현편입니다.

전편



후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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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화피' 때문에 왕조현에 대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엔 임청하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벌써 14년이나 됐군요. 임청하는 최근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감동을 주는 시나리오가 있다면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몇 차례 컴백설이 흘러나온 적이 있지만, 대개는 임청하의 이혼 가능성을 보도하면서 곁다리로 나온 소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혼설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컴백 가능성만이 부각되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임청하를 촬영장으로 다시 끌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나이 54세. 대개의 여배우들이 50대가 되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게 정상일 겁니다(간혹 과도한 성형 수술이나 미용 시술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1954년생인 배우들로는 성룡과 존 트래볼타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연배 여배우가 컴백 하건 말건, 누가 관심이 있을까 싶지만 임청하는 다르더군요. 대체 그 전설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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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홍콩영화를 대표한 것이 성룡을 중심으로 한 코믹 액션과 '영웅본색'으로 대변되는 느와르의 흐름이었다면, 90년대는 시대극을 표방한 리얼 액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는 1991년작 '동방불패'와 임청하가 있었죠. 이 시기의 홍콩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임청하와 '동방불패', '백발마녀전', '신용문객잔'과 '동사서독'을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임청하는 그 시기에 이미 30대 후반(37세)의 나이였죠. 그때까지 임청하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많은 한국 팬들은 임청하를 '젊은 날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다 나이 먹어서 뜬 배우' 정도로들 알고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에선 잘 몰랐지만, 임청하는 70년대부터 이미 중국어권을 통틀어 여배우 중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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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하는 1954년 대만에서 태어났고, 1972년 경요(瓊瑤) 원작 영화 '창외'에 캐스팅됩니다. 생일이 지나지 않은 탓인지 '17세'로 소개되기도 했군요.

 

이때부터 미모가 각광을 받아 일약 대만의 톱스타가 됩니다. 특히 대만 최고의 인기 작가 경요(흔히 '대만의 김수현'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주로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 발표하는 족족 메가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죠)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가 될 때 응당 주인공은 임청하가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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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요의 소설과 영상 작품들은 대만에서뿐만 아니라 홍콩과 싱가포르, 동남아 일대는 물론 중국 본토와 해외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이면 어디서나 인기 폭발이었기 때문에 임청하의 스타덤은 일찌감치 국제적이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스무살도 되기 전에 온갖 남자들의 구애로 요란한 스캔들이 시작됩니다.

 

임청하의 오랜 스캔들 중 첫 남자이자 끝까지 가는 남자는 바로 진한(秦漢, 1946년생)입니다. 이 스캔들이 절정에 올랐을 때에는 진상림(秦祥林, 1948년생)과의 삼각관계가 온 중국계 호사가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역시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어권에서는 당대의 미남 톱스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배우들이 잘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에서 흥행이 되는 중국어권 영화는 거의 대부분이 쿵후 액션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멜로드라마형 스타들은 드러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거죠. 아비와 진추하 주연의 '사랑의 스잔나' 같은 경우가 좀 드문 예외였고, 진추하조차도 그 이후의 스타덤을 이어 갈만한 히트작을 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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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진한, 오른쪽이 진상림.)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만 드라마. 초반 몇분은 그냥 지나치면 얼음여왕님의 앳된 비키니 장면이 나옵니다. 제목은 모르겠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진한.





임청하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는 세 스타가 공연한 1976년작 '아시일편운(我是一片雲, 역시 경요 원작)'에서 최고조에 달합니다. 여기서 승자가 되는 진한은 국내에서는 관금붕 감독, 장만옥 주연의 '완령옥'에 중간 정도 비중으로 얼굴을 비춥니다. 이에 비해 진상림은 국내 팬들이 이름을 몰라서 그렇지 얼굴은 꽤 알려진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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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성룡, 홍금보와 함께 80년대에 '오복성' '복성고조' '하일복성' 시리즈에 참여하기 때문이죠. 다섯 멤버 중 얼굴만 번드르하고 실속은 없는 바로 그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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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네 사람 중 맨 오른쪽이 진상림. 옆의 배우 이름에도 성룡, 홍금보, 종초홍과 함께 진상림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아무튼 국내에 임청하가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은 1978년작 한-홍콩 합작 '백사전(眞白蛇傳)'인 것으로 보입니다. 흰 뱀이 변한 여자가 인간의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요물을 용서하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슬픈 전설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하고, 뒷날 왕조현 장만옥 주연의 '청사'와도 사실상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도 진상림이군요.

임청하가 언제 홍콩으로 본격 진출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1977년 쇼 브라더스 영화 '홍루몽'에도 나오는 걸 보면 교류는 일찍부터 있었을 듯 합니다.

이한상 감독의 '홍루몽' 앞 부분입니다. 이때부터 소년 역으로 나오니 임청하의 남장은 정말 역사가 길다고 해야겠죠.




1980년, 당대의 검술 액션 1인자 정소추와 공연한 1980년작 '정인간도(情人看刀)'가 히트할 무렵에는 스타덤의 중심지가 대만에서 홍콩으로 이동해 있습니다. 그리고 1982년, '미니특공대(迷니特攻隊)'로 더 이상 멜로 스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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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1985년 국내에서 '대복성'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가 개봉됐을 때 본 저로서도 이 영화에 임청하가 무슨 역으로 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지 3년이나 지나 개봉된 이 영화의 국내 제목이 원제와 전혀 무관한 '대복성'인 이유는 '오복성'의 히트 때문이라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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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과 왕우, 정소추와 임청하 등 호화 배역진이 출동한 이 영화의 배경은 참으로 황당무계합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열대지방의 전선(?)에서 뭔가 미션을 이행하기 위해 왕우가 인솔하는 특공대가 길을 떠납니다. 특공대원 중 성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이죠. 네. 리 마빈 주연의 '특공대작전(Dirty Dozen)'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길을 떠난 뒤로 여인족(?)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귀신나오는 집(?)에서 귀신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아무튼 결말은 장렬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영화 보신 분들 있나요? 영상을 보시면 기억이 좀 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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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순서대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국내에서 임청하를 볼 기회는 1978년 개봉된 '백사전', 1983년의 '촉산', 그리고 1985년의 '대복성'과 '폴리스 스토리'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역할은 '촉산'이죠. 물론 이때까지도 '악의 화신이 된 정소추 때문에 번민하는 예쁜 그녀'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지 임청하라는 이름은 전혀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1980년대 중반까지밖에 못 왔는데, 예상대로 너무 길어지는군요. 이번엔 이 정도에서 끊겠습니다. 나머지 얘기들은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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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입니다.



대개 이런데 관심이 있으면 다음 글들도 관심이 가시겠죠?

전편



후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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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현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특히 왕조현을 기억하는 분들이면 1965년생 정도에서 시작해 70년대 초반 생 남자에서 그칠 거리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재 20대인 분들도 그를 기억하고 있더군요.

참 영화 한 편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사실 '화피'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천녀유혼'에 대한 추억을 다시 나눌 일도 없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화피'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난번 포스팅에 이어 이번에는 왕조현의 어두운 면을 다뤄 보겠습니다. 만 20세에 '천녀유혼'으로 일약 톱스타의 자리에 오른 왕조현은 왜 거기서 더 성장해 종초홍이나 임청하의 위치에까지 오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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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0세의 왕조현. 얼굴은 성숙했지만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입니다. 당연히 주위의 유혹도 많았겠죠. 그리고 스캔들은 18세때부터 시작됩니다.

홍콩으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왕조현은 '위사리전기(衛斯理傳奇)'라는 영화에 출연합니다. 이 영화는 위슬리라는 주인공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베스트셀러 모험소설 시리즈가 처음으로 영화화된 것이었죠. '위사리'란 위슬리의 한자 표기입니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허관걸.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성룡이나 주윤발에 비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중화권에서는 이 두 사람에 결코 못지 않은 인기 스타였습니다. 특히 '미스터 부' 시리즈나 '최가박당' 시리즈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못지 않은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왕조현이 나온 '위사리전기'는 국내에서도 개봉됐습니다. 티벳의 포탈라이궁을 무대로 용의 기원과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특이한 발상이 눈길을 끄는, 그런대로 볼만한 영화였죠.




국내에서 '미스터 부'라는 제목으로만 개봉된 시리즈 4편 '마등보표'나 '최가박당'은 홍콩 코미디의 전성기를 열었다 해도 좋은 작품들입니다. 허관걸이 국내에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훨씬 뒷날의 '소오강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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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48년생인 허관걸과 67년생인 왕조현은 거의 아버지와 딸의 차이가 나지만 이 허관걸이 바로 왕조현의 첫 스캔들 상대가 됩니다. 그 뒤로도 상대역으로 만나는 연기자마다 모두 왕조현과 연인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분방한 생활을 하죠. 아무리 홍콩 기자들이 뻥이 세기로 유명하다지만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왕조현은 한 인터뷰에서 "촬영장에 나가면 다들 나를 친근한 막내동생처럼 대했다. 그만큼 나와 상대역 배우들은 대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 역시 스스럼없이 그들을 대하다 보니 가끔 감정이 불쑥불쑥 드러날 때도 있었다"고 술회한 걸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왕조현의 가장 오랜 연인이라면 가수 제진(齊秦, Chyi Chin)입니다.






역시 국내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기 가수 겸 배우인 제진은 1988년부터 10여년간에 걸쳐 왕조현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연인입니다. 홍콩 쇼비즈니스계는 수차에 걸쳐 이들의 결혼 날짜를 보도하지만 결국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진과 계속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더라면 왕조현의 이미지가 나빠질 일은 없었겠지만 왕조현은 엉뚱하게도 홍콩과 대만 실업계-연예계의 거물인 임건악(林建岳, Lam Kin Ngak)과의 염문설에 휩싸입니다. 임건악은 현재 홍콩 영화계의 최대 배급사로 꼽히는 미디어 아시아(환아)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서울공략' 개봉때 이명박 시장을 만난 임건악.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입니다.



문제는 임건악이 처자식이 있는 중년이었다는 것이죠. 관계는 공공연해졌지만 결국 왕조현은 부자 남자의 첩에 머물고 맙니다.



이런 소문이 왕조현에게는 치명적이었죠. 영화 '청사'가 개봉됐을 때, 홍콩에서는 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대만에서는 관객들이 이 영화의 관람을 보이코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1994년, 불과 27세의 나이로 왕조현은 첫번째 은퇴선언을 합니다. 1997년 일본 영화 '북경원인'과 일본 드라마 한편에 우정출연한 것 외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죠. 오랜 칩거에도 좋아진 것은 없었고, 영화 '유원경몽'의 촬영을 마친 뒤에는 두번째 은퇴 선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은퇴는 모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임건악과 결별하고, 임건악은 대만 출신의 모델 모니카와 정분이 납니다.  결별 이후 애인 제진과의 재결합 소문이 잠시 돌지만 이번에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난번에 말했듯 왕조현은 '미려상해-상하이 스토리(2004)'를 촬영하죠. 이 영화로 왕조현은 색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마침내 연기에 눈을 떴다'는 긍정적인 평가였죠.

'미려상해'의 공개 이후 왕조현은 문제의 '뚱보 사진' 공개로 곤욕을 치릅니다.





'차기작에서의 캐릭터를 위해 살을 찌우고 있다' '스트레스성 폭식이다' '장국영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 먹기만 한다' '평소에도 워낙 많이 먹는 습관이 있었다'는 등 온갖 해석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새로운 모습이 공개되죠. 이번엔 다시 멀쩡해진 왕조현입니다. 두달 동안 야채만 먹었다든가 뭐 그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미려상해' 이후 왕조현은 여전히 밴쿠버(위 사진의 溫哥華)에서 조용히 칩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며 활동이며 완전히 중단한 지 오래. 아직 활동 재개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겠죠.

** 밴쿠버 사시는 분들, 사진 한장 찍어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서양에서 태어났더라면 이 정도의 스캔들이 배우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왕조현은 임건악과의 연애로 상당히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물론 왕조현 본인이 좀 더 배우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커리어 관리에 관심이 많았다면 일찌감치 이뤄 놓은 아시아 권의 톱스타 자리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겠죠. 장만옥이나 공리, 양자경 같은 선배들은 물론이고 훨씬 어린 장자이가 오늘날 가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왕조현이 그 자리에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인터넷에 '왕조현의 최근 사진'이라고 돌고 있는 사진이지만 진위는 확실치 않습니다.)






아무튼 그나마 21세기에 촬영된 그녀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유원경몽'의 예고편입니다.



마무리는 그래도 '천녀유혼'으로 해야겠죠?



아쉽다는 여론에 따라 전설의 목욕통 신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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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왕조현에 대한 추억 밟기를 마무리합니다. 이번에 저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왕조현도 '화피(Painted Skin)'라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더군요. 국내에 '무림객잔'이라고 소개됐던 1992년작 영화의 원제가 '화피지음양법왕(畵皮之陰陽法王)'이었습니다. 왕년의 명감독 호금전이 역시 화피 이야기를 소재로 음양법왕이라는 악의 존재와 싸우는 도사와 서생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호금전과 임청하의 '신용문객잔'의 영향이겠지만 도대체 이 이야기와 '무림객잔'이란 제목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참...) 왕조현은 여기서도 귀신 역으로 나오고, 정소추와 홍금보가 공연합니다. 설정으로 봐선 별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진짜 끝.




전편입니다. 왕조현의 전설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못 보신 분은 이쪽으로.




영화 '화피'에 대한 내용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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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중인 중국산 판타지 영화 '화피'를 보고도 '천녀유혼'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영화 '천녀유혼'(최근 제작된 드라마 '천녀유혼'이 아닙니다)을 본 적이 없는 사람뿐일 겁니다. 21세기의 감각과 기술이 21년 전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죠.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짝이 없었던 80년대, 푸른 색 조명 아래 등장한 한 미녀의 고혹적인 자태는 한국 젊은이들의 삼혼칠백(三魂七魄)을 사정 보지 않고 안다리로 후려 버렸습니다. 개봉관인 아세아극장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천녀유혼'은 재개봉관으로 흩어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신드롬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미 개봉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에스케이프 걸'까지 '의개운천'이라는 중국영화풍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고, 이 영화 이후에는 '귀신같다'는 말이 더 이상 욕이 아니었습니다. 꼴사나운 산발 머리를 한 여자를 가리켜 '귀신같다'던 말은 어느새 사라지고, 예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를 보고 '귀신같다'고 하게 됐죠.

그게 바로 왕조현의 위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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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는 조이 웡(Joey Wong)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왕조현은 1967년 1월 31일생입니다. 광동어로는 왕조인, 북경어로는 왕쭈샨, 대만식 북경어(북경어와 다른가보죠?) 왕츄션, 복주어로는 옹조헨이라고 불린다는군요. (네. 장난은 그만 치겠습니다.)

대만의 수도 대북에서 태어난 왕조현은 2남2녀의 둘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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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에는 '왕조현이 대만 대표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는 비장함 때문에 영화배우로 변신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왕조현은 어린 시절부터 쿠오 콴 아트스쿨에서 배우수업을 받은 연기자였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농구선수였고, 14세부터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5세때 농구화 CF 한 방을 찍고서 농구 선수로서의 미래와는 안녕을 고하게 되죠. 당연합니다. 이런 미녀를 농구계로 돌려보낼만큼 대만 연예계가 무능하지는 않았겠죠.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키였을 겁니다.





그의 프로필에는 키가 1m72로 돼 있지만 실물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1m80"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트릭을 쓰지 않고 그녀와 나란히 연기할 수 있는 남자 배우는 홍콩에는 거의 없었단 얘기죠.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주윤발과 공연한 1986년작 '의개운천(義蓋雲天)'입니다. 처음에는 '에스케이프 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가 몇년 뒤에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죠.

왜 한문 제목으로 다시 개봉됐을까요. 이유는 당연합니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열렸기 때문이고, 한자 제목(그것도 넉자라야 제 맛입니다)을 달아야 진정한 홍콩 영화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성기를 연 작품이라면 당연히 '영웅본색' 연작을 꼽아야겠지만 '천녀유혼'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1987년,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한국 남자들은 모두 이 여자에게 혼이 나갔습니다.


물론 이 영화를 8번 본 제가 과장하는 건지도 모르지만(제 주위에는 10번 이상 본 사람도 즐비합니다) 이 영화는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그 신비로움은 왕조현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어떤 사진을 봐도 '천녀유혼'의 왕조현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특히 이 물통이 나오는 신에서의 아름다움은 정말 숨을 멎게 하죠. 이렇게 흘러갑니다.

아시다시피 '천녀유혼'은 포송령 원작 '요재지이'의 한 토막입니다. '요재지이'는 구우의 '전등신화',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마찬가지로 이곳 저곳의 민담을 소설에 가까운 형식으로 엮은 단편집 형태의 책입니다. 당연히 '천녀유혼' 이야기도 매우 짧습니다.

아내가 있는 영채신이라는 남자가 객지의 절에서 하룻밤 유숙하다가 섭소천이라는 절세미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지만 준엄하게 꾸짖고 물리칩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옆방의 서생들이 죽어 있죠.

어찌어찌해서 영채신은 역시 같은 절에 머물게 된 연적하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섭소천이 귀신이란 사실을 알고 유골을 파내 고향으로 돌아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줍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섭소천은 다시 영채신의 곁에 나타나 두 사람이 남매의 연을 맺고, 영채신의 아내가 병들어 죽자 재혼해서 아들 낳고 딸 낳고(...귀신이?) 행복하게 삽니다. 매우 동화적인 해피엔딩입니다.





이게 전부냐구요? 그렇습니다. 천녀(섭소천)를 괴롭히는 대마녀도, 인간세계에 실망해 숲으로 들어온 도사 연적하의 사연도, 흑산대마왕과의 혈투도, 천녀를 안장해 주면 영원히 그녀와 이별해야 하는 영채신의 애절한 사랑도 원작에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모두 서극과 정소동의 창작입니다.

자, '천녀유혼'을 보신 분이라면, 이 짧고 심심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가슴아픈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여기에 음악이며, 푸른 색과 붉은 색을 자유자재로 이용한 조명 역시 장인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홍콩 영화의 르네상스는 짤짤이로 따온 게 아니었던 겁니다.


'영웅본색'이나 마찬가지로 '천녀유혼' 이후 엄청나게 많은 모방작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인 '화중선'에는 왕조현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죠. 아무튼 그중 퀄리티를 유지한 작품이었던 '천녀유혼 2 - 인간도'를 제외한 모든 작품은 한마디로 허섭쓰레기에 불과했죠.






최근 TV 시리즈로 재탄생한 천녀유혼 시리즈. 이렇게 장면까지 거의 똑같이 재현해 냈지만 원작의 포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중론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은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홍콩 영화의 미적 감각을 지배했고, 또 한편으로는 왕조현이라는 배우의 연기 인생을 정리해 버렸습니다. 이 배우가 그 이후로 어떤 역할을 맡아도 '천녀유혼'의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죠. 물론 이후의 배우 인생을 볼 때 그리 적극적으로 지우려는 노력이 있었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천녀유혼' 이전의 '의개운천'에서는 그래도 배우로서의 진지한 모습이 보였다고 할 수 있지만 '도신' 시리즈와 같은 현대물에서 왕조현은 그냥 예쁜 장식 같은 배우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스타의 자리를 유지하게 해 준 것이 '천녀유혼'의 또 다른 변형이랄 수 있는 '청사' 정도죠.




청사, 결말의 특수효과만 좀 자제했더라도 괜찮은 영화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장동건이 나왔던 '무극'과도 통하는 영화입니다. 산해경에 나오는 과부(widow가 아니라 발이 엄청 빨랐던 전설의 거인족 이름입니다) 전설에 기반을 두고, 해보다 빨리 달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역시 허무한 '천녀유혼'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캐릭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연기력의 부족이었죠. '천녀유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요부 연기가 현대극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관객들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왕조현이 현실로 내려오는 것, 즉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는지도...

물론 저 '우연'은 그런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왕조현의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장국영을 좋아하는 동료 가수 역으로 나왔던 매염방의 우수 어린 눈길이 기억에 남을 뿐. 그러고 보니 왕조현을 뺀 두 사람은 고인이 됐군요.





'천녀유혼'은 한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히트했고, 왕조현은 일약 아시아의 톱스타가 됩니다. 한국에서 찍은 이 CF는 지금까지도 그 시대를 산 분들의 기억에 생생할 겁니다.



자, 이 CF를 보고 나면 꼭 생각나는 CF가 있죠.



이후 왕조현은 1989년에는 '홍콩에서 온 여인'이라는 일본 드라마에도 출연하죠. 이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상당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스타덤에 오른 것이 장애가 됐습니다. '천녀유혼'이 공개됐을 때 만 20세. 홍콩 진출 이후 8년간 왕조현은 58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매년 7편 이상을 찍은 셈이죠.

이 정도의 작품수를 유지하면서 이미지관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당시 홍콩 영화계의 현실이었다고 보는게 좋을 겁니다. 그야말로 그냥 찍어 붓는 형태의 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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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발목을 잡은 것은 그녀의 사생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콩에서의 그녀는 스캔들의 여왕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자세히 하겠습니다) 결국 생활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한때 왕조현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대중을 경악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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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바로 그 다음편입니다.

왕조현이 왜 배우로 계속 성공하지 못했나, 후일담입니다.




영화 '화피'에 대한 내용은 이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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