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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idol) 그룹 멤버들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방신기 사태는 물밑에서 장기화되어 가는 듯 하고, 2PM의 리더 재범이 미국으로 돌아간데 이어 SS501의 김현중은 신종 플루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공통점 없는 사건들이지만 이런 뉴스들이 일으키는 반향을 보면, 이들의 팬이 아닌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대체 아이들이 뭐길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한국은 1996년 H.O.T의 출현과 함께 아이들 시대를 맞게 됩니다. 10년이 조금 넘은 역사죠. 아이들 그룹의 운영이나 결성에 있어 아직 한국은 초보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그룹이라는 존재와 사회적인 영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경우를 참고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이들 그룹을 만들고, 독특한 운영 노하우를 키워온 나라가 바로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아이들 그룹 운영은 올해로 47년에 달합니다.

일본 아이들 그룹을 오래 전부터 좋아하고, 자니즈의 팬이었던 분들에게는 상식적인 내용일 겁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의 '아이들 입문'을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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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펑크라는 문학 장르를 세상에 알린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의 장편 소설 중에 '아이도루(Idoru)'라는 작품이 있다. 1997년작이다 보니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일본의 사이버 가수 교코에 착안한 미래 사회의 사이버 스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왜 책의 제목은 아이들(Idol)이 아니라 아이도루(Idoru)일까. 당연히 '아이도루'는 '아이들'의 일본식 발음이다(사실 한국에도 '아이들'보다는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심지어 몇몇 언론사는 '아이돌'이 공식 표기 방침이기도 하다). 깁슨은 소위 '만들어진 아이들 스타'는 미국보다 일본이 원조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아이들 그룹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필요할 듯 하다. 보통 팝 아이들(pop idol)이라고 하면 십대들이 열광하는 인기 스타를 통칭하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렇고 비틀즈도 그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들 그룹이라는 말은 특정한 형태의 뮤지션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즉 ▲10대 초반, 늦어도 10대 중반부터 전문적인 기획자에 의해 발굴된 멤버들로 구성돼야 하고 ▲데뷔 전 상당기간의 트레이닝을 거쳐야 하며 ▲가사와 음악 역시 전문적인 기획자들에게 의존하며 ▲팬들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해가는 운명을 갖는다는 점이 아이들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팀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볼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팝 아이들이긴 하지만 아이들 그룹은 될 수 없다.

영미권에서는 보이 밴드(boy band)라는 말이 좀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이 말 역시 사용되면서 의미가 조금씩 변했다. 처음 쓰인 것은 마이클 잭슨과 형들로 이뤄진 잭슨5가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한 1968년 무렵이다. 이 시기의 보이 밴드라는 말은 그냥 나이 어린 멤버들로 이뤄진 그룹이라는 정도였지만, 1984년 뉴 키즈 온 더 블럭이 신화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보이 밴드=아이들 그룹'이라는 시각이 보편화됐다.

그런데 아이들 그룹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마이클 잭슨과 잭슨 5가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인 1962년, 이미 오늘날의 형태와 거의 차이가 없는 아이들 그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일본에서 결성된 사상 최초의 아이들 그룹 자니즈(Johnny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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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1세였던 자니 기타가와는 16세의 마이에 히로미와 이이노 오사미, 15세의 나카타니 료, 14세의 아오이 테루히코 등 네 미소년을 모아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그룹을 만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태생인 기타가와는 주일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가 우연히 음반 기획자로 변신했다.

자니즈는 멤버들 개개인의 매력은 물론 쉽고 밝은 노래,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춤과 몸짓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또 멤버들은 청소년 대상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다양한 재능을 뽐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기타가와는 아예 재능있는 소년들을 조기에 발굴해 제 2의 자니즈로 키워낼 수 있는 기획사를 창업한다. 이것이 바로 자니즈 사무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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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자니즈라는 이름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일본 연예계에 손톱만큼의 지식만 있다면 자니즈 출신 보이 밴드들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들 그룹이 자니즈라면 70년대에는 포 리브스(Four Leaves)가 있었고 80년대에는 본격적인 댄싱 아이들 그룹 쇼넨타이, 즉 소년대(少年隊)가 위력을 뽐냈다. 1984년 3인조로 구성된 쇼넨타이의 인기는 곧바로 국내에도 이어져 소방차라는 대체 그룹이 만들어졌다. 물론 자니즈의 최대 걸작은 1991년 데뷔한 SMAP다.

1988년, 기타가와는 당시 인기 아이들 그룹이던 히카루 겐지의 백댄서로 12명의 소년 댄싱 팀을 가동시켰다. 이미 스타가 되어 있는 팀과 함께 무대에 세움으로서 누가 실전에서 통할지를 검증하는 방법이었다(이런 시스템은 나중에 자니즈 주니어라는 '2군' 체제로 확립된다). 이 12명 중 기무라 타쿠야, 나카이 마사히로, 구사나기 츠요시(초난강), 이나가키 고로, 가토리 신고, 모리 가쓰유키의 6명이 SMAP이라는 새로운 팀으로 선택됐다. 1991년 이들이 정식 데뷔했을 때의 나이는 나카이와 기무라가 19세, 이나가키와 모리가 18세, 구사나기가 17세, 막내인 가토리는 14세였다.

일본 아이들 역사상 최고의 그룹으로 불리는 SMAP은 1993년 '캐릭터 부여'라는 새로운 전략과 함께 순항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략에 따라 나카이는 열정적인 리더, 이나가키는 시니컬한 귀공자, 구사나기는 배려심 강한 착한 친구 등의 이미지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기무라 다쿠야가 드라마에 데뷔하며 뒷날 일본 최고의 인기남으로 발돋움할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1993년의 일이다. 1996년 모리의 탈퇴로 5인조가 된 SMAP은 오늘날까지도 그룹을 유지하면서 멤버 개개인이 모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이 함께 진행하는 토크쇼 'SMAP X SMAP'에 게스트로도 초대되느냐 마느냐는 한류 스타들이 일본 내에서 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의 기준으로 통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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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P 이후에도 자니즈는 V6, 아라시, 캇툰(KAT-TUN) 등 최정상의 인기 그룹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여성 멤버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 그룹은 배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자니즈는 1980년대 오렌지 시스터즈라는 여성 그룹 프로젝트를 시도하다 실패한 것 외에는 아예 여자 연습생을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운영은 곧바로 기타가와의 성적 취향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기타가와는 여러 차례 자기 휘하 아이들 멤버들에 대한 성희롱 혐의를 받았다.

1999년,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칸분슈운(週刊文春)은 자니즈 내부의 성추행과 음주, 흡연 등 어두운 구석을 캐는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이로 인해 자니즈에 대한 경찰 수사가 진행됐고, 기타가와는 의회 청문회에도 나서야 했다. 혐의를 전면 부장한 기타가와는 곧 슈칸분슈운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은 5년 이상 진행되다가 결국 '슈칸분슈운 측의 취재에는 자니즈의 비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보도할만한 근거가 있었다. 단 음주와 흡연 부분에서 자니즈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다소 애매한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이런 내용 역시 주요 언론에 의해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자니즈는 지금도 최고의 미소년 아이들 그룹들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동성애나 성추행 부분을 제외하고 한국의 아이들 업계는 대동소이하게 자니즈 모델을 모방하고 있다. 90년대 초에도 잼이나 투투, 룰라 같은 댄스 그룹들이 인기를 얻었지만 최초의 한국형 아이들 그룹이라면 아무래도 1996년의 H.O.T를 꼽게 된다. 이후 SM이 S.E.S와 신화, 대성기획(현 DSP)가 젝스키스와 핑클을 내놔 성공을 이어가자 이들을 모방한 그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급조된 아이들 그룹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SM과 대성기획 이외의 기획사 소속 아이들 그룹 중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것은 소방차 멤버 출신 김태형이 제작한 NRG 정도일 뿐, 나머지는 대부분 단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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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와 가요계의 경기 추락은 '신생 아이들 그룹'의 맥을 끊었다. 아이들 그룹은 고비용일 수밖에 없다. 연습생이건, 데뷔 초년생이건 백댄서와 스태프를 포함해 장정 10~20여명이 몰려다니면 밥값이나 교통비만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공백을 깬 건 역시 SM. 2004년 등장한 동방신기는 오랜만에 아이들 그룹에 목말랐던 10대 팬들에게 감로수 역할을 했다. 4~5팀을 만들 에이스들을 뽑아 한 팀에 몰아넣었으니 자질은 우수할 수밖에 없었고 동방신기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이들 그룹 비즈니스의 필연인 장기 계약과 처우 문제는 또다시 그룹의 장래에 암운을 던졌다.

일본이라면 어땠을까. 자니즈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계약은 주기적으로 갱신되지만 사실상 종신 계약이라고 보는 게 좋다. 자니즈가 포기하지 않는 한, 스스로 자니즈를 벗어나 연예계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니 기타가와와 슈칸분슈운의 법정 분쟁이 진행중인 기간에도 분슈운(文藝春秋)계열의 매체를 제외하곤 어떤 방송이나 신문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만치 자니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류 스타들을 놓고 일본 매체 기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던 것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무소(소속사)가 자주 바뀌냐"는 것이었다. 일본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동방신기의 이익 배분 논란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니즈는 물론 어떤 기획사에서도 한창 인기가 치솟는 20대 초반의 청춘 스타들은 돈을 벌지 못한다. 소속 연예인들은 연공 서열과 왕년의 활동 경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당장 인기 있는 최고 스타보다 10년 20년 '근속'한 왕년의 스타들이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져간다. 이것이 일본의 '사무소' 시스템이다. 일본 연예인들에게 데뷔 5년째인 가수들이 1인당 20억원 넘게 돈을 벌었다고 하면 눈이 휘둥그레 질 것이다.

아이들 그룹이란 연예계의 냉혹함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학업과 학교생활로 보낼 10대 시기를 이른 직업훈련으로 보낸 아이들 그룹 멤버들은 춤과 노래, 그리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제외하면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 결핍되기 쉽다. 물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설사 아이들로 성공한다 해도 그 전성기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찬란한 시기를 되새김하며 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을 동경하는 10대들은 날로 늘어가는 추세다. 결국 이들에게 조언해줄 어른들의 현명함만이 비극을 줄일 수 있다.
(끝)



좀 더 길게 썼어야겠지만 주어진 지면의 한계로 이 정도에 끝냈습니다. 미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의 비교 등도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쇼넨타이가 활동하던 80년대만 해도 한국은 단순히 일본 대중문화의 모방국이었습니다. 쇼넨타이가 준 충격이 바로 이 분들을 만들어 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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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한국 최초의 아이들 그룹(?)이라고 봐도 좋을 이 분들은 당시에는 초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분들이 성공을 거둔 이후로 차츰 댄스 그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햇죠. 일본과는 달리 혼성 그룹들이 두각을 보였습니다. 윤현숙의 잼을 비롯해 투투와 룰라의 전성기가 있었고, 노이즈도 이 시기를 빛낸 그룹이죠.

그런 시기를 지나 이제는 한국산 아이들이 일본 시장을 넘나들며 한류를 이끌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아이들 그룹이라고 해도 일본에서는 10대 시장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등의 문제는 있지만 절대적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한 것만으로도 상황은 고무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그룹의 육성과 운영은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 멤버 개개인에게는 인생을 좌우하는 학교생활과 바꾼 배움의 장이라는 면에서 더더욱 그렇죠. 글 말미에 '어른들의 책임'을 강조한 것은 그런 부분들을 고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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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아이들 그룹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팬들입니다. 팬덤의 결집과 육성, 관리는 아이들 그룹의 생존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팬들의 사랑은 맹목적이라는 겁니다. 이들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애당초 정상적인 판단을 요구한다면 아이들 그룹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팬들의 이런 맹목적인 사랑은 가끔 아이들 아티스트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지나친 팬들의 사랑은 가끔 스토킹으로 변하기도 하고, 안티 팬들을 불러모으기도 합니다. 팬덤은 흔히 아이들의 기획사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릇된 판단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가끔 팬들은 아픈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도 긴 주삿바늘이 아기를 찌르는 걸 볼 수 없다며 한사코 아기를 내려놓지 않는 엄마를 연상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팬들의 사랑은 아이들 아티스트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때로 팬들은 그들의 우상을 죽인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기도 합니다. 요즘도 팬들의 바보같은 사랑때문에 완전히 재기불능이 될 지도 모르는 한 아이들 아티스트의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과연 그 팬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바로 '오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느라 부실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를 하다가 > 여기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요즘은 스타 아나운서가 없을까  (52) 200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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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테이너 어쩌고 하는 얘기가 유행하던게 벌써 오랜 옛날 일 같습니다. 애당초 별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했는데 이름을 지어 부추기다 보니 한때는 떠들썩 했습니다만, 지금은 싹 사라진 분위기입니다.

사실 최근 몇해 동안 아나운서들이 떴던 시절이 있었다지만, 따지고 보면 유명했던 건 훨씬 더 옛날의 아나운서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대자면 숱하게 댈 수 있죠. 그런데 지난해 이후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유명한 아나운서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왜 요즘은 아나운서들이 전처럼 활개를 치지 못할까요? 그런 저런 궁금증에 대한 글을 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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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스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태희의 외모도, 김제동의 개인기도, 강호동의 우기기도 없이 마이크 하나로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기며 온 국민을 사각 화면 앞으로 끌어모으던 왕년의 제왕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말을 듣고 '그러게. 한때 김성주, 강수정, 노현정이 방송을 다 하는 듯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더니 어떻게 된걸까'하는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아직 아마추어 시청자다. 그럼 아직도 가끔 화제에 오르는 황현정-황수경-황정민 '황 트리오'의 전성기 때 얘길까? 아니면 온 국민의 일요일 아침을 깨웠던 '열전! 달리는 일요일'의 최선규나 손범수 아나운서를 떠올려야 할까?

그 정도도 아직 멀었다. 진정한 스타 아나운서라면 왕년의 MBC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양분했던 '장학퀴즈'의 차인태,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밖에 KBS를 대표했던 미스코리아 전담 MC 김동건, '장수만세'에서 팝 DJ까지 TBC를 개인 방송처럼 휘저었던 황인용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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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 모두를 무색하게 만드는 '임택근'이라는 이름도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가수 임재범과 탤런트 손지창의 아버지로나 알려져 있지만 50대 이상 연령층에게는 김지미나 신성일보다도 한 단계 위의 스타다. 톱스타 엄앵란과 춤 한번 춘 죄로 스캔들의 주역이 되고, 4.19때 KBS 앞에 몰려든 시위대가 '사장 나오라'가 아니라 '임택근 나오라'고 외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오늘날의 방송환경에서 이런 전설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1950년대의 스타 아나운서 임택근은 거의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낼 수 있었다. 인기는 곧 권력이 되었고, 한번 스타가 된 이들은 새로 올라오는 후배들의 진출을 막고 자신의 치세를 늘려 나갈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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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두명의 탁월한 방송인은 전체 편성을 좌우할 수 있었다. MBC의 경우에도 변웅전과 차인태라는 두 스타가 각각 교양은 차인태, 오락은 변웅전이라는 식으로 황금분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스타는 수시로 이 경계를 넘나들며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신군부의 방송 장악과 함께 상황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 MBC TV '영 일레븐', KBS 2TV '젊음의 행진'을 시작으로 젊은 층을 겨냥한 예능 프로그램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런 프로그램에는 새로운 감각의 진행자들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재빨리 상식이 됐다. 개그맨 출신의 주병진, 가수 출신의 이문세, 배우 출신의 송승환 등 '젊은' 전문 MC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런 예능 MC 전문화는 전 연령대에서 활기차게 이뤄졌다. '가족오락관'의 허참, '사랑의 스튜디오'의 임성훈, '우정의 무대'의 이상용, 그리고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등이 전면으로 나섰다.
이런 경향은 아나운서들의 활동 영역 축소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반발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80년대 이후 3S 정책하에서 예능 프로그램들은 급격하게 저질화(?) 되기 시작했고 대다수 아나운서들은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체면이 깎이는 일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아나운서들은 9시 뉴스의 메인 앵커라는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데 있어 예능 프로그램 진행 경력이 오히려 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KBS의 전직 예능 PD는 "90년대 초에는 '연예가 중계'의 MC를 사내 공모했는데 지원하는 여자 아나운서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이를 꺼리지 않았던 손범수, 김병찬 등은 동료들이 외면하던 예능 진행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결국 스타 아나운서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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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경제 상황에서 왔다. 1997년, 한국이 IMF 시대를 맞자 온갖 기업이 경비절감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아도는 내부 인력 때문에 고민하던 KBS는 그 즉시 상대적으로 출연료가 비쌌던 외부 진행자들을 정리하고 소속 아나운서들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위에서도 거론한 황정민-황현정-황수경의 3황 아나운서가 방송계의 신데렐라로 다시 태어났다.

2006년 전후, '아나테이너 붐'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독일 월드컵 중계에서 보여준 탁월한 진행력을 바탕으로 김성주가 스타 아나운서로 뜨기 시작했고 KBS 2TV '여걸 식스'에서 소탈함을 뽐낸 강수정도 각광을 받았다. 이어 새로운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인 KBS 2TV '상상플러스'의 노현정, '스펀지'의 2대 진행자인 김경란 '하이파이브'에 투입된 이정민 역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이미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데다 어느 방송사보다 풍부한 인력을 자랑하는 KBS는 이번에도 한발 앞서갔다.

이들의 성공사례와 함께 다시 한번 각 방송사는 아나운서들의 스타 만들기에 전념했다. 무엇보다 싸고, 정확한 한국어 교육으로 자질 시비에 휘말릴 여지도 없고, 이미 선발할 때부터 외모를 고려했으니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들이 MC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더 좋을 일이 없었다. SBS는 뻔한 논란을 무릅쓰고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김주희의 해외 미인대회 수영복 심사를 용인했고, MBC는 아예 서현진, 최현정, 손정은, 문지애 등 신인급 아나운서들을 한꺼번에 투입한 예능프로그램 '지피지기'를 신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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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근 2년간에 대해 '아나테이너 전성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냈지만 사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일 뿐이다. 예능에 재능이 있던 몇몇 아나운서들이 우연히 '반짝 인기'를 얻었지만 이들 가운데 방송계의 스타로 불릴 만한 인물은 배출되지 않았다. 여론의 호들갑이 거품만 키웠을 뿐이다.

강제형 아나운서 협회장은 스타 아나운서의 부재에 대해 "과거처럼 긴 호흡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고, 장수 프로그램도 없는 방송의 '경박단소(輕薄短小)화'가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왕년의 대형 아나운서들이 스포츠 중계에서부터 바닥을 다져 올라온 데 비하면 최근의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들은 2∼3년차의 경력 때부터 오락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빠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거듭되는게 스타 아나운서의 배출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에 대한 각 방송사의 냉담한 분위기가 스타 아나운서의 출현에 가장 큰 장벽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각 방송사의 예능국에서는 일정한 MC 풀을 갖고 오락 프로그램 진용을 짠다.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 인정받으면 유재석, 강호동, 이휘재, 탁재훈 등의 위치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스타 아나운서에게 과연 무엇이 따라오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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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같으면 인기 아나운서들은 프리랜서로 독립해 고액 출연료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지난해 이후 이건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KBS 노사는 최근 PD와 아나운서를 막론하고 프리랜서로 나선 전직 직원에게는 사직후 3년간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다른 방송사들 역시 자사 출신의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에게 비싼 출연료를 주는 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의 푸념은 이어졌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뜨기' 위해서는 온 몸을 던져야 한다. 연예인 MC들이 개다리 춤을 추고, 한겨울에 얼음물에 뛰어들고, 까나리액젓을 자진해서 마시는 건 스타만 되면 그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봉급생활자인 아나운서에게 프리랜서로 클 통로까지 막아 놓으면 대체 뭘 기대하고 그 고생을 하겠나. 회당 몇만원의 수당을 받으면서 500만원, 1000만원 받는 '동료'들과 나란히 서는 게 '스타 아나운서'의 본질이라면 말이다."

어렵게 스타가 되어도 따라오는게 상대적 박탈감뿐이라면 과연 누가 스타가 되고 싶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아나운서의 정도(正道)'만 지켜선 스타가 될 수 없는 방송 환경이 유죄일까, 스타가 되어도 기대할게 없다는 매몰찬 현실이 문제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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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한건 분명합니다. 또렷또렷한 전달력보다는 프로그램의 맥을 꿰뚫는 재치가 훨씬 높은 가치로 평가받게 됐기 때문이고, 그런 식의 헝그리 정신을 갖춘 전문 방송인들에 비해 아나운서들이 갖고 있는 자산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건 현재의 아나운서들이 진지하게 해야 할 고민입니다. 과연 '선진국에는 없는' 방송사의 공채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왜 한국에는 있는 것일까. 대외적으로는 스타지만 방송국 내부적으로는 '앵무새'라고 비하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나운서는 과연 언론인일까. 그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는 열쇠가 있다고 해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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