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약전(설경구)과 창대(변요한)는 실존인물. 물론 창대가 서자인지 상놈인지, 아비가 나주의 부유한 홍어상인인지는 알 수 없다(이런 캐릭터는 제작진의 창작).
3. 영화의 시작은 정조 승하 1년 뒤인 1801년. 교과서에 '삼정의 문란'이라고 표현됐던 지방 행정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했고, 뜻 있는 엘리트라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리 없는 시대였다.
4.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여기서 <목민심서>의 길과 <자산어보>의 길을 나눈다. 기존 성리학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간 개개인의 윤리적 각성이 시스템 붕괴를 막으려 하는 쪽과, 시스템 자체의 교체 없는 부분적 수리는 이미 한계 극복의 수단이 아니니 좀 더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쪽이다. 이 영화의 고민을 읽어냈다면, 그 다음엔 과연 조선이 외세의 개입으로 망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라야 정상이다.
5. 이준익 감독의 영화답게 함축적인 대사가 폐부를 찌른다. 영화 시작과 함께 나오는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에서 "질문이 바로 공부지! 외우는 공부만 하다가 나라가 이꼴이 됐는데!" 까지. (그런데 이것은 바로 <차이나는 클라스>의 모토가 아닌가!!)
6. 영상미는 수묵화를 보는 듯 경이롭고, 배우들의 연기는 착착 붙는다. 특히 '가거댁' 이정은의 캐스팅은 신의 한수. 결론은 꼭 보시라. 극장에서. 스크린의 마법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엄마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홈리스(homeless)래요.” “아니. 나는 하우스리스(houseless)야. 그건 다른 거야.”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세상에 의해 강요된 ‘집 없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 뜻일까.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도시 하나가 없어지다시피 하는 날벼락을 맞아 낡은 밴 한 대가 전 재산인 처지가 됐다. 그 밴에 몸을 싣고 돈벌이를 따라, 날씨를 따라, 때로는 친구를 따라 미국의 대평원을 이리 저리 달리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현대의 유목민이다.
유목이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몸이 가볍다.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쫓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에 몸을 누이고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한 일망무제 하늘 아래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기만 할 리가 없다. 쉴새없이 날씨와 굶주림, 폭력과 야만, 질병과 부상을 겁내야 하는 것이 유목 생활의 본질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나 예술은 유목민에겐 사치다. 비록 그 무대가 12세기의 유라시아 평원이 아니라 21세기 미국이라 해도 그렇다. 디지털 노매드라는 새로운 인류에 대한 보고도 있었지만, 펀은 그런 계열도 아니다. 전화기는 그저 통신수단일 뿐인 올드 스쿨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비록 아름답지만 필요 이상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펀은 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별다른 위협에 부딪히지도 않는다. 문명의 혜택으로 유목민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위생상태도 좋고, 무엇보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게 건강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펀의 모습은 참 많은 ‘만약에’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치과에 갈 일이 생기면. 만약 교통사고가 나면. 만약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하면. 영화에도 나오지만 펀에게 차 수리비를 빌릴 누군가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현재도 미국에는 이렇게 스스로 유목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 가운데서 ‘집 앞에 요트를 사 놓고 한번도 타 보지 못한 채 죽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자오의 메시지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지.
그럼 자오는 <노매드랜드> 관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랐을까. 이미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새로운 삶의 방법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어떤 삶에든 아름다움은 있다?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인생 후반에 대한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는 없었다.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젊은이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클로이 자오는 참 용감하고, 훌륭하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이런 아름다운 영화를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도 노파심이 앞서가니. 젠장.
P.S. 맥도먼드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건 이미 수달의 수영 솜씨에 감탄하는 거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모습은 <쓰리 빌보드>나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와 사뭇 비슷하면서도 인물의 감수성 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대단하다.
소설 <듄>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튼 꼭 극장에서 보시길.
1만몇년이라는 연도(서기인가?). 우주제국의 귀족들이 행성 하나씩을 자신의 영지로 갖추고 군림하는 시대. 명망있는 아트레이데스 공작 가문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환각제 '스파이스'의 산지 아라키스 행성을 관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가장 큰 강점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차분한 진지함'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이야기든, 스토리텔러가 이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빌뇌브의 영화들은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성실한 완벽주의에 끌려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눈을 팔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주를 무대로 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도 그런 성실성은 빛을 발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은 한스 짐머의 음악과 함께 가히 압도적이다(사실 스토리도 앞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유사해질 기미가 보인다. 모두가 탐내는 자원이 풍부한 사막의 나라. 그들을 장악하려는 악의 제국. 외부의 간섭을 싫어하는 용감무쌍한 토착민. 이들을 도와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파란 눈의 백인 전사...).
우주전함은 광선포를 쏘고 있는데 전사들은 검(광선검 아님)으로 승부를 겨루고 있는 기이한 상황도, 빌뇌브의 손을 거치면 그럴싸한 긴장을 유발한다. 어느 순간 설득당하고 마는 진지한 친구 같달까.
티모데 살라메의 여린 몸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남주를 연상시키는 듯 나름 성공적. 하지만 배우 중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레베카 퍼거슨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캐릭터의 약점이 퍼거슨 덕분에 보완되는 느낌이다. 퍼거슨의 캐스팅으로 인해 제시카-폴 간엔 모자간답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생긴 건 감독의 의도적인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개봉이 다소 늦었지만 그 시점에 이미 해외 개봉(미국 기준임)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제 관건은 빌뇌브가 몇 편까지 감독을 맡는냐 하는 문제.
이 영화가 '파트 1'이 된 것은 6권으로 된 시리즈 중 1권의 파트1이라는 뜻이다. 현재 빌뇌브는 1권을 2편으로 나눠 만들고, 2권을 3편으로 하는 트릴로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트릴로지가 성공하면 소설 3권 이후도 죽 시리즈로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과연 빌뇌브가 계속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마블 외에도 기다려 가며 볼만한 시리즈가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 그런데... 한 2023년에는 볼 수 있는건가.
P.S. 워낙 방대한 원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일각에선 세계관을 공부하고 가야 하네 말들이 많던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이라면 관람에 아무 무리 없을 듯.
P.S.2. 1984년작인 데이비드 린치의 <듄>(국내 비디오 출시명은 <사구>)은 왕년에 보기는 했으나 혀를 끌끌 차며 잠들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거대한 샌드웜 뿐. 문득 이 <사구>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서극의 <촉산>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기억도 난다.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은 멀리 하고 싶었던 기억도.
몇해에 한번씩 그해의 히트작을 겨냥해 '내 아이디어', 혹은 '(아무도 모르는)내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믿으란 말이냐'고 주장하는데, 드라마 신인작가 공모전 채점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혜성이 지구를 삼킬 거라는 영화가 거의 동시에 두편 나온 적이 있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998년.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었다.
<돈 룩 업>이 지금까지의 범 지구적 재난 영화들과 철저하게 다른 점은 인류의 단결에 대한 냉소다. 지금껏, 최소한 영화 속에서 세계 각국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계인의 침공, 혜성, 괴수, 질병, 기후위기에 일치 단결해 맞서 왔다. 이런 영화들 중 절대 다수가 할리우드 산이었던 만큼, 미국 대통령이 그 선두에 서서 엄청난 명 연설로 인류의 단합을 촉구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또 지난 50여년간 만약 그런 재난이 닥친다면, 웬만하면 미국 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을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2021년. 아담 맥케이(<돈 룩 업>의 감독이다. 혹시 모르실까봐)는 과연 지금도 그런가 묻는다. 1998년이든 2021년이든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건만 어째 '미국 대통령이 지구 대통령'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최악의 대통령이 코로나라는 최악의 시기에 집권하는 바람에?
물론 이 이유도 크지만, 설사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었다고 해도, 이미 '미래를 위한 인류의 단합' 자체가 그리 공감가지 않는 이슈가 되어 버린지 좀 된다. 코로나 이전에도 기후 이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각국 정부의 태도는 인류의 공동 대응이란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줘 왔다. 전문가들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수도 있는 대대적인 생태계 파괴와 생물다양성의 소멸이 금세기 안에 일어날 거라고 경고의 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지만, 어떤 국가도, 어떤 기업도 자신들의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데 과연 혜성이라면 다를까? 그것이 바로 <돈 룩 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계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고 싶지 읺지만, 과연 이 아이디어의 구현을 위해 메릴 스트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케이트 블랜칫, 티모시 살라메, 조나 힐 같은 엄청난 출연진이 필요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솔직히 좀 낭비다 ㅎ), 반대로 저 배우들이 모두 '정상적인 출연료'를 모두 챙겨 받았다면 이 작품이 7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완성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로 얼마를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운동에 기부한 누적 금액은 1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 작품 출연의 동기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초반은 지나친 코미디 설정으로, 중반은 그리 진행에 도움되지 않는 요소의 남용으로 잠시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마지막 20분은 걸작의 일부로 손색이 없다. 떠나려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엔딩이다. (그리고 쿠키도!)
P.S.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가 내가 뭘 놓쳤나 싶은 분들은 다시보기를 통해 지난주 <차이나는 클라스-인생수업> 최재천 교수님 편을 찾아 보시길 권장함.
극장과 영화는 아마도 코로나 사태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 중 하나. 개인적으로도 극장을 몇번이나 갔나 싶습니다. 이번에 꼽는 영화들도 거의 모두 방구석에서 본 것들이죠.
그런데 문제는 만인의 극장이 된 넷플릭스의 단편, 즉 ‘영화’ 분야가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장편 시리즈 부문이 상대적으로 훨씬 낫고, ‘영화’라고 할 수 있는 2시간 내외의 단편 작품들은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의 이름이 간판에 걸려 있어도 신뢰감이 뚝 떨어집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길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용 영화는 프로듀서건, 투자사건, 배급사건, 온갖 시누이들이 ‘적절한 길이’를 요구합니다. 아주 긴 영화의 경우 어떻게 해서든 그 길이를 줄이라는 요구를 해대죠. 아예 <인피니티 워>나 <신과함께> 처럼 1,2부로 나누어 개봉을 하든가.
하지만 상대적으로 OTT는 시간에 너무 관대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상영시간표가 없는 플랫폼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작가(즉 감독)의 요구를 프로듀서들이 최대한 받아준다는 느낌. 그러다 보니 러닝타임은 한없이 길어지고, 아무리 집에서 본다 해도 관객의 인내심 가장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단의 호평’을 한몸에 받았던 <로마>도 <아이리시맨>도, 최근 호평이 있었던 <미드나이트 스카이>도 ‘저렇게 길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네.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아무튼 액션 대작 블록버스터가 없는 2020년은 참 우울했습니다. <매버릭>을 꽤 기대했는데 볼 수 없었고, 2020년 기대했던 작품 중 유일하게 개봉한 <테넷>이나 미국 평단이 극찬했던 <멩크>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취향 밖. 그리고 OTT로 직행한 ‘액션 대작’들은 어찌나 이렇게 죄다 함량 미달인지. 여러 모로 우울했습니다.
그래도 몇몇 작품들은 여전히 참 좋았습니다. 늘 그렇지만 기준은 <내가 2020년에 본 영화>. 가능한 한 최근 작품들 위주로 고르지만, 어쨌든 제작 연도는 일단 무시합니다.
작가미상 Never Look AwayWerk Ohne Autor
플로리안 폰 도너스마르크. <타인의 삶>의 감독. 2019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하나의 예술가가 태어나기 위해 그 시대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는 예술은 그 시대와 어떻게 호흡하고, 어떻게 그 시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 좀 늦긴 했지만 2020년 본 영화 중에는 단연 최고. 특히 태어나서 본 미술 소재의 영화 중에는 최고.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와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된 소년. 지독한 장마 중에 봐서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신카이 마코토의 다른 영화에 비해 훨씬 선명한 메시지. 이것이 일본에서 새로운 세대(밀레니얼이라고 해야 할지, MZ라고 해야 할지)를 바라보는 시선인가. 아니면 MZ가 기성 질서에 대해 내는 목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듬.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던 ‘문제 해결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느낌.
<뉴스룸> 시리즈의 작가로 유명한 애런 소킨이 직접 연출까지 맡은 작품.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시카고에 모인 반전주의자들이 한 법정에서 나란히 선 상황을 그린 영화. 당시 반전 세력을 구성하던 대학생, 히피,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무장흑인세력인 블랙 팬서까지 다양한 이들이 말도 안 되는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이 때론 웃기고 때론 서글픔. 선명한 수작.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
다스 베이더 아니고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전기 영화. 그렇게만 보면 뻔할 것 같은데, 뻔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 자칫하면 ‘연애도 잘 하고, 자식 농사도 잘 짓고, 남편 봉양도 잘 한 데다 경력도 관리해낸’ 슈퍼우먼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비 고비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빠지지 않아 마음이 놓임. 아무래도 여성 감독 미미 레더의 역할인 듯도 하고 펠리시티 존스의 인생작.
브렉시트: 치열한 전쟁 Brexit
토비 헤인스라는 연출가를 주목하게 된 작품.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 공과를 가리는 드라마는 아마도 영국 미디어의 독보적 생산품인 듯. 특히 브렉시트라는 거대한 역사적 결과물을 만들어 낸 도미닉 커밍스라는 인물을 통해 세계적인 반 이성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를 보여줌. ‘현대’를 이해하고 싶은 분들이 보셔야 할 작품.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잘생김을 포기하고 열연.
아리 애스터의 <유전>도 인상적이었지만 <미드소마>는 그 결정판. 북유럽의 민속(?) 행사를 관찰하러 간 대학생들에게 악몽이 찾아오는 이야기. 애스터에게는 공포의 구현을 위해 으슥한 지하실도, 컴컴한 밤도, 갑작스런 조명의 변화도 필요없는 듯. 그냥 백주 대낮에 일어나는 일들도 얼마나 사람을 소름끼치게 할 수 있는지 보여는 작품. <작은 아씨들>을 보고 플로렌스 퓨에 대해 반감이 생긴 분들을 위한 치료제 역할도.
오피셜 시크릿 The Official Secret
이라크전 참전을 앞둔 미국과 영국 정부의 불법적인 움직임을 알게 된 감청요원 키이라 나이틀리. 과연 국익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놀랍도록 공감 가게 풀어냄. 소품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기반한 정서 묘사가 아주 뛰어남. 개빈 후드 감독을 잘 모르는 분들은 반드시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보실 것. 어찌 보면 연극적인 소품이지만 놀라운 감동과 현실을 요약하는 통찰이 담긴 명작.
그레이하운드 Greyhound
이런 식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가 하고 포기할 때쯤 나타난 대작 전쟁 영화. 2차대전 초반, 독일 U보트들의 기습으로부터 수송선단을 지켜야 하는 구축함 함장 톰 행크스의 열연이 실감나는 전투와 맞물림. 개인적으로 잠수함 영화 마니아를 자처하는 터라 애정이 좀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박진감 넘치는 고전적 전쟁영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특히 강추. <U-571>같은 엉터리를 연상하시면 곤란.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 Rose Island
한 몽상가 엔지니어가 이탈리아 영해 바로 바깥에 가로 세로 20m 크기의 인공섬을 만들면서 시작되는 영토분쟁(?). 놀랍게도 실화 기반. 시대가 바로 세계적인 격동기였던 1968년이라는 데서 뭔가 슬슬 반체제의 냄새가 난다. 좀 더 톡 쏘는 맛을 살릴 수도 있었을 영화지만 이탈리아 영화라 그런지 어딘가 <인생은 아름다워>의 새로운 버전 같은 느낌도 그럴 듯. 넷플릭스로 볼 수 있음.
조조 래빗 Jojo Rabbit
연말에 이 영화 얘기를 하자니 사뭇 뒷북이긴 하지만 어쨌든 훌륭한 작품. 스칼렛 요한슨은 아카데미시 여우조연상을 받았어야 미땅하다고 생각. 소년의 눈으로 본 2차대전중의 독일에서 현실과 환상의 교차를 매혹적으로 그려낸 작품. 이 영화 이후 타이카 와이티티라는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유머감각을 보유한 연출자로 기억될 듯.
기본적으로 2019년을 대표하는 영화를 뽑으라면 <기생충>,<조조 래빗>, <포드 v 페라리>, <결혼 이야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정도를 꼽게 됨. <1917>과 <아이리시맨>, <페인 앤 글로리>, <두 교황>, <나이브스 아웃>은 거기 비하면 아무래도 좀 처지는 느낌. <조커>와 <작은 아씨들>은 만들어지지 않는게 나았을 것 같은 작품들. 그 중에선 역시 <기생충>의 진정한 경쟁 상대는 <조조 래빗>뿐이었다는 생각. (물론 개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괜찮은 영화가 없다 없다 했는데 그래도 10편은 금세 채워집니다. 그런데… 과연 내년에는 어찌 될지. 이 리스트의 영화 대부분이 2019년에서 이월된 작품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과연 2020년에 이월될 영화가 있을까 싶은…
다 꼽고 나서 한국 영화를 한 편도 꼽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밥정
물론 본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편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겠으나 큰 영화 몇 개가 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결함들이 보여 탑10에 꼽기에는 다들 좀 아쉬운. 그 가운데서 <밥정>이 마음에 꽂힘. 방랑식객이 외딴 데 사는 할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밥을 해드리는 이야기. 그 배경에는 두 어머니에 얽힌 그의 사연이 있다. 박해령 감독. 아, 개인적으로는 <해치지 않아>도 괜찮았음.
그리고 2018~2020년 작품은 아니지만 어쨌든 번외로 추천.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시작으로 <데몰리션>, <와일드> 등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를 몰아보던 중 2011년 작이지만 공유하고 싶은 영화라 리스트에 슬쩍. 전생과 인연, 본능과 감각을 연결시킨 작품. 작중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DJ다 보니 음악도 인상적(물론 이 감독의 영화들은 대부분 OST가 인상적). 잠 못드는 겨울밤에 보시면 좋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
올해의 재개봉 러시 중 한편(본래 2004년작). 필자가 원천적으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광팬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는 단연 초강추작. 배 위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일생을 보내는 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야기.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토르나토레/모리코네 듀오는 피아니스트 이야기라는 소재를 만나 관객을 초토화시키는 화력을 과시. 그런데 이 영화는 대표적으로 관객의 평가가 높은 데 비해 평론가 평점은 낮은 작품(rotten tomato에서 9점대 vs 5점대). 이런 세상에서 평론가란 대체 무엇인가.
P.S. 그리고 이런걸 써 올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보신 것 중에서 좋았던 것들도 추천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올해 방콕하시면서 많이들 보셨죠? 많은 추천 기대합니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전통이겠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과감한 극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화 <브렉시트, 치열한 전쟁(원제는 그냥 'Brexit')>. 한국으로 치면 '역사적인 평가가 완성되지 않은 사안'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건드려도 될까. 명예훼손이나 사실 왜곡 시비로부터 제작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작품이다. 면전에서 사실상 욕설을 퍼붓고도 "Nothing personal"이라고 퉁칠 수 있는 문화랄까.
영화 <브렉시트..>의 주인공인 도미닉 커밍스(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실제로 브렉시트의 심장으로 불리는 인물. 당시 'EU 탈퇴'라는 이슈를 놓고 수많은 주장으로 뒤섞여 있던 탈퇴파의 오합지졸들을 하나로 규합, 아무도 예상 못한 승리를 거둬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이 '승리'에 대한 공헌 덕분에 보수당의 압승과 보리스 존슨 총리 취임에까지 결정적인 공헌을 했고 '존슨의 최순실'이라고까지 불렸지만 몇가지 실수와 함께 스캔들이 생기자 존슨은 커밍스를 손절했다. 지난달 커밍스의 사임 소식은 국내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아주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토사구팽'이란 타이틀이 달려 있었다.
[영화 이야기로 넘어와서] 커밍스의 대척점에는 크레이그 올리버(로이 키니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카메론 총리의 공보비서관. 존슨 내각에서 커밍스가 하던 것과 비슷한 역할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EU 잔류 운동의 홍보를 진두지휘한다. 그런데 이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1차적으로 커밍스는 정확한 캠페인의 정석을 따른다. 너저분한 주장과 다양한 탈퇴세력 메시지를 'vote leave'와 'Take back control', 단 두마디로 정리한다. 탁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커밍스가 집중 공략한 사람들이 누구로부터도 관심받지 못했던 소외계층과 저소득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 이들은 'Take control'을 했던 적이 없다. 그런 이들에게 'back'이라는 환상을 심어 준 것이 천재의 솜씨란 생각이 든다.
여기 맞서는 올리버의 진영에는 훨씬 유능한 인력들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밍스 진영이 집요하게 SNS 등으로 퍼뜨리는 가짜 뉴스(예: "EU의 국경 개방때문에 터키인 7천만이 영국으로 유입될 것이다")에 공식적인 채널로 방어하는 올리버 진영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공세를 취하면 '지킬게 많은' 사람들은 버틸 재간이 없는 법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올리버가 탈퇴 지지층을 분석하기 위한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지켜보다가,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직접 그룹 속에 뛰어들어 '왜 EU에 잔류해야 하는지' 설득하려 시도하는 부분. 올리버의 언어, 올리버의 논리는 이들과 전혀 섞이지 않는다. 올리버를 비롯한 영국 정치의 엘리트들이 밑바닥 민심과 얼마나 유리되어 있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토비 헤인스 감독의 역량을 느끼게 한다.
두번째는 커밍스와 올리버가 투표 직전, 맥주 한잔을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 올리버는 커밍스에게 '영국 정치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아사리판으로 만드니 좋으냐'고 공격한다. 하지만 커밍스 역시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며 '너와 네 동료들은 너무 오래 권력에 익숙해진 탓에 사람들이 왜 변화를 원하는지 모른다'고 일축한다. 자신은 새로운 룰에 따른 게임을 하고 있다는. 그에겐 룰이 바뀐 걸 모르고 반칙을 주장하는 적들이 우습게 보일 뿐이다. (이런 대화가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적 허구겠지만 탁월하다.)
물론 커밍스는 승리를 거뒀지만 그 승리가 과연 승리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선 답을 할 수 없었다. 과연 민중은 권력을 되찾았을까? 커밍스의 캠페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인 양극화는 조금이라도 해결됐을까? 지금 커밍스는 밖에서 보기에 그렇게 쉬워 보였던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가를 곱씹고 있는 건 아닐지.
딱딱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감각적인 영상과 툭툭 터지는 영국식 유머 때문에 보기 힘들지 않다. 브렉시트에 이어 트럼프의 승리와 좌절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반 이성' 흐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날씨의 아이>를 선택했다. 어쩌면 며칠 전 한강을 건너다 본, 침수된 한강시민공원과 텅빈 올림픽대로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수도. 한번 보시기를 권함. 개인적으로, 보고 난 느낌은 <파이트 클럽>때와 매우 비슷하다.^^)
섬에서 무작정 도쿄로 올라온 16세 소년 호다카는 우연히 비를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18세(!) '날씨 소녀' 히나를 알게 되어 그 능력을 활용할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날씨 소녀에게는 능력의 댓가로 겪게 되는 어떤 운명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감성보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끝없이 내리는 비는 누가 봐도 일본의 쇠퇴를 상징하는 느낌. 이미 1980년대 정점을 찍었던 일본은 아직 당시의 호황과 번영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권력을 쥔 국가다. 그런 시대를 모르는 다음 세대는 그 후유증만 고스란히 떠 안았다. 심지어 그 다음, 지금의 청소년들은 그런 갈등조차도 남의 얘기다. 잃어버린 몇년 어쩌고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세상이었는데 어쩌라고. 그런 세상을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고.
결국 히나는 자신의 '소명'을 다 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호다카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왜 그걸 우리가 감당해? 남들보다 뛰어나서? 할 수 있으니까? 천만에. 설령 나 하나 희생해서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해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럴 이유는 없지.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지? 남들이 나에게 대체 뭐길래?
이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결국 <날씨의 아이>는 우리 세대가 교육받을때 일제때 교육받은 선생님들이 늘 염불처럼 외웠던, 그리고 아직도 태극기 할배들이 '한국이 일본 발뒷꿈치도 못 따라가는 이유'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멸사봉공과 메이와쿠의 문화에 한마디로 빅엿을 날리는 얘기였던 거다.
물론 에바 팬들은 이미 그런 정서의 애니메이션을 몇십년전에 봤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음습한 오다쿠 문화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게 뒤에 숨어서 아무도 못 알아듣게 혼자 중얼중얼하는 느낌이 아니라, 어른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웃으며 얘기하는 느낌이랄까. <날씨의 아이>는 두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 도쿄가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보여준다. 웃음이 나온다. 그래. 까짓거 그러면 어때.
<너의 이름은>이나 <초속 5cm>의 서정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작품. 결국 이 작품은 그들에겐 그들의 세상을 만들 권리가 있다, 라고 허락하듯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꼰대스러운 짓이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아직까지도 세상과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눈을 꼭 감은 채, 30여년 전 책에서 읽은 '도덕적 당위'가 불변인 줄 알고 있는 한국의 21세기 사대부들이 제발 봐야 할 영화일수도 있다.
다 떠나서 작화와 연출은 압도적. 음악 역시 많은 부분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시키는데, 연주곡에 비해 보컬이 들어간 곡들은 매우 실망스럽다. ...뭐 이건 개취라 어쩔수가.
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 <타인의 삶>으로 알려진 이 독일 감독의 2018년 작품. <작가 미상>은 독일어 원제인 <Werk ohne Autor>, 즉 ‘작가 없는 작품’에서 직역한 것. 영어 제목인 <Never look away>는 소년 쿠르트에게 이모 엘리자베트가 해 준 말에서 따 왔다.
2.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따라가고 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두각을 보이던 시점에 서독으로 망명했다는 점, 동독에서 그렸던 대형 벽화는 그가 탈출한 뒤 즉시 지워졌다는 점 등이 영화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의 가족사 디테일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3. 나치 치하에서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의 원혼이 된 사람들은 유태인만이 아니었다. 히틀러와 조언자들은 집시, 정신병자, 심신장애인, 심지어 소아마비 환자들까지도 우월한 순수 게르만 민족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세하거나 수용소에 가둬버렸다.
4.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군사법정에서 나치 부역자들을 심판했다. 처음에는 군 지휘자와 정치가들을 처단했고, 나중에는 위에서 말한 인종청소에 가담한 의사, 판사, 경찰 등을 피고인석에 세웠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냉전이 시작됐고, 미군 점령하의 서독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맡아야 했으므로 독일의 재무장과 생산력 회복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자발적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전범 심판은 ‘더 이상 생채기를 내지 말자’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1948년까지 집중적으로 펼쳐진 전범 재판의 피고인들은 상당수가 실형, 특히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61년 이전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상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주제)
5. 주인공 쿠르트는 어려서는 나치에 의해, 성장기에는 소련을 추종하는 동독 정부에 의해 ‘예술이란 국가와 사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피를 뿌리며 싸운 상대방이지만 의외로 똑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never look away)’ 는 메시지에 힘이 실린다.
6. 189분. 만만찮은 시간인데 어느 주말 새벽 1시쯤 보기 시작해서 4시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흐름이 빠르거나 대단한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일단 쿠르트의 운명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그걸로 끝. 3시간 순삭이다.
7. <타인의 삶>에 만족하신 분이면 무조건 봐야 할 영화.
<여기서부터는 아마도 스포일러.>
8. 영화는 한 세대를 휩쓴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한 예술가가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성공이 예견되는 엔딩은 일면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결코 할리우드적인 해피엔딩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지나간 시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굳이 지나간 세월의 묻혀진 진실을 파헤쳐서 새삼 또 무슨 상처를 내겠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은, 예술은 무엇을 위한 도구도 아니며 무엇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선 속 시원한 단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치 않게 그 유산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다음 세대에게 그 무게를 전가시키지 말자는 이야기일까. 이모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엔딩은 왠지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말하는 듯 느껴진다.
물론 기준은 개취구요, 대상은 '올해 본 영화 중 2018, 2019년에 제작된 영화'로 하겠습니다. 대상은 약 70~80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입니다. 순위는 크게 의미 없고, 생각난 순서?
1. 던 월 Dawn Wall
올해 최고로 이 영화를 고르는 데 전혀 고민이 필요 없었습니다. 요약하면 많은 일들을 겪고 난 한 남자가 묵묵히,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암벽 오르기에 끝없이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뻔하고 지루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왠지 눈가가 촉촉해지고, 주인공 토미 콜드웰을 응원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미친 영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 [넷플릭스에 있습니다]
2. 포드 v 페라리
결국 한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믿음을 받은 남자는 그 보답으로 평생 한번도 해 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남자라면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는 질주본능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영상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단지 회사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번 쯤 느껴 보았을, '누가 일 다 해 놓으면 잽싸게 숟가락을 얹는 XX'에 대한 묘사가 너무 리얼해서 감동을 좀 해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죠.
지금까지 과소평가되어 온 느낌이 있는 제임스 맨골드가 드디어 인정받았다, 는 감동도?
3. 원스어폰어타임인 할리우드
아마도 구세대라서 반응할 수 있었던 영화. 스파게티 웨스턴, 그린 호넷, 스티브 맥퀸, 대탈주, 로즈마리의 아기, 샤론 테이트, 찰리 맨슨... 머리 속에 저절로 각주가 달리는 느낌. 마지막 뭔가 느슨한 듯한 엔딩도 어쩌면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더군요. 타란티노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4. 기생충
뭐 이 영화를 언급하지 않고 2019년을 넘길 수 있을 도리가. 봉준호의 최고작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 특히 비오는 날, 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가족의 발걸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모든 영화 교과서에 남을 신이라고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주제가상은 박소담이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5. 콜드워
제목이 저렇긴 하지만 정치가 중요한게 아니라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이야기. 파리에서 만난 남녀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을 때립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믿음을 잃었고, 남자는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선택을 하고.... 그 결과는. ㅜㅜ
결론적으로 사랑의 완성이 과연 해피엔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죠. 음악영화로서도 주목할 만 하고. 파벨 포리코브스키라는 감독의 이름을 새로 인식.
6. 어느 가족
네. 너무 늦게 봤습니다. 여전히 좋더군요. 그렇지만 이 영화도 고레에다의 최고작은 아니라는 생각. 개인적으론 역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정점을 찍은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 놀라운 연출.
7. 좀비랜드 더블탭
이쯤에서 이뭥미 하시는 분들 다수 출현 예상. 전작 <좀비랜드>를 아시는 분이라면 그리 놀라지 않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만... 처음부터 개인적 취향이라고 못박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무턱대고 찡그리지 마시고, 마음을 여세요. 1편과 2편의 다른 점이라면, '좀비도 진화한다'? 뭔가 짜증나고 지루할 때 권장합니다.
아, 아래 오프닝을 보시고, 이건 도저히 내 취향이 아니야, 하시는 분들은 안 보셔도 됩니다.^^
8. 블라인드멜로디
인도 영화고 영어 제목은 Shoot the pianist 인가 그럴텐데 한국에선 저런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프랑스 고전 '피아니스트를 쏴라'와 혼동할까봐 그랬을까요? 블라인드 멜로디야말로 뭔가 장님 피아니스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같은 어색함이 감돕니다만.
어느 장님 피아니스트가 살인사건에 말려들어 겪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코미디. 웃기고 기발합니다. 네. 저 이런 영화 좋아합니다. 지루하지 않아요.
9. 바이스
결국 정치란 무엇인가. <하우스 오브 카즈>는 픽션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순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뭐 그런 이야기 되겠습니다. 미국이라고 대통령이 다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 삶은 계속되고, 대통령은 누군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한번 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건 취임 전과 취임 후의 인생에 대해서도 충분히 계산한 다음에 저지를 수 있는 도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데....
이하 생략. 어쩌다 보니 크리스천 베일 영화가 두 편이네요. 우연임.
10. 결혼 이야기
누워 있는 사진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죄 누워있는 사진. 그래도 이 사진만큼 이 영화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은 없을 듯 합니다. 딱 저 구도죠. 너무 여자의 입장에서 판타지를 그려 놓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내 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주제는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의탁할 때 비극은 이미 시작된 거니까요. 이것도 넷플릭스 오리지날.
고민했던 영화라면 너무 길어서 빠진 '아이리시맨'. 그리고 '엑시트'?. '벌새'? '하이웨이맨'? '두 교황'? 음...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이 약진하고 있네요. 이 정도가 11~15위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개취.
생각해 보면 '인피니티 워' 두번째 편도 넣을 만 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캡틴 마블'? 글쎄... 아쉬가르 파라디의 '누구나 아는 비밀'이 좀 아쉽군요. 그동안 파라디가 만들어 왔던 걸작들에 비하면 좀 떨어지는 느낌. '더 페이보릿'? 아뇨, 그런 취향 아닙니다. 란티모스 영화는 이제 앞으로 안 보기로 결심.
아, 그러고보니 '그린북'은 확실히 탑10에 넣어도 될 것 같은데 이미 10개 올렸으니 그냥 그걸로 된 걸로 하죠. 이게 무슨 상도 아니고. 아무튼 전반적으로 작년에 본 영화들에 비해 올해 영화들은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쓰리 빌보드'나 '팬텀 스레드' 처럼 머리가 띵 하는 걸작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죠.
P.S. 혹시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가 미상 (Never Look Away)' 이라는 영화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아시는 분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매우 궁금합니다.
페이스북에나 몇줄 쓰려다 너무 길어져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리로 가져왔습니다. 중간에 반말 존댓말 왔다갔다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올립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듬을 수도.
사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퀸 노래를 많이 들려주면서, 그 사이 사이에 스토리를 배치하느냐를 고민한 영상물, 즉 초장편 뮤직비디오에 해당하는 영화이므로 영화 자체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할 얘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내용이 사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을 분들이 아무래도 80% 이상이라는 점에서, 왜 줄거리가 이렇게 짜여졌는지가 좀 의아해집니다.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영화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앨범 출시가 퀸의 분열 내지는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했다는, 별로 믿어지지 않는 스토리가 왜 영화의 축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죠.
아마도 제작진의 설득에 메이와 테일러가 '수긍'을 한 쪽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일수도 있으니 그만 보실 분은 여기서 그만 두시길.>
0. 잠시 영화 진행 리마인드. 매니저 중 하나가 "CBS에서 400만 달러에 솔로 앨범을 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며 프레디 머큐리의 귀에 속닥질을 하고, 여기 솔깃한 머큐리가 솔로 앨범을 내겠다고 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멤버들은 "너는 퀸을 죽였어!" "어떻게 상의도 없이!" 하고 흥분하고 등을 돌리고, 상심한 머큐리는 더욱 매니저의 말만 들으면서 앨범 작업만 하고, 심지어 매니저는 라이브 에이드에 나가라는 말 조차도 차단해서 알려주지 않고, 결국 전 애인인 메리가 나타나서 모든 걸 알려주기 전까지 머큐리와 다른 멤버들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하고.... 그래서 반성한 머큐리가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다시 라이브 에이드 무대에 서고... 이런 스토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 퀸 멤버 중 솔로 앨범을 낸 건 머큐리 혼자만이 아니고, 심지어 머큐리가 첫 솔로 앨범 'Mr. Bad Guy' 를 내기 전 로저 테일러는 이미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밴드 전체의 음악성과 별개의 '자기 음악 세계 실현'은 퀸 뿐만 아니라 많은 밴드에서 이뤄진 관행. 그러니 머큐리가 솔로 앨범을 낸다고 해서 다른 멤버들이 "어떻게 니가 그럴수가!"라고 분개하는 건 좀 이상한 일. 신해철이나 김종서처럼 밴드를 버리고 아예 솔로 가수로 새 길을 걸은 것도 아니고.
2. 라이브 에이드가 85.7.15의 일이니 영화상으로 표현된 심각한 갈등과 머큐리의 고립은 85년 상반기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85년 상반기 퀸은 84년 앨범 Works의 홍보를 위한 전 세계 순회공연 Works Tour를 진행중이었더군요. 84년 8월 시작된 이 공연은 85.5.15 일본 오사카에서 끝났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래야 고작 2개월. 즉 실제로는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비행기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해서 다시 공연하고 먹고 자고 파티하고 하고 있을 시절인데 영화 속에서는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어딘가 따로 떨어져서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와 현실의 시간표는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
3. MR. BAD GUY 앨범은 83년부터 녹음을 시작해 85.4.29 발매.
그러니까 머큐리가 이 시점에 솔로 음반 발매를 털어놓고, 갈등을 빚고, 멤버들과 소원해지고, 라이브 에이드라는 것이 열리는 지도 모르고, 화해하고, 다시 라이브 에이드에서 멋진 공연을 펼친다는 건 몽창 지어낸 이야기. 갈등이 있었다면 The Works 앨범을 녹음하기 이전의 일일테니 83년 쯤인데, 이미 그 갈등을 극복하고 Works 앨범을 내고, 같이 전 세계 투어도 다니고 한 다음에 올 85년의 라이브 에이드에다 이 갈등을 갖다 붙였으니 이건 실제 역사와는 영 딴판.
4. 라이브 에이드를 앞둔 화해(?)의 조건이 '앞으로 모든 노래를 니 노래 내 노래 하지 말고 모두 퀸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수익분배도 1/4로 하자'는 것이었다고 나오는데, 그래서 그 화해(?)의 산물로 나온 86년 앨범 'A KInd of Magic'에서 첫곡 One Vision은 작곡자가 'Queen'이지만, 타이틀 트랙인 A Kind of Magic은 '로저 테일러 작곡'이라고 되어 있음.
한마디로 이 역시 실제와는 영 딴판인 얘기.
5.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가 위대한 점 중 하나는 10만명씩을 수용할 수 있는 웸블리 구장 같은 초대형 공연장에서, 어디서 들어도 훌륭한 음향 배치를 독자적인 기술로 실현할 수 있었다는 점(어딘가 인터뷰를 보면 브라이언 메이가 이걸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게 나온다). 그런 퀸이 '라이브 에이드에 나와' 라는 요청을 받으면 '거기는 음향 시스템을 어떻게 해놨대? 드럼 세트도 하나 갖고 다 돌려가며 써야 한다는데?' 라는 점에서라도 참여를 주저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무튼 그래서 라이브 에이드는 끝까지 참가를 망설인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
6. 아무튼 현실과 영화의 괴리는 이런데,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사전에 몰랐을 리 없는 퀸 멤버들이 왜 이런 요상한 갈등설(?)을 영화에 넣는데 반대하지 않았을까가 매우 의문입니다. "...미안해, 그때는 말 못했지만 사실 네가 솔로 앨범 내는게 우리는 너무 싫었어. 우리도 내지 않았냐고? 너는 너고 우리는 우리잖아." 뭐 이런 게 진실이었을지?
아울러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의 입장: "그래, 영화 속에서 우리는 파티도 싫어하고 난잡하게 여자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싫어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게 최고였어. 응. 그냥 그렇게 믿어 줘. 우리는 살아 있고, 마누라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있잖아. 이제 늙어서 갈 데도 없어. 받아 줄 데도 없고. 그러니까 나쁜 건 다 네가 가지고 가. 프레디. 사랑해." 뭐 이런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든 몇가지 생각.
<아셔도 그만, 모르셔도 그만.>
1. 머큐리가 내놓은 문제의 솔로 앨범 Mr. Bad Guy 수록곡 중 영화에 나오는 곡은 단 한 곡, 바로 타이틀 트랙인 Mr. Bad Guy 입니다.
머큐리가 폐인(?)이 되어 가며 '다들 좋다는 얘기만 하는' 녹음실에서 솔로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 뿜빰뿜빰뿜빰하는 전주가 잠시 흘러 나옵니다. (아주 오래 전, 서울음반의 상징인 녹색 껍질이 씌워진 카세트 테이프로 열심히 듣고 다녔죠. 곡들의 면면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친구들은 모두 이 음반을 싫어했습니다. 하긴, 이 친구들은 퀸의 Works 앨범도 인정하지 않았죠.^^)
2. 사실 이 앨범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곡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냥 '퀸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I was born to love you. 이 곡은 나중에 퀸의 다른 멤버들이 반주를 다시 녹음해 머큐리 사후 발매 앨범인 Made in Heaven에 슬쩍(그것도 처음엔 일본 발매분에만! )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 보시면 반주가 두가지. 머큐리 솔로 앨범 버전은 전자악기 중심의 약간 저렴한 듯한 반주고 퀸 리메이크 버전은 처음에 천둥소리가 나면서 메이의 기타 사운드가 울려퍼집니다. 아무튼 뭔가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는지, 웬만한 히트곡은 다 들어 있는 퀸의 그레이티스트 히츠 1, 2, 3 앨범에도 이 곡은 들어 있지 않지요.
(그러니 앞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곡'이라고 족보를 제대로 찾아 주기 바람.)
3. Mr. Bad Guy 전주가 잠시 나오는 것 외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밴드의 곡은 아마도 Dire Straits의 Sultans of Swing 이 유일한 듯. 라이브 에이드 무대에 서기 전, 퀸이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이 곡의 일부가 잠시 들립니다. Dire Straits는 퀸의 바로 앞은 아니고 앞의 앞 순서죠.
(그런데 이런 것까지 정확하게 재현한 이 영화에서 왜 스토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상.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영화에서 스토리가 솔직히 뭐가 중요하겠어. 노래가 주인공이고, 노래가 열일 다 하는데.
지난 겨울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이었던 '신과 함께 - 죄와 벌'의 속편 '신과함께 2: 인과 연'이 개봉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신과 함께'의 흥행 열풍이 갖는 의미를 물어보곤 합니다. 물론 흔히 거론되는 의미만 해도 이미 여러가지입니다. 우선 한국영화 최초로 대작 2편을 동시에 제작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용감한^^ 기획입니다. '신과 함께'가 흥행 초대박을 기록하면서 1편만으로 두 편 모두의 순익분기점을 넘기는 쾌거가 이뤄졌지만, 만약 1편이 흥행에서 쓴 맛을 봤다면 2편은 아예... 상상하기도 싫은 대재앙이죠. 또 '판타지=마법사, 요정, 드라곤이 등장하는 서구풍 이야기' 라는 등식을 깨고, 한국 고유의 설정을 기반으로 최초의 본격 판타지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뭣보다 웹툰 원작의 폭발력을 입증한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 얼마전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두 가지 면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첫째. '수출용 상품으로 적절한 한국 영화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가장 충실한 답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근래 한국의 대형 흥행작들을 살펴 볼 때, 철저하게 한국 로컬 관객들을 노린 '한국형 블럭버스터'들이 주류를 이뤘다는 점이 특징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대표적입니다. '1987'이나 '택시운전사'가 대표적이고, 흥행 참사를 기록하긴 했지만 '군함도'도 개봉 직전까지 '실패할 수 없는 영화'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듯, 일단 소재면에서 철저하게 한국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해외 진출에서는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신과 함께'는 누가 봐도 훨씬 문화적 장벽을 넘기 쉬운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신과 함께' 1편의 모자간 정서 같은 것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전 인류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죠. 그 밖에도 '신과 함께'를 보는데 한국 현대사나 정치 구도에 대한 선이해, 혹은 큰 관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신과 함께' 프랜차이즈의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의외로 천대(?) 받아온 가족영화의 성공입니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에게 왜 가족영화, 즉 패밀리 무비를 만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어떤 제작자들은 약간 모욕을 받은 표정을 짓곤 합니다. "내가 그 따위 영화나 만들 사람으로 보이냐"는 속내인 것이죠. 이런 제작자들에게 있어 '가족영화'란 '유치한 저예산 영화'와 거의 동의어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제작자들은 아직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뜨거운 메시지를 담아 성인 관객들을 격동시키는' 작품들을 선호합니다. 사회성 강한 영화와 폭력물, 메시지가 강한 사극 등이 주로 한국 영화에서 흥행이 잘 되는 장르로 여겨지는 것도 한 몫을 하겠죠.
그런데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역대 할리우드 영화 흥행 순위를 보면 상위권에는 PG, 혹은 PG-13 등급의 가족 관람을 겨냥한 영화, 즉 패밀리 무비들이 압도적입니다. 왕좌의 게임, 쥬라기공원, 해리 포터, 스타워즈 시리즈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죠. 특히 여름/겨울 방학 시즌을 노리는 영화라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패밀리 무비의 수요는 압도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 1위인 '명량'이 동원한 1700만명의 관객 중에도 부모님과 함께 온 초등학생들의 수가 만만찮게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의 위업을 다룬 영화'의 교육적인 효과 때문에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을 무시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극장을 찾은 부모님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신과 함께' 이전에도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흥행 대작으로 '국제시장'을 들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 이 영화 역시 지금 이 글에서 의미하는 패밀리 무비를 겨냥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때 그 시절, 굳세게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 라는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반면 '신과 함께'는 개봉 직후부터 '자녀들과 함께 관람하기 좋은 한국영화 대작'임을 대대적으로 알린 작품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속편들을 통해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가족 영화 프랜차이즈 블럭버스터'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요약하면
1. 최근 한국 흥행작 가운데 드물게 해외 시장에서 수출용 상품으로 가치를 가진 영화다.
2. 어른들도 흔쾌히 함께 볼 수 있는 온 가족용 프랜차이즈라는 새 시장을 개척했다.
..도입부가 너무 길었군요. 2부는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48번째 귀인인 자홍(차태현. 2부엔 안 나옵니다)의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친 세 차사 강림(하정우) 해원맥(주지훈) 덕춘(김향기) 앞에 또 하나의 귀인 수홍(김동욱)이 등장합니다. 자홍의 동생 수홍이 49번째 귀인이므로, 수홍까지 환생시키면 세 차사 역시 천년의 의무에서 풀려나 환생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수홍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세 차사에게 염라대왕(이정재)은 두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당연히) 49일 안에 수홍의 재판을 모두 마칠 것. 그리고 지상에서 많은 차사들을 괴롭혀 온 성주신(마동석)을 제압하고 허춘삼(남일우) 노인을 저승으로 데려오라는 것.
하지만 성주신은 전투력이라면 절대 남부럽지 않았던 해원맥을 한방에 무릎꿀립니다. 게다가 성주신은 "너희 죽을 때 내가 저승사자였는데... 나 기억 안 나냐?"는 충격적인 말까지 던집니다. 과거를 잊은 해원맥과 덕춘은 큰 충격을 받죠. 아울러 수홍은 자신을 지옥 재판정으로 인도하는 강림에게 끈질기게 캐묻습니다. "대체 왜 내 재판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내 재판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 아냐?"
그렇게 해서 '신과 함께2'는 해원맥과 덕춘이 어떻게 저승사자가 됐는지, 그리고 성주신과 허춘삼 노인은 어떻게 되는지, 전편에 이어 등장하는 염라대왕과 강림은 대체 무슨 사연인지 세 갈래의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사실 수홍은 1편에서만큼 중요한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엔딩에서 그가 뭔가 더 큰 빅 픽처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알려지면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참 많아 조심스럽네요. 게다가 뒤집은 32의 등장은 정말이지... ^^]
1편이 자홍의 죽음, 망자가 저승에서 겪어야 할 재판의 과정,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 등을 보여주며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큰 주제에 도달하는 다소 단순한 흐름이라면, 2편에서는 지상과 저승의 이야기가 비틀리고 꼬이며 비슷한 비중으로 흘러갑니다. 특히 2편에서는 성주신-해원맥-덕춘 라인과 강림-수홍-염라 라인이 팽팽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논리적인 얼개도 1편보다는 2편이 더 탄탄합니다.
게다가 1편에 없었던 철학적인 질문이 2편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현세에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 죽음, 즉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도록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라면 이미 죽음을 맞은 이후인 저승에서 죄인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은 무엇일까요?
말을 바꿔 보면, 만약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뒤저승에서도 한 인격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면, 그래서 그 인격이 소멸되지 않고 존재를 이어간다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존재를 가장 괴롭게 할 형벌은 무엇일까요? 불구덩이? 얼음 벌판? 매일 날아와 심장을 파 먹는 독수리? '신과 함께 2'는 한 인간을 천년 동안 괴롭힐 수 있는 신선한 방안을 제시합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인간으로부터 레테 여신의 선물을 빼앗는다는 것인데요, 그게 어떤 것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1편에 비해 2편의 가장 큰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주지훈의 매력 발산입니다. 1편에서도 나름 멋졌던 해원맥은 2편에서 고려 최강의 무사, 여진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흰 삵' 으로 변신해 여심을 강타합니다. '뇌는 없고 행동력만 최강인' 현재의 해원맥에 비해, '흰 삵' 버전의 주지훈은 쓸쓸한 눈빛의 츤데레 검객, 즉 고전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에 예고편 2초 등장 만으로도 2편에 대한 흥미를 100포인트 이상 상승시켰던 마동석의 근육미(?)도 열일을 합니다. 마동석 표 코미디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마동석은 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열연을 펼칩니다. 마동석이 아니라면 누가 했어도 '이렇게 적절할 수' 없는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통해 '신과 함께 2'는 전편에 비해 손색 없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의 도가니에 관객을 집어던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편의 강렬한 결정타 - 많은 지식인들이 '신파'라고 짜증스러워했던 -가 2편에는 없고, 전반부 수홍의 발걸음이 좀 무겁다는 점에서 2편보다는 1편이 더 가슴에 와 닿지만(개취입니다), 이미 1편을 보신 분들은 2편에 올라타지 않을 재간이 없겠죠. 뭣보다 2편을 보시면 다시 3편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벌써 2편은 개봉일 역대 최다 관객 기록을 세웠군요.
1편도 그랬지만 '신과 함께' 시리즈의 관람이란 행위는 전통적인 영화 관람이라기보다는 롤러코스터 탑승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그 흐름에 저항하면 턱이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두통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저 새까만 곳에서 떨어지는 청룡열차에, 독수리요새에 몸을 맡기고 그 아찔함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원해집니다.
P.S. 그런데 이미 나오기로 했다는 3편은 언제쯤 개봉? 아무래도 내년 여름은 힘들겠죠? (염라는 알고 있나...)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이 영화, '쓰리 빌보드' 의 악영향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꽤 적지 않은 수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키보드를 던져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플롯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진정 신의 축복이기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정도로 '쓰리 빌보드'는 대략 근 5년간 본 영화들 가운데 최소한 대본에서만큼은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시작.
살인사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미국 남부의 어느 조용한 읍내. 한 여자가 그 시골에서도 외진 길 쪽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광고판 세 개를 사서 광고를 냅니다. 광고의 내용은,
RAPED WHILE DYING
내 딸이 강간당해 죽었어.
AND STILL NO ARRESTS?
그런데 아직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다고?
HOW COME, CHIEF WILLOUGHBY?
윌로비 서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가출한 10대 딸이 강간당해 죽고, 불에 타다 만 시신이 발견되고, 그 뒤로 7개월이 지났는데 아무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경찰의 무능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가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 부분까지 보고 나면 관객의 90%는 영화의 방향을 짐작합니다. 이것은 딸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백인 하층민 엄마의 외로운 싸움을 그린 사회성 영화로구나. 이 엄마는 결국 무능하고 나태한 시골 경찰을 질타하고, 어디선가 론 레인저 한 사람이 나타나고, 이 영웅(혹은 반영웅)은 대다수 사람들의 외면 속에 엄마를 도와 딸의 원혼을 달래 줄 수 있....
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정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우수한 관객입니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를 계속해서 본다면 당신의 그 모든 예측이 이렇게 벗어날 수 있다는 데 진정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바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샘솟는 아이디어로 바로 대본을 쓰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한국의 영화계/드라마 업계는 바로 당신 같은 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글 첫머리에서는 이 작품으로 인해 좌절할 작가 지망생들에 대해서만 썼지만, 반대로 한 두 작품 해 보고 아 난 안 되는구나 하신 분들에게도 이 영화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각본/감독을 겸한 마틴 맥도나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이런 수준의 작품을 써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작 중 제가 본 작품은 '킬러들의 도시(In Bruge)' 하나 뿐인데, 일부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본상으로 별로 뛰어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맥도나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 시나리오입니다. 최소한 세 번은 써 봐야 하실 이유가 또 생긴 셈입니다.
자꾸 다른 얘기로 빠지지만, 이 영화의 리뷰를 쓰면서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건 별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할 말은 딱 한마디. 지금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세요. 언제 상영관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다음주까지... 물론 국산이든 외산이든 흥행용 대작 영화가 없는 3월이긴 하지만, 한국의 극장 상황에선 낙관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작렬입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여기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은 세 사람. 간판에도 언급된 시골 읍내 경찰서장인 윌로비(우디 해럴슨), 문제의 엄마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그리고 윌로비의 부하인 꼴통 경찰관 딕슨(샘 록웰)입니다.
세 사람 중 아마도 전통적인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윌로비 서장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꽤 자주 등장하는 미국 소규모 지역사회의 영웅이죠. 굳이 고전 영화로 비교하자면 '앵무새 죽이기'의 아티커스 핀치 변호사(그레고리 펙이 연기하는)같은 인물입니다. 정의감이 투철한데다 두뇌가 명석하고, 딕슨 같은 개망나니도 따르게 하는 이상적인 인간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그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밀드레드 딸의 강간 살인 사건은 난제입니다. 수사를 하려 해도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시체에서 남자의 DNA가 검출되긴 했지만 비교할 용의자가 없는 실정입니다.
반면 밀드레드에겐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윌로비의 말에 왜 이 동네의 모든 남자, 나아가 전 미국의 모든 남자로부터 DNA를 추출하지 않느냐고 우겨댑니다. 자신이 중시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선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이를테면 국가 권력이 닥치는대로 민간인의 DNA를 추출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 같은)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익이 주어질 때 내놓아야 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편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밀드레드의 일방통행적인 생각은, 딸을 잃은 엄마라는 당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밀드레드가 공격하는 윌로비 서장이 평판 좋은 인물인데다 암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밀드레드는 자신이 암에 걸려 있다는 윌로비의 말에도 "그럼 시간이 없을테니 더 서둘러 수사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진정 비호감 캐릭터죠. 이런 밀드레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딕슨이 있습니다.
물론 딕슨에겐 밀드레드에 대한 구체적인 미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애당초 딕슨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일찍 죽은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그의 성장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인종주의를 비롯한 갖가지 편견도 다 어머니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그 결과 딕슨은 엄청난 효자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 외에 그가 믿고 따르는 것은 윌로비 서장 뿐이고, 그 윌로비 서장에게 맞서다 결국 윌로비 서장을 죽게 하는(이건 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죠) 밀드레드는 진정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윌로비 스스로 밝히고 있듯, 그의 죽음은 더 지속해 봐야 고통만 더할 뿐인 암 치료의 연장을 피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광고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밀드레드를 더욱 비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고, 그 때문에 밀드레드에게 광고판 임대료를 자신이 지불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당연히 그의 예견대로 밀드레드는 더욱 고립되지만 밀드레드는 서장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하지 못합니다. 죽을 사람을,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죄책감 때문이죠.
이 영화는 '인간의 용서와 화해', '다른 인간의 입장에 대한 역지사지', '더불어 살기의 미묘함' 처럼 너무나 기본적인, 심지어 너무 자주 다뤄져서 하품이 날 지경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껏 관객들이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으로 관객들을 몰아넣고 절묘한 공감의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울러 그 가운데서도 코미디, 특히 블랙코미디로서의 위치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강점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이야기'와 '유머 감각'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해 버리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과 송강호의 개그가 절대 따로 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리 빌보드'에서는 딕슨이 주로 이 역할을 맡습니다. "아니에요! 열두시까지 들어간다고 했다구요!" "왜? 소금은 원래 상처에 좋은 것 아닌가?" 같은 대사는 너무나 유쾌합니다. (개인적 취향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죠.^^)
이 세 사람을 둘러 싼 여러 마을 사람들은 각각 이 세 사람 중 한쪽 편에 서서 갈등과 웃음을 조율합니다. 특히 '왕좌의 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난장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연기하는 제임스는 몇 신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의 색깔을 대변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가 맡은 역할을 '낙관'이죠. 희망이라곤 없는 밀드레드에게 잠시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인물입니다. 역시 같은 역할을 하는 페넬로페(사마라 위빙) 역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빙 Weaving 이란 이름에서 '혹시?' 하셨다면: 네. 스미스 요원님의 조카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대단한 이야기를 봤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군가로부터 '대체 그 영화는 뭐에 대한 영환데?'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두 마디로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는 점일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다룬 다른 위대한 영화들, 예를 들어 '타인의 삶' 같은 영화를 설명한다면 '도청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다, 그 사람의 인생에 감화되어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 처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쓰리 빌보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딸이 죽은 사건을 추적하다가 인생에 눈뜨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던 사람들이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든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이야기'라고 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특별한 사건이랄 게 딱히 등장하지 않는데도, 놀랍도록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이 영화의 신비로운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라스트 시퀀스.
차 안에서 딕슨과 밀드레드는 발견된 악을 스스로 징벌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오히려 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그 둘은 이제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서로를 지지해 주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끝까지 인간성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습니다. 이 낙관이 너무 나이브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을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이런 마무리를 충분히 싫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 물론 저 이 영화 굉장히 좋아합니다.)
맥도먼드와 록웰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는 것은 시간낭비. 그 밖의 배우들도 눈부십니다. 이 화려한 연기가 맥도나 감독의 대본과 디렉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작품상, 최소한 각본상은 주어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물론 상은 운이죠. 어쩌면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은게 불운의 시작...
P.S. 물론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는 라스트 신 직전에 나오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화 = "이봐, 사실 그때 경찰서에 불 지른 건 나였어." "...그럼 당신 아니면 대체 누구겠어?" - 입니다. 아마도 오래 전,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키즈 리턴') 이후 가장 훈훈한 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17 연말은 '강철비'-'신과 함께' - '1987'이 잇달아 개봉하는 대목입니다. 겨울방학의 시작이고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시즌인데다 크리스마스와 1월1일이 모두 연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대작들이 1주일 간격으로 개봉하는 것은 좀 이례적인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학도 긴데 이렇게 꼭꼭 붙어 개봉을 해야 하는지 약간 의문입니다.
그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신과 함께'를 보았습니다.
일단 만족도는 최상. 오랜만에 훌륭한 순수 오락영화를 봤습니다.
흔히 오락성=상업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작품이 상업적이냐 아니냐의 기준에는 오락성 외에도 여러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굳이 '순수 오락 영화'라고 한 것은 정치적인 상황, 개봉 당시의 사회적 이슈 같은 외적 요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 안에 내재하는 고유의 오락성이라는 요소에 주목할 때 매우 탄탄하고 충실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좀 지나칠 정도로 내수 전용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과 함께'는 꽤 특이한 영화입니다. '광해', '변호인', '국제시장' '명량' 등 역대 천만 영화들, 그리고 기획 순간 바로 천만을 바라봤던 '군함도', 'VIP'같은 2017년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의 질곡이나 독특한 정치 상황에 주목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제가 얘기하는 '내수 전용'이라는 말의 의미는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과 함께'는 이런 영화들에 비해 매우 보편성을 띤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12금이라는 점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과는 좀 다르죠.
아무튼 들어가는 말이 길었습니다. 그럼 줄거리.
(이 정도면 '출발 비디오 여행' 수준에 비쳐 볼 때 거의 스포일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스포일러가 있다고 느끼신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소방관 자홍(차태현)은 위험한 화재현장에서 소녀를 구해 함께 추락합니다. 일순 소녀를 구해냈다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차사 해원맥(주지훈)과 덕춘(김향기)을 보고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홍(의 혼)은 저승으로 날아가고, 자홍은 거기서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하정우)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망자들은 49일 동안 일곱 차례의 재판을 통해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평가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환생할 것인지 지옥에서 세월을 보낼 것인지 결정된다는 설명을 듣습니다.
(네. 천당행...은 여기선 선택지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의인으로서의 죽음 덕분에 자홍은 귀인(貴人)으로 대접받지만 그래도 모든 인간은 살면서 생각지도 못한 죄를 짓고 사는 법이죠. 통과하는 재판마다 자홍은 조금씩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차사들은 차사들대로, 천년 동안 49인의 망자를 각각 49일 안에 환생시키면 그들도 환생을 맞을 수 있다는 저승의 법에 따라 안간힘을 씁니다. 강림-해원맥-덕춘 조는 자홍에 앞서 47인의 의인을 환생시킨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홍이 통과하면 딱 한명 남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홍과 세 차사의 앞에는 지옥귀들이 나타나 재판길을 방해하고, 이것이 이승에서 망자의 직계 가족이 원귀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림은 이승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해 원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죠. 제대를 앞둔 육군 병장이었던 수홍의 원귀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관심병사 동연(도경수)의 주변을 맴돌고... 그 과정에서 자홍이 이미 15년 전 집을 나가 단 한번도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대체 효성과 우애가 유난히 깊은 의인 김자홍이 어머니와 동생을 15년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영화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는 미스테리이고, 강력한 반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꼭 휴지나 손수건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눈화장이 녹아 민망해질 수 있습니다.
앞부분, 자홍이 죽은 이유와 일곱 대왕이 지배하는 일곱 지옥의 설정, 자홍과 세 차사들의 캐릭터가 설명되는 부분은 흠 없이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사실 '신과함께'의 초기 홍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각된 부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CG 효과로 저승의 거대한 비주얼이 표현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CG는 명불허전, 대단합니다. 자홍과 세 차사가 가는 저승길의 비주얼은 한국 영화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죠. '신과 함께' 제작진은 자칫 이런 작품의 제작진이 빠질 수 있는, '자, 이게 우리가 제공한 스펙터클이야. 어때, 멋지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화려한 저승의 그래픽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메인 요리로 인물들의 디테일과 사랑받을만한 사연이 허술하지 않게 들어 찼다는 점이 '신과 함께'의 첫번째 강점입니다. 당연히 사건을 풀어 가는 메인 주인공은 하정우의 강림 역(원작의 강림도령과 변호사 진기한을 합친 캐릭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순무식과격한 무적의 전사 해원맥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원맥은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도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강력한 전사입니다. 단 머리 쓰지 않는 일일 때만. ^^
그래서 해원맥은 사뭇 진지한 강림과 영화 내내 걱정이 태산인 자홍 때문에 자칫 무거워질수도 있는 영화에 웃음과 힘을 제공합니다. 아, 한국인이 좋아하는 배우 차태현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정우-차태현-주지훈-김향기 라인은 이들 외에 어떤 배우를 끼워넣어도 이 이상의 효과를 내기 힘들 정도로 탄탄합니다. 여기에 딱 세 장면 등장하지만 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로 존재감이 뚜렷한 이정재가 있고, 영화 시작 30분 이내에 장광 김해숙 오달수 임원희 유준상(응? 어디?) 가 쏟아져 나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물반 고기받으로 쏟아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블록버스터의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흠을 잡자면 초반엔 자홍의 재판이 너무 안이하게 쉽게 풀려나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지옥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화 '신과 함께'는 장르가 바뀝니다. 수홍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뜻밖의 이야기들이 관객을 서서히 클라이막스로 이끌어 갑니다.
마지막, 올해 한국 영화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한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듭니다.
이 '한방'에 대해 꽤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너무 신파다'라는 일부 평자들의 주장입니다만, 부모 자식간의 정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는 것은 어떤 영화든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입니다. 이 영화에는 가족사에 관련된 강력한 최루성 코드가 있고, 저는 그 부분이 '신과 함께'라는 영화의 훌륭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 영화의 후반 30분은 관객 모두가 '우리도 알고 보면 모두 죄인임'을 인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신과 함께'가 완전무결한 영화는 아닙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자홍의 초반 감정은 관객들이 따라가기에 다소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고(이 역할을 연기한 것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우' 차태현이 아니었다면 좀 심각한 위협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전자 제품에 대한 집착은 좀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가 자아내는 거대한 공감의 크기는 그런 사소한 흠결들은 충분히 덮고 갈 수 있는 힘들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영화 본편이 끝났다 싶으면, 역대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쿠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심 빵 터집니다.)
무시무시한 싱크로...^^
P.S. 도경수가 연기한 캐릭터 이름 '원동연'은 이 영화의 제작사인 리얼라이즈 픽처스 원동연 대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촬영장 분위기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동연아 임마! 야 이 자식아!"....
아무튼 도경수의 연기력은 아이돌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 한 사람의 배우로서 훌륭합니다.
P.S.2. 그래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 때문에 가장 크게 득 볼 배우는 주지훈과 김동욱이라고 생각.
P.S.3. 이 영화가 갖는 감동의 핵심은 관객의 죄책감을 공략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정한 장면이 평소 관객들이 갖고 있던 죄책감의 단초를 확 폭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매우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주위에 잘 하셨던 분들은 그런 느낌이 덜 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왈칵 밀려드는 감정을 느낄 거라는 생각. ^^ 여러분은 어떤지 한번 시험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정윤철 감독의 영화 '대립군'을 봤습니다. 130분 동안 화면 속의 인간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세자 광해(여진구) 또한 왕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고, 가토 기요마사의 명을 받아 세자 일행을 뒤쫓는 왜군 장수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면 가토의 질책으로 할복을 피할 길이 없으니 피차 물러설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아수라장 속에서 영화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다소 시대에 뒤진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같은 말이지만 만약 아무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어떤 덕목이, 어떤 기준과 시선이 그 아무개를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약 10개월 간의 진통 끝에 새 대통령이 나와 구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순서대로 하자면 일단 영화의 배경을 소개해야 합니다. 조선 선조 때, 1592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숫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산을 통해 조선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거듭합니다. 중간 피난지 영변에서 선조는 "나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가 직접 구원병을 청할 뜻을 밝힙니다(1592년 6월13일).
그리고는 대신들이 일제히 요동행에 반대하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 또한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6월14일 자신은 요동으로 떠날테니 세자는 평안도 땅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결사 항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른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눠 국난에 대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200년, 말하자면 안일했던 나라에 국권이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고, 선조로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지나치게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난을 극복할 만한 슬기로운 군주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죠.
이때 광해군의 나이 만 17세.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다 큰 장정의 나이지만 그래봐야 스무살도 안 되는 앳된 청년일 뿐입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엔 어림도 없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보다는 뭘 봐도 낫다는 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들 사이에 부자간의 살가운 정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광해는 임진왜란 중의 활약으로 백성들과 대신들의 신망을 샀고, 그 이후 선조는 오히려 광해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대립군'은 이런 역사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과연 무엇이 궁중의 금지옥엽이었던 17세의 광해군을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선 강인한 왕자로 바꿔 놓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대체 이 왕자는 전쟁중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미리 경험해보지도 못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을까요.
영화의 시작. 임진왜란 발발 직전 토우(이정재)를 비롯한 대립군들은 여진족과 맞서고 있는 북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만, 후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 병역을 살고 있는 대립군들이라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수를 받고 약조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병역을 살게 된다는 현실만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런 토우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남쪽에서 왜란이 발발했으니 국왕을 호종하러 평양까지 남하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다가 피란차 북상하는 왕의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조정이 둘로 나뉘었으니 세자 광해(여진구)를 호위하고 강계까지 이동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한달만 있으면 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립군들이지만 세자 호위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전쟁중의 특별 무과 시험을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바람으로 여럿은 선뜻 세자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철도 없고 숫기도 없는 소년 세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왜군의 추격, 왜군보다 더 무섭게 압박해오는 정체 모를 자객들, 턱없이 부족한 식량이며 무장, 추격을 피햐려 들어선 가파른 산길 등 이들 앞의 난관은 첩첩 산중. 그러는 가운데 토우는 자신이 호위하고 있는 왕세자의 민낯을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생깁니다.
과연 그를 살려 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가 왕이 되면 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도 대립군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토우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나와 우리 무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영화 '대립군'은 다들 아다시피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영화입니다. 본래 역사에 쓰여 있는대로 선조는 암군이요, 광해는 현명한 군주라고 딸딸 외우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소년이 민초들과의 만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민초의 눈높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희생과 헌신이라는 영웅적 행위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이 영화의 카피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그날,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두 배우, 여진구와 이정재는 아낌없는 호연으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여진구의 연기도 대단히 칭찬받을만 했지만, 특히 이정재는 2017년 이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이 영화, '대립군'을 통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정재라는 배우는 긴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네. 20년 가량의 시간 차이를 둔 모습이지만 거의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만치 이정재는 어찌 보면 불멸의 젊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지금껏 자리매김해 왔죠.
아무튼 그의 젊은 모습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동년배인 정우성과 함께 찬란한 빛을 뿜었습니다.
물론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젊음에 연륜이 깃든 뒤부터의 일인 듯.
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열연이 새삼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립군'이라는 작품,
문득 이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불멸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사무라이라는 특권 신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무훈을 칭찬받는 것은 불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소명을 깨닫고, 한 촌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캐릭터입니다)는 본래 백성의 아들이면서 전쟁통에 사무라이를 가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깨질 위기가 등장했을 때, 그는 백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의미를 사무라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성의 한 사람이기에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 수 있었던 남자.
이 영화, '대립군'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비로소 이정재를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만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란 본래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정재가 보여줄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대립군'은 매우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 한척]과 [배 한척에 목숨을 건 민초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오른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겠지만, 그 [배 한척]이 주는 느낌은 매우 산산하더군요. 백성이 탄 배의 중요성이 이미 몇몇 지도자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나라라서 말입니다.
P.S.2. 제작진으로부터 'NO CG, NO SET'라는 말을 듣고 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제작진과 배우들이 겪었을 고생의 강도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관객들도 아마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감동 두배 보장.
'암살'과 '베테랑'이 쌍끌이 천만 시대를 이어가고 있는 2015 여름, 다른 한국 영화들은 소리소문없이 꼬리를 마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지난해의 기대작이었던 '협녀'조차도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큰 호응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그리 큰 영화로 보이지 않았던 영화 한 편이 우뚝 일어섰습니다. 바로 '뷰티 인사이드'.
백감독의 유려한 영상과 조성욱 감독의 음악 역시 영화를 이끄는 강력한 힘입니다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한효주라는 배우의 힘에 대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앳되고 청순한 얼굴이 표상이었던 한효주는 이 작품을 통해 진정한 원톱 여배우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더군요.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일단 정리해 봅니다.
웬만한 분들은 아실 얘기지만 이 영화는 도시바의 '뷰티 인사이드'라는 온라인 광고 시리즈에서 시작됐습니다. 총 6편, 모두 합해 약 39분 분량인 이 광고영화는 2013년 칸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광고 필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기본 설정과 도입부는 거의 똑같습니다. 한국판에서는 뚱뚱한 남자(김대명)가 여자가 깨지 않도록 몰래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습니다. 맞지 않는 바지와 신발에 한숨을 쉬면서.
(아래는 한국 네티즌들이 한글 자막까지 입혀 놓은 원작 광고입니다. 영화와 비교해 보실 분들은 한번 보시는 것도. 존재 목적이 목적인 만큼 광고에서는 노트북이 큰 역할을 합니다. 영화에서 유난히 안경테가 강조되는 것과도 비교 가능.^^)
이 남자, 우진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어 있는 남자입니다. 물론 남자라고는 하지만 '태어날 때 원래 남자'였다는 것 뿐이지 매일 아침 일어나 보면 어떤 날은 남자, 어떤 날은 여자, 어떤 날은 노인, 어떤 날은 외국인으로 바뀌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떤 날은 이진욱처럼 잘생긴 남자가 되고, 어떤 날은 조달환처럼 코믹한 얼굴로 깨어납니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란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는 그. 당연히 잘 생긴 날은 밖에 나가 여자를 유혹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관계란 아예 기대하지 않는 삶이 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나타나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입니다.
모든 창작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야기는 훨씬 쉽게 풀립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메인 아이디어 하나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디어를 어떻게 30초 짜리 이야기(대부분의 광고), 5분 짜리 이야기(인터넷 광고), 15분 짜리 이야기(웹 드라마), 20분 짜리 이야기(단편 영화), 70분 짜리 이야기(TV 단막극 드라마), 2시간 짜리 이야기(극장용 영화), 16시간짜리 이야기(TV 미니시리즈) 로 바꾸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혹은 완전히 새로운 작업이 됩니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의 규모(어느 정도의 길이에 적합한 이야기인가)를 한정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확장이 불가능할 것 같던 아이디어가 새로운 아이디어와의 결합을 통해 생명 연장(?)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이 영화, '뷰티 인사이드'만 해도 기존의 39분짜리 광고 필름에서 2시간 짜리 극장용 영화가 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아이디어의 확장이 이뤄졌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절친 상백(이동휘)이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아울러 또 세상과 우진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진의 어머니(문숙),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 이수(한효주)가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이수의 주변 사람들, 예를 들어 실장님(신동미) 같은 캐릭터들이 추가됐습니다.
(이분이 바로 문숙씨.)
한 두 장면 지나가면 될 단편과는 달리 이야기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판타지는 설정이 중요해집니다. 많은 판타지들이 여기서 무너지는 건 '어차피 판타지인데 어때'라는 생각에서 정교한 설정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경우라면 우진이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는 것이 핵심 설정인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면 '그럼 대체 변하는 시점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필요해집니다. 즉 우진이 아침에 눈을 뜰 때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인지, 잠이 가장 깊이 든 시점에 바뀌는 것인지, 자는 동안 서서히 조금씩 변해 가다가 깨면 완성되는 것인지, 밤에만 바뀌는 것인지, 낮잠 때에도 바뀌는 것인지...
이런 설정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시간이건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얼굴이 바뀐다는 설정 덕분에 이진욱의 등장 장면은 풍성한 재미를 이끌어 낼 수가 있습니다. 반면 하루 한번, 심야 시간에 바뀌는 것이 설정이었다면 또 거기에 맞는 장면이 등장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잔재미도 가능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사실 뒤로 가면서 조금 밀도가 떨어지는 느낌을 줍니다. 원작인 광고가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비밀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데서 끝나는 반면, 극장용 영화는 그 뒤로 죽 이어져 '정말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다 보니 뭔가 불필요한 이야기가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이디어의 지속적인 확장을 위한 연구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환하게 빛나게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수, 한효주의 힘입니다. 한효주가 연기하는 이수를 보고 있으면, 만약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매일 변하는 얼굴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1000년을 살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10년 밖에 못 산다(뭐 이건 좀 뭔가 구미호같은 설정입니다. 물론 영화에는 이런 유치한 설정 같은 건 없습니다)고 하더라도, 이수에게 고백하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개연성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예쁜 얼굴은 기본. 뭐든 다 이해해 주고 뭐든 다 받아들여 줄 것 같은 이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라고 표현하는게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뷰티 인사이드'는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가 되기는 다소 힘에 부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먼 훗날 2015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름다운 영화'였다고 기억할 것은 분명한 영화입니다. 연일 격무에 지친, 메마른 감성의 아저씨에게도 달달한 꿈을 꾸게 할 만한.
P.S.1.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털어놓습니다만, 이 영화는 사실 '사랑이란 그 사람의 외면보다는 내면에 빠져 드는 것'이라는 뜻의 제목과는 달리 '뷰티 아웃사이드'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듯, 스토리는 우진이 배성우 김상호 김희원 조달환일 때 진행되지 않습니다. 진짜 러브 스토리는 박서준 이진욱 유연석일 때 이뤄집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한효주의 경우 역시 굳이 외모의 중요성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죠.
(물론 '우진은 우월한 외모일 때 수많은 미녀들을 유혹하지만, 그 중에서 미모 뿐만 아니라 내면의 매력을 갖춘 이수를 만났을 때 진정 일생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데에 '뷰티 인사이드'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죠.^^)
여기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인정할 건 인정해라'입니다. 수많은 사회심리학자들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서도 외모라는 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합니다. 물론 이 '외모'의 판단은 매우 주관적인 평가의 결과물이지만, 어쨌든 인간은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상대를 사랑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동물입니다. 그걸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죄악시하는 건 그리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결론이 보여주는 건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외면이지만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은 내면'이라는 정도의 실용적인 태도입니다. 평생을 관통하는 사랑이란 일순간의 매혹과는 크게 다른 것이며, 외모로 그런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교훈인 셈이죠.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의 삶에는 좋은 날과 나쁜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매일 좋은 날이 이어지는 행운의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날의 기억으로 운 나쁜 날의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좋은 날을 기대하며 삶을 이어갑니다. 좋은 하루는 끝없이 지속되고, 나쁜 하루는 조금이라도 짧게 끝났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 이 '좋은 날'과 '나쁜 날'을 사람의 외모에 대입한다면 '뷰티 인사이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우화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P.S.2.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사실 가장 반가운 배우는 박민수 군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