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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철 감독의 영화 '대립군'을 봤습니다. 130분 동안 화면 속의 인간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세자 광해(여진구) 또한 왕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고, 가토 기요마사의 명을 받아 세자 일행을 뒤쫓는 왜군 장수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면 가토의 질책으로 할복을 피할 길이 없으니 피차 물러설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아수라장 속에서 영화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다소 시대에 뒤진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같은 말이지만 만약 아무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어떤 덕목이, 어떤 기준과 시선이 그 아무개를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약 10개월 간의 진통 끝에 새 대통령이 나와 구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순서대로 하자면 일단 영화의 배경을 소개해야 합니다. 조선 선조 때, 1592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숫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산을 통해 조선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거듭합니다. 중간 피난지 영변에서 선조는 "나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가 직접 구원병을 청할 뜻을 밝힙니다(1592년 6월13일).

 

그리고는 대신들이 일제히 요동행에 반대하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 또한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6월14일 자신은 요동으로 떠날테니 세자는 평안도 땅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결사 항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른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눠 국난에 대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200년, 말하자면 안일했던 나라에 국권이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고, 선조로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지나치게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난을 극복할 만한 슬기로운 군주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죠.

 

 

 

 

이때 광해군의 나이 만 17세.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다 큰 장정의 나이지만 그래봐야 스무살도 안 되는 앳된 청년일 뿐입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엔 어림도 없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보다는 뭘 봐도 낫다는 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들 사이에 부자간의 살가운 정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광해는 임진왜란 중의 활약으로 백성들과 대신들의 신망을 샀고, 그 이후 선조는 오히려 광해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대립군'은 이런 역사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과연 무엇이 궁중의 금지옥엽이었던 17세의 광해군을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선 강인한 왕자로 바꿔 놓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대체 이 왕자는 전쟁중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미리 경험해보지도 못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을까요.

 

 

 

 

영화의 시작. 임진왜란 발발 직전 토우(이정재)를 비롯한 대립군들은 여진족과 맞서고 있는 북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만, 후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 병역을 살고 있는 대립군들이라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수를 받고 약조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병역을 살게 된다는 현실만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런 토우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남쪽에서 왜란이 발발했으니 국왕을 호종하러 평양까지 남하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다가 피란차 북상하는 왕의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조정이 둘로 나뉘었으니 세자 광해(여진구)를 호위하고 강계까지 이동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한달만 있으면 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립군들이지만 세자 호위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전쟁중의 특별 무과 시험을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바람으로 여럿은 선뜻 세자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철도 없고 숫기도 없는 소년 세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왜군의 추격, 왜군보다 더 무섭게 압박해오는 정체 모를 자객들, 턱없이 부족한 식량이며 무장, 추격을 피햐려 들어선 가파른 산길 등 이들 앞의 난관은 첩첩 산중. 그러는 가운데 토우는 자신이 호위하고 있는 왕세자의 민낯을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생깁니다.

 

과연 그를 살려 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가 왕이 되면 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도 대립군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토우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나와 우리 무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영화 '대립군'은 다들 아다시피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영화입니다. 본래 역사에 쓰여 있는대로 선조는 암군이요, 광해는 현명한 군주라고 딸딸 외우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소년이 민초들과의 만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민초의 눈높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희생과 헌신이라는 영웅적 행위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이 영화의 카피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그날,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두 배우, 여진구와 이정재는 아낌없는 호연으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여진구의 연기도 대단히 칭찬받을만 했지만, 특히 이정재는 2017년 이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이 영화, '대립군'을 통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정재라는 배우는 긴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네. 20년 가량의 시간 차이를 둔 모습이지만 거의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만치 이정재는 어찌 보면 불멸의 젊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지금껏 자리매김해 왔죠.

 

 

 

 

아무튼 그의 젊은 모습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동년배인 정우성과 함께 찬란한 빛을 뿜었습니다.

 

 

물론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젊음에 연륜이 깃든 뒤부터의 일인 듯.

 

 

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열연이 새삼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립군'이라는 작품,

 

 

문득 이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불멸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사무라이라는 특권 신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무훈을 칭찬받는 것은 불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소명을 깨닫고, 한 촌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캐릭터입니다)는 본래 백성의 아들이면서 전쟁통에 사무라이를 가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깨질 위기가 등장했을 때, 그는 백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의미를 사무라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성의 한 사람이기에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 수 있었던 남자.

 

이 영화, '대립군'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비로소 이정재를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만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란 본래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정재가 보여줄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대립군'은 매우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 한척]과 [배 한척에 목숨을 건 민초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오른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겠지만, 그 [배 한척]이 주는 느낌은 매우 산산하더군요. 백성이 탄 배의 중요성이 이미 몇몇 지도자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나라라서 말입니다.

 

P.S.2. 제작진으로부터 'NO CG, NO SET'라는 말을 듣고 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제작진과 배우들이 겪었을 고생의 강도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관객들도 아마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감동 두배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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