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비야역에서 아 저기인가보다 하고 빌딩 숲 속으로 쑥 들어왔는데 별세계였다.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예쁜 공간.
지도상으로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은 황거라고 불리는 천황의 거처와 도쿄역 사이에 있다. 말하자면 도쿄의 구 도심에서 심장부에 위치한 곳이다. 요즘은 옛날같지 않겠지만 미쓰비시라는 이름은 과거 제국을 꿈꾸던 시절부터 일본을 상징하는 브랜드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종합상사였고, 성룡은 모든 출연작에서 미쓰비시 자동차를 타고 나왔다.
그 미쓰비시 그룹의 1호관, 그러니까 첫번째 사옥이 있던 자리라는 얘기. 물론 그 1호관은 지금으로 봐선 아주 조그만 3층짜리 건물이지만, 미쓰비시 그룹의 후예들은 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주변을 으리으리한 수십층짜리 오피스 건물들로 둘러쌌다. 미술관을 나와서 알았지만, 도쿄 역까지 가는 동안 큰길 따라 '미쓰비시'라는 이름을 단 빌딩들이 죽 이어진다. 저 블록 하나가 전부 미쓰비시 타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 시계가 보이는 곳이 말하자면 미쓰비시 타운의 입구,
그 입구로 들어가 몇미터 이동하면 이런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게 바로 미쓰비시 1호관.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건물 한 켠에 내력이 적혀 있는데, 대강 1894년에 빅토리아 시대 양식을 살린 건물로 지어졌고, '한 블록의 런던'을 도쿄 시내에 재현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얘기. 처음부터 줄곧 보존된 것은 아니고, 한번 허물었다가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 안으로. 먼저 로트렉 전을 본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역과 찍을 수 없는 구역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 유명한 로트렉의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1870년대 파리에서 유명했던 카페/레스토랑/공연장을 겸한 공간의 이름인데, 거기서 펼쳐지는 공연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스터의 형태로 그려냈다. 가운데 앉아 검은 옷을 입고 공연을 보고 있는 것이 로트렉 그림에 늘 등장하는 캉캉 댄서 제인 아브릴(깃털 모자가 포인트), 무대에 있는 것이 가수 겸 댄서 이베트 길베르라고.
그리고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작품. 제목은 <독일의 바빌론>인데 빅토로 조즈(Victor Joze)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용 포스터다. 당시 베를린 사교계의 타락과 혼란스러운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너무 노골적인 내용이라 당시 독일 대사관에서 판매 금지를 요청할 정도의 작품이었다고. 그래도 로트렉이 "그러면 안되지!"하고 직접 포스터를 그리는 등 출판의 자유(?)를 위해 애썼다는 전설이 있다.
작품 사이로 이동하다 찍은 정원. 밤에 가보면 야경이 그리도 아름답다고 한다. 아무튼 마음에 쏙 드는 장소였다.
그리고 소피 칼의 작품은 전면 촬영 금지. 이 전시의 제목은 '부재 absense'인데, 칼이 자주 사용했던 주제인 듯 하다. 현장의 설명 등을 읽어보면, 프랑스의 한 미술관에서 유명 작품들이 도난을 당하고, 미술품 도난이라는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해당 미술관에서는 그림이 있던 자리에 텅 빈 액자만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칼은 거기서 영감을 얻었던지, 제목만 있고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시를 시도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을 가려 놓고 제목만 보여준 뒤, 가린 커튼을 열어 작품을 보게 하는 전시를 시도했다.
(....근데 이런 것들을 굳이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심지어 전시의 설명 문구도 찍지 못하게 해서 과연 무슨 소득이 있을지 모르겠다.)
촬영이 허락된 소피 칼을 몇몇 작품들. 소피 칼은 유난히 작품에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한데, 문제는 그 텍스트가 전부 프랑스어라는 것. ㅠㅠ 무슨 말인지.
단순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이 <시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관 모양의 시계. 너무나 직관적인.
이어서 <그의 시선>, <누구세요>, <눈 주위의 멍>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작은 갤러리에서는 坂本繁二郎とフランス 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1세대 유럽 유학파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사카모토 한지로(1882-1969)의 작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대략 누가 봐도 당대 인상파의 영향이 짙은 그림들을 비슷한 시기의 밀레나 모네의 그림 등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전시. 그 시기에 일본은 벌써...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시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보니 은행잎이 한껏. 12월인데.
미쓰비시 1호관의 명물은 갤러리와 레스토랑이라는데,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와 보니 엄청난 장사진.
이 공간에서 식사를 할까도 했으나 역시 너무 줄이 길어 포기. 당초 계획(앞글 참조) 대로 도쿄역 지하의 표적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보행 인구가 별로 없어서인지, 12월 중순인데 아직도 가을 같은 느낌. 은행나무 가로수가 드문드문 있는 길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5분쯤 걸어가자 도쿄역이 보이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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