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김주성 하석주 고정운 홍명보 등 왕년의 스타들이 보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한국축구사 요약 족보 2탄. 좀 길어도 그냥 한방에 끝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축구 100년사 (2)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하자 축구협회는 또다시 대표팀 이원화론을 들고나왔다. 이번에는 화랑과 충무.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이디어는 청룡-백호와 똑같았다. 아무튼 이 해 화랑팀의 일원으로 제6회 박스컵에 출전한 차범근은 첫 경기인 말레이시아전에서 1 대 4로 뒤지던 후반 38분부터 순식간에 3골을 넣으며 4 대 4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날 이후 ‘한국 축구=차범근’이라는 등식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남북 축구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록한 해였다. 청소년 대표팀은 1976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북한과 만나 0 대 1로 진 적이 있지만 성인 대표팀의 만남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북한을 두려워해 맞상대를 꺼렸던 한국은 1978년 메르데카컵과 박스컵의 우승으로 자신감을 갖고 북한과 격돌했다.
12월 20일 방콕 국립경기장. 결승에서 만난 양팀은 연장전까지 격돌했으나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골은 터지지 않았고 결과는 공동우승이었다. 경기 후 열린 시상식에서 “기진맥진했고, 비기기를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는 남한팀 주장 김호곤은 북한팀 주장 김종민에게 “우리, 손 잡읍시다”라고 제안하며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사진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두 선수가 어깨동무를 한 이 사진은 지금껏 남북화해의 상징처럼 기억되고 있다.
남북대결 당시 김호곤의 축구화.
차범근은 아시안게임 직후 서독 분데스리가 테스트를 받았고 이듬해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유럽 무대 진출의 막을 열었다. 1980년에는 허정무도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했고 이후 김진국 박상인 박종원 등이 앞다퉈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이 해 12월에는 국내에서도 국가대표 이영무를 주축으로 한 1호 프로구단 할렐루야가 창단, 프로화를 재촉했다.
1981년 5공화국의 스포츠 드라이브는 축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됐고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개막됐다. 한편으론 멕시코 세계 청소년대회 출전권을 따냈던 북한이 아시안게임에서 주심 폭행사건으로 2년간 각종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면서 한국은 대타로 멕시코행 티켓을 따내는 행운을 차지했다.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대회를 앞두고 개최지가 고지대라는 점을 감안, 선수들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는 등 가혹할 정도의 체력훈련으로 팀워크를 다졌다. 마침내 그 해 6월. 한국은 스코틀랜드에 첫 경기를 0 대 2로 내주며 한숨을 자아냈지만 홈팀 멕시코와 호주를 각각 2 대 1로 연파하며 예선을 통과, 8강에 진출했다.
김종부 신연호 이문영을 주축으로 한 한국이 6월 11일 우루과이를 연장전 끝에 2 대 1로 꺾고 4강에 오르자 전국은 축구 붐으로 불타올랐고 외신은 연일 한국의 선전에 찬사를 날렸다. ‘붉은 악마’라는 호칭은 바로 이때 등장했다. 비록 6월 15일 브라질에 1 대 2로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첫 ‘세계 4강 진출’에 쏟아지는 갈채는 끊일 줄을 몰랐다.
박종환 감독은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됐고 축구협회는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88팀’을 맡겨 육성하게 했다. 이 88팀을 모체로 해 ‘올림픽 대표팀’이 마련됐고 성인 대표팀인 ‘월드컵 대표팀’은 문정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올림픽 축구 출전 선수는 23세 이하여야 한다’는 연령제한 규정이 나온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의 일이었으므로 굳이 올림픽 대표팀의 나이가 어릴 필요는 없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은 1984년 LA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월드컵 대표팀 역시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예선 탈락하자 축구협회는 감독직을 사퇴한 문정식 감독 대신 김정남 감독을 내세워 대표팀을 일원화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 나선 한국은 승승장구 끝에 최종 예선에서 일본을 2 대 1, 1 대 0으로 연파하고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비원을 이뤄냈다.
1986년. 독일에서 뛰고 있던 차범근까지 가세한 한국 대표팀의 기세는 충천해 있었으나 국제대회에서 매번 한국을 괴롭혔던 대진의 불운은 여전했다. 첫 상대는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0 대 3으로 뒤졌던 한국은 후반 28분 박창선의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사상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어 한국은 불가리아전에서 후반 26분 김종부의 동점골로 1 대 1 무승부를 기록, 첫 승점을 올렸다. 세계적인 강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도 3 대 2까지 추격해 접전을 벌인 것은 그리 실망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1무2패, 예선 탈락이었지만 국민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월드컵 대표팀 멤버들은 홈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사실상 첫 월드컵 진출’이라는 점을 감안해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던 국민은 이회택 감독이 이끈 1990년 이탈리아 대회의 3전 전패, 김호 사단이 출전한 1994년 미국 대회의 2무1패,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해임된 1998년 프랑스 대회의 1무2패 등 거듭되는 월드컵 본선의 실패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아시아 예선 통과는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축구의 최대 과제는 ‘월드컵 16강 진출’이었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까지는 10년이 넘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정몽준 의원이 47대 축구협회장에 당선되면서 한국 축구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바로 2002년 월드컵 개최 추진 발표. 10월 카타르에서 열린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득실차로 제치고 출전권을 따내는 ‘도하의 기적’(일본에서는 ‘도하의 참변’)을 이룬 직후, 정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월드컵 유치전 참가를 선언했다. 이미 일본은 5년 전인 1988년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천명해 놓은 상태. 결국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96년 5월 31일, 공동개최에 사인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개최를 천명했던 일본에 비하면 공동개최는 뒤늦게 뛰어든 한국의 승리인 셈이었다.
이제 문제는 한국 팀의 성적. 허정무 사단이 1998년 아시안게임 부진(8강)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성론이 축구계를 강타했다. 2002년에도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총체적 위기감으로 각성한 축구협회는 2000년 11월 14일,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에 0 대 5의 치욕을 안긴 네덜란드 감독 거스 히딩크를 사령탑으로 초빙한다.
물론 히딩크도 처음부터 신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히딩크 사단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002년 초 유럽 원정에서 각각 프랑스와 체코에 0 대 5로 무너지는 등 신통찮은 모습을 보이며 극렬한 비난 여론에 부딪혔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 이전의 모든 경기는 연습경기”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6월 4일, 한국은 부산에서 강호 폴란드를 2 대 0으로 가볍게 누르며 월드컵 진출사에 마침내 첫승을 신고했다. 이때 이미 대다수 국민은 ‘목표 달성’의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국은 6월 10일 미국과 1 대 1로 비긴 뒤 6월 14일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누르고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붉은 물결로 뒤덮였지만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히딩크 감독은 6월 18일 이탈리아와 16강전을 앞두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I’m still hungry)”는 명언을 남기며 선수들의 분발을 독려했다. 결과는 연장전 끝에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린 한국의 2 대 1 승리. 6월 22일 한국은 스페인마저 승부차기로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세계 4강에 올랐다. 1966년 북한이 영국 월드컵에서 이뤄낸 8강 신화를 넘어선 것이다.
비록 4강전에서 독일에 0 대 1로 패했고 3·4위전에서도 터키에 2 대 3으로 져 종합성적은 4위에 그쳤지만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히딩크는 한국인의 영웅이 됐다. 대표팀 서포터인 ‘붉은 악마’와 100만 인파를 동원한 거리 응원의 장관도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다.
3년 뒤인 2005년,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 6회 연속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으나 국민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미 신화가 된 ‘불패의 명장’ 히딩크의 그림자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만 보였던 두 후임자, 코엘류와 본프레레를 낙마시켰다. 과연 2006년,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나서는 한국 축구는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끝)
그 뒤의 일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아드보카트는 1승을 거뒀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은 핌 베어벡을 사령탑으로 내세웠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서 모두 4강에 그치며 국민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허정무 사단은 2010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천적 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두 장의 티켓을 다퉈야하는 위기를 맞았죠. 과연 허감독의 '옛날축구'가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월드컵 본선 연속진출 회수를 6에서 마감해버릴까요?
1편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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