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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여자 레슬링이 있었다. TV에서 김일 천규덕의 레슬링을 중계방송하던 시절, 오프닝으로 여자 경기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선 여자 경기가 오프닝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희귀취향의 왕국 일본에선 여자 프로레슬링이 자립 가능한 규모의 영역으로 꽤 오랜 기간 인기를 누렸다는걸 이번에 알았다. 5부작 <극악여왕>은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들의 치열한 라이벌 시기를 그린 드라마다.
1980년대 일본 여성 프로레슬링에는 정도를 걷는 '크래쉬걸스'와 닥치는대로 반칙을 일삼는 악역 '극악동맹'이 있었는데 크래쉬 걸스의 리더격인 나가요 치구사는 숏헤어가 어울리는 미소년스러운 외모로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의 인기를 자랑했다.
이 나가요 치구사가 역경을 딛고 챔피언에도 오르고, 여자 레슬러들을 규합해 경기단체도 만들고 업계의 큰언니로 성공하는 이야기(실화다) 였다면 그걸로 한폭의 드라마가 나왔겠는데, 뜻밖에도 이 <극악여왕>은 제목 그대로 극악동맹의 리더, 90kg대에 가부끼 분장을 즐기던 덤프 마츠모토가 주인공이다.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그런데도(혹은 그래서) 드라마는 재미있다. 핵심 질문은 "덤프 마츠모토는 왜 악역 여왕이 될수밖에 없었나'. 이 사연을 꽤 그럴듯하게 풀어낸다. 덤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크러쉬 걸스의 나가요 치구사가 아닌, 흉악무도한 덤프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엔딩도 자못 감동적.
(물론 드라마상의 '사건'들은 거의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 위주로 진행되지만, 내용은 거의 허구라고. 예를들어 무대에서 덤프가 치구사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원인이나 동기는..)
이 드라마의 강점 중엔 나가요 치구사 역을 맡은 배우가 카라타 에리카라는 점을 빼놓을수 없다.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한다면, 맞다. 몇해전 LG폰 광고에 나와서 세상을 술렁이게 했던 바로 그 배우다. 레슬러 연기를 위해 10KG를 불렸다는데도 여전히 가냘프고, 여전히 예쁘다.
사실 <극악여왕>도 일본 드라마 특유의 느린 전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특히 유혈낭자한 레슬링 경기 장면이 너무 자주 나오고 너무 긴데, 보다 보면 약간은 면죄부를 줄만하단 생각이 든다. 수많은 여배우들이 수없이 잔부상을 겪어가며(안 봐도 느껴진다) 애써 촬영한 레슬링 장면(심지어 퀄리티도 높다)을 그냥 편집해버리기는 너무나 힘들었을 것 같다. 저런 장면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상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 근데 아무래도 취향을 꽤 탈 거같다.
[여자 프로레슬링은 일본에서는 지금도 꽤 인기를 얻고 있다고. 이 드라마를 보시면 어쩐지 '정년이'가 생각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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