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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개의 품평이 올라오고 있는 <흑백요리사>. 굳이 말을 보태기보다 개인 기록용으로 남김.
[주: 지난 9월28일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늦었지만 옮겨 봅니다. 당시의 느낌을 보관하기 위해. 사실 드라마가 아닌데 딱히 이런 종류의 글을 올려 놓을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기도 애매한 것 같아 이 페이지로.]
1. 요리를 주제로 한 서바이벌 게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심사위원의 날카롭고 정리된 평가가 처음도 아니고, 처음인 건 압도적인 규모. <피지컬100>과 <더 인플루언서>를 넘어 이제 예능은 실내체육관급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시대로.
2. 흑과 백. 1층과 2층. 이보다 시대정신에 맞는 구도는 없을 듯. 스튜디오 슬램은 정말 대단하다. 이미 <슈가맨> 시리즈와 <싱어게인>으로 얻은 언더독 스토리텔링과 일반인 판정의 노하우가 요리에 덧씌워졌다.
3. 1층에서 흑셰프들이 싸울 때 스튜디오는 콜로세움 같았다. 검투사들이 거친 운동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울때 객석의 로마 귀족들은 흰 토가를 나부끼며, 꿀과 포도를 맛보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여기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관객들은 화면 밖에 있었고, 이들은 우아하게 관전하던 귀족들의 흰 토가가 피와 먼지로 더럽혀지는 모습을 보며 열광한다.
4. 사실 공정한 심사란 환상이다. 특히 미각의 공정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자기 미각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권위(ex. 미슐랭)에 기대고, 남의 눈치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맛을 상찬하는 일은 너무 흔하다. 어쨌든 <흑백요리사>는 그 안에서 성공적인 권위와 승복을 만들어냈다. 일부 시청자들은 불만일수도 있겠으나, 저 100명의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백종원/안성재라는 이름을, 그 심사를 받아들이고 출연을 결심한 상태에서 이미 <흑백요리사>는 성공한 셈이다.
5. 누가 이익인가. 쉽게 생각하면 잃을게 많은 백셰프들이 손해일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예능에서 이들을 '한번 대결해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존경의 대상으로 예우해 줄 것인가. 그 업장들의 예약 리스트만 봐도 모두 위너.
6. 서울의 파인 다이닝 시장이 이 프로그램으로 살아날까 하는 건 너무 지나친 기대. 한국인에게 파인 다이닝은 아직 '정말 맛있는 걸 먹으러'가는 곳이 아니라 '특별한 자리'를 위해 가는 곳이다. 이게 바뀌려면 서울이 더 글로벌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비교의 기준이 도쿄, 홍콩, 싱가포르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파인 다이닝 신이 빈약해 보이는 것은 한국의 특급 호텔 라인업이 빈약해 보이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은 서울에 진정한 5성급 호텔이 몇이나 되는지, 왜 그런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물론,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도 아니고, 이게 잘못됐다는 말도 아니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것 뿐이다.)
7. 어찌됐건 예능은 예능. 아무리 재미있어도 <흑백요리사>가 보여주는 맛에 과몰입은 금물이다. 실제 가보니 실망했다면 그건 당신 책임. 리조또가 알덴테건 죽이건, 가장 소중한건 내 취향과 기준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은 최현석 셰프의 명언. "주방에서 셰프보다 높은게 딱 하나 있죠. 재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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