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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러쉬업 라이프의 세 주역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원작 웹소설 이후로 요즘 '인생 2회차' 서사가 넘쳐나지만 사실 이 장르에서 아 그거 걸작이었지 싶은 작품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1986)>, 해롤드 래미스의 <사랑의 블랙홀(1993)> 이후로는 <어바웃 타임(2013)> 정도? 일본 만화 <리라이프>?
그러니까 내가 과거로 가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빙의되어 다시 태어나는 경우는 흔한데 '내 인생'을 동시대에 다시 살 기회가 생기는 서사는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아마도 2023년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는 이 전통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듯 하다.
 
일본 어느 지방도시 공무원으로 아주아주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던 아사미. 어느날 교통사고로 급사해 저승의 흰 공간에 떨어지고, 생전의 자기와 너무나 하는 짓이 비슷한 저승 공무원("규정때문에 안됩니다")에게서 지금 환생하면 쌓은 덕의 포인트가 부족해 다음 삶은 과테말라의 개미햝기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단, 그게 싫으면 인생을 다시 살아서 만회할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살아야지. 인생 2회차 도전!
이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인생을 두번 살면 얼마나 삶이 달라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삶은 어느새 훅 지나가 버린다. 더구나 덕을 쌓지 않으면 미물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니. 대체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덕'이란건 정체가 뭐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포텐셜인가, 노력인가. 과연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란 존재하나. (단, 장르는 코미디)
...라는 식의 이야기는 인생이 2회차면 다 될것 같으냐는 진지한 접근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계란 후라이처럼 가장 돋보이게 덮인 것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일본적으로 변형된 <섹스 앤 더 시티>.
 
아니,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일까? 네 친구의 너무나도 끈끈하고 치열한 우정이 사뭇 감동적인데 심지어 거기엔 남자의 그림자가 없다.
 
남성 캐릭터 중 가장 비중이 큰 후쿠짱은 그야말로 커다란 곰 인형 수준. 사랑이며 연애며 하는 것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정말정말 사소한, 지나가는 얘깃거리일 뿐이다. 정정하면 <노 섹스 앤 더 시티>. "Trends come and go, but friendships never go out of style." 그런데 정작 작가는 75년생 남자(바카리즈무).
소꼽친구 여자들 이야기에서 연애라는 강력한 재료를 아예 들어내고도 10부작 드라마가 이토록 흥미로울수 있다니. 사뭇 놀라울 뿐이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사회교육방송적인 색채도 최대한 억누른(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연출도 새롭고, 말 실수 하나도 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초세심 대본도 빛을 발한다.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는 말할것도 없고.
물론 <펜트하우스>나 <아씨두리안>이 인생드라마였던 분들에겐 비추. 왓차/웨이브/티빙에서 시청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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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빙> 때문에 디즈니 아이디 살렸는데 어 어벤저스밖에 없네 인제 뭐보지 하는 분들을 위한 추천. <만달로리안>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를 보시고, 물론 <카지노>도 볼만한데 <드롭아웃>도 한번 보시라고.
우리에게 황우석이 있지만 바이오 벤처의 역사에는 그 정도는 우스울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즈. 피 한방울만으로 200가지 질병을 진단할수 있다는 신기술로 엄청난 투자를 모아 초거대 성공신화를 쓴 늘씬한 금발 미녀가, 실제론 모든게 구라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한때 수조원이었던 기업가치를 0원으로 만들고 실형을 살고 있다는 실화.
 
<드롭아웃>은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사기의 원칙이 살아 있다. 사기를 치려면 가능한 한 상상의 범주를 넘어 크게 쳐야 한다. 그래야 '설마 저게 사기겠어?'라는, 대중의 사각에 위치하게 된다.
극중 사기의 패턴은 너무 간단해서 놀라울 정도. 우리를 검증하겠다고? 미안.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검증은 불가하다. 특허는 현재 검토중이며, 곧 모든게 선명해진다. 얼마나 많은 유명인사들이 우리를 지지하는지 알고 있나? 그 사람들은 뭐 다 바보라서 그러고 있을 것 같은가.
 
우리 실험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꼭 투자하라는 얘기는 않겠다. 다른 투자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엘리자베스 홈즈는 실제로 금발, 외모, 언변이라는 자신의 자산을 최대로 이용한 인물인 듯(드라마 한 회차의 제목이 '백인 중년 남성'이다). 테라노스 사건 이후로 한 여성 벤처기업인은 "홈즈를 연상시킬수 있으니 금발을 다른 색으로 염색하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암튼 보고 있으면 선악의 자리바꿈이 현란하다. 홈즈의 피해자(투자자)들은 그야말로 탐욕의 화신들. 홈즈의 변호인은 너무나 '정의'를 자주 들먹인다. 한편 유일하게 진실을 파헤친 사람은 모두가 싫어하는 극 비호감 인물이란 점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해석에 따르면 홈즈는 소시오패스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역을 맡은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를 보는 것이 큰 재미. '감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보고 학습해서 그걸 연기로 써먹는' 연기가 진정 압권이다. 아무튼 참 실화라기엔 실감이 안 나는 놀라운 이야기. 재미있다. #드롭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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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오징어게임>이 처음 나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썼던 글입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봤는데 별로 틀린 말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때 온갖 호들갑이 쏟아져 나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나올 때 썼던 글이라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아무튼 그 뒤로 K-콘텐트의 물결이 세계를 휩쓰는 걸 보게 된 지금, 다시 읽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1970년대 초 쯤이라고 치자. 서양인 서넛이 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길을 잃어 인적이 드문 변두리로 빠졌다. 어두컴컴해서 겁도 슬슬 나고 배도 고픈데 저 앞에 영자로 된 레스토랑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다. 잘 닦아진 커틀러리 하며, 리모주 자기 그릇들이 예사롭지 않더니, 거북이 알 수프에서 브랜디에 담근 메추라기, 농어 구이까지 제대로 된 프렌치 정찬 코스가 나오는 거다. 다들 놀라는 가운데 어디서 좀 먹어봤다는 친구가 말한다.
“수프와 메인은 좋았어. 하지만 제빵기술은 아직 부족해. 치즈도 두가지밖에 나오지 않고, 이렇게 쿰쿰하지 않은 까망베르는 어린이용이지. 뭣보다 와인리스트는 손을 봐야 할 거 같아.”
그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뉴욕이나 파리에서 이 가격에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우리는 내일부터는 이 식당에 다시는 예약을 못 하게 될거야. 그리고 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 음식이 어떻게 나온 건지나 알아? 이 도시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아? 여기가 홍콩이나 도쿄라도 되는 줄 알아?”
 
 
 
 
2. <오징어게임>에 대해 입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요즘. 굉장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오징어게임>에 열광하는데 왜 한국 사람들만 여기저기서 재미없다, 잘 못 만들었다 말이 많은 건가요?”
한때는 <기생충>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매국노로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일 기세더니(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살려주세요), 이젠 <오징어게임>이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콘텐트에 토를 다는 행위는 마치 여동생이 선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얘 눈이랑 코랑 다 성형한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이 적지 않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전 세계 넷플릭스 1위’까지, 국위선양, 환호, 좋다. 다만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일단 이 콘텐트가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고, 이방인 평자들은 이 콘텐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붐은 여기저기서 징후가 보인지 오래지만 이렇게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은 신기하고 낯설다는 뜻이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순간, 드디어 외국에서도 ‘비평’이 시작되고 있다. 알리 캐릭터가 엉클톰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부터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3. 가장 답답한 것은 ‘<오징어게임>의 분석을 통해 K-콘텐트의 성공 원인을 분석’ 하려는 시도다. 이건 전봉준이나 나폴레옹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동학혁명의 실패 원인이나 19세기 초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비슷해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 K-드라마는 이미 충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상품을 내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노출의 기회, 즉 쇼윈도의 존재였다. 이 경쟁력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어 온 창작의 자유가 있었다. 일부 제한된 분야, 즉 섹스와 폭력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의 금기가 작용했지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그런 제약을 일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천, 지 인으로 나눠 서술하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이 정도만.)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레스토랑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K-콘텐트는 훌륭한 디저트다. 디저트만으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지만 메인디시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가 진정한 성공의 시작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그럼 앞으로는? 당연히 잘 되겠죠. 이웃 나라 중에 K-콘텐트를 온 국력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나라도 있는데, 당연히 잘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건 <펜트하우스>가 넷플릭스에 올라가면 어떤 반응을 얻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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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은 사골칼국수의 고향이다. 대학로에서 내려오면 혜화동 로타리에 떡 보이는 혜화동칼국수집이 있고, 그 뒤에는 전직 대통령 단골집이었다는 국시집이 있고, 반대쪽으론 골목 안 가정집에 숨어 있는 손국수집이 있다.
 
전부 사골 머리 양지 다 때려넣고 푹푹 삶은 뽀얀 소고기 국물 칼국수다. 이 동네에선 닭칼국수나 바지락 칼국수는 취급하지 않는다. 모두 다 맛있고,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다.
그런데 언젠가, 맛집 컬렉터인 L감독님이 한 말씀. "명륜 손칼국수 가봤어요? 혜화동 언저리를 넘어 서울에서 최고에요."
그렇다면 가봐야지, 했는데 그게 만만한 미션이 아니었다. 일단 저녁 장사가 없고, 주말에도 쉰다. 주차도 안된다(이번에 보니 가게 입구에 2대 정도 가능). 난관.
 
그래서 당초 생각보다 엄청 늦어서야 가 볼수 있었다. 설렁탕과 칼국수. 두 메인의 국물은 같다고 한다. 혹시 문배동 육칼처럼 반반 메뉴는... 없다. 그냥 미련이 남으면 공기밥을 시켜서 칼국수에 말아 먹을 것. 
수육/문어 반반 주문. 문어를 주문하니 초장이 나오고, 수육이 나오니 간장이 나오는데 송송 썬 마늘종을 반찬으로 주는게 특이하다. 물론 입에 같이 넣고 씹으면 한국인인 이상 싫을 리가 없다.
 
 
 
문어는 평범하게 그냥 맛있는데(미안하다. 포항 분들의 손을 거친 문어를 먹은 뒤로 다른 문어들은 그냥 평범하게 느껴진다), 수육에서 눈이 확 뜨인다. 꽤 두껍고 모양없이 그냥 대충 썬 고기인데 기가막히게 부드럽고 즙이 죽죽. 수육을 더 시킬걸!
대망의 메인 칼국수. 진하다. 그리고 진짜 칼로 썬 칼국수다. 후루룩이 아니라 호로록 호로록. 간이 깊이 배어 있다. 살강살강 씹히는 파와 부스러기 수육의 조화도 그만. 완벽하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간이 약간 세다. 이날만 그랬는지,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지만(많이 가 보신 분들은 원래 그 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을 타서 먹게 되더라도 또 가고 싶은 맛. #송원섭맛집 #명륜손칼국수 #간판을못찍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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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남쪽의 하카(客家). 하카라면 북방에서 내려온 중국의 유태인. 주윤발 장국영.
 
하카는 많이 들어 봤는데 하카식 음식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고, 사실 그냥 이름에 끌려 방문. 근데 그런거 있잖아 왜. 오래된 식당 아닌데 간판만 봐도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거.
(어쨌든 이 식당은 맛있지만 하카식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는 진짜 하카식 식당들도 꽤 있다고.)
 
 
 
오이무침은 흔한 메뉴지만 살짝 고수맛이 섞인 데서부터 양념의 섞임이 상큼하기 이를데없고(물론 오이를 썰지 않고 부숴 주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공심채는 흔히 먹듯 숨을 죽인 맛이 아니라 줄기의 힘을 탱탱하게 살려 아삭아삭한 맛이 별미다. 처음 두가지 채소에서 기대 폭등.
 
 
미리 주문한 오리는 광동식이라기에 기대했는데 북경식과 사실상 다를 게 없어 살짝 실망. 하지만 맛은 대박. 오이채와 파채를 넣고 전병에 싸먹는 바로 그 맛이다. 살코기를 먹고 나면 남은 살점이 붙은 뼈를 튀겨낸 뒤 큐민 등등 양고기 양념에 굴린 느낌으로 주는데, 살짝 느끼한 오리 맛을 없애 준다. 맛있다.
사천볶음밥(중국식 햄이 들었다. 이름과 달리 맵지 않음). 버터 탕수육, 창펀 모두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는 맛. 샤오롱바오는 내 기준으로는 살짝 국물이 좀 과하게 기름진 맛이긴 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난리.
아무튼 시그니처 오리는 가성비를 넘어 아주 훌륭하고, 나머지 요리들도 뺄 것 없이 만족스러움. #송원섭맛집 #오랜만에흡족한차이니즈 #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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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단길 여수댁(혹자는 여수집이라고도 한다). 덕자찜 한번 먹자는 따거의 말씀에 우루루 모였다. 병어찜이나 덕자찜이나 대개 갈치조림이나 별 다를 것 없는 국물에 푹 졸여 국물도 떠 먹고 살점도 들어 먹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경리단길 시장의 여수댁은 하얀 덕자찜을 낸다.
왕년에 민어집으로 유명했던 팔판동 병우네(코로나 지나고 보니 어디론가 사라짐)에서 먹어 본 뒤로 하얀 덕자찜은 처음이다. 덕자 사진 옆의 전화기는 크기 비교를 위해 누군가 내민 것.
50cm는 되어 보이는 덕자병어를 홍고추 대파 썰어 넣고 담백하게 잘 쪄냈다. 두터운 흰 살을 떠내 양념 간장 뿌려 파와 함께 입 가득 넣고 씹으면 고소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일품.
물론 비싸서 아무 때나 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럿이 한입씩 먹는 재미가 있다. 메뉴판을 보면 덕자 외에도 가오리 민어 등 고춧가루 넣지 않은 생선찜이 전문. 서울에서 여수식 맛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추가로 생선구이. 서대, 좀 작은 민어, 조기가 나온다. 괜히 이름만 드높아서 여수 가는 사람들이 먹어 보고 실망하는 군평선이는 필요 없다. 앞으로도 여수 가시는 분들, 맛이 없는 것은 아니나 뼈만 많고 살은 한 숟가락인 군평선이를 그 가격에 먹느니 다른 맛난 생선들을 잔뜩 드시길. 
 
모두 살짝 반건조해서 구운거라 고소한 풍미가 그만. 여기에 닭똥집 제육 같은 기본 안주들이 매우 충실하고, 일단 자리에 앉으면 나오는 기본 찬에 파김치, 돌김, 돌게장이 훅 달려든다.
 
 
돌게장(사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올 때 살짝 눈짓을 하면 양푼에 밥 비벼 먹으라고 계란후라이까지 같이 주시는 센스가 일품. 후식으로 나오는 구운 가래떡에 설탕 궁합도 매력적이다.
단 일견 허름해 보이는 가게의 분위기에 비해 비싼 집(정확하게 말하면 비싼 재료 취급 전문점. 내장이 화려했다면 더 비쌌겠지)이라는 건 각오해야 할 듯. #송원섭맛집 #경리단길 #여수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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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잘 하란 말이야
 
똥오줌 못 가리는 문과출신의 OPEN AI 사태에 대한 관전기.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이며 회사의 리더인 샘 알트만을 해고시킨 것까지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의 이사회는 주주들이 아니라 사회 공익단체 간부 같은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다. 결국 잽싸게 나선 마이크로소프트가 알트만을 채용하겠다고 하고,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 나선다고 하고, 결국 알트만이 OPEN AI 대표로 복귀하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지켜봤다.
1. 샘 알트만(올트먼?)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 사람이 관둔다고 500명이 따라서 관두겠다고 하는 일은 엄청난 일. 여기까지만 봐도 정말 한폭의 드라마. 대체 평소에 어떻게 해줬길래?
2. 일리야... (이름이 길어서 못 외움. 수츠케버)는 연구는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인간에 대해서는 정말 몰랐구나. 반란의 수괴가 하루만에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나를 버리지 마"라고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흉하다.
3. 이게 결국은 AGI로 이행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세상에 인공지능 연구하는 회사가 OPEN AI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그 회사의 CEO를 날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4.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게 목표였다면 일단 크게 울린 셈. 하지만 무슨 수로 저 열차를 세울수 있을까. 스스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AGI를 나쁜(놈들이 키운) AGI보다 빨리 개발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샘 알트먼과 일리야 수츠케버
문득 또 생각. 저 일리야...님이 "인간이 평생 만나는 정보량을 단어 수로 계산하면 약 10억개, 아주 넉넉잡아 20억개라고 쳐도(20억개라면 약 62년 동안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단어씩 보는 셈), 이건 AI가 학습하는 정보량에 비하면 정말 미미한 양"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최소한 초기에는 오염된 정보/ 가짜 정보/ 틀린 정보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옆에서 '편견(일부러 이 표현을 썼습니다)'을 넣어 줘야겠지만, 그 과정도 다 지나 그것도 결국 일부의 의견이라는 걸 다 아신, 통계학적으로 다음 어순에 들어갈 단어 찾기를 지나, 논리적 추론도 지나, 예측과 분석을 다 하게 되고, 진짜 자기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신, 정말 최고의 현자가 되신 AI님에게는 이 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댁이 보기에 '진정 인류를 위하는 길'이란 어떤 길인가요?"
이 질문을 빨리 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더 분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그런데 문득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XX이야?')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질문은 다른 분이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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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오타니 다큐, <오타니 쇼헤이: 비욘드 더 드림>을 봤다.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매우 실망.
 
이런 다큐를 만들 생각이라면 과연 시청자는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유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지구적 스타가 된 오타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궁금해 한다. 대체 오타니는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오타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시절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괴물이 나왔을까. 대체 어떤 훈련을 한거지? 야구 과외라도 했을까?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오타니도 친구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은 오타니를 어떻게 대했을까. 어려서도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완성된 인간이었을까? 고교시절 같은 팀 동료들은? 니혼햄 시절 동료들은? 과연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혹시 첫사랑은? 
 
 
그렇다면 이 다큐에는 오타니의 초딩 동창, 고교시절 야구부 동료, 은근히 지켜본 같은 반 여학생, 이와테 지역에서 맞붙었던 다른 학교 라이벌이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이 다큐에는 부모 형제는 물론, 과거 니혼햄 동료나 현재 엔젤스 동료 한명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명한 야구계의 전설들이 나와서 오타니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타니가 만나본적도 없는 마츠이 히데키,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와서 대체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오타니가 고1때 만들었다는 야구인생 계획표. 몸 만들기, 컨트롤, 키레('구위'라고 누군가 해석해 놨던데 정확한지 잘 모르겠다), 시속 160km,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 등 8가지를 단련해서 고교 졸업때에는 8개 구단으로부터 지명받는 것(일본은 여러 구단이 한 선수를 동시지명할수 있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연 이게 고1 소년이 세울수 있는 계획일까. 아무리 봐도 외계인.
 
(그런데 왜 타격에 대한 얘기는 없을까. 그건 굳이 연습할 필요도 없어서? ㅎ)
 
 
그 밖의 멘트들은 역시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들이라 재미라곤 느낄수 없었다. 오히려 좀 섬뜩할 뿐. 오타니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나랑은 다른 인간이야. 나도 야구를 좀 잘 한 편이지만 나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거든" 하면서 낄낄 웃은 C.C 사바시아에게 훨씬 호감이 가더라.

어쨌든 오타니 다큐는 누군가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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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2차 시기가 한번 훑고 지나간 뒤로 면역이 약화됐는지 잔병이 끊이질 않는다. 이 몸을 너무 오래 써서 그런가.
그런 사이에도 간신히 가본 캐롤스. 간판부터 닐 세다가의 오 캐롤을 연상시키니 전체적으로 아메리칸 다이너, 가까이는 한때 국내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TGIF나 베니건스를 연상시키는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압구정 코코스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성기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였던 만큼, 그 세대에 맞춘 듯한 BGM이 제격이다. Chicago의 You're the inspiration과 Peter Cetra의 Glory of Love에 맞춰 멜론 절반만한 잔에 나오는 프로즌 스트로베리 마가리타 주문. 크어. 역시 격에 맞는다.
시그니처 비프 립 바베큐, 베이비 백 립(돼지), 애피타이저 샘플러, 프라이드 치킨 샐러드가 잇달아 등장. 옛날 그 맛이기는 커녕 훨씬 발달한 첨단의 맛이다. 바베큐 소스에 푹 전 소갈비와 돼지갈비를 버터에 지진 빵 사이에 끼우고 코울슬로와 할라피뇨를 얹어 먹으면...
이건 정말 알기 쉬운 직설적인 맛. 0.01초만에 뇌에 쨍하게 전달되는 그 맛. 헤어날 수 없다. 샘플러에는 코코넛 쉬림프, 모짜렐라 튀김, 어니언 링 등이 향수를 자극하는데 찍어먹는 소스가 청양고추 마요네즈라면 이것 또한 더 바랄게 없다.
 
흥이 나서 좀 달릴까 했더니 업장 마감이 10시고 건물 조명이 꺼지는 시간이 9시50분쯤이니 참고하시라는 안내. ㅠㅠ 이게 아마도 유일한 약점일듯 싶으니 한번 추억의 안주로 달리실 분들은 좀 일찍 가셔야 할듯. 개인적으로 그저 먹고 마시는 걸 넘어서, 매장에서 좀 살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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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가게를 좋아한다. 유튜브스타인 선배가 굳이 익명을 포기해가면서 회사 이름으로 예약한 집이라 가슴이 설렜다. 성신여대 옆 동네 이름은 동선동, 골목 안을 가득 채운 샌드위치 전문점, 키토 푸드점, 패스트푸드 가게, 카페를 다 지나, 아마도 90년대 초에 성장을 멈춘 듯한 동네 골목 안에 있다.  밀양손칼국수라는 간판이 살짝 바랜게 벌써 신뢰감을 자아낸다. 

칼국수의 친구인 생선전과 아롱사태 수육이 감동적인데 여기에 서울식으로 쨍한 김치에 말을 잊었다.
 
 
이 김치 맛을 봐선 간판의 '밀양'을 지워야 하는게 맞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들어갈 것 다 들어갔는데도 짜지 않은, 제대로 익은 김치 맛이 기립박수를 부른다. 석박지와 무생채도 완성도가 높다. 부라보.
여기서 사실 뭐라 덧붙이면 전부 사족인데, 사골 베이스의 메인 칼국수도 은은하고 고급스러웠다. 특히 마지막의 살짝 걸치는 참기름 한방울 맛이 그렇게 적절할수가 없었다.
 
당분간 밀가루를 자제하라는 의사 선생님들 말씀에 국수를 1/3쯤 남기고 나오는 가슴이 어찌나 쓰린지. 면종복배(麪從腹背), 국수를 추종하면 뱃속이 배신한다 하나 어찌 국수를 벗어나 살 수가 있을까...
 
결론은 맛으로 볼 때 '밀양'은 아무래도 갸우뚱. 하지만 맛은 진짜. 근처 발 닿는 분들은 절대 후회 안 하실. #송원섭맛집 #밀양손칼국수 #성신여대 #동선동 #돈암동아님 #면종복배그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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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꽤 오래 전, 육사 출신인 한 현역 장교와 대화를 나누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내가 다닐 때, 선배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김오랑 중령을 꼽았다. 최소한 육사 출신이라면 죽을 자리에서 그런 의기를 발휘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라며, 그래도 세상이 그리 무심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오랑 소령은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정해인.) 

김오랑 중령

 

2. <서울의 봄>은 영화적으로 더없이 훌륭한 영화지만, 영화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다 제쳐 놓고, 한국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차음부터 끝날때까지 쫄깃한 긴장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아수라>에 이어 한단계 더 올라선 모습으로, 지난 2년간 한국 영화계에 일었던 노장 감독 무용론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특히 숨막히는 편집은 정말.... (대체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사라졌을지 궁금하다^^)


영화는 약간의 과장과 미화는 있지만 1979년 12월12일을 충실히 재현한다. 5.16 당시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벌인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 이후, 자칭 하나회 일당은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부 내의 친위세력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육성됐다. 그러던 그들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위기감을 느끼고, 수사권을 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 수호를 위해 뭉쳤다. 워낙 눈에 띄게 행동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 견제에 대한 반응이 12.12였던 셈이다. 

3. 그 시절을 모르는 분들이 보시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이야기:

혹자는 정승화 총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역시 박정희 집권기에 누릴 것 다 누린 군내 엘리트들이고, 만약 12.12가 없었다면 그 그룹이 권력을 계승했을테니 결과적으로 군부 집권 연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2.12는 상명하복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군 내에서 하극상과 무력 남용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사건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수 없다. 무엇보다 12.12를 통해 무력 사용에 자신감을 느낀 이들 집단이 5.18이라는 비극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저 집단에게 면죄부를 줄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뒷날 "전두환 그룹의 핵심 장군 중 하나가 12.12 이후 전두환을 대상으로 역 쿠데타를 하겠다며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거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영화 <헌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이 집단은 의리조차도 없었다는 얘기다.

4. 12.12의 교훈 중 하나는 어떤 시스템도 사람을 넘을수 없다는 진리다. 서울 시내에 있는 수경사령관의 직할 병력은 청와대 경비병력인 30단과 33단인데, 만약 이 두 부대의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수경사령관은 사실상 휘하 병력이 없는 셈이 된다. 이것이 바로 12.12의 핵심이다.

물론 이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을 때의 안전 시스템으로 수경사령관은 유사시 서울 주변에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등 4개 사단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유사시'에 이 시스템 또한 기능을 잃었다. 그 부대의 지휘관들이 '괜히 나서서 독박 쓰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무명인사가 아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여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않으면 나중에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2중 3중으로 쳐져 있어도,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시스템 수호의 의지가 없다면 소용 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할병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모두 소수의 정예병력이 궁과 도성을 장악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항상 병사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선 지휘관이야말로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16 때도 소장 박정희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주역들은 모두 영관급 장교들이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무력하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후임이자 12.12의 주역 중 하나인 정호용은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특전사 내에 사령관 경호를 최우선 임무로 하는 직할부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강철부대에 나오는 707 특임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막나가던 12.12 주체들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몰락했지만 한 행동에 비해 처벌이 무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5. 특히 한국사에서 12.12와 가장 비슷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이라고 생각한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키되 목적은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 나라를 어지럽히는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보위의 중책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고, 애당초 멈출 생각도 아니었다. 

난을 맞은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은 시스템상으로는 전 조선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나 수도 복판에서 고작 수백명의 반란군에 맞서 싸울 직할 병력은 단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고, 그저 국왕의 칙명에 따라 누가 반란세력인지를 지명받으려는 시도밖에 하지 못했다. 도피에 나선 김종서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입궁'이었다.

물론 그 왕은 금세 수양의 수중에 들었고, 겁박 속에 안평과 김종서 황보인의 음모라는 수양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루 아침에 최고 권력자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고, 참살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감히' 수양이 자신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종서는, 체포시에도 수양의 수하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걷기 힘드니 가마를 가져오라"고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6.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20중 바리케이트는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만(급조된 100여명의  '장태완 부대'는 실제로는 출동하지 못했다) 영화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참모총장을 무단으로 구금하고 대통령 추인을 얻은 패거리들이 이틀 뒤 자신들만의 축하 잔치를 벌이는 광경(전두환-황정민은 유명한 <떠나가는 전삿갓>을 부른다)은 이 영화의 본질이 느와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복 대신 군복을 입었을 뿐, 범죄조직이나 다를게 뭐냐는 시각이 선명하다.

영화 속 수십명 장성들의 모습은 배우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찌질함을 연기하는 바람에 더욱 큰 분노를 일으켰다. 육본 벙커에서 벌어지는 몇몇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당시 육본에 모인 장성들, 그리고 30단에 있던 반란군 수뇌부의 행동거지는 모두 당시 현장에서 봤다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노재현 국방장관 역을 연기한 어떤 배우는 정말....

7. 정우성은 인생 캐릭터의 호연. 어떤 배우라도 맡고 싶어 했을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웅에 대한 영화다. 타협과 보상의 유혹에 맞서 원칙을 고수하려 한 사람. 따뜻한 바지락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불의를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사람. 그런 영웅이 세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TV 드라마를 통해 김동현과 김기현 배우도 장태완 장군 역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이 다음 세대는 정우성을 통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 

P.S. 깜짝 웃음 포인트도 여러 군데. 국방장관의 "나 많이 찾았니?", 노태우의 "믿어주세요", 그리고 전두환 부인 역 배우의 외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리고 저 포스터 중간의  Everything Changed that night 은 혹시 That night changed everything 이라고 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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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나기 전에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엔가 한마디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다년간 서울대에서 수학한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쓴 책이다. 한국인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문화의 핵심을 성리학의 기본 단위인 이(理)와 기(氣)를 통해 해석, 전통적인 한국 사회와 해방후 급격한 경제 발전, 사회의 변화, 특징적인 민주화 등이 어떤 정신적 분위기(?)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공자는 참으로 강하구나" 했던 바로 그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한국에 정통한 학자라 해도 한계는 있겠으나, 매우 독특한 해석이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그럴듯한 부분들이 많다.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소개하면.

 

 

 


1.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한국인의 사상사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명사를 통해 해석하고 가르쳤다. 가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상이며, 단일한 원리이자 지향해야 할 선이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이며,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법칙(所當然之則)의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기는 이 이가 현실세계에 적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이가 절대지상의 원칙이라면 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들인 셈이다. 흔히 이를 체(體)라 한다면 기는 용(用)이라 표현된다.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빗대 이해할 수도 있다. 


2. 오구라 기조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는 '이'의 사회다. '주자학에 의한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천,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적인 규범이다' 라고 규정한다.
즉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 주자학 이후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리'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 '리'가 도덕적 정당성이 되어 국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수호하는 지식인들의 나라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도덕을 중시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문체에서는, 지식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며 정치의 선봉에 선 시대가 없었던 일본 역사에 대한 묘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도 시대에도 유학자들은 막부의 통치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종의 어용 학자의 역할을 했을 뿐, 유학자가 정국을 주도하거나 한 시대는 전혀 없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정치는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치 전문가'들의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유학이 '공맹지학'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유학에서 맹자의 존재가 희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3. 아무튼 지식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보니, '리'에서 벗어난 물(物)은 매우 비천한 것으로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사농공상의 사회질서가 공고하고, 특히 공과 상의 귀함이 지독하게 무시당해 온 역사가 바로 이 '리'에 집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오구라 기조의 해석이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사는 사람도 선물하는 사람도 그 정성과 고마음에 교감하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 한(恨)이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소비는 일종의 한풀이다. 그 구매 대상이 상징하는 상위의 생활에 대한 동경이 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런거 하나 못 살까보냐', '내가 이런 것 하나 못 사줄까보냐' 같은 심성이다. 정말 일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에 대한 이런 묘사는 심히 그럴듯하다.


4. 그렇다면 왜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대(事大)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일까. 오구라에 따르면 그 이유는, 중국의 명조가 바로 '리'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명조에 있었고, 유학이라는 학문이 지향하는 과거의 이상, 즉 기원전 8세기 주나라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실재하는 존재가 바로 명조였던 것이다.


오구라는 여기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한중관계를 잠시 거론한다. 과거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역사적으로 사대를 기본 원칙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사대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사대는 과거의 중국이 '리'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나 20세기 이후 중국은 그런 존재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미 20세기 이후, 한국의 '리'는 미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을 추종한 것 역시 오구라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이 6.25때 도와주었다거나 경제적 원조로 번영을 이끌었다거나, 혹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의 방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 역시 친미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과거 중화가 갖고 있던 '리'를 한국인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리를 지향하고, 거기에 맞춰 국가와 국민 모두 합심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하다.

오구라 기조 교수


5. 한국의 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이 리를 숭상하는, 지식인 중심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민주주의라는 리의 구현을 위해 한국 지식인들은 목숨과 지위를 아끼지 않았다. 흔히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대부'와 '선비'로 나뉘곤 한다. 선비가 국정에 참여하면 사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재야의 사림이 된다. 항상 그 순수성은 재야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안에서 오구라의 주장은 큰 맥락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그의 시각이 반한적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오구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앞서도 잠시 말했듯, 일본 역사에서도 이토록 지식인(혹은 문인)이 주도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부러움이 느껴진다. 


6.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과연 오구라의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볼만한, 한국인 스스로 쓴 한국인의 정치 사상사, 혹은 한국인의 정신사에 대한 저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대한 분석이라면, 과연 한국인의 정치사상을 다룬 한국 학자의 괄목할만한 저작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몇몇 권위자들께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추천할만한 책이 없다'였다. 사실 이 책의 독후감은, 책 자체의 독후감보다 '없다'라는 추천의 충격이었다. 왜 없을까. 없어야만 할까. 

혹시라도 '없긴 왜 없어'라고 추천해 주실만한 분, 아울러 지금이라도 직접 써 주실 분이 궁금하다. 이 포스팅을 이렇게 끝맺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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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던 천재. 금수저. 잘생긴 얼굴. 유혹의 재능. 섹스에 대한 집착.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영화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여기서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과연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유명한 인물의 일대기이니 스포일러가 있을까 싶지만, 감상에 영향을 받고 싶지 않은 분은 그냥 여기서 멈추길.  

내 느낌대로 정리하자면,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어느 관종의 추락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히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목받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주목을 즐거워하고, 항상 어떤 자리에서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원하고, 더 큰 주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관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는 매우 강력한 '관종'의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어느날, 역사적인 폭탄 제작에 참여하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당연히, 관종답게, 그는 ‘맨하탄 프로젝트’ 참여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려 한다. 물론 충분히 자격도 있다. 그리고 미친듯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과를 냈다.

 

과연 이 폭탄은 어떻게 쓰여져야 할까. 많은 과학자들이 -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 이 폭탄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을 낸다. 여기에 대해 많은 기록은 ‘오펜하이머는 본보기로 실제 사용을 해야 전쟁 억지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되어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폭탄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을 대략 뭉그러뜨리는 정도 선에서, 실제 투하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원자폭탄의 사용이 다른 방법을 통한 인간 살해에 비해 딱히 더 부도덕할까?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이미 도쿄에선 몇 차례의 폭격에 의해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한 것보다 많은 사망자 수다. 만약 일본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면,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진공작전을 폈다면 수만명의 미군이 더 희생되었을 것이고, 일본인 사망자는 수십만, 수백만에 달했을 것이다. 핵폭탄 투하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펜하이머에게는 사용을 지지하는 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다. 이미 일본의 패배는 바뀌지 않을 상황이고, 그렇다면 미군을 포함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성과가 그 종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가장 좋은 조건일테니까.

 

폭탄이 무사히 실험을 마치고, 군인들이 두 개의 폭탄(아마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일)을 로스 알라모스로부터 외부로 반출하는 시점. 여기서부터 놀란의 카메라는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의 오펜하이머를 쫓기 시작한다. ‘저 폭탄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인 딜레마는 물론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이어 폭탄 투하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 오펜하이머의 실망은 극에 달한다.

물론 언론은 ‘전쟁 종결자’ 오펜하이머를 놓치지 않고, 그는 명성의 최절정에 오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을 방문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관종으로서의 욕망을 드러낸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트루먼은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기대했을) 공감이나 동정이 아닌, 분노를 표현한다. “폭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거기서 알기나 할 거 같은가? 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나야.” 두 개의 핵폭탄을 날려 전쟁을 끝낸 사람은 난데 어디서 일개 과학자 따위가 주인공 행세를 하려 하느냐는 불쾌감이다. 

 

표면적으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양심적 고뇌를 시작한’ 오펜하이머와 ‘인명 따위 관심없는 권력자’ 트루먼의 대립 같지만 사실 내게 보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인물’의 자리를 건 관종과 관종의 대결이다(...문과와 이과의 대결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밀린 오펜하이머는 어색하게 퇴장한다. (문과 만세!)

대개의 관종들은 선량하고 나이브하다. 관종일수록 사람들의 선의를 잘 믿는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대체 어떻게 그 호의 뒤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데. 이게 일반적인 관종의 패턴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화에서도 오펜하이머는 스트로스가 자신을 고의로 음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을 가까스로 끝내고 공산주의와의 치열한 체제 경쟁을 시작한 미국의 여론 앞에선, 이런 노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심쩍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소폭탄을 개발해선 안된다’는 의견은 ‘원폭은 되고 수폭은 안 된다는 건 또 뭐냐. 소련도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데’에 부딪히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UN이 공동관리하게 하자’는 의견은 ‘소련과 핵무기를 공유하자고?’로 들릴 수밖에 없다. 

 

영화상으론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오펜하이머가 비공개 청문회를 통해 (영화에 따르면 스트로스의 공작에 의해) AEC에서 밀려난 것은 1954년, 스트로스가 상무장관 지명을 받고 미국 상원이 그의 지명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54년은 아직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던 시절이지만 그 뒤로 미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꼈고, 1959년이면 무고한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을 낳아 여론을 반전시킬 시기였다.

 

심지어 놀란의 영화상으로는, 오펜하이머는 ‘냉전의 시대에 용기있게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해서’가 아니라 ‘스트로스가 소인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가 보복당해’ 공직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가 나라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고, ‘지나친 관종이라 주위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당했다는 시각으로 읽힌다. 

 

어쨌든 70여년 동안 인류는 용케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 데 성공했고, 이건 인류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놀란은 거기에 오펜하이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인류가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관종끼 강한 천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소위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얼마나 호되게 당하는지에 관심 있어 보일 뿐.

너무 길어졌다.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영웅의 추락을 그린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오펜하이머의 추락 원인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오만과 공명심,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시, 억제할 수 없는 ‘관종’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몰락한다. 성격을 중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측면에서 <오펜하이머>는 매우 탁월한 영화다.

3시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핵 폭발 실험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킬리안 머피에서 시작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게리 올드먼, 조쉬 하트넷, 맷 데이먼, 플로렌스 퓨, 에밀리 블런트, 케네스 브라나, 라미 말렉, 한때 넥스트 디카프리오였던 데인 드한까지... 단역까지도 올스타급으로 채운 라인업은 중국 영화 <건국대업>을 연상시켰는데, 현재 할리우드에서의 놀란의 위상을 보여주는 면모. 

아무튼 명작이지만, 두번 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P.S.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의 폭발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는 바가바드 기타 11장32절 머릿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후로 수많은 힌두교 연구자들이 이 말이 적절하게 인용된 것인가에 의문을 던져 왔다.

이 말은 인도 신화에서 비쉬누의 여덟번째 아바타이며 무적의 용사인 크리쉬나가 자신의 사촌이며 동조자인 영웅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쉬나와 같은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데, 크리쉬나가 파리 죽이듯 인간 전사들을 살상하는 것을 보고, 전능한 신에게 대체 싸움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대답한다.

 

The Supreme Lord said: I am mighty Time, the source of destruction that comes forth to annihilate the worlds. Even without your participation, the warriors arrayed in the opposing army shall cease to exist.

Therefore, arise and attain honor! Conquer your foes and enjoy prosperous rulership. These warriors stand already slain by Me, and you will only be an instrument of My work, O expert archer.

 

크리쉬나가 말하는 힘의 비교 대상은 시간이다. 세상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도 영원한 시간 앞에서는 모두 소멸될 뿐이다. 그러니 아르주나가 돕건 안 돕건, 그런 강대한 내가 참전한 이상 전장에 서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다. 물론 힌두교의 전제상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었다가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니, 너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누가 죽고 누가 사는 일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연연하지도 말고, 그저 내 도구로서 승리를 즐겨라.

 

한마디로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영원을 다루는 신의 의도와 권능을 이해하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짖음인데, 과연 오펜하이머의 인용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이 크리쉬나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인지, 그냥 단장취의하고 ‘뭔가 강력한 것’이란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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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고, 살아가면서 얽힘이 없는 인간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늘 꼽는 학연/지연/혈연을 옹호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주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의 성취(혹은 그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는 자기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판타 레이> 저자인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이런 전제 위에서 존재하는 책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구한말-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의 암흑기에, '우리 조상들이 좀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분단과 남북한 독재의 탄생과 같은 민족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뭔가를 알려 할수록, 그 시기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를 그 시대에 데려다 놓은들 과연 더 낫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917년작인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사람들에게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미국 유학가서)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물론 형식 자신도 생뭏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광수는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꿔놓기 위해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등장하는 조선의 과학자들은 1920년대 이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같은 서구의 최신 물리학 조류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식민지의 계몽에 온 정성을 바쳤다. 이 책은 최규남 최윤식 도상록 이극로 등 당대의 선각자들이 조선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배운 사람'들은 '무식한 민중'을 탓하며 자신들만의 성역에 안주하지 않았다.

 

1939년 영화화된 <무정>. 김신재 한은진 주연. 당시 경성 장안의 화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최규남이 '백만원이 있다면 지상 5층 지하 5층의 번듯한 이과학 연구소를 만들겠지만, 백만원이라면 일원짜리 지폐 백만장이 아닌가''라며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한 순간에선 안타까움이 앞선다. 간송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 1만원에 산 것이 화제가 되었던 시절이다.  누가 식민지 젊은이들을 위해 그 큰 돈을 모을수 있었을 것인가. 1938년에서야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설치된 경성제대 이공학부가 학생 한명당 2만원 수준의 투자가 이뤄졌다고 하니 최규남이 바랐던 것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 같다. 


'이과 책'이긴 하나 어려운 과학 지식을 요하는 내용은 없다. 사실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굳이 달리 표현하자면 '과학사')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궁극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책이다. 가능하면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거룩하고 지루한 책 같지만, 저자의 취향이 개입된 trivial한 팩트들이 주는 자극을 또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선데이 과학(?)' 적인 요소도 다분하니 재미없다는 얘기는 안 나올 듯.^^ 아무튼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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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한다. 당연히 여행을 꿈꾸게 하는 책도 좋아한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지금까지 나온 유현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생각하면 왜 <인문 공간 기행>이 아닌지도 궁금하지만(아마도 게으른 서점을 위해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 읽다 보면 처음엔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나 저기 갔었는데. 왜 저걸 못 봤을까. 유홍준 선생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항상 참이다. 베를린에 갔어도 국회의사당은 밖에서 보는 걸로 스쳐 지났고, 베네치아를 몇번 갔어도 퀘리니 스탐팔리아는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오사카에 갔어도 빛의 교회나 아주마 하우스를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뭐 대신 히메지성을 갔으니 이건 후회는 없다). 물론 어쩔 수 없었던 때도 떠오른다. 산 세바스찬에 갔어도 빌바오를 들를 수는 없었던 것처럼.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남들에게도 그 감동을 전하고 싶어하고, 글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 책은 건축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건축덕후의 글에 가깝다.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감정이 있다. ‘...어렵게 찾아가느라 짜증이 났는데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는 식의 표현. 어떤 것인지 바로 느낌이 온다. 그래 맞아, 맞아.
이 책이 꿈이라면, 이 책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두 찾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건 슬픔. 우와 하는 생각에 정확한 위치를 검색해 보면 파리에서 6시간.... 어렵다.
 
아무래도 살아 생전에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베어런(그 유명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이 있다)이나 텍사스 주 포트워스(킴벨 미술관)같은 곳에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안타깝다.
이 책에 나와 있는 30개의 건축물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여기에 올라와 있을 지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 유현준 교수가 본 ‘세계 3000대 건축물’ 중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엄선된 것일 거란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투자자만 있다면 멋진 건축 다큐(...아니다). 아무튼 또 한동안 여행병에 시달리겠다는 생각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은 읽으실 분들을 위한 주의사항 모음]

P.S. 단순한 관람기가 아니다. 한 건물을 설명하기 위해 대략 10개 안팎의 다른 건축물과 예술작품들, 해당 건축물들의 역사적 맥락과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워싱턴 베트남 베테랑 메모리얼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서도호의 ‘ some/one’ 이 매우 반가웠다.
 
한때 리움의 상설전시작품이었던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는 옛 글귀를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표현하다니, 라고 감탄했던 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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