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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훈('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시나리오 박상연('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선덕여왕 공동집필)이라는 브랜드만으로도 '고지전'은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입니다. 이런 한국 영상계의 에이스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면 굳이 배우 요소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보고 얘기해야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해 훌륭합니다. 후반 약 30분은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치 제작진이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 났다는 선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놓고 감히 말하자면, '태극기 휘날리며'류의 감상주의에 대한 압도적 승리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가 가져온 가장 큰 수확은 고수라는 새 배우의 발굴입니다. 네. 1998년 만 20세때부터 활동한 바로 그 고수 말입니다.



1953년 1월, 지리한 휴전협상을 바라보던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는 사소한 시비 때문에 동부전선의 격전장 애록고지로 전출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전출 이유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전투의 핵심인 악어중대에서 뭔가 인민군과 내통한 흔적을 수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강은표는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친구 김수혁 중위(고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강은표는 방첩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전쟁의 진실을 하나 하나 알아차립니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이 전쟁의 첫 8개월은 엄청난 규모의 역전과 재역전이 펼쳐집니다. 개전 한달만에 낙동강에 고립됐던 한국과 UN군은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10월1일(국군의 날)에는 북진을 시작합니다. 12월, 한반도의 북쪽 끝까지 국군의 진격이 이뤄지지만 중공군의 투입과 맥아더의 퇴진, 1.4후퇴로 다시 전선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내려오죠. 이 1951년 1월 이후 전선은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루한 휴전 국면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휴전 국면은 그야말로 누가 땅 한뼘을 더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고, 지휘관과 국정 지도자들이 지도상의 땅 1cm, 아니 1mm를 놓고 책상 위에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휴전선 일대의 고지들은 시체로 산을 쌓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살육전의 핵심을 지목한 것이 바로 영화 '고지전'입니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애록(Aero.K)이라는 고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동부/중부전선 어디를 가나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될만한 고지들이 널려 있습니다. 유명한 백마고지를 비롯해 펀치볼, 피의 능선, 베티고지 등 수많은 고지들이 바로 그 '지도 위의 1cm'를 놓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곳들입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화 '고지전'은 '한 고지를 사이에 두고 몇 개월, 몇년씩 마주 보고 싸워야 하는 적들 사이의 묘한 관계'에 주목합니다. 그렇게 매번 같은 고지를 놓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이다 보면 서로 얼굴도 알아볼 만 합니다. 더구나 같은 언어로 대화도 통하는 동족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흥미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제작진은 이 '고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합니다. 어떤 때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함께 청승맞은 노래를 합창하며 눈물을 닦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먹을 것을 나눠 먹기도 하지만 어느 한 순간, 서로 목숨을 노리며 눈을 부라리는 관계는 지금도 변한 게 없습니다. 서로 이름까지 알 사이지만 돌아서서 "그 자식, 어제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평양에서 펼쳐지는 남한 가수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는 손과, 연평도에 포탄을 퍼붓는 손이 다른 손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도 반대쪽에서 볼 때에는 이쪽도 마찬가지로 보인다는 것. 1953년 동부전선에서 펼쳐지던 웃지 못할 희비극이 지금도 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야말로 영화 '고지전'의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이런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 넘쳐난 것이 '고지전'의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혹자는 이런 요소를 "한국 전쟁영화는 역시 죽기 전에 너무 말이 많아"라고 한마디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건조하게,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영화였으면 하는 느낌입니다. 이미 제작진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후반부의 '전선야곡' 합창으로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감정에 어필해야 하고, 얼마나 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해야 하느냐에 따라 수천가지 입장이 나뉠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지전'은 지금까지 나온 대략의 한국전쟁 영화들에 비해 감정의 분출을 가능한 한 억제한 영화라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그동안 쏟아진 울고 짜고 하는 감상주의에 비해선 대단히 큰 발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상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법이란 얘기가 아니라, 감상주의 일변도의 신파 노선을 벗어나서도 이렇게 큰 울림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큰 성과라는 뜻입니다.)




연출과 대본의 훌륭함을 넘어 이 영화를 진정 살려내는 건 온갖 전력을 갖고 전쟁에서 하나로 뭉쳐진 악어중대원들의 열연입니다. "정말 형이라고 부를 거지요?"라고 궁시렁대는 류승수, 믿기 어려운 광복군 전력을 신물나게 외우는 고창석, 허풍쟁이 신임 중대장 조진웅, '전선야곡'을 구성지게 불러대는 이다윗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화려한 조연의 향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제훈과 고수가 있습니다. (신하균은 사실 연출 의도를 살리면 살릴 수록 관객에게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죠. 배우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일 겁니다.)



'파수꾼'에서 곱상하면서도 잔혹한 1진의 면모를 보여준 이제훈은 첫 등장하는 장면, 첫 대사인 "무례하네, 상관한테" 이 한마디로 절대 지워지지 않는 존재감을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원래 그러라고 있는 대사와 상황이겠지만, 커리어가 길지 않은 배우가 자신이 '따 먹어야' 할 장면을 이렇게 제대로 '따 먹는걸' 보면 제작진도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목소리가 다소 가녀린 면이 있지만 앞으로의 대성이 기대됩니다.




고수의 성공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수는 어떤 배우였을까요. 데뷔 후 줄곧 따라다녔던 '사슴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청년'의 이미지에서 고수는 얼마나 벗어나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해 이 작품 전까지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작품에서 고수가 냉혈한의 이미지를 연기하곤 했지만 그 속에는 항상 상처받은 소년이 있었고, 그 모든 캐릭터는 고수가 본래 갖고 있는 요소, 즉 수려한 용모 속에 가려져왔다고 보는게 냉정한 평가일 겁니다.

하지만 '고지전'의 고수를 보면 여러 모로 엄청난 발전이 느껴집니다. 고수의 작품 중 처음으로 고수 아닌 김수혁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나약한 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김수혁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가 곡절 끝에 탈출해서, 2년 사이 졸병에서 장교로 진급해 있는 인물입니다.

누구보다 생사의 기로를 여러번 넘나들었고,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이라는 간단한 논리에도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 인물이죠. 특히 '살고 죽는 문제가 1초의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에 단련된 남자'만이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니컬한 웃음은 정말 일품이라고 칭찬할 만 합니다. 드디어 '사슴의 외모'와 '짐승의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완성됐다는 신호인 것이죠.

올 연말과 내년 초 사이에 고수가 이 작품으로 트로피를 몇개나 모을 지 궁금합니다. 영화 '고지전'과 고수가 트로피 갯수로 경쟁을 벌일 지도 모르겠군요.^^



P.S. '잘가라' 신에서 영화가 끝날 수 있었다면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고, '전선야곡' 합창과 '돌격'에서 끝났다면 냉정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뒷부분이 과연 필요했나 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상황이지만... 이렇게 힘들고 긴 작업을 마친 제작진으로서는 더 선명한 결말을 원했을 수도 있겠죠.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난 제1감은 '영화 내용도 전쟁이지만 정말 찍는게 더 전쟁이었겠구나'하는 생각. 스태프며 배우들, 지긋지긋 했겠습니다. 고생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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