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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에 대해 수없이 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는 흔히 공통된 단어나 어구가 등장합니다. '난해' '관객의 혼동' '지적인 블록버스터'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꿈과 현실의 혼란' 등등입니다.
혹시라도 이런 말들에 현혹되어 이 영화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며 다 보고 나서도 뭔가 화장실에서 물 안 내리고 그냥 나온 듯 찜찜한 기운이 남는 영화라고 착각하실 분들이 꽤 있을 것 같아 급히 몇줄 쓰기로 했습니다. '인셉션'은 절대 그런 영화 아닙니다. 탄탄한 대본과 놀라운 연출이 조화를 이룬, 독창성에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그런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놀런의 전작 '다크 나이트'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입니다. 꼭 보셔야 합니다.
설정을 전혀 모르셔도 상관 없지만, 아셔도 될 부분까지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다른 사람의 꿈에 침투해 비밀을 찾아내는 콤비입니다. 이들은 큰 회사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대부호 사이토(켄 와타나베)의 꿈에 침투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사이토에 의해 격퇴당하고, 반대로 그의 청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새로운 미션을 위해 코브와 아서는 꿈 속에 침투하는 드림팀을 짭니다. 새로운 꿈의 설계자로 여대생 아리아드니(엘렌 페이지), 무엇으로도 변신하는 임스(톰 하디), 약물전문가 유수프(딜립 라오)가 합류하죠. 그런데 코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였던 맬(마리옹 코티아르)가 계속 꿈에 등장한다는 거죠.
영화 내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그 꿈에서 한 단계씩 심연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설계'한 놀런의 상상력입니다. 게다가 놀런이 창조한 세계 못잖게 보는 이를 놀라게 하는 것은 실로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연기파 배우들로 채워진 라인업입니다. 화려함으로는 '오션스 일레븐'에 뒤질 지 모르지만 실력파들로 채워졌기로는 근래 보기 드문 탄탄한 진용이더군요.
출연진 가운데 7명이 오스카 후보에 올랐고 그중 2명(마이클 케인, 마리옹 코티아르)은 수상자입니다. 나머지 6명은 3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아직 수상하지 못한 디카프리오,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피터 포슬스웨이트, '주노'의 엘렌 페이지, '라스트 사무라이'의 켄 와타나베, '플래툰'의 톰 베렌저입니다.
하다못해 단역인 첫 장면의 설계자 역으로 루카스 하스, 그리고 누워서 몇마디 하지도 않는 늙은 피셔 회장 역으로 피터 포슬스웨이트가 나오는 걸 보고 '이것이 스타 감독의 위용인가...'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초반부터 조셉 고든 래빗과 루카스 하스가 함께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아이디어가 신선했던 영화 '브릭' http://www.imdb.com/title/tt0393109/ 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아무리 좋은 배우가 있더라도 그게 영화의 성패를 결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배우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제대로 활용한 놀런의 실력은 다시 한번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놀런이 이번에 창조한 세계는 꿈 속. 물론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1950년대의 영화광에게 '인셉션'을 보여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우리는 그동안 '매트릭스'를 봤고, '바닐라 스카이(혹은 '오픈 유어 아이즈')'를 봤고, 하루 아침에 도시 하나를 만들었다 허무는 프로야스의 '다크 시티'를 봤고, 사람의 뇌를 하드 디스크로 활용하는 윌리엄 깁슨의 원작 소설을 기초로 한 '코드명J(Johnny Mnemonic)'를 봤고, 사람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아이덴티티'를 봤고, 연인의 마음 속을 엿볼 수 있는 세상을 그린 '이터널 선샤인'을 봤으므로 남의 꿈속에 들어가고, 남과 나의 꿈을 연결해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감춰진 비밀을 훔쳐낸다는 황당무계한 설정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의 변화에 따라 놀런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꿈을 서로 연결해주는 기계의 매커니즘 따위에 대해서는 설명을 절약할 수 있게 됐습니다. 너무 자세한 설명으로 러닝타임을 잡아먹지 않겠다는 것이 놀런의 입장인 듯 합니다. 그리고 그 설정의 기본 골격이 워낙 탄탄하고 설명이 명료하기 때문에, 놀런이 사소한 부분에선 수시로 설정을 바꾸는 데에도 관객은 쉽게 적응합니다.
그러니까 '매트릭스' 시리즈가 1편의 탁월한 설정과 창의력에도 불구하고 2편, 3편으로 가면서 지나치게 관객들을 혼란시키며 자멸의 길을 걸은 반면, 놀런은 아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설정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며 보다 관객들에게 친숙한 길을 걷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마지막 장면 하나 정도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그건 글자 그대로, '관객의 취향'을 고려한 것입니다.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얼토당토않은 결말을 내려 놓고서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관객에게 '그건 관객이 해석할 몫'이라고 대답하는 한심한 감독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무책임한 감독들이 '관객이 해석할 몫'이라고 말할 때에는 콘서트에서 진정 관객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이 올라가지 못하는 고음 파트에서 객석을 향해 마이크를 내미는 가수가 떠오릅니다.
잠시 다른 길로 빠졌지만 이 영화를 통해 놀런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이미 오래 전 칼 융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꿈을 꾸는 것은 깨어 있을 때 의식상태에서 하는 것과 달리 무의식이 뭔가를 위해 움직이고, 그 결과물인 꿈에서 사람은 자신이 의식상태로 인지하지 못하는 의미를 전달받곤 한다는 식이죠. 그래서 주인공들은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가 단서를 심고,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데 도전할 수 있는 겁니다.
써놓고 보면 길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고, 칼 융 이후에 누가 또 뭘 어쩌고 누구의 철학 이론에 따르면 꿈이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에는 아무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데 그런 바보같은 수작은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놀런의 공헌은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충분히 납득이 가면서도 박진감있는 스토리로 풀어놓는가 하는 부분에 있죠. 이런 차이가 어떤 사람은 공부나 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대 감독이 되어 떼돈을 벌게 합니다. 꿈속의 꿈 부분, 그리고 꿈의 단계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부분 등은 정말 탁월한 설정입니다.
'인셉션'에 대해서는 깊이 우려먹을 부분이 또 있을 것 같아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두려 합니다.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해도 꽤나 머리를 쓴 흔적이 보입니다. 어쨌든 이런 얘기들은 나중에 다시 하고, 결론은 꼭 보시라는 것.^^
P.S. 많은 분들이 결말을 갖고 머리를 썩히시지만,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정답이 없는 결말입니다. 어느 한 쪽이든, 관객이 믿고 싶은 쪽을 믿으면 됩니다.
P.S.2. 소위 '킥 송'으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건 마리옹 코티아르가 여주인공인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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