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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 최대의 기대작이라는 표현이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초반 화제 몰이에 성공한 느낌입니다. 첫 주말이 오기 전에 이미 10만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선입견 없이 영화를 본 관객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초기 관객 중에는 여성층의 호응이 높은 편입니다.
반면 웹툰으로 연재됐던 원작 '이끼'에 애정이 깊었던 관객들이 영화로 등장한 '이끼'에 보여주는 시선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지난 100년간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얻었던 영화는 그야말로 극소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영화 '이끼'가 웹툰 '이끼'와는 참 다른 작품이 됐다는 점입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일단 줄거리- 영화의 전개를 따릅니다.
1970년대 후반. 독하기로 소문난 형사 천용덕(정재영)은 친분이 두텁던 한 기도원 원장으로부터 어떤 남자가 기도원 측으로부터 신도들을 빼앗아가고 있으니 손을 봐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류목형(허준호). 처음에는 그저 겁을 주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천용덕은, 이 남자가 기도원 신도들은 물론 같은 교도소의 흉악범들까지도 길들여버리는 무서운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원작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원작대로라면 이렇게 시작해야겠죠.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 농촌 마을, 류목형의 부고를 받은 아들 류해국(박해일)이 찾아옵니다.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부조리한 꼴이나 억울한 손해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소한 폭력 사건에 휘말린 뒤 분쟁 과정에서 담당 검사 박민혁(류준상)을 시골로 좌천당하게 만들지만, 그 또한 직장도 잃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남자입니다.
그런 류해국을 마을에서 맞은 것은 이장인 천용덕, 덕천(유해진) , 성만(김상호), 성규(김준배). 그리고 류해국은 이 마을에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돈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묘한 분위기의 미인 영지(류선)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류해국이 어두운 밤, 차를 달려 마을에 도착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점점 마을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장의 전직이 형사였고, 아버지 목형과 이장 천용덕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두 사람의 과거 인연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아마도 영화의 전체 얼개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큰 차이일 듯 합니다. (흔히 영화와 웹툰의 결말이 다르다는 부분이 언급되곤 하지만, 그건 사실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런 전개 과정의 변화는, 어쨌든 영화는 영화고 웹툰은 웹툰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수용할만한 일입니다. 원작 팬들은 '이끼'의 숨막히는 구성과 절묘한 커트에 열광했던 터라, 웹툰 '이끼'의 어느 장면 하나, 어느 컷 하나, 어느 대사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는 영화화를 기대하는게 당연하지만, 세상에 그런 영화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원작의 완벽한 미적 구성을 생각하면, 웹툰은 콘티로 삼아 그 컷대로만 찍으면 될 것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극단적인 비난도 나오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영화 '이끼'는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내내 긴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원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관객들의 성원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원작 '이끼'의 볼륨은 160분에 담을 수준은 아닙니다. 아마도 원작 팬들이 원하는 영화를 뽑아내려면 최소 300분 정도는 필요합니다. 도입부의 설정을 바꾼 것도 일단은 물리적으로 관객이 볼 수 있는 시간 안에 '이끼'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캐스팅은 매우 긴 얘기가 되겠지만, 원작과 영화의 캐릭터가 100% 똑같지는 않다는 정도로 얘기해 두려고 합니다. 아마도 가장 다른 인물은 유준상이 연기하는 박민욱 검사일 겁니다. 원작에서 박민욱 검사가 느끼던 좌절과 분노가 많이 희석된 만큼, 어찌 보면 코믹하고 지나치게 밝은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정재영의 이장 연기는 '우려에 비하면 대단히 성공적'이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젊은 이장과 나이든 이장에 두 명의 배우를 써서, 늙은 이장 역에는 이 분의 연기를 보고 싶었지만 어쨌든 정재영은 충분히 제 기량을 보여줬다고 인정합니다.
정작 아쉬움이 남는 캐스팅은 영지 역의 유선과 류목형 역의 허준호입니다. 캐스팅에 대해서는 더 할 이야기가 있어 이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캐스팅, 레전드급은 아니지만 상당히 훌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 '이끼'와 웹툰 '이끼'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웹툰 '이끼'가 그 많은 독자를 매료시킨 동력은 음울하면서도 사방에서 죄어 들어오는 듯한 독특한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 '이끼'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기 힘듭니다.
웹툰 속 마을은 대체 해가 비치기는 하는지,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웃고 떠들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음습한 공간입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사람이 사는 지역과는 다른, 이계와 같은 공간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정도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영화 속 마을은 여느 농촌과 그리 다를 게 없습니다. 해가 비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게다가 수시로 삽입되는 강우석 감독 특유의 유머는 원작 속 어둠의 흔적을 저 멀리 날려 버립니다.
물론 160분짜리 영화를 내내 어둡고 무겁게만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강우석 감독의 판단을 존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유머가 삽입됐다고 해도, 전체적인 영화의 톤이 그렇게 밝아져버린 것은 매우 의아한 선택입니다.
이럴 때 '살인의 추억'을 들고 나오는 것은 좀 불공평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살인의 추억'을 본 많은 사람들이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가?'를 비롯해 여러 차례 등장하는 코믹한 대사들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밝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영화가 보여준 전체적인 밝은 분위기를 더욱 선호하실 분도 있을 듯 하지만 원작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분위기의 교체는 좀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류목형과 천용덕이 이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될 죄인들을 억류해 놓은 마을'이 그냥 태양이 비치는 일반적인 마을로 그려진 것은 좀 불만스럽습니다.
(사실 이 유머 부분은 영화화 과정에 대부분 스태프처럼 참여한 윤태호 작가도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요소'라고 지적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525310)
결론적으로 영화 '이끼'는 160분을 즐기는 데 그리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고 평할 만 합니다. 하지만 원작을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의 깊이가 깊을 수록 실망이 커질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약 둘 다 안 보신 분이 있다면, 영화를 먼저 보시고 웹툰을 나중에 보실 것을 권장합니다. 아마도 그 쪽이, 두 작품을 최대한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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