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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 앤 데이'는 꽤 많이 본듯 한, 아주 익숙한 포맷의 영화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영화를 막상 보고 있으면 진정 혁신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줍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충격적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기술은 진화하고, 모든 스토리도 진화합니다. 영상도, 영상을 읽는 법도 진화합니다. 만약 15세기 사람에게 오늘날의 영화를 보여주면 그 스토리의 전환이나 진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나잇 앤 데이'는 '아바타'와 같은 기술의 진보와 영상의 충격을 준 작품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다이 하드'를 구닥다리 영화로 보이게 만들 만한 놀라운 스피드를 보여줬습니다.


간략한 줄거리: 아버지로부터 차량 정비 기술을 이어받은 독신녀 준(카메론 디아즈)은 어느날 공항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와 두번이나 부딪힌 끝에 같은 비행기에 탑니다. 자신을 로이라고 소개한 이 남자(톰 크루즈)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한순간 준은 이 남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로 훈련받은 위험한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준의 인생은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롤러코스터 속으로 말려들어갑니다.



흔히 '로맨틱 액션'이라고 불리는 영화들도 꽤 역사가 깁니다. 남녀 주인공이 합심해서 위기를 뚫고 나가는, 액션과 로맨스에 유머감각이 조화를 이룬 작품을 찾자면 대략 존 휴스턴 감독,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 주연의 '아프리카의 여왕'(1951)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1933년작 '킹콩'을 비롯해 유사성을 가진 영화들이 있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영화로는 이 정도라는 얘깁니다. (이 정도로 넘어가시고^^)

그리고는 수많은 유사 작품들이 명멸했지만, '아프리카의 여왕'의 진전을 잇는 영화라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마이클 더글러스, 캐슬린 터너 주연의 1984년작 '로맨싱 스톤(Romancing the stone)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액션과 절묘한 유머감각, 그리고 처음에는 뭔가 그리 썩 잘 맞지 않을 것 같던 남녀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진행까지 모두 A를 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죠.

이 큰 흐름에서 살짝 비껴난 작품으로는 토니 스코트의 '트루 로맨스'가 떠오릅니다. 다소 반영웅적인 주인공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순진한 창녀 패트리샤 아퀘트를 데리고 총알 바다 속을 헤쳐나가며 엘비스의 가르침에 따라 진짜 영웅으로 거듭나는 작품이었죠.


그렇지만, 이런 걸출한 선배들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잇 앤 데이'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영화 필름을 부분 부분 접어 넘기는 듯한 놀라운 진행의 속도감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준과 로이가 악당들에게 잡혀 있는 순간, 희미한 기억 속에서 준은 로이가 발목이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는 걸 봅니다. 다음 순간, 로이는 거꾸로 매달린 채 준에게 말합니다. "지금 상황이 안 좋아 보이겠지만... 내가 곧 구해줄테니 걱정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어디론가 달리고 있고, 다시 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어디론가 배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네. 그러니까 어떻게 잡혔고, 로이가 어떻게 고문을 당하고, 어떻게 밧줄을 풀며, 어떻게 탈출하고, 어떻게 추격을 따돌리는지 등은 싸그리 생략돼 있습니다(이렇게만 얘기하면 한 순간에 러시아에서 일본 아키타 현으로 주인공들을 이동시키는 '아이리스'의 신공을 상상하는 분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이리스'의 경우엔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이 경우엔 다들 웃음과 박수를 보냅니다).

관객의 입장에선 빨리감기 버튼을 눌러 가며 2시간짜리 영화를 1시간에 보는 듯한 경험일 수도 있죠. 단 그 리모콘을 쥐고 있는 건 관객이 아니라 감독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그리 작품 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내놓을 때마다 확실한 승부를 해 왔던 탄탄한 실력파입니다.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안젤리나 졸리에게 오스카상을 안겨준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였지만, 처음으로 감격한 것은 존 쿠색 주연의 걸작 스릴러 '아이덴티티'였습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심리 스릴러라는, 90년대의 수없이 많은 영화 가운데서 이 영화만큼 독창성으로 충격을 준 영화도 없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어 자니 캐쉬의 일대기를 다룬 '앙코르(Walk the line)', 그리고 정통 서부극의 귀환을 알린 '3:10 투 유마(네. 제목 짓는 데에는 별 재능이 없는 듯^^)'에 이르기까지 흥행 대박 작품은 아니더라도 관객이 신뢰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나잇 앤 데이'에서도 그는 일상적인 선택을 거부한 셈입니다. '특수공작원인 남자가 일반인 여자를 우연히 만나 둘의 인생이 겹쳐지는' 영화를 낭만적인 시선에서 그린다면 너무 뻔한 영화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상식적인 내용은 모두 생략한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죠. 이미 관객이 다른 영화에서 수없이 봤을 법한 장면들은, 스토리 진행상 반드시 필요하다 해도 그냥 생략해버리는 겁니다. '이미 관객은 그 장면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 결과 '나잇 앤 데이'는 놀라울만큼 슬림하고 잘 짜여진 영화가 됐습니다. 두 주인공이 너무 나이들었다는 안타까움이 있고, 왕년 할리우드 최고의 바디라인을 자랑했던 카메론 디아즈의 비키니 모습을 바라보는게 이젠 좀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영화의 흥미가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아마도 직접 찍었을 것이 분명한 톰 크루즈의 주차 액션 신 같은 장면은 크루즈가 성룡이 되어 가는게 아닌가 할 정도의 열정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번 'A특공대' 때에도 대단히 만족했지만, 냉정하게 얘기한다면 '나잇 앤 데이'를 먼저 보고 나서 'A특공대'를 본다면 만족도가 좀 떨어지는게 일반적일 듯 합니다. 'A특공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잇 앤 데이'의 힘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백 투더 퓨처'나 '매트릭스'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초강추작입니다.

(그런데 미국 시장에서 '나잇 앤 데이'는 개봉 첫주 흥행 수입 3위에 그쳤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토이스토리3'였다고 해도, 아담 샌들러의 '그로운 업'에도 뒤진 건 좀 망신이군요.^^ 톰 크루즈가 미국 시장에서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S. 제목의 의미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Knight(톰 크루즈의 정체와 관련 있는 단어입니다)가 night와 같은 발음이라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이라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많은 사람들이 Day와 카메론 디아즈의 관계를 밝혀 보려 했으나 모두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분의 가르침에 따르면 영어로 'night and day'는 우리말의 '물과 불'처럼 서로 전혀 공통점이 없는 상반된 성격을 가리키는 숙어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두 남녀의 처음 설정이 그랬다는 걸 생각하면 여기서 가져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S.2. 혹시 'A특공대' 보신 분들, 영화 속에 나오는 프랑스 여기자를 눈여겨 보신 분이 계시다면 그 분들을 위한 영상입니다. 참 이쪽의 선수층은 넓고도 깊군요.

http://vimeo.com/473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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