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가 생겨난 이후로 전쟁이라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무기의 위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실제 전장에 가서 전쟁을 '구경'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행위지만 안락한 극장에 앉아서, 화면 안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과 화염을 보며 주인공의 대활약에 넋을 잃는 건 지난 100년 간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평균 이상의 쾌감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화가 실제가 아니라 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그것도 대량 살육을 구경하면서 좋아한다는 건 어쩐지 좀...'이라는 반성의 시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결국 어느 시점 이후로, 전 세계의 모든 전쟁 영화는 기본적으로 '전쟁은 나쁘다'는 휴머니티를 기본으로 깔고 제작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관객들이 전쟁영화를 보는 가장 큰 동기는, 아무래도 가슴 끈끈한 휴머니티보다는 생사를 가르는 전장의 긴박감과 호쾌한 볼거리라는 사실이 변한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도 인간미 넘치는 주제보다는 몸서리처지는 오마하 해변 상륙작전이나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는 시가전 장면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일종의 이율배반이죠. 그리고 이런 모순은 예외 없이 '포화 속으로'에도 적용됩니다.
1950년 8월. 전쟁 6주만에 인민군은 남한의 2/3를 점거하고 부산을 향해 남하합니다. 미군의 참전에 한가닥 희망을 건 국군은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데 인민군의 최정예부대 하나가 전선을 이탈해 낙동강 북쪽 포항으로 향합니다. 야심만만한 박무랑(차승원)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격전지를 우회해 국군의 후방으로 침투, 허를 찌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강석대 대위(김승우)는 낙동강 전선의 핵심 방어구역으로 이동하면서 사단 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을 71명의 학도병에게 맡깁니다. 그중 오장범(T.O.P)은 단지 실전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중대장에 임명돼 지휘를 맡습니다. 하지만 살인미수로 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얼떨결에 학도병에 합류한 구갑조(권상우)는 영 오장범이 못마땅합니다.
이 영화는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서 시작한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편지는 실제 존재합니다. 영화 마지막 마지막에도 등장하지만, 1950년 8월11일, 실제로 포항여중을 방어하던 학도병 71명이 공산군과 전투를 벌여 그 지점을 약 12시간 동안 방어하는데 성공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그중 48명이 전사했고, 그중 서울 동성중 3학년에 다니다 학도병에 합류한 이우근 학생의 시신에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됩니다.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가 바로 영화 '포화속으로'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얼마 전 포항에는 이 편지의 내용을 담은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임권택감독의 '낙동강을 흐르는가'를 단체 관람으로 봤고 언젠가 한국 보이스카우트 회지에 연재되던 낙동강 전투 당시 학도병들에 대한 소설을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공간이 포항여중이라는 건 몰랐지만, 아무튼 그 소설은 학도병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꽤 상세히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강점은 대단히 높은 시각적 완성도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한동안 대규모 전쟁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 영화 시장에서 오랜만에 나온 작품답게 전투 장면에서 더 이상 싱겁거나 우습게 보이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액션에서 지나치게 과장된(사격훈련이라고는 단 1발밖에 해 보지 않은 학도병들의 상당히 놀라운 전투 실력, 수류탄조차도 쓰지 않고 죽어가는 인민군들, 군사훈련이라곤 받은 적이 없을텐데 미제와 소련제 무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학도병들 등) 장면을 지적할 만 하지만, 아무튼 전쟁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인 전투 장면에서 이 영화의 수준은 월드 클래스라고 인정할 만 합니다.
'포화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선배들을 가진 영화입니다. 실화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이런 다윗대 골리앗의 그림은 관객들에게 대단히 친숙합니다. 특히 그 골리앗의 역할을 차승원이라는 중량감 넘치는 배우가 맡았다는 건 대단한 강점으로 꼽힙니다. 박무랑 VS 오장범이라는, 양쪽 두 지휘관의 대립을 그려내는 데에선 이재한 감독의 연출이 충분히 힘을 발휘했다는 느낌입니다.
이밖에 오장범을 후원하는 국군 대위 역의 김승우, 또 오장범을 위협하는 천부적인 파이터 구갑조 역의 권상우까지 네 명의 남자 주연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돼 탄탄한 구도를 이룹니다. 어쨌든 이 영화의 강점은 이 네 주인공의 구도가 끝까지 흔들리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긴장감을 유지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넷 다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긴 하지만,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 못잖게 아쉬움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네 주인공 외의 인물들이 지나치게 글자 그대로 들러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건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본 단계에서는 분명 독자적인 캐릭터가 부여됐던 것 같은 학도병들이 그저 소품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더군요.
물론 다 찍어 놓은 장면들이 강도 높은 편집 과정에서 다 잘려 나갔을 수도 있고, 러닝타임을 줄이려는 시도 속에서 중요도가 덜한 인물들과 관련된 내용이 희생됐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대본 수정 과정에서 '쓸데 없는 부분'이 날아갔을 수도 있겠죠. 참고로 이 영화 대본의 최종 각색자는 제작사 대표인 정태원씨('아이리스'를 만든 분이죠)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선전되는 것처럼 '한국판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되려면 그 안에 뭔가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의 얼굴을 좀 더 부각시켜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네. 멋모르고 형을 따라 온 어린 동생의 에피소드 정도가 있었지만 이건 이야기 자체가 너무도 전형적이라("형님아,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 먹고 싶다" 같은 대사는 너무나 의무감에서 넣은 태가 역력합니다) 도대체 관객에게 감동이란 걸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입니다.
어쨌든 두시간짜리 영화를 딱 네 명의 주인공에게만 집중시켜버렸다는 건 이 영화의 한계를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사실 21세기의 시점에서 전쟁 영화란 상당히 위선적인 존재입니다. 전투신의 쾌감을 극대화해서 관객들의 마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한편, 동시에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어쨌든 희생자죠) 인간들의 면모에도 초점을 맞춰야 잘 만든 작품이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포화속으로'는 전자 부분을 수준급으로 이뤄낸 반면, 후자 부분에서는 기준점 이하입니다. 이 영화는 어깨에 '후까시'가 단단히 들어가 있는 영웅들의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뿐, 생전 처음 끌려온 전장에서 겁에 질려 있는 십대 소년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갱스터 무비였다면, 어깨에 힘을 빡 주고 아무 것도 겁나지 않는듯한 태도로 무표정하게 상대의 몸에 칼을 꽂아 넣는 소년들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아무 생각 없이 진짜 전쟁에 끌려나온 소년들의 이야기이고, 그러려면 그 소년들이 어떻게 전쟁 속으로 젖어드는가가 드러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옹호자들은 혹시 오장범 역의 TOP이 그 역할을 맡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장범은 '어쩔 수 없이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 훌륭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리더'의 캐릭터일 뿐입니다. 이 영화를 대표한다기엔 너무나 평면적이고 뻔한 캐릭터죠.
정리하면, 주변의 작은 얘기들을 다 쳐 내고 주인공들의 마초 스토리만 남겨 놓은 탓에 이 영화는 다양하고 작은 울림이 없는, 그냥 두 시간짜리 전쟁 블럭버스터, 혹은 두 시간짜리 전투 하일라이트 영화가 된 느낌입니다. 그 네 주인공의 이야기도 탄탄하긴 하지만 결국 어떤 감동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더 고민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복잡한 생각 하실 필요 없이, 두 시간 동안 다윗과 골리앗이 신나게 치고 받는, 제대로 된 전쟁 액션 영화를 원하시는 분들에겐 당연히 권할만 합니다. '포화속으로', 절대 못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뭘 좀 하다가 > 영화를 보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잇 앤 데이, 로맨틱 액션의 신기원 (53) | 2010.07.01 |
---|---|
A특공대, 지친 사람들을 위한 자양강장 드링크 (76) | 2010.06.25 |
'방자전', 정말 춘향을 모독했나? (32) | 2010.06.06 |
드래곤 길들이기, 빈 라덴과 친구되기? (30) | 2010.06.01 |
페르시아의 왕자, 생화학 무기가 왜 나와? (41) | 2010.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