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상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빈의 '아저씨' 상영관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만치 관객들의 기대가 컸다는 얘기였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난 첫번째 느낌은 '대체 한국영화계는 그동안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고 뭘 했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나가 작품상을 받을 영화가 아닙니다. 요리로 치자면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대단한 명품 음식이 아니지만, 싸고 맛있는 떡볶이 같은 영화입니다.
무슨 대단한 상상력이나 엄청난 기술의 힘, 혹은 거액의 제작비가 필요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를 등한히했던 영화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꽃미남 배우의 제대로 된 활용이란 면에서도 이 영화는 동료 감독들에게 귀감이 될만 합니다.
달동네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태식(원빈, 이름은 한참 나중에 나옵니다)의 유일한 친구는 매일 혼자서 노는 소미(김새론).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녀입니다.
하지만 마약중독자인 엄마가 섣부른 욕심을 내는 바람에 엄마와 소미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직간 암투에 뛰어든 경찰은 소미의 운명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황. 이제 소미를 구할 수 있는 건 '옆집 아저씨' 하나 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줄거리.
소미에게 다행인 건, 이 옆집 아저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설정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한 소녀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킬러의 이야기 '레옹'과,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온 프랑스의 인신매매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테이큰'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입니다(뭐 '맨 온 파이어'를 살짝 덮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대개 이런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특수부대원에 대한 판타지입니다. 80년대 한국에도 '사형집행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던 돈 펜들턴의 펄프 픽션 'Executioner' 시리즈는 아마도 이런 판타지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소설은 월남전 그린베레 출신인 맥 보란이 스스로 '1인 군대'를 선언하고 여동생을 망친 마피아에게 단신으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바로 이런 판타지에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 '사법 제도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과 불만', '여자나 어린이에 대한 보호'와 같이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잘 섞어 폭발력 강한 혼합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원칙에 민감한 법조계 관련 인사들은 법 질서에 근거하지 않은, 사사로운 정의 실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이 영화의 주제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들로서는 영화 속 원빈이 악당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면서 동정심보다는 쾌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다크 나이트'같은 속터지는 영웅 이야기보다 이런 영화를 100배 정도 선호하는 유전자가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료만 좋다고 바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만 이정범 감독의 세심한 솜씨는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것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좋은 배우들입니다.
악당 형제 역의 김희원과 김성오, 믿음직한 수사관 역의 김태훈(김태우의 동생이죠), 그리고 낯설지만 적역에 들어간 태국 배우 타나용 웡트라쿨까지 다양한 조역 배우들이 최상의 연기를 펼칩니다. 연기 못하는 아역 배우란 원래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김새론은 참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인물 배치는 현역 최고의 꽃미남 스타인 원빈이 케이크 꼭대기의 체리 역할을 유감없이 해낼 수 있게 하는 탄탄한 팀워크를 만들어 줍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원빈은 정확한 타깃 역할만 하면 되는 구성입니다. 그에게 미드필드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아 골문까지 드리블을 하거나 상대 수비를 유인하는 일, 혹은 수비에 가담하는 일 따위를 맡기지 않고 오직 골을 넣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대목에서 이정범 감독의 용병술은 빛을 발한다고 하겠습니다.
원빈의 연기력을 논하기에는 대사가 너무 적기도 하지만(녹음 때문인지, 발음 때문인지 중요한 대사가 그리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리한 요구 없이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한 것이 좋았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원빈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작품의 원빈보다 멋집니다. 역시 아무리 명품이라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법입니다. 이정범 감독과 만난 건 원빈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저씨'는 정당하게 느껴지는 폭력(물론 실제로 정당한 것과는 큰 거리가 있죠)과 적절한 유머("나, 옆집 아저씨야" "중문과, 너 오늘 알바비 날렸다" 등등), 속도감 넘치는 구성과 아동 대상 폭력에 대한 공분이 무르익은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불만 붙이면 바로 터질 수 있는 폭탄같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판타지 스타일의 마무리였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지만, 오히려 여성층은 현재의 결말에 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걸 보면 이 영화의 흥행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 듯 합니다.
분명 '아저씨'는 한국 영화사에 획을 그을 걸작형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영화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장인 이정범'의 발견이란 면에서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듯 합니다.
P.S. 특수부대원 판타지와 관련: '람보' 시리즈 1편 '퍼스트 블러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트라우트먼대령이 람보를 뒤쫓는 경찰들에게 람보가 얼마나 시골 경찰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아저씨'에서도 국정원 직원들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설명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라 좀 아쉬웠습니다. (혹 다 찍어 놓고 편집에서 삭제된 것이 아닐지...)
P.S.2. 이렇게 시작된 '아저씨'의 속편은 혹시 특수부대원 '아저씨'가 특수 업무 수행을 위해 투입되는 시리즈로 이어지게...되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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