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극장에 가서 표값을 볼 때마다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꽤 흔히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일단 극장에 걸리면 모두 같은 값입니다. 1억달러를 들여 찍은 영화건, 1억원을 들여 찍은 영화건 관객은 똑같은 돈을 내고 보게 됩니다.
이런 환경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싼 영화건 비싼 영화건 똑같은 가격이 매겨진다면 비싼 영화 쪽이 손해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영화가 8000원 받을 때, 대작 영화는 한 10000원이나 12000원 정도 받아서 더 빨리 자본 회수를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이런 시스템은 작은 영화 쪽에 훨씬 더 손해입니다.
티켓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관객의 입장에선 기왕이면 좀 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를 봐야 '본전을 찾는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실망스럽더라도 대규모 전투신이나 유명 스타의 소문난 베드신, 엄청난 CG등 '볼거리'라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인지상정이죠. 물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제작비와 만족도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만 말입니다.
'죽이고 싶은'은 누가 봐도 단촐한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단 두명. 전체 출연진을 다 합해 봐야 열명 남짓입니다. 배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두신을 제외하면 병원 주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온 몸에 마비가 진행중인 환자 김민호(천호진)는 옆자리에 새로 온 환자 박상업(유해진)을 보고 평생 잊지 못하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뇌손상인 박상업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김민호는 원수가 옆에 있건만 일어서서 박상업의 옆까지 걸어갈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박상업이 조금씩 기억을 회복해 가면서, 상황은 또다시 일변합니다.
누가 가해자인지를 가리는 게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기 때문에 흔히 이 영화는 스릴러로 분류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액션 스릴러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두 주인공이 모두 침대에 누워 있지만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아무래도 액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대체 어떻게 액션이 가능하다는 거냐?'는 질문이 떠오르겠지만, 이 영화를 보시면 그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액션이 펼쳐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실 겁니다.
워낙 등장인물이 적고 배경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영화는 상당히 연극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무대극이었다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굳이 영화 중에서 비교하자면 마이클 케인과 주드 로가 열연했던 영화 '추적(Sleuth)' 정도일까요. 두 남자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수트를 입고 우아하게 싸우는 '추적'과는 달리 '죽이고 싶은'의 두 남자는 환자복 차림으로 아주 추하게 진흙탕 싸움을 벌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싸움이 가능하냐는 대목에서 연출진의 아이디어가 빛납니다. 일단 방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다 사용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특공대원이나 무술 대가를 설명할 때 흔히 '온 몸이 무기'라고 하지만 이 영화의 두 배우에겐 '잡히는게 다 무기' 입니다. 여기서 웃음과 함께 비애가 느껴집니다.
(사실 이 영화의 액션 진을 보다 보면 영화 전체가 악몽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악몽 속에선 있는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죠. 등장인물들의 상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투지만 있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 그야말로 악몽인 셈이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야구 한국시리즈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도 두 남자는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시라고 하면 간단할 듯 합니다.
구성을 보면 다른 어떤 영화보다 배우의 몫이 클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두 배우는 자기 몫을 톡톡히 합니다. 천호진은 마초적인 외양에 비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배우로 꼽힙니다. 그래서 '악마를 보았다'의 형사반장 같은 역에는 미스캐스팅의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뭐 경찰의 무기력함을 상징하는 설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듯^^). 반면 '죽이고 싶은'에서는, 과거는 알수 없지만 어쩐지 연민을 자아내는 초로의 환자 역할에 매우 어울립니다.
물론 영화의 활력은 대부분 유해진에게서 나옵니다. 아마도 상당 부분 애들립일듯한 유해진의 코미디는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에 적절한 조미료로 작용합니다. 그러면서도, 희극적인 얼굴에서 순간 범죄자의 얼굴로 바뀌는 표정 연기는 이미 이 배우가 어느 정도 경지를 넘어 섰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이 영화 관계자와 잘 아는 사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을 상당히 초기부터 지켜 봤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롯데 자이언츠적인 요소(^^)가 정점 강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기도 했습니다(충분히 아실 수 있겠지만 감독이 부산 출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반전의 요소가 조금 더 불명확했던 상태가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 극장에 개봉되어 있는 영화는 그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이 말끔하게 의혹을 해소해 줍니다. 분명히 출연하긴 하되, 마지막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한 배우는 대체 출연료를 얼마나 받았을지, 저도 궁금합니다.^^
아무튼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대략 합의가 이뤄진 내용이 있습니다. '관건은 극장에까지 관객을 데려오는 거다. 설정과 규모를 보고 이 영화를 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일단 보고 나면 괜히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다'라는 겁니다. 이런 의견에는 대다수가 동의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화려한 캐스팅과 물량으로 관객을 유혹한 뒤 막상 보고 나면 '이 뭥미?'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와는 정 반대 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이 영화는 조원희/김상화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아무쪼록 이 두 사람이 이번 영화로 재능을 인정받아 좀 더 큰 예산의 영화를 만들어 선보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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