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동원에 대해 늘 나오는 얘기는 '단기전에서는 최강이었고 타자를 압도하는 기세가 일품이었지만 젊어서 너무 혹사당한 탓에 투수로서 단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환경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리 짧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대투수를 나름대로 조상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77~1981년의 시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고교야구였고, 성인야구에도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지만 후대에까지 전설로 불릴 만한 스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꼽자면 최동원, 장효조, 그리고 김재박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세 선수는 각자 자기 포지션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위세를 뿜어내고 있었죠.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교야구 사상 최강의 강타자들이었던 한양대의 이만수와 고려대의 김정수가 차세대 스타의 자리를 예약하고 있던, 그리고 선동렬과 박노준이 갓 고교야구 스타로 발돋움할 시점입니다.





77년 연세대에 입학한 직후부터 최동원은 곧바로 국내 최고 투수로 공인을 받게 됩니다. 고교야구 시절 한 경기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며 최고의 재목으로 꼽히기는 했지만, 당시 경남고의 전력은 최동원을 제외하면 큰 기대를 가질 수준이 아니었죠. 아무리 최동원이 잘 던져도 늘 이길 수 없는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세대는 달랐습니다. 고려대 입학 약속을 하루 아침에 뒤집고 최동원이 연세대에 입학한 77년은 바로 전력이 급상승하는 해였던 겁니다. 이미 박철순, 배경환 등 뛰어난 투수들이 있었던데다 실업야구의 강타자이자 국내 최고 포수 중 하나였던 박해종이 뒤늦게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합니다. 또 3년 선배로 '투수에서 포수까지 전 포지션을 뛸 수 있다'던 만능 선수 이광은과 그의 배재고 동기인 철완의 외야수 신언호가 있었고, 역시 강타자 김봉연도 이 해에 복학합니다. 최동원과 합께 입학한 강타자 양세종도 빼놓을 수 없죠.



(만약 최동원이 당시 고려대로 갔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 김윤환 우경하 등 강타자들과 또 한팀을 만들었겠지만 연세대만큼 강한 팀이 되지는 못했을 듯 합니다. '최동원의 연세대'를 이기기 위해 고려대는 이듬해부터 김경문 박종훈(78년)은 물론 79년에는 양상문 김호근 김정수 김남수라는, 당대 고교야구의 '빅4'를 모두 잡아오는 등 필사적인 추격을 펼칩니다....만, 최동원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전력의 뒷받침 속에서 최동원은 최고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힙니다. 그해 대학야구 4관왕에 오른 것은 물론, 곧바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자마자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을 해 버립니다. 물론 쿠바가 불참한 대회라는 것도 최동원의 행운 중 하나일 겁니다. 이 대표팀 마운드에서 최동원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가 승승장구,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몇가지 좋은 여건이 따랐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대로 경남고 졸업 직후 그를 포함해 전력이 최고조에 이른 연세대에 입학한 것. 그리고 둘째는 좋은 동년배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 대표팀입니다. 7명의 투수 중 3명이 실업, 4명이 대학 선수일 정도로 대학생의 비중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 설명합니다.)




고교시절부터 동갑내기 최동원-김시진-김용남은 최강의 트리오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77년, 최동원이 대학에 입학한 이후 김용남은 약간 빛을 잃고, 이들보다 2년 선배인 임호균을 합해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이 국가대표 마운드의 1,2,3번 투수가 됩니다.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팀이 이 최-김-임 트리오의 데뷔 무대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트리오는 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선동렬이라는 새로운 에이스가 등장할 때까지 한국 야구의 최고 투수 자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78년 고교야구에서도 양상문(좋은 투수라는 것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부산 출신에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제2의 최동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상윤, 장호연, 양일환 등 우수한 투수들이 대거 배출됐지만 이 세대 역시 최동원과 김시진을 넘어설 만한 대 투수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한국 야구의 주축으로 일찍 떠오르게 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 이들이 뛰어난 투수였기 때문이지만, 당시 실업야구의 조로현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대학 3~4년차, 졸업후 3~4년째까지가 전성기였고 그 뒤로는 아예 은퇴를 하거나 실력이 내리막을 걸었던 것이 이 시기에는 상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엘리트 선수의 코스는 대략 이렇습니다. 고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실업팀에 스카웃됩니다. 이후 2~3년간 선수로 뛰다가(대개 야간대학원 진학 등의 편법을 쓰는 거죠), 군에 입대합니다. 당시엔 성무(공군)와 경리단(육군)이 라이벌 관계로 실업야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대할 시점이면 서른 전후.

대단한 엘리트 선수가 아니면 은퇴를 해 일반 직원으로 변신하거나 - 은행 팀들이 실업야구의 주축일 때에는 많은 선수들이 은행원으로 변신했습니다 - 지도자가 되는게 대략의 길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은행 팀에 입단하면 '평생직장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대학에 스카웃될 수 있는 우수 선수들 가운데서도 고교 졸업 직후 은행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례를 보면 더 느낌이 옵니다. 김응용 감독이 한일은행 선수에서 은퇴해 감독이 된 건 만 31세 때인 1972년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69년 일찍 은퇴하기도 했지만 실업야구 기업은행 감독이 된게 만 30세 때인 1972년이죠. 코치도 아니고 감독이 서른살 언저리였다면 한국 성인야구가 얼마나 젊은 팀이었는지 아실만 할 겁니다.

(이때문에 프로 출범 직전인 1981년, 현역 선수였던 33세의 김우열이나 32세의 윤동균은 전 실업야구 리그를 통틀어 대단히 희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28세의 김봉연이 '대단한 노장' 대접을 받았으니 뭐 말할 것도 없죠.)


다시 77년으로 돌아가, 이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19세의 최동원이 한국 야구의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프로야구 출범이 선수들의 수명을 엄청나게 늘려 놓은 지금의 시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선수들은 체계적인 몸관리가 필요 없었던 겁니다.

어차피 야구는 '서른 넘으면 그만 두는 종목'이었고, 웨이트 트레이닝은 '쓸데 없는 근육을 만들어 배팅 스피드를 줄이는', 절대 하면 안되는 운동이었죠. 당시의 투수들이 어깨가 아파도 계속 던졌고, 지도자들이 그걸 그냥 용인했던 것은 '서른 넘으면 쓸 일도 없는 어깨'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던졌다가 오늘 또 던지고, 아프면 약 먹고 던지고 하는게 상식이던 시절입니다.

1978년 6월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저 위 기사를 보면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 대회에서 42이닝, 그것도 준결승-결승은 이틀동안 연장전 포함 27이닝을 혼자 던졌다는 얘깁니다. 요즘 프로야구의 '노예'라고 불리는 투수들은 여기에 비하면 왕족이죠.

하지만 기사 어디에서도 '혹사'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예 그런 개념이 없던 시대였던 겁니다. 최동원은 이런 70년대 야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투수가 1980년대 이후에 배출됐다면... 뭐 일찌감치 메이저리그에 가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군요.

아무튼 그 최동원은 바로 그 77년부터 미국 일본 프로야구의 주목을 받습니다. 오라는 데 많은 바쁘신 몸이 된 겁니다. 나중엔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다가 파기를 선언, 계약위반이니 뭐니 시끄럽기도 했고 스카우트 파문에 짜증이 난 최동원이 은퇴를 선언하는 등 진통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학 재학기간 중에는 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심이 쏟아졌죠. 재일교포가 구단주인 롯데 오리온즈(지바 롯데 마린스의 전신)로 가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가장 많았습니다.



거기다 79년에는 구타에 항의한 팀 이탈 사건도 벌어졌고, 이때 세상의 반응은 '아니 어떻게 최동원 같은 스타를 때릴 수가 있느냐'는 것과, '마운드에서도 건방져 보이더니 오죽하면 선배들한테 맞았겠느냐'는 것으로 양분됐습니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죠.

일단은 여기서 한번 자르겠습니다. 예상대로 길어지는군요.


댓글
  • 프로필사진 shccrom 쿠바가 불참한...거니다->아마도...겁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두근두근하게 하는 글을-!!!! 2011.09.18 11:14 신고
  • 프로필사진 아자哲民 30년만에 많이 변했네요.
    야구판도 우리나라도

    30살에 감독이라.
    평생직장 은행원도 감동적입니다.
    2011.09.18 23:12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지금도 평생직장 아닌가요? 2011.09.25 11:38 신고
  • 프로필사진 수원별 저의 10대 우상이었죠. 지난주 내내 아주 우울했더랬습니다. 대학시절의 최동원선수는 정말 멋있었는데....제가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의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는 가장 큰 이유가 최동원선수 때문이었답니다. 요즘의 롯데의 행태를 보면 점점 정이 떨어지긴하지만 그래도 롯데와 최동원선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죠. 다음편이 아주 궁금합니다. 2011.09.19 08:12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뭐 한두분이 아니죠.^^ 2011.09.25 11:38 신고
  • 프로필사진 제로드™ 야구의 인기는 최근들어서도 많이 올라갔는데, 최동원 선수가 에이스로 활약하던 시기와는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요. 아무튼 최고의 투수임에는 틀림없는데,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 인한 후유증이 최근의 일로 되돌아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의 발전상과도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단기간에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과 말이죠.

    앞으로 우리가 무엇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 지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2011.09.19 08:29 신고
  • 프로필사진 한없이투명에가까운블루 오랜만의 글 반갑습니다. 최동원 선수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겠죠...바쁘시더라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11.09.19 12:14 신고
  • 프로필사진 가을남자 문제를 하나 내도 되는지 모르겠읍니다. 야구깨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더군요.
    문제 : 포수가 투수의 공을 포구할때 포수의 오른손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야구 선수 출신들은 잘 알겠지만 일반인중에서는 한번도 아는사람을 못만났읍니다. 미국의 메이저나 일본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도 손의위치는 같읍니다.
    2011.09.19 12:22 신고
  • 프로필사진 가을남자 선동열과를 비교하자면 기록상으로는 선동열이 낳을수도 있겠지만 선동열 부터는 비교적 관리를 받는 시절이었고 최동원 시절은 무식하게 부려먹는 시절이었지요.
    연세대 신언호는 고등학교때부터 주로 포수로 활약을 했던것 같네요. 니카라과의슈퍼월드컵때는 또다른 전설이 있었지요. 김재박선수가 아마 공격부문 7관왕을 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84년 롯데 우승시 6,7차전을 완투했던게 당시로서는 영광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힘을 많이 못쓰게 된 원인이 아니었나 싶읍니다. 76년대통령배 때에는 결승전에서 대구상고의 김시진과 군산상고의 김용남의 투수전이 대단했었읍니다. 그대회에서 군산상고가 우승하고 나머지 대회는 최동원의 경남고가 전부 우승했던것 같읍니다.
    2011.09.19 12:23 신고
  • 프로필사진 독자 최동원 고교시절엔 시합 전 연습투구 100개 정도 던지고, 시합은 당근 완투하고, 시합 후에 몸 푼다고 50개 정도를 60미터 원투로 던졌다. 그런 공 하나 하나가 딴 투수의 전력투구보다 빨랐고, 요즘 프로야구 외야수 송구보다 더 빨래줄같이 깔려서 갔다. 그런 운동량을 시즌 내내 매일 유지했다. 2011.09.19 13:53 신고
  • 프로필사진 독자 가을남자님, 76년 경남고는 청룡기 하나밖에 우승 못했어요. 대통령배, 황금사자기, 화랑기에선 천적 신일에게 졌고, 봉황기에선 인호봉의 인천고에게 0-1로 졌고 전국체전에선 군산상 김종윤에게 역전타 맞아서 졌지요. 화랑기, 봉황기는 부산상고가 우승 2011.09.19 13:57 신고
  • 프로필사진 가을남자 제가 착각을 한것 같읍니다. 2011.09.20 12:26 신고
  • 프로필사진 후다닥 해태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던 1인으로서 최동원투수는 당시 꽤나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해태가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가 등판한 날이면
    아 혹시 오늘은 어려운게 아닐까 하는 그런 심정..
    저시절 야구 기록들 보면 선수인지 야구기계인지 모르겠는 그런 기록들이 많더군요
    이광은 선수 고등학교 대회때 기록 보고 말그대로 ㄷㄷㄷ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경기 출장이었나 뭐 그랬던거 같은데(투수로)
    선수를 그정도로 혹사시킨건 아무리 시대상황이 그랬어도
    좀 심한거 아닌가 싶더군요..
    P.S 80년대 초 군산상고 소속이던 조계현이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 나가서 무지 혹사 당했는데 그 이유가 당시 감독이었던 라이벌고등학교 감독의 술책이란 소문에 불끈 했던 기억이 나네요.. ^^;;;
    2011.09.19 15:25 신고
  • 프로필사진 lacookie 경북고의 구수갑 감독이셨던걸로 기억합니다만, 사실 혹사이기는 했었지만, 당시 조계현선수만큼 잘 던지는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게 이기려면 어쩔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2011.09.19 17:53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제 기억으론 고교야구 투수의 '혹사'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게 대통령배 5경기를 완투해 우승한 부산고 김종석 선수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2011.09.25 11:40 신고
  • 프로필사진 lacookie 저도 그때 고교야구와 대학야구를 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게 해준 송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최동원 선수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그야말로 80년대 야구의 아이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현세씨의 만화에서 마동탁의 모델이기도 했었던걸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좋아하는 선수이고, 교통사고로 요절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고려대의 김정수 선수가 최동원, 장효조, 김재박, 이만수, 선동렬 선수급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아마도, 송기자님의 애교심이 조금 작용한 것 아닌가요.
    2011.09.19 17:56 신고
  • 프로필사진 halen70 오.. 마동탁의 모델이 최동원님이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안경낀 모습이..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대로 그냥 끝이라면 참 너무 허망하니 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곳에선 더욱 행복하시길.. 2011.09.20 06:16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프로에 와선 분명히 그렇습니다만, 고교/대학시절의 김정수 선수를 봐선 누구도 레전드가 될 걸 의심하지 않았죠. 심재학이나 강혁과 비슷한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2011.09.25 11:42 신고
  • 프로필사진 lacookie 김정수 선수 정말 아까운 선수죠. 신일고 시절부터 투수에 타자에 정말 대단했었는데요. 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한일전에서 2:0으로 지고있는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서 1타점 2루타를 친 장면입니다. 어찌보면 한대화선수의 3점 홈런보다도 더 중요한 한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김정수 선수의 그 한방으로 그야말로 게임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기억합니다. 실력과 함께 개그기질까지 있던 선수라 더 좋아했었는데요. MBC 청룡시절 김동엽감독 밑에서 이주일씨 걸음을 흉내내던 것도 기억나는군요... 2011.09.25 23:43 신고
  • 프로필사진 skywalker 와 바로 70년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김한근, 정진호 (기사에서)등이 더욱 반갑게 느껴집니다.

    김응용 감독이 서른한살이라... 그 정도인줄은 몰랐지요.
    2011.09.20 14:38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 2011.09.25 11:42 신고
  • 프로필사진 테리 다음 편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른 올려주세요.. 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이었는데(초등학생 이었나?), 최동원 선수때문에 야구가 눈에 들어왔고, 야구 룰을 익혔고, 야구를 즐길줄 알게 되었죠. 어린 눈에도 연대 야구선수였던 금테안경 낀 최동원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면 무지 멋있게 보였습니다. 꽉찬듯 보였었죠.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야구 인생을 마감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경남고 레전드 매치에서 마지막 야구 유니폼을 입었을때, 만감이 교차했을 그의 마음이.. 그냥 이해됩니다. 그날 모자를 벗으며 고개숙여 팬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던 사진이 있던데.. 아마도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신거가 봅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2011.09.20 15:24 신고
  • 프로필사진 운치 롯데를 열렬히 응원하는 팬입니다.

    정말 두루 다방면으로 상식이 아주 풍부한 분이셨군요.

    간만에 야구에 관한 글을 써주셔서 잘 읽고 갑니당...
    2011.09.20 15:28 신고
  • 프로필사진 달봉이 저는 최동원하면...투구전 로진을 바르고 난 다음 스파이크위 스타킹을 한번씩 튕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 박한이 선수가 하는 루틴과 유사한 일종의 의식이었다고 생각되는데...전 최동원과 선동렬의 3차전 무승부를 비록 TV로나마 직접 볼 수 있었다는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야구선수들이 유명을 달리하면 왜이리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지...ㅠㅠ 2011.09.21 10:14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아마 한미대학야구였겠지만 그 동작때문에 혹시 윤활제나 기름을 몰래 바르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었죠.^^ 2011.09.25 11:43 신고
  • 프로필사진 사랑과평화 연대시절 최동원을 팼던 분도 유명한 분이시죠...불사조라고... 2011.09.22 12:56 신고
  • 프로필사진 민아 ㅋ^^b 2011.09.22 19:22 신고
  • 프로필사진 이상해씨 잘 봤어요 ㅎㅎㅎㅎㅎㅎㅎ 2011.11.16 20:18 신고
  • 프로필사진 와일드 잘못알고 계신게 몇가지 있네요 고대로 가려 했는데 고대에서 안받아줬습니다 안보이는 손 즉 검은권력이방해를 한거죠 2012.03.22 00:02 신고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