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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나긴 스페인 여행기의 마지막 편입니다. 지루하셨겠지만 이제 끝.]

 

기대 이상이었던 알카자르 덕분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한 터라 톨레도의 나머지 지역 구경을 위해선 조금 서둘러야 했다.

 

사실 톨레도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엘 그레코의 도시라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제 일단 엘 그레코는 뒷전. 우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찬탄했던 언덕 위의 톨레도 뷰를 보기 위해 서둘렀다.

 

 

사상 최악의 길찾기 코스인 톨레도 관광에서 그나마 뭔가 트인 공간을 보려면 조코도베르 광장으로 가야 한다. 사실 처음에는 '뭐? 이따위가 광장이라고?' 라는 생각이지만, 톨레도에서 30분만 여기저기로 걸어 보면 '아, 이게 광장이구나'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톨레도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미로다.

 

그래서 조코도베르 광장의 저 M 사인이 보일 때 매우 반가웠다.

 

 

건물을 찍을 때는 사진에 표현되지 않지만 참 아름다운 날씨였다.

 

 

잠시 대기하며 배룰 채우고, 드디어 미니열차 Zocotren 출발. 요금은 5유로 정도고 약 40분 가량 톨레도 주위를 돌며 구경을 시켜준다. 톨레도 내부에서도 저렇게 다니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톨레도 내부엔 저 정도의 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는 도로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다. 조코베르 광장을 벗어나면 도보 이동만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못 봤지만, 만약 그 좁은 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려 한다면 한참 욕을 먹을 듯.

 

 

그러니까 이런 길은 여기 말고는 없다고.

 

 

성벽을 따라 난 도로를 통해 성 밖으로 나가기 전. 톨레도 성은 주변 지역보다 표고가 높다.

 

 

 

톨레도는 대략 이렇게 팝콘 알갱이 같이 생겼다. 보시는 바와 같이 외곽의 70%를 타호 강이 감싸고 있는, 평지보다 살짝 높은 고지대에 도시가 건설된 것이다. 방어를 위한 최선의 거점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팁: 이 미니열차는 톨레도 시내를 빠져 나와 시계방향으로 도시외곽을 돈다. 그 말은 즉...

 

기차 안의 좌석은 한 줄에 약 4명씩 앉는 배치인데, 오른쪽 창가 쪽에 앉는 것이 가장 좋다는 뜻이 된다.

 

다들 저렇게 팔을 내놓고 촬영에 열중하게 된다. 그만치 풍광이 아름답다.

 

 

이렇게 해서 성 밖으로 나서면,

 

 

 

타호 강을 건넌다. 그림같다.

 

 

강 건너에서 시계방향으로 순환도도를 달리며 톨레도를 바라보게 된다. 오른쪽 자리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아까 가본 알카자르가 역시 도시의 상징답게 눈에 확 들어온다.

 

 

 

 

 

왕년에 쓰이던 다리와 정문.

 

이런 몇 군데의 포인트만 차단하면 톨레도는 그야말로 철벽 방어 태세가 된다.

 

 

 

남쪽으로 돌아 나오면 알카자르 말고도 볼만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

 

 

 

아이 이뻐.

 

 

 

잠시 후 차를 뷰포인트에 세워 준다.

 

강 건너편은 절벽. 만약 성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 강을 건너고, 다시 톨레도의 성벽을 넘어야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대구경 화약무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톨레도로 쳐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오른쪽의 알카자르와 비슷한 높이인 첨탑이 톨레도의 카테드랄이다.

 

성-속 권력의 경쟁 구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살짝 다른 각

 

 

이런 장난을 쳐 보고 싶게 하는 참 아름다운 광경이다.

 

 

저 올망졸망한 골목길.

 

잠시 후, 저 골목길에서 좌절하게 된다.

 

저 골목 안에 갇히면 길찾기의 제왕도 당황하게 된다. 바로 옆에 저만한 높이의 대성당이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혹시 이런 것도 침략자에 대비한 설계인 것일까.

 

 

도시의 서편. 아무튼,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라 그냥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게 된다.

 

 

 

이건 동쪽 다리. 그러니까 정면의 성문(북문)이 있고, 다리는 동편과 서편에 하나씩 있다.

 

 

북쪽 성문을 통해 다시 성 안으로.

 

이제부터 본격적인 도보 톨레도 관광이 시작된다.

 

 

 

아니 웬 롯데리아...

 

근데 잘 보면 t가 하나 없다. 저 로떼리아는 복권. lotto와 같은 어원이겠지?

 

 

지금까지는 그나마 넓은 길. 사실 저렇게 차가 서 있지만, 톨레도 주민들은 대체 이 골목으로 어떻게 차가 다녀? 싶은 곳까지 차를 끌고 돌아다니는 듯 싶다. 뭐 동네가 동네다 보니 적응한 것이겠지만.

 

 

 

그런데 예쁘다 예쁘다 하고 다니다 보니 길을 잃었다. 뭐 여행 다니면서 길 찾는 거야 평소 일도 아니라고 자부했던 터라 아무 걱정 없이 잘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여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위를 올려다 봐도 저렇게 자기 머리 위의 하늘만 보여.

 

 

밑을 봐도 표지판 하나 없고...

 

 

저렇게 빤히 보이는 건물도 막상 가다 보면 길이 없고 건물은 사라져 버린다. 골목길의 마술이다. 나중엔 무서워진다.

 

 

한참을 헤맨 뒤에 가까스로 도착한 카테드랄. 저 첨탑이 그 도시 밖에서도 잘 보이던 바로 그 첨탑인데, 막상 도시 안에선 저 첨탑이 보이질 않는다. 물어 물어 간신히 찾았다. 골목이 하도 복잡하니 현지인들도 마땅히 가르쳐 주기기 쉽지 않은 듯. 톨레도 가시는 분들은 농담 아니고, 나침반을 휴대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웅대한 카테드랄의 규모. 막상 대성당 앞에도 공터가 없으니 건물의 규모가 제대로 드러나는 사진은 감히 찍을 방법이 없다.

 

곧 내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엄청나게 크고 장대하다.

 

 

엘 그레코의 도시에 왔으니 역시 엘 그레코 앞에 서야 한다. 그가 1603년에 남긴 'Santo Doming'라는 작품.

 

 

 

이런 식으로 엘 그레코의 그림들이 전시된 공간을 살짝 지나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걸개 그림이 방문자를 반긴다. 아직 놀라면 안된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스페인 역사의 진짜 수도는 마드리드가 아니라 톨레도였다는 것은 카테드랄을 보면 안다.

 

 

이제 슬슬 익어가는 카테드랄의 기본 구조. 가운데에는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석이 있다.

 

 

 

 

 

규모는 세비야 카테드랄이 더 클 수 있으나, 장식의 화려함은 톨레도 카테드랄이 훨씬 앞서 있다.

 

 

 

 

황금색으로 뒤덮인 장식 속에 곳곳의 이런 목각이 눈길을 잡는다.

 

 

 

진정 요란한 주 제단.

 

 

 

 

역시 딱 보면 알 수 있는 엘 그레코의 손길.

 

 

뜻하지 않은 곳에서 카라밧지오의 그림을 만난다. 그가 그린 San Juan Bautista.

 

스페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San Juan Bautista는 앞서도 말했지만 Saint John the Baptist, 즉 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스페인식 표기다. 어디선가 '바우티스타 성인'이라는 기이한 번역도 본 것 같다.

 

 

 

더 화려한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아무튼 이 카테드랄의 주제는 '화려함'이다. 금색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남용되고 있다.

 

 

고개를 돌려 위쪽을 바라보면 채광창을 통해 왕실 예배당으로 햇살이 비친다. 신비롭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엘 그레코의 12사도 그림이 있다. 익숙한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누가 봐도 엘 그레코'.

 

 

 

그렇게 해서 카테드랄과 이별하는 길.

 

 

 

 

 

부속 건물은 고승들의 묘지로 쓰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카테드랄과 이별.

 

엘 그레코를 찾아 산토 도메 성당까지 가는 것이 당초의 목표였으나 불행히도 알카자르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잡아 먹고, 카테드랄을 찾느라 너무 헤매는 바람에 감히 산토 도메 성당을 찾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리 예매해 놓은 열차 시간이 달랑달랑.

 

어느 분이 톨레도는 관광객이 떠나간 오후 다섯시 이후가 진짜 끝장이라던데, 안 그래도 언젠가는 톨레도에서 하룻밤 자 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톨레도 역으로 복귀.

 

 

그래도 톨레도에 오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마사판(Mazapan)은 한 상자 샀다.

 

엄청나게 달다. 우유나 쓴 커피가 없으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

 

이렇게 해서 스페인에서의 열흘간이 지났다. 총정리편은 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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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해진 생활용어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셋이서 어울려 다니기만 해도 아주머니들이 "아유 셋이 아주 삼총사야"하고 말하곤 합니다. 미디어에서도 지겨울 정도로 널리 쓰입니다. 뭐든 세명이 두각을 보이거나 중요한 존재가 되면 무조건 삼총사로 묶입니다(듀오, 삼총사, 사인방, [독수리]오형제...로 나가는 공식은 정말 영원불멸일 듯).

 

그런데 정작 이 삼총사가 본래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뒤마의 소설 제목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그 내용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얼마 없더군요. 오히려 그 바로 뒤에 나오는 '사인방'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듯 합니다. 

 

'삼총사'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첫 단계는 가운데의 '총'입니다. 이 총이 쏘는 그 총이라는 걸 아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삼총사

[명사] 본래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제목. 이후 세 명이 잘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되어 전 세계적으로 활용중.

 

한자 표기 三銃士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전혀 놀라지 않겠지만, ‘가운데의 총이 탕 하고 쏘는 그 총 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원제인 ‘Les Trois mousquetaires’에 나오는 mousquetaire는 영어의 musketeer, 즉 화승총과 현대식 라이플의 중간 세대에 위치한 화약 무기 머스킷(musket)으로 무장한 근대식 기병을 말한다. ‘머스킷을 쓰는 병사를 압축해 번역하다 보니 총사(銃士)라는 한자어가 등장한 것이다.

 

삼총사에 나오는 프랑스 총사대는 1622년 루이 13세에 의해 국왕 직속부대로 창설됐다. 아버지 앙리 4(‘낭트 칙령을 발표해 프랑스 내에서 구교도와 신교도를 모두 정당한 신민으로 인정한 왕으로 유명하다. 영화 여왕 마고에서 마고 여왕의 남편)가 거느리고 있던 경기병(Carabinier)의 화력을 보강해 개편한 프랑스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다.

 

 

 

왕이 직속부대를 강화하자 당시의 실권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도 자신의 직속 경호대를 창설했다. 국왕에 비해 꿀릴 것이 없는 권력자인 만큼 자신의 경호대가 왕의 총사대에 비해 규모나 무장 등에서 손색이 없도록 구성한 모양이다. 당연히 두 부대 사이에는 치열한 라이벌 의식이 싹텄다. 소설 삼총사의 앞 부분, 즉 달타냥이 파리에 도착해 총사대와 경호대 사이의 분란에 뛰어드는 대목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소설 삼총사는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루이13세와 안느 왕비, 왕비의 연인이며 영국의 총리대신인 버킹엄 공작 존 빌리어스, 달타냥의 숙적인 추기경 리슐리외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은 모두 실제 역사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반면 달타냥과 삼총사는 실존 인물과 행적이 딱 일치하지는 않는다. 달타냥의 모델은 뒷날 달타냥 백작이 된 군인 샤를 드 바츠(1811~1873)라는 게 정설이다. 소설과는 달리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긴 하지만 궁정과 추기경 사이를 누비며 은밀한 활약을 펼쳤고, 뒷날 총사대의 대장에도 올라 실제 소설의 주인공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달타냥 백작의 일생에 감명을 받은 가티엥 드 쿠르틸 드 상드하(Gatien de Courtilz de Sandras)라는 동시대 작가가 달타냥 씨의 비망록이라는 기록(제목은 비망록이지만 내용은 무협지 수준의 과장이 넘쳐난다고 전한다)을 출판했고, 200년 뒤 사람인 뒤마는 이 기록을 모태로 자신의 대표작인 삼총사’ 시리즈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대성공을 거둔 이 책은 20세기 이후 수십차례 각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4년 한국에서는 원작의 배경을 조선 인조 때로 옮겨 놓은 드라마도 나왔다.

 

 

삼총사의 총이 그 총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왜 소설에선 칼싸움 밖에 안 나오냐고 반문하는데, 사실 총 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그런데 많은 분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삼총사의 후반 1/3 가량은 1627~28년에 걸쳐 벌어진 라 로셸 포위전에서 피아 5만의 군대가 대포와 총을 동원해 벌이는 대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총은 안 나오잖아?'하는 분들은 이 책의 앞 쪽 50페이지만 읽은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굉장히 옛날 같지만 1622년이면 이미 조선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에서 사수,살수와 함께 조총병인 포수를 양성하고 있던 시절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번역을 했다면 소설 제목 삼총사삼포수(三砲手)’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울러 달타냥과 삼총사가 등장하는 소설은 '삼총사' 한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 두고 싶다. 뒤마는 삼총사와 달타냥을 주인공으로 1844삼총사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 뒤 20년 후’, ‘브라젤론 자작(Le Vicomte de Bragelonne)’등 속편을 내놨다. 삼총사 시리즈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젤론 자작 3부가 바로 영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철가면 에 등장하는 철가면과 루이 14세 이야기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20년 후1995년 번역된 적이 있으나 절판되어 구해 볼 방법이 없고, ‘브라젤론 자작은 아예 출간된 적이 없다. 영화 철가면이 나왔을 때 뒤마 원작이라고 아는 척 했던 분들 가운데 실제로 책을 읽어 볼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삼총사도 수십가지 번역본이 나와 있으나 대부분 아동용 압축본인 게 한국의 출판 현실이다.

 

P.S. 30여년 전, 아동문학전집에 섞여 있던 삼총사는 국왕 폐하에게 충성하는 달타냥이 카르지나르라는 간신과 싸우는 이야기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 카르지나르가 악당의 이름이 아니고 추기경(Cardinal)’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일본어 중역본 시대의 웃픈 이야기.

 

 

 

 

 

 

무기에 대해 전문적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마어마한 밀덕들에게 당할 수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자세히 얘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삼총사 - Three Muskuteers 라는 말은 초콜릿 바 이름에까지 쓰일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단 저렇게 영어로 써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삼총사라는 말과 Musket이라는 무기를 연상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데 비해 '삼총사'라고 쓰면 그게 저 무기와 관련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기가 힘들죠.

 

흔히 arquebus를 '화승총'으로, rifle을 '(현대식)소총'으로 번역하는 반면 그 중간 단계인 musket에는 마땅히 붙일 만한 번역어가 없습니다(물론 아퀴부스와 라이플 사이에 머스킷 한 단계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사이에 수많은 다른 단계와 다른 이름의 무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머스킷 총'이라고 부릅니다.

 

머스킷은 아퀴부스의 약점인 짦은 사거리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입니다. 멀리 나가게 하려면 총신이 길고 견고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연히 무게가 더 나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초기의 머스킷은 대단히 무거워서 받침대가 없으면 혼자 사격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무기였지만, 차츰 개량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머스킷과 라이플의 차이는 단적으로 말해 총신에 강선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rifle 은 동사로는 '총신(bore)에 회오리 모양의 강선을 파다'라는 뜻입니다. 즉 머스킷의 총알이 그냥 총구에서 밀려 나오는 방식이었다면, 라이플로 쏜 총알은 총구에서부터 회전하면서 날아가기 때문에 더 빠르고 더 멀리 날아간다는 것이죠.

 

(여담이지만 어떤 사람은 rifle을 '장총'이라고 번역하고 어떤 사람은 '소총'이라고 번역합니다. 정 반대의 의미인 셈이죠. 물론 길이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이긴 합니다만, 어쩌다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지게 됐는지 참...^^)

 

 

 

 

 

 

아무튼 아쉬운 것은 번역의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삼총사'는 여러 번 읽어 봤지만 '20년 후'나 '브라젤론 자작'은 당연히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20년 후'만 해도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 서점에 서서 몇 줄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에 나오는 안느 왕비가 뭔가 위험에 처했을 때, 누군가 "왕년에 왕비님을 도와준 달타냥을 기억하십니까? 그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하자 왕비가 "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하는 반응을 보이는 대목에서 책을 덮었던 듯 합니다.

 

그러니까 '삼총사'에서 달타냥과 세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일을 성사시켰더니 20년 뒤 왕비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져 있다니. 등장인물에 대한 배신감이 확 일어서 책을 사 볼 마음이 없어졌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책도 구할 길이 없어져 버리고 나니, 그때 그 책을 샀어야 하는 건가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무튼 언젠가 '20년 후''브라젤론 자작(혹은 철가면)'이 번역되어 나오길 기다릴 뿐입니다.

 

 

앞서 말했듯 수십 수백개의 삼총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삼총사는 이 쪽.

 

 

 

혹은 그 원형인 이쪽.

 

 

 

 

아 이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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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밝은지 좀 됐군요.

 

어쨌든 더 늦기 전에 얼른 올립니다. 다행히 로스 로메로스 공연은 9일이군요.^

 

 

 

 

 

 

10만원으로 즐기는 10월의 문화가이드

 

매년 하반기의 낙이라 할 수 있는 추석 연휴가 칠천량 해전에 나간 원균의 함대처럼 속절없이 무너져내렸겠지? 남은 건 송편이랑 갈비찜 때문에 찐 살과 가족들 선물 산 카드값 밖에 없다는 건 잘 알겠어.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마. 10월엔 아직 개천절과 한글날이 충무공의 열 두 척처럼 남아 있으니까. 사즉필생!

 

10월의 공연 전시 리스트를 보다가 이건 봐야 해하는 느낌이 딱 오는 이벤트가 있었어. 바로 109일 예술의 전당 IBK 챔버 홀에서 열리는 로스 로메로스 내한 공연 이야. 세계적인 스패니시 기타리스트 셀레도니오 로메로가 창설한 로스 로메로스(눈치챘겠지만 로메로 가족이란 뜻이야)는 스패니스 기타의 쿼텟 스타일을 처음으로 만든 팀이지.

 

세월이 흘러 셀레도니오의 둘째 아들이며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의 페페 로메로가 리더 역할을 이어받았고 두 손자가 멤버로 들어와 팀이 3대째로 접어들었어. 가을 밤의 스패니시 기타 소리. 네 명의 기타 명인이 연주하는 알베니스의전설(Leyenda, 혹은 Austurias)’. 어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지?

 

물론 다 좋지만 문제는 가격. 11만원 짜리 R석과 7만원 짜리 S석밖에 없어. 고민되지만 이럴 때 한번 질러 보는 거지 뭐. IBK홀은 그리 크지 않아서 굳이 11만원짜리까지 욕심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 7만원 투척.

 

다음은 지난달 카르미나 부라나에 이은, ‘들으면 다 아는데 쉽게 연주되지 않는 곡시리즈 2탄이야. 1031일 예술의전당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연주돼. 네이버 지식인에 둥당둥당 둥당둥당 밤~ ~ ~ 빠밤으로 시작하는 클래식 곡 제목이 뭐죠?’ 라고만 물어봐도 누군가가 답을 알려 줄 만큼 유명한 곡이지. 하지만 실제 연주를 들어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아.

 

 

 

이번 연주는 스타 지휘자 임헌정이 올 연초 코리아심포니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뒤 내놓은 기획이야. R석이 5만원인데다, 1층 사이드와 2층 대부분 좌석이 2만원 짜리 A석이라는 건 감동적인 보너스지. 단 곡의 심도있는 이해를 위해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를 꼭 읽고 오라고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이 곡을 유명하게 만든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도 끝까지 보려면 힘들 수도 있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음악만 들으러 와.

 

, 다음은 리움 미술관 10주년 기념 전시 교감 이야. 이미 821일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인데다 워낙 유명하지만 그래도 1만원에 이만한 효용의 전시를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제목이 교감 - Beyond and Between’ 이듯 우리 고전 미술 작품과 국내외 현대 미술 작품 간의 대화를 상징하는 전시야. 혹시 가 봤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8월의 추천 전시였던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의백자예찬과 비슷한 컨셉트의 전시라고 볼 수 있겠네. 물론 리움의 소장품이 등장한다면 더 말 할 게 없겠지. 1221일까지니까 여유있게 들러 봐.

 

이달의 책. 전 세계적으로 사 놓고 안 읽는 책 1라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추천해서 여러분도 그 대열에 동참하게 하거나(책값만 3만원…), 저 책을 읽은 척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이드로 알려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 읽기를 추천할 생각은 없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도 너무 뻔한 선택이라 탈락. 뭐 이미 보신 분도 많을테고.

 

 

 

그래서 고른 이달의 책은 조시 베이젤의 비트 더 리퍼. 뭐 이 코너를 지켜보신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어쨌든 모토는 재미있는 책이야. 그리고 대략 취향도 파악됐을 거야. 깜찍발랄한 소설 참 좋아해.

 

비트 더 리퍼는 병원 인턴 피터의 일상에서 시작해. 그런데 사실 이 피터는 평범한 의대생이 아니고 전직 마피아의 킬러였어. 그것도 천재적인 킬러. 그런데 과거를 씻고 FBI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한 거야. 킬러 출신 인턴, 멋지지 않아?

 

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예전에 알던 마피아 멤버 하나가 환자로 병원에 나타난 거야. 그리고 요구하지. “내가 죽으면 (너의 비밀을 폭로할 테니) 너도 죽는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도 나를 살려라.”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2011년 출간된 책이라 가격도 싸. 7000원대면 살 수 있어. 그러니 늘 당부하지만, 신작에 목 매지 말라고.

 

그럼 이달은 여기까지. 11월에 만나.

 

로스 로메로스 내한공연                                         S 7만원

코리아 심포니,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 2만원

리움 미술관 10주년 기념 전시 교감                              1만원

조시 베이젤, ‘비트 더 리퍼                                     7000

합계                                                            107000

 

 

 

자, 영상 학습 시간.

 

영화에 좀 관심있는 분이라면 직접 보지는 않았어도 어디선가 들어 보셨을 유명한 장면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오프닝 장면이죠.

 

그냥 별 할일 없이 자빠져 뒹굴고 있던 원생 인류(외견상 침팬지와 별 차이가 없죠^^)들이 어느날 외계에서 날아온 모노리스(검은 색의 비석)로 부터 영감을 얻어 동물과 선을 긋고 진화의 방향을 선택하는 그 장면이죠. 모노리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한 유인원이 동물의 다리뼈를 도구로 이용하는 법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팔과 다리 이외의 도구를 확장된 몸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인류 문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큐브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무 길어서 다 못 보시겠다는 분들은 5분25초 쯤부터 보시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어떻게 사용됐는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번의 '까르미나 부라나'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한번 영화를 통해 음악의 위용이 드러난 다음에는 엄청난 남용의 시기가 찾아오고, 그러다 보면 음악이 실제 갖고 있는 의미는 저 뒷전으로 사라집니다.

 

패션쇼 오프닝이나 지하철 상가 개장 광고에서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어 오신 분들이 한번 이 기회에 진짜 음악을 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페페 로메로 옹의 연주. '스패니시 기타 연주곡' 이라면 누구라도 딱 머리에 떠올릴 알베니스의 '전설'.

 

 

 

 

한곡 더?

 

 

 

 

Los Romero: 50th Anniversary Concert at 92Y - GIMÉNEZ: El baile de Luis Alonso (1896)

 

영상에도 표시되듯 2009년 3월21일 연주입니다.

 

날씨 참 기가 막히게 좋군요. 좋은 10월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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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개는 '투쟁'이라는 말이 뒤에 붙어야 한 단어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 눈에 띄는 '단식원'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한가하거나, 뭔가 숭고한 대의를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후자의 이유로 단식을 하는 사람들에겐 그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연이 있을테지만요.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단식이라는 위협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좀 남용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하는 쪽이나, 억압받는 쪽이나, 느낌표와 과장법이 지배하던 시대의 유산에서 아직도 세상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분명히 '단식'이라는 것은, 시도하는 사람이 "나는 지금 내 목숨을 걸고 나의 주장의 관철시키려 하고 있으며, 이 의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는, 절박하고도 비상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일 때 진실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정도의 절실한 문제가 아닐 때 과연 이런 투쟁의 방식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김영오씨의 단식투쟁이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듯 합니다. 너무 흔해진 줄 알았던 '단식투쟁'의 의미가 이렇게 절박하고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으니까요.

 

 

 

 

단식 [명사] 斷食. 스스로 음식 섭취를 중단함.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다고 단식이 되지는 않는다. 일단 주체적인 의지를 갖고 음식 섭취를 중단한다는 점에서 단식은 의학적 목적으로 음식 섭취를 막는 금식(禁食)과 구별된다. 아울러 우리 말의 단식에는 영어의 fasting hunger strike,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영어의 fast빠른이란 의미 외에 단식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은 아침식사를 가리키는단어 ‘breakfast’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밤 사이 잠을 자느라 어쩔 수 없이 했던 단식(fast)을 깨는(break) 것이 바로 아침식사라는 얘기다.

 

엄밀히 말해 단식 투쟁으로 번역할 수 있는 hunger strike는 인류사 전체를 돌이켜 볼 때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행동양식이 아니다. 20세기 이전 인류 문명의 대부분 지역에서, 절대 다수의 피지배 계층에게 있어 기아(飢餓)는 형벌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식량의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던 시대에 만약 별 지명도 없는 인물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굶어 죽겠다고 적을 위협했다면 그 적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 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단식을 감행하는 사람이 평소 큰 명망과 존경을 얻고 있는 사람이라면 달랐을 수도 있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의에 반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단식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통 탓인지 영국의 통치에 맞선 아일랜드 독립투사들 중 많은 수가 옥중에서 단식 투쟁으로 숨졌다. 1920년 무려 94일간의 단식으로 기네스북 기록을 갖게 된 피터 크로울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131, 보비 샌즈를 비롯한 10명의 IRA(아일랜드 공화군) 전사들은 자신들을 전쟁 포로 아닌 일반 죄수로 취급하는 영국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며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순차 단식에 들어갔다. 첫 희생자인 샌즈는 66일만인 55일 목숨을 잃었고, 다른 9명도 차례로 소금과 물만을 섭취하며 버티다 차례로 숨져 갔다 마지막 주자 마이클 디바인이 숨진 것은 820일이었다.

 

이런 일이 빚어지는 동안 영국 미디어의 헤드라인은 로열 웨딩의 화사한 뉴스로 도배되고 있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그해 224일 약혼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커플은 729일 런던 세인트폴 예배당에서 전설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테러리스트라면 테러리스트지만, 열명의 젊은이가 차가운 감방에서 수개월에 걸쳐 스스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꽃가루를 뿌리는 초대형 결혼 이벤트가 펼쳐졌으니, IRA와 동조자들의 입장에선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에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이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철의 여인마거릿 대처의 행정부다웠다.

 

단식 투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도 끔찍하지만, 더 심각한 폭력은 단식을 강제로 중단시키기 위한 강제급식(force-feeding)이다. 얼핏 생각하면 단식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겐 강제로라도 음식을 먹여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인도적일 것 같지만, 세계 의료협회(WMA) 1975년 전 세계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막기 위한 도쿄 선언(Declaration of Tokyo)’ 7항에서 모든 의사들은 일체의 강제급식 행위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단식 투쟁은 구금상태에 놓인 사람의 선택이며, 이를 강제로 막는 것이야말로 인권에 반하는 일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불행히도 단식이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가장 동화 같은 이야기는 1948, 마하트마 간디가 펼친 마지막 단식이 아닐까 싶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을 쟁취한 인도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반목으로 심각한 내전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간디는 1948 113, 모든 계파가 유혈사태를 멈추고 평화에 동참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식민주의와 맞서 평생 비폭력의 길을 걸으며 수시로 단식 투쟁을 감행한 간디였지만 이미 79. 단식을 한다면 며칠 버티지 못할 것임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5일만인 118, 인도 전역에서 총성이 멎었고 100여명의 각 종교 계파 지도자들이 간디의 처소 앞에 집결해 제발 단식을 중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12일 뒤인 130일 간디가 권총으로 저격당해 숨지며 비극으로 끝났다. 범인은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드세로 밝혀졌다. 그의 총알은 인간애에 대한 호소, 비폭력 수단에 의한 투쟁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역시 산산조각을 냈다. (끝)

 

 

인도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국이 됩니다만, 종교로 인한 분리는 피하지 못합니다. 힌두교가 절대 다수인 인도를 남긴 채 1947년 이슬람교 우세 지역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독립했고, 역시 불교 우세 지역인 스리랑카도 다른 나라가 됐지요. 아무튼 이런 분리 이후에도 온 나라가 심각한 종교 분쟁에 휘말려 죽고 죽이는 피바람이 일 때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간디는 원초적인 형태의 단식에 들어갑니다.

 

 

 

 

간디의 일생을 다룬 5시간 짜리 다큐멘터리. 4시간48분부터 이 최후의 단식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79세의 나이에 단식에 들어간 겁니다.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1982년작 '간디'의 후반부.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단식 5일째인 간디에게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들이 찾아와 더 이상의 유혈 사태가 없을 것을 약속하며 단식을 중단해 달라고 사정하는 장면.

 

무슬림들에게 자식을 잃은 복수로 자신도 무슬림의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자신은 지옥에 갈 거라는 힌두 전사에게 간디는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잃은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부모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워라. 단 그 아이는 무슬림의 아이여야 하고, 무슬림으로 길러져야 한다."

 

 

간디의 만년 이야기가 영화적인 과장이 아닌, 실제 역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1948년의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시절엔 저런 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지막으로 윗글에서 언급한 도쿄 선언의 제 7조 전문.

 

Where a prisoner refuses nourishment and is considered by the physician as capable of forming an unimpaired and rational judgment concerning the consequences of such a voluntary refusal of nourishment, he or she shall not be fed artificially. The decision as to the capacity of the prisoner to form such a judgment should be confirmed by at least one other independent physician. The consequences of the refusal of nourishment shall be explained by the physician to the prisoner.

 

수감자가 자의로 단식에 들어갔을 때, 의사는 그 수감자의 판단을 무시하고 비자발적인 강제급식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물론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맞지 않도록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환자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죠).

 

누군가 단식투쟁을 하고 있을 때, '인도적인 결정에서' 죽지 않게 보살펴 주자는 이유가 아니라, 그 수감자가 죽어서 영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강제 급식(force-feeding)'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단식 투쟁과 거의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강제 급식은 그 자체가 고문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도쿄 선언은 '양심적인 의료인이라면' 거기 동참하지 말라고 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강제급식은 유명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롯해 수많은 감옥에서 현재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보비 샌즈의 투쟁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헝거'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울러 주변에서 '진짜 목숨을 걸지 않은' 단식을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한번쫌 보시라고 권해도 좋을 듯.

 

문득 근 30여년 전. "단식할 때 정말 아무 것도 안 먹니?" "물은 먹죠." "그것밖에 안 먹어?" "가끔 사탕 정도는 먹죠." "또. 그게 다야?" "저녁엔 초콜렛 정도는 먹어야 해요. 그래야 안 쓰러져요." 이런 바보같은 대화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잘 나가고 있는, 상대방은 혹시 이 대화를 기억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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