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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은 그동안 사극 드라마든 영화든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물론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동안 임해군 역을 맡은 배우들만 해도 정성모(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임정하(조선왕조 오백년, 회천문), 임혁주(서궁), 김유석(왕의 여자), 그리고 이번 '불의 여신 정이'의 이광수까지 꽤 많습니다. 한마디로 영화 '광해'를 제외하고 광해군이 나오는 작품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임해군의 역할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광해군만 해도 1980~90년대 이후에야 '똑똑했는데 제대로 안 풀린 비운의 군주'로 관심의 대상이 됐던 만큼, '광해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형'에게까지 돌아갈 관심이 예전에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조금 공부를 해 보니, 물론 '광해군이라는 똑똑한 동생'의 존재가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겠지만 임해군에게는 왕이 될 수 없었던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임해군 (1574-1609) 1

 

선조의 장남이며 광해군의 형 임해군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괴롭혀 조선 백성들의 손으로 왜군에게 포로로 넘겨졌다는 것, 또 하나는 광해군 때 명나라에서 왜 장남을 두고 차남이 왕이 되었는가 대한 엄격한 추궁이 있었다는 것 정도다.

 

두 가지 모두 를 묻는다면 한국사에서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임금이 되기에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역시 왕의 장남이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소현세자나 사도세자의 경우에도 공식 기록은 임금 감이 아니었다는 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가 아닌 다른 사서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능력도 있고 뭔가 바꿔 보려는 의욕을 갖고 있던 왕자들이, 권신들의 음모에 휘말린 것이란 의심이 뭉클뭉클 일어난다. 

 

반면 임해군은 거의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정사든 야사든 성품이 못되고 포악해서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서술이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 얄미운 행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임해군(이광수)은 실제 기록에 비하면 많이 점잖은 편이다.

 

선조는 아들만 14형제를 두었는데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서 장남 임해군(1572년생), 차남 광해군(1575년생)을 얻었다. 14형제 중 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1606년생인 막내 영창대군 뿐이었다.

 

물론 영창대군이 왕위 계승의 경쟁자로 고려되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이야기고, 일단 임해-광해 형제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배다른 형제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들을 낳은 공빈이 일찍 죽고, 그 뒤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인빈이 의안군(1577년생)부터 내리 4형제를 낳았기에 더욱 그랬다.

(요즘 '불의 여신 정이'에 나오는 신성군은 의안군의 동생. 인빈의 둘째 아들.)

  

 

그런 가운데서도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15일만인 428, 대신들의 뜻에 따라 17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혹시 왕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 후사를 미리 정해야 다소나마 민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피난길을 떠나기 직전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대신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없었다. 그만치 광해군은 임해군에 비해, 그리고 다른 왕자들에 비해 선조의 총애나 왕으로서의 자질 면에서 돋보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공사견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선조)이 여러 왕자에게 묻기를, ‘반찬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 하니, 광해군이 소금이라 했다. 이유를 물으니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임금이 또 묻기를,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니 광해가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했다. 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평안도로, 임해군은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향하게 되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모아 적에게 대항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임해군은 이런 의도에 적임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북상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에 쫓긴 임해군 일행은 함경북도 회령으로 달아나지만 여기서도 백성을 함부로 대하다 오히려 반란을 맞이한다. 난의 주역인 국경인 등은 두 왕자를 묶어 왜군에게 넘겼다. 의병장 정경운은 임진왜란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임해군의 체포를 출이반이(出爾反爾)’라며 한탄하고 있다. 이는 자업자득이라는 뜻.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겠느냐는 얘기다.

 

(함경도를 장악한 가토의 병력은 평안도로 넘어가 선조가 행재소를 차려 놓고 있던 의주를 공격해야 했겠지만 뜻하지 않게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여진족. 조선의 견제에서 벗어난 북동지방의 여진족들은 두만강 일대를 장악하려는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이 함흥 언저리에서 머물게 만듭니다.

이어 정문부 - 아래 영정의 주인공 - 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 등의 모반자들을 잡아 죽이고 가토 군을 무찔러(북관대첩) 함경도 일대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임해군 일행은 가토 군에 의해 이미 남쪽으로 옮겨진 뒤.

뒷날 임해군은 무사히 석방되긴 합니다만, 이후 평화회담이 오가던 시절 가토는 자기 명의로 임해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포로로 있던 임해군과 가토는 비교적 관계가 원만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정에선 '누가 대충 예의만 갖추고 알아서 회신해라' 정도의 반응.)

 

 

 

반면 광해군은 선조 일행과 갈라선 뒤 영변, 정주 일대를 돌며 백성과 군사들을 위로했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고, 심지어 신하들 중에는 대놓고 선조에게 아예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권고를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자책감에 빠진 선조는 실제로 양위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하지만 1593, 명나라는 장남을 두고 둘째를 세자로 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며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이견을 제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그렇다고 심병(心病, 마음의 병, 즉 정신병)이 있는 임해군을 세자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답답해 했다. 광해군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임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임해군에 대한 사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런 반응은 당연해 보인다. 포악하다, 탐욕스럽다,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갈취했다, 왜군이 한양으로 몰려왔을 때 백성들이 궁성을 노략질할 때에도 임해군의 집에 재물이 많다 하여 표적이 됐다(유성룡의 서애집에는 반면 광해군의 집에는 아무도 불을 지르지 않아 민심이 광해군에게 있음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등등이다.

 

임진왜란 후에는 전 경기도관찰사 유희서의 첩을 빼앗기 위해 유희서를 청부 살인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선조의 적극적인 옹호로 더 이상 파헤쳐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소시오패스의 기록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

 

 

 

 

유희서 사건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계묘년(1603) 6월에 전 참판 유희서와 전 부사 황극중(黃克中)이 암살되었다.
희서는 고 정승 전(㙉)의 아들로서 본래 행검(行檢)이 없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이 유의 첩이 미색임을 듣고 비밀리 불러들인 후 도적을 시켜 살해 하였다. 《일월록》


○ 도적이 참판 유희서를 암살하였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여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이 이 옥사를 철저히 수사하던 중 죄를 얻어 귀양가고 희서의 아들도 또한 장을 맞고 귀양가니, 영의정 이덕형이 상소하여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드디어 파면 당하였다.

이항복이 그 후임 갑진 에 임명되자 사양하기를, “양걸이 귀양간 것을 신도 실상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였는데 다만 미처 말을 못했을 뿐이니, 덕형은 바로 이미 말한 신(臣)이요 신은 바로 미처 말하지 못한 덕형입니다. 죄가 비록 드러나지 않았으나 신이 어찌 차마 본 정을 숨기겠습니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더욱 심각합니다. 유희서가 죽은 뒤 선조는 "서울에서 하루 거리인 포천에서 30여명의 도둑떼가 고관을 죽였으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영을 내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캐면 캘수록 흉흉한 구석이 나타납니다. 일단 설수와 김춘배라는 용의자가 잡히지만 이들을 포함해 관련자가 잡혀 오면 잡혀 올 때마다 감옥 속에서 자백할 틈도 없어 죽어 나갑니다. 유희서의 아들 유일, 그리고 포도대장 변양걸은 이 사건과 임해군의 관계를 폭로했지만 오히려 '증거도 없이 왕자를 모함했다'며 역공을 당해 귀양 가는 몸이 됩니다.

 

진상은 유희서의 첩 애생을 임해군이 탐내면서 벌어진 치정사건. 임해군이 은근히 애생을 달라 청을 해 보지만 유희서 또한 나라 법을 어기면서 차지한 애생을 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생은 본래 관서의 관비라 유희서가 마음대로 데려올 수 없는 몸이었는데 나름 세도가인 유희서가 임의로 자기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임해군이 도적떼를 가장한 수하들을 보내 애생을 빼앗아 오게 한 것인데, 유희서가 기죽지 않고 맞서다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

 

수많은 관련자가 죽어 나가는 바람에 증인이 없는 상태가 되어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살아남은 박삼석 한 사람은 처음 체포됐을 때 임해군이 배후에 있다고 증언했으나, 막상 의금부에 와서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증언하고, 결국 이 사건은 선조 하대의 국가 기강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맙니다.

 

아무튼 왕자가 무장한 건달 패거리를 거느리고, 그 건달이 참판급 관리를 죽여도 유야무야되는 이런 사건은 조선시대의 다른 왕 때에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듭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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