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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를 달려온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립니다.

 

조선 인조 시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이라는 대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욕의 역사라는 점 때문에 이 시대를 그린 드라마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특히나 병자호란 이후 인조 말년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음을 맞는 과정은 사극 소재로 인기있는 내용은 아니었죠.

 

'꽃들의 전쟁'은 그 시대를 주도했던 악녀 소용 조씨(드라마가 끝날 무렵엔 귀인 조씨)와 간신 김자점을 조명하는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숙종 시대의 장희빈과 인현왕후 이야기가 남인과 서인의 정국 변화에 따른 부침으로 오르락 내리락이 있는 이야기인 반면, 귀인 조씨는 너무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 드라마로는 흥미가 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숨가쁘게 달려온 50회는 여느 사극에 비해 정하연 작가 특유의 현실적 역사관이 반영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갔습니다. 여기에 젊은 노종찬 PD의 속도감 있는 연출도 새로운 사극의 개척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꽃들의 전쟁'은 인조(이덕화), 김자점(정성모), 귀인 조씨-얌전이(김현주)의 죽음으로 한 시대의 끝을 맺고, 새로운 임금 효종(김주영)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태어나 형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시대.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효종 이호(孝宗 李淏, 1619~1659)

 

TV에서 효종(봉림대군)의 일대기를 그린 최초의 드라마는 1981 KBS 사극 대명이다. 한국 방송이 본격적인 컬러TV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린 대하 사극 대명은 효종이 병자호란의 비극을 딛고 야침차게 북벌을 준비하는 내용을 그렸다. 효종 역을 맡은 배우 김흥기의 열연도 화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효종=북벌이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와 관련해 효종이 이완 대장과 함께 기해년 단옷날 대군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지만, 왕이 단오 전날인 음력 54일 급사하는 바람에 대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때문에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북벌의 성패 여부를 떠나 효종의 치세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1649년 왕위에 오른 효종은 두 가지의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아버지 인조를 왕위에 올려 놓은 반정 공신 세력이 건재하다는 것, 둘째는 형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우선 효종은 아버지의 총희인 희빈 조씨와 김자점의 연합 세력부터 손을 댔다. 권신 김자점은 잇단 탄핵으로 귀양을 간 뒤 아들과 손자가 모반을 계획했다는 고변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하지만 이것이 두번째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김자점을 역적으로 처단했으면 아버지 인조의 노염을 사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빈 강씨는 복권을 시켜야 하는 것이 순리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빈의 죽음은 김자점의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강빈에 대해 말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못을 박았다. 눈치 없이 강빈의 복권을 주장했던 황해감사 김홍욱은 장살(杖殺)을 면치 못했다.

 

이런 기록은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강빈을 살려내기 위해 왕위를 던질 각오까지 하는 의로운 봉림대군(김주영)의 모습과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효종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자신이 조카가 올라야 할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김홍욱의 죄에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효종과 강빈의 관계는 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효종의 대의가 '간신 김자점' 등 난신적자를 처단하는 데 있었다면, 당연히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강씨의 원을 풀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자신의 정통성이 흔들립니다. 게다가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막내 석견은 살아있는 상황. 만약 강빈이 복권되면 왕위의 정통성은 석견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미 왕위에 오른 자신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아들(뒷날의 현종)은 어찌 될지 모르는 국면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현종의 안전을 위해 불쌍한 석견을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죽은 어머니의 신원 때문에 살아있는 아들을 해쳐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대의명분이 뭐건 냉정하게 생각할 때 이거야말로 부질없는 짓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홍욱의 죽음을 놓고도 당시 그 많은 사대부들이 임금을 탓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 효종이 실제로 강빈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근거도 있습니다. 아래 글에 1659년 3월11일 효종과 송시열의 대화 내용을 인용했는데 이날의 대화 속에는 강빈과 김홍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열이 아뢰기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지금까지 인심이 평정되지 않고 있는데 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경과 함께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틈이 없어 하지 못했다. 강빈의 악행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일단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금수라도 있게 마련이다. 소현(昭顯, 즉 소현세자)의 상을 당했을 때 대조(大朝, 인조를 말함)께서 애통해 하면서 그를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이다.’ 하셨는데, 강빈이 발악하기를 ‘아무 달 이후에는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 후 자식을 낳고서는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고자 즉시 스스로 죽여서 감추었다. 그 성질이 이와 같으니 역모한 것이 괴이할 게 뭐 있는가. 또 역모한 형상은 안에서나 알 뿐이지 밖의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그 일이 낭자하여 완전히 의심이 없는데 밖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억울하다고 여기니, 내가 실로 마음이 아프다.”
하자, 시열이 대답하기를,
“그 역모한 자취를 밖에서는 참으로 모릅니다. (하략).”
하였다. 상이 가만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과연 경의 말과 같겠다. 그러나 역모는 참으로 의심이 없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설령 이 참으로 역모를 했다고 하더라도, 김홍욱(金弘郁)이 어찌 역모한 사실을 알고서 구원할 리가 있겠습니까. 소견이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너무 갑자기 죽였으므로 인심이 더욱 안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법령을 정하기를 만일 감히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강과 같은 죄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 법을 무시하고 말을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내가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19금 스토리가 등장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이상의 내용을 보면 효종이 강빈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자신이 이렇게 강경한 입장을 표명해야 뒷날 석견을 두고 다른 말이 없을 것이라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무튼 효종의 북벌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정통성을 확보했으니 그 다음엔 국론을 하나로 묶을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북벌론. 국력을 길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명분에 감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 핵심에는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어영대장 이완이 있었다.

 

북벌을 전제로 실시한 부국강병책은 효과적이었다. 광해군 때부터 추진되어 온 대동법은 효종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무기 개량 사업의 성공으로 1654년과 58년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 조선의 조총 부대가 러시아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하는 성과도 있었다.

 

나선정벌에 참여한 조선군의 병력은 1 150, 2 270명 수준이었지만 그 실력의 우수성은 효종을 매우 고무시킨 듯 하다. 1659311, 40세의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10만 포수(조총수를 의미)을 길러 요동으로 쳐들어가면 명의 유민들과 포로로 잡혀간 우리 백성들이 내응할 테니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느냐고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석달 뒤, 종기가 덧난 왕은 돌연 숨을 거뒀다.

 

 

 

 

그 뒤에도 북벌론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다. 숙종 때인 1673, 윤휴는 오삼계 등 삼번(三藩)의 난으로 청이 혼란에 빠지자 이때야말로 북진해 심양을 함락시킬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1년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내정에 힘쓴 뒤로는 국력의 차이가 현격해졌다.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시대에 청은 이미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본보기였다.허생전에서 허생이 효종의 심복 이완을 꾸짖는 장면은 박지원이 얼마나 북벌론을 허황된 것으로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어쨌든 북벌 정책을 통해 확고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 효종은 형 소현세자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656,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석견을 귀양지 제주에서 불러 올려 경안군에 봉한 것이다.

 

효종이 귀인 조씨를 죽일 때 그 소생인 숭선군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지만, 효종은 어린 아이가 무슨 수로 역모를 꾀했단 말이냐며 어린 이복동생을 지켰다. 권력 앞에 형제고 조카고 없었던 조선의 군왕 치고는 칭찬받아 마땅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효종이 강화시킨 왕권은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을 거치며 영,정조 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이쯤 되면 효종을 역사의 승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끝>

 

 

 

 

허생전의 마지막 대목은 다들 읽어보셨을테니 여기서는 생략.

 

 

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숙종은 뒷날의 영조나 정조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입니다. 남인과 서인을 자유자재로 조종한 정치젹 역량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 근거에는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는 탄탄한 정통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종의 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세 왕이 모두 임금의 정궁(정비)으로부터 태어난 대군으로 이어진 순도 높은 왕들이라는 것이죠. 그게 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이렇게 3대를 잇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북벌사업이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는지, 그 주도 세력은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떠나 효종의 치세는 왕조를 이어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뿌리를 내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는 매우 성공적인 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P.S. 강빈이 신원된 것은 숙종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영조 때, 소현세자의 증손이며 석견(경안군)의 손자인 밀풍군 이탄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합니다. 만약 강빈이 더 일찍 신원됐다면 소현세자의 자손들에게는 더 일찍 비극이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효종을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악녀 얌전이와는 이별입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의 소득 중 하나는 김주영이란 새로운 배우를 발굴한 것.

 

'꽃들의 전쟁'은 이렇게 끝나고, 다음주부터는 새 주말드라마 '맏이'가 방송됩니다. '그대 그리고 나'의 원로 김정수 작가가 집필하는, 가족애 넘치는 시대극입니다.

 

 

 

 

 

 

 

 

 

 

댓글
  • 프로필사진 곽용주 글 잘읽고 가요..

    역사에 대해 빠삭하시네요.

    효종에 대해선 장례문제로 파라 갈린 것도 있는걸로 아닌데 효종이 아녔나요?

    암튼 효종때의 이런 이야기는 사극으로 많이 보진 못한 것 같아요.


    2013.11.22 01: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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