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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가 남긴 여러가지 유산들 중 하나는 프레피 룩의 유행입니다. 사실 새삼스러운 유행이랄 것도 없을 듯 합니다. 프레피 룩의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옥스포드 스타일의 버튼 다운 셔츠, 브이넥 스웨터, 치노 팬츠 등은 이미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학생복의 주요 요소로 여겨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보다 남자' 이후에는 여기에 자켓이며 타이 등의 요소가 첨가되면서 좀 더 연령대가 확대되고, 프레피 룩이라는 말이 미국 동부의 귀족(?) 가문 청년들의 패션인 양 지나치게 미화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프레피'라는 말이 그리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 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프레피 룩의 대유행에는 뒤에는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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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프레피(Preppy, Preppie)란 동부의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 고교, 즉 프렙 스쿨(Prep School: Preparatory School)의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학교들이 '예비 학교'라고 불리는 것은 재학생들이 대학 진학, 특히 동부의 아이비리그 명문교들을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반 고교와는 차별화된 교육이 진행되고, 기숙사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학교도 많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미드 '가십 걸 Gossip Girl'에 나오는 학교도 당연히 프렙 스쿨이죠. 물론 더욱 당연하게, 이 학교 학생들의 패션 역시 프레피 룩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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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프레피 룩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작품은 '꽃보다 남자'나 '가십 걸'이 아닙니다. 바로 1989년작인 '죽은 시인의 사회'죠. 엄격한 프렙 스쿨에서 입시와 진학 이외의 인생을 가르치다가 좌절하고 마는 키팅 선생님의 감동적인 일화를 담은 이 영화가 공개된 뒤, 10년 사이 한국 중-고생의 겨울 외투는 모두 더플 코트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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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원을 따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이 프레피라는 말은 40대 이상에게 더욱 친숙한 말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10대나 20대들은 '그런 영화가 있었나' 싶을 고전 로맨틱 무비 '러브 스토리'에서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1970년작인 '러브 스토리'는 WASP 명문가 출신의 하버드 법대생 올리버 배릿 4세(라이언 오닐)와 이탈리아계(미국 사회의 백인 중에서는 가장 낮은 레벨입니다) 래드클리프 여대생 제니퍼 캐발레리(알리 맥그로)의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미국 사회에서도 빈부격차가 있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힘들어진다'는 충격(^^)을 준 작품이라고도 전해집니다.

아무튼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알리 맥그로는 라이언 오닐을 계속 '프레피'라고 부르는데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라이언 오닐의 독백이 끝나고,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하버드 도서관을 두고 래드클리프 도서관에 책 한권을 빌리러 온 올리버에게 제니퍼는 "500만권의 장서량을 자랑하는 니네 도서관을 두고 왜 우리 도서관에 왔느냐"며 쌀쌀맞게 대하는데, 말끝마다 올리버를 '프레피'라고 부르며 경우도 모르는 바보 취급을 합니다.

올리버: '***'라는 책 있나요?
제니퍼: 당신네 도서관이 있을텐데요. 프레피.
올리버: 질문에 대답하세요.
제니퍼: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요.
올리버: 우리도 래드클리프 도서관을 쓸 권리가 있어요.
제니퍼: 내가 말하는건 규정이 아니라 도의 문제에요, 프레피. 그쪽엔 500만권이나 있잖아요? 우리는 몇천권 뿐인데.
올리버: 내가 원하는 건 한 권 뿐이라구요. 제길, 내일 시험이 있어요!
제니퍼: 입 조심해요, 프레피.

Oliver Barrett IV: Do you have this book?
Jennifer Cavalieri:  You have your own library. Preppy
Oliver Barrett IV: Answer my question.
Jennifer Cavalieri:  Answer mine first.
Oliver Barrett IV: We're allowed to use the Radcliffe library.
Jennifer Cavalieri: I'm not talking legality, Preppy. I'm talking ethics. Harvard's got five million books, Radcliffe a few thousand.
Oliver Barrett IV: I only want one. I've got an hour exam tomorrow, damn it!
Jennifer Cavalieri: Please watch your profanity, preppy.


그러자 발끈한 올리버는 "대체 왜 날 자꾸 프레피라고 부르냐"고 반항합니다.

올리버: 뭘 보고 내가 프렙 스쿨에 다녔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
제니퍼: 당신은 부자에다 멍청하게 생겼거든요.
올리버: 하지만 사실은 난 가난한 집의 수재인데.
제니퍼: 하. 내가 바로 가난한 집의 수재에요.
올리버: 당신이 수재라는 근거라도 있어요?
제니퍼: 당신같은 남자랑 커피 마시러 가지 않으니까요.
올리버: (기가 막힌다) 하지만 난 당신이랑 커피 마시러 가자고 얘기하지도 않잖아요.
제니퍼: 그러니까 멍청하다는거죠.

Oliver Barrett IV: What makes you so sure I went to prep school?
Jennifer Cavalieri: You look stupid and rich.
Oliver Barrett IV: Well, Actually I'm smart and poor.
Jennifer Cavalieri: *I'm* smart and poor.
Oliver Barrett IV: what makes you so smart?
Jennifer Cavalieri: I wouldn't go out for coffee with you that's what.
Oliver Barrett IV: what if I wasn't even gonna ask you to go out for coffee with me?
Jennifer Cavalieri:l that's what makes you stup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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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 장면은 당연히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러 간 장면이죠.

아무튼 이상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 '프레피'라는 말은 '세상 물정 모르고 우기는 부잣집 도령'이라는 식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물론 늘 이런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말이 충분히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됐다는 걸 알 수 있죠.

(사실 '프레피'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이 장면을 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장면입니다. 심지어 TV로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를 겁니다. 제가 TV에서 볼 때 이 장면의 '프레피'는 '촌뜨기'라고 더빙이 돼 있더군요. 물론 의미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더빙입니다.)

그러니 '프레피처럼 입는다'는게 그리 좋은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옷차림은 말쑥하고 깔끔하지만 속으론 야무지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뜻도 될 수가 있으니까요. 물론 어떻게 해서든 겉모습만큼은 '강남 도련님, 아가씨 처럼 보이는' 것이 이 시대의 목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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