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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은 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해, 그리고 아사하라 쇼코가 그 유명한 옴 진리교를 창시한 해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해의 이름에서 9을 Q로 바꿔(일본어로는 발음이 같은 '큐'라고 합니다) 1Q84라는 소설을 써냈습니다.

책을 잡으면 원래 잘 놓지 않는 편이긴 합니다만, 이만치 다음 얘기가 궁금해지는 책은 참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하루키 선생의 책을 처음 읽는 것이 아닌 터라 결국은 끝까지 읽고 나서도 뭔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명쾌한 설명 같은 것은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묘한 글쓰기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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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소개된대로 이 책은 2중 구조로 쓰여져 있습니다. 한 장은 남주인공 덴고의 눈으로, 그 다음 장은 여주인공 아오마메의 눈으로 쓰여져 총 48장에 맞춰져 있습니다.

학원 수학 강사이며 데뷔하지 않은 소설가인 덴고는 어느날 편집자 고마쓰로부터 한 소녀가 쓴 미완성 소설을 제대로 된 소설로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습니다. 한편 무술 강사인 아오마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는 바늘을 이용해 사람을 해치우는 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오마메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에 이끌려 이 세계와 겹쳐 있으면서도 이 세계가 아닌, 즉 1984년이 아니라 1Q84년인 세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이 둘은 지금껏 한번도 서로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다른 한 켠에 버티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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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문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도대체 리틀 피플이 뭐냐'는 것입니다. 1Q84의 세계에서, 문제의 '교주'는 리틀 피플과 인간을 연결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루키는 칼 융을 인용합니다.

융의 '인간과 상징'을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융은 한 민족, 혹은 한 문화 공동체를 설명하기 위해 '원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신화나 전설, 꿈은 하나의 공동체를 묶어 주는 역할, 즉 그 공동체를 공동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하루키의 리틀 피플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하루키가가 이들을 가리켜 '선이나 악이라는 존재로 막연하게 가릴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이들이 단순한 악령이나 외계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교단'의 모델이 하루키가 일찌기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할 때 대상이었던 옴 진리교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굳이 왜 하루키가 이 교단과 리틀 피플에 대해 호의적인 묘사를 하려 하는지 좀 의아해지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칼 융과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인용하면서 이 교단의 존재 의미를 인류 공통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원시적인 종교성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과연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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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번데기와 도플갱어에 이르면 하루키에 익숙한 독자들은 '아아, 또 시작이구나'하는 실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의 '독자 흔들기'입니다. 사실 하루키 선생은 가끔씩 이렇게 변화구를 던지면서 이야기의 진행에 목마른 독자들을 약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위해 하루키가 사용하는 소재와 학설들, 칼 융, 마셜 맥루헌,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그리고 '헤이케 이야기'와 '1984'는 모두 지나간 것들, 흘러간 것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착을 드러냅니다. 굳이 2009년에 왜 하루키는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는 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요.

그의 머리 속에서 1984년은 현재, 즉 2009년의 맹아가 될 수 있는 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해, 어느 시점도 마찬가지겠지만 1984년의 우리가 뭔가의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죠. 하루키에게는 아마도 그 시간, 1984년의 시간들이 지금에 와서는 아주 먼 과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별 의미 없이 정의되지 않은 시간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제가 이 소설에 끌린 것 역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젊은 날을 보냈던 사람으로서의 느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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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루키 특유의 논지 피해가며 변죽 울리기 - 이 소설에는 "나는 말이지, 특히 소설에 관해서는 내가 다 읽어낼 수 없는 것을 무엇보다 높이 평가해. 내가 죄다 알아버리는 그런 것에는 도대체 흥미가 없어. 당연하지. 지극히 단순한 일이야"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 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합니다. 어떤 독자라도 '한 눈에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히 빛을 발합니다.

그런 모든 요소를 하루키의 허세라고 치부해 버리더라도, 이 소설이 갖고 있는 고갱이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파란 하늘, 두 개의 달이 빛나는 저녁, 두 개의 달을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사랑을 떠올리고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내는 정경은 하루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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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루키의 작품 중에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유니콘의 꿈)'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겹쳐지는 세계라는 면에서는 또 다른 무라카미인 무라카미 류의 '오분 뒤의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하죠. 물론 가리키는 방향은 정 반대입니다.

1Q84는 순간의 인기에 따라 사라질 책은 아닌 듯 합니다. 지금이 아니라 내년, 내후년에 읽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어쩌면 한 10년 뒤 쯤이 가장 좋은 시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한번 '빠져 보시죠'.


P.S.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메인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다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곡은 태어나 제목조차도 들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멜로디는 놀랍도록 친숙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L&P)의 라이브 앨범에서 들어 본 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곡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이거였더군요. 'Knife Edge'.

모처럼 추억 속의 EL&P를 되새겨 보는 계기도 됐습니다.

'전람회의 그림' 가운데 '키에프의 대문'입니다. 익숙지 않은 분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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