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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10일 일요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언젠가부터 찍고 이동하는 여행보다는 한 도시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여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성에 차려면 한 도시에 한달씩은 살아야겠지만, 어쨌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도시 사람들처럼 이동하고, 최대한 그 도시 사람들이 먹는 것들을 먹어보려 하고, 일상에 접근해 보려 하는. 

 

뭐 아예 은퇴한 뒤라면 모를까, 일을 하면서 그렇게 다니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도시든 대중교통이 대략 익숙해지고, 도시의 방향과 길이 눈에 들어올 때쯤 되면 떠날 때가 된다. 정말 아무데서나 보이는 에펠타워.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반가웠는데 이제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아무튼 쌀쌀한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해 버리고 호텔을 나섰다. 

세느강 북쪽의 텅빈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런데 정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은근히 바깥의 돌들이며 진입로도 어딘가 정성들여 돌보지 않은 태가 난다.

문 닫은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하지만 굳이 여기에 온 건 라울 뒤피의 '전기의 요정 La fee electricite'을 보기 위해서지. 

이런 거대한 그림.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대작 벽화를 의뢰받고,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기를 형상화하는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에 착수한다. 그 결과 이런 대작이 나왔다.

 

이 작품에는 석판화 연작과 이 벽화가 있는데, 작년 서울 전시때는 이 작품을 약간 변형한 석판화 버전이 전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 둥근 홀 모양으로 되어 있는 2층 높이의 전시실을 가득 채운 대작. 

잘 보면 수십명의 인물들이 있다. 무식해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과학/공학자들이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맥스웰, 모르스, 뢴트겐... (나머지 잘 모름)

에디슨, 퀴리 부부, 멘델레예프... 뭐 등등.

 

물론 이걸 보러 온 거지만,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시립'이라는 이름을 아무 미술관에나 달아줄 리 없다. 소장품들을 보면 그렇게 만만한 미술관이 아니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꽤 많다. 

이건 마티스가 스트라빈스키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nol>의 1920년 초연을 위해 그린 무대와 의상.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황제를 감동시킨 나이팅게일의 노래. 어느날 선물로 바쳐진 기계 나이팅게일. 궁정인들이 기계 나이팅게일에게 열광하자 숲으로 돌아가버린 나이팅게일. 그러나 기계는 어느날 작동을 멈추고, 죽음의 사자가 황제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

어쨌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여러 모로 전설이다. 마신, 니진스키 같은 이름들과 함께 달리, 피카소, 마티스 같은 사람들이 무대미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마티스는 역시 마티스. 왠지 마티스의 스케치에서 '춤' 연작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캐서린 브래드포드의 <운동선수들 Athletes>.

....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그림.

 

뭔가 동화와 악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듯한 그림. 돈 밴 빌리트의 작품 <야크와 달들 Yaks, moons>.

돈 밴 빌리트는 캡틴 비프하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뮤지션이자 가수라는데, 처음 들어본다. 이럴 때마다 뭘 안다고 거들먹대는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라울 뒤피, <헨리 로얄 레가타의 조정 선수들 Regates a Henley, les rameur>. 

그리고 그 연작. 헨리 로얄 레가타는 런던 테임스강에서 19세기부터 계속 열리고 있는 조정 경기라고. 

빅토르 브라우너, <La Rencontre du 2 bis rue Perrel>. 제목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지만 조르주 루오를 연상시키는 숲과 정령인 듯 한 생명체의 묘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리 로랑생이 1923년에 그린 Jeannot Salmon의 초상. 지인 중에 닮은 사람이 있어 눈길이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의 <꿈 Le reve>. 문득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꿈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몇개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중국 화가 Zao Wou-Ki의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01.10.73>. 1973년 1월10일이란 뜻일까? 폭설이 내린 산중의 설경?

대략 미술관의 설명으로 봐선 중국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널리 활동한 화가인 듯 하다. 

아무튼 이밖에도 수많은 피카소, 샤갈, 루오, 보나르 등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던 멋진 미술관.

오히려 무료라는 이유로, 그리고 일반적인 관광객들의 노선과는 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많은 발길이 몰리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파리에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뭔가 초겨울에는 을씨년스럽던 마당의 카페. 노천 좌석 뿐이라 동절기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지만, 여름 밤이면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일 듯. 

사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이 건물은 팔레 드 도쿄라고 불리는 유서깊은 곳. 그러니까 1차대전 당시 유럽 연합국의 반 독일 노선에 참여했던 일본은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간주되어 이 건물에 수도의 이름을 남겼다. 

물론, 서울에 있다면 꽤 중요한 명소 취급을 받았음직 한데 불행히도 여기는 파리. 이 정도의 연식과 이 정도의 사연을 가진 건축물은 그야말로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그래도 현장에 가 보면 확실히 멋지다. 

그렇게 해서 잔뜩 흐린 파리의 하늘을 살짝 바라보며, 택스 프리 신청을 위해 들른 백화점 식당에서 사실상 마지막 끼니를 때웠다. 

문어와 파스타. 꽤 비쌌지만 생각보다 고퀄의 식사. 

그리고는 호텔에 들러 맡긴 짐을 찾고, 마지막 라운지 이용을 탈탈 털고,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파리 드골 공항의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아시아나 항공도 함께 쓰는)는 엄청난 규모와 꽤 괜찮은 시설이 눈길을 끌었는데, 불행히도 좌석이 그리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런 걸 언제 쓸까 싶은 공간이 많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는 바람에 뭘 좀 먹어 보려 음식을 집으면 수백걸음을 걸어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 

게다가... 아니 대한민국 국적기가 라면을 이따위로밖에 못 만들다니. 

어쨌든 14시간의 긴 비행 시간 동안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감사했다. 대한항공 비즈니스와 아시아나 스마티움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공간 이용 면에서는 대한항공이 좀 앞서지만 좌석을 내가 원하는 각도로 딱 맞춰 활용하는 것은 스마티움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귀국. 바로 달려간 곳은 부대찌개집.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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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에 맞춰 다시 올립니다.]

2023년 12월 파리를 방문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 알아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연말로 예정된 공연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손꼽히는 대도시 파리에서 꼭 가 보고 싶은 공연장은 뭐니뭐니해도 '오페라'라는 지명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영화든 뮤지컬이든, <오페라의 유령>을 보신 분이라면 '아 거기?'하실 바로 거기다), 그리고 라 빌레트에 새로 지어진 파리 필하모닉 홀이었다. 

 

대부분의 공연 일정이 정해지는 것은 대략 6개월 전.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안에 중요한 공연들은 매진이 되어 버린다. 베를린 필하모닉 때도 그랬지만, 현장에 간 상태에서 '아, 베를린에 온 김에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라도 한번 보러 갈까?'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다. 아주 운이 좋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다. 다만 일찍 표가 열린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기도 좀 불안한 것이, 한번 사고 나면 환불은 불가능(정말이다). 산 사람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티켓을 파는게 최선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사야 한다.

 

2023년 12월,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은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었는데, 이건 본 순간 이미 매진이었다. 실제로 티켓을 팔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오페라 가르니에 후원회원을 위한 특별 공연 같은 형식으로 관객들을 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 꼽은 공연이 바로 이지 킬리앙 Jiri Kylian의 안무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공연하는 <Jiri Kylian Evening> 공연. 흔히 지리 킬리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체코어로 Jiri라는 남자 이름은 '이지'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아무튼 네덜란드 발레 시어터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연단체로 끌어올린 킬리안은 '현대 발레의 나침반'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은 안무가(집에 그의 DVD를 두개 갖고 있다). 특히 강한 인상을 받은 <Petit Mort> 도 이번 공연 리스트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이건 꼭 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연장이 바로 오페라 가르니에. 사실 이름이 오페라지만 이미 오페라를 위한 공간으로선 수명을 다했다. 지금은 공연 프로그램의 90%가 발레. 오페라는 새로 지은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거의 모두 소화된다. 혹자는 예쁘기만 한 공연장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발레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였는데, 며칠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공연이 매진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가. 다행히 대기 모드를 띄워 놓고 기다린 결과, 약 한달 뒤에 빈 자리가 나왔다(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늦게 푸는 좌석이 있는 것인지). 바로 낚았는데, 사실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19세기형 극장의 박스석이 어떤 분위기인지 맛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어쨌든 공연 당일. 토요일 밤의 파리 오페라 주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 날씨인데도 사람이 막 흘러다니는 분위기였다. 보수중이라 건물 앞부분은 차폐막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차폐막까지도 명품 광고... 그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시면 느낌이 오실 듯.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극장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에 맡긴다. 2층과 3층의 회랑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기둥의 장식들이 너무나 멋지다.

 

아마도 같은 유럽이라도 러시아나 발칸 제국 같은 변방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파리와 다른 도시들을 구별하는 기준처럼 보였을 것 같다. 내게도 '알겠나? 이게 바로 문명이야'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아마 21세기의 사람들이라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건축물에서 느꼈을 그런. 

그동안 멋진 걸 많이 봐 왔지만,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더구나 이 멋진게 그냥 오래된 멋짐으로 남아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극장이잖아.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 

각각 다른 안내원에게 몇 차례 티켓을 보여주고 간신히 찾아간 곳은 무대 바로 앞의 2층 박스석. 묘한 구조라 1층과 2층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박스석 중에는 가장 낮은 위치, 그러니까 무대와 거의 수평 위치에 있다.

박스석마다 입구가 있다.

저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박스 안에 한 6석 정도 좌석이 있다. 

바로 건너편에 유명한 '유령의 박스'가 있다. 실제와는 무관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이후 저 자리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은 팬텀 아닌 일반 관객들이 그 자리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들면 <오페라의 유령> 도입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가 있고, 그 뒤에는 그 유명한... 샤갈이 그린 천정화가 있다. 사실 전날 퐁피두 센터에서 샤갈이 이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했던 스케치들을 보고 온 다음이라 감동이 더했다. 

여기서 시선을 위로 올리면,

쿠궁.

 

그리고 공연.

맛보기로 하자면 이런 거다.

https://youtu.be/MKOqRvcLknE?feature=shared

뭐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Gods and Dogs>, <Stepping Stones>, <Petit Mort>, <Sechs Tanze>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고개를 너무 내밀고 보느라 목이 좀 아팠지만(무대에서 너무 가까운 박스석은 비추. 절대 비추. 더 가까운 박스석의 관객들은 대체 어떻게 공연을 봤는지 궁금하다), 무용수들의 안무 소화는 완벽했다. 드문드문 동양인 무용수가 보여 혹시 박세은...? 일까 했는데 그 뒤를 이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합류했다는 강호현이었다. 매우 훌륭했다.

물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공연을 마친 뒤 76세의 이지 킬리앙이 직접 무대에 오른 것. 20세기의 문화 영웅들이 하나씩 하나씩 흘러간 별들이 되고 있는 지금, 현대 발레의 이정표를 세운 거인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절로 발길이 둥둥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구경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객석 바깥쪽에는 쉬는 시간마다 음료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파티 공간이 있다.

근데 진심 호화롭기 그지없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이런데, 19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봤다면 정말 이 공간이 어떻게 보였을지. 

물론 전기의 도입 이후라야 제 역할을 했겠지만.

공연장, 좌석, 무대, 그 밖에 극장에서 펼쳐질 수 있는 파티를 위한 공간, 지금도 바로 쓰이고 있는 회랑 공간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파리 시민이냐, 관광객이냐의 차이는 이런 곳을 일상 공간처럼 향유하고, 저 자리에 여유있게 서서 칵테일이나 와인을 나누며 대화의 꽃을 피우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

물론 뭐니뭐니해도 극장의 완성은 무대.

낮시간에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의 내부 투어를 하는 가격이 15유로. 블로그들을 보다 보면 내부 광경에 감탄해 '언젠가는 이 안에서 직접 공연을 보리라'는 평을 남긴 분들이 많은데 그런 언젠가는 절대 오지 않는다. 다음에 파리에 가기로 되어 있는 분들, 방문 기간 중의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 정보를 꼭 살펴 보시길. 그리고 반드시 공연을 보시길. 거기서 공연을 보고 그 안을 둘러본 느낌은 그동안 파리에서 했던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인상적이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턱시도를 입고,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가신다면 더 기막힌 경험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그 안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그대로 하실 당신, 누구든 후회 없을 거라고 믿는다. 

 

 

P.S. 파리 여행의 기록을 여기다 남기긴 남길 것인데, 한번에 다 숙제하듯 쓸 것도 아니고,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마음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파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전에도 그랬듯, 여행기는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곶감 뽑아 먹듯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한번씩 들러 보시길.^^ [라고 썼고, 그래서 이 회차는 전체 여행기의 16회로 끼워넣습니다. 제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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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쎈 동영상 하나 보고 가실게요.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크리스마스때마다 천장 돔을 저렇게 장식해놓고 트리를 설치한다고 한다. 근데 그게 대단한 볼거리가 될까...라고 생각했는데, 되더라는. 아무튼 그런 저런 파리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 보시는 회차.

 

잠시 시간은 전날 밤으로 돌아간다. 조엘 로부숑에서 비싼 밥을 때려먹고, 잠시 기운을 회복해서 에펠탑 조명을 보러 갔다. 

사실 밤마다 에펠탑도 볼 겸, 밤마실도 나가려고 생각을 했지만, 대부분의 날 비가 왔고, 특히 밤이 되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어딜 나갈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1988년. 맨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조명이 들어 온 에펠탑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해지는 시각에 세느강 유람선 바토 무슈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강만 보고 자란 청년에게 세느강의 강폭은 의외로 좁았고, 배에 설치된 조명이 다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교각의 장식을 비췄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배가 반환점에 도착할 무렵 사방이 컴컴해졌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빛으로 빛나는 에펠탑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것이 있다니. 감탄했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와 섰다. 그야말로 감회가 새로웠다. 무려 35년. 나이를 먹었고, 그 시절의 낙관은 사라졌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안녕. 부디 잘 남아 있기를. 정각의 반짝반짝까지 볼까 했는데 날도 차고... 피곤해서 호텔로. 오자마자 숙면.

새벽의 라자레 역 광장. 눈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눈이 온 건 아니다. 차가운 새벽, 

더 이상 빵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진짜 파리 호텔 부페. 

빵 종류만 10가지가 넘는다고 쓰려고 했는데 하필 빈 틀을 찍었네. 

아무튼 아침 디저트(?)인 파운드케이크만 네 종류. 괜찮은데.

물론 빵 말고 다른 쪽은 별 대단한 건 없다. 콘티넨탈 브랙퍼스트의 전통인지 뜨거운 음식은 그냥 구색만 갖춘 정도. 계란은 얘기하면 원하는 스타일로 조리해서 가져다 주는 방식이다. 

커피는 받아서 알아서 가져가시라는 분위기. 종이컵과 뚜껑 제공.

 

그렇게 아침을 먹고, 자체 휴식. 쇼핑을 원하시는 분은 백화점으로 가시고, 뭘 할까 하다가 그냥 침대에서 뒹굴기로.

그리고 버스를 타고 (구)몽주약국으로 쇼핑차 이동.

정말 어디가나 보인다. 근데 점심을 뭘 먹긴 먹은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없지? 사진도 없고... 음... ;;

기억의 구멍. 

 

아무튼 느즈막한 오후, 생또노레에 왔는데 겨울이라 일찍 해가 떨어지고, 거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 이런게 파리지.

파란 하늘, 금빛 조명, 하얀 건물. 안 예쁠 재간이 없다.

생토노레라는 지역 강조.

네... 다 아시는 상표

말하자면 그 명품거리.

방돔 광장 쪽으로 가 본다.

어느 건물 앞에 갔는데,

웬 애들이 엄청나게 떠들고 있는데, 시끄럽기가 장난 아닌.

주위에 물어봐도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는데, 좀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가르쳐줍니다. "틱토커".

그렇군요. 주말이라 북적북적.

탄성이 나와 계속 사진을 찍게 된다.

반대편에는 회전목마가.

어쨌든 이것이 바로 파리의 크리스마스다! 라고 할만한 광경. 

그냥 계속 서서 사진을 찍게 된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 그럴듯하게 예뻐 보인다.

해가 이미 지긴 졌는데 아직도 파란 하늘.

마음에 담고 갑니다.

쇼핑한 짐을 내려 놓기 위해 일단 호텔 쪽으로.

좀 이따 다시 오게 될 오페라 가르니에

 

아무튼 호텔에 짐을 내려 놓고, 마침 호텔의 해피타임이라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그리고 다시 나간다. 이번엔 백화점 쪽으로.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의 끝판왕은 백화점.

그것도 파리의 백화점.

온 가족이 다 나온 집이 많고, 당연히 어린이들을 노린 노점들 천지.

길 양편으로 난리.

끄레뻬가 빠질 수 없다.

저쪽으로 가야 오페라 가르니에지만 일단 백화점 내부의 돔을 보러 간다.

이렇게 생긴 돔. 

파리의 오만 사람들은 다 여기 와 있는 느낌.

모든 사람이 이런걸 찍고 있다.

심지어 음악에 따라 천장 돔 색깔이 계속 바뀜. 너무 예쁨.

진종일 보고 있어도 안 질릴 것 같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라도 자리를 떠야 한다. 여기저기서 안전관리 요원들이 지나가라고 독려하기도.

어쨌든 그래서 밖으로 다시 나옴.

백화점 건물 1층의 외벽 장식이 기가막히다.

인파가 걷기 힘들 정도.

갤러리아 라파이에트 안녕.

거기서 조금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페라 가르니에 뒤편이 나타난다.

갤럭시 간판 밑으로도 입구가 있는데, 아니 아니, 여기는 관객 출입구 아님. 

여기가 정면 출입구. 사람은 많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근데 파리 가시는 분들, 여기는 꼭 들어가 보셔야 해요.

이렇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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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다비드를 알게 된 것은 어린시절 들고 다녔던 동아출판사 완전정복 시리즈의 표지였던,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 나폴레옹 그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도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초상화 가운데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줄리에트 레카미에, 이 그림이 그려진 1800년 당시 23세. 남편은 39세의 은행 재벌 자크 로즈 레카미에. 그런데 결혼을 1793년에 했다니... 16세에 딱 두배인 32세 남자와 결혼하신 거다.

(사실 근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16년 차이가 뭐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66세와 50세, 뭐 괜찮은 나이 아닌가? ㅎ)

 

어쨌든 당시에도 미모와 지성이 파리를 뒤흔들어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셨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전설적인 분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그려진 수많은 초상화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오는데, 어떤 그림도 다비드의 그림처럼 빛나는 미모는 아니다. 왜 다비드가 출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무튼 그런 초상화들의 힘(?)으로 그 셀럽으로서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 퍼졌고, 수많은 숭배자(라고 쓰고 정부라고 읽을 수 있는)들이 각국에서 찾아왔고, 남편의 은행이 망해 살림이 어려워진 뒤 프로이센의 왕자가 구혼해 오자, 남편도 차라리 자기와 헤어지고 왕자와 결혼하는것이 좋겠다고 후원(?)에 나섰으나, 결국 남편과 헤어지지는 않고 근근이 사셨다는 그런 분이다. 

암튼 거대한 나폴레옹을 다시 한번 보고, 수없이 많은 유명한 그림들이 잘 있나 확인해 본다.

사실 이 그림에는 다비드 본인이 들어 있다는 걸로도 유명한데,

저 그림 위쪽, 일반 관람객 사이에 섞여 열심히 실제 광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사람이 다비드라고. 물론 그림을 이렇게 그린 걸 보면 실제 다비드의 위치는 반대편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카메라도 없던 시절, 이런 종류의 기록화를 남기는 것도 아마 혼자 힘으로는 힘들지 않았을까.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물론이고 저 많은 왕족, 귀족, 거물들이 '내가 이렇게 생겼냐' '난 저날 저거보다 훨씬 잘 입고 갔다' '내가 숱이 그렇게 없냐'고 화가를 들볶았을테니, 아마도 현장에 제자들 수십명을 풀어 보이는 건 모두 그려오라고 하지 않았을지. 

 

아무튼 저렇게 사진처럼 현장을 잘 표현했으니 왕정 - 혁명 - 나폴레옹 제정 시대를 이어서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비드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감히 ㅎㅎ)

또 루브르에 있는 외젠 들라크르와의 그림이라면 당연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꼽아야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못지 않게 인상적인 그림은 이 그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Mort de Sardanapale>이다.

 

전설적인 앗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전쟁에 패하고 항복 권유를 받자 노예들에게 자신의 애첩들을 모두 죽이고 처소에 자신의 말, 자신의 보물들을 모두 쌓아놓은 채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었던 그 어떤 것도 적에게는 넘겨주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 침상에 기대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이 벌인 참극을 바라보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의 표정이 무엇보다 강렬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이승에서의 삶, 극한의 사치와 즐거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반추하고 있을까. 아무튼 왠지 이 그림이 좋다. 

 

물론 여기는 루브르. 저렇게 그림 하나 하나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담으려면 책 열권으로도 어림없다. 그리고.... 사실 비싼 레스토랑에 저녁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 영영 머물 수는 없다. 

위 그림도 좋아하는 그림. 프란시스 에두아르드 피코의 <큐피드와 프쉬케 L'Amour et Psyche>.

 

구경하다 보니, 마침 루브르에서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 Museo di Capodimonte 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교환 전시중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가본 일은 없으나, 피렌체의 우피치에 이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두번째로 소장 회화가 많은 미술관이라는 명성. 

명성에 걸맞게 18세기 이전, 유럽 미술계를 지배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걸작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카라밧지오의 <그리스도의 태형 The Flagellazione>. 수십차례의 범죄 행각으로 수배 대상이었던 카라밧지오를 대체 불가능한 화가로 만든 라 루체, 광선의 위력이 살아있다. 

 

그리고 이 나폴리에서 온 그림들을 보다 보니, 이건 '카라바조와 그 후예들' 전시회 아닌가. 은근히 반가웠다. 

이를테면 마티아 프레티의 <성 세바스찬>. 화살에 맞아 순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수억장의 그림 중에서도 손꼽힐만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귀도 레니의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Atalante e Ippomene>. 남자보다 강한 여전사 아탈란테를 유혹하기 위해 세 개의 황금 사과를 받은 히포메네스는 '경주에서 나를 이기는 자와 결혼하겠다'는 아탈란테와 경주에 나서 중요한 대목마다 사과를 흘려 결국 아탈란테를 신부로 맞는데 성공한다... 는 이야기. 

 

물론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아탈란테가 신랑 후보들을 유심히 본 다음, 맘에 안 드는 놈들에게는 전력질주해서 이기고(패자는 모두 죽였다), 맘에 드는 놈을 골라 져 줬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인 젠더 이슈의 부각과 함께 너무나 유명해진 그림. 17세기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유디스 Giuditta decapita Oloferne>가 역시 나폴리에서 와 있었다. 실제로 강간 피해자였던 젠틸레스키가 그림 속 유디트에게 자신을 투영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을 그려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성경 속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그린 그림들은 수만 종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확실히. 

주세페 데 리베라의 <성 제롬과 심판의 천사  Saint Jerome et I'ange du Jugement>.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성 히에로니무스라는 이름보다 제롬이라는 이름을 쓰는 듯. 아무튼 성 세바스찬이 화살 꽃힌 나체의 청년으로 그려지듯, 황무지에서 두루마리에 뭔가 쓰고 있는 깡마른 노인은 백이면 백, 라틴어 성서 번역자 성 히에로니무스라고 알아볼 수 있다. (해골이나 사자가 있으면 특히 더)

 

아무튼 이렇게 카라밧지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 그림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나폴리에서 온, 주세페 데 리베라의 또 다른 작품. 제목은 <취한 실레누스 Silene ivre>. 그림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 아재스러움이 너무나 친근감을 갖게 한다. 

 

사티로스 중의 한 사람인 실레누스(실레노스)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키워 준 반신. <정글 북>에서 모글리를 키워준 곰 발루가 아마 실레누스의 아바타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거의 모든 그림에서 술만 마시면 즐거운, 뚱뚱한 중년 남자로 그려진다. 아재의 신...

주세페 데 리베라, 혹은 호세 데 리베라의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Apollon et Marsyas>. 피리의 명인인 마르시아스는 감히 자신이 음악으로 아폴론 신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며 신에게 공개 도전한다. 거기 응한 아폴론은 리라 연주로 마르시아스를 무너뜨린 뒤,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로 인간의 오만을 응징한다. 

 

데 리베라라는 이름만 봐도 스페인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이런 소재를 그린 것도 그렇고, 뭔가 광기가 느껴지는 필체도 그렇고, 어딘가 엘 그레코를 연상시킨다. 

위 그림과 뭔가 비슷한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엘 그레코의 <성 루이, 프랑스의 왕>.  

엘 그레코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아래 두 인물은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독지가들인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문 생산된 그림이라는 뜻. 그렇다 보니 엘 그레코 하면 떠오르는 광기가 많이 잠잠해져 있어 아쉽다.

아무튼 이 한도 끝도 없는 그림, 그림, 그림들...

마지막으로 라파엘로의 <큰 미카엘>로 알려진 <악마를 물리치는 미카엘 대천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의 성모>에는 인사를 하고 루브르 구경 마무리. 

 

다빈치 선생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은 지금까지 20개 뿐인데, 그중에서도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다빈치의 작품이 확실한 것은 그나마도 몇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굴의 성모>도 '다빈치가 참여해서 그린 것은 맞는 것 같지만 타인의 기여가 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도의 단서가 붙은 작품. 

(그런데 대체 어쩌다 이 다빈치 선생은 이렇게 대단한 화가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이 짧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이 이 분이 그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좀 무섭다.)

 

아무튼 이번에는, 세번째 루브르를 방문해 그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행동을 했다.

어라 이런 것들도 있네 싶은 수많은 전시실을 돌아 도착한 곳은 

네. 화장실.

혹시 가 보셨습니까? 루브르 화장실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 많은 관광객들에 비하면 화장실 수는 정말 적고... 안에 들어가면 비정상적으로 넓은, 희한한 구조.

그리고 이 많은 그리스 도자기와.... (사실 이것도 화장실에 가까워서 한번 찍어 본 것)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 이를테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책을 전부 다 읽는다든가, 루브르 안에 있는 모든 소장품을 다 본다든가. 

 

어쩌다 파리에 살 일이 생기면 감히 한번 도전이라도 해 보련만, 여행자란 항상 바쁘고, 아무리 여유있어도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 할 것은 항상 많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아예 루브르는 일정에서 빼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와 보고 나니, 역시 루브르를 방문하지 않고서 파리를 다녀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뭔가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유산들에게 그동안 잘 계셨나 인사드리고 오는 수준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상 부실한 2024년의 루브르 방문기를 이걸로 정리하며.... 

과연 금생에 파리 올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소. 그때까지 안녕히들 계시길. 

도보로 세느강을 건너러 간다.

다리 위에서 봐도 예쁜 밤의 파리.

강 건너편의 루브르.

그렇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죽 내려간다. 

10분 쯤 걷다 보니 보인다.

조엘 로부숑의 아틀리에. L'Atelier de Joel Robuchon.

현재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따낸 셰프'로 공인된 스타 셰프 조엘 로부숑의 소위 '본점'이라 불리는 레스토랑이다. 현재 파리에 2개, 도쿄, 런던 등을 합해 총 12개의 레스토랑을 통해 32개의 미슐랭 스타를 따냈다.

 

그런데... 정작 이 '본점'은 현재 별이 없다(가 보고 난 뒤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랬다). 같은 파리에 있는 에트왈 점은 원스타. 가장 많은 별을 가진 곳은 홍콩 지점으로 3스타.

 

뭐 아무튼 별 수가 뭐가 중요해! 여기가 본점이라고 본점! 

(꼭 여기를 가라고 강추하셨던 문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만 별이 없나요. ㅎㅎ)

단체석이나 마주보는 테이블도 없는 건 아닌데, 대부분의 좌석이 바 형태도 되어 있다. 

아무튼 파리에서도 부촌이라는 생제르맹 지역. 주변 분위기는 아주 좋다.

일단 코스를 주문하고, 샴페인도 한잔. 기분인데!

인테리어가 독특하다. (옆엣분은 '내 취향은 아니야' 라고 자르심.)

어느새 거의 전 좌석 만석.

자, 메뉴를 봅시다. 

1. 아뮤즈부쉬

2. 라임을 곁들인 도미 카르파치오

3. 세가지 질감의 양파 수프

4. 푸아그라

5. 푸아그라와 트뤼플 소스를 곁들인 왕새우 라비올리

6. 무와 미소에 재운 대구 구이

7. 우유에 담근 양 갈비와 타임, 그리고 매쉬드 포테이토

8. 치즈

9. 바질과 열대과일 주스를 곁들인 밀크 아이스크림

10. 아라구아니(Araguani) 초콜렛 가나슈, 코코아 

이상 10개 코스에 인당 159유로. 네네. 비쌉니다. 그러니 파리까지 와서나 한번. 

식전빵. 말해 뭘 하나. 당연히 맛있다.

아뮤즈 부쉬. 호로록 짭짭. 뭔지 기억 잘 안 남. 아무튼 맛있었다. 

도미 카르파치오. 라임 주스가 많이 들어가 있어 사실상 세비체. 당연히 맛이 없을리 없음. 국물까지 쪽쪽. 

이 대목에서 레드와인 도 한잔!

세가지 풍미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양파 수프. 흔히 생각하는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아니고, 아주 진득한 맛. 

푸아그라. 솔직히 말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난린가. 느끼하다.

개인적으로 대구 이리나 홍어 애가 훨씬 맛있다.

랑고스틴으로 만든 라비올리. 소스가 끼얹어져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냥 한입. 맛있어.

미소에 절인 대구...라고 되어 있는데, 옆에 무까지 있는 걸로 보아 일식 기분을 내려고 많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무를 쓸거면 국물에 푹 삶아서 양념이 가득 밴.... 얘들이 아직 고등어나 갈치조림에 들어간 무 맛을 모르는 것 같다.

양갈비 구이와 타임. 그리고 그 유명한 매쉬드 포테이토. 

양갈비가 생각보다 너무 연약했는데 아무튼 맛은 당연히 좋았다. 매쉬드 포테이토도. 감자 더 드릴까요를 물어보는데, 한입거리씩 먹은 게 뱃속에 쌓이다 보니 배가 꽤 불러왔다. 

 

이게 아마 주는대로 팍팍 먹어 치우는 느낌이었다면 배가 안 불렀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여기까지 먹는데 두시간 반 정도 걸렸다는 것. 음식이 나오면 먹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마 어마 어마하게 긴 거다. 음식과 음식의 간격이 약 20분 정도?

 

아 물론 이해한다고. 그렇게 천천히, 맛난 음식을 음미하면서, 와인도 한잔 하면서, 같이 온 사람과 대화도 나누면서, 그렇게 만찬을 즐기는게 이 프렌치 코스 디너의 진정한 의미라고 하겠지. 안다고.

 

그런데 느려도 너무 느려! 졸리다고! ㅠㅠ

어 왜 치즈 사진이 없지 ;; 아무튼 치즈가 나왔고, 먹었고, 첫번째 디저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입맛을 다시게 하는 새큼한 열대 과일 주스. 

여기까지 먹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에? 아직 코스 안 끝났는데요 손님, 네네. 알아요 알아. 여기까지만 먹고 갈게요. 맛이 없어서도 아니고, 분위기가 나빠서도 아니고, 지겨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디저트는 포기할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산 처리하는 것도 꽤 느려서, 계산서와 함께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초콜렛과 생크림, 그리고 오레오쿠키 부순 가루로 만든 가나슈. 주위의 새큼달큼한 잼과 함께 먹는다. 그렇게 해서 코스 완주.

 

모든 코스가 당연히 맛있고(푸아그라 빼고), 재료의 수준이나 들인 공, 서빙하는 인건비를 생각하면 저 정도 가격이 그리 비싼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제발 음식은 조금만 빨리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파리 방문 중 가장 화려하고 긴 식사를 마쳤다.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에 먹는데만 대체 얼마를 쓴거냐)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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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8일. 숙소 옮기는 날. 

그 말인즉 파리에서 머물 날이 2박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 ㅠㅠ. 

모든 숙소는 집이라서 떠날 때는 아련해진다.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짐을 싸서 프론트에 맡겨 놓고, 근처 멋진 데 가서 비싼 점심을 먹기로.

집(?)에서 세느강 쪽으로 가면 사마리텐 백화점이 나오고, 그 옆 건물의 꼭대기 층, 저 돔 같은 지붕에 콩 Kong 이라는 유명 레스토랑이 있다. 왕년의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와 유명해진 곳.

(처음엔 잘못된 정보로 저 장면 촬영지가 퐁피두 옥상의 조르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기였다.)

 

뭐 어찌됐건 이번엔 최근 더 핫한 곳으로.

사마리텐 백화점을 지나 강을 따라 서쪽으로 몇발짝 가면,

슈발 블랑 호텔이 나타난다. 

신상 호텔. 밤에 보면 조명발이 더 예쁜데, 아무튼 이날 따라 날이 화창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퐁 뇌프를 아니 걸을 수가 없지. 

<퐁뇌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 Neuf>... 이거 아시는 분들 최소 연식이. 

 

저땐 줄리엣 비노쉬도 젊었고, 나도 젊었고...

(한때 누군가 소개팅 하라고 할 때마다 '줄리엣 비노쉬같이 생겼대'라는 말이 유행하곤 했었다. 당연히 곧이 들으면 안되는 말들... 요즘 기준으로는 김고은 닮았다는 말에는 절대 넘어가면 안된다던데.)

암튼 그 퐁 뇌프. 영화에 나오는 칙칙한 분위기 아님. 관광객 넘실넘실.

다리 위에서 다시 슈발 블랑을 보고, 예약 시간에 맞춰 입장. 

저 건물 7층의 테라스가 튀어 나온 곳, 거기에 목적지인 르 뚜 파리 Le Tout Paris 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아 통창을 통해 레스토랑 안을 보는 순간, 아, 예쁘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알록달록 화사. 

처음엔 욕심껏 창가쪽 자리를 잡았다가, 강렬한 직사광선 때문에 안쪽 자리로 다시 요청했다. 

이렇게 앉아서 세느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어차피 전망은 테라스로 나가서 보는 게 더 낫다.

사실 날씨가 따뜻했다면 테라스를 예약했겠지.

(좋은 날씨에도 테라스에서는 식사는 안 되고, 술이나 음료만 된다고 함. 참고들 하시길.)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안쪽 테이블에서도 전망이 잘 보인다. 

테라스에서 안쪽을 보면 이런 느낌.

굳이 창가 자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듯. 

메뉴, 듣던대로 가격은 상당히 사악함. ㅎ

그래도 파리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니고... (아 모르겠다 막 시켜)

전채 요리. 

음료 잔 안의 얼음에 박힌 백마 로고가 앙증맞다.

백마는 바로 호텔의 이름인 슈발 블랑 Cheval Blanc 을 상징하는 것. 로비에 이런 것도 있다.

문득 한비자에 나오는 아열의 백마비마( 白馬非馬: 백마는 말이 아니다) 고사가 생각나려다... 말았다.

식전에 왜 과자를 주나 싶긴 한데, 아무튼 주니 고맙다. 맛도 좋고, 모양도 예쁘고.

비싸다는 느낌을 완화하려고 뭘 자꾸 주는거냐.

심지어 식전빵도 예쁘다. 맛은 당연히... 여기 빠리라고요. 빵의 도시.

식전빵이 나오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겨서 

화장실

화장실 앞 대기공간 

그리고 바 테이블을 슬쩍 둘러봤다. 참 공들인 가꿈. 

아무튼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 하나 나오는데,

농어. 서더리 부분을 잘라내고 고갱이만 구움. 당연히 맛있는데... 양이 적고 비싸다. 

자... 크기 보고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블루 랍스터. 뭐 크기는 상상하시는 그 크기. 물론 맛은 있다.

그리고 아티초크 지짐.

모듬 구운 채소. 뭐 이것도 조금. 

빵과 디저트는 제공, 여기서 탄산수와 버진 칵테일 한잔 해서 180유로 정도 나왔다. 

 

사실 정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 비싼 가격이긴 한데, 파리라는 이공간, 그 중에서도 핵심 공간 체험료라고 생각하니 또 낼만 하다는 생각도 들고. (아 몰라. 어차피 파산)

본전을 뽑기 위해 테라스 구경. 볕이 드니 참 좋네.

시테 섬 왼쪽으로 공사중인 노틀담이 보인다. 

당연히 반대쪽으로는 에펠탑이. 물론 이 전망을 밤에 보면 반짝반짝해서 더 좋다는 얘기가 있더라.

이건 이 호텔 옥상에 있는 셀레스테라는 바의 야경인데, 각도로 보아 르 뚜 파리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야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음. 아무튼 좋네. 

딱 정면은 이런 풍경.

막 이런 것도 해보고.

특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다. 날씨 좋은 날 밤, 이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잔.... 그런 그림이네.

그러고보니 12월. 

1층에는 예쁜 트리가 있다.

참 예쁘고 비싼... 기억을 담고.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동네 길을 지나 호텔로 짐 가지러.

워낙 날이 흐리다보니 파란 하늘이 매우 정겹다. 

샤틀레 안녕~

그렇게 해서 시타딘레알에서 볼트를 불러 타고,

힐튼 오페라로 이동.

뭐... 파리 호텔 같다.

1층 카페 겸 레스토랑 겸 바. 

'파리의 호텔'이라고 하면 생각날 듯한 그런 풍경이다.

방도 크고, 화장실도 크고, 옛날 호텔이라 좀 이상한 것도 있는데 아무튼 널찍널찍 좋다.

역시 비싼게 최고...

코너 방이라 큰 창도 두개나. (아 네. 하나는 반사)

욕실 바닥도 따뜻.

네네. 결혼 20주년, 돈 쓴 보람이 있군요.

서울에선 없어진 브리오슈 도레가 여기에.

아무튼 점심식사로 시간을 너무 소요한 관계로,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다.

아무튼 이번엔 호텔이든 뭐든 위치 중심으로. 

전철로 두 정거장 내려가 코너를 돌면,

응 피라미드, 오랜만이야. 

루브르는 1988, 1998에 이어 세번째 방문. 물론 세번째라고 해도 사실 늘 똑같다.

아무튼 이번엔 야간개장 하는 날 오후 4시 정도가 가장 덜 붐빈다는 어떤 분의 말을 믿고, 그 시간으로 예약했다. 

줄이 진짜 별로 없네

씐나셨군요.

정말 좀 한산한가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

아무튼 식순에 따라 니케 여신에게 루브르 왔다고 신고를. 

어휴 25년... 만에 보니 많이 낡았네.

그리고 눈썹 없는 그분께도 역시 인사를 드려야.

항상 느끼지만, 루브르에 온 사람의 한 1/5 정도는 니케 여신상과 모나리자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어디 안 가고 잘 계신거 확인했으니 됐네.

길 잃지 말고 잘 보세요. 

 

사실 루브르에 맨 처음 와서 놀란 것은 "와,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들이 그냥 이방 저방에 다 걸려 있어!" 라는 것인데, 나이 먹어 생각해보니 우리가 어려서 본 미술 교과서들인 너무나 19~20세기 프랑스 주요 미술관 위주로 작성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루브르라는 이 공간의 위력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여기 걸린 작품들의 가치가 별로라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루브르에 와 보면 이 공간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 하나가 이 오이디푸스 그림과 아래쪽 잔다르크를 그린 장 오거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줄여서 그냥 앵그르).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초상을 그린 자끄 루이 다비드와 그림 속의 주인공인 나폴레옹.

잘 아시겠지만 다비드는 말하자면 나폴레옹의 어용화가(또는 어진화사)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 지금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아울러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응원에 힘입어 온 유럽과 이집트를 누비며 각국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리로 실어 날라 이 루브르의 드넓은 공간을 가득 가득 채운 주모자.

당연히 이 유명한 그림도 다비드의 작품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폴레옹 1세의 생김새는 거의 모두 다비드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비드의 최고 걸작은 역시 이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ㅎ

이른바 옛날 미술 교과서 최고의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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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긴 일정의 하이라이트. 클라우스 메켈레의 앵콜. 

물론 이건 늦은 밤 얘기고, 당연히 오후 시간대로 되돌아갑니다. 

밖으로 나오니 가는 비가 살짝 오락가락.

파리 사람들은 이런 비에는 익숙한 듯, 우산 쓴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동행인이 뭐 좀 사러 가야 한다는 곳이 있어서 비내리는 마레 거리를 조금 걸었다.

샵 이름이 메르시. 바로 옆의 농 메르시는 다른 가게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메르시 아님'이라고 가게 이름을 정한 걸 보면 주인이 같은 가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저 메르시는 커피숍 입구고, 정작 편집샵으로 들어가려면 바로 옆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과 함께 샵 메르시가 등장한다. 

그리고 샵 안에서 내다보면 이렇게 커피숍과 연결된다. 

물론 연결된다는 것은 공간의 연결이고, 샵에서 커피숍 쪽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 아무래도 물건을 쓱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커피숍으로 갔다가 도망친 도둑들이 꽤 있었지 싶다. 어쨌든 편집샵 안은 생각보다 엄청 넓고 물건도 많고... 한국말도 많이 들리고...  (아는 분들은 다 아는 데라고)

물론 태생이 물건 사는데 별 관심이 없는 터라(먹을 수 있는 물건 빼고) 이런 곳은 들어가는 순간, 제발 언제 나갈 수 있는 지 알려줘, 하는 심정이 된다. 대강 봐선 물건 값도 비싸다. 

그렇게 비가 살짝 뿌리는 마레 거리를 조금 걷다가, 꽤 알려진 카르나발레 박물관/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동절기 휴관. 으슬으슬 추운 가운데 뭔가 차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보주 광장 주변의 유명한 카페라는 카레트 Carette 라는 곳을 갔으나, 역시 사진 한 장 찍고 싶지 않은 그저 그런 공간. 

 

숙소로 돌아와 저녁 스케줄을 위한 재정비를 하고, 북쪽으로 출발했다.

일단 저녁을 먹으러 향한 곳은 벨레뷜르 지역의 동 후옹 Dong Huong.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난번에 파리에서 먹었던 쌀국수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터라, 이번에도 파리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쌀국수였는데, 불행히도 한번 좌절했다. 

그래서 이번에 검색을 통해 다시 도전한 것.

현지 매체에서는 '파리에서 진정한 베트남 쌀국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몇 곳...' 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그런데 저 위평 為平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메뉴에는 為平牛粉이라고 써 놨던데... 뒤의 牛粉이야 소고기 쌀국수라는 뜻이겠지만 위평은 대체 뭣일지. 

동 후옹이라고 쓰면 중국 남부의 동썅 桐鄕 이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식당 집안의 조상이 저 동썅에서 오신 분들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베트남어로 동 후옹이 또 다른 뜻이 있는지도.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고이꾸온을 주문했는데.... 한입 깨물었더니 고기 냄새가 역하다.

고기가 삶아 놓고 냉장고에서 일주일은 버틴 듯한 냄새. 갑자기 자신감이 땅으로 꺼졌다.

구운 고기는 언뜻 보기엔 먹음직스러웠으나 어떤 건 질기고, 어떤 건 설익고. 

기본 쌀국수는 나름 괜찮았으나 기본적으로 국물이 너무 달다. 대체 4년, 코로나 사이에 파리의 쌀국수 집들이 단결해서 다들 설탕 한 숟가락씩 더 넣고 장사하자고 합의라도 한 것인가. 

아무튼 총평은: 쌀국수는 그럴듯 했으나... 굳이 다른 지역에서 차 타고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는 걸로.

사실 목적이 라 빌레트에 있는 파리 필하모닉 홀을 방문하는 거였기 때문에 중간의 동 후옹을 갔던 거라서. 굳이 애써 동선을 낭비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1998년에 방문한 라빌레트는 파리 북쪽의 공원이었고, 그 한 구역이 엑스포 같은 형식의 청소년을 위한 미래 과학 홍보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과연 그 시설은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궁금했는데, 2015년에는 파리 필하모닉의 새 보금자리가 이곳 라빌레트에 지어졌다.

입구쪽에서 걸어가다 보면, 조명을 받아 빛나는 은갈치같은 괴물이 보인다.

오오 멋지다.

 

낮에 보면 이런 모습이라는 얘기. 장 누벨의 작품인데 안 멋질리가...

약간 빙빙 돌아서 입장해 보면 대기 공간이 이렇게 생겼다.

내부를 잠시 돌아보니 바는 4곳이나 있고, 다들 모두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은 아주 아주 아주 먼 곳에, 몇개 안 된다. 이상하게도 이 나라는 공중화장실을 굉장히 천대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공연장에서. 저렇게 한잔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화장실을 이렇게 멀고 적게 짓는 이유는 뭘까. 

아주 아주 그럴듯한 내부 공간.

무대도 막 멋지고.

글쎄 간거 맞다니까요.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부분확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코러스석 쪽에 설치된 장애인 특별석. 

개를 데리고 들어와 있다. 맹인용 인도견은 짖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콘서트 홀 안에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이것도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강아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쪽으론 선진국 맞는 느낌.

관객들이 꽉꽉 차고, 시작한다!

마켈레 등장.

이 동네 사람들은 음악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외에는 사진을 마구 찍어댄다. 당연히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

한국이 좀 특이한 듯. 

클라우스 마켈레. 이 공연을 보고 있을 당시 27세. 세계 지휘계의 신성이자 아이돌. 훤칠한 키와 훈훈한 외모, 역동적인 지휘로 2021년부터 파리 필하모닉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아주 핫한 유자왕 언니의 남친이 되어 세계 클래식계의 핫 커플로 자리한지... 아직 잘 사귀고 있겠지?

어쨌든 이날 메켈레가 동향 북유럽의 16년 선배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노르웨이 출신)를 독주자로 불러들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임윤찬 덕분에 더욱 핫해진 이 곡. 

 

임윤찬이 섬세하고 투명하다면 이 듀오는 지칠 줄 모르는, 데스메탈을 연상시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출해냈다. 장하다 스칸디나비안 브라더스, 역시 메탈의 고향! 바이킹 화이팅! 

그런데 이날 콘서트는 왠지 여기가 하이라이트였다는 느낌. 그 다음 메인 연주곡은 12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 때마다 호두까기 인형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는 서구 관객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딱히 큰 감회가 없었다. 

 

어쨌든 메켈레와 장 누벨의 홀을 경험했으니 여한은 없다. 파리 도착 후 시내에서는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날인데, 중간에 잠시 전철이 끊기는 사고(그러나 옆에 서 있던 한 파리 시민은 '이런 일 늘 있어요' 라며 별 짜증도 안 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있었으나 다른 노선을 이용해 무사히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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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한 층을 내려가 퐁피두 4층.

걷다 보니 샤갈 특별전을 하고 있네. 아무리 샤갈의 도시지만 너무 편애하는거 아니냐는 생각으로 들여다보니, 뜻밖의 사연이 있는 전시다. 알고 보니 샤갈이 의상 디자이너 역할까지 했다고 하네. 

사연인즉,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라고 하면 다 아실 바로 그 단체. 번역하면 '미국발레단'이라 그냥 저렇게 썼다)가 1944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새로운 안무로 싹 리뉴얼하려는 시점. 책임 연출자 루시아 체이스는 이미 완성된 무대 세트와 의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존경하는 마르크 샤갈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의 러시아적 감성으로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세요! 스트라빈스키 선생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설득을 했겠지. 사실 샤갈은 벨로루시 출신이지만 아무튼. 

급하게 일을 맡은 샤갈은 딸 이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100여벌의 의상과 소품 등등을 급하게 다시 만들어 냈는데,

불행히도 야심찬 새 공연에서 안무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평을 들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 공연에서 칭찬받은 것은 샤갈의 혼이 담긴 의상 뿐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샤갈은 체이스를 위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내용인 즉 '내가 보기에도 안무는 좀 이상했다. 그러니 빨리 조지 발란신에게 부탁해서 다시 어떻게 해 보라고 해라.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뭐 그런 얘기였다고.

그래서 발란신이 투입된 결과, 1947년의 새로운 안무는 성공을 거뒀고 샤갈의 의상도 같이 전설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스케치 하나하나가 다 멋진 건 당연한 일인데,

과연 샤갈의 이 꿈속같은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승화시킨 디자이너/재단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실제 만들어진 옷이 궁금하기도 하다. 

자료를 보내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 듯. 물론 그림이 더 멋지다. 영화도 항상 원작 소설이 더 좋듯, 당연한 일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샤갈이 나타난다. (퐁피두는 정말 샤갈을 사랑하나보다)

바로 1963년,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준비했던 밑그림들. 

샤갈은 그냥 붓 대고 막 그려서 그런 그림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샤갈도 미리 다 그려보고 하는 거였구나. ;; 

음...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거 같은데 말이지. (응 아니야)

아무튼 이런식으로 완성된 그림을 며칠 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실제로 이 천정화의 감동은, 퐁피두에서 원화를 보고 갔기 때문에 더 컸다.

 

샤갈을 빼고도 퐁피두의 4층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물론 '생각보다'가 중요하다). 게다가 5층은 작가 하나에 그림 하나 정도씩 수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4층은 작가 하나에 딸린 전시공간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현대미술의 그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이렇게 퐁피두에 자기 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물론 4층은 상설전시라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작가를 바꿔 전시하는 듯 했다. 안 그랬다가는 큰 일이 났을지도... 

일단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장 뒤비페의 <겨울 정원 Le Jardin d'hiver>. 겨울 정원이라는 말은 '온실'이란 말로도 해석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온실이라기보다는 그냥 알타미라 동굴 같은, 구석기 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동굴 같은 느낌. 

회화가 아니라 3차원의 꽤 큰 동굴이라, 이렇게 안에 들어가서 기념촬영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실제 간거 맞음)

그리고 끌렸던 그림은 마크 브뤼스 Mark Blusse 의 <퉁그라우아의 딸 1   Mister Tungrahua's daughter I>. 퉁그라우아는 찾아보니 에콰도르에 있는 화산의 이름이라고. 2001년작인데, 여기서도 뭔가 일본 판화의 느낌이 솔솔 풍긴다. 

 

그 뒤로는 대형 설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키네틱 아트의 대가 야코브 아감 Yaacov Agam 이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집무 시절, 엘리제 궁 안에 있던 대통령 개인공간 안의 한 방을 이런 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1974년이라니 퐁피두 센터를 막 짓고 있을 무렵인 듯.

그리고 나서 후임 지스카르 데스탱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자, 이 공간을 철거해서(...아무래도 취향이 안 맞았던 게 아닐까), 그대로 뜯어다 퐁피두 센터에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TMI: 알고보니 아감은 88 올림픽 공식 작가라 이런 것도 했다고 한다. 이런 5공 부역자였다니...)

그리고 또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한 또 다른 작품은 주세페 페노네 Giuseppe Penone의 <숨쉬는 그림자 Respirare l'ombra>.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벽의 표면은 월계수잎이 켜켜 덮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벽 한 구석에서 빛나는 황금의 폐. 작가는 이 작품 안에 페트라르카와 그의 연인 로라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문학의 정서를 전혀 모르다 보니 그런건 잘 모르겠고... 도시의 성벽처럼 화석이 되어 가는 잎들, 그 안에 금속으로 굳어진 폐, 이것만으로도 자연과 멀어져가는 문명의 공허함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 

 

옆을 보면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의 <벨리미르 클레브니코프에게 : 전쟁의 새로운 이론 Für Velimir Chlebnikow: neue Lehre vom Krieg Schicksale der Völker>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도 '벨리미르 클렘니코프에게...'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다. 전시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2차대전때 사용되었을 법한 녹슨 잠수함들의 모습. 클렘니코프는 중요한 해전은 317년마다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기이한 이론을 내놓은 러시아 시인(시인이 대체 왜...) 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무튼 내용은 뭘라도 설치의 규모에 압도되는 이 소시민 같으니. 

또 한 구석에서는 중국계 태국 화가 탕 창 Tang Chang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요즘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 화가들의 물결인가... 하고 보니 혈통이 중국계일 뿐(한자로는 陳壯), 태국에서 태어나 사망한 태국 작가. 심지어 중국어로는 위키 페이지도 없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명성이 높은 듯. 

아무튼 눈길을 끈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무제 Sans titre>. 아마도 자화상이 아닐까... 

맞는듯.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었던 작품이 마르게리트 위모 Marguerite Humeau의 <지상2 Gisant II>. 지상이란 우리가 중세 묘지에서 많이 보던, 묘소 위에 누운 형상으로 조각된 고인의 모습을 말한다(불어 발음은 '지조'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한데...). 

누가 봐도 코끼리의 두개골 같은 형상인데, '작가에 따르면' 뒷부분은 인간의 발성기관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진화의 어느 한 시점에, 지금의 인간의 말소리를 낼 수 있는 형태로 발성기관의 돌연변이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런 돌연변이가 만약 코끼리에게서도 일어났다면 어떤 생물이 등장했을까.... 라는 상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다. '이해하기 위해 언어로 된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더 이상 미술이 아니지' 라고. 하지만 현대미술의 시대가 오면서, 과연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이런 위모의 작품처럼 그저 '보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식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온 작품이라면. 

 

아무튼 80년대생의 젊은 작가이면서 '현대의 다빈치'라고 불릴 정도로 지식과 예술의 결합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작가라니 역시 관심이 아니 갈 수가 없다. 

이번 방문을 통해 몇몇의 관심 작가를 마음 속에 등록하고 퐁피두를 나선다. 안녕. 언제 또 다시 만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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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7일. 파리의 목요일.

이제 중간을 넘어, 집에 갈 날이 더 가까워진다.

오전을 휴식시간으로 보내고, 느즈막하게 퐁피두 센터로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퐁피두 센터는 상당히 큰데, 거기서 옥상층에 있는 레스토랑 조르주  Georges 로 가려면 저 흰 파라솔을 찾아야 한다.

여기.

저 아저씨의 허락을 받고, 빨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올라가다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환승.

당연히들 아시겠지만 루브르가 19세기 초까지, 오르세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를 대표한다면 퐁피두 센터는 대략 1차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대변해주는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퐁피두 센터 주변은 참 많이 돌아다녔지만 지금까지 내부의 미술관을 구경해보지는 못했다. 어려서는 현대 미술에 대한 막연한 반감으로 저런건 봐서 뭐해, 하는 생각이 결코 없지 않았고, 얼마 전에는 일하느라 구경할 짬이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어디서나 보이는 에펠 타워.

예쁘다.

예쁘네.

그리고 꽤 올라갔다 싶으면 도착.

바닥이 좀 어수선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파리의 하늘이다. 

날이 좋으면 밖에 앉을 때 더 기막히련만, 꽤 추운 날이라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상 오픈런이라 자리는 여유있는 편.

웨이터 간지 뿜뿜.

퐁피두 센터의 외벽도 노출 파이프가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내부도 이렇다.

 

퐁피두 센터가 지어진 것이 1977년. 리처드 로저스렌초 피아노라는 두 거물 건축가가 설계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이 앞을 지나갔던 1988년에도 가이드 형님이 "외관만 보면 공사중인 건물처럼 보이지만 공사중 아닙니다. 원래 저런 모양으로 만든 겁니다"라고 했었다. 

 

지금은 온 동네의 상식처럼 된 저 노출 파이프의 원조가 아마도 여기일 듯. 

이른 점심이라 수프 하나, 파스타 하나, 로스트 치킨만 주문. 

뭘 많이 배터지게 먹자는 게 목적이 아니고, 여기서 한번 식사를 해 보고 싶었다.

망고가 들어간 소스와 잘 구운 닭, 좋은 조합이다.

디저트는 왜 사진이 없는지.

아무튼 아침 먹은지 얼마 안 되어서 가볍게 점심. 이렇게 풍경에 초점이 맞춰진 식당들은 대개 음식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음식도 훌륭했다. 가격도 엄청 비싼 편은 아니니 한번씩 방문해보실만. 

역시 레스토랑은 손님과 음식이 내장의 일부다.

아무리 멋지게 꾸몄어도 빈 식당은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 손님들이 차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살기 시작했다.

굿바이 조르주.

사실 조르주에서 밥을 먹으면 좋은 점 하나는, 1층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점. 본래 뮤지엄 패스가 있어도 퐁피두 센터는 줄을 서야 입장 가능인데 조르주에서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게 팁이라면 팁.

사실 퐁피두 센터=미술관이라고 지금까지 쓰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퐁피두 센터는 이 건물의 이름이고, 정작 미술관은 프랑스 국립 현대 미술관( 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이다. 이 미술관이 퐁피두 센터의 5층과 4층을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다들 퐁피두 센터=미술관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그래서 5층으로 들어가 잘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5층은 현대 회화 컬렉션, 4층은 컨템퍼러리 컬렉션, 즉 5층에는 20세기 초 거장들의 이미 고전이 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찌나 컬렉션이 방대한지, 한 작가에 한 작품 이상의 공간이 할애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퐁피두 5층에 만약 두 작품 이상이 전시되어 있는 작가가 있다면 그만치 편애받고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을 듯. (내 맘대로 해석)

시작은 앙리 마티스, <빨간 물고기가 어항속에 있는 봄철의 실내 Interieur, bocal de poissons rouges Printemps>, 1914

역시 마티스, <붉은색과 흰색의 머리 tete blanche et rose>

조르주 루오, <다친 광대 Le Clown blesse>, 1932.

앙리 루소와 함께 미술 교과서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화가가 루오였다. 굵은 테두리로 얼굴을 그리는 스타일 때문. '예수처럼 보이는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라는 기억이 오래 남았는데, 이 <다친 광대> 역시 뭔가 연민을 자아내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 샤갈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퐁피두, 아니 샤갈 없이는 무의미한 파리. 

 

<빨간 지붕 Les Toits rouges>, 1953. 달 아래 보이는 건물이 노틀담이라고 한다. 벨라루스 출신이면서 "파리는 제2의 비쳅스크(자기 고향)"라고 말했던 샤갈이 파리를 그린 그 수없이 많은 그림들 중 하나. 

<나의 아내 A ma femme>, 1933/1944. 그리고 역시 수없이 많은, 아내 벨라와 자신을 그린 그림 중 하나. 

 

근래 한때 에곤 쉴레 같은 패륜적 사생활의 작가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샤갈은 참 모범적(?)인 삶을 산 듯. 

늘 <에펠탑의 신랑신부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들 듯. 생각보다 작았다.

 

알베르토 마넬리 Alberto Magnelli, 잘 모르지만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수레 위의 노동자들 Les Ouvriers sur la charrette>

그리고 금세 알아볼 수 있는 페르난드 레제르, <수업 La Lecture>. 

사실 누구나 수업에 들어가면 저 눈빛이 되지 않을까. ㅎ

그림만 있는게 아니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의자들도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저 의자 어디서 많이 봤는데. 

유명한 호안 미로의 <파란색 2호 Bleu II>. 1호랑 3호는 어디갔니. 

그러고보니 이쯤에서 기념샷을 하나 찍었어야 했는데 너무 그림만 찍었네. 

전날 친해진 보나르를 다시 만나니 반가움이! <욕조의 누드 Nu a la baignoire>. 

1931년작이라 그런지 나비파 시절의 기상(?)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저 의자에 걸친 수건들의 요염함이란.

마리 로랑생도 현대인이었구나. <누운 무희 Danseuse couchee>, 1937.

그리고 이 층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들 중 하나. 가스통 셰샤크 Gaston Chaissac 이라는 화가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구성 Composition>. 노동자 출신의 독학 화가라고 한다. 

셰샤크의 또 다른 작품. <두 얼굴의 토템 Totem double face>, 1961.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 1970년대가 막 나오기 시작한다. 

베르너 팬톤, 잘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디자이너. 제목은 <의자 생활 조각 Siege Living Sculpture>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제목인지 해설인지 모르겠다. 뭐 의자로 쓸 수 있겠네. 아무튼 색감이 마음에 든다. 

많이 보던 그림. 누가 봐도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에 대한 패러디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잘 보면 화면 상단에 파리가 앉아 있다. 안 날아간다. 진짜 파리 아니다. 

작가 이름은 마르샬 레스 Martial Raysse. 앵포르멜에 대항한 누보 레알리즘 계열의 작가고, 이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파스티슈 pastiche를 많이 사용했다. 그림의 제목은 참 엉뚱하게도 <일제, 라 그랑 오달리스크 Made in Japan - La Grande Odalisque>. 1964년작. 

 

1964년이라니까 왠지 도쿄 올림픽이 생각나고, 문득 오달리스크의 머리 수건 장식이 만국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설을 보면 그 시절 유럽 기준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던 싸구려 일본 물건(요즘의 중국 물건에 해당하는 - 우리는 다 이 길을 걷고 있다)들을 대강 걸쳤다는 뜻이라는데.

 

일본에선 별 인기 없는 작가일 듯. 

말 나오기가 무섭게 등장하는 일본 화가(퐁피두에서 딱 한점 눈에 띄었다). 시라가 가즈오라는데 일본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는 화가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이거 화단의 BTS나 조성진 아니야?)

아무튼 그림 제목은 <7월, 자연의 행성> Planete nature, juillet. 사실 이 그림을 눈여겨 본 것은 작년 서울에 전시됐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과 너무 흡사해서였다. 

비슷하지 않음? ㅎㅎㅎ 

대략 호안 미로의 작품들 같은 것이 있는데 테라스는 겨울엔 닫는대서 안 나가봄.

그렇게 그림들에 파묻혀 걷다가 문득 바깥을 보면 그림같은 파리의 지붕들이 보인다. 

사실 이 지역은 슬럼화된 도심이었는데, 1970년대 파리의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 사업에 의해 퐁피두센터가 지어지고, 주위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따 퐁피두 센터가 된 것. 

 

대통령이 되어 이름을 남기려면 이런 식으로 남겨야지. 한국 전직 대통령들의 이름은 다 어디에 가 있는가. 

 

참 거시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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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오르세는 왕년에 기차역이었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1986년 개관). 그래서 엄청난 층고와 천장을 통한 채광 덕분에 실내지만 놀라운 개방감을 자랑한다.

특히 2층 회랑은 로댕을 비롯한 다양한 대가들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천천히 2층을 산책하면 만족감은 배가된다.

2층 회랑에서 이렇게 아래층을 내려다 보든,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그러다 발견한 건물 모형. 이게 뭐지 했더니 곧 가 볼 건물인 오페라 가르니에 단면 모형이다.

팬텀이 누비고 다니던 지하 공간까지 잘 보인다.

오... 그림만 봐도 상승하는 기대감. 하지만 몰랐다. 그림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질 줄은.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오페라 가르니에 꼭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공연을 보든, 투어를 하든.

쿠르베가 그린 에트르타 해변의 코끼리바위.

그리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도미에 Daumier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그림. 아마 이런 풍의 돈키호테 그림을 도미에는 한 300장 정도 그린 모양이다.

그리고 추억의 그림. 아마 20세기 말 언제쯤 '한국인이 좋아하는 세계 명작 회화'를 조사했다면 당당 탑10에 들었을 작품. 그 뒤로는 그림의 해석을 놓고도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게 평온한 저녁 기도 장면이 아니고, 굶주림 끝에 죽은 어린 아이를 묻으려는 젊은 부부의 비통함을 그린 작품이다... 뭐 그런.

 

<만종> 바로 옆에 있는 이 그림, <이삭줍기> 역시 추수한 곡식은 저 뒤에 있는 지주들이 다 걷어가고, 정작 농민들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야 먹고 살 수 있는 농촌 현실을 고발한 그림이라는 얘기, 그리고 세 여인의 두건 색깔이 청, 적, 백의 삼색기 색깔인 것이 우연이 아니라 혁명과 민중의 의식화를 부르짖는 그림이라는 주장까지.

 

아마도 바르비종파 안에서도 장 프랑수아 밀레가 두드러진 운동권이라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 본 덕수궁의 <밀레 전> 때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당대 화가들의 운동권성이 드러나는 그림 또 하나. 오노레 도미에의 <공화국>.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공화국 La République nourrit ses enfants et les instruit>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불온한 사상(?) 때문에 당시에는 전시되지 못했던 그림이라는. 물론 도미에는 돈키호테 그림을 안 그릴 때는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도 많이 눈에 띈다.

 

물론 프랑스의 19세기 후반에는 다들 인상파처럼 뭔가 뿌연 그림이나, 아니면 저런 운동권 그림들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화가들이 바로 옆에(오르세 미술관 전시공간 기준) 배치되어 있다.

 

일단 오르세가 자랑하는 두 개의 비너스.

너무나도 유명한 카바넬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과,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부그로?) William Adophe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 

만약 세계의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 여자를 가장 예쁘게 그리는 화가를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부게로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를 꼽겠다. 둘 다 예쁘다 못해 요기 妖氣 넘치는 그림들을 그리는 스타일. 아무튼 엄격한 다비드와 앵그르의 적통을 잇는 제자들도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풍성하게 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부그로의 그림들은 때로 요염하다 못해 요기가 지나쳐 공포감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지옥을 방문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다. 그림의 위치와 조명의 위치가 좀 요상해서, 중요한 부분이 안 보이는데, 

각도를 바꾸면 지옥의 악마들이 죄인들을 괴롭히는 장면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고 있는 단테(우)와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죄인의 목에서 피를 빠는 흡혈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런 것이 부그로의 세계. 

이렇게 오늘도 오르세 1층의 한 방에서는 인상파와 인상파 이후 화가들의 물결 속에서 신고전주의의 후예들이 외롭게 방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은 줄스 조세프 르페부르의 <진리 La Verite>.

 

우리가 방문한 날, 마침 1층에서 고흐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줄이 줄이 세상에...

사람 많은 것은 워낙 꺼리는 편이라 아유 뭐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나니 눈에 확 들어온 것. 이번에 오르세를 오길 잘 했다고 느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비파의 발견이었다.

피에르 보나르의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 보나르는 알고 있었지만, 늘 그냥 목욕탕에 서 있는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자기 아내라고)만 그리는 화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의 다른 면모를 많이 봤다.

 

나비파(Nabis)는 인상파 바로 다음 세대의 젊은 화가들이 만든 방파 아니 유파로, '나비'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한다고 한다. 이들은 마네나 세잔 같은 인상파 선배들에게서는 큰 감흥을 얻지 못한 듯, 고갱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나비라는 이름은 '우리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그림을 그린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해도, 미래에는 우리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젊은 놈들 특유의 오만함이 풍겨나오는 작명이다.

멋지지 않은가? 그래! 우리 그런거 좋아해!

인상파 중 상당수가 그렇지만 특히 나비파는 당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우키요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보나르의 이 그림, <로브입은 여자 Le Peignoir>도 그렇다. 로브가 기모노로 보일 정도. 

나비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1889년, 그 일파인 폴 세루지에 Paul Serusier였는데, 사실 이들이 모여 활동한 기간은 총 12년 정도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는 제각각 흩어져서 자기 갈 길을 찾았다고 한다. 원래 잘난 놈들은 오래 몰려다니지 못하는 법. 여러 모로 멋지다. ㅎ 

 

아무튼 주요 활동 멤버로는 보나르세루지에 외에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드 뷜라르, 펠릭스 발로통, 조르주 라콩브, 앙리 가브리엘 이벨스 등이 꼽힌다. 어쨌든 인상파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주력했다면, 이들은 딱히 눈 앞에 있는 실체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림은 스튜디오에서 그리는 거지', 뭐 약간 이런 느낌.

 

가장 주목했던 것은 색채. 그리고 내 마음 속의 그림. 

모리스 드니의 <숲속의 뮤즈들 Les Muses, Dans le Parc>. 멋지지 않음?

펠릭스 발로통 Felix Valloton, <장밋빛의 목욕하는 여인 Baigneuse rose>.

요즘 그린 그림이라 해도 놀랍지 않을 이 동시대감이란...

에두아르드 뷔야르 Edouard Vuillard, <줄무늬 가운을 입은 여인 La Robe rayee>.

그리고 보나르의 <물의 유희 Jeux d'eau>. 비슷한 그림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제목만 봐도 뭔가 라벨의 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비파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이후의 보나르는 이런 식으로, 목욕하는 여자들을 엄청나게 많이 그렸다(위에 말한 대로 거의 다 그의 아내...). 물론 벽지나 디테일에서 볼 수 있는 화사하면서도 온화한 색감이 역시 강력한 특징이다. 

사실 뭐든 알고 나면 보인다. 여기서 나비파를 영접하고 나니 그 뒤로는 어디 가서 보나르, 발로통, 뷔야르가 눈에 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오르세에는 그 시절 파리에 유학 온 온 세상 출신(이라고 해봐야 유럽 각국) 화가들의 작품들만을 따로 전시하고 있는 공간도 있다. 

유학생 차별(?)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당시 파리의 위상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의 러시아나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 취급을 받았고, 독일이나 스페인만 해도 '문화의 중심'과는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19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대부분 베네치아로 유학을 가듯 19세기 이후 문화의 패권, 특히 미술의 패권은 확실하게 파리의 차지가 된 것이다.

벨기에 출신 레온 프레데릭의 <가시숲속의 아이 Enfant dans les ronces>.

미국 출신 알렉산더 해리슨의 그림 <고독 La Solitude>에서는 묘하게 아르놀트 뵐클린의 <죽음의 섬>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나비파로 다시 돌아와, 나비파 작품들로 꾸며진 거실. 

돈만 많으면 이렇게 해놓고 사는건데 말이죠.

신나게 구경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문득 시계도 참 예쁜 오르세.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구나. 그때까지 안녕. 

 

그러고서 시내를 걸어 다니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간판이. 

이건... 무슨 현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응? 오늘도 고기먹는 날? 

고기가 제일 싼 파리라서 ㅎㅎㅎ 그래도, 별 양념 안 해도 맛은 최고.

본래 스테이크는 프랑스 사람들의 음식이 아니고, 프랑스 식당들이 요리를 잘 해서 스테이크가 맛있는게 아님. 그냥 고기가 맛있음. 

얼른 먹고 구경가자.

바스티유 오페라 도착. 오펜바크의 <호프만의 이야기 Les Contes D'Hoffmann>. 

줄거리만으로도 재미있는 오페라 중 하나. 특히 프랑스어 오페라를 대표한달 수 있는 작품이라 진작에 예매를 해 두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이지만 이미 오페라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파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공연장은 이 바스티유 오페라다. 

근데 사실 들어가 보면 너무나 실용적이고 깔끔하게만 지어진 건물.

이게 충무아트홀인지, 오페라 바스티유인지 사진만 보고는 구별이 힘들 수도. 

억지로 뭔가 있어보이는 구도를 찾았다. 아무튼 대 파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으로서 기대했던 미감은 전혀 아님. 

드디어 공연 시작, 그런데....

1막 끝나고 퇴장. 

물론 공연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테너가 목이 좀 덜 트인 것도 큰 문제 아니었는데, 공연의 세팅이 집에 있는 dvd와 완벽하게 똑같은 거다. 

제수스 로페스-코보스 지휘, 닐 쉬코프 주연의 이 DVD는 2002년 제작인데(공연장도 오페라 바스티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도 물론 같다), 그러니까 오페라 바스티유는 로버트 카슨의 2002년 프로덕션을 22년 동안 안 바꾸고 쓰고 있었던 거다. 

오페라는 늘 같은 오페라지만, 매번 새로운 무대 해석을 볼 때마다 아 여기선 이렇게 했구나 하는 것들을 보는 재미가 매우 쏠쏠한데(그래서 빌리 데커를 좋아한다),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물론 가수도 다르고, 지휘자도 한국인이지만, 집에서 늘 보던 똑같은 화면을 여기까지 와서 또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여행도 이제 중간을 지났으니 피곤해질 때도 됐다 싶었고, 그 핑계로 그냥 일찍 자리를 떴다.

극장 밖으로 나오면 과거 감옥이 있던 자리의 바스티유 광장에 7월 기념탑이 조명을 받으며 서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 1798년 7월의 바스티유 습격이라 '7월 기념탑'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그 7월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탑은 1830년의 7월혁명을 기념하는 탑. 물론 이 혁명 역시 미완의 혁명인 셈이고, 결국 대혁명 50주년인 1848년의 2월 혁명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국민의 권력이 프랑스의 주권을 차지하게 된다.

 

소수의 희생으로 한번에 완성되는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역사란.... 이라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피곤했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잠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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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오랑주리 방문에 이은 오르세 방문. 파리에는 수백수천개의 미술관이 있지만 그래도 중요도나 지명도, 규모를 따졌을 때 딱 셋을 꼽으라면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오르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말하자면 벨 에포크 시절, 인상파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혹은 인상파를 극복하겠다며 나온 수많은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요약하면 적절할 것 같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온 그림들이 너무 많아 행복해지는 곳이다. 

 

오르세에 오면 처음 오는 사람이나 여러번 오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꼭대기층으로 올라가 시계 문자판을 찾는 것. 

그리고 이렇게 역광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았다. 동구권에서 온 듯한 여자 관람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이제 유럽인 중에도 사진 찍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법인데.

(역시 사진은 실루엣이군)

 

그리고 꼭대기층에 왔으면 일단 신고를 해야 하는 분들이 계시지. 

먼저 마네 옹.

뭔가 클래스가 열리고 있군요. 혹시 팀 투어인가?

그리고 르누아르 옹.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2019년에는 저 그림의 실제 현장 바로 앞에 있는 몽마르트르의 가금류 전문 레스토랑에서 촬영을 했어서. ㅎ

그리고 고흐 옹. 

1988년 처음 왔을 때에는 오르세 미술관이 코스에 없었고(파리에서 단 2.5일), 1998년 파리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이 고흐의 방이었다.

 

사진 도판으로만 볼 때는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고흐 그림의 느낌. 저렇게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거칠게 짓눌러 편 느낌, 손가락으로 죽죽 문지른 듯한 느낌의 강렬함을 보고 놀랐다. 고흐의 그림은 3차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했던 그림이다.

(아, 솔직히 말하면 물론 1층 큰 방에 있던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준 충격이 더 크긴 했지만 그건 뭐....;; )

물론 하나 더 있죠. 별밤지기 형님들 보고 계신가요.

그리고 고갱 형님까지. 어쨌든 눈도장은 찍어야 하는 오르세의 터줏대감들.

순정만화의 조상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을 빼놓으면 서운해 하겠지. <장갑을 든 여자 La Femme aux Gants>.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구스타브 카이유보트의 <바닥 대패질하는 사람들 Raboteurs de parquet>.

 

카이유보트 역시 인상파의 중요한 화가들 중 하나지만 지명도는 좀 떨어지는데, 예전에 내가 감수했던 책 <히트메이커스> 때문에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카이유보트는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과는 좀 다르게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상속자였는데, 이때문에 친구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사서 모으기도 했고, 전시회를 개최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뭘 하든 자신이 산 그림들 위주로 했을 게 당연한 일이다.

 

이런 카이유보트의 활동 때문에 카이유보트의 소장 리스트에 있던 7명의 인상파 화가들, 즉 마네, 모네, 세잔, 시슬리,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결국은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인상파를 대표하는 7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카이유보트 리스트에 있던 7명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훨씬 자주 묶음으로 등장했고, 다른 화가들보다 많이 노출될 기회가 있었다는 이야기. 

(이 자리를 빌어 히트메이커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뭐 인세 같은 걸 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오르세 미술관을 처음 가시는 분들께 조언을 하자면, 오르세에서는 일단 5층으로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5층 구경만 대강 마쳐도 다소 허기가 밀려 오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서 5층에는 오르세의 명물 카페 캄파냐가 있다.

예쁘고 음식도 맛있고, 하지만 오늘은 패스. 

 

어 왜?

 

원래 개인적으로 미술관 식당에서 뭘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이날은 오르세 2층의 르 레스토랑 Le Restaurant을 예약해 뒀기 때문이지. 물론 그냥 가도 식사 가능할 수 있지만 관광지에선 뭐든 예약을 해 두는게 좋다.

벌써 아름답지 않음?

정확하게 12시에 문을 열어준다. 문 밖에서 대기.

네. 드디어 입장.

와우. 절로 탄성이 나온다. 예쁘다.

샹들리에며 천정화며,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궁전의 한 방처럼 꾸며진 천장, 창, 샹들리에, 조각들과 캐주얼한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메뉴는 스타터, 메인, 디저트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중 2개를 선택하는 것을 전제로 점심 특선이 인당 31유로. 파리의 무시무시한 물가를 고려하고, 레스토랑 내부의 아름다운 장식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스타터에 포함되는 프라이드 치킨+시저 샐러드.

이것도 스타터. 파스닙   Parsnip을 주 재료로 한 야채 수프. 둘다 맛은 좋았다.

그리고 메인.

이건 대구 튀김과 채소.

이건 오리 콩피와 다진 양배추, 그리고 배즙이 들어간 소스. 훌륭했다.

네네. 식후에는 페리에죠. 

이런 분위기에서의 한끼, 권장한다. 

자, 밥도 먹었으니 기운을 내서 본격적인 오르세 탐방. 

 

큰 맘 먹고 오디오가이드 착용. 춤추는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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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여행 중반으로 접어든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가 시작된다. 4일짜리 뮤지엄 패스 첫날은 베르사유, 둘쨋날은 오랑주리와 오르세, 셋째날은 퐁피두, 넷째날은 루브르를 가기로 이미 작정을 해 놓고 있었다.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로댕 미술관이나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묘지 같은 곳도 가 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허약체질 부부의 컨디션을 볼 때 무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뭐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파리를 또 올 수도 있겠지(과연?).

아무튼 미술관으로서의 첫 표적은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Orangerie 는 글자 그대로 오렌지를 보관하던 창고라고. 모처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콩코르드 역에 내려서 세느강 쪽으로 몇발짝 걸어가면 저렇게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이 겹쳐질 듯 보인다.

콩고르드 광장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묘하게 작은게 더 친근감이 간다.

창고라더니 온실... 하긴 뭐 온실이나 창고나.

아무튼 살짝 줄을 서야 했고(겨울인데!) 뮤지엄패스는 휴대 필수다. 짐을 맡기라고 해서 순순히 짐을 맡겼더라도, 뮤지엄패스는 반드시 따로 챙겨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잠시 소란을 겪고 입장.

사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루브르/오르세/퐁피두에 비해 규모 면에서는 많이 작다. 나도 오랑주리는 이번이 처음인데, 명성에 비해 너무 작아서 좀 놀랐을 정도. 그런데 유명한 이유가 있다. 

입장하면 누구나 다 아는 모네의 방이 있다.

바로 그 모네가 그린 수백장의 연꽃 그림 중에서도 가장 큰, 대표적인 연꽃 그림.

그 거대한 수련 그림으로 긴 배 모양의 방을 휘감아 전시하고 있다.

어떻게 봐도 모네는 모네.

약 30년 전에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모네의 그림을 보고 '모네다!' 라고 감동했던 기억.

그런데 그 뒤로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여기도 모네가 있네'의 상태가 되었다. 대체 연꽃을 몇 점이나 그린 거야... 하루에 한장씩 몇년은 그린 듯한 이 연꽃의 물결. 

하지만 이 연꽃들은 어쨌든 크고, 아름답다. 관광객들로 꽉 찬 방에서, 가능한 한 다른 관광객이 들어가지 않도록 사진을 찍는게 매우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잘 보면 그림이 조금 다르다. 모네의 방이 2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모네의 방 사진을 올려 놓고 있어서 매우 궁금했다. 대체 오랑주리의 나머지 공간에는 어떤 그림들이 있는 거지? 알고 보니 오랑주리 미술관은 꽤 작기는 하지만, 매우 알찬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모네의 방만 보고 휙 가버린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림들. 다른 작품들을 보려면 한 층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그림은 샘 프란시스  Sam Francis의 <In the blueness>. 1955년 작품으로, 모네의 수련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비슷한 풍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한다. 역시 모네가 지배하는 오랑주리. 

이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이 그림을 그린게 누구인가가 사실 더 궁금한게 인지상정. 이 화가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다.

모딜리아니라고! 모딜리아니가 남자도 그렸단 말인가!

그림 속 남자는 폴 기욤 Paul Gillaume.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많은 근대 화가들의 후원자였고, 죽은 뒤 자신의 컬렉션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부했다. 그 공로로 이렇게 오랑주리의 지하 1층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모델로도. 아무튼 당대의 풍류남에서 43세 요절까지... 전설이 되실 요소를 많이 갖춘 분이었다.

이건 모딜리아니가 그린 막스 야코프의 초상. 당시 시인이자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야코프는 폴 기욤과 모딜리아니를 만나게 해 준 은인으로 꼽힌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딜리아니 상설관(폴 기욤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이 생긴 셈이다.

물론 모딜리아니가 끝이 아니고, 지금부터 시작. 피카소, 마티스, 드렝, 수틴, 르누아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폭넓은 컬렉션이 대단하다.

샤임 수틴의  웨이터 그림 Le Garcon d'etage. 오래 전 미술 교과서에 나오던 수틴의 메신저 소년 그림도 떠오르고, 무엇보다 로알드 달의 단편 <피부>가 떠오른다. 어찌 어찌 하다가 수틴의 그림을 문신으로 몸에 간직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 

수틴의 이런 풍경화는 낯설다.

해외의 대형 미술관을 보면 역시 교과서로 접하던 화가들의 낯선 그림들을 보게 된다. 앙리 루소의 그림 중에 밀림이 나오지 않는 그림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폭풍우 속의 배 Le Navire dans la Tempete>.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이 짙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쿠사이의 그림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 

루소의 또다른 작품,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Promeneurs dans un parc>. 

누가 뭐래도, 나뭇잎들만 봐도 역시 루소의 작품 맞다. 

젊은 모리스 위트릴로가 그린 노틀담. 위트릴로가 그린 수많은 파리 풍경 중의 하나답게 화사함은 없고 쓸쓸함만 있다.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화가일 것으로' 추정되는 위트릴로.

어머니 수잔 발라동은 젊은 시절 르누아르, 로트렉을 비롯해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자 정부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직접 화가로 데뷔하기도. 아무튼 위트릴로의 그림에서는 뭔가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느껴지곤 한다.

앙리 마티스의 <푸른 오달리스크 Odalisque bleue>. 

피에르 아우구스트 르누아르의 <긴 머리의 목욕하는 여인 Baigneuse aux cheveux longs>. 혹시 이 그림의 모델도 수잔 발라동은 아닌지. 

그리고 오랑주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앙드레 드렝의 <익살꾼과 피에로 Arlequin et Pierrot>. 왼쪽이 아를르켕, 오른쪽이 피에로다. 둘 다 '어릿광대'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뭐야 싶은데 아를르켕은 영어의 할리퀸 Harlequin 과 같은 것으로, 격자무늬 못이 특징이고, 꾀 많은 재담꾼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익숙한 피에로는 말 못하는 바보 캐릭터에 가깝다. 두 '광대'의 차이를 한 눈에 보여주는 교육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그림이다. 

 

누가 오랑주리의 느낌을 묻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바글바글한 모네의 수련의 방과 한적하고 조용한 지하의 보물창고. 오랑주리에 가시는 분들은 부디 절대 모네의 방만 보고 휙 다음으로 넘어가시는 일이 없기를.

모딜리아니 따라 그리기 세트도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제가 그린 것일까요.

어쨌든 오랑주리를 보고 나오니 화창한 날씨가 기다리고 있다. 파리에 온 뒤로 가장 좋은 날씨.

오랑주리를 나와 남동쪽으로 600미터만 가면 오르세 미술관이 나온다. 사실 오르세 -루브르-오랑주리는 도보 이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리. 단 파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의 경우, 이 세 미술관을 하루에 다 '처리' 하겠다는 야심을 품으면 큰일난다. 평소 미술관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도 이런 미술관 3개를 하루에 돌면... 토한다.

아무래도 루브르에 하루를 할애하고 오랑주리와 오르세 까지는 하루에 묶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순서는 오랑주리-오르세 순으로. 오랑주리는 뮤지엄패스로 시간 예약이 가능하고, 오르세는 뮤지엄패스 전용 줄서기가 가능하지만 시간 예약은 따로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보다 오르세를 먼저 보고 나면 오랑주리는 굉장히 초라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세느강을 인도교로 건너면, 

자 오르세!

25년만에 들어가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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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무지개!

12월5일

일일 루틴대로 빵집에서 사온 따뜻한 바게트와 쇼시숑, 쇼콜라로 아침 식사. 

 

어쨌든 이번 여행 전후로 확실히 바뀐 것은 바게트에 대한 고정관념의 변화. 늘 딱딱하고 입천장 까지는 빵이라고만 생각했다가, 갓 구운 따뜻한 바게트의 부드러움과 향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따뜻한 바게트는 찾아서 먹어볼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텔 앞의 유명 빵집, LA PARISIENNE

정해진 식순에 따라 베르사이유 행 열차에 올랐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방법은... 물론 렌트를 했다면 당연히 운전을 하고 가면 되겠지만, 그 외의 수십가지 방법 중에 RER C를 이용하는 방법보다 나은 것은 없는 듯 하다. 

 

호텔의 강점 중 하나인 샤틀레 레알 역에서 RER B나 다른 선을 타고 세느강을 건너 한 정거장만 가면 생 미셸 노틀담 역이다. 거기서 RER C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달려가면 끝. 너무 간단하고 편하다. 나비고 카드가 있다면 추가 비용 0. 

이것이 나비고 카드

RER C 를 탈 때에는 2층 좌석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시내에서 베르사유나 에펠탑 방향으로 갈 때에는 당연히 오른쪽 자리. 그러면 약 한시간 동안 달려가면서 세느강 연안의 파리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올 때는 왼쪽. 

 

어쨌든 베르사유-샤토 역에 내려서 궁전까지는 약 10~1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그 시절에도 넓었을, 아주 넓은 길을 걸어가는 느낌도 좋은데... 비가 뿌린다. 역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 물론 가는 길에 우산을 파는 행상 아저씨들도 꽤 많다. 우산에는 루이 14세 얼굴이 아주 크게 그려져 있다. 

바로 앞까지 가면 이 궁의 주인공인 루이 14세 동상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산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한 위치에서 온 프랑스를 호령하는 자세가 나온다.

여기 처음 와 본 것이 1988년. 무려 35년 전이다. 정말로 감회가 새롭다. 물론 그때는 정확한 베르사유의 위치 같은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 여행사 버스를 타고 이 광장에 도착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로 가슴이 뿌듯했다. 

들어가는 곳도 얼추 기억과 비슷한 모습. 물론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 있다. 겨울이라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산. 

18세기, 세계에서 가장 화려했던 곳. 

솔직히 1988년의 느낌은 없다. 그동안 워낙 좋은 곳을 많이 가 보기도 했고, 한국에도 정말 좋은 곳들, 호화롭게 치장한 곳들이 워낙 많다 보니 살짝 바랜 느낌이 있는 이 궁에서 감동을 느끼긴 쉽지 않았다. 

설사 199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이 이곳을 처음 방문했더라도 별 감흥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론 베르사유를 그냥 잘 꾸며진 호텔 보듯 하는 사람과 달리, 저 골동품들의 가치를 다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남다른 감동이 있을 수도. 

가구며 침대며 참 정교하고 예쁘긴 하다. 

일단 처음 들어간 건물에서 안쪽으로 나오면, 중정 같은 느낌의 공간이 있다. 

어쨌든 베르사유에 왔으면 베르사유의 상징, 거울 방을 가야 한다.

어디가 어딘지 헷갈려서 물어 물어 찾아가는 중.

거울방으로 가는 길에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 대관식 그림의 모사품이 있다. 진짜는 루브르에.

사실 루브르의 18세기 그림 전시실과 거의 똑같은 느낌. 

여기까지 오니 아, 예전에 이런게 있었지, 하는 느낌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땐 젊고 우린... 에이 아니다.

여기가 아마 루이14세의 침실이었던 듯. 다른 방에 비해 천장의 그림이 유난히 많다. 

아무튼 그 침실을 지나고 나서 좀 더 가면 드디어 거울 방의 입구가 나온다. 

18세기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나라 프랑스의 국왕이 무도회를 여는 곳이니 그 시절에는 온 유럽의 왕족이며 귀족들이 '나도 언젠가 저길 한번 가 봐야 할텐데'라고 생각하고, 막상 방문해서는 '나도 언젠가는 이런 공간을 마련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는 바로 거기다.

이것이 바로 거울방. 

물론 실제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이라는 건 감안해야 할 듯. 막상 가 보면 좀 뭔가 뿌옇고 많이 닳고 그런 느낌이다. 누차 말하지만 이 방의 전성기는 약 250년 전이라는 걸 잊으면 안됨.

그래도 저기 처음 갔을 때는 엄청나게 감동했었지. 지난 세기의 어느날.

 

수십년만의 베르사유 에피소드 하나는 화장실에 전화기를 두고 나온 것. 한 100발짝 가서 알아차렸고, 돌아가 보니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가 있다. 남미계로 보이는 아저씨가 화장실 문 앞에 있다. 안에 누가 있나? 이 사람도 줄을 선 건가? 음... 뭐라고 말해야 내가 먼저 안에 좀 들어가야 한다고 가장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고 있는데, 뭔가 당황한 눈빛을 본 아저씨가 먼저 말을 한다. "폰?" 

 

네. 폰. 폰 찾으러 온거 맞아요. 

 

"오피스!"

아유 감사합니다

아, 분실물로 오피스에 맡기셨다구요?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말하는 아저씨. 그런데 그 순간 화장실 안에서 뭔가 스페인 말인듯한 말로 따발총처럼 다른 아저씨가 뭐라고 하고, 밖에 있던 아저씨는 야 야 넌 그냥 싸기나 해. 내가 다 알아서 해결했어 라는 식의 말로 다스리고 있다. 뭐지. 두 친구가 용변을 보러 온 건가. 안에 있던 아저씨도 라틴계 특유의 수다 본능으로 참견이 하고 싶었던 건가. 어 그거 내가 먼저 들어와서 보고 갖다 맡겼으니까 니 폰은 거기 가서 찾아 뭐 그런 거. 

 

꽤 코믹한 상황이었는데, 20m  쯤 떨어진 오피스에 가서 혹시 전화기 맡겨진게 있냐고 물으니 신중한 아저씨, 어느 회사 폰이냐고 묻는다. "쌤쏭, 갤럭시". 오. 전화기가 맡겨져 있다. 여기서 이 전화기가 니꺼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묻는 아저씨. 뭐 그거야 패턴을 그려서 오픈해 드리면 되죠. "빠르뻭토!" 

 

그렇게 해서, 수만명이 드나드는 베르사유에서 잃어버린 전화기를 바로 찾았다는 이야기. 이것 때문에 동행인에게 꽤 강력한 빈축을 샀지만, 아무튼 이런 여행운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춥고 비 뿌리는 날의 베르사유 구경을 마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KFC에서 점심. 베르사유를 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90% 정도가 KFC나 맥도날드에서 한끼 정도는 때우는 걸 보면서 이유를 궁금해 했는데, 가 보고 알았다. 궁전과 역 사이에 신기할 정도로 식당이 거의 없다.

수요는 많을텐데...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RER C를 타고 파리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연스럽게 에펠탑 역에서 내리게 된다. 

파리가 그렇게 크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서 가는 곳마다 에펠탑이 보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코앞에서 에펠탑을 느껴야 하는 법. 생각해보니 매번 올 때마다 그랬다.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느낌?

역에서 내려 몇발 걷지 않아 잘 보인다. 에펠탑의 미덕 중 하나는 확실히 '잘 보인다'는 것. 

그 거대한 탑 밑으로 왔는데... 매번 올때마다 느끼지만 참 대단하다. 

처음 보는 광경, 무지개 같은 하단부 옆에 무지개가 그려졌다. 

오홍.

자, 그리고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다리를 건너 샤이요 궁 Palais de Chaillot 으로 가야 한다는 건 상식 아입니까. 

살짝 기울어가긴 하지만 어쨌든 해가 뜨고 파란 하늘이 나온 건 길조다. 

오, 이런 느낌 좋아 좋아. 점점 개고 있어. 관광사진이 되어 가고 있다고. 

비에 젖은 바닥에 오후 햇살이 비쳐 금빛으로 빛난다. 

네번째 와 보는 에펠탑이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일세. 

여전히 바람도 많이 불고, 춥고, 빗발도 간간이 날리고, 그저 구름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정도지만, 이렇게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바닥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인증샷.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매번 가도 감동.

저게 처음 만들어졌을 때 구스타프 에펠이 "이제 프랑스는 300미터 높이의 국기게양대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멘트가 생각난다.

 

잠만 기다려. 밤에 불 켜진 거 보러 또 올게.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장면을 뒤로 하고 숙소로. 꽤 걸었으므로 잠시 쉬었다가 역시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 이름은 짧게 레옹 Leon. 아내가 검색해서 예약한 홍합 요리집이다.


벨기에식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전 세계를 돌아봐도 홍합처럼 싸고 맛있는 해산물은 없을 듯. 일단 별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은 전통식 홍합을 주문했다. 

홍합이 홍합 맛이지. 근데 너무 맛있다. 짭조름하고... 다만 국물이 한국식 홍합에 비해 좀 더 짜고 살짝 비리다. 굳이 떠 먹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 맛이다. 

대구 종류(eglefin)로 만든 그라탕. 물론 맛있다. 단 보기보다 그릇이 작다. 

홍합이 짠 점을 감안했는지 빵과 밥이 나오고... 근데 밥이 좀 말라비틀어진 밥. 

그리고 역시 벨기에인이 발명했다는 설이 있는 프렌치 프라이(이게 뭐야)가 나온다.

뭔가 좀 아쉬워서 로슈포르 치즈가 들어간 홍합찜을 추가로 주문. 이것도 맛있는데... 좀 더 짜다. 굳이 치즈의 풍미 같은 것은 없었어도 됐을 것 같다. 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다. 

그렇게 잘 먹고 53.2유로. 서울에서 저 정도 먹고 7만6천원 정도면 제대로 눈 주위를 맞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게 그 다음부터 먹은 저녁식사 중 가장 소박한 식사였다. 팁 문화가 없는게 다행이지 여기다 팁까지 냈다면.... 끄억. 

아무튼 파리 비싸다. 가실 분들은 유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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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월요일

 

월요일의 가장 중요한 할 일은 나비고(Navigo) 카드 개통이었다. 파리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나비고 카드로는 1주일 동안 파리의 버스와 전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현금으로 전철/버스 표를 사서(버스는 타서 버스표를 끊을 수 있다) 다니는 것도 가능한데, 전날 하루만에 그건 만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웬만한 전철 역은 표 끊는 줄이 꽤 길고, 대부분 전철 표를 사려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리고한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전철역의 티켓 판매기에 티켓이 떨어져 긴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도착하자마자 나비고 카드를 개통했어야 할 일이겠으나불행히도 나비고 카드는 월요일-일요일 구간만을 일주일로 인식한다. 즉 나비고 카드를 금요일에 개통하면, , , 3일만 쓸 수 있다.

 

역시 이것도 한국이라면 말이 되냐고 난리가 났을 일이나, 어쨌든 파리에 가면 파리 법을 따라야 하는 법. 택시나 우버/볼트로 모든 교통을 해결할 사람들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시내에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다닐 수는 없다. 특히 베르사유를 다녀 올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비고는 필수.

(그리고 나비고 이용하실 분은 셀카 찍어 컬러 프린터로 프린트를 해 가든, 증명사진을 빼 가든, 사진 가져가시는 걸 잊지 마시길. 이력서에 붙이는 것보다 좀 작은 사이즈로 사진을 붙여야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는 한국의 교통카드와 거의 똑같이 사용 가능.)

드넓은 샤틀레 레알 Chatelet Les Halles 역 구내를 살짝 헤맨 끝에, 물어 물어 창구를 찾아 나비고 카드를 개통하고 이날의 첫 목적지인 오스만 가로 향했다. 오늘날의 파리를 만든 도시계획가의 조상,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이름을 딴 오스만 가에는 파리를 대표하는 프렝탕과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다. 동행인이 파리에서 가장 잘 아는 곳.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어쨌든 뮤지엄 패스가 화-금 일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쇼핑은 뮤지엄 패스와 겹치지 않는 날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백화점 구경. 도심 숙소의 장점을 살려 쇼핑한 짐을 호텔에 가져다 놓은 다음 근처 쌀국수 집(꽤 유명한 가게였던 Pho14의 분점이 호텔 근처라 방문했다)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메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루이 뷔통 재단 Louis Vuitton Foundation 으로 다시 향했다. 루이 뷔통 재단은 유명 미술관이긴 하나 뮤지엄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므로, 이날 방문해야 했다.

(보기엔 그럴싸 했지만국물이 너무 달았다. 실망.)

루이 뷔통 재단으로 가려면 에투왈 개선문 바로 옆에 가서 재단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재단 홈페이지에 나와 있었다. 과연 그랬다. 개선문(Blue bus for Louis Vuitton Foundation이라는 정차장이 구글 지도에도 나온다)에서 재단까지는 거리상 지척이었지만 비오는 파리의 정체는 매우 심각했다. 셔틀버스 안에 앉아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안내상으로는 10분 거리였지만 족히 30분 정도 걸렸다.

어쨌든 사진으로 많이 보던 루이 뷔통 재단 도착. 비가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건물 전경을 찍을 수 있는 먼 거리까지 떨어지는 건 무리였다. 그냥 이런 게 드넓은 공원 한 복판에 있다. 

이날의 목적은 마크 로스코 전시. 재단 앞에 내려 보니 줄이 꽤 길었지만 예약을 해 놨기 때문에 걱정없이 신속 통과. 다만 어디서나 짐 검사를 한다는게 귀찮았다. 물론 이때만 해도 누가 루이 뷔통 재단에 테러를 할까 생각을 했으나, 모나리자에 수프를 뿌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판이라 검색의 생활화가 나쁠 것은 없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검문 검색을 한다고 수프 뿌리는 애들을 막을 수 있으려나.

로스코 전은 듣던 대로 대단했다. 전시실만 11개인데 그 전시실이 모두 주제별, 시대별로 꽉 차 있었다. 총 작품 수가 거의 150~200개는 될듯 한 느낌.  세계 각지의 미술관은 물론, 개인 소장 작품들도 이 전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듯 했다. 듣기로 리움의 홍관장님도 로스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던데, 혹시 리움에서 온 작품도 있나 궁금했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이날 전시의 최대 수확은 로스코의 자화상을 본 거였다

이 사람이 네모가 아닌 그림도 그렸다니. (물론 자화상의 얼굴도 약간 네모꼴...이긴 했다.)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로스코도 젊은 시절에는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도 그리고, 다양한 인물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까지는 특별한 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작품들도 꽤 인상적이었지만 그걸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듯.

결국 언젠가부터 누가 봐도 로스코인 사각형 그림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마침내 대가가 되었다. 대략 이런 전환은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정말 다양한 로스코의 시도들을 볼 수 있었다. 

때론 어둡고, 때론 밝은 그림들.

"나는 색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추종한 것은 빛이다." 

뇌과학과 미학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연구자 에릭 캔델은 마크 로스코와 데 쿠닝, 잭슨 폴록 등을 환원주의 Reductionism 를 이용해 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연 작가들이라고 평가한다. 

소위 환원주의의 시대. 화가들은 '그림의 원형, 미술의 원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점점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림이라는 것의 출발점을 어떤 형상을 구성하는 아주 원초적인 요소들의 단계에서 다시 규정해 보자고 시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면을, 어떤 사람은 선을, 어떤 사람은 색을 선택해 각각의 그 요소들을 파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몬드리안이 선택한 것이 구획으로 나뉜 면, 폴록이 선택한 것이 복잡한 곡선이었다면 로스코가 선택한 것은 색이라고들 하는데, 로스코 본인은 '나는 색 아님. 내 관심사는 빛'이라고 저렇게 공언했다. 본인의 말이니 인정하자.

죽기 1년 전, 로스코는 갈색과 검은색으로만 그리는 시리즈에 들어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건가, 아니면 설명에 쓰여 있는대로 1969년 아폴로의 달 착륙을 지켜본 영향일까.

이 마지막 블랙 시리즈의 그림들은 윤형근 화백의 그림과 매우 닮아 있다.

로스코가 1970년에 죽었고 윤 화백은 1928년 생이니 생전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아무튼 무채색의 선 속에선 뭔가 세상의 강요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의지 같은 것이 읽힌다.

아무튼 이렇게 로스코 안녕. 

훌륭한 전시였다. 루이 뷔통 재단 미술관은 뮤지엄 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상설 전시와 마크 로스코 전시는 따로 따로 표를 끊어야 했다. 간 김에 둘 다 봐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마크 로스코 전만 표를 샀는데, 다행이었다. 마크 로스코 전만으로도 체력소모가 꽤 심했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인 루이 뷔통 재단 건물 1층은 커피숍과 매점, 관광객들과 뭔가 나들이를 나온 듯한 파리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위로 올라가니 인적 없는 공간이 많아 좋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실용적인 건물은 아니라는 생각. 건물 곳곳에 앉아서 파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특히 해질녘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공간은 많았지만, 그 공간들은 그냥 그런 공간들일 뿐, 효율적으로 뭔가를 위해 쓸 수 있는 공간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커다란 낭비 자체가 예술이라면 당연히 인정.

비가 와서 막히는 파리를 가로질러 호텔로 귀환.  

샤틀레 레알 역 부근의 반미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캐주얼한 가게였는데 엄지손가락만한 회색 쥐가 나왔다. 그런데 너무 작고 귀여웠던(?) 탓인지 주인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심지어 쥐나 벌레를 절대 좋아하지 않던 동행인조차도 ‘해치지 말아요’의 태도였다. 

 

주인은 슬리퍼 짝으로 쥐를 쫓아 가게 밖으로 내보내며 파리에선 어디나 이래요”라고 변명했다. 동행인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쥐가 나온 식당의 위생상태를 걱정하기는커녕 비도 오는데 쟤 어디 가서 비나 피할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역시 뭘로 태어나든.... 귀여워야 한다.  

음식은 먹을 만 했지만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꽤 많은 도보로 피로했으므로 바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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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르셰 백화점의 뻥 뚫린 내부

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바로 2차선 길건너 빵집으로 달려가 갓 구운 바게트와 빵 한두가지를 사온 뒤, 호텔 1층에서 핫 초콜렛(커피머신이 있는데 쇼콜라테는 오전에만 제공한다)을 받아 올라오는게 루틴이 됐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바게트 봉투를 손에 쥐는 느낌도 좋고, 맛은 또 얼마나.

 

마늘을 북북 갈 수 있는 마른 바게트의 단면과는 전혀 다른, 순결한 속살의 느낌이 기막히다. 물론 서울이라고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를 파는 집이 없을까마는, 여기는 파리 아니냐, 파리.

 

어쨌든 아침을 간단히 챙기고, 잠시 다시 누워 아침잠을 청하고(...이상하게 아침이 되니 난방이 나와 방안이 따뜻해졌다), 깨 보니 점심때. 전날 밤부터 내심 가볼 생각이었던 파이브가이즈를 털었다.

오오. 이 리마커블한 맛이란. 귀국해도 꼭 다시 먹으리라 결심.

 

햄버거로 기운을 북돋운 뒤 버스를 타고 봉마르셰 탐방. 동행인에게 파리는 곧 봉마르셰 와 그 주변, 라파이에트와 그 주변이다. 고향 가서 모교를 돌아보듯(그분의 입장에서) 일단 봉마르셰를 방문했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

 

영상 1~5도 정도에 습기가 섞인 날씨는 음울 그 자체다. 흔히 뼈가 시리다고 말하는 그런 날씨를 뚫고, 퐁네프 앞에서 버스를 타고 몽마르셰로 향했다.

지나가다 본 생제르맹 지역의 작은 공원

봉마르셰는 1852년 개관한 파리 최초(당연히 세계 최초겠지?)의 백화점. 따지고 보면 170년이나 된, 역사책에 나와야 할 건물인데 구스타프 에펠이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쌩쌩하기만 하다. 

물론 실내는 역시 세월을 이기기 힘든 느낌이 있다. 몽마르셰 위층은 개성있고 예쁘게 꾸며진 것은 분명했으나, 170년 전에는 정말 별세계였을지언정 지금은 아닌 느낌일단 층고가 너무 낮다그나마 중정이 뻥 뚫려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게 다행이었는데이 설계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백화점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는 건 쇼핑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별도 옆 건물인 식품관 1층으로 내려가자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곳은 진정 별세계. 세상의 온갖 치즈 온갖 버터 온갖 절임 온갖 소스 온갖 초콜렛 온갖 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만약 파리 시민인데 좀비가 창궐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제일 먼저 털어야 할 곳은 이곳이었다. 여기저기 건넬 자그만 선물 등속을 요것조것 샀는데, 그것만 해도 꽤 돈이 깨졌다. 쇼핑 안 좋아 한다더니라는 동행인의 비웃음을 등지고.

생제르맹의 H사 매장. 공식명칭은 에르메스 세브르 점.

아무튼 그렇게 몇 걸음을 걷다 보니 해가 반짝. 8일 정도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파란 하늘을 본게 몇번 안 되는데, 그중의 하루가 이 날이었다. 중간에 몇 군데를 더 들러 돌아보고(덕분에 에르메스 세브르 점의 위용을 봄), 어찌 어찌 하다가 예정되어 있던 카페 레 뒤 마고 Les Deux Magots에 일찍 입장.

오후 4시 경인데 그 명성 때문인지 카페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사실은 우리 다섯시 반에 예약했는데로 우겨서 바로 입장에 성공했다.

 

그런데내부는 바깥보다 더 끔찍했다. 개인적으로 붐비는 곳을 매우 싫어한다. 식당도 옆 사람의 팔꿈치가 닿을 듯한 곳은 삼겹살집 외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여기는 서울의 노포 삼겹살집이 우스울 정도로, 내부가 도때기 시장이었다.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프랑스어를 못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했더라면 옆 자리 아저씨들의 집안 사정을 다 알뻔 했다. 어찌나 격렬하게 떠드는지.

마드리드였다면 츄러스를 찍어 먹어도 좋을 듯한 쇼콜라(맛은 있었다)를 마시고 나니 한 순간도 더 거기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본래는 거기 앉아서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옆자리 아줌마가 튀기는 침이 내 밥에 다 들어갈 듯한 공간에서 밥을 먹지 않게 된 게 천행이라는 생각만.

 

유명 문호들이 드나들던 파리 카페의 낭만적인 분위기?

 

아 녜 녜. 그런거 눈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레 뒤 마고를 헤밍웨이가 파리 살 때 자주 가던 곳이라며 가봐야 한다고들 하는데, 헤밍웨이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able feast>를 읽어보면 그의 단골 카페는 다른 곳이다. 뤽상부르 공원 남쪽에 있는 라 클로세리 데 릴라 La Closerie des Lilas 가 바로 그 곳이다.

 

헤밍웨이는 책에서 이 카페를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들 중 하나라고 부르고, 심지어 뒤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이 카페에 다른 작가가 왔다는 이유로, 그 작가에게 왜 '내 카페'에 온 거냐,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글을 쓸 수가 없다고 욕을 하며 내쫓으려 하기까지 한다.

 

저 책 내내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정신병자 취급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 헤밍웨이 또한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한때 절친이었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그래서 거기는 갔냐고? 아니.

레 뒤 마고를 가본 뒤 파리의 카페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런 곳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아졌다. 가 봐야 헤밍웨이 사진이나 몇장 붙어 있겠지.

참고로 파리 여행을 앞두고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어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1/3 정도는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에 대한 뒷다마인데, 헤밍웨이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 못지 않은 환자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실만 하겠으나, 헤밍웨이가 가 본 파리의 명소들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이 궁금하다면, 매우 실망할 것을 확신한다.

 

그래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1920년대 초,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문인들이 1차대전이 끝난 파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싸구려 와인을 퍼 마시고 몰려다니던 시절을 회고한 글이다.  단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실제 쓰여진 것은 1950년대. 만년의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쓴 내용들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시절의 파리에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T.S. 엘리엇, 루이 부뉴엘, 만 레이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이 들끓던 시절이라 온 동네마다 셀럽들이 넘쳐 흘렀던 것 같다 - 물론 오늘날의 시각이지만. )

 

그중 한 대목. 그런 시절을 한참 지나고 파리를 방문한 헤밍웨이는 왕년의 단골 술집을 들러,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바텐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당연히 헤밍웨이는 그 시절 같이 술집을 전전하던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데, 바텐더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묘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이 내용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피츠제럴드의 단편 <다시 찾아간 바빌론 Babylon Revisted>에도 나온다는 점이 처연한 느낌을 더한다(이 단편은 1954년, <내가 마지막 본 파리 The last time I saw Paris>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젊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가 빛나는 추억의 영화). 여기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파리를 오랜만에 찾아 단골 바를 방문하고, 나이 든 바텐더에게 옛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바텐더는 나는 기억하지만 함께 오던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묘하게 일치한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웨이터에게는 잊혀진 인물들일 것이다. 단지 나는 눈앞에 와 있으니 기억해주는 척 하지만, 어차피 그에겐 그의 무대인 바를 스쳐간 수없이 많은 손님들 중 하나일 뿐.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혹은 그 패거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파리의 흔적을 그 다음 세대의 젊은 손님들이 밤마다 메웠을 것이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파리의 밤을 지배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뿐,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 자신이 세상의 주인처럼 느껴지는 시절이 있지만, 그들의 빈자리는 너무나 빨리 메워진다. 그 다음의 물결에 의해.

 

이런 생각과 함께 늦은 밤 파리의 카페에서 한잔 하는 스케줄을 떠올리기도 했었으나, 막상 파리의 카페를 가보고 나선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파리 카페, 안녕. 문득 서울의 술집들이 그리워졌다.

생제르맹의 명물 중 하나인 돈 키호테 동상

어쨌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던 레 뒤 마고를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마땅히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날 산 소고기를 바로 구워 먹자는데 둘 다 이견이 없었다. 프랑스의 꽃등심(faux filet)은 맛이 좋았다.

식사 후 에펠탑 야경을 위해 길을 나섰으나, 기온이 급강하하고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바로 후퇴. 이렇게 해서 사실상의 첫날 마무리.

그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상 자크 탑 Tour Saint-Jacques. 그냥 크다는 느낌 말고는 사실 별 것 없었다.

파리에 이런게 어디 한두개라야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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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 건물 지붕 너머로 보이는 일출

공항에서 시내로, 숙소 시타딘 레알 호텔

2023년 12월1일. 예전엔 11시간이면 가던 거리가 전쟁 때문에 14시간 걸렸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루브르와 마레 지역 사이, 레알(Les Halles)의 숙소까지 전철로 약 60분 정도. 갈아 타지 않고도 갈수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고생일 듯 해서 택시를 알아봤다. 다행히 택시 가격은 55유로 정찰제.

 

그런데 택시로 90분이나 걸렸다. 만약 정찰제 없이 미터기대로 냈다면 거지될 뻔. 토요일 밤에 파리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정체 아닌 곳이 없었다. 일요일 저녁도 아니고 토요일 저녁인데 시내 들어오는 길이 이렇게 막히다니. 

 

이란 출신(워낙 차가 막히다 보니 지루해서 대화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인 기사님은 어떻게 해서든 안 막히는 길로 가 보겠다는 의지로 이쪽 저쪽 골목길을 팠지만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던 듯 하다. 그 덕에 라 빌레트 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파리 변두리를 차 안에서 좀 구경할 수 있었다.

 

전에 비해 중국 음식점이 참 많이 늘었다는 느낌? 지나오는 동네마다 중국 음식점 간판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시타딘 레알 로비. 호화롭지는 않지만 잘 단장되어 있다.

곡절 끝에 호텔 앞 도착. 시타딘 레알 (Citadines Les Halle). 시타딘은 프랑스에서는 꽤 유명한 레지던스 형 호텔 체인이다. 절대 럭셔리한 느낌은 아니고 그냥 생활감있는 한국의 콘도 같은 느낌. 2구짜리 인덕션 레인지가 있고, 냄비 후라이팬 칼 접시 등 주방 살림 일습이 있다.

 

파리를 몇번 가 본 경험에 따르면 파리 음식은 크게 기대할 게 없었다. 좀 짜고 딱히 맛있지 않았던 느낌. 게다가 8박을 하자면 좀 피곤하기도 하고, 약식으로라도 한국 음식(?)을 좀 먹는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레지던스형 호텔을 선택했다. 거기다 공연장을 여러 번 가려고 하는데, 파리의 좀 한다 하는 식당들은 대부분 7시는 되어야 저녁 오픈을 한다.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하면 공연 시간에 맞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저녁 공연이 있는 날은 낮에 구경을 나갔다가 일찍 들어와서 간단히 숙소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별 대단한 준비를 한 건 아니고, 그냥 햇반 몇 개, 밑반찬 몇 개, 사발면 몇 개를 싸 간 정도가 전부다. 시판 볶음김치를 가져간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파리에는 좋은 식재료가 많을 테니 웬만한건 사서 해결하자는 자세.

호텔 주변에 대형마트와 아침에 문을 여는 유명한 빵집, 라 파리지엥(La Parisienne)이 있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7시에 문을 여는 빵집에 달려가 갓 구운 바게트와 크루아쌍 등을 사왔고, 호텔 1층에서 역시 오전에만 주는 핫 초콜렛을 컵에 받아다 아침을 먹었다. 봉마르셰에서 사 온 버터와 소시숑을 곁들였고, 근처 마트에서 과일과 요구르트를 사왔다.

 

저녁에는 밥을 먹을 일이 있을 때 두 번 고기를 구워 먹었다. 꽃등심(faux filet, 립아이에 해당하는 프랑스 명칭이다) 기준으로 봉마르셰에서는 250g13유로, 마트에서는 280g11.29 유로에 샀다. 국내와 차이가 있다면 곡물 사료 대신 풀을 먹여 기른 소라 마블링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고소한 맛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름이 녹아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같은 250g을 구워도 한우보다 실질적인 고기 양은 훨씬 많다. 소금만 찍어 먹어도 술술 넘어간다.

식탁이 따로 있는 좀 큰 방을 빌린 덕분에 호텔 안 식사도 수월했고, 가져간 노트북을 HDMI로 삼성 TV와 연결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방값이 비슷한 크기의 호텔에 비해 훨씬 싼 대신 매일 청소를 해주지 않았지만(6일 머무는 동안 한번 청소를 요청했다) 수건이나 기타 물품은 창고에서 무제한으로 직접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단 슬리퍼는 없으니 가져가거나 사거나전에는 슬리퍼를 주었다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마트에서 슬리퍼를 사야 했다. 30유로. 비싸다.

시타딘 레알의 최대 강점은 위치다. 지근거리에 두 개의 역, Chatlet 역과 Chatlet Les Halle 역이 있고 이 두 역으로 파리 시내의 주요 포스트로 가는 전철은 거의 다 이용할 수 있었다.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노틀담, 마레 지구는 도보로 20분 이내 거리, 오페라도 전철로 10분 거리. 아침에 나가 뭔가 구경을 하다가 방에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저녁 구경을 나갈 수 있는 것도 괜찮았고, 한밤중에도 카페나 술집마다 손님들이 우글우글한 홍대 앞 같은 곳이라 밤에 나다녀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안전지역이라는 점도 괜찮았다.

 

이렇게 다 좋은 시타딘 레알이지만 심각한 약점도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난방실내 온도의 상한을 24도로 임의지정해 놓았는데, 밤에는 난방을 열심히 하지 않아 실내 기온이 21도 언저리, 썰렁한 기운이 실내를 감돌았다.

 

물론 21도면 괜찮은 실내기온 아닌가 싶을 분들이 있겠지만 은근한 우풍(!)이 있다 보면 실제 기온은 그보다 훨씬 낮게 느껴진다. 

 

잘 때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이쪽 분들의 상식인지, 오히려 아침에 눈을 뜨면 난방이 가동되고 실내 기온이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일단 구들장이 타들어가도록 불을 때고, 집안에 들어오면 동저고리만 입고 살 수 있게 했던 한민족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책

보일러 최대 조정 가능 온도 24도...

결국 혹시나 해서 가져온 50cm x 50cm 정도 사이즈의 전기 모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아쉬운 건 모포는 1개뿐. 난국 돌파를 위해 생수병에 끓인 물을 부어 탕파(湯婆)로 활용해 볼 생각을 했다. 끓는 물이 닿자 PET 병이 쭈그러드는 걸 보면서 아 이거 틀렀구나 했는데 일정 크기 이하로 줄어들지는 않았고, 물이 새지도, 금방 식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부에 직접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워 수건으로 감싸고 사용하는데 보온 효과는 매우 훌륭해서 매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잠결에 깔아 뭉개서 터뜨릴 정도로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

 

...뭐든 닥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다.

힐튼 오페라 로비

시타딘 레알에서 6, 그래도 여행의 마무리는 꽤 좋은 호텔에서 하자는 생각으로 귀국 전 힐튼 오페라에서 2일을 머물렀다. 건물이며 위치며 흠잡을 데 없는 A급 서비스. 일찌감치 예약을 했는데, 방문 2개월 전 쯤에 가격이 내려가는 바람에 더 큰 방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버렸다.

침대도 넓고 욕실도 넓고, 역시 위치도 이상적이고. 미국계 호텔답게 뭔가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하기 보다는 기계의 도움을 많이 받게 하는 호텔이었지만, 아침 부페는 파리답게 빵 가짓수만 15개 정도 되더라고.

 

숙소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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