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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가 마침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드라마 '인수대비' 속의 이야기입니다.

 

1482년, 윤씨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성종보다 2세 연상설과 12세 연상설이 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12세 연상설을 따르고 있으니 성종이 25세, 윤씨는 37세로 추정됩니다. 성종 임금은 한창 피어나는 나이였던 반면 윤씨는 서서히 시들어가는 나이였던 셈이죠. 두 사람 사이에서 1476년 태어난 원자(뒷날의 연산군)는 갓 여섯살. 당연히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정현왕후(당시의 숙의 윤씨, 뒷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어머니)를 친 어머니로 알고 성장합니다.

 

연산군이 왕이 되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어쨌든 '폐비를 사사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이상 이 임무는 누군가 집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세좌라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 한 공무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 세자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전하라는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고 그 책임이 내게 맡겨질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종 13년 임인(1482, 성화 18)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해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부인은 죄가 없는데도 한()나라 무제(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曹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만한 것이 없습니다.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것이 운명의 8월16일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세좌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느냐는 데에는 이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허종, 허침 형제가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지혜롭게' 그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서울 경복궁 입구에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종침교 터'라는 비석이 서 있을 정도로 꽤 유서깊은 다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다리는 연산군 및 폐비 윤씨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허씨 문중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1482년, 폐비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시절 허종과 허침 형제는 조정의 중신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들 형제의 누님(혹은 고모라고도 함)인 '백세 할머니'라는 지혜로운 여성이 "오늘은 조정에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형제가 이유를 묻자 백세 할머니는 '이미 조정에서 폐비의 일을 결정할 참인데 지금 입궐하여 폐비를 핍박하는 일에 관여하면 나중에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형제는 입궐하다가 종침교(물론 당시엔 다른 이름을 썼을 것으로 추정)에 이르러 일부러 말을 다리 아래로 몰아 떨어져 부상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았다.

 

결국 허종 형제가 없자 조정에서는 숙질간인 이극균과 이세좌를 시켜 사약을 받들고 폐비에게 가게 했다. 뒷날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이 이극균과 이세좌의 집안을 멸문시킬 때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피해 사람들이 백세 할머니의 지혜를 칭찬했고, 다리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불렀다...

 

는 것이 이른바 '종침교'의 고사입니다. 이것이 조선 왕조 500년을 지나면서도 미담으로 남았고,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처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벼슬에 올라 임금의 뜻이 옳지 않다 생각되면 목숨을 걸고 간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벼슬을 던지고 죄를 청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덕률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폐비에 반대해 처벌을 받았고(물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원자 즉위 후의 '뒷일'을 걱정해 보험에 들어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온 선비의 기상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침교의 고사는 결국 일신의 안위를 위해 직무유기를 시도한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 고사가 사실이라면(후세에 윤색된 것일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되려 임금의 명에 충실했던 이세좌만 고지식한 바보일 뿐이고, 잔머리를 굴리지 않은 죄로 뒷날 멸문의 화를 당한 셈입니다.

 

왠지 이 대목에서 6.25 당시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킨 죄(?)로 그해 9월 총살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종침교의 고사는 역사에 전하는 바는 아니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도 실제로 두 사람이 말에서 굴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허침은 이미 형 허종과 함께 덕이 높은 선비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성종이 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인물입니다. 폐비에 반대한 인물이라 세자의 스승이 되었건, 세자의 스승이라는 의리 때문에 폐비에 반대했건, 아무튼 태도의 일관성을 보인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관된 입장 때문인지 갑자사화 때에는 당시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한 사람들을 벌 주라고 앞장서서 외치는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실록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45 (을축)

유순·허침 등이 폐비의 일을 상고하여 아뢰다

 

 유순(柳洵)·허침(許琛)·이집(李諿)·김수동(金壽童),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아뢰기를,

회릉(懷陵)이 폐위당할 때, 언문 글 쓴 자는 나인(內人)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 없으며, 《실록》이 오르지 않은 것은 상고할 근거가 없습니다. 나인으로서 그 일에 간섭한 자는 권 숙의(權淑儀)·엄 숙의(嚴淑儀)·정 숙원(鄭淑媛)이며, 일을 의논한 사람은 전에 벌써 상고하여 아뢰고 빠진 자는 없습니다. 다만 언문을 가지고 온 자는 노공필(盧公弼)·성준(成俊)이었습니다.”

 

회릉이란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모신 능의 이름으로, 폐비 윤씨를 능호로 부른 것입니다. 즉 '폐비 윤씨'라는 뜻이죠. 언문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당시 삼전이라 불렸던 세 대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를 말함)가 폐위와 사사의 당위성을 말한 언문 편지를 전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준과 공필의 죄는 윤필상(尹弼商)과 벌이 같을 것이다.”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필상은 그 일에 참여하여 의논하였으니, 준과 공필은 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회릉이 폐위되어 사삿집에 거처할 때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그것이 불가함을 간했습니다. 그리고 성종께서 의논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자, 공필을 명하여 가서 삼전(三殿)께 아뢰게 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붙여서 성종(成宗)께 아뢰게 하였으며, 준은 대사를 다 정한 후에 명을 받들어 삼전께 고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준에게 주어 아뢰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만 삼전 및 성종의 명으로 왕복하며 회계(回啓)했을 뿐이요 건의한 일이 없으니, 그 죄는 필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채수가 폐비가 곤궁하고 살고 있으니 양식과 옷을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바와 같습니다. 나머지는 윗글에 대한 보충.

 

하니, 전교하기를,

그 죄가, 필상과 함께 벌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시 경하게 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의 죄를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준과 공필은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며, 그 아들도 함께 직첩을 거두소서. 또 공필은 전에 벌써 외방에 부처하였으니 먼 고을로 옮겨 정배하소서.” (이하 생략)

 

이처럼 허침은 그저 '지혜롭게 난을 피한' 수준이 아니라, 갑자사화 때 가해자 측에서 폐비를 찬성하거나 방조한 대신들을 죄 주는데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리 아름다운 행동은 아닙니다.

 

반면 이세좌는 역시 숙질간인 이극돈과 함께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의 주역으로 역사에 나쁜 이름을 남깁니다. 뒷날 갑자사화 때 이세좌가 임인년의 일(폐비 사사)을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억울하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날의 평가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과오를 후세의 사림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허종, 허침 형제가 '지혜롭고 곧은 인물'로, 이세좌가 '운 없는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단지 그때 한 순간의 대처가 어땠느냐만으로 가려진 것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평생 삶이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받은 결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평생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은 요인이겠죠.

 

물론, 아무래 그래도, '종침교에서 굴렀다'는 이야기가 마치 '좋은 처세'의 본보기처럼 전해지는 것은 역시 문제 있는 시각이라는 생각입니다. 사극의 진짜 교훈은 드라마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나 할까요.

 

 

 

P.S.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뒤 연산군의 보복은 참으로 집요하고도 광기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은 어머니를 몰아낸 주역으로 윤필상을 꼽아 처단했으면서도, 윤필상의 집안(파평 윤씨)이며 어머니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에 대해서는 아무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기까지 했죠.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이건 혹시 연산군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댓글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실록의 기록을 봐서는 허침이 적극적인 가해자라기보다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서 노력한 것 같은데요..언문을 쓴 나인은 누군지 찾을 수 없으니 처벌이 안되고, 실록이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은 상고할 수 없으니 처벌할 수 없고, 언문을 전달한 성준 노공필은 단지 전달만 했을 뿐이므로 폐비사사에 주동이었던 윤필상 등과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는 등 전반적으로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만..폐비사사건을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피해자를 적게, 형벌은 가볍게 하려고 애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훗날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 아들인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죽이고 나서 폐모하여 서궁에 유폐하였다가 결국은 인조/서인의 쿠데타로 퇴위한 것을 생각해보면, 친정아버지나 아들이 직접적으로 역모죄에 걸리지 않은 정현왕후를 친척인 윤필상의 일로 해서 폐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아마 정현왕후측에서도 생존을 위해서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고 엎드린 자세를 취하였고, 결정적으로 진성대군의 부인으로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연산군 조정에서 도승지-영의정을 하여 실권자로 위세등등했던 신수근의 딸을 맞이하여 연산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12.06.04 16:13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1)인용한 부분은 갑자사화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일 뿐이고, 이후 누구를 살리고 죽이는지가 사실상 유순, 허침, 박숭질에 의해 시작됩니다. 자료를 종합 검토해 보신 후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2)김제남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다는 증거를 갖고 계신가요?
    2012.06.04 17:16 신고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1) 그러면 더 설득력있는 자료를 제시하지요..저는 본문에 제시된 자료를 보건데, 허침 등이 사태의 확산보다는 적정한 수준에서 제어하려고 보이는데요..허침이 '그닥 좋은 사람이 아니다'면, 그에 관한 자료를 적극 제시하여서 공박해야지 되려 우호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면, 논지의 설득력이 떨어지지요..아무렴, 폐비사사에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공격하지 않아야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과 유리된 사람이 아닌 이상, 특히나 왕정시대에 벼슬살이하는 사람으로서는 적당히 임금의 눈치도 보면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고, 어쩔 수 없는 사람은 최소화하는 타협을 보는 것이지요..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문에 제시된 자료수준으로는 허침이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서 맞불 작전을 했다는 수준이지 적극적인 방화범 수준은 아니네요..

    2) 김제남 역모의 역사적 진실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해군/ 대북집권세력에게 폐모의 명분으로 그것이 활용되었다는 것이지요..그에 반하여 정현왕후는 그러한 친정 아버지의 혐의점도 없고 친척의 일로 위해를 가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지요..그런데다가 연산군의 처남을 사돈으로 맞는, 시쳇말로 촌수/족보 꼬이는 무리를 해서라도 실권자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들여, 안전 생명보험을 들어두는 정치적인 기민함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3) 그리고 이세좌를 입법/행정/사법 3권이 분리된
    현대의 공무원처럼 묘사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익히 알다시피 왕정시대에는 정치적인 발언의 통로가 사실상 관직을 갖는 자에게 집중되었고, 관직도 현대처럼 3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합쳐져있기 때문에 관리는 또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그러하기 때문에 왕정시대 관료의 행동은 정치가들에 의한 정치적 결정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현대의 행정공무원과 달리 정치적 결정과 행정적 실행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폐비 윤씨 사사라는 정치적 결정에 의견이 다르면 승지의 직을 사임함으로써 그러한 결정에 항의의 뜻을 표출할 수 있습니다..조광조 등이 죽은 기묘사화 때도 조광조를 처벌하는 교지를 전달하려는 하명이 있었음에도 승지들이 그 교지의 전달을 거부하니, 임금인 중종이 모든 교지들을 해임시키고,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를 교지 전달의 임시직으로 만들어서 교지를 전달케 한 것을 보면, 이세좌가 단순히 누군가 했어야 할일을 한, 운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또한 성종 연간에서 "8극"이라며 극(克)자 항렬 8명이 정승/판서를 하면서 성세를 구가하던 광주 이씨 문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국왕과 그 배후에 있는 대비전/ 폐비사사 주도 세력의 의견에 동조하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결과라는 사실이지요.


    글구 저는 앞의 사약 꼭지의 지나가다와 다른 사람임을 밝힙니다..^^
    2012.06.04 18:59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1) 공부는 직접 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2) 제 대답은 "해칠 의도만 있었다면 역모나 명분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3) z
    2012.06.04 21:32 신고
  • 프로필사진 송원섭 신기하게도 '지나가다'라는 이름으로 글 쓰시는 분들은 다 다른 사람일텐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으신지 참 궁금합니다. 흥분하시면 맞춤법 틀리는 것까지. ㅋ
    아무튼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논박하고 계시니 더 이상 댓글은 필요 없을 듯 합니다.
    2012.06.05 10:54 신고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1)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 먹으시네..조선왕조실록 검색해보는 것은 누구는 못합니까? 님이 쓰신 글의 논지에 맞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글의 설득력을 높인다는 것이지, 주장을 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면 그 글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2) 세상 살만큼 산 분이 그리 물정이 어두우십니까? 역모나 명분은 만들고 싶다고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며, 만들었다쳐도 다른 사람들이 수긍할 수 밖에 없게 나름대로 그럴듯하거나 세력적으로 우위에 있어야지 하는 것이지 그냥 의도만 있어면 다 됩니까?

    3) 저도 이세좌를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의 희생양으로 생각하는 당신의 역사인식에 z
    2012.06.05 11:25 신고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인터넷 댓글에 100% 맞춤법에 맞게 쓸 수 있나요?? 그리고 님은 맞춤법 실수 안했는지 이 블로그 죄다 뒤져볼까요?^^..저도 그 글 쓰고나서 오타났구나 생각했었습니다..이왕 지적나온 김에 수정했습니다..그렇지만, 글 자체가 오류투성이요, 허구의 픽션으로 논리 전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무력화하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믿어달라는 님의 오류에 비하면 사소한,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실수입니다..기자들 소설쓰는 거 한두번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지만, 궤변일지언정 앞뒤가 맞아야 하는데, 이건 앞뒤 맞지 않으면서 일단 무조건 믿으라는 강변에 지나지 않음..저도 벽창우랑은 더이상 말 섞고 싶지 않네요^^ 2012.06.05 11:33 신고
  • 프로필사진 풋샵 그 나이에도 무모한 댓글러들 놀리는 까칠한 취미생활을 계속하시는 걸 보니 체력이 참 좋으시다는 생각. 이젠 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실법도 한데.^^ 아랫분, 맞춤법이 문제는 아니지만 고치려면 뒷부분까지 싹 다 고치지 그랬습니까.^^ 2012.06.06 08:59 신고
  • 프로필사진 또우리 참 웃기시는 사람입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글이긴하나, 후손된 도리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글 남깁니다.. 저는 휘 침 자 쓰시는 할아버지의 16대손입니다..함부로 추정해서 소설쓰지 마십시오..혹시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 아니신지요? 송 시열 선생으로 인하여 허문중의
    선조가 단양으로 귀양을 가셨지요..송씨 집안하고는 상종을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있습니다..허가 하고 송씨는 구원이 있단말입니다..그러지 않고는 남의 집 선조를 깎아내리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그리고 사실관계도 맞지도 않습니다..
    2012.06.05 09:19 신고
  • 프로필사진 노가다 폐비윤씨 사사한 사람은 장금이 아빠임 2012.06.05 13:1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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