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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 들어서던 날, 비가 오고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태양의 나라에도 가을 겨울은 있었다. 이런 날씨라면... 국물이 필요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사르수엘라(자르주엘라) Zarzuela가 생각났다.

 

하지만 호텔 매니저는 사르수엘라를 잘 하는 집은 커녕 사르수엘라라는 음식을 아예 몰랐다. "공연을 보시고 싶은 건가요?" 하고 반문을 한다. 참고로 사르수엘라는 스페인식 오페라의 일종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포기. 그럼 카스티야 풍의 국물 음식은 뭐가 있는지 물었다. 문득 가이드북에서 본 코시도 Cocido 라는 말이 생각났다. 호텔 근처에 코시도 잘 하는 집이 있느냐고 묻자 매니저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자신이 있다는 신호. '미첼린'에도 나온 집이란다. '음. 스페인식으로는 미슐랭이 미첼린이로군'.

 

그가 지도를 꺼내 표시해 준 집은 라 볼라 La Bola. 볼라 거리를 대표하는 집이라는 뜻이란다. 호텔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면 작은 광장이 나오고, 거기서 메르쿠레 Mercure 호텔이 보이면 왼쪽으로 꺾으란 설명.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 안에서 또 길이 두 갈래다. 이런. 일단 볼라 거리 Calle de Bola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다행히 한 아주머니가 이 방향이라고 가르쳐 준다.

 

 

 

가는 길에 한식당 마시타 Mashita 발견. 사실 여기까지 와서 한식당을 갈 이유는 없었지만 나중 호기심에 찾아 보니 트립어드바이저에서 꽤 순위가 높은 집이었다. 많은 손님들이 이 집에서 '환상적인 스시'를 먹었다고 하는데... 과연 무슨 스시를 먹은 것일지. 혹시 노리마키?

 

 

 

 

마시타에서 골목길을 죽 내려가면 오른쪽에 라 볼라가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후 3시에 줄을 서 있다. 대단하다.

 

 

 

 

집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미슐랭(스페인식으로 미첼린) 가이드의 위용. 그리고 더 잘 보이는 '현찰만 받아요' 간판.

정감있는 고전적인 분위기의 실내엔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첫 주문은 당연히 이 집의 성명절기인  '마드리드식 코시도 Cocido Madrileño '. 그리고 고기와 토마토 소스 스튜라는 설명이 있는 로파비에하 Ropavieja를 시켰다.

 

 

 

 

아담한 항아리에 담긴 코시도가 나왔다. 아래 보이는 올리브는 기본 제공. 이 올리브만 반찬으로 해서도 빵 한접시를 비울 수 있을 정도로 신선하고 상큼한 맛이 났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항아리가 개봉됐다.

 

 

 

 

코시도를 먹는 순서 1. 우묵한 접시에 소면 같이 가느다란 파스타를 담고, 거기에 항아리에서 국물만 따라 붓는다. 진한 국물과 함께 소면을 말아 먹는 셈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인상적인 맛.

 

대부분의 국내 곰탕/설렁탕 집들은 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오만가지 비법을 다 쓴다. 마늘과 양파, 통후추는 기본이고 각종 한약재에서 커피까지 다양한 소재들이 고기를 삶을 때 비장의 재료로 사용된다. 하지만 코시도의 국물은 이보다 훨씬 정직한 '고기 국물' 맛이다. 국물의 '고기 냄새'에 예민한 사람들은 싫어할 수도 있을 듯.

 

 

 

수프와 파스타 접시를 비우면 항아리의 내용물이 나온다.

 

 

 

스페인 특유의 알 굵은 콩을 중심으로 쇠고기 한 덩어리(양지머리 같은 부분이 아닐까 생각됨), 닭 가슴살 한 덩이, 소 꼬리 한토막, 그리고 삼겹살(이라지만 사실은 거의 비계) 한 덩이가 들어 있다. 이걸 푹 곤 국물을 좀 전에 먹은 거다.

 

 

 

고깃덩이를 가져다 찢어 먹는게 코시도의 두번째 순서. 느끼한 맛을 덜기 위한 토마토 소스, 초절임 고추(전혀 맵지 않다), 날 양파가 제공된다. 고기와 삶은 콩, 토마토 소스를 마구 버무려 먹다가 심심하면 고추절임을 한입씩 깨물면 된다.

 

맛있다. 음.

 

 

 

그러는 사이 두번째 메뉴 로파비에하 Ropavieja 등장.

 

재료상으로는 코시도 마드릴레뇨와 크게 다를 게 없다. 토마토 소스를 나중에 첨가해서 먹느냐, 아니면 토마토 소스를 함께 넣고 고기를 잘게 찢어 국물이 많지 않게 자박자박하게 끓여 내느냐의 차이 정도.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는 로파비에하가 이 집의 진미를 맛보는 더 간편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코시도로 일어선 집인 만큼 처음에는 일단 코시도를 맛봐 주는게 예의가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메뉴상으로는 다양한 생선과 고기 요리를 취급한다. 혹시 다음에 가 볼 기회가 있다면 이 집 방식의 라따뚜이를 맛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튼 태양의 나라에도 쌀쌀한 날씨는 있는 법, 푸짐하게 먹고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마드리드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코시도.

 

 

 

끝으로 서비스의 질. 서빙하는 거구의 어르신도 라 볼라의 명성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왔을 듯 하다. 말 안 통하는 외국인 손님들을 맞아서도 여유가 넘치고, 양쪽에서 똑같은 음식을 주문했을 때 코시도 항아리를 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어.느.놈.을.먼.저.줄.까.요' 를 몸짓으로 구현하기도 하는 재치까지. 음식 맛 뿐만 아니라 여유있는 서비스도 인상적인 식당이었다.

 

 

 

1870년부터 성업중인 노포의 명성은 역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듯.

 

 

 

스페인 여행 첫 소식을 이걸로 전합니다. 앞으로 [여행]과 [맛집]으로 나눠 포스팅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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