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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는 노래 잘 하는 여자를 보면, 혹은 자신의 노래 실력을 과신하고 뽐내는 여자를 보면 지가 무슨 휘트니 휴스턴인줄 아느냐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살짝 흘러 이 말은 지가 무슨 머라이어 캐리냐는 것으로 바뀌었죠. 요즘은 누가 이 자리에 들어갈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바로 그 휘트니 휴스턴이 서울에 왔습니다.

2010년 2월6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휘트니 여신님을 친견하고 돌아온 길입니다. 물론 많은 걸 기대해선 안된다고 다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20년 전, 아니 10년 전 휘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One moment in time', 'Run to you'가 세트 리스트에서 아예 빠져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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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 무렵까지, 세상은 세 명의 디바를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 그리고 셀린 디온이죠. 종합적인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으로는 머라이어 캐리가 휴스턴을 앞지를 수도 있을 것이고(RIAA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음반 판매량으로 캐리는 통산 6300만장, 휴스턴은 5500만장 선입니다), 셋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 하는 것 등은 취향의 문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기준으로 평가할 때, 제가 노래를 들어 본 여가수 가운데 맨 윗 줄에는 휘트니 휴스턴과 바브라 스트라이잰드가 있고, 이 줄에는 이 두 사람 외에는 올라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 노래 잘 하는 가수가 한두명일까마는 이만한 가수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이라면 벌써 보셨겠지만 그 인간의 한계를 넘은 듯한 가창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1989년 그래미 시상식장에서 부른 One moment in time.

하지만 휴스턴은 어느새 가수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만큼 철저하게 망가져 버렸죠. 가십 잡지에는 홈리스 가까운 모습이 된 휴스턴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말 많은 결혼생활과 이혼, 고질적인 마약 문제(90년대 이후 줄곧 '왜 휴스턴은 한국에 오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올 때 '세계에서 가장 마약에 대해 민감한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어왔습니다)가 이 뛰어난 엔터테이너의 가수 생명을 갉아먹은 것이죠.

어쨌든 지난해 앨범 'I look to you'를 내놓고 가수로서 재기하겠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떠올랐던, '과연 그 기적적인 보컬 퍼포먼스를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은 기대에 비해 너무나도 얌전한 노래인 'I look to you'를 들었을 때 '아니겠구나' 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간간이 공개된 라이브 솜씨도 기교는 여전했지만 인간 음역의 한계를 넘나들던 가창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후 복귀해서 노래하는 모습들입니다. 지난해 11월22일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부른 I Didn't Know My Own Strength.



또 지난해 12월 영국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인 'The X Factor'에 출연해서 부른 'Million Dollar Bill' 입니다.


이어진 월드 투어 소식. 놀랍게도 10년만의 월드 투어가 서울에서 시작된다는 신기한 소식을 듣고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에 앉았습니다. 숨이 턱에 차서 공연 직전에 입국하는 것도 아니고, 이틀 전에 입국해서 컨디션 조절을 한다는 스케줄이라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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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휴스턴이 부른 노래들은 대략 이렇습니다.

For the lovers
Nothin' but love
한국어로 '감샤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I Didn't know my own strength
My love is your love
Exale (Shoop Shoop)
If I told you that
It's not right but It's OK

그리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들어간 뒤 3곡이 나왔습니다.
One Moment in time - 뮤직비디오
For the love of you - Gary Houston(오빠)
Queen of the night - Chorus

1집 메들리:
Saving all my love for you, Greatest love of all, All at once
(한 곡이 더 있는 듯 한데 확실치 않습니다)

I wanna dance with somebody
I love the lord (from Preacher's Wife)
I Look to you
Step by step
I always love you

encore: Million dollar bill



굵은 글자로 표시된 것은 모두 지닌해 발매된 최신 앨범인 'I look to you'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 앨범 수록곡이 5곡이나 된 것은 최신 앨범에 대한 홍보의 의미도 있겠지만, 이 앨범의 노래들이 현재 휴스턴이 소화할 수 있도록 맞춤 제작된 것들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공연 내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댄스 곡들의 비중이 높았고, 휴스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노래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힘들어하고, 왠지 시간을 끌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휴스턴의 파워풀한 목소리를 뽐낼 수 있는 노래는 거의 부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Saving all my love for you 같은 노래는 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 그게 그 노래였어?'라고 말할 정도로 리메이크됐습니다(다만 이 노래를 부르기 전,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애끓는 추모의 정을 얘기하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I look to you의 녹음에서는 가릴 수 있었지만, 라이브에서는 왕년의 매끈한 목소리 대신 인생의 굴곡이 느껴지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굳이 느낌으로 얘기하자면 휴스턴의 대모인 아레사 프랭클린이 왕년 휘트니 휴스턴의 히트곡들을 리메이크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략 어떤 분위기인지 상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영상입니다. 지난해 9월 미국 Good Morning America를 통해 소개된 I'm Every Woman 입니다. 이 노래의 특징을 이루는 끝부분의 고음부를 비롯해 힘든 부분은 거의 다 코러스에게 넘겨 놓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위의 동영상이나 마찬가지로 6일 서울 공연에서도 팬들은 그가 노래를 마칠 때마다 일제히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그 분들이 모두 귀가 없어서, 혹은 20년 전의 휘트니가 저 노래들을 부를 때 얼마나 듣는 이가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한 가창을 보여줬는지 몰라서 그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왕년의 영웅이었던 그녀가 오랜 방황과 고난을 겪은 뒤 돌아와,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서였을 겁니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곡.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며 머리를 매만지는 휴스턴의 모습을 보니 정말 마음이 짠하더군요. 그동안의 사소한 불만들이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물론 노래가 만족스러워서는 아닙니다. 모든 관객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 옛날처럼 노래하는 모습을 기대했다면 그거야말로 욕심이지. 이렇게 돌아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노래는 본래의 악보에서는 한 줄 정도 아래로 내려온 상태였지만 어쨌든 휘트니가 돌아와 있다는 게 중요하지.

부디 7일에라도 목소리가 회복돼 좀 더 나은 공연을 보여주기를, 그리고 앞으로 6월까지 이어지는 50회의 공연에서는 조금이라도 과거의 기량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제발 감기라서 그랬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속엔 이렇게 노래하는 휘트니가 살아 있다는 건 과연 보는 사람과 본인, 누구에게 더 잔인한 일일까요. 추억이란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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