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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천재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고, 두번째 작품인 '황해'의 개봉이 늦어지자 조심스럽게 소포모어 징크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황해'의 봉인이 뜯기자 세상은 곧바로 찬사와 감탄으로 가득찼습니다.

'황해'같은 영화가 예전에 없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만치 치밀하고 집요하게, 빈틈 없는 플롯으로 세 시간을 밀어붙인 작품이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특히 후반부의 자동차 추격 신과 충돌 신 등의 완성도는 입이 떡 벌어집니다.

한마디로 2010년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올해 최고의 역작이 나왔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서도 세 시간이 이렇게 짧은 영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온 세상이 악의로 가득차고, 누군가 뒤에서 등에 칼을 꽂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불끈 불끈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황해'는 연변 어딘가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하고 있는 구남(하정우)이 그날 번 몇푼 안 되는 돈을 마작으로 다 날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한국에 일하러 간 아내는 소식이 없고, 아내의 비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진 빚은 도저히 갚을 방법이 없죠. 그런 가운데 사채업자들의 혹독한 빚독촉까지 받는 절망적인 나날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구남은 연변의 보스 면사장(김윤석)으로부터 솔깃한 제의를 받습니다. "한국에 가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오면 빚 탕감을 해 주겠다"는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제의를 받아들인 구남. 천신만고 끝에 밀입국에 성공하지만 달랑 주소와 이름 하나 받아들고 한국에 온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열흘. 그 사이에 아내의 행방도 찾고 주어진 일도 마무리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실행 단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황해'는 오락 영화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만만찮습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진 뒤, 한국인들에게 '연변(옌볜) 동포'란 '언젠가 만나게 될 북한 동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그리움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면서 연변과 조선족 자치구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저 이제는 싸고 말이 통하는 노동력의 공급처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죠. 그러면서 조선족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기도 하고, 무시와 모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때로 추격이 힘든 범죄자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분명히 이 사회의 한 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조선족 아줌마' 없이 돌아가는 식당이 없을 지경인데도 온 세상이 그냥 외면하고 싶은 그런 존재들로 남아 있습니다.

'황해'는 단순히 치고 때리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과연 '조선족'이라는 집단이, 한국에 와 있고, 약간 이상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분이 애매한 이 사람들은 대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수많은 조선족 관련 다큐멘터리나 시사월간지 기획 특집들 속에 이름과 나이로 표시되는 사람들이, 실제 숨쉬고 생각하는 우리 곁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김윤석, 하정우의 연기와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 스토리 진행력은 한마디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위에서 거론했던 자동차 추격 신에서 순간 순간 뉴스 화면처럼 보이는 영상(아마도 여러 대의 카메라를 쓰다 보니 노출 차이가 꽤 있었던 듯 합니다)이 삽입된 것은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거기까지 통제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문제삼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 문제 제기를 한다면 하정우의 캐릭터에는 조금 부언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 넘어와 람보가 되는 하정우가 대체 왜 그렇게 잘 싸우고 임기응변이 뛰어난지에 대해서 너무 설명이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깨진 결혼사진에서 하정우가 입고 있는 옷이 군복이 아니었나(확실치 않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중국군 최정예 특수부대 출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입니다. (아니면 연변 남자들에게 그 정도는 기본일까요? ㅋ )

'추적자'와 '황해'를 통해 볼 때 나홍진 감독의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여성관'입니다. '추적자'에서의 여성이란 학대당하고 죽음을 당하는, 수난의 대상인 반면 '황해'에서의 여성들은 남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남자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존재들입니다(영화를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겁니다). 과연 세번째 작품 쯤에는 '긍정적인 여성'이 등장할 지도 궁금합니다.

화면 전체가 피칠갑이 되는 영화지만 '악마를 보았다'에 비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폭력의 수준으로 본다면 '올드 보이'급?). 아무튼 이제 남은 건 과연 '황해'가 어느 정도 관객을 동원하는가를 넘어, '조선족'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데 대한 궁금증입니다.


P.S. 아울러 빛을 발하는 것은 나감독의 블랙 유머감각. 구남이 개고생을 하며 한국으로 타고 오는 배 이름이 '행복호'인 것을 비롯해 어두운 화면 여기 저기에 유머 코드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면정환이 "어, 그러고 보니 최이사가 안 보이네?"라고 말할 때에도 빵 터졌습니다(물론 뒤의 내용을 오해했기 때문이지만...).

P.S.2. 그런데 이 영화처럼 청부살인이란 쉬운 일일까요? 평범한 회사원도 사람을 사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일까요? 조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을 사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조폭이라거나, 범죄 집단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면 주변에 구직자(?)도 꽤 있을 것이고, '황해'에서 보듯 조선족을 쓰거나 '달콤한 인생'에서 보듯 다른 동남아 근로자를 고용해 일을 치르거나 등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그냥 평범한 사회인이라면, 여러가지 골치 아픈 일들이 생깁니다. 자, 우선 어디서 '사람을 죽여 주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뭐 세상이 편해졌으니 그런 웹사이트가 있다고 가정하죠. 홈페이지를 통해 당신은 KILLER-1 과 채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격을 흥정한 뒤에, 죽일 사람에 대한 기초 정보를 주고, 거래를 마칩니다.

간단할 것 같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첫째. 여러분이 최소 수백만원 단위의 상당한 거금(뭐 사람 하나 죽여 주는데 30만원, 50만원 한다면 그건 더 믿을 수 없겠죠)을 KILLER-1이 시키는대로 입금하는데 그때부터 KILLER-1이 감감소식이 됩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분명 상당히 고가의 상품일텐데, 대체 뭘 믿고 돈을 주겠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돈만 갖고 튀어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KILLER-1을 직접 만나 그가 정말 사람을 죽일 능력과 그걸 사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업 의지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사실 이것 역시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만날 사람이 진짜 킬러라면, 그는 귀찮게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 어디 하소연 할 데가 없을 의뢰인을 등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중에 경찰에 가게 되더라도 대답이 궁색합니다. '평소 알지도 못하던 그 위험한 사람을 왜 으슥한 데서 만났어요?'라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요? '사람 하나 죽여 달라고 부탁하려구요'?^^)

그 킬러에게 의뢰인인 당신이 노출되면 될수록 반대로 협박을 받을 가능성만 커집니다. 반드시 경찰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회사, 혹은 그 죽여달라고 청부한 목표 인물에게 '아무개가 돈을 줄테니 당신을 죽여 달라고 하더라'고 공개해 버리겠다는 협박은 꽤 유효합니다.

따라서, 살인청부라는 것은, 최소한 그 청부자에게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너부터 죽을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협박이 가능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살인은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 살인 용역을 발주하는 것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특히나 '황해'에 나오듯, 어설프게 명함 한장 주고 시킬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이런 얘기는 '황해'의 완성도와는 무관한 얘깁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바로 영화의 의도라고 할 수 있겠죠.


P.S.3.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영화에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목소리들이 들립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 프리 버전입니다. 스포일러 만땅 버전, "황해의 모든 것" 편은 곧 따로 공개하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여러분의 추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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