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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부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는 비밀 정보 기관 [킹스맨]의 멤버 갤러해드(본명은 해리, 콜린 퍼스)는 임무 수행중 죽은 동료의 아들에게 메달을 줍니다. 세월이 흘러 17년 뒤, 그 소년 엑시(타론 에저튼)는 곡절 끝에 킹스맨의 멤버가 되기 위한 테스트에 응합니다. 그 사이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세계적인 IT기업가 발렌타인(새뮤얼 잭슨)은 지구에 붙어 사는 바이러스적 존재인 인간이 지구를 망가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그 음모는 엄청나게 위험한 계획이란 사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론 [킹스맨]을 즐기기 위해 사전에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어떤 다른 영화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단순합니다. 사실 기본 설정부터 말이 안 됩니다. '유명 양복점들과 연관된 재력가들이 뭉쳐 전 세계 어떤 정부, 어떤 권력과도 관련이 없는 정의 수호를 위한 국제 정보기관을 만들었다'라뇨.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팍한 설정과 막나가는 진행은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킹스맨'의 첫번째 포인트는 당연히 '스파이는 영국산'이라는 교훈의 부활입니다. 물론 너무 늦게 태어난 까닭에 이미 스파이 세계가 이선 헌트와 제이슨 본이 지배하던 세계였던 분들, 그리고 007 시리즈가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극약 처방으로 본래의 색채를 잃은 시대에 영화를 보기 시작한 분들에겐 참 죄송하기 짝이 없는 얘기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과거 션 코너리와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활약하던 시대를 얘기하는 것은 참 무의미한 경우가 많고, 그보다 더 마이너한 TV 시리즈들인 '어벤저(The Avengers)'나 '전격대작전(The Persuaders)', '세인트(The Saint)' 등을 얘기하면 이 뭔 선사시대 이야기인가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이런 '수트를 폼나게 갖춰 입은 영국제 스파이'의 문화를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킹스맨'이 가장 반가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전격 제로작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방송된 'New Avengers'의 패트릭 맥니. 존 스티드라는 빛나는 '영국 스파이' 캐릭터로 20여년에 걸쳐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007 이전, 카리스마 넘치는 '세인트'로 인기 스타의 자리를 굳힌 로저 무어.)

 

그 전통의 종가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본드는 불행히도 그 맥을 스스로 잘라 버렸습니다. 바로 2006년작 '카지노 로얄'에서 시작된 다니엘 크레이그의 새로운 007 시리즈가 시작되면서 그 본질적인 정취가 사라져 버렸죠. 일부 본드 마니아 중에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거칠고 냉혹한 이미지가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초기 본드의 모습과 어울린다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주장을 펴는 분들은 플레밍이 왜 '근육질의 액션 스타형 젊은이' 션 코너리를 캐스팅 한 데 실망감을 표하고 "내가 원했던 본드는 데이빗 니븐"이라고 말했는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플레밍은 이미 이 시절에 '영국산 스파이'의 본질이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낙관적인 태도로 극복해 나가는, 여유 있는 신사의 이미지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예상과는 달리 션 코너리는 역사에 남을 영국산 스파이의 전형을 멋지게 연기해 냈고, 그 연기를 본 플레밍이 "내가 그를 과소평가했다"며 만족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007 시리즈 제작진은 피어스 브로스넌 체제의 제임스 본드 영화들이 전성기만큼 전 세계 관객들에게 큰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판단하에 시리즈의 색채를 짝퉁 제이슨 본 시리즈로 만들어 놓은 뒤 흥행 면에서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정통 영국산 스파이'의 정취는 영영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국 귀족의 후예로 태어날 때에는 드 비어 드루먼드 라는 거창한 이름이었던 매튜 본이 칼을 뽑고 나선 것입니다. ('드 비어'라는 이름은 '킹스맨'에도 등장하죠. 갤러해드가 발렌타인에게 접근했을 때 쓰는 가명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킹스맨'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니엘 크레이그 체제의 007을 비롯해 일단 뛰고 달리고 아크로바트 액션을 펼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21세기 초반의 스파이 영화 시장입니다. 과연 관객이 원하는 것이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스파이 영화 뿐만이겠느냐는 냉소가 담겨 있죠. 물론 '오스틴 파워'나 '자니 잉글리시'도 방향만 보자면 비슷한 노선을 택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 영화들이 갖추지 못한 미덕을 '킹스맨'은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수트 포르노'라고 불리는 진정한 '수트 입은, 섹시한 영국 스파이' 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발몽'의 꽃미남 시절 콜린 퍼스. 누군가 '킹스맨'을 보고 "왜 콜린 퍼스는 제임스 본드 후보에 오르지 않은 거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뭐 오르지 않았을 리야 없지만 사실 경쟁이 너무 치열했던 거죠.)

 

사실 콜린 퍼스는 경력만 놓고 보면 '대영제국 스파이'의 이력이 없는 배우지만, 어쨌든 전 세계 여성 팬들을 녹일 수 있는 댄디한 매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매튜 본의 의도는 타론 애저튼을 앞세워 '귀족인 척 하는 자들의 희화화'였는지도 모르지만, '킹스맨'을 본 전 세계의 대다수 여성 관객들에게 이 영화에서 애저튼은 퍼스의 비중에 비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미미한 존재라는 점에서, 별 의미 없는 얘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영화를 본 거의 모든 분, 특히 여성 관객들은 콜린 퍼스 외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아울러 1960년대, 또 다른 히트 스파이 시리즈인 '해리 팔머' 시리즈를 주도한 마이클 케인이 아서 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에 '영국산 스파이'와 '안경 쓴 쉬크한 스파이'의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물론 킹스맨 2층의 회의실이 원형 테이블이 아니라는 건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지만요.

 

 

(해리 팔머 시리즈 시절의 풋풋한 마이클 케인.)

 

 

 

 

이런 맥락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 과연 어떤 식으로든 사회 비판이나 계도성 메시지가 담겨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좀 왜곡하는 느낌이 듭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매튜 본의 영화 이력은 사실상 가이 리치의 히트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의 프로듀서 역할에서 시작합니다.

 

그 뒤로 직접 감독으로 나서 만든 영화들 - 가이 리치 의 영화라고 해도 아무도 신기해 하지 않을 '레이어 케이크'에서 이번 '킹스맨'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B급이면 어때'와 '주인공만 주인공이란 법 있어' 입니다. 보는 이에 따라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유지만, 과연 그의 영화에서 몇몇 평론가들이 읽어 내는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서태지의 '소격동'에서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려는 것 만큼이나 억지로 느껴집니다. 뭐 이 영화에 귀족과 기득권층에 대한 비웃음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로 '킹스맨'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타란티노의 '장고'는 인종차별국가 미국을 전복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라고 보아야 할 정도겠죠.

 

사실 '킹스맨'은 매우 비교육적인 영화이고,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매겨진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에 담긴 생명 경시나 성차별, 인종 차별, 그리고 '정치적 공정성'이란 말 자체를 비웃는 듯한 표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저속함을 이유로 무시하기엔 이 막나가는 코미디 영화가 갖고 있는 재미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데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코미디는 그냥 코미디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돈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이 가이 리치, 오른쪽이 매튜 본)

 

P.S. 한때 매튜 본은 '가이 리치의 재능을 흠모해 따라다니는 돈 많은 친구' 정도의 대접을 받았지만, '킹스맨'을 통해 마침내 가이 리치와의 위치를 역전시킬 기회를 잡았습니다. 가이 리치가 데뷔 초의 재능은 어디로 팔아먹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같은 영혼 없는 영화로 흥행 감독의 면모만 유지하게 되어 버린 결과죠.

 

흥미롭게도 가이 리치 또한 나폴레옹 솔로라는 슈퍼 스파이로 유명한 왕년의 인기 시리즈 '첩보원 0011(Man from U.N.C.L.E)'의 리메이크와 함께 '원탁의 기사(Knights of the round table)'의 제작을 발표해, '고전적 스파이 이야기'와 '아서왕 이야기'를 한방에 버무린 매튜 본과 평행선을 그리게 됐습니다. 과연 이 두 작품에서 가이 리치가 왕년의 기발함을 되찾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그 옛날, 매튜 본의 '스타더스트'에 대한 글 http://blog.joins.com/fivecard/8417922

 

매튜 본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리뷰 http://fivecard.joins.com/939

 

그리고 가끔 혼동되는 또 다른 매튜 본에 대한 글^^ http://fivecard.joins.com/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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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 서서히 인기에 불이 붙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하녀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란 나라가 선 지 1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상황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가 아니고 보면 1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닙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두메산골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란 새 나라가 섰다는 사실도 최신 뉴스일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나라의 주역들이 가장 경계할 일은 아무래도 전 왕조의 후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동태 파악입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백제의 강역에서 부흥운동이 펼쳐졌고, 고구려도 부흥운동이 일어난 데 이어 그 땅에서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하는 발해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자료를 보면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후예들에게 상당히 관대한 듯 하지만 그 아랫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죠. 자신감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조선이 망한 뒤 고려 왕씨들이 어떤 운명을 걸었는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은 바로 '왕 거을오미' 입니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 1393~) [가장 극적으로 살아남은 고려의 후예]

 

드라마 하녀들에는 조선 초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반목하는 사이 고려를 수복하려는 왕씨들과 그 유신들로 구성된 만월당이라는 비밀 조직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가 망한 뒤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고려 유신들이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는 기록은 있으나, 누군가 조직적으로 고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운동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의 안승이나 백제의 귀실복신 같은 인물은 고려가 망한 뒤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 고려 왕씨의 후손들은 조선 건국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집권 직후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공양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데 이어 태조 2(1393) 526일에는 거제도를 비롯한 낙도로 유배가 있던 공양왕의 후손들을 육지로 나오게 해 생업을 주고 안정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 중 왕강은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에게 동조한 공이 있어 조선 건국 뒤에도 벼슬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 본인보다 정도전을 비롯한 공신들은 훨씬 더 강력하게 왕씨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을 내버려 둘 경우 새로운 왕조에 해가 될 것이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마침내 1394226일에는 이성계가 직접 보호하던 왕강와 왕승보 등도 귀양가는 몸이 되었다. 이어 414일 윤방경 등을 강화에, 손흥종 등을 거제에 보내 왕씨 일족을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다. 말인즉 파견되는 관리가 재량껏 단속하라는 것이었으나, 조정의 여론을 감안하면, ‘재량껏이란 씨를 말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삼척에 귀양 가 있던 공양왕도 이때 아들과 함께 처형됐다.

 

야담집 추강냉화에는 당시 학살의 풍경이 기록돼 있다. 파견된 관원들이 왕씨들에게 육지에서 떨어진 낙도에 모두 모여 살게 해 주겠다며 거짓 포고령을 내려 포구에 모은 뒤, 배에 싣고 가다가 가라앉혀 몰살시키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죄없는 내 후손들을 몰살시키니 네 아들들도 뒤가 좋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어 426일에는 아예 왕씨라는 성의 사용 금지령이 내려진다. 본래 왕씨면 어머니의 성을 쓰고, 사성(賜姓)으로 왕씨를 받은 자들도 본래의 성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왕씨들이 전()씨나 옥(), ()씨로 성울 바꾼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다들 한자로 보면 자가 들어 있는 글자들이다.

 

공양왕의 형인 왕우는 태조의 8남 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귀의군에 봉해진 뒤, 이런 변란 속에서도 왕씨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목숨을 보존했다. 하지만 1397년 왕우가 죽고 장남 왕조가 귀의군의 칭호를 물려받은 뒤, 이듬해인 1398 826일엔 귀의군 왕조와 그 아우 왕관이 죽었다는 기록이 실렸다. 이날은 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방석 형제와 정도전, 남은 등이 주살당한 날이다. 방번이 죽었으니 그 처남들인 왕조와 왕관을 더 이상 살려 둘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왕씨가 사라졌다.

 

하지만 태종 13(1413) 11, 고려 왕족인 왕휴의 서자 왕거을오미가 발견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왕휴가 이밀충이란 사람의 누이를 첩으로 삼아 낳은 아들인데 20세가 되어 호패를 마련하려는 것을 지신사 김여지가 조정에 보고한 것이었다.

 

 

 

관계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 공초가 있었으나 태종은 역성혁명이 일어나도 전조의 자손들을 아예 멸족시킨 경우는 없었다. 특히 태조의 경우 왕씨들을 몰살시킨 것이 본의가 아니었고, 당시만 해도 내가 나이 어려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제 내가 왕씨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며 거을오미의 석방령을 내렸다. 이후 문종 1(1451)에는 왕씨의 사용 금지령을 해제하고 임금이 직접 "왕씨의 후손들을 찾아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오늘날까지 개성 왕씨의 후손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가 망한 뒤 부흥의 움직임이 공식 문서에 기록된 바 없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가혹한 박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왕거을오미도 왕씨에 대한 박해가 끝났음을 알린 인물이기는 하나, 관직이나 토지를 주어 잘 살게 했다는 기록 역시 없는 것을 보면 무슨 특전이 주어진 것은 아닌 듯 하다. 문종 때 왕씨의 사당인 숭의전을 짓고 왕우지를 발탁해 왕순례라는 이름을 내린 뒤 숭의전 부사로 봉해 토지와 집을 주어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한 것이 완전한 사면의 첫 기록이다.

 

이렇듯 조선 왕조가 왕씨를 받아들이는 데 대략 건국에서 60년이 걸렸다. 다시 한번 망국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P.S. 고려 왕씨에서 비롯된 성씨 중에는 위에서 거론한 성씨 외에 개성 내()씨가 있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초 검문하던 군관이 무슨 성씨냐고 묻는 말에 당황한 왕씨 일족이 ?”하고 반문하는 바람에 내씨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것인데, 믿을만한 이야기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개성 내씨 이야기는 참 코믹합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

 

뭐 역사의 만약이란 얘기해 봐야 그냥 재미를 위한 것일 뿐이지만, 왕우와 이성계가 사돈을 맺을 때 하필 방번과 왕우의 딸을 결혼시킨 것이 묘한 상황입니다. 이성계가 후계자로 삼으려 한 아들은 방번과 어머니가 같은 방석이었으니, 그대로만 됐으면 왕우의 집안은 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으로 태종 방원이 방번-방석 형제를 처지했으니 왕우의 자손들은 두 겹의 역적이 된 셈이죠. 망국의 왕손인데다 난신적자의 집안... 이것이 팔자 소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 전씨(全이든 田이든) 중에 고려 왕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속설에 따르면 가능성은 꽤 있는 편입니다. 한때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의 측근들도 넌즈시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비슷한 경우를 부여 서씨의 경우에도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왕성은 본래 부여(夫餘)씨인데, 나라가 망한 뒤 여(餘)자의 일부를 변형해 여(余)씨나 서(徐)씨로 성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왕씨의 후손들은 이렇게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문종 때 세워진 왕씨들의 사당)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니, 굳이 누가 진짜 고려의 후손인지를 따질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하녀들'은 태종 초, 함흥차사가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시작했으니 왕씨의 후예들은 모조리 참살당한 뒤의 상황입니다. 그래도 고려 부흥의 음모가 등장하니 왕씨가 아예 안 나올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하녀들'의 등장인물 중에는 누가 고려 왕실의 후예일까요. 뭐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눈치 빠른 분들은 대략 짐작을 하실 듯 합니다. 당연히 비밀조직 만월당의 주역들 중에 있겠죠.^^

 

('하녀들'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미 김치권[김갑수]와 아들 은기[김동욱]가 고려 왕실의 자손이고, 무명[오지호]은 이방원의 아들이란 게 밝혀졌습니다. 이 글은 그 전에 쓰여진 글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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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2월입니다. 세월 참 빠르죠?

 

이달의 기대는 바로 이것.

 

 

 

 

 

10만원으로 즐기는 2월의 문화가이드 (2015)

 

이번달 예술의 전당 공연 중에는 향수라는 표제의 공연이 눈길을 끌어. 대부분의 연주회들이 별 설명 없이 레퍼토리를 내놓는 데 비해 이 공연은 향수라는 주제로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첼로 협주곡, 그리고 교향곡 9신세계를 연주해. KBS 상임지휘자였던 함신익과 심포니송의 연주. 첼로 독주자는 인기 최고인 송영훈이야.

 

함신익과 심포니송은 지난해에는 황홀이란 표제를 달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4번을 연주했는데, 한 작곡가를 이렇게 한 단어로 압축하는 건 무리가 아니냐는 생각도 드는 반편, 참신하고 대중적인 접근이란 면에서 그럴듯하기도 해. 물론 많은 사람들이 드보르작의 음악 세계를 설명할 때 미국에서 활동하며 고향 보히미아를 그리던 작곡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걸 보면 드보르작과 향수를 연결하는 건 무리가 없어 보여. C 3만원이면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거야.

 

다음. 국립극장에서 영국 국립극장(NT, National Theatere)의 공연을 그대로 녹화한 영상을 가끔씩 상영하고 있다는 걸 아는 분들은 이제 아실 거야. 그런데 이번 공연은 그야말로 마니아들을 흥분시킬만한 대박이야. 영국 BBC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미국 뉴욕판 셜록 드라마인 엘리멘트리의 셜록 조니 리 밀러가 함께 무대에 서거든. 작품은 메리 셸리 원작 프랑켄슈타인’.

 

누가 프랑켄슈타인 박사고 누가 괴물이냐고? 둘 다야. 두 스타 배우가 공연에 따라 번갈아가며 괴물과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을 바꿔 연기해. 이번 국립극장에선 두 가지 버전의 공연을 각각 3회씩 상영하지. 게다가 연출은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 이 글을 쓰는 나부터도 마음이 급해지네. R 15000, S 1만원. 알았으면 서둘러야겠지?

 

 

 

 

이달에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다니구치 지로의 선생님의 가방이야. 1년에 150권을 읽는(정상이 아닌) 다독가 하지현 교수가 추천한 책인데, 줄거리를 요약하면 술 좋아하는 37세의 골드미스 츠키코가 우연히 술집에서 옛날 고교시절 선생님을 만나 차츰 남녀관계로 발전해가는 이야기야.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 그것도 노인의 연애 이야기인 거지.

 

하 교수에 따르면 나이가 만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와 관계의 감정이 무르익어 자연스럽게 숙성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일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남자든 여자든 이제 나이 들어 의미가 가슴에 닿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권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 두권 짜리 만화의 울림이 만만치 않아. ‘고독한 미식가등을 통해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체를 접해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한컷 한컷이 작품이라는 생각이 정도의 공력이 느껴져.

 

 

 

 

문득 반대쪽에 있는 책을 하나 추천하고 싶어지네. 배명훈의 책을 추천하는 이번이 두번째인 같은데, ‘맛집 폭격이라는 제목을 들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 한국과 곳에 있는 어떤 나라가 묘한 긴장 상태에 들어가. 워낙 거리라 직접 교전은 없지만 양쪽 상대방의 본토에 대해 미사일로 정밀 공격을 가하면서 눈치를 보는 상황인 거지. 그런데 한국의 상황 분석자가 보기엔 정말 묘할 정도로, 적의 공격 목표가 한때 사랑했던 그녀 함께 가던 추억의 맛집들이더라는 거야. 과연 메시지가 뜻하는 뭘까.

 

선생님의 가방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지나쳐 어떤 감정을 감정이라고 말하기 주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맛집 폭격 감정 대놓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쿨하지 못하고 촌스러운 행동이라서 차마 그렇게 말할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야. 그렇게 너무나 달라. 아마 작품 모두를 좋아하는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인터넷 서점 기준으로 맛집 폭격 12000 , ‘선생님의 가방 권당 1만원 .

 

 

 

마지막으로 이달의 전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작년 128일부터 열리고 있는 폼페이. 중앙박물관 전시 중에는 드물게 유료 행사야. 기원 79 화산 폭발로 사라진 도시 폼페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고, 유적은 이탈리아 남부 여행에서 봐야 곳으로 꼽히지. 이번에는 폼페이에서 나온 유물 300여점이 전시돼. 폼페이 유적이 특별한 도시가 서서히 몰락해 가면서 텅빈 유령도시가 되어 유적화한 것이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생활이 진행되던 상태에서 화산재로 덮여 정지화면처럼 그대로 남았다는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당시 생활을 재현할 있는 유물이 풍성한 편이지. 성인 13000.

정도면 2월은 심심찮게 보낼 있을거야. 3월에 만나.  

 

 

향수 드보르작                                            C 3만원

국립극장,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조니 밀러의 프랑켄슈타인  R 15000

다니구치 지로, ‘선생님의 가방’ 1,2                            1만원

배명훈, ‘맛집 폭격                                          12000

국립중앙박물관, ‘폼페이                                     13000

 

                                                           9만원

 

 

 

그러니까 긴말 할 것 없이,

 

 

 

 

그리고

 

 

 

이렇게 두가지를 볼 수 있다는 거죠.

 

뭐 굳이 말을 더 길게 할 필요가 없을 듯. 팬들은 얼른 예매하세요.

 

이달의 음악도 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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